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14호] 1971-2021: 미국이 브레튼우즈를 배신한 지 50년
  • 조회 수: 4475, 2022-02-15 18:51:41(2022-01-27)
  • 1971-2021: 미국이 브레튼우즈를 배신한 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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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그리고 우리가 속한 모든 정치적 경향으로 볼 때, 우리가 자본주의의 세 번째 세계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국경이나 계급 분할이 없는 번영하는 세계 공동체의 물질적 가능성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한 세기가 넘도록 한때 인류를 위해 진보적이었던 경제체제(생산양식)는 인간 존재 자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물론, 핵심은 세계 경제를 창조한 자본주의 운동 법칙은 20세기가 바뀔 무렵을 의미한다.

     

    자본축적 과정에 항상 내재한 순환적 위기가 세계전쟁에 의해서만 풀릴 수 있는 지구적 위기로 되는 그러한 지점에 자본 집적과 집중의 과정이 도달했음을 보여주었다.”

    (국제코뮤니스트경향 강령)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운동 법칙은 이윤 추구, 즉 개별 상품의 생산 비용을 지속해서 줄이면서 노동자 1인당 생산량을 더욱 증가시켜 이윤율을 높이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이윤 동기는 다양한 종류의 개혁주의자들(특히 자본주의가 지구를 약탈하고 자연계를 파괴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환경주의자들, 그리고 소비재와 함께 급성장하는 세계에서 증가하는 부의 격차에 분노한 사회개혁가 지망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단순히 '불공정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산 양식의 핵심인 근본적인 부당함은 노동계급이 창출한 새로운 가치(당신이 원한다면, )의 자본에 의한 전유라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과학기술 혁신(보기를 들면 산업 혁명 이후)이 엄청난 생산성의 향상, 즉 주어진 기간 동안 평균 임금 노동자가 창출한 새로운 가치의 엄청난 증가를 수반했기 때문에 더 극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 시간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1870년 이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오랫동안 확립된 제1 세계 경제 국가 중 극소수만이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1))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윤의 극대화' 외에 다른 역동성이 없는 근본적으로 부당한 이 체제는 전 인류가 잠재적으로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세계 공동체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세계 경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끊임없는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허물었던"(맑스, 그룬트리세) 것은 결코 순차적인 발전이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항상 호황과 불황을 겪어왔다. 노동자의 임금 삭감과 실업으로 이어지는 정기적인 위기; 탕감, 인수, 그리고 결국 더 집중되고 중앙 집중화된 더 높은 기술적인 기반에서 자본 축적의 새로운 주기로 인해 생산성은 향상되었지만(다른 말로 하면 착취율로 이해됨), 일반적으로 이윤율은 하락했다. 이러한 평균 이윤율 하락 경향은,

     

    “... 현대 정치경제학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며, 가장 어려운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다.(2)”

    (맑스, 그룬트리세)

     

    왜냐하면 그것이 지속적인 확장의 이유이기도 하며, 자본이 평가 절하되고 더 집중되고 중앙집중화되는 동안 반복되는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축적의 길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단일 기업에서 이익을 창출하는 개별 기업가로부터, 공동 주식회사, 증권 거래소 그리고 특히 유럽 대륙에서는 금융 자본의 발전을 의미했다. 주기적 위기의 관점에서 그것은 처음에는 국내 경제 부문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서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걸쳐서 동기화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19세기 말에는 국내에서 대기업, , 카르텔, 합병 및 독점 그리고 해외에 대규모 자본을 수출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향을 상쇄하려는 움직임이 해외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처를 찾는 것을 가속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 경제가 생겨났고, 새로운 시장과 투자, 값싼 원자재를 얻기 위한 싸움은 단순한 경제적 경쟁 이상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대공황(1873~96)으로 불렸던 길고도 지난한 일련의 국제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새로운 제국주의'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1차 세계 대전 이전 기간에는 대외 무역이 급격하게 증가했지만, 자본주의가 자유방임에서 벗어나 국내 경제를 보호하는 데 국가가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움직임이 증가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1873, 1882, 1890년 및 1907년의 대공황 시기에 관세장벽으로 복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883년 사망한 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을 예측하지 못했다. (비록 1896년에 사망한 엥겔스는 예측했지만) 그러나 맑스는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의 단계를 뛰어넘으리라 예측했다.

     

    자본이 약한 한에서는, 그것은 여전히 과거의 생산 양식이나 상승과 함께 지나갈 버팀목에 의존한다. 강하다고 느끼자마자 버팀목을 버리고, 자신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것이 자신을 발전의 장벽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본의 해체와 생산 양식의 해체를 예고하는 형태로 도피처를 찾는다.

    (같은 책, 651)

     

    그러나 자본주의의 변화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은 새로운 제국주의와 세계 대전 자체에 직면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부하린과 레닌(카우츠키와는 달리)은 제국주의 전쟁이 자본축적의 정상적인 과정에 대한 비정상적인 중단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보았다. 자본이 너무 중앙집중화되고 집중되어, 순전히 경제적 경쟁은 독점과 금융 자본의 이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국가 간의 경쟁에 자리를 내줬기 때문이다. 부하린의 자유방임주의는 국가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레닌은 독점자본주의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국가와 혁명에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제국주의와 함께 자본주의가 생산 양식으로서 새로운 역사적 쇠퇴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도 레닌이었다. (비록 "이러한 쇠퇴의 경향이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믿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3 인터내셔널의 설립을 뒷받침한 것은 역사적으로 쇠퇴한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이해인데, 3 인터내셔널의 창립 대회는 현재의 시대가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시대라고 발표했다. 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발전시켰던 체제의 내적 모순이 결국은 새로운 사회의 탄생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맑스 생각과 일치한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이윤율 하락에 대해 다시 설명한다.

     

    사회의 생산적 발전과 지금까지 존재하는 생산 관계 사이의 증가하는 불일치는 쓰라린 모순, 위기, 경련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자본의 폭력적인 파괴는 외부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보존의 조건으로서 그것이 사라지도록 조장하고, 더 높은 사회적 생산 국가를 위한 길을 마련하는 가장 두드러진 형태이다. 따라서 기존의 부의 가장 큰 팽창과 함께 생산력이 최고조로 발전하는 것은 자본의 가치하락, 노동자의 퇴화, 그리고 그의 생명력의 궁핍한 고갈과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폭발, 대격변, 위기를 초래하여, 노동의 중대한 중단과 자본의 상당 부분을 소멸시킴으로써 자본이 다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격렬하게 축소된다. ... 그러나, 이러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재앙은 더 큰 규모로 반복되고 마침내 폭력적인 전복으로 이어진다.

    (같은 책, 750)

     

    20세기에는 두 번의 세계 전쟁(그리고 한 번의 패배한 노동계급 혁명)이 대규모로 전개된 순환적인 자본주의 위기의 결과였다. ‘자본의 대부분을 전멸시킨 제2차 세계대전은 가장 긴 자본주의 호황의 토대를 제공했고,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자본주의 역사상 훨씬 더 긴 경제 위기였다.

     

    브레튼 우즈

     

    유럽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연합군이 독일 도시들을 폭격하고,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도 전에 전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규정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두 개의 매우 불평등한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뉘는 세계였다. 한편으로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 다른 한편으로는 결국 식민지를 박탈당한 서유럽 국가들과 함께 하는 미국이었다. 그리고 19452월 얄타에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에 의해) 세계 재분할에 대한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에, 뉴햄프셔의 미국 산악 휴양지 브레튼우즈의 한 호텔은 미국과 '동맹국'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경제적 기반과 교역 조건을 놓고 다투는 장소가 되었다. (19447) 심하게 패한 영국 제국주의 협상가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국제 무역을 위한 독립 통화(‘방코르’)를 만들자는 제안과 함께 미국 협상가 해리 덱스터 화이트 간에 씨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미국 달러가 국제 무역의 통화가 되어야 한다는 반대 제안은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연합군의 '전쟁 지원'에 대해서 미국이 더 이상의 신뢰를 하지 않겠다는 위협과 함께).(3) 미국은 이제 제국주의의 최고봉이 되었고, 달러가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회원국들은 자국 통화를 미국 달러에 고정하고, 전쟁 기간 이웃 국가 통화의 평가 절하가 궁핍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미국은 온스 당 35달러의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할 것이다. 이 협정의 일부분은 불가피하게 달러로 거래되는 IMF의 채권자 역할을 하는 세계은행의 설립이었다. 이에 대해서 한 가지 크게 추가된 사항은 러시아가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브레튼우즈 제도를 "월가의 지부"라고 비난했으며, 세계은행은 "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적에 종속된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내용이다.(4)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최종적으로 브레튼우즈가 정착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결코 제국주의 분할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미국의 지배에 대한 상대적으로 약한 제국주의 측의 저항이었다. 약하지만, 그런데도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련(이른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은 자체의 위성국을 확보해서 달러의 패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때 처칠은 철의 장막 연설을 했고, 트루먼은 미국이 권위주의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민주국가'를 지지할 것이라는 그의 '독트린'을 발표했다. 1947년 미국은 유럽의 동맹국들을 위해 마샬 플랜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미국이 다음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는 국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의미했다.

     

    코뮤니스트 운동은 ... 경제적, 정치적 약점을 먹고 사는 모스크바가 주도한다. 코뮤니스트의 압력을 받는 국가들은 영토 보존과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려면 대규모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한때는 국제적인 은행이 그러한 지원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제 은행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미국은 인류의 자유에 대한 전 세계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스스로 직접 제공한 방대한 새로운 지원 프로그램이다.(6)”

     

    이에 대해 소련은 1949년 동유럽 국가들의 마셜 플랜 참여를 저지하고 미국과 영국 및 기타 서유럽 국가들이 강제한 무역 보이콧에 대응하기 위해 상호경제원조위원회(Comecon)를 구성했다.


    한편, 전쟁으로 영국은 파산했고, 1946년 미국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된 케인즈는 차관의 조건을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영국 파운드화 무역수지가 있는 국가들을 19477월부터 달러로 환산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은 영국 달러화 보유고를 증가시켰다. 태환은 중단되었지만, 1949년에 이르러 영국 파운드화가 4.03달러에서 2.80달러(7)로 평가 절하되면서 보다 현실적인 환율이 확립되었다. 9월 말까지 영국에 이어서, 호주, 캐나다, 핀란드, 프랑스, 인도, 아일랜드, 이스라엘, 뉴질랜드, 노르웨이, 스웨덴을 포함한 더 많은 나라가 달러 대비 자국 통화를 평가 절하했다. 서구의 자본주의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은 러시아에서 확산하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불편한 파업과 시위보다 정치적으로 더 위험한 것으로 변해가는 파산한 동맹국들의 노동계급이 직면한 결핍과 빈곤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동맹국들뿐만 아니라. 194511월부터 1946년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파업 물결이 일어났는데, 이는 인플레이션의 급격한 상승으로 5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여했으며, 대부분은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았다. 미국 자본의 당면한 과제는 자국 경제와 동맹국의 경제를 모두 되살려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1948년에서 1952년 사이에 서유럽에 약 130억 달러를 송금한 마샬 원조는 "모스크바가 지휘하는 코뮤니스트 운동만큼이나 내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세계의 양극화로 인한 제국주의 분할, 냉전, 그리고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배경으로 했다.

     

    긴 호황

     

    세계 제조업의 최대 50%가 미국(8) 내에서 이루어지고, 달러가 국제 교환의 주요 통화인 상황에서 미국 자본주의는 새로운 자본축적 주기를 이끌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1960년 무역수지 흑자로, 미국의 GDP는 전 세계 총생산의 40%를 차지했다. 그것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재정 적자를 내는 것(특히 서독 수출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과 일본의 재건 덕분에 동맹국들이 곧 따라잡은 호황이었다. 새로운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한 세계 전쟁의 파괴로 탄생한 생산의 급증이 노동계급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오늘날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줄 가치가 있다. 흔히 '소비자 호황'으로 정의되는 이 호황은 전쟁 중에 계획된 국가 복지 조치 확대에 근거했고 노동자들이 '코뮤니즘(사실은 스탈린주의)'에 끌리고 본질에서 노동자들의 월급봉투에서 인출된 돈으로 지급되는 경향을 약화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병원과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영국에서 유명한 NHS), 국가 병가, 실업급여 혜택 및 실행 가능한 노령 연금 제도는 영국의 노역장을 중단시키고,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쇠약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일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한편,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이제 중등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소수가 대학 학계의 상아탑(생계 수당에 대한 수단 검증 보조금을 받게 됨)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능력주의의 부상' 이론이 생겨났다.

     

    전후 수십 년 동안은 매우 낮은 실업률(자본가들은 그것을 완전 고용이라고 불렀다)과 실질 임금의 상승으로, 노동자들이 점점 더 다양한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주택(및 고층 건물) 건설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주택 부족을 줄였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영국에서는 1954년까지 배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되었고, 1957년에 해럴드 맥밀런(Harold Macmillan) 총리는 "당신은 그렇게 좋은 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미국과 함께, 새로운 도로망 구축과 자동차 산업의 확장이 철도 보다 우선시되었는데, 특히 영국 전체를 연결하는 (수익성이 없는) 철도망이 자동차 산업의 확장을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축소된 영국에서는 더 그러했다. 60년대에는 1961년에서 1971년 사이에 민간 자동차가 거의 5백만 대에서 그 두 배인 1,000만 대로 증가하면서, 자동차 산업이 호황기임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자동차가 있든 없든, 많은 회사들이 휴가 급여로 여름 휴업을 시행하고 있는 가운데, 관광회사들은 '패키지 휴가'에 대규모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서 확장되었다: 캠프장에서 베니 돔(스페인의 리조트 도시)으로 전환하면서 많은 노동계급 가족들이 처음으로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보다 일반적으로 소비재 시장의 확대는 진공청소기에서 세탁기에 이르기까지 '노동 절약기'의 생산이 붐을 일으키면서 주부가 집에 머무는 시간을 단축했다. ‘완전 고용기간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하게 한 것이다. 이는 여성 고용이 증가했던 이전 시기(보통 전시)와 달리 자본주의 경제에서 서비스 지배와 60년대 말까지 여성 통제 피임법이 일반화되면서 열린 실용적 가능성을 반영하는 영구적인 추세임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호황이 영국의 노동계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블록의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했다. 프랑스에서는, 호황기를 영광의 30(1945~75), 이탈리아에서 일 소르파소(다른 모든 것을 넘어선 수십 년)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아메리칸 드림 속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가 그렇게 좋은 적이 없었다는 말을 들은 후, 영국은 역동적인 60년대로 향했고, 노동계급은 10여 년 동안 공식 및 비공식 파업에 돌입했다. 1963년에서 7년 사이에 매년 2~3백만 일의 근무일이 '손실'을 입게 되었고, 1968년에는 470만 일로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이 강력한 노동자들의 투쟁성은 결코 작업장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지 못했다. 호황이 시작되었을 때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브레튼우즈에 대한 미국의 배신: 장기 불황의 시작

     

    1971815,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협정의 핵심인 미국 달러를 금으로 직접 태환할 수 있는 고정 환율 시스템의 "일시적" 취소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사실상 달러는 국제 무역의 단위였다. 무역이 회복되고 서독과 일본과 같은 나라들이 국제 무역의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유로 달러 시장에서의 금융 회전 및 거래와 같이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 달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60년대 초에 미국 밖에서는 포트 녹스(연방금괴저장소)의 금으로 충당할 수 있는 금액보다 더 많은 달러가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60년대 말에 조금씩 상승하면서 점점 더 많은 달러가 금으로 전환되고 있었고, 온스당 35달러의 공식 금리가 아니었다. 그 시스템은 지속될 수 없었다. 미국은 이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출로 인해 재정 적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 미국의 무역수지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수치를 나타냈다. '닉슨 충격'은 세계 경제에 브레튼우즈 경제체제 종말의 시작을 알렸다. 1973년 닉슨이 금과의 고정 환율을 영구적으로 종료할 때까지 금 가격은 온스당 100달러에 이르렀다. 현재 가격은 약 1,900달러이다. 분명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금으로부터의 달러화 분리는 미 재무부가 달러를 마음대로 '인쇄'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주로 달러로 거래되는 상품 가격, 특히 석유 가격에 반등한 통화를 효과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과 유럽(주로 서독) 제조업체들의 원자재 비용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노동계급 소비재에 대한 서구 세계의 지속적인 가격 상승을 촉발했다. 70년대에 영국은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연간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했다. '닉슨 충격'의 주요 기획자는 존 코널리(John Connally) 재무장관인데, 그는 (로마에서 열린 주요 10개국 회의에서)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당신의 문제"라는 악명 높은 빈정거림으로 미국 수입품에 10%의 추가 요금을 부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 노동자들에게 90일 간의 임금 및 가격 동결을 강요하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의 노동계급은 세계의 다른 '선진국'과 그 너머에 있는 여타의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OECD 노동자의 G20 국민소득 비중은 1970~2014년 꾸준히 감소했으며, 미국 내 노동계급은 약 11%로 네 번째로 큰 감소를 경험했다. 이것은 현재 이른바 신흥 경제국을 포함한 세계적인 추세이다. (오늘날 전 세계 총생산에서 노동자의 비율은 약 50%로 추정된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결한 브레튼우즈 협정의 핵심 부분을 폐기한 것은 세계 자본 축적의 세 번째 주기에서 장기간에 걸쳐 하강하는 단계를 가져왔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소련의 붕괴와 전후 제국주의 분할이 얄타에서 합의되는 것을 보았으며, 현재 세계 GDP1/5을 겨우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것은 국제 금융과 무역의 지배적인 단위로서 달러의 역할 덕분에 최고의 지위를 유지해 왔는데, 달러와 금을 연계하는 것이 계속해서 유지되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석유를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거래하겠다고 위협하자, 미국은 1991년 이라크(사막의 폭풍 작전)를 침공한 다음 2003년에 더욱더 맹렬하게 이라크를 침공함으로써 직접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잠시 자본주의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미국의 패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2007~8년 자본주의 사상 최대의 금융 거품(이른바 서브프라임 위기)이 터진 데 이어 세계 경기 침체기에 중국 자본주의가 수요와 국제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개입한 이후에 끝났다.(9)

     

    오늘날 모든 사람은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계 노동계급에 중요한 것은 이 두 경쟁자가 같은 자본주의 체제 일부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웠고 수익성 위기에 직면하여, 착취율을 높일 방법과 수단(임금과 노동력의 일반적인 유지비용 이상으로 창출된 새로운 가치의 양)을 찾도록 전 세계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위기를 50년 동안 겪은 후에는 노동계급을 위한 '활력 있는 60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쇠퇴하는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이 연합한 세계 사회로 대체하는 대안을 우리는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데, 정말로 원하는가?

     

    2021, 815

    이레이너(ERay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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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데이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유용한 웹사이트(자본주의 경제의 미래에 대한 자유주의적 낙관론을 공공연하게 발전시키지만)ourworldindata.org참조.

     

    (2) 맑스, 그룬트리세, Pelican ed. 1973, p.748

     

    (3) 경쟁하지 않는 패권: 브레튼 우즈에서 금풀제(Gold Pool)까지 1945~60의 세계 경제 위기, Fitt, Faire and Vigier, p.74-77.

     

    (4) Eric Toussaint, cadtm.org 참조.

     

    (5)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발표된 "발트해의 스테인(Stettin)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Trieste)까지, 대륙 전체에 걸쳐서 철의 장막이 내려왔다"고 수사학적으로 선언한 5.3.46. 국가기록원 웹 사이트에서 주석이 달린 영인본을 이용할 수 있다.

     

    (6) 1947년 초 유럽에서 귀국한, 윌 클레이튼(Will Clayton) 국무부 경제부 차관의 각서에서 인용된 바와 같이, 106-7.

     

    (7) 보기를 들어, 벤 스테인(Benn Stein), 브레튼 우즈 전투, 프린스턴 발행 331 쪽 참조.

     

    (8) 추정치가 다르다. E.A. Brett, "전쟁 이후 세계 경제" (맥밀란)는 보수적인 "40퍼센트가 넘는" (63)이다.

     

    (9) "고뇌에 찬 18개월의 경기 침체기 동안에, 실업률은 10%에 달했고 GDP는 무려 4.3%나 줄어들었다. 경제는 파산한 은행들을 부양하고 충격을 받은 경제에 자본을 투입하기 위해 막대한 정부 부양 지출(15천억 달러 이상)을 한 후에야 회복세로 돌아섰다.” (history.com) 사실 그 추락은 미국이 추락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세계 경제는 아랍의 봄, 노동계급에 대한 '긴축'과 생산적인 투자의 추가적인 감소를 포함한 연쇄적인 결과들로 인해서, 불황으로 내몰렸다.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옮긴이 이명수

     

     

    <출처>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8-15/1971-2021-50-years-since-the-usa-reneged-on-bretton-w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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