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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13호] 코뮤니즘 세상에서... 도시와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 조회 수: 7522, 2021-08-11 14:31:20(2021-05-23)
  • 코뮤니즘 세상에서...

    도시와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생산과 주택은 지역 전체에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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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즘 아래에서의 도시, 주택 및 도시화

     

    코뮤니즘 아래에서 공장은 어디에 위치할까? 도시가 여전히 존재할까?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 모두 집에서 살 것인가? 인구가 분산되면 생산도 분산될까?

     

    대도시 아래에서는 자본 축적이 있다

     

    농촌과 도시 간의 대립과 도시의 기하급수적인 발전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현상이다. 시스템과 그 주기를 나타내는 자본 축적은 정의에 따르면 집중된 생산 자원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중은 법적인 형태의 자본이나 계급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특정한 조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대도시 중심가에서 산업의 집중과 서비스의 집중은 자본 간의 유동성을 촉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첫 단계부터 자본집중과 도시집중이 함께 진행되었다. 부르주아혁명이 대륙 전체에서 자본주의를 아직 확장하지 않은 19세기 초, 도시 인구는 유럽 전체의 3%에 불과했다.

     

    자본주의의 탄생 자체는 공동의 토지 구획 및 인클로저와 토지의 통합으로 시작되어 다수의 농민이 도시로 모여들게 하였다. 그곳에서 농민은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도시에 노동자의 집단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도시 자체가 자본으로 변했다. 그리고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서는 가상의 자본으로, 완전한 투기로 변했다. 역사적으로 대도시에서 모든 집이 원래 가격대로 몇 번이나 거래되었는가? 도시 전체가 공간과 벽돌로 합쳐진 순전한 가상의 자본이다. 애초에 중세 일화에 나오는 니콜라스 플라멜(Nicolas Flamel)의 부동산 투기 속임수는 현대에 와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각 아파트는 인위적으로 부족한 공간에 대한 작은 독점이기 때문에 가변 자본(임금, 노동력)의 무게를 최소화하여 점점 더 높은 고층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웃들은 자본 자체의 논리에 근거하여 괴물 같은 벌집의 형태를 취했다. 주거용 타워와 사무실 고층건물은 자본주의 집중의 기념비적인 초상화이다.

     

    자본 축적이 더는 사회에 필요한 임무가 아닐 때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본 축적(자본주의 집중)을 대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공간에 대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시와 인구 과밀화에 맞서서 투쟁할 것이다. 엔지니어를 양성한 전투적인 이탈리아의 국제주의자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1950년대에 그것을 분명히 묘사했다.

     

    끔찍하게 뻗어나가는 덩어리를 파괴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은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 : 코뮤니스트 산소 대 자본주의 찌꺼기. 공간 대 시멘트.”

    (아마데오 보르디가. 공간과 시멘트, 1953)

     

    그러나 코뮤니즘 아래에서, 도시의 극복에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탐구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처음부터 정의했던 도시-국가 대립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영국에서 산업발전, 환경파괴, 노동자 주거의 비참함 사이의 관계를 수년간 연구해 온 엥겔스에게는 자본주의가 부상하는 가운데에서도 눈에 띄었다.

     

    따라서 도시와 국가 간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오히려 농업 생산과 더불어 공공 위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미 산업생산 자체의 즉각적인 필요성이다. 도시와 국가를 합쳐야만 현재의 공기, , 토양 오염을 해결할 수 있다.” [...]


    자본주의 산업은 이미 원자재 생산의 국산화로 지역적 한계에서 상대적으로 독립하였다.” [...]

     

    따라서 도시와 국가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며, 영토 전체에 걸쳐 대기업이 가능한 한 균일하게 분산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조차도 아니다. 문명이 대도시에서 우리에게 유산을 남겨 놓은 것은 사실이며, 그것을 없애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도시는 폐지되어야 하고, 길고 어려운 과정을 감수하더라도 폐지될 것이다.”

    (엥겔스, 반뒤링론,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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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옥수수를 모두 로봇으로 재배하는 것은 이미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영토 전체에 분포된 생산구조

     

    지역 전체에 걸쳐 대기업을 균일하게 분산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환경운동가, 투자관리자,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한목소리로 외칠 것이다. 그들은 집중이 생산성을 높이고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또한, 자본 집중은 이윤이라는 측면에서 생산성을 높인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 집중이 반드시 인간의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내에서, 스탈린주의가 그 좋은 예이다.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규모를 늘리고 생산을 집중했던 스탈린주의의 집착은 러시아 중부 지역의 여러 대형 공장 시멘트 생산량을 줄였다. 그 결과, 정작 필요할 때 시멘트가 없었다. 생산은 모든 종류의 혼란과 병목 현상에 직면하여 극도로 취약해졌다.

     

    이것은 철의 장막 반대편에 있는 투자자들과 같은 조건으로 생각한 기획자들에게는 아주 희소식이었다.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게다가, 합리적으로 보이던 이 계획은 복수심을 동반했다. 스탈린주의 하의 소련 자체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취약하고 통제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은 생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일 공장에서 생산의 초집중은 생산량을 조정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종말을 재촉하는 데 일조를 했다.

     

    “8월 쿠데타가 실패하기 전에, 몇몇 공화국들은 소련 정부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몇몇 주요 원자재와 제품을 다른 공화국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 불가피한 결과는 기업들이 계획된 공급에 의존할 수 없고 가게는 판매할 상품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제의 공급 부분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공장이 담당했던 제품을 국가 생산으로 집중하여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던 구 계획 시스템의 고도로 전문화된 성격으로 인해 상황은 악화한다. 최근 언론의 추정에 따르면 가장 일반적인 6,000개의 산업 제품 중 4분의 3이 단 하나의 시설에서만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공화국 간의 전통적인 무역 관계가 붕괴함에 따라 대체할 수 있는 공급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좀 더 최근의 보기는? 코비드 백신... 그리고 감염병의 첫 단계에서 마스크까지. 초집중은 분명히 국가 자본 자체에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필요 만족으로 관리되는 탈상품화 생산이 그러한 필요 의지도, 즉 공간에서의 인구 분포를 따르고 최적의 생산 규모에 적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이 시리즈의 전편에서 보았던 것처럼 코뮤니즘 아래에서, 우리는 생산력 발전의 해방, 특히 노동력, 즉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해방, 즉 생산의 사회화에 대한 현재 경향을 가속하는 해방이라는 결과를 누릴 것이다. 종합하면, 둘 다 노동의 물리적 생산성은, 평균 노동시간 동안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임금 노동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노예화된 노동을 완전한 폐지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증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자재가 항상 같거나(분명히 지금처럼 같지는 않음) 생산의 모든 물리적 요소의 생산성이 현재와 같거나 일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않고 우리는 종이책에서 전자책에 이르기까지, 석탄에서 에너지원의 혼합에 이르기까지- 즉 재생 가능한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 등으로 발전했다.


    코뮤니즘 아래에서 각 생산물은 다른 최적 규모를 가질 것이며, 이것은 또한 최적의 생산 규모와 필요한 규모 사이의 적합성은 고정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반경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생산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망고와 파인애플은 특정한 기후 조건 때문에 한정적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필요한 곳에서 재배할 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의 필요구조가 변하면 다른 것들은 순간적으로 규모가 축소되거나 확대될 것이다.

     

    코뮤니즘 아래에서 생산의 중앙집중주의는 계급의 중앙집중주의를 반영한다. 이것은 소수의 권력 집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모든 결정의 집중을 의미하기 때문에 생산적 중앙집중주의는 공장 집중과는 반대다. 모든 생산은 인간 사회의 전체적인 필요에 따라 규제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채로운 필요에 따른 형태에 지속해서 적응하고 발전한다. 좀 더 구체적인 부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기 전에 아주 많은 탈상품화를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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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930년 엥겔스의 반 뒤링에서 영감을 받은 '더바니스트(deurbanist)' 이아코프 체르니호프(Iakov Chernikhov)의 프로젝트 '일하는 도시'. 

    더반주의자들은 가치 논리에 반하는 과도적 도시주의를 시도했다. 그들의 책은 금지되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스탈린주의에 학살되었다.

     

    개인 주택?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인간관계의 체계적이고 거대한 탈상품화, 즉 사회주의는 자본 동력의 임무에 불과한 수직주의와 집중에 직면하여 공간을 재발견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행기 사회에서는 미래 주기에서 가능한 생산을 늘리기 위해 사회적으로 얼마나 축적되는지를 결정하는 - 노동하는 인간 필요 충족에 전념하는 생산의 일부인- 가변 자본이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의 빈곤을 대가로 축적 자체가 주장하는 자본의 독재와는 반대인 노동자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자본주의 생산 관계를 폐지한다. c [축적된 것]은 자본이 되는 것을 멈춘다, v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념하는 노동]은 더는 인구 대다수를 빈약한 소비로 감소시키는 노동력의 가격이 아니며, 이어서 pl [자본주의 하의 잉여가치]는 개인과 집단 소비를 위해 준비된 새로 생성된 상품으로 나타난다.

     

    더는 다른 사람 노동이 부르주아지, 공무원 또는 기관에 의해 전용되는 이윤은 없다.

     

    따라서 확대재생산은 사회를 통합하는 집단적인 인간의 직접적인 필요에 대한 대응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그것은 자본 축적이 아니다. , 이행기 동안 여러 주문의 소비 확장이 주관하여 확장된 축적(오래된 고정자본)을 결정한다.”

    (무니스(G. MUNIS). -국가, 스탈린주의, 혁명, 1974)

     

    아래는 이행기 경제의 기초인 코뮤니스트 사회를 향하는 과정에서 주택과 주택 형태를 의미하는데, 보르디가가 다시 한번 잘 설명하고 있다.

     

    점점 더 잔혹한 독재를 무력으로 분쇄한 후, 모든 해결책과 계획을 생활 노동조건 개선에 종속시키고, 이를 위해 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해 온 죽은 노동, 영구 자본, 가구들의 종말을 고한다.

     

    그러면 콘크리트 괴물의 잔혹한 수직주의는 조롱과 억압을 받게 될 것이고, 거대한 수평적 공간 확장 속에서 커다란 도시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인간 동물의 힘과 지능은 거주할 수 있는 땅에서 점차 삶의 밀도와 일의 밀도를 균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 공간과 시멘트, 1953)

     

    이 도시는 엥겔스가 말한 대로 흩어져 있는 공간과 자연에서 인간들의 완전한 통합을 목표로 사라지며, 러시아혁명 기간 꿈꿨던 탈도시론자들이 난간에서 그들의 집을 도발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나 코뮤니즘 아래에서 우리는 개인 주택, 가족 주택, 작은 집단 공동체에서 살 것인가? 가족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알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른 기사에서 그것에 대해 다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공동체주의가 계급의 역사와 그 모든 발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계급 분열이나 굴절 없이, 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출현을 암시하고 실험한다. 비록 그것이 그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작은 공동체 형태의 영속성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코뮤니즘 아래에서 우리는 충분한 공간을 갖게 될 것이고, 자본과 관련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 영토의 더 넓은 공간을 통해 이동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화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형태를 아직은 알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자본주의를 전복해야 한다. , 우리 이제 시작해보자.

     

     

    202136

    해방

     

    <원문 출처>

    https://en.communia.blog/under-communism-city-housing/#todays-topic-city-housing-and-urbanism-under-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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