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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 글씨] 계급의식과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당의 역할에 대하여 - 이형로
  • 조회 수: 5007, 2013-09-07 09:38:25(2013-04-30)
  • 계급의식과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 당의 역할에 대하여

    이형로|국제코뮤니스트전망 회원

     

     

    들어가며

     

    최근 노동자들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노동자계급’, ‘노동자정당’이라는 단어는 정작 본인들에게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정치, 자기 일이 아니라 누가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통진당 사태, 민주노총의 무능, 진보정치의 파산이라는 이야기가 불편하게 들려오지만 자기 일이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는 집단들이 저지른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의 본질을 파헤치고 원인을 따져 묻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 그만이다.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노동자계급정당, 사회주의노동자당, 노동자혁명당, 혁명적 노동자당……. 2013년의 춥고 배고픈 겨울을 앞둔 노동자들에게 진보와 노동자당은 먹고사는 것과는 반대로 과잉되어 있다. 게다가 이들의 차이가 사람의 차이인지 노선의 차이인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그들이 대중 앞에 내건 이름이 무엇이건 그들 모두는 본질에서 진보적이지도 않고 혁명적이지도 않았다. 부르주아 정치의 왼쪽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 말고는 부르주아 정치와 어떻게 다른지, 어디부터가 진보인지, 개혁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인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단지 당의 이름과 강령이 시류에 따라 바뀌는 것과 이들의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점일 뿐이다.

     

    한편, 이렇게 모호한 진보를 넘어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은 진보정치가 파산하는 동안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기는커녕 어느 순간 노동자계급정당의 뒤에 숨어버렸다. 국가보안법의 탄압에도 공개적이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사회주의 정치와 혁명강령은 노동자계급의 무기가 되지 못하고 어느 정파 조직의 문서창고와 작은 책 속에 갇혀 버렸다. 이들은 이제 대중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사회주의를 숨기는 것을 넘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운동을 하고 나섰다. 십수 년 전의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카드를 다시 꺼내 들고 사회변혁과 계급 중심성을 기조로 이른바 현장활동가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자신들조차도 사회주의에 당당하지 못하면서 단지 파산한 진보정당의 반정립으로 노동자들에게 정치의 주체로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과정에 함께했던 자신들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아무런 성찰도 반성도 없이 여전히 낡은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당을 만들자는 당위만 있을 뿐 어떠한 당을 누가 만들지는 말하지 않는다. 당의 주인이라는 노동자계급과 계급의식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와 고통 속에서도 왜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는가? 왜 자신들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가에 대해 답해주지 않으면서, 당을 만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환상을 불어넣기에 바쁘다. 당의 이름은 과잉되어 있지만, 노동자계급에 진정 필요한 당은 여전히 빈곤한 상태이다. 당 건설을 말하기에 앞서 계급 전체의 과업과 당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 당과 계급의 관계, 계급의식과 당의 역할에 관해서는 토론조차 되고 있지 않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당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 투쟁에서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가들과 맞설 수 있는 스스로의 무장, 즉 계급의식을 갖는 일이다.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자기해방은 당을 포함하여 어떠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갖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투쟁하는 노동자가 자신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하게 인식하려면 먼저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과 부르주아 의식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이글에서는 공산주의 운동의 최종목표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우선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계급의식.JPG 

    1.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사회주의의 달성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배 확립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효과적인 정책은, 생산력 발전의 결과물로서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발생하는 운동들과 변화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야만 한다. 이 정책은 또한 동시에 그리고 같은 수준에서 “머릿속에서” 즉 이러한 과정들에 예속되어 있고 실제로 그러한 과정들을 수행하는 인간들­다른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온 사람들, 직업.나이.성별이 다른 사람들-의 심리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계급의식 개념은 사회주의 운동과 그 정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나라의 피억압 주민층이 “계급 의식화” 되는 것이 현 사회체계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키는 가장 긴급한 전제조건이라고 크게 강조되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이 경제적 사회적 과정의 효과 아래서 혁명이라는 사회 행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도록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미한다.(빌헬름 라이히, 사회실천연구소/윤수종 옮김,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실천 4~5월호], 2007)


    비록 짧았지만, 사회주의 건설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현실에서 목격된 러시아 혁명 이래 계급의식의 문제는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사회주의의 왜곡과 세계혁명의 패배 속에서 묻혀버렸지만, 여전히 혁명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는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의식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트 자기해방을 위해 필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구분하는 것은 이데올로기 일반으로부터 계급의식을 구분하는 것이다.”(국제공산주의흐름, [공산주의 조직과 계급의식], 빛나는전망, p.35)

     

     우리는 생산력의 엄청난 발전이 공산주의 혁명의 물적 조건을 만들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이데올로기도 함께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내부모순 심화로 공산주의가 가능성을 갖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또한 과거 사회에서부터 발전해 온 이데올로기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과거 이데올로기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사회적 위기와 고통 속에 살고 있고,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사회혁명을 담지 한 계급이라는 객관적 존재이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

     

    폴 매틱은 생산력과 이데올로기가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생산력이란 무엇인가? 명확하게는 노동, 기술 그리고 조직이며, 덜 명확하게는 계급충돌, 그렇기에 이데올로기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산력은 인간의 행동이며,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전의 발전경로를 반드시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이전에 건설된 것들을 사회적 상황이 저지할 수도 있고, 이를 파괴하는 조건들이 창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사회적 목표’가 이전의 발전 경향의 확장과 지속이라면, 역사는 진정 생산능력의 전개를 통한 ‘사회적 진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폴 매틱, [자발성과 조직], 1977, http://libcom.org/library/spontaneity-and-organisation-mattick)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발전은 인류의 지적 발전기간 전체에 기초한다. “의식은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은 의식의 발전에도 적용된다. 즉, 생산력의 발전 단계는 사회이데올로기의 발전에 반영된다. 인간이 생존수단을 생산하고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의식의 수준은 물질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간이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 자신과 다른 것과의 관계에 대해 의식하는 능력의 향상을 보여주었고, 이와 함께 생산력도 발전되었다. 따라서 의식은 생산력 발전의 산물이며,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과 공산주의 혁명은 이 성장을 더욱 풍부화 시킬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의 출현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가는 이 권력이 바로 국가”라며,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는 국가의 기원을 말했다. 사회조직이 공동체 전체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던 원시공동체 사회를 지나,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와 내적 모순에 의해 분열된 사회에 와서는 사회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사회 위에 군림하는 일련의 법과 규칙을 채택해야 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구조와 연계된 사회이데올로기가 착취하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고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즉, 공동체 사회에서 삶의 언어의 한 표현이었던 이데올로기가 계급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정치적 상부구조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동시에 나타났다. 지배계급은 사회가 계급으로 분리된 것을 정당화했고 영원한 것이라 강요했다. 착취는 은폐되었고 특권을 가진 소수 이해관계는 마치 전체 사회의 이해관계와 사회발전을 위한 것처럼 포장되었다. 이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을 둔 경제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사회이데올로기로 표현한다.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경제 권력인 생산수단과 물리적 힘을 가진 지배계급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수단들까지도 함께 소유한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은 경제적 하부구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체제에서 경제적 권력이 전혀 없고, 새로운 착취형태의 확립을 목표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었을 때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계급이 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의 영속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도록 강요당할 어떠한 경제적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록 그들이 원할지라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계급의식의 정치적 성취물은 그것이 절대적인 사상으로, 이데올로기로 굳어버리는 순간, 그 혁명적 성격을 잃고, 부르주아적 편견의 혼잡한 체계들로 통합되어 버린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새로운 착취체제와 착취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 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과는 무관하다. 단지 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은 현실에서도 미래에도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는 조건을 마련해야 함은 물론 공산주의 사회 건설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의 차이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하면서 보존하려 한다. 권력에서도 착취계급은 착취체제를 신비화시키고 영속화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는다. 부르주아지는 권력을 누리면서 다수의 소외를 즐기고 자신의 권력의 실체를 인식한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은폐하고, 사회관계의 역사성도 가린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현실은 부르주아지와는 전혀 다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현실에 대한 자기만족과 유지가 아니라 그것에 반대하여 저항하도록 한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를 규정하는 경제 사회적 법칙들이 인간행동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단지 구체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을 반영하는 법칙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일 수는 있겠으나 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반대하는 전면적인 투쟁에는 나서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오직 그렇게 이해함으로써만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분리를 폐지하고, 경제에서 하나의 사물처럼 자신에게 대상화된 그 자신의 힘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여 이러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다. 현실로부터 그것을 구체화한 겉모습을 분리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분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사활이 걸린 문제다.(Franz. Jakubowski,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사고에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1936, http://libcom.org/library/ideology-superstructure-historical-materialism-franz-jakubowski)

     

    계급의식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실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하는 어떤 추상적인 것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바뀔 수 있고, 바꿔야만 하는 살아있는 사회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경향이 어떠하든 절대로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찢어버리고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반드시 획득해야 한다.

     

    둘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개별자본가, 국가, 경쟁하는 개인들, 상품의 개별 소유자 등의 개별로부터 출발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부르주아 계급의 사회지배를 잘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집단적 산물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은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적 위협, 같은 환상, 같은 편견과 도그마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개인은 타인으로, 서로 경쟁자로 간주하며, 각자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생각들이 있다고 상상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사상과 행동에서의 진정한 연대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생산수단과 인간관계의 사회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과정에서 연합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삶의 조건들 때문에 연대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투쟁 속에서 단결함으로써, 자신들의 공동의 적인 자본을 압박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국제적 연대에 기초한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존재하게 될 사회관계의 선구체로, 투쟁 속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정치적 성찰의 출발점은 개체로서 개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일부로서 개인, 계급의 한 부분으로서 개인에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개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계급의식은 총체로부터 시작하여, 고도로 집단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국제공산주의흐름, [공산주의 조직과 계급의식], 빛나는 전망, p.60)

     

    셋째, 이데올로기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반영이지만, 계급의식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을 포함한다. 만약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격에 직면한다면 그들도 자신들끼리 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나 집단체가 결코 프롤레타리아트 연대의 수준에 이를 수는 없다. 이것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의 담지자로서 하나의 역사적인 계급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적대적인 하나의 역사적인 계급을 구성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살아있는 부정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자본주의를 파괴하겠다는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계급투쟁은 자의적인 상상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이 획득한 계급의식은 완벽하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이다. 실천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론적으로 풀리지 않았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며, 낡은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자신들의 계급의식을 얻어 나간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힘과 실천은 프롤레타리아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채 남아 있는 한 휴면상태와 같다. 그들의 잠재력을 실제적인 물리력으로 바꾸는 것이 계급의식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은 투쟁을 통해서만 경제체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적과 조력자들을 구분해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에 1910~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은 계급의식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보여주었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가 나타났고, 그곳 모두에서 회합과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교류가 발생했다. 이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가 부과한 심각한 무지와 의식의 왜곡 속에서 침체되어 있었지만, 평의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명료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소통하면서 그들은 정치적 토론에 임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을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환경은 열정적인 토론을 창출하고, 다른 프롤레타리아들과의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때 계급의식은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1920년대와 같은 혁명적 상황이 연출되지 않는다면 계급의식은 발전하지 않을까? 아니다.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한 일상적인 저항 속에서도 계급의 단결과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한 지형이 만들어진다. 단지 소규모 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한 것뿐이다. 이것을 촉진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계급의 집단적 활동과 혁명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넷째, 이데올로기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들 사이에 분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반면, 계급의식은 경제와 정치 투쟁이 분리되지 않으며 밀접한 연계를 통해서만 발전을 이룬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자신의 힘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얻는다. 그 투쟁과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생산물과 사회적 권리들이 부르주아지들에 의해 강탈되는 것을 인식했을 때 정치적으로 확장된다.


    “계급의식의 이러한 발전은 항상 계급투쟁과 동의어다. 계급의식은 본질에서 계급투쟁의 경험적 산물이기 때문에, 계급 전체의 행동을 당이나 위임받은 소수가 대체할 수 없다. 혁명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해방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들의 일이다. 따라서 계급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의식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다.”(국제주의자 목소리, [혁명조직과 계급의식], 2010, http://internationalist.ueuo.com/en/english.htm)


    과정으로서의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필요성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혁명적 계급으로 형성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절대 평탄하지 않게 전개된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항상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없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자본의 세계적 지배가 전면화 된 상황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도 점차 세계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모두 같은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심지어 한 지역, 한 사업장에서도 어떤 노동자들은 더욱 단호하고 전투적이지만, 어떤 노동자들은 계속 망설이거나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을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사회관계 속에서 극도로 소외당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것을 강하게 주입했고, 경쟁과 분업을 통해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분리하고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을 통일되고 의식적인 계급으로 구성할 때, 경쟁하는 개인으로 원자화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 모순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이며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계급 속에서 절정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투쟁에서 어떤 일치단결을 이룬다 할지라도, 모든 구성원이 마치 한 사람이 행동하는 것처럼 똑같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처럼 고정되고 불변하는 원칙이나 미리 준비된 처방에 따라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투쟁의 과정에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무기를 연마하며, 이러한 투쟁의 원천은 매우 길고 복잡한 사회적 과정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은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부패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모순의 폭로, 사회적 긴장의 악화로 발전될 조건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을 계급의식의 발전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이끌어내고, 자신들의 경험을 일반화시켜, 미래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투쟁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현재 주어진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영이 아니다. 계급의식의 발전은 끊임없는 이론적 성찰과 과거 경험의 비판을 요구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와 혁명적 계급의식의 반영인 혁명 강령에 대한 끊임없는 정련을 포함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성찰과 정련, 그리고 계급의식의 균질화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맡아서 할 수는 없다. 일상시기에 절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위되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의 정치적 성과물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역할은 계급 안에서 가장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부분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부분은 계급의 분파를 형성하는데, 이들이 운동의 목적을 좀 더 일찍 이해했기 때문에, 투쟁에서 고립과 분열을 막는 일과, 의식에서 우연성과 부분적 경험의 즉각적 반영을 극복하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분파들이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내려면 그들 스스로 혁명적인 조직, 즉 공산주의 조직으로 재편해야 하며, 계급투쟁 속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내야 한다.

     

    맑스는 [폴 라파르그에서 보낸 서한, 1870]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계급이 국제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뿐이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국제노동자협회>가 탄생했다. 이것은 하나의 종파나 이론의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생적 산물이며, 근대 사회의 자연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경향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생적 산물인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계급투쟁의 산물이고, 계급의 실천적인 경험으로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자발적인 것은 단순히 경제적 요소들로부터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적 필요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적이고 역사적인 운동들이 혁명가들의 존재를 위한 유일한 기반이다. 혁명가들은 마키아벨리적 목표나 자신들의 열망을 만족하게 하려고 나타나지 않는다. 혁명가들은 계급의 단위조직(노동조합 등)으로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제기하는 의식적인 자기 조직화의 복잡한 요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으므로 등장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혁명의 최종목표를 깨달았을 때조차도 여전히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유혹과 환상, 착취의 모순과 굴욕에서 계속 고통 받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국제공산주의경향은 혁명당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떠밀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이해를 방어하는 기반 위에서 싸울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역사는 또한 투쟁의 도구를 줄 수 있고 계급투쟁의 궁극적 결과인 봉기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총체로서의 완전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풀 수 없고 혁명당이 그 안에 구체화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정치 강령에 도달하기도 어렵다.(국제공산주의경향, 국제코뮤니스트전망/오세철 옮김, [꼬뮤니스트], 빛나는 전망, p.89)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노예상태를 하루아침에 간단히 해방할 수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계급의식의 발전과정을 일반화시켜야 하며 이질적인 것을 극복하면서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계급 안에 혁명조직을 필요로 한다.

     

    만약 계급투쟁의 역사와 정치적 성과물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지워지고, 처음부터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균질화가 가능하겠는가? 수십 수백 년에 걸친 수많은 계급투쟁의 교훈들은 뜬구름 속에서나 계급의 무의식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교훈들은 반드시 집단적이고 물질적 인간 형식인 혁명조직으로 존재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아래서 프롤레타리아들이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되돌아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계급에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조직인 혁명당이 필요하다.

     

    로렌 골드너는 토론의 중요성을 말한다. 다른사회에 대한 비전은 강령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은 혁명 이후 소비에트에서 잘 해결될 것이다’는 식의 오래된 관념들에 맞서서, 이러한 토론을 지금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획기적으로 다른 사회 질서에 대한, 폭넓게 공유되는 일정한 비전을 가진 활기찬 경향 없이, 성공적인 혁명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로렌 골드너, 사회실천연구소/이경수 옮김, '토론을 위한 테제들', [실천 11월호], 2011)

     

    혁명 강령이란 공산주의 혁명을 이론적으로 밝혀줄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자,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을 자본주의 물질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다. 또한, 강령은 노동자 계급이 실현해야 할 공산주의라는 목표로부터 규정 받고, 이러한 목표 일부를 이루는 전략전술들을 동시에 한결같이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전술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서 나오는 실제 조건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해야 하고, 강고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그 풍부함을 이끌어내야 한다. 따라서 혁명 강령은 신비스런 기원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은 규칙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의 투쟁 산물이며 투쟁의 무기다.

     


    2. 당에 대한 이론과 오류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현재 당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대중들이 당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욱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입장에서 당을 판단하려면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당은 어원은 라틴어 pars에서 기원한다. 누군가는 잘 정의된 계급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정권장악을 위한 정치결사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당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 잘 정의된 계급이라고 본다면, 어느 계급에 기반을 두고 어느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지가 기준일 것이다. 또한, 정치 결사체로 본다면 당의 목적과 정치활동을 통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가계급에 기반을 두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당을 부르주아 정당으로, 노동자계급에 기반을 두고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당을 노동자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제도권 정치에 합법적으로 참여하는 모든 정당은 계급을 초월한 형식적 주권자인 전체 국민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민중에 기반을 둔 노동자정당들도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한 결국 부르주아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어있다. 한국에서 최근 등장한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 유(類)도 노동자민중, 서민계층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좌익 구실을 하므로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분파로 규정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에게 당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당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의 정치적 성격이다. 당의 정치적 성격은 당의 정치활동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당의 정치활동은 강령에 따라 규정 받기 때문에, 만약 강령과 당 활동이 어긋난다면 사상과 실천이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강령과 당 조직 모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령에 입각한 당을 건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당의 강령과 정치활동이 일치하는 당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부르주아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자신들 정파의 정치권력 장악에 목적이 있다.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권력은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합법적으로 교체될 수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조직과 활동, 그리고 정책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부르주아 정당과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진보정당, 노동자정당들에게 강령이란 구체적 목표나 실천의 지침이 아니라, 필요할 때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정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자기해방 즉, 자본주의 착취체제 철폐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조직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자기해방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완전한 파괴와 다수 계급의 집단적 권력인 노동자평의회의 권력 장악을 통해 실현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에게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와의 계급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혁명 강령과 혁명조직 그리고 전체 계급의 의식적 투쟁이 필요하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목표를 강령으로 갖고 있지 않은 당과 노동자계급을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당은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자기해방이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는 의미에서 노동자계급의 정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당, 공산주의 노동자당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일상시기에 계급의 혁명적 부분인 공산주의 강령에 입각한 공산주의노동자들의 집단적 존재 여부와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건설할 수 있다.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모든 계급투쟁에 참여하면서 그 중심에서 투쟁의 활력소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계급의식이 공산주의 강령에 근접하도록 균질화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계급 전체의 과업이자 가장 의식적인 계급투쟁이기 때문에, 계급의식이 공산주의 강령에 가장 근접했을 때 비로소 현실로 다가온다. 계급투쟁이 최고조에 이르고 계급의식의 발전이 전면화 되어 계급의식과 공산주의 강령의 차이가 좁아질수록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가장 대중적 계급정당인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으로 자리 잡게 된다. 따라서 계급의식을 고려하지 않은 전위정당과 대중정당의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며, 혁명조직의 역할과 계급 전체의 과업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왜 같은 목표와 비슷한 구성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당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것일까? 그것은 당이 계급의 분파이기 때문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은 계급의 일부인 당이 계급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계급 일부로서 혁명가들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계급투쟁들 속에서도, 자본주의의 파괴 시 또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의 행사 시에는 더욱이나, 그 어느 때에도 계급을 대체할 수 없다. 이전의 역사적 계급들과는 반대로, 소수 의식은, 비록 그것이 이미 그렇게 계발되어 있을지라도, 프롤레타리아의 과제들을 실현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이에 덧붙여 계급 전체의 항상적 지속적 참여와 창조적 활동이 필수적이다.([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http://ko.internationalism.org/platform)

     

    문제는 모든 당이 계급의 분파이지만 모두가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정당은 부르주아 정당들처럼 계급을 대표한다거나 권력을 위임받지 않기 때문에, 항상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만을 방어한다. 또한, 노동자계급 전체의 과업인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든 과정을 계급의 일부인 당이 대신해줄 수 없다.

     

    평의회들은 계급 전체를 총괄한다. 유일한 소속척도는 “노동자라는 점”이다. 그와는 달리, 혁명가들의 조직은 계급의 혁명적인 인자들만을 총괄한다. 소속척도는 여기서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강령에의 동의 및 그것을 옹호할 태세. 그래서 계급의 전위에는 사회학적으로 볼 때 노동자계급에 속하지 않는 하지만 그들의 출신계급과의 단절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이해관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러한 개인들도 속할 수 있다.

    이 두 인자 사이에는 결코 어떤 권력관계가 존재할 수 없는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로부터 분리된 어떤 이해관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위의 문서)

     

    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단일조직은 노동자평의회이며, 노동자평의회가 권력을 가져야만 전체로서의 계급 권력을 집단으로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계급의 정치조직인 당은 계급의 일부일 수밖에 없으므로 계급의 분파를 형성하며, 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 안에서 자신들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에 속해 있거나 계급 특정분파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둔 당들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끊임없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거나 다른 계급과의 연합을 시도한다. 이들은 모두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을 위해 존재하는 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위해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할 뿐이다.

     

    최근 대선 시기를 맞이하여 ‘노동자 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다시 한 번 등장하여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 출신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력은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부르주아 최고 권력이자 통치기구인 ‘노동자 대통령’으로 표현될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노동자의 권력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와 계급 전체의 집단적 권력행사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며, 노동자의 대표 역할은 계급의 일부 분파가 아닌 계급 전체를 포괄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평의회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면 노동자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직접정치와 집단적 권력의 발현체인 노동자평의회와 부르주아 통치기구인 대통령은 적대적인 관계임을 주장해야 한다. 부르주아 선거 무대에서 투쟁하는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노동자 투쟁의 공간에서 계급 고유의 방식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 정치에서 사회민주주의의 기원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주변에 수없이 나타났던 당들은 어떤 당이었으며, 노동자계급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알아보자.

     

    1864년 세워진 최초의 노동자 국제연대 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의 [임시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해 쟁취 되어야 한다”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러한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며, 맑스 이후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혁명가 조직, 노동자 정당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노동자들의 주변에는 항상 자신들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고, 지도하는 세력이라 자임하는 정파와 파벌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들은 항상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이고,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 전체를 통제해야만 노동해방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과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노동자계급을 권력과 투쟁의 주체로 세우고 있는지, 아니면 노동자계급을 대리하거나 이용하는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혁명의 시대이자, 반혁명으로의 길을 열어주었던 코민테른 시기,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들은 당의 역할에 대해 “정치권력은 오직 정치적 당에 의해서만 획득되고, 조직되며, 지도될 수 있다”([당의 역할에 대한 테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2차 당 대회)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제2인터내셔널의 당과 권력에 대한 관념에 잉태되어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 당시의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면서, 노동조합의 역할을 강조하고 당은 의회에서의 역할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사민주의자 에드워드 데이비드가 “혁명주의의 짧은 개화는 매우 다행히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당은 의회에서 그의 권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확장하는데 전념할 것이다.”라고 강조한 이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수정주의가 탄생했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활동과 정치적 활동 사이의 분리는 점점 더 확연해져 갔다. 카우츠키는 이미 1902년에 ‘점진적인 운동, 민주주의적이며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를 주창했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임무는, 이러한 점진적인 운동을 강제할 목적으로 의회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고 노동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당의 역할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당은 노동자계급 일부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진정한 계급의 조직이면서도, 동시에 혁명에 가장 앞장서는 전위이자 혁명기관이 더는 아니었다. 당은 통치기구가 되었고 노동자들은 당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당에 투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활동과 권력을 당에 위임해야 했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의 탄생 배경이며,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계급에 비극을 가져다준 맑스주의 왜곡의 역사이다.

     

    사회민주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혁명가들

     

    대리주의는 1900년대 초 러시아의 탁월한 혁명가인 레닌에 의해서도 강화되었는데, 처음에는 경제주의자들의 잘못된 정치와 경제의 분리에 대항한 반대의 강조로써 혁명적 이론과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아주 강력히 주장하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올바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쪽으로 막대를 너무 구부려, 또 다른 대리주의를 표현했는데, 그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요 브렌델은 투쟁으로 이끌 환경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이론이 투쟁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외부로부터의 의식주입을 주장하는 좌파를 비판한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의식의 어떤 양이 투쟁의 절대적인 필수조건이라는 특정한 생각과 관념은 옳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많은 경우, “이론은 대중들에게 소유되자마자 물질적 힘을 갖게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 이론은 과거의 경험들과 결과들의 요약, 결코 그 이상일 수 없다. 어떤 이론이 새로운 투쟁의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부터 기인하는 새로운 경험이 새로운 이론의 탄생을 가져다준다. 이것은 끊임없는 과정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머리에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들은 이론적 결과물들이 아닌 실천적 결과물들을 끌어낸다. 그들은 어느 한 이론의 형식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다. 그들의 실천은 특정한 이론의 결과물이 아니다. 대신 그들의 실천은 이론이 획득되기 위한 결과물들을 갖고 있다. 투쟁으로 이끌 환경이 존재하지 않을 때, 좌파의 대변자는 이론이 투쟁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사막에서 설교하는 목사의 목소리를 남긴다. (카요브렌델, [혁명적 좌파의 재조직화에 관한 단상], 1993, http://libcom.org/library/some-thoughts-re-organization-revolutionary-left)

     

    대중들은 스스로 노력을 통해서는 단지 노동조합의 의식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의식은 지식인층에 의해 대중들에게 도입되어야만 한다는 레닌의 1903년 정식화는 지도자와 일반인, 노동자와 지식인, 과정과 목표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정립시켰다. 이후 그것은 운동의 목을 죄는 올가미로 작용했다. 비록 레닌 자신이 1917년 4월 테제에서 ‘대중들이 종종 지식인의 지도력보다 앞서있음을 스스로 입증한다’고 인정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도자와 일반인, 지식인과 노동자, 이론과 이론의 원천인 실천적 투쟁을 분리하는 대리주의 경향이 혁명운동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미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계급의식과 투쟁 사이의 분리,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경제적 측면들과 정치적 측면들 사이의 분리가 초래한 문제점들을 비판한다. 카우츠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의식을 생산관계의 외부에 위치시키면서 공산주의 혁명과 그 발전을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으로 축소해, 사회주의 강령과 혁명의 필요는 더는 경제 현실의 결과물이 아니며,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 아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훗날 폴 매틱은 조직과 자발성의 문제에 착목하면서 레닌과 로자의 한계를 지적한다.

     

    노동운동에서 조직과 자발성의 문제는 혁명적 소수와 자본주의 교리로 주입된 프롤레타리아 대중간의 관계를 포함하는 계급의식의 문제로 접근되었다. 이는 소수 이상이 자신들을 조직함에 의하여 혁명의식을 받아들이고, 유지하고 적용하려는 것이 믿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었었다. 노동자 대중은 단지 환경의 힘에 의하여만 혁명가로서 행동할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상황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였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레닌과는 다르게 생각하였다. 당 독재를 실현하기 위하여 레닌은 무엇보다도 조직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독재의 위험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발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단지 특정한 조건에서 부르주아지가 노동하는 대중들의 사상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다른 조건에서 혁명적 소수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레닌은 이를 사회주의 사회로 인도하는 기회로 보았으며, 로자 룩셈부르크는 지배 권력의 위치를 차지하는 어떤 소수도 바로 과거 부르주아지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발전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을 반자본주의 행동으로 강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비록 레닌이 자발적 운동을 고려하였지만, 동시에 두려워하였다. 레닌은 대중들의 후진성을 인용하여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혁명에서 의식적인 개입의 필요성을 정당화하였으며, 자발성에서 파괴적인 하지만 건설적이지 못한 요인을 보았다. 레닌의 관점에서는, 자발적 운동이 강렬할수록, 조직되고 계획된 당 행동을 통하여 보충하고 지도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소위 노동자는 자신들에게서 보호돼야 하며, 또는 그들은 무지 때문에 자신들의 대의에 어긋날 수 있으며,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여 반혁명의 길을 열 수도 있다는 것이다.(폴 매틱, [자발성과 조직], 1977, http://libcom.org/library/spontaneity-and-organisation-mattick)

     

    트로츠키 역시 1904년 「우리의 정치적 책무­정치적 대리주의를 타도하자!」라는 제목의 구절에서 계급의식에 대한 변증법적 관점을 보여준다.

     

    정치적 대리주의 체계는, 경제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단순한 체계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들과 그 의식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들은 존재의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들은 매우 강력하고 불가피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결국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관계들의 실현을 자신들의 주관적인 이해관계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요소 사이에 모든 삶의 부분을 이루는 영역이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전술적 통찰력은 전적으로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길을 단축하고 촉진하는 데 있다.

     

    하지만 로자와 트로츠키 모두 사회민주주의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는데, 이는 사회민주주의라는 학교를 통과해 온 당시의 혁명가들에게 사회민주주의라는 족쇄는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1920년대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와 당의 강력한 독재를 옹호하는 대리주의를 강화시켰고, 반대로 로자는 혁명운동의 대중성에 조건 없는 애착을 발전시켜 당을 대중성을 갖는 어떠한 것에도 적응시키려 했다. 이러저러한 대중조직이나 정치의 대중성에 대한 애착은 심지어 노동자 대중이 계속해서 투표하므로 단순히 의회 정치를 지원하도록 오도하기까지 했고, 훗날 대중운동에 종속된 대중정당이라는 개념은 사회민주주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러한 대중정당 노선은 모든 의회주의 정당이 기본노선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고, 그들의 그럴싸한 혁명적 구호나 강령문구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보여주는지는 역사가 증명해왔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자신들의 과업이다’라는 맑스의 올바른 관점조차 소비에트나 노동자평의회라는 대중의 직접 권력기관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당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명제로 인해, 그것이 의회를 통한 권력 장악이던, 당이 국가권력을 지배하는 당 독재이던 노동자계급의 해방과는 무관한 실천적 결론을 초래한 것이다.

     

    대리주의의 유산, 스탈린주의 반혁명

     

    카요 브렌델은 스탈린주의 당 독재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중앙 지도력이 올바른 방식으로 생산된 모든 것들을 분배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러한 사실이 유지된다 할지라도, 생산자는 생산의 기계류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계류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좌절시키는데 사용될 것이다. 불가피한 결론은 현존하는 지도력을 반대하는 그러한 집단들이 힘으로 억눌려지는 것이 될 것이다. 중앙 경제 권력은 동시에 정치적 권력 또한 장악할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 정치적 문제나 경제적 문제에 대한 어떤 반대의 생각이 어떠한 가능한 수단으로 억압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맑스가 규정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의 연합 대신에, 이전에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교정시설(노역장)일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민주주의뿐만 아니라 볼세비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특징으로 한다. 노동자계급의 일상 경험들을 세밀하게 분석한 그룹이 바로 이 집단이었다. 그래서 그 집단은 계급투쟁에 대한 새로운 사고로 나아간다. 그 경향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세비즘을 ‘오래된 노동자운동’으로 규정하고, 이와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운동’을 주장한다.

    당 독재는 임노동의 폐절과 노동착취의 절멸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생산자의 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다.(카요브렌델. [평의회공산주의와 볼셰비즘 비판], 1999, http://libcom.org/library/council-communism-critique-bolshevism)

     

    1930년대 스탈린은 이런 대리주의 경향들에 기반을 두어 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 국가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제적 통제 시스템으로 확립시켰다. 러시아 국가는 노동자들의 권력인 평의회들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힘이 반혁명에 의해 파괴되는 역사를 의미했다.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공연한 대표자가 되자마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비록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이 반대되는 일을 할지라도, 심지어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과 국가는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는 당과 국가의 역할이 되어 버렸다. 그 후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어 갔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선택했을 때, 그 조종을 울렸고, 볼셰비키 당은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위와 같이 대리주의의 기원은 사회민주주의적 사고에 있으며, 그 토대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미성숙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미성숙함은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부르주아 의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자리를 잡게 했고,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 당 독재노선에 기반을 둔 공산당들로 채우게 하였다. 결국, 소련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두 조류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한 축이거나 체제수호자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3. 계급의식의 발전과 혁명가의 역할

     

    우리는 앞에서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계급의식과 이데올로기의 차이, 혁명조직의 필요성, 당 이론에 대한 오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혁명가들이란 무엇이며, 그 임무는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혁명가들이 계급의식의 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지금까지의 서술을 기반으로 혁명가들의 임무를 요약하여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어 운동에 명확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명확한 강령의 기초위에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하여 계급의식의 발전을 능동적으로 돕는 것이다.”

     

    혁명은 진정 노동자계급 전체의 의식적인 과업이다. 하지만 그 길이 항상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심지어 혁명의 시기에도 다수 노동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속해 있다. 이때 혁명가의 역할은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널리 전달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치를 대중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순간 계급의식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영향 아래 다수의 대중반응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확한 인자들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혁명적 경향들을 촉진하기 위해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살아있는 산물이자,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성숙에서 능동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낡은 조직형식과 실천들의 붕괴에 직면하여 명확한 강령의 기초위에 자신을 조직하고 투쟁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정치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산당 선언에서는 공산주의 전위의 본질적인 책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자계급 당과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만 구분된다.

     

    1. 여러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국내 투쟁들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관계를 지적해내고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2.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지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공산주의자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412)

     

    공산주의자들에게 노동자계급 운동을 혁명의 길로 이끈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이해관계와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지속해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혁명가들이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해야 하며, 혁명조직을 통해서만 그 지속성을 유지하며 계급의식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하고 명료한 역할이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자칭 혁명가 또는 활동가들은 이러한 단순함을 과소평가하면서 좀 더 복잡하고 어렵고 화려한 것으로 치장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혁명조직의 단순 명료한 역할에 지도자 또는 사령관의 지위를 부여하려 한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 수동적이고 혁명적이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좌파(소련의 교과서에 충실한 이른바 맑스-레닌주의 전통)의 출발점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그들의 원칙은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레닌주의 테제이다. 다시 말해서, 좌파에 의해 해석된 혁명적 실천이다. 그러나 맑스는 이렇게 알고 있었다. 예컨대 “이 노동자, 저 노동자 혹은 자신의 목표로서 전체의 대표로서 노동자 계급조차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존재에 따라서 그것이 역사적으로 행위 하도록 강요될 것인가이다.”(Marx/Engels, 「The Holy Family or Critique of Critical Criticism. Against Bruno Bauer and Company」,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5/holy-family/index.htm)

     

    맑스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전통적 좌파는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전위들이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자신을 노동자계급보다 우수한 지적인 계층으로 분리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당연시됐다.(카요브렌델, [혁명적 좌파의 재조직화에 관한 단상], 1993, http://libcom.org/library/some-thoughts-re-organization-revolutionary-left)

     

    위와 같은 전통적 좌파의 테제들이 혁명조직의 역할에 대해 ‘명령하거나 지시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지도한다는 것’으로 도약시키는 경향을 만들었다. 이 경향은 혁명조직의 역할을 대중을 지도하는 것과 지도력 획득을 위한 권위 창출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강요와 동원 방식의 운동을 만들어낸다. 이런 운동은 계급의식이 균질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준비되지 않은 대중들을 기다려줄 수도, 대중투쟁에 꾸준히 함께 할 수 없다. 하지만 혁명의 승리는 전체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을 조직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수동적으로 지도를 받고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것은, 그들이 권력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히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정치적 전망을 갖는 것이 아니다. 혁명조직의 역할은 잘 길들여진 노동자군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다.

     

    라이히는 계급의식이 무엇인지와 혁명당의 역할에 대해 과장하지 않고 말한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인류의 존재를 지배하는 역사적인 혹은 경제적인 법칙들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모든 영역에서 고유한 삶 욕구들에 관한 인식.
    2. 그 욕구들을 만족하게 할 방법들과 가능성에 관한 인식.
    3. 사경제적 사회질서가 그 욕구만족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에 관한 인식.
    4. 자신의 삶의 필수품들과 그것의 방해물에 대해 분명해지려는데 대한 자신의 금지와 공포[불안]에 관한 인식. (“적은 자신의 땅에 있다”는 말은 개별적인 억압된 것들 자체에 대한 심적 금지에도 특별히 타당하다.)
    5. 대중의 통일이 이루어질 때 억압자의 권력에 대항해 불굴의 힘을 만들어 낸다는 인식.

    혁명지도부(혁명당)의 계급의식은 대중이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대중을 대신해 말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본의 멍에에서의 혁명적 해방은, 혁명지도부가 삶의 모든 측면에서 대중을 이해하기만 하면 충분히 발전된 대중의 계급의식에서 자발적으로 성장할 총괄적인 행동이다.(빌헬름 라이히, 사회실천연구소/윤수종 옮김,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실천 4~5월호], 2007)

     

    현재의 자본주의는 충직하고 복종 잘하는 노동자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력하게 단결된 계급에 의해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계급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 혁명가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활동해야지, 자신들을 영웅으로 만들거나 뛰어난 연설가로 숭배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혁명은 군사행동과 비교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그 실현은 오로지 노동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함에 따라 그 자신들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당은 계급을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당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위임받는 것을 필요치 않다. 혁명조직의 유일한 역사적 기능은 계급 스스로 그 과업과 혁명적 행동의 기반이 되는 목적과 수단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정치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계급이 역사적으로 맡게 될 혁명적 지향을 의식하도록 활동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의식과 혁명가의 역할


    국제공산주의흐름은 혁명가들의 기반에 대해 연대와 신뢰를 강조한다.


    조직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관계들 및 투쟁가들 사이의 관계들은 불가피하게 자본주의 사회의 흔적들을 띠게 마련이고, 그래서 이러한 관계들은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공산주의 관계들의 섬을 형성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들은 혁명가들에 의해 추구되는 목표에 명백하게 모순되어서는 안 되며, 공산주의를 실현할 계급의 조직의 귀속성을 특징짓는 연대와 상호 간의 신뢰에 반드시 기반을 둬야 한다.([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http://ko.internationalism.org/platform)

     

    혁명가들에게 노동자 계급에 영향을 줄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혁명가들은 자임하여 노동자계급 당이라고 선언할 수 없으며, 계급의식과 그 발전의 복잡성에 대해 인위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도 없다. 혁명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과 존재가 지속함에도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현실의 일부이다. 현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역관계의 변화를 경험하고, 계급투쟁의 상승기와 퇴조기를 경험한다. 혁명조직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박으로부터도 전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혁명가들은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공산주의 의식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투쟁 속에서 항상 연대와 신뢰를 기반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국제공산주의경향은 공산주의 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 혹은 공산주의 의식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은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의 ‘즉자적’ 계급의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깨달음과 그 착취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의식은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부과한 예속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 수단, 투쟁의 형식, 전술, 전략과 정치 강령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공산주의 의식은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주고 있는 정치적 형식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으로부터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국제공산주의경향, 국제코뮤니스트전망/오세철 옮김, [꼬뮤니스트], 빛나는 전망, p.88)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의식인 공산주의 의식은 현실 상태를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실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과정에 대한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인식이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 속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깨고 혁명계급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가장 의식적인 행동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의식은 그 스스로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에 능동적인 요소가 되어야 한다.

     

    로렌 골드너는 혁명가들의 강령적 실천을 강조한다.

     

    공산주의는 자본이 “노동자계급에게 행하도록 강요하는” (마르크스) 것에 근거한 구체적인 가능성이다.

     

    혁명가들은 늘 전체 운동 속에서 “대자적 계급”을 자극하려고 말한다. 혁명가들의 목표는 특정한 “요구”나 몇몇 경우들에서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 사이에, 또는 노동자들과 실업자들 사이에, 나아가 인종적 성적 차별 속에 존재하는 장벽을 부수는 경험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아르헨티나 또는 그리스 또는 이집트와 같은 곳에 서 있을 때, 유일한 진짜 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다. 이는 어떤 반란의 모험을 지지하는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강제될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동학이 있다. 그러나 국가에 맞선 투쟁에서 성공하고 국가를 (소비에트든, 노동자평의회든, 그리고 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 어떤 형태든) 전 계급적인 제도들로 대체하는 것은 (앞서 토론한 것과 같은) 강령과 이 강령을 수행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미리 형성되어 있는 경향이 필요하다. 이 경향은 가장 전투적이고 의식적인 요소들의 네트워크들로부터, 투쟁의 부침 속에서, 시간을 두고 출현하며, 다른 어떤 형식을 갖춘 조직에 속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후자, 즉 형식을 갖춘 조직은 투쟁의 극대화된 리듬이 그것을 요구할 때 등장할 것이다.(로렌 골드너, 사회실천연구소/이경수 옮김, '토론을 위한 테제들', [실천 11월호], 2011)

     

    공산주의 의식을 담지 한 혁명가들은 현실에서도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제시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계급의 의식적인 투쟁을 통해 목표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모든 선전 작업과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제안을 하고 계급투쟁의 확산에 기여해야 한다. 특히 혁명가들의 양적, 질적 수준이 초보단계이고, 계급의식의 발전이 정체된 상황에서는 다음과 같은 활동이 중요하다.

     

    첫째, 선전활동의 상시화와 피드백을 담보해 줄 현장과 지역 노동자들의 정치토론과 회합을 조직해야 한다. 이것은 혁명조직과 노동자 사이의 정치적 실질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둘째,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 수평적 연대를 고무시키고 그곳에 적극 참여하여 노동자들의 제한 없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투쟁의 공간에서 정치토론과 직접정치를 결합하는 일이며 반드시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을 둬야 한다. 혁명가들은 정치토론의 장에서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밝히고 노동자 스스로 투쟁의 전망을 갖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계급 내부의 부르주아적 요소와 이데올로기를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셋째, 모든 계급투쟁에 결연하고 전투적인 투사로 참여하여 투쟁이 확산하고 집중되도록 독려하고 활력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혁명조직은 항상 계급투쟁의 가장 활성화된 부분에 있어야 하며, 투쟁 속에서 발생한 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을 공산주의 의식과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넷째,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인 노동자 그룹들(행동그룹, 토론그룹, 정치그룹)과 그들의 행동 사이에 수평적 네트워크(대중총회, 투쟁위원회)가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중총회와 같은 평의회 형식의 계급 조직에서 정치와 행동은 일치될 것이며 낡은 운동을 깬 새로운 운동의 출현을 촉진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발전시켜 나갈 것이며, 자기 조직화의 물질적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나오며

     

    라이히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은 혁명의 주체인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에 대한 철저하고 폭넓은 이해에 기반을 둔 혁명지도부(혁명당)의 계급의식의 변증법적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인류의 존재를 지배하는 역사적인 혹은 경제적인 법칙들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① 모든 영역에서 고유한 삶 욕구들에 관한 인식, ② 그 욕구들을 만족하게 할 방법들과 가능성에 대한 인식, ③ 사회경제적 사회질서가 그 욕구만족을 방해하는 장애 꾼들에 관한 인식, ④ 자신의 삶의 필수품들과 그것의 방해물에 대해 단절하려는 데 대한 자신의 금지와 불안에 관한 인식, ⑤ 대중의 통일이 이루어질 때 억압자의 권력에 대항해 불굴의 힘을 만들어낸다는 인식이다.(오세철, [계급의식, 계급무의식 그리고 혁명], 2011.6 5회 맑스코뮤날레 발표)

     

    혁명가들은 언제 어디서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과 만나, 계급의식에 대한 철저하고 폭넓은 이해를 통해, 혁명이론을 발전시키고 계급투쟁에 대한 구체적인 개입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대중의 열망과 실천을 혁명가들의 의식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계급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과 모든 계급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에 대항해 독립적으로 자신을 조직하려는 모든 흐름을 자극하고 촉진해야 한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믿은 것처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당 지도부가 믿는 것처럼 아주 없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은 많은 구성요소로 나타나며, 이 구성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아직 계급의식을 구성하지 않지만(예를 들어 단순한 배고픔) 서로 결합되어 계급의식이 될 수 있다. 이들 요소는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반대의 심리적 의미들과 힘들에 침투되고 혼합되고 엮인다. 혁명당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대중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현재의 수준에서 더 고도한 수준으로 정제해 간다는 과제를 완수하는데 실패한 한에서만, 히틀러는 대중은 작은 어린아이들처럼 영향 받을 수 있다­대중은 당신이 그들에게 주입한 것을 단순하게 당신에게 되돌려 준다­는 자신의 공식을 가지고 성공해 나갈 수 있다.(빌헬름 라이히, 사회실천연구소/윤수종 옮김,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실천 4~5월호], 2007)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한 혁명조직의 역할이 아닌 위로부터의 투쟁 창출과 인위적 의식 주입은 오히려 노동자에게 해롭다. 노동자 대중의 열망과 혁명조직의 무능력 틈을 파고드는 것이 파시즘임을 명심해야 한다. 혁명가들이 대중의 열망을 계급의식으로 발전시키고 운동의 최종목표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대중의식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거나 단순한 선동 책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강제하려 노력할 때마다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을 막다른 길로, 적들의 총구 앞에 내모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노동자계급과 혁명조직의 역사에서 기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원칙들을 포기하게 했고, 대리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과업을 당이 대신하게 했다. 계급투쟁에 임하는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원칙과 최종 목표의 포기, 그리고 대리주의와 소수 행동이라는 두 가지 함정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열망과 무의식 앞에 나아가서 그러한 열망들을 계급의식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촉진하며, 프롤레타리아가 그 진정한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계급의식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혁명조직과 계급 사이의 관계, 그리고 계급의식이 발전을 위한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과제는 앞으로 우리가 계급투쟁 속에서 더욱 풍부화 시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처한 당면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과제를 위해 당과 계급과의 관계에 대해 문제의식을 던진 국제공산주의경향의 글을 인용하며 이글을 마친다. 

     

    당은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전술과 전략이 된 것도 그것이 갇혀 있는 경제적 울타리를 부수면서 계급을 혁명적 길로 되돌리는 일련의 경제투쟁, 그리고 그것의 종합과 정교화의 역사적 성과가 된다. 그러나 당은 전체로서의 계급이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독립적으로 끝내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은 계급투쟁이 매번 반복되는 동안 이미 결정된 진화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끝내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당-계급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의 기본에 대한 근본적 동의와 명료성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 모든 일관된 혁명적인 힘이 함께 오는 과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국제공산주의경향, 국제코뮤니스트전망/오세철 옮김, [꼬뮤니스트], 빛나는 전망,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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