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교육에 대한 코뮤니스트 개념을 향하여
  • 조회 수: 5870, 2023-05-15 13:12:25(2021-02-23)
  • 교육에 대한 코뮤니스트 개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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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1)에서 우리가 지적했듯, 부르주아지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은 그것이 노동자에 필수 불가결한 것과는 매우 다른 본질적 이유 때문이다. 교육이란 국가 건설의 한 방법인 까닭에, 부르주아지는 그것을 항상 국가 이미지 형성(프레이밍)을 위한 도구로 간주했던 반면, 노동계급에 있어서 교육은 언제나 자신들의 해방을 위한 필수요건이자 즉각적이고 보편적 필요의 일부로 여겼다.


     

    소외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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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슈루즈베리(영국), 1,000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최초의 랭커스터 학교


    자본주의가 발전 단계에 있던 시기에는 오로지 교회가 통제하는 학교만이 낡은 사회의 대들보로서 부르주아지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배타적으로 암기에 근거한 교육, 종교적인 이야기들과 미신들로 들쑤셔진 교육을 증진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학교에 과학을 도입하겠다는 미명하에 부르주아지의 대안 프로그램은 단지 내용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비효율적인 전통 학교를 전복하는 데 있었다. 이는 교육 과정을 하나의 워크샵으로 간주하기 위함이었는데, 조직적인 기술적 향상은 제조업이 경험하기 시작한 것과 유사한 도약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표는 교육의 과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는 교육 과정이 공학으로 기능하기 위함이었으며, 학교를 사회적 기계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루소는 새로운 과학이 되고자 했던 부르주아 교육적 담론의 첫 삽을 떴다. 그의 출발점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혁명적이었던 것은: 진정한 자유란 지구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노동력을 팔기 위해 자유로워야 하며, 따라서 본성에 가장 가까운 직업인 육체노동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동을 낡은 중세 시대 동안의 반()본성적으로 세뇌되어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그를 본성대로 재통합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는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가 잉태한 본성을 아동이 독립적으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이 아동은 자신이 개인이라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사회성을 개인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게 근거하여, 루소는 한 가지나 그 외의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강력하게 남게 될 훈련의 주제, 구호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 자연은 아동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 실질적 경험과 직접적 관찰을 통해 학습해야만 한다고. 아동에게 있어서 무엇이 진리인지 아닌지에 관한 경험주의적 범주에 대한 설정은 자연과 부르주아지의 특별한 관계라기보다는 경험을 재생산하기 위한 기초이다.

     

    그렇지만 물론... 부르주아지의 자명한 진리는 아동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정의되는 특정한 상황에서만 명백할 뿐이다. , 훈련의 목표는 학생 자신에게 전혀 분명하지 않은 것을 분명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근본에서 벗어날 수 없는-이런 모순을 둘러싼 담론들을, 페스탈로치(Pestalozzi)에서 피아제(Piaget), 몬테소리(Montessori), 서머힐(Summerhill)...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살펴볼 것이다. 이를 전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교육학이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같은 곳으로 귀결되는 아동심리학과 특수지식 및 전체적인 세부 분야들 역시 그랬다 : 성숙과 학습이 상업적인 삶으로 수렴된다는 다소 노골적인 생각. 그리고 그것은 노동자의 경우, 그들의 생애를 상품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운동은 곧 보편적인 공교육 기저에 자리한 다층적인 덫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맑스는 노동계급 아동에 대한 교육을 국가에 넘기려는 모든 생각에 반대한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계급의 여러 주장이 매우 조직적으로 짜임새 있게 전개된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교육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기본적 의문에 응답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후 교육이란 계급투쟁과 미래 사회 모두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것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비()계급-분화 사회 내에서 등장할 새로운 관계들의 관점, 자본주의가 사회에 가하는 제약과 비참함에서 벗어난 노동을 통해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을 자연과 더불어 전체로서 함께 한다는 관점이. 다시 말해 그들의 교육적 노력은 코뮤니스트 도덕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 어느 것도 계급운동 자체가 사라진 곳 그 이상으로 전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식적 도약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던 러시아에서 아주 짧은 기간에만 일어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기의 교육학적 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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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비고츠키(Vigotski)와 그의 딸


    세계혁명 기간 발생한 인간 행동 및 아동발달에 관한 진정한 지식의 분출은 자주 잊힌다. 지식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법처럼 등장한다거나 몇 사람들의 천우신조를 통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식은 그것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지식을 사용할 수단과 능력을 지닌 사회적 주체의 사회적 조건 및 필요에 응답한다. 이는 계급 간 권력의 상관관계가 항상 내포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이며, 훗날 이데올로기에 의해 역사의 원동력으로 등장할 특별한 인물들을 낳는다.

     

    소비에트에 의한 권력 장악은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새로운 필요의 세상을 가져왔다. 먹을거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는데,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리는 것이 사회의 처음 목표였기 때문이다. 상징과 아이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다. 보편적 메시지가 처음으로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시절 및 학습의 의미와 형태에 새로운 이해가 필요했다. 착취를 위한 교육이 더는 제공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학습 장애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 안에서 아동들의 학습 장애를 이해하는 손상학이 보편적 욕구를 표현하는 의식적인 사회적 목표가 된 것이다.

     

    이것이 비고츠키(Vigotski)의 연구에 등장하는 틀이다. 오늘날 손상학에 접근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다른 것들 사이에서 이것은 과학의 비()선형적이며 비()기계적인, 변증법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증상이나 현상을 해결할 수 있기 위해 단일한 측면에 답하기를 원치 않는다. 손상학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사회적이라고 알려진 현실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소비에트에서 노동했던 과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특성인 기계적인 개념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도 과학의 한계로 남아있다.

     

    비고츠키에게, 아동의 학습 문제, 청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것, 초등교육, 그리고 교수법에 관한 연구는 같은 것이며, 인지 과정과 개인의 사회적 형성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같은 세트의 일부이다. 작업은 광범위하다. 언어의 역할과 의미, 사유, 아동의 상상력, 감수성, 예술적 표현과의 관계 등을 다룬다... 이들 작업은 인접 문제를 연구한 후 다양한 각도에서 반복적으로 같은 주제로 돌아간다. 그들은 부분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전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경학, 의학, 종의 진화 및 기호학이 아동과 그들의 필요에 따른 심리적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 통합된다. 그들은 진정으로 과학적 지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사회가 세계의 반()혁명과 전쟁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모든 과학, 방법론적으로 후퇴한 모든 과학과의 비교는 엄청난 것이다. : , 60년대 미국의 행동 생물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침팬지의 수화를 실험했을 당시 (와슈Washoe프로젝트, 님 침스키Nim Chimpsky 사례 등.), 그들의 방법론적 실험 특성으로 인한 제약으로 인해 공허하며 빈약한 고립된 인과관계로 귀결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비고츠키는 파생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사회적 요구에 적용될 가망은 거의 없었다.

     

    혁명의 시기에 소비에트 팀이 이룬 모든 것을 한쪽의 글로 요약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볼 것을 우리는 강력히 추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전해 온 교육학의 모든 토대를 무너뜨릴 아동 교육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출발점을 강조할 수는 있겠다.

     

    비고츠키와 그의 동료들은 인간은 노동을 통해 본성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본성 자체 역시 변화시킨다는 유물론적 관념을 주목한다. 동물행동 생물학에 대한 초기 연구를 통해, 그들은 유의미한 상징에 대한 창조 및 사용은 의식적 의지에 대한 종속적 행동의 능력에서 오는 인간의 특징적 기술이라고 결론 짓는다. 언어는 도구이며, 자본주의 형태를 벗어난 인간의 실질 노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 요소이다. 우리를 통해서 사회화하고 변형시키는 도구이며, 우리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변형된다.

     

    이러한 상징의 사용은 사회적 논리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논리는 다른 사회적 동물의 그것과는 같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 인간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종의 논리는 인간과 상호작용할 때에만 인간에게 적용될 뿐이다. 인간은 논리를 내면화하고,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 안에 사회적 총체를 지닌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구두로든, 플라스틱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형태로든지 언어에 대한 사용 및 명령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언어 진화를 통한 인간 심리의 발달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욕구 및 변혁과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사회 총체는 첫 생명의 순간부터 우리들 개개인의 모습을 형성한다.

     

    첫 번째 교육학적 결론 - 아동발달에 대한 경험적 개념, 즉 언어영역은 전에 이미 이해된 것을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은 오류다.

     

    우리는, 인간 사회에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개념에 상반된다. 진리를 지탱하는 순수한 자연에 상반되는 부패한 사회에 루소의 이분법-오늘날에도 여전히 깊게 뿌리박힌-은 산산조각 난다. 아동 발달은 성인의 경우처럼 개별적이지 않다. 그것은 중립적 자동장치로부터 처리된 감각 및 경험의 축적으로 축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동 발달은, 특정 인간의 개입 및 능력에 의존한 그것의 이해에 있어 경험뿐 아니라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아동을 자극 A에 노출시켰을 경우, B처럼 발달할지를 알려주는 선형 관계의 매트릭스는 없다. 단순히 조건화한다는 것 이상으로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관계들이다. 교육과정은 아동을 일정표에 넣기 위하는 것도, 보상에 관한 것도 아니다. 아동들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 즉 그들이 이미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앞서 구성된 문제들로부터 그들이 겨우 무엇을 배웠는가에 관해서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동이 도움을 받아 성취할 수 있는 것, 보기를 들어 숙달하는 과정,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을 주장하도록 해주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아동 발달의 현재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이미 과거에 그들이 무엇을 습득했는가가 아니라, 미래의 관계, 그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의 관계이다.

     

    사회적 지식이 종의 역사에 종속된 것과 마찬가지로, 학습은 삶과 분리된 장이 아니며, 순간마다 마주칠 수 있는 미래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인간교육학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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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아이들에 둘러싸인 크루프스카야(Krupskaya)


    당시 노동자들이 고려했던 것과 시도했던 것은 특정 계급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 사회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사회로부터 인류 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즉각적 가능성으로 제시된 그러한 미래는 이미 당대에 지식을 확장하고 있었다. 학습은 더는 공동체의 필요로부터 분리된, 기계적인 어떤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예견된 인간 노동의 중심이었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주의적인 아동들이 자신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위에 두도록 갈구하며, 대중에 반대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닌 집단주의, 집단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강화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증대시키는 다면적이고, 의식적이며, 신체가 건강한 아동으로 만들려고 한다. (N. 크루프스카야, “청년 교육”)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리, 시골과 도시의 분리, 성별 분리에 대한 종식. 소비에트 권력,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한 계급의식의 거대한 발전은 진정한 인간 교육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했다. 여러 부가적 형태가 필요하지 않고, 아동들이 어떤 목적으로든 노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일반화되고 방대한 형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려되었다. 학습이 의식적인 것이 되는 형태, 그들에게 다차원적 존재로 살아갈 능력을 부여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형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속이도록 하지 않으며, 누구도 교육학적 지식의 공백을 제기하지 않는 형태 말이다. 극복한다는 것은 이상적 개념에서처럼 0부터의 시작을 위해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지식 역시, 심지어 시의적절하며 무해한 것 이상인 체제에 대한 개념적 경계를 떠나지 않은 동시대의 지식도, 문화적이고 물질적 유산의 부분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잉태한 변화의 가능성이자, 현재 정권을 완전히 전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의 일부이다. 그것이 그들이 레오 톨스토이와 존 듀이의 작품에 가치를 두는 이유이다. 보기를 들어 소작농 아동들을 교육하는 자신의 경험담인 톨스토이의 작품은 아동들이 과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나가는지 보여준다. 노동이 교육에 기여해야 하는 역할에 대한 존 듀이 학파 및 그의 관점은 아동들이 그들을 다차원으로 존재하도록 해 줄 지식과 기술을 습득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아동들은 공동체에 훌륭한 구성원이 될 것이다. 타인을 돕는 것이 학습의 기본적 부분이며, 거기에 속임수에 대한 개념은 없다. 시험도, 경쟁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더는 그들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아니라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것이다.

     

    내전이 야기한 비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며, 빈곤의 끝에 그려진 미래의 당근이었다. 그것은 현재에 작동하는 미래였으며, 그 자신을 한계에 도전하도록 하는 미래였다. 볼셰비키가 과학기술 교육을 증진했을 당시, 그들은 아동들을 전문화된 노동자로 훈련시킬 순수 기술 교육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문턱에 있었던 세계 사회에서, 러시아의 보루인 아동들은 생산을 의식적으로 지시하는 법을 학습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 새로운 기준이 그들을 생산에 최적화된 도구로 여기지 않은 이유이다. 반대로 그것은 그들이 보편적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도구를 생산하도록 훈련시키는 문제였다. 크루프스카야의 주장에서, 과학기술학교 설립 목적은, 아동들이 학업 종료 시 생산의 모든 조건 및 동시대 수준의 기술을 완전히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며, 약간의 과학적 가르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국가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한 첫 번째 일 중 하나가 전통적 교육, 그것의 가치와 상징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다시 사람들을 도구로 준비 시켰다 ; , 다소간 국가가 통제하는 자본 축적의 경제, 인간의 욕구와 그들을 대표하는 계급인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또다시 정복했다. 교실은 다시 동료 국민들로 구성된 공장이 되었고, 노동자들이 착취를 극복하는 대신 인정하도록 준비시킨 교육 정권의 불길한 안개 속으로 다차원적 삶에 대한 생각은 다시 숨겨졌다.

     

    2020. 11. 21

    해방 저널(JOURNAL OF EMANCIPATION)

    번역 :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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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교에 대한 그들의 필요와 우리의 필요

    https://en.communia.blog/their-and-our-need-for-school/

     


    <원문 출처>

     https://en.communia.blog/towards-a-communist-conception-of-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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