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15호] 스탈린과 스탈린주의Ⅱ
  • 조회 수: 2176, 2022-11-18 09:59:11(2022-09-01)
  •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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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전과 제국주의 개입

     

    낙후된 농민 경제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는 문제에 대한 레닌 초기 해결책은 곡물 독점이었다. 627일 전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주의 상품 교환에서 사회주의 생산물 교환으로 점진적 이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R.W. 데이비스 사회주의 공세2쪽에서 인용)

     

    1920년 말 내전이 끝났을 때도 레닌은 곡물의 강제 몰수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기근과 1920~1921년 겨울 농민 불만과 노동자 파업 증가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레닌 자신이 인정했듯이 볼셰비키는 경제 전선에서 퇴각을 선언해야 했고, 노동계급 투쟁 급증이 그들을 구할 때까지 버티려고 노력해야 했다. 신경제정책(NEP)은 농민 생산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곡물의 자유(자본주의) 시장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이른바 전시 코뮤니즘시기 비상 정책(화폐폭락, 배급에 의한 분배)이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희망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그리고, 부하린은 레닌이 따뜻하게 평가했던 책, 이행기 경제에서 이것을 주장했다), 근본적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 생산양식을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1917년 레닌이 러시아 경제 일부를 국유화 하고자 요구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 도입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 조치...”1)

     

    사회주의의 하향식 도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레닌은 사회 변혁은 노동계급 대중이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이해했다. 이것은 단지 기존 자본주의 정치 질서를 전복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여기서도 레닌은 볼셰비키가 블랑키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소수가 스스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거나 장악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이것이 레닌이 19177월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던 이유다.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중심인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19179월 이후에야 레닌은 케렌스키 정권의 전복을 주장했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191711월에 수립된 체제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또는 노동자 국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장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소비에트 체제의 주권 강조이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의 수립이 사회주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사회주의는 법령으로 시행될 수 없기”(레닌) 때문이다. 레닌은 혁명이 사회주의에 도달하려면 국제적으로,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 계급의식 측면에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쪽 전선에서 1917년의 혁명적 희망은 1921년에 깨질 것이었다.2) 국제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가 군사적으로 승리한 내전으로 인해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기반이 무너졌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어떻게 소비에트가 빈껍데기가 되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다. 1921년까지 1917년 공장 노동자의 57%가 붉은 군대에 입대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시골로 돌아가기 위해 공장을 떠났다. 이때 레닌이 말했듯이

     

    우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의 대표자이다.”

     

    그 자리에 코뮤니스트당이 생겼다.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에서 이제는 거대한 관료기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천 명의 당원이 있을 때조차도 야코프 스베르들로프(Jakob Sverdlov)와 두 명의 비서가 한 사무실에서 운영한 혁명당은 점차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1919년 스베르들로프의 사망은 한때 혁명적이었던 당의 통치기구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저항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1922년 스탈린이 당 총서기가 되었을 때,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당 독재로 넘어갔다. 내전은 또한 상황을 바꿔 놓았다. 그것의 악랄함은 소비에트 실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단순히 옛 혁명가들이 무자비한 국가 관료가 되도록 강요했다. 아무도 이 오염을 피하지 못했다. 10차 당 대회의 분파 금지 결정은 콜론타이(Kollontai)와 슐라프니코프(Shlyapnikov)노동자 반대파와 같은 코뮤니스트 좌파 반대파, 사프르노프(Sapronov)와 오신스키(Ossinsky)와 같은 민주 중앙집중주의자, 그리고 미아스니코프(Myasnikov)노동자 그룹과 같은 다른 그룹들을 겨냥했다. 이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진정한 양심이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이미 당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21~1928년 사이에 분파 금지가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1921년의 결정은 스탈린이 독재자로 부상할 수 있도록 나중에 사용할 또 다른 무기를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부 볼셰비키는 당이 나아하는 방향에 분명히 관심을 보였고 혁명적 노동계급(지금은 소수가 됨)에서 당의 뿌리가 상실되는 것에 대해 걱정했지만, 지노비예프(Zinoviev)와 같은 다른 볼셰비키들은 심지어 당 독재가 좋은 일이라고 선언했다.3) 이러한 차원에서, 스탈린의 기관 통제는 그가 총서기를 맡았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말년에 레닌은 혁명의 퇴보와 스탈린의 부상 위험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그는 노동자농민 감독관인 라브크린(Rabkrin)을 체제에서 최악의 운영조직 중 하나로 비판했다. 이 조직의 수장은 스탈린이었다. 마찬가지로 레닌의 마지막 저술에서 그는 스탈린이 총서기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의 추가 쇠퇴와 죽음만이 스탈린을 구했는데, 1924년까지 트로츠키를 권력에서 제거하기 위한 당내 투쟁으로 지노비예프가 중앙 위원회에서 그를 옹호하면서 레닌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레닌은 말년에 관료화 과정이 1917년 초기의 혁명적 희망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뮤니스트당은 더는 혁명적 노동계급의 전위가 아니었다. 그 계급은 이제 수천 명의 출세주의자로 부풀려졌고 그들 중 대부분은 차르의 전직 관료였다. 내전 동안 러시아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은 그들을 받아들였다. 레닌은 19223(11차 당 대회에서)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에 보낸 마지막 생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거대한 관료 기계, 그 거대한 무더기를 취한다면 우리는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들이 그 무더기를 지휘하고 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받고 있다.”

     

    코뮤니스트당이 이제 사실상 국가 기구였기 때문에 레닌은 기본적으로 심각한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탈린을 총서기에서 해임하라는 그의 유명한 요구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레닌은 일반적으로 당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집착했다(공안질서수호국[Okhran] 요원 말리노프스키[Malinovsky]가 문서를 보여줄 때까지 경찰 스파이였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또한 볼셰비키가 191710월에 케렌스키를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세상에 알린 것도 용서받았다. (주로 레닌이 말했던 파업 파괴에 대한 많은 지지를 받았던 볼셰비키는 무관했기 때문에) 하지만 스탈린을 제거하라는 요구는 총서기직에서 그를 해임하라는 요구였다. 왜냐하면 그를 정치국에서 제거하지 못할 만큼 그는 과도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마지막 유언에서 여전히 혁명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집단지도체제 구성을 바랐다.

     

    그러나 지노비예프가 트로츠키에 맞선 분파를 만들기 위해 당에 레닌의 충고를 무시하라고 요청하면서 분열은 이미 일어났다. 스탈린은 지역 당서기를 임명하여 중앙위원회에 누가 선출될지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기구가 지도부를 선출함에 따라 레닌이 경고했던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스탈린은 여전히 소수의 대의원만을 통제했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했지만, 과반수를 차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제

     

    만약 반()혁명이 정치영역에서 진행 중이라면, 경제에서도 긍정적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이, 볼셰비키가 생산양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전시 코뮤니즘기간에도 노동계급은 더는 자신의 기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른바 1918년 공장위원회 탄압은 사실 생산을 더 잘 조정하기 위한 더 강력한 집중화에 대한 그들의 제안이었지만, 1인 경영(정부가 임명한 경영자를 이용한) 부활, 미국에서 노동력 착취를 강화하는 테일러주의 경영 관리법 채택, 부르주아 전문가에 대한 임금 인상 등은 모두 심각한 후퇴 증거였다. 확실히 이러한 후퇴는 계획적인 오류라기보다는 상황의 산물이었지만, 그런데도 후퇴로 남아있다. 1920년에 이르러 하향식 장치가 되어 트로츠키 자신이 노동의 군사화를 제안했을 때 백군과 제국주의 지지자들에 맞서 내전에서 승리한 방법을 사용할 것을 주창했다. 이 모든 것은 19213월 적어도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이 신경제정책을 채택하도록 강요하기 전에 일어났다. 신경제정책 골자는 소부르주아 생산에 대한 양보였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무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경제정책이 정확히 후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농업국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미래에 사회주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소련의 분위기는 스탈린 시대와 달랐다. 볼셰비즘의 지지자가 아닌 알렉 노브(Alec Nove)1920년대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20년대는 지적으로 흥미진진한 시기였다.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뛰어난 웅변과 재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볼셰비키가 아닌 사람들이 상당히 독립적인 발상을 제안했다. 국가계획위원회(GOSPLAN)와 인민경제최고위원회(VSNKh) 전문가에는 많은 옛 멘셰비키가 포함되었는데, 훗날 음모 및 사보타주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로만(Groman), 바자로프(Bazarov), 긴츠부르크(Ginzburg)와 같은 사람들은 정책토론에 크게 기여했다. 보기를 들어 저명한 경제학자 콘트라티예프(Kondratiev), 농업 전문가 차야노프(Chayanov), 첼린츠셰프(Chelintsev)와 같은 옛 인민주의자들과 전 사회혁명당원(SR)또한 활동했다. 리토스셴코(Litoshenko)와 커틀러(Kutler)와 같은 비()사회주의자들조차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일당(一黨) 국가가 있었고, 조직과 반대의 법적 수단은 없었지만, 조건은 획일적인 1930년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경제사, 펭귄 출판사, 1992, 131)

     

    1920년대 볼셰비키당원들 사이의 논쟁을 연구하는 사람은 비극의 목격자이다. 정권이 세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과 글이 넘쳐났지만, 고립이 가중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코뮤니스트 개인의 의지는 크게 흔들렸다. "원시적 사회주의 축적"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조차 외부 자본 없이는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돌이켜 보면(, 그들의 경험)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현실은 역사가 가만히 있지 않고 한 번의 후퇴가 곧 다른 후퇴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스탈린은 당의 완전한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계책을 부렸다. 그가 행한 수단 중 하나는 세계혁명이라는 원래 목표를 포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소규모 공장은 개인 소유로 돌아갔지만, 주요 변화는 곡물 시장의 재건이었다.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농민의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프롤레타리아트로서 소비에트 정부는 많은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레닌은 공개적으로 그것을 후퇴라고 묘사했지만, 이 늦은 단계에서도 세계혁명이 이 상황을 구할 것이라고 여전히 기대했다. 몇 달 후 그는 혁명의 물결이 끝났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고립에서 벗어나기까지 몇 년, 심지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대신 신경제정책은 국가자본주의 제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레닌은 "국유화""사회화" 라는 용어의 혼동을 비난했지만, 레닌이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 사이에서 제기했던 이전의 반대 또한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두 용어는 동의어가 되었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강령을 부활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이 혼란은 핵심 쟁점이다.

     

    러시아혁명이 러시아의 생산양식을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기가 항상 어려웠다. 일부 사람들에게 "전시 코뮤니즘"(1918-21) 동안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소농의 소유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크게 확대되었을 때였다. 자본가들은 모두 도망쳐서 공장을 프롤레타리아트(그들이 사회화하기 시작한)에 버렸을지도 모르고, 화폐는 그 가치를 잃어서 배급과 물물교환이 일반적인 교환수단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체제가 생존하기 위한 이러한 긴급조치가 사회주의 건설 시도라고 추정하는 것은 착각이었다. 사회주의는 생산력이 물질적 풍요를 창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만 올 수 있다. 1918년 러시아 경제의 붕괴 상태는 너무 심각해서 한 역사가는 적어도 1347년의 흑사병에 비유했다.

     

    다른 사람들은 스탈린이 계획경제를 시작할 기관(국가계획위원회, 국영은행 및 인민경제최고위원회가 보다 직접적인 국가 기구로 전환된 시기)이 작동하기 시작한 신경제정책 시기(1921-8)를 지적한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많은 볼셰비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착취"로 불리지 않았다. 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실업률은 대략 노동계급의 약 25%로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 상승에 따라 하락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팔기 전에 내야 했던 "현물세"가 화폐세로 대체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화폐개혁이 수반되었다. 국영은행은 이제 새로운 질서의 독점 금융자본가가 되었다. 다시 한번 이것의 주요 희생자는 노동계급이었다.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차이가 가장 명백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실제로 지배적이고 정치적으로 통제한다. 소비에트가 확장하고 기능하던 1918년에도 어떤 의미에서도 이것은 러시아에서 단일 국가(따라서 볼셰비키가 국제주의를 고집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와 같은 슬로건 채택은 분명히 맑스주의자들이 항상 이해해왔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의 폐기를 의미한다. 건설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혁명에 대한 진정한 전망이 희미해지면서 소련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볼셰비키 지부의 많은 사람이 신경제정책이 계속된다면 러시아는 소부르주아 자본주의 생산자들이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경제의 생산 부문(농민)에 대한 과세를 통한 국가자본의 느린 축적만이 이후 산업발전의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후진성이 논쟁을 지배하면서 핵심 질문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아니라 러시아를 어떻게 산업화시킬 것인가로.

     

    스탈린은 진지한 공헌자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에서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1924레닌주의의 기초라는 강연에서 일국사회주의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처음 제기했다. 이 작업은 레닌 사상을 단순화한 것이지만, 세계혁명 이외의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또한 담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당 전체가 처한 혼란을 반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세계혁명의 미래와 러시아 발전에 대한 논쟁에서 거의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모든 분파 사이에서 중심에 서는 것이었고, 항상 다른 분파를 좌파”, “우파또는 통합파”, 반대파로 묘사했다. 지노비예프와 같은 사람들이 한때는 격렬하게 반()트로츠키였다가, 다음에는 친()트로츠키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자신을 분파 위의 당원으로 묘사할 수 있었고, 또한 점점 더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때까지 소비에트가 공식적으로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생각은 당 국가에서 실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 기억이 되었다. 당이 더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관료적 통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선 지노비예프가 도입한 것이다. 심지어 트로츠키조차도 누구도 당에 맞설 수 없다라고 외쳤는데, 이는 스탈린이 청중들에게 좋은 레닌주의방식으로 당이 실수하리라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게 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당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 대부분 무시되었던 분파 금지에 관한 1921년의 결의안은 스탈린에게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의 대의원에 대한 지배가 커짐에 따라 모든 반대자는 정치국에서 투표권을 박탈하고, 정치국을 오르조니키드제(Ordzhonikidze), 카가노비치(Kaganovitch), 몰로토프(Molotov) 및 미코얀(Mikoyan)과 같은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AD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 이형로

     

    <>

    (1) 선집2(모스크바 1977) 51쪽 인용,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2) 국제주의 코뮤니스트21, “1921: ()혁명의 시작참조

    (3) 이 주제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8, “러시아혁명의 쇠퇴와 당 숭배참조

     

    <출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22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03-08-01/stalin-and-stalinism



    <이전 글>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2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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