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14호] 스탈린과 스탈린주의Ⅰ
  • 조회 수: 1921, 2022-07-01 11:17:23(2022-05-12)
  •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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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부르주아적 폄하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맑스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류 발전의 최종 단계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지만)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1) 필연적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동에서 이윤을 얻는 부르주아의 마음과 정신에 그러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와 이윤의 거대한 양극화 창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행성에서 온 이성적인 존재라면, 너무 많은 풍요의 한가운데에 지구상의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현재의 기근, 영양실조, 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절망적인 실패라고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의 비전은 평범한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잘 할 수 있고,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희소성이 끝나고, 사회 발전이 모두에 의해 계획되는 사회,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인류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탄생이 인류 선사시대의 종말이자 진정한 인류 역사의 시작을 나타내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 사회는 자본주의와 직접적으로 대조를 이루며, 계급과 사회 불평등, 국가와 전쟁, 민족과 국경, 착취와 화폐가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자연스럽게 맑스에게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비난을 하게 했다. 그는 착취 없는 사회에서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을 주장했는데, 이 사회에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은 억압적인 국가의 강제력 없이 함께 협력할 것이다.

     

    하지만 맑스가 노동계급에 그 목표를 명확히 이해시켰다면, 스탈린은 그 어떤 개인보다 그 열망의 가장 큰 무덤을 파는 자였다. 스탈린주의가 반()혁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지만, 우리가 자주 언급했던 스탈린주의 반()혁명1917년 이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었던 고립 과정의 마지막 절정이었다. 스탈린 사망 기념일은 자본주의 선전 기계가 스탈린주의 옹호자들이 언제나 부르기 좋아했던 현실 사회주의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괴물이었다는 메시지를 주입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기회에 불과했다.

     

    우리는 여기서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s)의 명백한 자본주의 선전이나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 학파의 학문적 반증에는 관심이 없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고용된 글쟁이들은 10월 혁명과 스탈린의 연속성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드러난 노동계급 사이의 논쟁이다. 그들은 스탈린주의가 러시아혁명의 논리적인 결과일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의 진정한 표현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계급, ()착취 사회 건설로 이어질 수 있는 일련의 사상을 거부한다.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맑스와 엥겔스의 경우 두 용어를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음)1930년대 소련에서 스탈린이 만들어낸 전체주의 체제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편리한 신화이다. 자기 계급의 진정한 역사를 모르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이 생겨나면서 자본주의 거짓말 기계는 그것의 결점이 무엇이든 간에, 자본주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체제일 뿐만 아니라, 가능한 유일한 체제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조차도 학계 언론과 정치 저널리즘의 모든 그늘은 러시아 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한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그들의 주요 무기는 1917년 혁명적 노동자들의 패배로부터 등장했고, 1990년에 결국 붕괴한 스탈린주의 체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10월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스탈린주의의 정반대와 동일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자식이라고 끊임없이 언급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미 증명된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스탈린주의와 러시아혁명의 퇴행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이러한 사건을 이해해야 하는 일반적인 분석 틀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틀은 맑스가 제공하고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강화에 부응하여 성장한 볼셰비키에 맞선 코뮤니스트 좌익 반대파가 발전시켰다. 맑스가 명확히 보여주었듯이, 생산력 발전과 그에 따른 노동계급의 성장 없이 사회주의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1917년이나 실제로 1925, 또는 1928년에 러시아에서만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규모에서 생산력 발전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은 1914년에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에 충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사는 세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과 시급성을 보여주었다. 1917년의 혁명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세계혁명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루어졌다.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전 세계적으로 정치 권력을 쟁취해야만 사회주의 생산으로의 이행기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행기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지속되는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후진성은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세계적인 과정에서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혁명의 실패는 이러한 희망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후진성은 맑스가 예상한 자본주의 발전 경로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1917년에서 1921년의 혁명적 격변이 붕괴한 이후 남아 있던 러시아 체제는 필연적으로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과제, 즉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수행했다. 이러한 발전이 19세기 유럽 자본주의의 경로였던 사적 자본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여전히 자본주의 발전이었다. 이 문서는 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고려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와 스탈린주의가 만든 야만적인 국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개념을 반박할 것이다.

     

    스탈린이라는 신화

     

    스탈린주의에 대한 문제가 너무 방대해서 하나의 짧은 기사로는 그것이 현대 혁명운동에 영향을 준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없다. (2003)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 기간 우리는 혁명가가 되고 싶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많은 젊은이를 만났다. 우리는 자신을 마오주의자라 주장하며, 스탈린이 비록 오류를 저질렀지만그가 사회주의를 만들었고발전시키고 소련을 현대화했다고 주장하는 남미와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압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실제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했던 모든 것은 명령경제의 마오-스탈린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사적 부르주아지가 없고, 세계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현대 국가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산업화라는 부르주아적 과제를 수행한 스탈린(그리고 마오)을 존경했다. 우리는 스탈린이 나중에 소련에서 추진한 체제의 종류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우선은, 이러한 젊은 마오주의자들을 위해, 그리고 실화를 연구할 준비가 된 다른 이들을 위해, 스탈린에 대한 소련 내 실제 기록을 그 자체로 살펴보겠다.

     

    우선 고립된 소련이 산업화해야 한다고 인식한 것은 스탈린만이 아니었다. 소련에서 모든 분파의 코뮤니스트당 지도자들 사이의 전체 논쟁은 사회주의의 선구자로서 산업 발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경제의 유일한 생산 부문인 소농계급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1920년대 초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회주의적 원시 축적”(트로츠키의 이전 지지자인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가 만든 용어임)의 재원 마련을 위해 소농계급에 대한 중과세를 주장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소농계급이 미래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사적으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신경제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른바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가 반대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논쟁(트로츠키를 ()산업주의자라고 매도한 것을 제외하고!)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지만, 1928년에 소련을 충분히 장악하여 자신의 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자본 축적이 일어난 농업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 스탈린은 집산화를 결정했지만, 트로츠키와 1920년대의 다른 주요 코뮤니스트들과는 달리, 그는 이것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단순히 세금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강제 집산화에 들어갔다. 그것은 완전한 재앙이었다. 수천 명이 총으로 위협받으며 집산화 되었다. 많은 농민(그리고 부농만이 아니라)이 농작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하고, 새로운 농작물 파종을 거부했다. 스탈린은 1930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프라우다에 성공의 현기증과 지역 관리들이 그 계획을 왜곡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 스탈린의 파렴치한 위선은 이러한 비극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았고,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가 동일한 잔인함으로 재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2년까지 농민의 60%가 콜호즈(집단농장)에 있었지만, 전체 농장 가축의 1/3에서 절반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과 혁명의 해 이래 처음으로 1925년 수확량이 1913년의 수확량을 넘어섰지만, 1934년에는 기근이 너무 심해서 보기를 들어보면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외부세계에서 들려오는 재앙 소식을 차단하기 위해 군사봉쇄가 도입되었다. 최소한 8백만 명이 처형, 기근 또는 강제 이주로 사망했다. 소련 농업은 이로부터 한 번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항상 소련 경제의 약한 고리였다. “맑스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인 스탈린이, 소농계급에 대한 레닌의 마지막 논설을 무시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그의 정책의 어리석음은 더욱 명백해진다. 레닌은 농민은 협업의 우월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나은 기계류를 농민에게 제공할 수 있을 때이고, 그것은 오직 유럽혁명이 성공해야 가능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레닌은 진정한 사회주의는 노동자 스스로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하향식으로 사회주의를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농업에 재앙을 가져왔다고 보는 우리가 소련의 산업화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해야 하는가? 심지어 냉전 시대에 쓰인 영국 교과서조차도 1945년까지 강대국 중 가장 낙후된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변화시킨 5개년 계획의 놀라운 성과를 지적하곤 했다. 이것은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성과가 어떻게 달성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5개년 계획은 군사적 전제에 바탕을 두었다. 1928년은 거짓 전쟁 공포(서방 국가들이 서로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탈린은 그들 모두의 공격을 예상했다)를 경험했다. 그는 왜 옛 러시아가 항상 패배했는지를 소련 시민들에게 질문했다. 대답은 경제의 낙후성이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 뒤처져 있다. 우리는 이것을 10년 안으로 단축해야 한다. 우리가 해내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짓밟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 사회 전체가 국가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소비재는 가게에서 사라졌고, 가장 기본적인 상품조차도 끝없이 줄을 서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배급제도가 도입되어야 했고, 임금은 삭감되었고 가격은 급등했다. 임금 격차는 사회 불평등이 서구의 불평등을 반영하는 지점까지 증가했다. 5개년 계획의 근간은 곡물을 수출하여 해외에서 기계 설비를 들여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다수 인구의 기아와 결핍이 이러한 자본 축적의 기반이었다.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강압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태업(怠業)자들을 체포하여 노동 규율을 강화하려는 시도 외에도, 많은 사람은 그들이 정말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으며, 현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믿었다. 가장 비참한 착취의 한가운데에서, 스탈린이 삶은 점점 더 좋아지고, 더 즐거워지고 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할 뿐이다!

     

    이 시점에선 개인숭배가 한창이었다. 1936년 프라우다의 한 시는 스탈린을 수백 만의 마음을 통해 반사되는 태양이라고 묘사했다! 1934년에 당은 현재 우리가 대부분 과장된 수치로 알고 있는 인상적인 목록을 들으며 제15개년 계획의 업적을 축하했다. 자본 축적과 산업 성장의 측면에서 실제 업적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승자의 당 대회는 더 큰 재앙의 싹을 가져왔다. 중앙위원회 선거는 스탈린이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면서 평소대로의 결과를 낳았다. 글쎄,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스탈린의 동지이자 레닌그라드의 인기 있는 당 대표 키로프(Kirov)가 더 많은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몇 달 후 키로프는 불만을 품은 전 코뮤니스트 청년 회원에 암살당했는데, 그는 재판도 받지 않고 의문의 총에 맞았다. 스탈린은 이제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1935년 스탈린의 옛 정치국 동지였던 카메네프(Kamenev)와 지노비에프(Zinoviev)는 첫 번째 공개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것은 아마 연루된 사람들 숫자에 있어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국가탄압의 물결을 촉발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코뮤니스트당원이었다. 명백한 경쟁자들은 제거되었다. 만약 (다양한 종류의 고문 후에) 그들이 터무니없는 혐의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면 그들은 공개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그들은 단순히 실종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또는 굴라크로 알려진)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의 과거 반대자들에서 멈추지 않았다. 나이 든 당원들은 그들의 알려진 견해가 무엇이든 간에 제거되었다. 역사가들에게 분명해진 것은 스탈린이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꿈꿔왔던 것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실제로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간부 그룹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만들었다. 스탈린 유혈사태의 젊은 수혜자들은 다른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들 중 15만 명은 숙청 아래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를 통한 승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들의 자녀들은 노동절이나 10월 혁명 기념일(117)에 여전히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언론이 묘사하는 것처럼 불명예스러운 코뮤니스트 체제의 슬픈 잔재가 아니다.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한 관계는 오직 그 무덤 파는 자에 대한 숭배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뿐이다.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이 수용소로 보내졌고, 대다수는 진정한 코뮤니스트였다. 그중 일부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와 트로츠키주의자의 정치적 선구자였다. 많은 사람이 굴라크에서 계속해서 저항하다 사망했다.

     

    이 비참한 대학살에서 스탈린의 결정적인 어리석음은 붉은 군대의 기존 장교계급을 거의 전멸 시켜 그의 5개년 계획이 공급하기로 했던 바로 그 방위군을 약화시킨 것이었다.

     

    스탈린의 외교정책 기록은 자신의 선전과 완전히 다르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스탈린은 자신을 최초의 원수라고 칭한 후 나치를 물리치는 데 있어 이른바 그의 군사적 기술을 위한 프랑코주의 칭호인 대원수를 자신에게 부여했다. 외교와 군사정책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이것이 단지 그의 자만심임을 보여준다.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하도록 하려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도는 먼저 스탈린이 나치와 1939년 악명 높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 점에서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다른 자본주의 권력보다 더 비난할 것이 없다. (스탈린의 반()파시즘에 속았던 모든 코뮤니스트와 노동자들은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수 있지만) 하지만 스탈린은 히틀러가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히틀러가 1941622일 소련을 침공했을 때 스탈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이틀 동안 방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정치국을 소집했을 때 스탈린은 그의 파행으로 해임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해임 대신 그는 지지를 받았고, 결국 침공 후 11일 동안 초토화정책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이미 죽거나 나치의 포로가 되어 나치 전쟁 기계의 노예 노동 수용소에서 학살당하는 길에 서 있었다. 스탈린이 1945년에 다시 돌아온 생존자들을 굴라크로 집어넣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범죄적 어리석음에 대한 증인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탈린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살아남았다. 실제로 모든 슬라브인을 열등 인간으로 간주한 나치의 인종 차별적인 대량 학살만이 소련 시민들을 조국 러시아의 방어를 위해 결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한 민족주의는 스탈린의 다른 정책들과 일치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스탈린은 1943년 영국 및 미국과 동맹의 대가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해체함으로써 세계혁명을 지원한다는 마지막 가식을 포기했다. 이것은 소련이 제국주의 세계 질서의 일부라는 것을 더욱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새로운 제국을 정복한 것은, 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믿었던 것처럼 국제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확장이 아니라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표현이었다.

     

    스탈린의 업적에 관한 사실은 너무 많다. 이것들은 실제로 스탈린 체제의 모델을 이용해 자국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제3 세계 민족주의자들(마오주의자들, 카스트로주의자들 등)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서구 제국주의와의 단절이 스탈린주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모든 민족해방투쟁은 불가피하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소련이 국제 사회주의의 공평무사한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이면에는 그들도 스탈린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시급하고 현대적인 문제로 눈을 돌려야 한다.

     

    생산양식

     

    우리는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서 마오주의자들 외에도 주로 대도시 국가에서 온 다른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 현대 세대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취를 알고, 자신을 ()자본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분명히 표현하지 않는다. 수백만 명이 전쟁에 반대해 행진하고, “세계화에 반대하는 젊은이 중에는 종종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과 같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 방식의 변화, 즉 생산양식의 변화만이 실제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의 착취에 의존하고 그에 의해 정의된다. 노동만이 자본이 자신의 용도에 따라 전유하는 가치를 창조한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노동을 전유하고 이 노동 자체를 상품으로 바꾼다.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상품이 무상으로 분배되고, 노동이 자유롭고 집단으로 제공되는사회인 사회주의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탈린주의는 한 번도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적이 없다. 만약 스탈린주의가 실제로 사회주의였다면 현존하는 세계 질서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어떠한 생각에도 반대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인륜적 범죄뿐만이 아니라 소련을 특징짓는 중앙집권적 통제경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바탕을 둔 사회에 대한 맑스의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의 부분이다. 스탈린은 일생 진정한 코뮤니스트들을 위한 물질적 지옥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산은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들의 뇌리를 악몽과 같이 짓누른다.”(맑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를 정치적으로 거부하는 것(보기를 들어,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가 그러는 것처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코뮤니스트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주의 정의를 재해석하는 것에 기초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코뮤니즘은 좋은지도자가 있는 국가 자본주의가 아니다. 코뮤니즘은 우리를 대신해 결정을 내리고 우리를 억압하는 어떤 국가의 개념 전체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코뮤니즘은 현재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보다 더 공정하고, 더 평등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스탈린주의로 변질한 러시아혁명 또한 우리에게 코뮤니스트의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소비에트 또는 노동자평의회의 설립은 대중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 어떻게 행정 기능과 입법 기능을 결합하면서도 사람들 다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기구가 있을 수 있을까? 소비에트는 수백만 명이 자신 일을 운영하는 데 참여할 방법에 대한 지표를 제공했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실패했지만, 그들의 실패는 계획되지도 않았고 필연적이지도 않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혁명의 원인과 궤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해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강령적으로 준비하는 방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혁명의 과정

     

    러시아혁명은 세계사에서 독특한 경험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국가에서도 권력을 잡은 적이 없었고, 191710월 러시아 노동계급의 승리는 짧은 몇 년 동안 전 세계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독일 노동자들이 패배했을 때(그리고 이것은 19213월 행동 이후 일어났지만,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세계혁명에 대한 전망은 희미해졌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 전복을 주도했는데, 이는 국제 노동계급의 다른 더 발전된파견대가 영감을 받아 러시아 노동자들의 선례를 따를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19173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는 유럽 국가 중 가장 후진국 중 하나인 농민 국가다. 사회주의는 그곳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 하지만, 농민 대중은 귀족들의 막대한 소유물을 모두 몰수할 정도로 불가피하고 성숙한 농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 그러한 혁명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 노동운동에 큰 자극을 줄 것이다.”

     

    이것은 맑스가 사망하기 1년 전 말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전통 농민공동체(미르)가 사회주의 조직의 기본형태가 된다는 주장은 오직

     

    러시아혁명이 서구 노동자혁명의 신호탄이 되어 둘이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면 말이다.” (E.H 볼셰비키 혁명2387, 펠리컨 판에서 인용함)

     

    하지만 1917-18년에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주요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붕괴 직전에 있었고, 러시아혁명이 더 서쪽으로 계속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곳에서 노동자 투쟁의 부활에 직면하여 빠르게 종결되었다. 1918년 세계혁명의 모든 개념이 신화”(사회당/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수치스럽게 공유한 견해)라고 주장한 (러시아 내전」 〔베를린, 2000의 저자 에반 모즐리Evan Mawsdley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가들과는 달리, 러시아혁명이 세계혁명의 신호일 뿐이라는 견해는 견고한 물질적 근거가 있었다. 1917년 프랑스군과 영국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918년 초에 독일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영국 정부는 19181월에 서둘러 선거권(모든 남성 노동자와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을 확대했고, 셰필드와 글래스고의 (노조)직장위원들이 배급제를 조직하겠다고 위협하자 1918년 여름부터 그것을 전국에 도입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베를린, 헝가리, 바이에른의 혁명은 군사적으로 진압되었고 리마에서 시애틀, 위니펙, 레드 클라이드사이드, 이탈리아 공장 점거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에 영향을 미쳤던 투쟁은 모두 무산되었다. 자본가들은 자국 노동자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서로 화해했다. 그들의 성공은 러시아 소비에트 실험을 고립시켰다.

     

    이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독특한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노동계급이 지역 지배계급을 타도했지만,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고립된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이전의 계급투쟁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전의 노동계급 경험에서는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엥겔스의 역사서 독일농민전쟁은 재세례파(Anabaptist) 지도자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의 딜레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극단파 지도자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사회가 그가 대변하는 계급의 지배와 그 지배가 의미하는 조치가 실현할 정도로는 운동이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를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언제나 다양한 계급 사이의 적대감의 정도, 계급 모순의 기반을 이루는 물질적 생존 수단의 발전 정도와 생산 및 상업 수단의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 그가 해야 할 일, 그의 당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역시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발전 단계와 그 조건에 달려 있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된 교리와 요구에 얽매여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는 그 순간의 계급 관계나 다소 우연한 생산 및 상업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운동의 일반적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관통하는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필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전의 모든 행동과 원칙과 모순되고, 당의 당면한 이익과도 모순되며,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당이나 계급이 아니라 당시 운동이 그들이 지배할 기회를 제공한 계급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운동의 이익을 위해 그는 다른 계급의 이익을 증진하고, 자신의 계급에 말과 약속, 즉 다른 계급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라는 단언으로 만족시켜야 한다. 이 어색한 위치에 놓인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잃는다.” (위에서 언급한 엥겔스의 책. 모스크바 1977, 115)

     

    볼셰비키와 러시아 노동계급 전체가 바로 이 문제를 정확히 경험하고 있었다. 상황은 경제문제에 절박했고 곧 군사 전선에서도 그러했다. 세계혁명의 확산이라는 생각은 모든 주요 볼셰비키들에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물질적 조건이 필요했다. 전후 세계가 안정되면서 역사의 흐름은 노동계급에 등을 돌렸다. 게다가 혁명당은 이제 대다수 사람이 문맹인 나라에서 국가를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적합하지 않은 과제였다. 이 모든 문제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반혁명의 실제 과정은 우리가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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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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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록 그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이것이 자연적으로 더 높은 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사회가 새롭게 건설되거나 아니면 계급투쟁이 경쟁하는 계급의 공동파멸로 이어질 것이다. 또는 훗날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공식으로 표현한다면 부르주아 사회의 붕괴에서 나올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준비와 계급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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