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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13호] 200년: 엥겔스와 그의 혁명적 기여
  • 조회 수: 4873, 2021-11-18 13:48:06(2021-09-17)
  •  200: 엥겔스와 그의 혁명적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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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태어난 때로부터 200년이 된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우리는 1995년 엥겔스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며 출간했던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1(시리즈 3)의 글 하나를 다시 펴낸다. 이것은 축하라거나, 단순한 일대기가 아니다. 이것은 맑스주의 방법과 19세기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헌과 그의 사후 125년 동안 이어진 그의 중요성을 평가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엥겔스의 공헌을 방어하며 제시된 주장은 이른바 ()엥겔스주의의 근원도 추적하는데, 이 주장이 제기된 25년이 지난 이후, 새로운 세대(보기를 들어, 몇몇 아마추어 코뮤니스트들과 가치 형태 이론가들)가 다시 한번 맑스주의에서 엥겔스를 퇴치하려는 시도에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없어서는 안 될 엥겔스

     

    칼 맑스의 전 생애에 걸친 친구이자 협력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9585일에 사망했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가장 위대한 투사이자 혁명적 코뮤니즘의 공동 설립자를 잃은 해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엥겔스가 없었더라면, 맑스주의도, 맑스주의 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1847년 코뮤니스트 동맹(Communist League)의 발족으로부터, 1864년 국제 노동자 협회(1 인터내셔널) 설립, 말하자면 가장 익숙한 정치적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1889년 제2 인터내셔널의 준비에 이르기까지, 엥겔스의 기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현재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마찬가지로 퇴조 시기, 맑스와 격리되어 있었음에도, 조직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 바로 엥겔스였다. 많은 서신을 통해 분파의 필수적인 작업을 계속했던 것도 그였다. 1883년 맑스 사후, 엥겔스는 당의 정신으로서 살아 숨쉬며, 3 인터내셔널까지 바로 조직의 원칙과 경험의 지속성을 전달했고, 역사적인 오늘날, 그 정치적 유산을 체현한 유일한 전통, 코뮤니스트 좌파에게까지 전달했다.

     

    엥겔스의 이론적 투쟁에 대한 고발은 최종 분석에 있는데, 이는 정치적 상황과 따로 떨어질 수 없으며, 그의 위상에 동등한 증언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공식화 이후 100, 오늘날 그의 사상은 뜨거운 논쟁거리, 분란의 원인으로 남아있다. 1844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a Contribution to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부터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적인 본질에 맑스의 눈을 뜨게 한 작업인 공동저작, 코뮤니스트 선언(Communist Manifesto), 청년 헤겔주의자에 대한 응답으로 맑스와 함께 맡았던 초기 작품, 신성 가족(The Holy Family),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 그리고 그의 후기 저작들인 -뒤링(Anti-Dühring),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The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자연변증법(The Dialectics of Nature)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맑스의 자본(Capital)초안에 대한 물적, 지적 지원부터 혁명적 코뮤니즘의 원칙들을 유명하게 한 수많은 팸플릿과 논쟁적인 글들에 이르기까지, 엥겔스의 지적 에너지는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에 끊임없이 기여했다.

     

    이 글은 그를 칭송하기 위한 일대기가 아니다. 우리는 학계의 맑스주의 전문가들이 안락의자에 앉아 연대기적 자료들의 유골을 살펴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엥겔스의 결정적인 전기는 계급투쟁의 페이지 속에서만 작성될 것이다. 우리는 그 대신 엥겔스의 혁명적 맑스주의를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며, 이는 전문적인 중상모략의 정통이 된 이들에 의해 폄하된 그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엥겔스주의의 기원

     

    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 시기, 패배를 모르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세대가 등장했는데, 계급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필수적인 주관적 조건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들은 다양한 종류의 좌익 급진주의의 등장을 목격했다. 새로운 축적 싸이클 위기의 징조, 냉전 시대 첫 번째 균열, CND(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핵군축 캠페인)와 새로운 좌파의 성장, 베트남전 반대 등, 지식인 집단의 새로운 계층들을 급진화하고 필연적으로 동시에 맑스주의 사상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몇몇 조건이 존재했다.

     

    이 과정은 몇몇보다 명백한 개량주의의 공허함, 그리고 스탈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돌덩이의 무거운 무게에 대한 더 큰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비판자들은 맑스주의 설립자들의 저작에서 스탈린주의의 씨앗과 개량주의의 실패를 찾기 시작했고, 이는 학계 맑스주의의 확장에 기름을 부었다. 이와 동시에 맑스의 초기 인본주의적저작들이 널리 이용되었다. 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엥겔스의 사상이 완전히 관념적 방법의 결과였다는 것 - 지면의 한계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 영향력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주류는 스탈린주의의 조악한 환원주의와 개량주의의 반-이론적 왜곡에 대한 반응으로 종종 철학적, 문화적 분석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좌파(New Left)의 맑스 계승주의자들(marxicologists)은 태생적으로 이러한 현상들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론에서 환원주의나 실용주의가 스탈린주의나 개량주의 보다 덜한 원인이라 가정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맹목적으로 관념론적 방법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일단, 이 논리가 받아들여지면, 유산의 지식인들은 곧 어떤 사상가가 이런 잘못된 사상들을 운동에 처음 들여왔는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원죄탐색이 시작되었다.

     

    비판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 사이의 틈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주장한 연구 중 하나는 게오르그 리히트하임(Goerge Lichtheim) 맑스주의: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연구(Marxism: An Historical and Ciritical Study, Routlege, 1961)이다. 리히트하임은 맑스의 비전에서 비판적 사고는 혁명적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validated)”는 것이, 엥겔스에게서는 사회주의가 필연이라는 것이 거의 기계적인 확실성으로 연역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철의 법칙으로 등장한다.”(1)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가 역사적 진화가 자연적(보편적) 진화의 한 측면이고, 기본적으로 같은 법칙에 종속된다고 했을 때 맑스와 갈라선 것으로 여겨진다. 맑스는 헤겔로부터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자기 의식적 행동의 중요성을 가져왔다. 반면, 진정으로 엥겔스를 도취시킨것은 헤겔의 결정론: 자연과 역사가 이미 정해진 과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었다.(2)

     

    리히트하임의 책은 발간 이후 20년 넘게 출간된 저작들에서 매우 친숙해진 여러 가지 주제들을 반복한다: 엥겔스가 맑스의 주체적 행동을 과학의 경험론적(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대체했고, 이는 다윈주의 진화론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적 세계와 자연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맑스주의를 잘못 확장했으며, 이 결정론적 환원주의적 공식이 필연적으로,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독일 사회 민주주의당(German Social Demoratic Party)이 개량주의적 정책을 지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리히트하임은 서유럽 맑스주의으로 알려진 사상적 흐름의 뿌리 깊은 특징이 된 반()엥겔스주의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알프레드 슈미츠(Alfred Schmidt)맑스의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 in Marx)(1962)에서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자연과 사회적 역사의 관계에 대한 개념에서 엥겔스는 맑스의 개념을 넘어섰고, 이 지점에서 그는 교조적 형이상학으로 빠져들었다.”(3)

     

    슈미츠는 맑스가 물질세계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사상을 찾았다면, 엥겔스는 인간 존재의 두뇌 속에서 외재적 세계의 조악한 반영만을 보았을 뿐이며 이를 알량한 의식 이론의 모조품이라고 믿었다.

     

    1969, 루시오 콜레티(Lucio Colletti)는 거의 무심결에 아래와 같이 질문할 수 있었다.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가 저지른 맑스주의 사상에 대한 왜곡은, 배아 상태였을 뿐이지만 엥겔스의 저작의 몇몇 측면 속에서 어디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는가? 자연과 역사 발전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에 대한 탐색이 이러한 시도를 전반적으로 헤겔주의와 다윈주의와의 오염의 경향(preconstitution)으로 만들었는가?(4)”

     

    그는 계속해서, 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 대한 엥겔스의 영향력이 철학적-우주론적 발전, 다시 말해 자연 철학’, 다른 말로 역사적 유물론을 확장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에 넣은 그의 작업의 부분적 결과라고까지 주장한다.

     

    콜레티에 따르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엥겔스가 홀로 잘못한, 조악한 오해이다. 엥겔스는 유물론을 더욱 우월한 형태로 만들고 있다는 착각으로, 이미 헤겔에 통째로 존재했던 사물의 변증법’ - 이에 대해 헤겔이 이미 명시적으로 반-유물론적 기능을 부여한 것도 모른 채 - 을 진부한 방식으로 재생산했을 것이다.

     

    엥겔스로부터, 모든 맑스주의를 아우르는 가짜-맑스주의 전통이 확산했을 것이다.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맑스주의와 헤겔(1958)의 첫 부분에서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으나, 두 번째 부분(1968)에 의하면 완전히 이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서유럽 맑스주의라는, 코르쉬(Korsch)와 초기 루카치(Lukács)에서 마르쿠제(Marcuse)에 이르는 이들은 반()유물론과 반()엥겔스 논쟁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에 대한 엥겔스의 오류 계승을 역시 배신한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초반에 이르러 그 양식이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 엥겔스는 악당이었다. 정치적 입장이나 이론적 입장 - 콜레트의 신칸트주의가 되었든, 슈미츠의 인본주의가 되었든,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의 알튀세르주의가 되었든 - 에 관계없이, 결론은 항상 같았다 : 무엇이 되었든 맑스주의가 잘못된 뿌리는 엥겔스였다. 르빈(Levine), 카버(Carver), 콜터(Coulter), 조던(Jordan), (Gunn) 등 몇몇 소수만이 이러한 경향이 가상의 정통에 엉겨 붙어 있음을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 사상의 통합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입장은, 명백한 현실 -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평생에 걸친 동반자 관계 - 을 무시한다. 코뮤니스트 운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의 삶에 관한 기본적인 전기적 사실들을 뛰어넘는 것은 상당한 왜곡이 필요한 일이다. 오직 가장 조악한 방식의 관념론만이 그 위업을 행할 수 있다: 오직 미리 상상 속에서 정해놓은 결론만이 그러한 수정된 사상들을 유지하기 위해 실증적인 데이터를 왜곡할 수 있다.

     

    카버(Carver)에게, ‘살아 있는 두 사람의 지적 관계는 바로 그들이 독립적으로 성취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맑스 사후, ‘변증법을 창조하고 그에 따라 맑스의 삶과 저작들을 재구성했다’(5)는 점에서 엥겔스는 전능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르빈(Levine)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관념론의 반동적 논리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지적 차이가 어째서 유형화되어, 진정한, 명확하게 구분되고, 인정된 논쟁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나지 않았을까?”(6)

     

    맑스와 엥겔스가 서로 다른 이론적 경로를 따라 발전했다는 아이디어는 어떤 전기적 증거도 없는 주장이다. 후자는 곁눈질로만 봐도 이를 지지한다.

     

    1840년대 두 사람은 역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지게 될 관점에 도달했고, 몇몇 중요한 예시에서 길을 이끌어 간 것은 엥겔스였다. 전체가 공동작업인 코뮤니스트 선언은 코뮤니즘의 원칙들에서 엥겔스가 처음 윤곽을 잡았다. 엥겔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썼을 때, 맑스는 여전히 헤겔 철학의 엉킨 실타래에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이것은 40년 동안의 경제 분석에 몰두하기 위한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한 것이었고, 또한 그의 1844경제학 철학 수고에 그 과정이 기록된, 맑스가 완전한 유물론적 계급 분석으로 이행하는 즉각적인 영감이 되어주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동의 견해에 도달하면서, 그들의 견해를 정교화한 신성 가족독일 이데올로기를 공동 집필했다. 그들은 그들이 개입한 의인 동맹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설득하고 코뮤니스트 동맹으로 전환하기 위해 함께 투쟁했다. 1848년 유럽 곳곳에서 일련의 부르주아 혁명이 발발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촉진할 조건을 갖추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맑스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고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 지낸 것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공동 작업 유형을 변화시켰다. 그들 사이에 새로운 정치적, 지적 노동 분업을 확립한 것이다. 오랜 기간의 자본론작업 동안 엥겔스는 그들이 거의 매일 주고받은 서신에서, 또는 방문 토론을 통해 맑스의 변함없는 조언자였다. 이러한 지속적인 협업은 자본론집필의 모든 단계에서 계속되었으며, 이는 맑스가 엥겔스에게 대개 위임했던 교정작업을 포함한다. 맑스에게는,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당신의 만족스러운 응답은 나에게 있어 세계의 나머지 누구의 만족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그 마지막에서 우리는 그의 엥겔스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부채의 본질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절대 이 작업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확신컨대, 당신의 뛰어난 에너지를 낭비하고, 특히 주로 나와 관련된 돈을 버는 문제들 속에서 녹슬게 한 것에 대해, 더욱이 여전히 나의 소소한 문제들에 대해 나를 대신하여 당신이 개입해야 했던 것이 항상 내 마음을 무겁게 해 왔습니다.”(7)

     

    르빈은 맑스의 죽음이 엥겔스가 자유롭게 그의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된 저작을 출판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르빈이 제공한 연대기 출판물조차 그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킨다. 반뒤링은 맑스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된 저작이며, 모든 프로젝트가 맑스의 아이디어였고, 맑스는 스스로 그 일부 챕터를 서술하였다. 우리는 맑스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의 철학을 학살하는 것, 그 자신의 사상에 안티테제인 형이상학적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해낼 필요를 명백하게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다고 이해해야 하는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반뒤링에서 나왔고, 이 또한 맑스 죽음 이전에 출판되었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은 맑스 사후에 나왔으나, 맑스가 그의 손으로 작성한 문화인류학적 노트로 엥겔스가 만든 것이다. 루트비히 포이에흐바흐는 맑스 사후 출판되었으나, 그의 초기 저작들의 관점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엥겔스는 맑스의 새롭게 발견한 포이에흐바흐에 대한 테제를 부록으로 출판했다. 명백히 그는 인본주의적젊은 맑스와 결정론적늙은 엥겔스 사이의 모순을 발견할 수 없었다.

     

    로라 맑스(Laura Marx)의 남편, 폴 라파르그의 아래 편지 발췌는, 아마도 어떤 역사적 회고보다도 그들의 진정한 취지와 독특한 관계에 대한 본질을 훨씬 더 잘 전달하고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말하자면, 맑스 가족의 일원이었다. 맑스의 딸들은 그를 그의 두 번째 아버지라 불렀다. 그는 맑스의 또 다른 자아였다. 그들은 젊었던 시절부터 함께 발전하고 서로 평행하게 함께 나아갔으며, 사상과 감정들의 친밀한 동료관계 속에서 살았고, 같은 혁명적 호소를 공유했다.···그러나,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엥겔스는 맨체스터로 향해야 했고, 맑스는 그동안 런던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거의 매일 서로에게 편지를 쓰며 공동의 지적 삶을 지속해 나갔다.···엥겔스가 자신 일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그는 맨체스터에서 서둘러 런던으로 향했고, 거기서 그는 친우 맑스로부터 10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마련했다. 1870년부터 그의 친구가 죽을 때까지, 그들은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때때로 그들의 집에서, 때때로 다른 이들의 집에서 만났다.··· 맑스는 다른 누구의 의견보다 엥겔스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는 맑스가 엥겔스를 그의 협업자가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맑스에게 엥겔스는 그의 온전한 청자였다. 엥겔스를 납득시키고 그의 사상을 설득하는 데에 맑스는 그 어떤 것보다 큰 노력을 들였다. 보기를 들어, 나는 엥겔스의 어떤 부차적인 부분에 대한 견해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사실들을 찾으려고 맑스가 모든 서적을 몇 번이고 읽는 것을 보았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엥겔스가 자신의 견해에 동의해주는 것이 큰 업적이었다. 맑스는 엥겔스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엥겔스의 모든 도덕적이고 지적인 뛰어난 점들을 열거하는 데에 기쁨을 느꼈다. 그는 지식의 다재다능함을 존경했고, 어떤 조그마한 나쁜 일이라도 그에게 생길까 경계했다.”(8)

     

    저속한 유물론자의 저속한 비판

     

    콜레티는 슈미츠와 페처(Fetscher)(9)와 마찬가지로 엥겔스가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을 우주적차원으로 확대하려 할 때, 그가 반대하고자 했던 매우 저속한 유물론의 저주 아래, 쓸모없고 부정적인 작업에 빠져들었다고 주장했다. 간단하게, 이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맑스의 인식론적(gnoseological)(10), 사회정치적 위대한 성취는 인간 존재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연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변형하는 기능 외 지식은 없다. 이러한 혁명적 통찰 과거의 모든 철학에 비해 목적, 방법, 그리고 사상에 있어서 우월한 에 도달했으면서 어째서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철학으로 회귀하여 되돌아가야 하는가?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의견은 이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오해임이 밝혀진다. 그것은 청년 맑스가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비판을 공식화한 시대와 비교하여 1850년 이후 유럽의 철학-과학적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데 실패했다. 몰레스홋(Moleschott) 또는 부흐너(Buchner)는 순수 철학적 입장에서 포이에르바흐보다 열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물론은 포이에르바흐의 본질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인본주의보다 자연과학에 훨씬 더 많이 연결되어있다.

     

    전자는 단순히 개념에 대한 감각적인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신학을 인류학으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각지성과 도덕성과 마찬가지로 을 생물학적 용어로 설명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맑스가 제기한 포이에흐바흐에 대한 반대는, 후자의 경우 능동적인 면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점을 간과하였으나, 그래도 충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새로운 유물론(18세기 프랑스 유물론도 마찬가지로)의 주장은 심지어 이런 능동적인 면조차 과학적 용어로, 그러니까 특정한 법칙을 따르는 여러 유물론적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단순하고 조악하다 할지라도 그 주장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조악함은 주요하게 두 가지 요인의 결과이다. 1) 인간 문화, 도덕, 그리고 정치적 행동을 어떤 심사숙고 없이 생물학적 활동으로 환원시켜 버리고, 따라서 동물의 세계에 속한 인간 존재를 구분해주는 노동이 부여한 두 번째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2) 사회적 불평등과 부당함을 과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과학자 자신들의 계급 위치와 어떻게 이것이 그들의 이론적 결과물을 조건 짓는지에 대한 어떤 분석도 누락해버린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편향적인 지적 발전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주관적 요소의 재발견으로서뿐만 아니라 유물론의 틀 안에 주어져 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자연이 영원한 순환’(여전히 몰레스홋(Moleschott)은 이 개념을 공유하지만)이라는 개념을 전복시키고, 역사적 확실성이란 인류에게만 존재하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다윈의 위대한 발견이 유물론의 2차 유행을 불러온 이후,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진화주의는 인간 이전 자연의 존재, 인류의 기원과 미래의 소실에 대한 의문을 다시 제기하였다. 노동의 등장과 함께 하는 두 번째 본성이 확립되는 한, 코뮤니즘의 출현과 함께 세 번째 본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인류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어떤 점에서는 조악하고 반동적일 수 있었던 한 철학이 제기한 이러한 의문은 과학적 연구가 인류의 객관적 현실을 밝혀냄에 따라 새로운 빛을 비추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치료제였다.

     

    19세기 중후반 이러한 사상이 등장함과 동시에, 퇴색한 실증주의 또한 등장했다. 이 실증주의는 불가지론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종교로 장난을 치진 않았다.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반응이 된 것은, 20세기 초, 쇠퇴 시기의 등장과 함께 유행한 관념론적 르네상스로, 실증주의 그 자체 내부에 이미 발아하고 있었다.(12)

     

    바로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맑스주의의 이른바 우주론적 개발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것은 엥겔스가 행했던 충동적인 지시를 보여준다기보다, 오히려 객관적 정치-이론적 필요를 의미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맑스주의의 두 설립자 사이의 차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라면 그것이 한 사람의 철학적 심오함과 다른 한 사람의 이른바 피상적인 이해라는 식의 손쉬운 비교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강제한 한계의 산물인 노동의 분업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시기 당시의 문화와 논쟁하는 일을 맡은 것은 엥겔스였고, 맑스는 그동안 그의 모든 에너지를 단 하나의, 그의 위대한 작품, 자본에 쏟았다.

     

    자연과학에 대한 엥겔스의 저작을 단순히 헤겔의 자연 철학의 진부한 반복이나 저속한 유물론에의 부분적 항복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러한 저작의 근본적인 특징: 실증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에 반대하는 논쟁이라는 특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특징은 한 편에서 가 능한 한 생각(사고)을 금지하는 실증주의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독일의 저속한 유물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 이론을 사회에, 그리고 사회 개혁에 적용하는모습을 보여주었다.(13) 엥겔스가 헤겔주의 변증법의 이름으로 진정한 유물론’, 다시 말해 오늘날의 근대적인 과학을 형이상학의 한 형태로 거부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콜레티가 지적한 대로, 헤겔주의 변증법은 머리로 물구나무선것이거나 신비주의의 껍질로부터 추출한 것으로서, 저속한 유물론이나 불가지론적 실증주의(경험주의)의 단점을 수정하는데 부적절한 도구라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헤겔주의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거부를, 그것을 인문과학에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유효하게 사용한 맑스와 자연과학에 잘못 적용한 엥겔스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헤겔과 관련해서는, 맑스와 엥겔스는 둘 모두 근본적인 지점에서 동의했다. 둘은 변증법의 유물론적 재해석을 위해서는 1) 객관적인 존재가 있는 법칙이나 법칙들로 취급되어야 하며, 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가 오직 현상적으로 투영될 뿐인 사상의 법칙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2) 현실에서 이러한 법칙들의 존재는 실증 방법을 통해, 미리 생각하고 있는 법칙에 끼워 맞추는 식으로 실재를 위반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정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어려웠던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두 번째 작업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할 것이냐에 있었다.

     

    보기를 들어 맑스의 글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부정의 부정과 같이, 변증법의 사용이 더 날카롭게 묘사된다면, 역사-인문학 내에서 기원한 논리적인 절차들의 사용을 자연과학에 적용할 때 보다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는 사실로 아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연 과학이, 그리고 여전히 자연과학은 과학적 정확성의 길을 따라 진보했고, 양적 용어로 공식화되지 않은 불만족스러운 특징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졌다. 맑스가 스스로 자연의 변증법이란 생각에 전혀 적대적이지 않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는 점은 언급해 두어야겠다. 그는 자본1, ‘잉여 가치의 비율과 양챕터 주석에서 작은 예시를 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언급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납득했다:

     

    헤겔의 발견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전환된다는 법칙 은 역사와 자연과학에서 유사하게 옳다.”

     

    이런 언급은 맑스가 변증법을 잠깐 건드려 보았을뿐일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우리가 반()엥겔스 진영이 주장하는 바처럼 맑스가 엥겔스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스스로 허락했다고 가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엥겔스와 개량주의

     

    엥겔스의 기계적 유물론이 독일 사민당(SPD)와 그들 중 일부가 참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주류가 된 개량주의 전략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흔한 비난이다. 만약 사회주의가 필연적이라면, 왜 혁명적 모험이라는 그 과정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가? 의회 다수가 되는 필연적 과정을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것이 개량주의로 알려진 전형적인 공식화이며, 이는 엥겔스의 엄격한, 경직된 객관주의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개량주의가 엥겔스의 사상이나 전반적인 정치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선택적 인용과 왜곡의 결과이다.


    이 암시의 씨앗은 사실 맑스가 제1 인터내셔널 헤이그 회의 이후 암스테르담에서 한 연설에서 처음 제기된 주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는 여기서, 보기를 들어 영국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목표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다라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인용에 부여된 해석의 중요성을 부과하는 것은 맑스의 파리코뮨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는 파리코뮨에 대한 분석에서 노동자들은 반드시 국가 기계를 때려 부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유사한 맥락에서, 엥겔스를 폄하하는 이들은 자본의 첫 영어 번역판의 엥겔스가 작성한 서문에 집착하는데, 여기서 엥겔스는 맑스의 언급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응답한다:

     

    적어도 유럽에서, 영국은 평화롭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필연적 사회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러나,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인다:

     

    (맑스)는 확실히 영국의 지배계급이 -노예 반란없이 평화롭고 합법적인 혁명에 항복할 것이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따라서, 엥겔스가 한 언급의 전체 의미는 만약 영국의 노동계급이 평화롭게 권력을 획득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혁명적 내전의 방식으로 그것을 방어해야만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엥겔스가 죽기 얼마 전 작성한 그 유명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소개 글에서 도시에서의 무장봉기의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판단과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의 선거 승리에 긍정적 가치를 표현함으로써, 개량주의의 등장을 사주했다는 것이 가능한가?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이것은 엥겔스를 개량주의의 죄악에 연루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편의적으로 빠뜨리는 것인데, 엥겔스의 소개 글은 독일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승인을 받기 위해 다양한 결정적인 측면에서 검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 문구를 그의 주장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했는데, 189543일 라파르그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리프크네히트는 저를 속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1848-50년에 대한 맑스의 글을 소개한 나의 글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롭고 반()폭력적인 전략을 지지하는 그의 목적에 맞는 것들만 추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전략이 오직 오늘날 독일만을 위한 전략이며, 그것조차 많은 유보사항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카우츠키에게 보낸 혹독한 항의 서한에서, 그리고 SPD의 기관지 새 시대(Neue Zeit)의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놀랍게도, 전진(Vorwarts)에서 나의 소개글 일부가, 내가 모르는 상태로, 나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사랑하는 합법의 숭배자로 보이도록 편집되어 인용된 것을 보았습니다. 새 시대(Neue Zeit)에서는 전체 글을 모두 실어준다면, 이러한 매우 수치스러운 인상이 일소될 것입니다.”

     

    혐의와는 반대로, 소개글은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권력 쟁취의 목표를 프롤레타리아트에 부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목적은 합법적 환경에서 당의 성장이며, 부르주아지가 스스로 평화로운 타협의 영역을 포기할 때, 필연적인 마지막 결전의 순간이 왔을 때, 보다 강력한 힘을 갖춘 상황에서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론적 생산의 조건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은 보편적인 과학적 개념과 사상의 생산 조건에 의존한다. 이 조건은 다시 보편적인 생산 조건에 연결된다. 생산양식은 과학이 이론적으로 정교화하는데 실질적으로 적용될 뿐만 아니라, 사상과 과학이 정교화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이 생산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극단적인 전문화를 강요하는 것처럼, 사상의 형성, 특히 과학의 영역에서도 역시 노동의 분업을 심화시키는 극단적인 전문화를 강요한다.

     

    지배계급은 과학의 영역에서 착취의 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통합을 이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건드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사실 통합은 그들의 혁명적 비평을 위한 필수적인 출발 지점이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에서의 지식의 발전은 자기 자신의 과학의 이론적 발전을 엥겔스의 자연 철학과의 대립을 위한 동기와 출발 지점으로 보는 것을 포함한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의 레닌과 마찬가지로, 엥겔스는 그가 전혀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문제에 대해 다뤄야만 했다. 더욱이 맑스 사후, 엥겔스는 자본을 편집하고 출간해야 하는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고, 그가 직면한 보다 큰 정치적 조직적 책무들을 수행하고 남은 가끔의 시간 동안 그 일을 해야만 했다. -뒤링의 제2판 서문은 그가 자연변증법을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과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자연과학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철학에 대립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엥겔스 또는 레닌이 이러저러한 이론적 오류를 저질렀는지, 가끔 그들이 지나치게 도식적이거나 과거의 부르주아 유물론과 유사한 철학적 견해에 빠졌는지 여부는 그들을 평가하는데 필수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반적인 활동, 계급투쟁에 대한 고발과 관련하여 그들의 정치적 지향에 대한 판단 기준일 것이다. 중요한 지점은 어떻게, 그리고 왜 그들이 맑스의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의 실천 영역에 스스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적 발전을 보다 전반적인 이해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사회 혁명 모든 진정한 진보의 기반 - 의 실천적인 실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것이 엥겔스와 레닌의 실천에서의 추동 원칙이었다.

     

    노동자 운동은 자본주의 내에서 그 독특한 혁명적 존재, 다시 말해 그 투쟁을 통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그 지식의 발전은 이중적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해방으로 가는 진척 상황에 달려있다. 한 편에서 그것은 정치적이며, 즉각적이고 뜨거운 이슈들을 포함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서 그것은 이론적이며 과학적인데, 좀더 천천히, 그리고 지금까지는 주요하게 계급투쟁의 퇴조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진화하는 측면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작업의 차이는 강령에 제기되고, 그 이후에 실천 적용에서 제기되며,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차이의 진화는 사회의 보편적인 진화, 계급의 진화, 투쟁의 방식, 이데올로기, 이론과 정치적 실천을 반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수하게 철학적 영역에서의 과학적 변증법은 실천적, 정치적 계급투쟁의 즉각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변증법은 더욱 거리가 멀고, 간헐적이며, 지역 사회 또는 보다 넓은 사회적 환경과 명백한 연결이 없다. 이는 봉건제도 말기와 자본주의 초기의 자연과학 발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식의 더 많은 영역이 실천적 적용에 즉각적으로 연결될수록, 그 진행 상황을 알아채기 쉽다. 다른 한 편, 더 폭넓은 통합을 시도할수록 변증법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러한 통합은 엄청난 복잡성의 법칙에 의존하고, 매우 다양한 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결국 오늘날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그런 연구들에 씨름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글은 오직 그런 노력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하나의 기여에 불과하다. 코뮤니스트 좌파 전통이 영국에서 부활한 많은 부분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고고학의 정지작업과 맑스주의 경제 이론 기초의 재()서술 덕분이다. 노동자 운동 역사상 가장 긴 반()혁명에 직면하여, 맑스주의의 목소리가 소멸한 것과 다름없는 곳에서, 20년 이상 동지들의 가장 큰 에너지를 소모한 것이 이 필수적인 책무였다.

     

    이러한 실천적-정치적 요구사항들이 압박하는 맥락에서, 우리가 다른 문제들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반복해서 나타나는, ‘서유럽 맑스주의가 철학적, 문화적 분석들 주변을 회전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앞으로 이 저널에서 출간된 글 속에 담길 몇몇 문제들에 쏟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주장해 왔듯이, ()엥겔스주의는 본질적으로 관념론의 독특한 변종이다. 그 기원은 한 세기의 초반 등장했던 신-관념론, 극단적 반-객관주의를 포함한 변형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시작은 과학의 인식론에 있는 실제, 심각한 문제였으나, 이 위기가 등장한 관련 역사적 맥락에서 신비주의적 자유와 인간의 창의성, 새로운 주관주의-자발주의와 같은, 실제 인간 존재가 속해 있는 진짜 조건을 무시하는 사상들에 대한 재주장에 이용되었다.

     

    비록 엥겔스가 이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주어진 해답을 제공한 것은 아님에도, 이러한 이론적 질문들을 직면하는 데 있어서 매우 많은 중요한 방법으로 우리의 정치적 기원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우리의 출발 지점이다.

     

    A.S.

     

     

    <>

     

    (1) 리히트하임, p.238

    (2) 같은 책, p.253

    (3) 슈미트, p.55

    (4) 같은 책

    (5) 루소에서 레닌까지(From Rousseau to Lenin), p.26

    (6) 카버(Carver), 맑스와 엥겔스: 지적 관계(Marx and Engels: The Intellectual Relationship)

    (7) 르빈(Levine), 비극적 속임수: 맑스와 엥겔스의 대립(The tragic Deception: Marx contra Engels)

    (8) 맑스와 엥겔스: 서신집(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9) 어빙 페처(Irving Fetscher), 맑스와 맑시즘(Marx and Marxism)

    (10) 다시 말해, 지식 철학에의 기여로서(편집자 주)

    (11) 몰레스홋(1822-93): 독일 생리학자이자 철학자. 유몰론과 헤겔주의 관념론을 배치함.

    (12) 세바스티아노 팀파나로(Sebastiano Timpanaro), 유물론에 대해(On materialsim)

    (13) 자연의 유물론(The Dialectics of Nature), p.153, p.85

     

    20201128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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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출처>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11-28/200-years-on-engels-and-his-revolutionary-con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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