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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적 봉쇄, 부르주아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내다.
  • 조회 수: 6378, 2021-03-11 20:35:54(2021-02-18)
  • 국민적 봉쇄, 부르주아국가의 야만성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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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건 대참사에 직면하게 된 세계 각국의 부르주아지는 인구의 절반 이상인 거의 40억에 달하는 국민을 격리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만약 자본주의 국가와 그들의 보건 시스템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을 어떻게든 막을 능력이 한계에 달함으로써 필수적인 것이 된 것이라면, 부르주아지의 진정한 주된 관심사는 가능한 한 그들의 경제를 보호하는 것이고, 손해를 최소한으로 막고자 함이다. 이런 이유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유지하고 보호한다는 핑계로 지배계급은 전 국민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려는 진지한 고민을 해왔다. 나머지 인구의 사망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바이러스의 전파는 통제 불능에 빠질 것이며, 세계 경제는 마비될 위험이 크다. 그래서 강대국은 봉쇄(lockdown) 전술을 택했는데, 말하자면 시행할만한 다른 보건 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중세의 관습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바이러스 희생자들을 1/4로 줄이기 위해 고립, 소외, 격리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전 지구적 규모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세계 인구에 있어서, 필수적 봉쇄는 그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위험하고, 비좁고,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또 수백만 인구가 밀집해 있는 위험한 대도시에서 살아간다.

     

    봉쇄의 결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임금을 받는 피착취계급이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와 같은 후진국의 경우, 수천만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이미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광범위한 고립, 사회적 상호작용을 규제한 것, 과밀한 가정, 이동과 여행을 제한한 것은 건강에, 그것도 특히 국민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런 조건하에 있는 피착취계급에 대한 격리로 인한 트라우마는 부르주아계급이 필요한 모든 물질적 풍요를 갖춘 넓은 주거시설에 살아온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격리조치는 사회계급으로 나뉜 사회에 가증스럽고 소름 끼치는 불평등을 더욱 부각시켜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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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생활과 집단생활의 위험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부르주아지가 우리에게 믿도록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인생의 역경에 직면했을 때 모두가 동등한 건 아니다. 봉쇄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언제든지 이 부패한 체제가 양산한 비극에 과도하게 육체적인 대가를 치른다. 이들 피착취계급의 가장 취약한 이들, 혹은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보기에 쓸모없어진’, 그리고 원치 않는이들이 그것의 비인간성과 야만주의의 결과로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2나이트 쉘터’(Night Shelter)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매해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노동자계급 보통의 생활 여건에서 비극의 밤으로 추락한다. 그들은 침전물처럼 사회의 나락으로 침묵 속에 추락한다. 더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만큼 쥐어짜 낸 자본주의로 인해 닳아버린, 쓸모없어진 요소가 된 인간쓰레기는 쇠 빗자루로 쓸려나갔다.”

     

    부패한 자본주의는 물질적 궁핍에 더해 계속하여 개개인을 주변화시키고, 원자화시켰다. 가족 관계는 파괴되었고,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과 노약자는 배제당했다... 이는 자유 기업의 이름으로 불행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할 의무, 살기 위해 착취당해야 하는 의무인 것이다.

     

    맹목적 분노 속에서, 자본주의는 신성한 이윤의 제단에 피착취계급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시킨다. 노동자계급 내의 모든 인간적 유대를 파괴하고, 특히 고독에 대한 감정적 유대를 파괴한다. 이들 지배계급이 우리들 사이에 있는 취약한 이들과 노인, 누구보다도 특권이 없는 아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위선 떨었을 때, 그들은 파렴치하게도 거짓을 말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을 제공하는 복지가 수명이 다해 와해되어 가고 있는 것을, 그리고 이에 대한 정책의 결과를 보고 있다. 이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으로 숨겨지고 말 것이다. 그들은 대유행 동안 국가가 가장 취약한 이들을 돌볼 것이라고 우리를 믿게끔 할 것이다. 사실 국가 자신은 전염병이 야기한 모든 사회적이고,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고통에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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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로부터 버려진 노인들

     

    전 세계적으로 요양 병원의 휴먼드라마는 끝이 없다. 처음에는 부르주아 국가에 의해 침묵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추악하게 드러나는 현실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그것은 뉴스가 되었다. 프랑스 가정의 공식 사망자 수는 이미 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기록되었다. 스페인에서는 지난 516천 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기록됐는데, 수백 구의 시체들이 수일간 버려져 침대에 뉜 상태로, 시설에서 발견되었다. 비슷한 극단적 사건들은 다른 많은 국가에서도 벌어졌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노인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넘쳐나는 입에 지나지 않게 되자, 사회로부터 그들을 격리하여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얼마나 최선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는 운명에 맡겨진 채 자신들의 가정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모든 다른 이들을 간과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요양 중인 노인들을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해줄 적절한 지원의 부족은, 봉사자들의 부족까지 더해져 너무도 분명한 냉소와 뻔뻔한 태만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책임져야 할 사실상 대참사를 양산한 것이다.

     

    최후의 시설의 이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프랑스에서만 70만이다.), 극도로 취약하며 적절한 보호도 없이 바이러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렇기에 격리를 나머지 국민들에게 적용하면서까지 노인들을 그들의 방에 감금하고, 고립시키고, 격리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가족, 친척, 또는 바깥에 살고 있는 여전히 건강한 친구들과 모든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된 것이다. 보육원, 구치소, 난민시설, 이주민수용시설, 소년원, 은퇴자의 집과 같은 곳들은 감염이 확산하기 쉬운 용광로인데, 특히 이들은 이미 나이나 질병으로부터 취약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먼드라마의 풍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대유행으로 인한 피해에 더해, 피해자로 불리는 이들은 그들의 선을 위해고립되어 암울하게 절망하도록 강제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노년기 우울증의 피해자로 진단받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들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뼈저린 상실감과 고독을 느끼게 할 뿐이다. 이는 삶에 흥미를 완전히 잃게 만들고 심지어는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게 한다. 대유행으로 사망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그들 또한 탄식과 고독으로 자살하게 할 뿐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은 가족에게 사회의 야만성을 목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녕과 도움을 주기 위한 시도들이 벌금형에 처해 졌다. 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기 위해 금지 규정을 어길 용기를 내어 약 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사람, 혹은 요양 시설에 거주 중인 남편에게 인사를 하려고 바로 건너편 옆집에서 요양원으로 건너온 여성의 경우다.

     

    보다시피, 격리조치 기간 동안 국가는 사회적 격리를 아주 강력하게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사회적 연대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었고, 특히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한 것이 그랬다.

     

    반대로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키겠다고 주장함으로써, 취약한 이들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두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함으로써, 국가는 사회에 악취가 진동하는 통제와 과도한 강제 정책을 펼쳤다. 금지를 넘어, 그다음에는 강제적 규제를 시행했다. 경찰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죽음 역시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이기 때문에, 대유행의 시기에 그것은 매우 이윤이 남는 것이다. 프랑스의 장례 업체는 파리 근교의 거대 도매식품시장인 Halles de Rungis 앞에서 15분 동안 가족 모임을 하는데 250유로를 청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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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 자본주의 봉쇄의 또 다른 희생양

     

    학생은 상황이 위태로울 것으로 지목되는 이들이다. 이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상당수는 별난 직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학업을 수행한다. 가정으로부터 떨어져 살며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예리한 고독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래가 어떨지 보장할 수 없는 심오한 불안을 경험할 것이다. 봉쇄는 이러한 생활상을 악화시켜온 것일 뿐이다. 수년 동안 학생의 자살이 증가해왔다. 보기를 들어 몇 달 전 좌절한 프랑스의 한 학생이 리옹 대학교의 학생회관(Centre Régional des Œuvres Universitaires et Scolaires) 밖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별난 직업의 감소, 전반적 폐쇄, 가족 방문에 대한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제한이 현실이 되었다.

     

    심리치료센터로 걸려오는 절망에 찬 전화가 그토록 끊임없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는 최강 선진국(미국, 캐나나, 영국, 프랑스 등)을 포함한 몇몇 국가에서만 증가할 것이다. 이들 국가는 학생 보건에 대한 권위가 실효성이 없어졌고, 수많은 대학이 새 학기를 재개하지 않기로 했으며, 강의실 수업을 온라인 과정이나 화상회의로 대체하기로 했다. 이제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이 전무한 채 컴퓨터를 뒤에 두고 온종일 작은 방 안에 고립되어 남겨질 것이다. 이는 사회적 고립 및 사회 개별 구성원에 대한 분자화로의 또 다른 이행이다.

     

    결국 부르주아 국가가 사회에서 수많은 노인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했지만, 미래의 프롤레타리아를 다루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들 다수는 실직이라는 암담한 미래에 직면해 있으며, 경제 위기가 가속화되고 악화할수록 훨씬 더 위태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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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과 아이들을 상대로 한 폭력의 증가

     

    몇 주, 아니 몇 개월 사이 미디어는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압력을 행사해 왔다. ‘가정에 머무르시오.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시오. 자신과 타인을 보호하시오!’ 물론 이러한 지침을 따르지 않은 이들은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것이 아니라면 건강과 생명을 위태롭게 한 것이었다. 결국 모범 시민으로 보이지 않는 이 모든 이들이 바이러스를 전파했다고 비난받는 것이다.

     

    사실 봉쇄는 고집스러우리만치 잘 지켜졌다. 국민 대부분은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방어벽을 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봉쇄가 삶 다른 모든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관한 측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동등한 권리에 대한 환상을 퍼뜨린 것이다. 지배계급은 대다수의 거대한 노동자계급, 그것도 가장 취약한 이들과 실직한 이들의 삶인 가난과 열악한 주거환경을 모른 척한다. 전 가족이 밤낮으로 비좁고 갑갑한 방에서 살아야 한다. 또다시 이윤 및 시장 권력이 주택의 품질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다.

     

    만약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 불행하게도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면, 이러한 봉쇄 환경에서 (폭력은) 심각하게 증가할 것이다. 국가의 관심은 오직 경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이 두려워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긴급 번호를 누르라고 제안하는 사회 복지 외에는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폭력의 조류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가정 폭력이 급소도로 확산하였는데, 프랑스에서는 경찰 신고가 48% 증가하여 (가정폭력은) 30% 증가했다. 유럽의 응급 구조대 호출은 60% 증가했다. 튀니지의 여성에 대한 폭행은 다섯 배 증가했다. 인도의 가정폭력 사건 수치는 곱절 이었다. 브라질에서 가정 폭력으로 보고된 사건은 40에서 50% 증가했다. 멕시코의 폭력 사건 신고는 방역 기간 동안 60% 증가했으며, 여기에 200건의 여성 살해 사건이 추가되었다. 페루에서는 900여 명의 여성들이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런데도 부르주아지에 이들 인재(人災)는 종이에 적힌 숫자, 혹은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도 빠르게 그것을 망각한다. 건강관리복지를 삭감한 지 수십 년 이래, 어린이 보호, 폭력으로부터의 여성 보호, 취약자라든지 심각한 장애를 지닌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 복지 모든 영역에 충분한 예산을 들이지 않았다.

     

    실질적 고통의 규모가 얼마나 클 것인가? 하루의 끝에 숨겨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클 것인가? 봉쇄와 격리와 같은 상황으로 인하여 쌓여 온 고통과 우울, 그리고 자살 시도 사례가 얼마나 많겠는가?

     

    심각한 봉쇄 조치와 사회활동에 대한 제약은 국민의 몫이었다. ‘경제를 지키기위해 감염될 위기를 안고 그들의 동료들과 함께 가칭 바이러스 총알받이가 되어 일터로 끌려나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이고 추상적인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강조해왔다.

     

    바이러스가 몇몇 대륙으로 지속해서 확산하고, 재확산 국면에 접어든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 상당한 호전을 보여주자, 미디어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오명을 씌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노인과 일반 국민에게 무책임하다 했다. 몇 주간의 격리가 지나자 그들이 대규모로 무리지어 모였기 때문이다; 이는 세대 간에 이데올로기적인 분열 이상을 일으키려는 목적이다. 물론 모든 예방 조치는 받아들여져야 하겠지만, 이들 모임은 사회적 연대에 대한 갈증과 몇 달간의 고독과 심리적 고립 이후 가족과 친구, 친척들과 만나고 싶은 갈망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사회화된 존재의 필수적 욕구, 인간 종()으로서의 그것을 표출할 뿐이다. 유럽에서 그들을 바이러스 급속 확산의 새로운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미디어가 몇 주 동안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잔인성과 비인간성 그 이상을 증명하는 것이다.

     

    위기의 시기,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회, 모두에게 자리가 주어지고,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의 열쇠를 쥔 계급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엄청난 규모의 건강, 경제, 사회적 위기가 강타하자, 장막은 걷히고, 자본주의 착취의 뻔뻔한 끔찍한 모습이 등장 한다; 삶이 주목받을 가치가 있는 상품이 되는 체제, 그것이 이윤이 될 것 같고, 너무 값나가지 않는 조건에서 인정받는 체제. 경제 위기로 이들 사회는 혼돈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극도의 비인간성의 나락으로 타락하고, 점차 무책임하며 생명까지 위협하는 정책들이 삶 자체에 적용된다. 이런 거짓말쟁이 계급, 언론,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쏟아내는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미래의 세계는 더는 이전의 세계와 같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는 더 나은 보건 서비스가 있을 것이다’, ‘마스크가 있고 실험을 할 것이다’, ‘세계는 더욱 단결될 것이다’, ‘요양원의 노인들을 돌볼 것이다’, ‘고독은 끝날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등을 오늘의 우리는 믿어 버린다. 이 위선적이고 장황한 이야기들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것이라거나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부르주아지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했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광범위한 야만주의의 갱신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바짝 뒤쫓아 왔다. 그러므로 이후의 세계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리라는 말은 진실이다. 세계는 훨씬 더 악화될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약속은 믿기 원하는 이들에게만 확신을 줄뿐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사회에 잉태시킨 고통 받고 있는 세계, 악몽의 세계에 대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더 이상의 어떤 환상도 가질 수 없다.


     

    202052

    (Sam)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옮긴이 : 지나

     

    <원문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917/population-lockdown-bourgeois-state-shows-its-brut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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