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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15호] 자본주의와 그 불만: 좌파주의의 여러 얼굴들
  • 조회 수: 2024, 2022-11-18 12:42:55(2022-08-22)
  • 자본주의와 그 불만: 좌파주의의 여러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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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누구도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경제와 국제 관계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류와 자연의 관계에서도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 특히 젊은이들은 현재 상황 속에서 더는 자신의 미래를 찾지 못한다.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와 코뮤니즘에 대한 오래된 탐구를 자연스럽게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용어의 의미는 항상 정치적 전쟁터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유토피아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

     

    19세기 초 자본주의가 아직 유아기였고 노동계급이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기 전,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이미 당대의 지배적인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상에 대한 이념적 도전을 하고 있었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 앙리 드 생시몽(Henri de Saint-Simon),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와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었다. 산업화의 공포에 대한 대응으로, 그들은 협동조합, 공동체, 신용조합, 상호원조 등을 통해 사회를 조직하는 대안적인 방법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당장 그곳에서 사회주의 원칙의 우월성을 보여주고 지배계급도 같은 관행을 채택하도록 설득하고 싶어 했다. 노동계급의 행동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이상에 기반을 둔 그러한 개혁주의적 실험은 내부 압력으로 붕괴하거나 단순히 자본주의 질서에 다시 흡수되는 등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러한 초기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기본 법칙이 여전히 적용되는 한 실질적인 또는 다른 어떤 것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최초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 기존 사회를 향해 쏟아놓은 다양한 비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보다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상주의적 과거를 받아들이면서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코뮤니스트 선언, 1848)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역사 유물론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자본가계급인 부르주아지가 봉건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어떻게 일어섰는지를 묘사한 후,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폐지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특별한 계급이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 없이 독특한 위치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력을 판매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결코 자본가가 획득한 새로운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착취가 모든 자본주의 이윤의 원천이다. 사회주의는 더는 미래 사회를 위한 종교의 종파적 환상이나 개인의 청사진 영역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지식에 기반을 둔 의식적 표현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동시대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코뮤니즘,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해방 시킬 수 있는 조건을 의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데 그들의 삶을 바쳤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그들의 선언은 대부분 제한적이고 부정적인 성격 :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연합체로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며, 국경, 국가, 임금 체계, 사유 재산 및 계급 구분이 폐지되며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이다.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그들이 분명히 밝힌 것은 오직 "현존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의 전복"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848년에 노동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일을 할 만큼 충분히 많지 않았고 또한 조직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후 20년 동안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은 현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발전에서 확실한 근거를 찾았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그 역사적인 임무를 구현해 내었다. 비록 72일 동안 지속되었고, 한 도시에 국한되었지만, 하늘을 강타하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비록 엄밀히 말하면 아직사회주의는 아니었지만)의 시도였다. “노동계급이 기존에 만들어진 국가기계를 단순히 붙잡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활용할 수 없다는 혁명사상을 확인한 것이다. (프랑스 내전, 1871) 코뮤니스트 사회의 창조를 향한 혁명 운동의 일환으로 국가는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1).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굉장한 비판을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시대마다 지배적인 사상이 지배계급의 것이었다면, 노동계급은 그들 자신의 착취 경험이 그들을 새로운 세상을 위해 정치적으로 싸우도록 이끌었을 때 비로소 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코뮤니스트 연맹, 1 인터내셔널, 그리고 후에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될 조직에 크게 기여를 한 이유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말은, 때때로 주장하듯이, 노동자는 정치적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단언은 아니었다. 이 말은 결국 제1 인터내셔널의 초안(1867)에 있다. 이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분파의 어떤 영향권 밖에서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직설적인 설명이다. 맑스와 바쿠닌의 추종자들 사이의 분쟁으로 분열된 제1 인터내셔널은 붕괴하였다. 그 자리에 맑스주의를 고수하는 사회주의 조직이 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1889년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이제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유물론적 역사 개념, 경제, 정치, 심지어 문학, 예술, 철학 등의 학문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자체적인 대중 정당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었다.

     

    모호한 사회민주주의의 경로

     

    유물론적 사상에 기반을 둔 혁명적인 정치 운동이 이제 노동계급을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보이는 것과 같지는 않았다. 당시 많은 이들이 알지 못했던 맑스와 엥겔스는 비밀에 부쳐졌고, 독일 당 지도부의 검열까지 받았지만,(2) 그들은 대부분 사적인 편지와 미발표 원고로 좌절과 비판을 표현했다. 1878년 이후 독일의 반()사회주의 법은 개혁파가 법의 테두리에 맞게 사회주의 강령을 수정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에두아르드 베른스타인 같은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이제 시민이 되고 경제 위기의 본질적인 경향은 없으며 자본주의는 단순히 사회주의로 진화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의 필요성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은 경제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동안, 당의 역할은 정치민주주의로 나아가도록 작업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수정주의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제2 인터내셔널의 혁명파에 의해 도전받았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 사회주의 변혁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개혁을 통해 순수하게 자본주의를 종식하는 길을 찾는 것은 같은 목표로 나아가는 더 느리고 평화로운 길이 아니라 그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었다.(3)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내부의 목소리가 국제주의 원칙 포기를, 식민주의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제국주의의 한 블록이 다른 것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레닌과 룩셈부르크는 주적(主敵)인 부르주아지가 국내에 있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들은 사회민주주의가 계급투쟁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도록 결속시킨 제2 인터내셔널 대회의 결의를 방어했다.

     

    1914년까지 제국주의 긴장, 경제적 압력, 노동계급의 전투성으로 인해 세계 전쟁이 지배계급이 선호하는 선택지가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시험대가 될 예정이었지만, 비참하게 실패했다. 2 인터내셔널의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카이저 전쟁 신용채권투표에서 찬성했고, 노동조합은 전쟁 활동에 대항하는 파업을 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이 운동의 혁명파가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로 차르를 몰락시킨 1917년 러시아혁명 덕분이었다. 그런 다음 노동자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마침내 제3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다. 볼셰비키는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혁명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 몇 안 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중 하나였다. 1905년 러시아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사상을 발견한 이후, 그들은 자본주의 의회의 가짜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계급의 대안으로 그들을 선전했다. 10월혁명 이후 첫 6개월 동안 그들은 소비에트의 수를 늘렸고, 선출된 대의원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노동계급 원칙을 도입했으며,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를 장려했다. 그것은 전 세계 혁명가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되었다.

     

    소련의 유산

     

    러시아혁명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 보기를 따라 전 세계에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다. 노동자평의회와 코뮤니스트당은 단결하고 조직하며 투쟁을 주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 헝가리와 핀란드와 같은 나라의 노동자들이 직접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폭력적으로 탄압받았다. 소련은 자본주의 유산인 경제 위기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국제 자본이 부채질하고 자금을 지원한 잔혹한 내전에 휘말려 들었다. 볼셰비키는 승리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경제 위기의 시기에 전쟁을 해야 할 필요성이 소비에트(그리고 실제로 당)의 통제 밖에 있는 적군과 비밀경찰 체카에게 무장한 노동자평의회의 민병 제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소비에트는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고 종종 집행위원회로 대체되었다. 1921년까지 혁명은 1917-18년의 희망적인 부분에서 벗어난 일당 국가가 점진적으로 등장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코뮤니스당 안팎에서 다양한 반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훨씬 더 많은 퇴보가 의제에 올랐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소련이라는 명칭을 붙였을 때, 초기의 혁명적 꿈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가 소련의 방어로 추진되고 있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회민주주의가 이미 "사회주의"의 의미를 자본주의 복지국가의 동의어로 변형하기 시작했다면, 1930년대에 소련은 "코뮤니즘"의 개념을 굴락(강제노동 수용소)에 연계시켰다. 독일혁명이 사회학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노동자정당"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회민주당에 의해 주로 격렬하게 짓밟힌 것이나, 스탈린의 숙청 기간 오랜 기간 혁명가들이 하나씩 제거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시즘은 "국가사회주의"라는 미명 아래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등장했다. 그때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대규모 산업화한 학살로 왕관을 쓴 세기의 자정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출현한 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19세기 말에 열린 제국주의 시대의 모든 국가에 내재한 국가주의 경향은 이미 더 새로운 중앙집권적 형태를 채택했다. 국가의 무장력은 체제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대중정당과 노동조합은 민족국가 배후의 계급을 더 효과적으로 동원하거나 억제하는 데 이용되었다. 스탈린주의 변종에서 자본주의의 어떤 범주도 근절되지 않았다. 이제 고용주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임금 노동은 계속되었다. 변함없는 것은 무급 노동의 지속적인 전용을 바탕으로 이윤과 성장을 도모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목표였다. 그것은 사회주의도 코뮤니즘도 아니었지만, 스탈린은 그것을 코뮤니즘으로 가는 단계인 "현실 사회주의"라고 교화시켰다.

     

    이 거짓말은 전후 호황이 펼쳐지면서 소련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945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미국)코뮤니즘”(소련)으로 나뉘어졌다. 소련은 이제 두 번째로 강력한 제국주의 블록의 선두에 서 있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거의 완전한 국가 소유를 전제로 한 자본주의 발전의 대안적 비전은 다양한 정권의 부르주아지, 특히 자본주의 주변부에 영감을 주었다. 이 가운데 중국과 쿠바는 소련보다 오래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가장 두드러지게 심어주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감옥과 망명지에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역사적 강령을 보존하면서 시류에 역행한 극소수, 그 중 코뮤니스트좌파의 이전 세대를 제외하고는이러한 스탈린주의 거짓은 20세기에 국가, 임금체계, 사유재산 폐지, 또는 계급 분열 없는 세계적인 협동적인 연방으로서 사회주의와 코뮤니즘의 비전을 진압하는 데 대체로 성공했다.

     

    우리는 다시 모두가 사회주의자다

     

    비록 자본주의의 전후 붐은 1970년대 초에 끝이 났지만, 1991년 스탈린주의 소련의 붕괴는 미국이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던 자본주의의 대안이 이제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2008년의 금융 붕괴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역사의 종말"과 최종적인 자본주의 승리에 대한 모든 서사를 잠재웠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잠재적인 대안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부채에 허덕이는 이 연약한 체제의 위기를 악화시켰을 뿐이다. 그것은 전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전쟁 기간과 다를 바 없는 신속한 대응을 해야 했다. 수조 달러를 시장에 투입했다. 그리고 특정 부문은 국유화되었으며, 노동자들은 해고되었고, 국경은 폐쇄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가오고 있는 환경 파괴의 위협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할 뿐이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회주의"를 그 해결책으로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모두가 이제 사회주의자다"라는 것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회주의의 의미는 종종 국가 통제, 노동조합주의, 노동자자주관리, 그리고 세계의 서열에서 덜 강력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정권에 대한 "()제국주의" 지지로 축소된다.

     

    한편으로 유토피아 사회주의가 남긴 자국이 있다. 오늘날 낡은 것의 껍데기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은 이른바 '예상하는 정치'를 이끄는 동기로 남아 있다. 그것이 작은 사회 중심이든, 스쿼트(squats:무단거주)이든, 협동조합이든, 또는 더 큰 자치 공동체(사파티스타, 로자바 등)이든, 좌파 자유주의와 특정한 형태의 아나키즘은 임금체제나 자본주의 국가를 제거하지 않고, 억압받는 소수가 그 체제 내에서 자신의 틈새를 개척하면서 세상이 점진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환상을 퍼뜨렸다.

     

    그 다음에 동구권 붕괴 후 바로 태어난 세대가 주도하는 스탈린주의의 부활이 있다. 그것이 자유주의적 감수성을 뒤엎는 것을 목표로 한 급진주의의 유치한 캐리커처로 봉사하는지, 아니면 "현실 사회주의"라는 군사적 그리고 산업적 "업적"을 더 심각하게 방어하는 것인지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는 전체 역사에서 많은 노동계급 운동을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노동 착취에 기반을 둔 정권들에 대한 선전이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는 수치심에 죽지 않았다. 혁명적 노동자 학살을 도왔던 끔찍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노동자들을 위해 점점 더 인간적으로 불평등해지는 자본주의를 관리하려는 추구에 의해서 이끌리는 "실용적인" 추종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사실 동일한 정치에서 선거 기반을 찾기 위해 노동계급(노동자들이 충분히 투표하지 않음)을 대부분 포기했으며, 그것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구·신좌파 정당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욱 절박한 좌파들은 현재의 위기가 공공 지출에 대해 제레미 코빈과 버니 샌더스 같은 사람이 옳다는 것을 적어도 증명했다고 위안으로 삼는다.

     

    이론적으로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양자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트로츠키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것의 모집 전략, 입당주의, 그리고 다양한 국가들의 방어를 통해 그들이 변형된또는 퇴보한 ()제국주의양자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사실, 트로츠키는 스탈린 치하에서도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사회주의로 향하는 진보적인 조치(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견해를 항상 고수했다. 그 부분에서 유일하게 잘못된 것은 그것을 관리하는 개인이었다. 전쟁의 참모 총장으로서 트로츠키는 다른 볼셰비키들보다 더 많이 진정한 노동자 운동의 무장 단체인 민병대를 대체하는 상비군을 기반으로 한 국가의 창설을 장려했다. 그리고 대중 운동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모색은 트로츠키주의가 정직하지 못한 사회민주주의 조직으로 진입을 시작하게 했던 1930년대 그의 유명한 "프랑스 전환"으로 그를 다시 사회민주주의로 이끌었다.

     

    조직화한 좌파의 영역 밖에는 다양한 좌파, 사회민주주의,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 그룹이 아직 존재한다. 다양한 학계, 대안 매체와 인터넷 개인들로부터 무작위로 빌린 생각을 재현하는 더 많은 가상 영역이 존재한다. 리처드 울프(Richard Wolff), 마이클 파러티(Michael Parenti), 자코뱅(Jacobin), 노바라 매체(Novara Media) 또는 랜덤 유투버와 같은 것을 여기서 면밀히 분석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과거의 아이디어들을 재활용하고 쇄신한 것이라고만 말해두자. 그리고 자본주의 위기는 이러한 빠른 해결책을 위해 수익성 있는 분야를 제공한다. 이 정당에 투표하고, 이 조직에 가입하고, 이 탄원서에 서명하고, 이 제품을 구입하고, 이러한 대의에 기부하라, .

     

    노동계급이 핵심이다.

     

    이런 맥락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사상이라는 시장에서 또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과 그 부속물을 통해 통합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좌파의 흐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그들 자신을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발표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인 원인이나 운영방식이 아닌 그 영향에 대해 크게 의문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금융화된 그리고 투기적인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인, 현 국가 내의 대안이다.

     

    우리는 자본의 좌파와 토론을 통해 그 추종자들이 우리 대열에 합류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임금노동자들 스스로 집단적인 저항을 조직하는 계급투쟁의 부활이다. 우리가 지금 그런 부활의 시작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일반적으로 구()자본주의 심장부에는 아직도 노동조합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동계급이 있는데, 노동조합은 공정한 하루의 노동에 대해 공정한 하루의 임금조차 우리 모두에게 제공할 수 없다, 게다가 기껏해야 우리 중 일부는 "덜 나쁜" 단기간의 해결도 할 수 없다. 한편 자본주의 주변에서 우리는 폭발적이고 때로는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대체로 자발적인 성격의 집단적인 투쟁을 목격하고 있다. 여기서 주요한 보기에 해당하는 나라는 아마도 이란으로, 수년간의 파업과 시위에 이어 노동자들은 이제 진정으로 스스로 투쟁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인 "투쟁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란이 계급의식을 가진 반()자본주의 운동의 도화선이 되든 아니든 간에, 어떤 운동이든 다른 여타의 세계의 국가를 위한 등불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직 형태(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처럼)뿐만 아니라 더 넓은 정치적 목표(비록 즉시 달성할 수 없고, 소수만이 목소리를 낼지라도), 정치적 도약이 있어야 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이러한 도전 없이는 코뮤니스트 강령은 여전히 국가 통제가 코뮤니즘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라는 환상에 의해 지배되는 "흥미로운 사상"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방어하는 사상, 즉 지난 2세기 동안의 투쟁에서 얻은 교훈의 연속적인 공통의 주제는 미래의 운동에 복무하기 위해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모든 독자를 초대하는 국제적인 차원의 집단적인 토론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일관성 있는 집단행동은 있을 수 없다.

     

    202112

    다이즈버즈(Dyjbas)

     

     


    <>


    (1)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1-03-18/1871-2021-vive-la-commune


    (2) 많은 보기가 있다. 마지막은 1895년 엥겔스가 폴 라파르그에게 항의하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독일어판 도입부를 새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였다.


    리프크네히트가 방금 나에게 멋진 속임수를 썼다. 그는 맑스의 1848-50년 프랑스에 대한 저작 중 내가 쓴 서문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력과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 전략을 지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인용했다. 특히 베를린에서 강압적인 법이 준비되고 있던 당시에, 그는 얼마간 이를 설파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전술들을 단지 오늘의 독일을 위해서 설파하고 있으며, [그들은] 내일이 되면 적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맑스-엥겔스 저작선, op. cit. p.461, 원문에 강조)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팸플릿 계급의식과 혁명조직4(위의 추가 읽기 목록 참조)을 참조


    (3) 베른슈타인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그들은 당시 "맑스주의의 교황"으로 여겨졌던 카우츠키의 지지를 받았지만, 카우츠키는 사회주의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이기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때까지 노동자들은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서 연합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로 보지 않았고, 상황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전쟁에서 평화주의를 옹호했다


    (4) 우리는 이것에 대해 수많은 기사에서 다루었지만, 최근 1971-2021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미국이 브레튼우즈를 배신한 지 50, 브레튼 우즈의 종말 : 동시대의 분석

     

    202233일 재발행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 이명수

     

    <출처>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2-03-03/capitalism-and-its-discontents-the-many-faces-of-lef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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