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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코뮤니스트좌파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 조회 수: 9237, 2023-05-31 18:21:19(2013-01-14)
  • 코뮤니스트좌파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1. 1920년대 중반 국제적인 혁명의 물결이 패배한 이래 이른바 사회주의, 코뮤니즘(공산주의) 용어보다 더 왜곡되고 남용된 예는 없을 것이다. 이전의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체제들 또는 현재의 중국, 쿠바 및 북한과 같은 나라들이 코뮤니즘이나 맑스주의의 표현라는 생각은, (부르주아의)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지배계급의 모든 정파에 의해 영구화 된 20세기의 진정 가장 커다란 허위이다. 1935년에서 45년까지의 제국주의 세계대전동안, "반파시즘" "민주주의의 수호"와 함께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라는 신화가 인류역사상 가장 커다란 살육을 위해 노동자를 동원하는데 러시아 안팎에서 이용되었다.

     

    그 허위는, 미국과 러시아의 주도권 아래 두 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경쟁들이 지배적이었던 1945 -89년 사이의 기간 동안 훨씬 더 강력하게 이용되었다: 동구권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서구권에서는 제국주의적 충돌에 대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차폐물이자("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한 민주주의의 수호")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음해하는 수단으로서: 러시아 강제노동수용소를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는 것 - 만약 저것이 사회주의라면, 그 모든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 주제는, 동구 블록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그리고 심지어는 노동자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을 때, 더욱더 귀청을 울리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의 선전에 부가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르주아의 극좌들”,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들은 스탈린주의 체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노동자 계급적인 토대를 인정했다.

     

    2. 이러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왜곡들은 또한 20세기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연속성과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맑스주의의 잘못된 옹호자들 - 스탈린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학자적인 "맑스학 주의자들", 근대화자들 및 철학자들 -이 집중조명을 점유한 반면에 그 진정한 옹호자들은, 더 직접적으로 억압되고 침묵되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무의미한 파벌들로, 차츰 더, 잃어버린 세계로부터의 화석들로 격화된 채 주변화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 세기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연속성을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 속에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선언에서 부터, 맑스주의는 고립된 천재적 "사상가들"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실제적인 운동의 이론적인 표현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래서 그것은 피착취계급의 직접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관계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서 피착취계급의 운동에 대한 그것의 충실성을 증명하는 그러한 투쟁이론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옹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같은 근본적이고 변경할 수 없는 원칙들에 대해 충실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 함과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경험들과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결합된 맑스주의 이론의 지속적인 풍부 화를 포함한다. 게다가, 집단적인 노동과 투쟁을 체화하는 계급의 산물로서 맑스주의 자체는 단지 조직화된 집합체들을 통해서 - 혁명적 부분과 정당을 통해서 -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코뮤니스트 선언은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 조직 즉, 코뮤니스트 연맹(Communist League)의 강령으로서 나타났다.

     

    3. 자본주의가 여전히 팽창하고 상승하는 체계였던 19세기에, 부르주아는, 검은 것이 마치 흰 것인 양, 자본주의가 진정 사회주의인 양 꾸밈으로써 그 자신의 지배의 착취적 본성을 숨길 필요가 덜했다. 이러한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도착들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에 있어서 전형적이고 "맑스주의" 자체를 신비화의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부르주아의 노력들에 의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가차 없는 압력은, 노동자들의 운동 속으로 밀수입되는 사회주의의 잘못된 판본들의 형태를 빈번하게 취했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주의 선언은 스스로를 "봉건적",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로부터 구별해야만 했고, 1 인터내셔널 내부의 맑스주의 부분들은 한편으로는 바쿠닌주의에 대항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쌀레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항한 두 방면의 전투를 벌어야만 했다.

     

    4. 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맑스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창설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자운동 내부의 상이한 경향들의 일종의 연합이었던 제1 인터내셔널로부터의 중요한 한 걸음 전진을 나타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에너지에 있어서, 개혁을 위한 투쟁이 핵심이었던 거대한 자본주의 성장기에 그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자본주의 체계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압력에 특히 취약했다. 이러한 압력은,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은 "수정되어"야 하고 어떤 혁명적인 단절 없이도 사회주의를 향해 평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한 개혁주의적 흐름들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당 내부에서 표현되었다.

     

    이 시기동안 - 특히 1890년대 말엽과 1900년대 초엽 - 맑스주의의 연속성은, 기본적인 맑스주의의 원칙들의 옹호에 있어서 가장 비타협적이었으며, 자본주의가 그 상승기의 한계에 도달하면서 나타나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최초로 인지했던 "좌파" 흐름에 의해 유지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을 구현했던 아래 이름들은 잘 알려져 있다 - 러시아의 레닌, 독일의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판네쿡, 이태리의 보르디가 - 그러나 이러한 투쟁가 중 어느 누구도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기회주의의 괴저(壞疽)가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점점 더 그들은 그들 각각의 정당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들 - 러시아의 볼세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등 - 로서 활동해야만 했다.

     

    5.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의 전망을 확인했고, 노동자운동 내부에서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그 기원을 가진 조직들이 처음으로 바리케이트의 서로 다른 편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대부분이 예전의 "개혁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졌던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이전 시기의 맑스의 저술을 환기시키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돌이킬 수 없이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의 전쟁을 위한 신병소집 하사관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충실성은 위선적인 선언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매우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대학살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든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좌익 흐름이었다. 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이들 동일한 흐름이었다.

     

    6. 1919년은 전후 혁명물결의 최고정점이었고 그 창설총회에서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진보된 입장을 표현했다: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전적인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이러한 강령적인 명확성은 혁명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 그것은 낡은 정당 내부의 좌익 정파의 정치적 이론적 공헌에 의해 그 이전에 준비되어 있던 것 이었다: 그래서, 권력으로 가는 길에 대한 카우츠키의 합법주의적이고 점진주의적 전망에 대항해 룩셈부르크와 판네쿡은 혁명의 토양으로서의 대대적파업개념을 구상해 냈다; 카우츠키의 의회주의적 백치주의(Parliamentary cretinism)에 대항하여 판네쿡, 부하린 및 레닌은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코뮨국가"의 창설의 필요성에 대한 맑스의 주장을 부활시키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혁명의 시간이 시작되면 실천적인 정책의 문제로 될 수 있었다.

     

    7. 혁명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러시아의 소비에트권력 내부에서 변질과정을 야기했다. 볼세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 및 참여기관 -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및 적군- 에 대해 반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다. 인터내셔널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활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 -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에서의 활동에 대한 증가하는 강조, "동양의 인민"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의 호소 및 무엇보다도, 사회애국주의자들의 자본주의적 본성에 관한 힘들게 획득된 명확성을 모두 내던져 버린 통일전선 정책 -을 초래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의 성장이, 좌파 흐름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의 반작용을 자극했듯이, 마찬가지로 코뮤니스트 좌파 흐름이 제3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 풍조에 대항해 저항했다 - 판네쿡과 보르디가와 같은 많은 대변자들은 이미 그 이전의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맑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스스로를 증명했었다. 코뮤니스트좌파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에서 그 표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들은 맑스주의의 전통이 가장 강했던 바로 그 나라들, 즉 독일, 이태리 및 러시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8.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실제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거대한 기세와 결합된 맑스주의 전통의 깊이는 이미, 혁명물결의 절정 당시, 특히 의회 및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서 가장 진보된 정치적 입장의 일부를 도출 시켰었다. 그러나 그러한 좌파 코뮤니스트는 독일코뮤니스트당(KPD)과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의 최초의 징후에 대한 대응으로서 출현했고, KPD 내부의 좌익 분파가 비원칙적인 책략에 의해 축출되어 1920년 형성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에 의해 선도되었다. 비록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I) 지도부에 의해 "유아적"이고 "아나코 노동조합 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 지라도, 낡은 의회 및 노동조합 전술에 대한 KAPD의 거부는,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맑스주의적 분석에 기반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러한 전술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볼세비즘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강령적으로 명료한 핵으로서의 당 개념을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의 낡은 "대중당" 개념에 대한 KAPD의 거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KAPD,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쿡과 호르터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이것은, 20세기 초 독일의 코뮤니스트좌파가 주요한 약점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쇠퇴를 장기간의 몰락과정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최종적인 "죽음의 위기"의 형태로 바라보는 그것의 기조 때문에, 그것은 혁명물결의 퇴조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자발주의(voluntarism)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영구적인 단절을 결과 시킨 조직문제에 대한 약점들 및 1922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립하려던 헛된 노력도 이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갑옷에 난 이러한 틈새로 인해, 그것은 1920년대 동안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데 방해를 받았고 결과적으로는 파편화라는 재앙적인 과정을 겪어야만 했으며, 이는 별개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평의회주의(councilism)"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부분 이론화되었다.

     

    9. 한편, 이태리에서 코뮤니스트좌파 - 처음에 이태리코뮤니스트당 내부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유했던-는 조직문제에 있어서 특히 명료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변질되는 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에 대항해 용감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운동의 난파를 무사히 살아남아 반혁명의 어두운 시기동안 맑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하나의 코뮤니스트 분파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반, 부르주아 의회로부터의 거부를 주장하고, "대중적인 영향력"의 환상을 주기 위한 대중주의적 거대 정당들과 코뮤니스트 전위 사이의 융합에 대항하며, 통일전선 및 "노동자정부"의 슬로건에 대항한 그것의 주장 또한 맑스주의적 방법론의 심오한 파악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현상 분석 및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부르주아 정당과의 모든 반파시즘 전선에 대한 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보르디가의 이름은 이태리 코뮤니스트좌파의 역사에서 이 시기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 투쟁가의 공헌의 거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태리 좌파는, 볼세비즘이 레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로 환원 될 수는 없다. 이태리 좌파와 볼세비즘 양자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운동의 유기적 산물이다.

     

    10. 러시아에서 혁명의 고립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노동계급과 더욱 더 관료적인 국가기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를 초래했다 - 이러한 괴리의 가장 비극적인 표현은, 크론슈타트 노동자 병사 반란에 대한, 점점 더 국가와 뒤엉켜가던,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볼세비키당에 의한 진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기 때문에, 또한 볼세비즘은 그 자체의 변질에 대항한 수많은 내부적인 반응을 만들어냈다. 레닌 자신- 1917년에 그 당의 좌익의 가장 분명한 대변인이었던- 은 당이 관료주의에 잠식되어 가는 것에 대해, 특히 그의 생애의 말기에, 매우 적절히 비판했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시기에, 트로츠키는 당 내부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규범을 회복하려 시도했던 좌파의 주요한 대표자가 되었는데, 이 좌파는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의 가장 악랄한 표현들에 대항한, 특히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항한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대부분에 있어서 볼세비즘이 국가와의 융합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로서의 그 자신의 역할을 침식했기 때문에, 당 내부의 가장 중요한 좌파 흐름은 국가기구에 대하여보다는 계급에 대하여 친밀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던 덜 유명한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었다.

     

    이미 1919년에, 오신스키(Ossinski), 스미르노프(Smirnov) 및 사프라노프(Sapranov)에 의해 주도된 민주집중주의(Democratic Centralism) 그룹은 소비에트의 "위축"에 대해 그리고 파리코뮨의 원칙으로부터의 점증하는 이탈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유사한 비판이 1921년 콜론타이(Kollontai)와 슬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의 주도하의, 노동자 반대파(Workers' Opposition)그룹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이것은 "중단(Decist)"그룹에 비해서 덜 엄밀하고 덜 영속적인 임이 판명되었다. 데시스트 그룹은 20년대 동안 줄곧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이태리 좌파의 그것과 유사한 접근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1923년 미아스니코프(Miasnikov)에 의해 주도된, 노동자 그룹(Workers' Group)은 그것의 선언을 발행했고 그 해에 있었던 노동자의 파업에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 입장들과 분석은 KAPD의 그것과 가까웠다.

     

    이 모든 그룹은 볼세비키당 으로 부터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원래 원칙으로의 회귀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당 내부에서 투쟁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반혁명 세력이 당 내부에서 입지를 획득해감에 따라서, 다양한 반대파들이 이 반혁명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것의 조직화된 표현에 대한 어떤 감상적인 충성과도 단절하는 능력이 핵심적인 논점이 되어갔다. 이것은 트로츠키와 러시아 코뮤니스트좌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입증하게 된다: 트로츠키가 소련의 옹호 관념에 심지어는 스탈린주의 당의 노동자 계급적 본질에 집착한 채 평생 동안 남아있었던 반면에, 코뮤니스트좌파들은, 스탈린주의의 승리 - 많은 트로츠키 추종자들을 혼란시켰던 그것의 "좌편으로의" 전향을 포함해서 -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적()의 승리를 의미하며 새로운 혁명의 필요성을 암시함을 인식했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 반대파 중에서 많은 우수한 자들은 -소위 "비타협적인 자들"- 자신들이 20년대 후반 및 30년대 초반에 코뮤니스트좌파의 진영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테러는 30년대의 말엽 즈음에 이들 그룹을 거의 확실하게 제거해버렸다.

     

    11. 1930년대는,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 봉기-는 이미 소멸되고 말았다. 코뮤니스트당은 민족수호의 정당으로 되어 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들이, 혁명운동이 그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특히 그 나라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는 추방과 억압과 증가되는 고립에 직면에 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들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트로츠키가 이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좌익반대파는 "대중의 정복"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점점 더 기회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 사회민주주의적 정당 속으로의 "프랑스 전환(French turn)" 회귀, 반파시즘으로의 투항 등등. 이러한 노정의 최종 결과는, 트로츠키 자신에게 있어서 보다는 트로츠키주의에 있어서, 1940년대 동안 부르주아 전쟁기계로의 편입이었다. 그 이래 트로츠키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및 스탈린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정치도구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의 모든 가장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연속성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

     

    12. 이러한 궤도와는 반대로, 평론지 빌랑(Bilan) 주변의 이태리 좌파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다: 첫째, 전쟁으로의 행진에 직면해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혁명물결의 특히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 대조표(balance sheet)"를 초안할 것, 그리고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당시 혁명가에게 특히 혹독한 시험이었고, 많은 혁명가들이 반파시즘의 나팔소리에 사로잡혀서, 그 전쟁이 양 진영 모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이며,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총연습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빌랑(Bilan)은 꿋꿋이 나서서, 1차 대전시 레닌이 양쪽 진영 모두를 비판했듯이, 파시스트와부르주아의 공화파 양자 모두에 대항한 계급투쟁을 호소했다.

     

    동시에, 이 흐름 - 이후에 벨기에, 프랑스 및 멕시코에서 부분을 포함하는-에 의한 이론적 공헌은 매우 거대하며 진정 대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관한 그것의 분석 -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에서, 미래의 이행기 문제에 대한 그것의 연구에서, 경제위기와 자본주의 쇠퇴의 기초에 대한 그들의 작업에서, "민족해방"투쟁들을 위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옹호입장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서, 당과 분파의 이론의 정교화에서,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치 흐름과의 부단한 하지만 형제애적인 논쟁에서, 이러한 그리고 다른 많은 분야에서 이태리 좌파분파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세우는 그 임무를 의심할 여지없이 수행해냈다.

     

    13. 독일에서 코뮤니스트좌파 그룹의 파편화는,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 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 지라도, 나치 테러에 의해 완결 되었다. 1930년대 동안, 독일좌파의 혁명적 입장의 옹호는, 비록 폴 매틱(Paul Mattick)에 의해 주도된 그룹에 의해서도 미국에서도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특히 국제코뮤니스트그룹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빌랑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좌파는 국제적인 학살로의 길을 준비하는 모든 지역적 제국주의 전쟁들에 직면해서,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유혹에 저항하여 국제주의를 견지했다.

     

    네덜란드 좌파는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있어서 노동자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에 의해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한 - 그리고 그러한 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그것이 볼세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이점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이었다.

     

    14. 한편, 이태리좌파는 비록 반혁명에게 그 값을 치르긴 했지만, 일종의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했다. 전쟁 직전, 이태리좌파는 세계대전의 절박한 위험을 부정하는 "전쟁경제이론"에 의해 혼란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의 활동은 제국주의적 충돌의 시기에, 특히 한 프랑스부분의 출현에 의해 계속되었다. 전쟁의 말기에 즈음하여, 이태리에서의 주요한 프롤레타리아 투쟁들의 발생은 그 프랑스부분의 위상에 있어서 한 층 더한 혼란을 유발했고, 그 다수는 이태리로 되돌아가서, 20년대 후반 이래 정치적으로 비활동적이었던 보르디가와 함께 이태리 국제코뮤니스트당(the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 in Italy) 을 창립했다. 이 당은 비록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불명확한 강령적 기초 위에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한 잘못된 분석을 가지고 창립되긴 했지만, 혁명전투의 일종의 준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방향은, 그 시기가 승승장구하는 반혁명의 시기로 남아있고 그래서 자신의 임무가 아직 완수되지 않았음을 더 재빠르게 인식한 프랑스 부분의 대다수에 의해 반대되었다.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 (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는 빌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태만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및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전이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이태리 좌파에 매우 전형적이었던 확고한 맑스주의적 방법을 유지하는 한편, 그것은 독일-네덜란드좌파의 가장 훌륭한 공헌의 일부 또한 그것의 전체 강령적 병기고에 통합할 수 있었다.

     

    15.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의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코뮤니스트 입장의 명료성을 추구하는 정치적 인자의 새로운 새대를 낳았고, 기존의 혁명그룹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결국은, 좌파 코뮤니스트 유산의 쇄신을 모색하는 새로운 조직을 출현시켰다. 처음에, 이 새로운 정치적 환경은, 볼세비즘의 "권위주의적" 이미지에 대항하여 평의회주의에 의해 깊이 고취되었지만, 그것이 성숙함에 따라서, 점점 더 그것의 반조직적인 편견들을 버리고 맑스주의적 전통 전체와의 연속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현존하는 혁명적 환경 내부의 대부분의 그룹이, 조직문제 및 손상되지 않은 혁명전통의 보존필요성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던 이태리 좌파 경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르디가주의 그룹과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양자 모두가 이태리 국제코뮤니스트당의 상속자들인 한편,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대부분에 있어서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의 후예이다.

     

    16. 60년대 말의 프롤레타리아의 부활은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전진과 후퇴의 운동들을 거치며, 노정에 많은 장해물들, 특히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장해물이었던, 코뮤니즘 자체의 죽음에 대한 부르주아의 거대한 캠페인- 그 일부가 코뮤니스트좌파에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포함했던-과 직면하였다. 이 모든 과정의 곤경은 혁명적 환경 자체의 노정에 많은 곤경을 부과했고, 그것의 성장을 지연시키고 그 단일화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코뮤니스트좌파"운동은 진정한 맑스주의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세계 코뮤니스트당의 형성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가교"로서 남아있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걸쳐 계속 발전하는 새로운 투쟁가들이 코뮤니스트좌파의 그룹과 대면하여, 그들과 논쟁하고, 궁극적으로 그들과 합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새로운 투쟁가들은 세계혁명당의 구성에 스스로 공헌하게 될 것이고, 그것 없이는 어떤 성공적인 혁명도 불가능할 것이다.

     

    <출처 :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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