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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급의식] 중국에서의 마오주의의 환상과 적색 테러 - 오세철
  • 조회 수: 21719, 2013-05-06 09:24:04(2013-01-20)
  • 중국에서의 마오주의의 환상과 적색 테러   

     

     

                                                                                                                                                                                                                              -오세철

     

     

    1. 들어가며

     

      <<공산주의 흑서 (Black Book of Communism)>>에서 중국 관련 부분을 쓴 장-루이 마골린(Jean-Louis Margolin)은 ‘중국 공산주의’에 대한 분석이 두 배나 중요하다고 하면서 1949년 이래 베이징 정권이 붉은 깃발 아래 사는 인민의 3분의 2를 지배했고, 1991년 소련이 몰락하고 동유럽이 그들의 ‘공산주의’를 포기했을 때에도 인민의 10분의 9를 지배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베이징은 1960년 중·소 분쟁 이후 맑스주의-레닌주의의 제2의 로마였지만, 실제로는 대장정 이후 옌안의자유지역 탄생 이후(1935-1947)였다는 것이다.1)

      중국에서의 계급억압과 테러, 그리고 중국식의 파시즘을 이해하는 데는 우리의 지난번 <연재 3> 소련 분석에서 견지했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는 맑스주의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맑스주의 사상과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문화, 이데올로기와 사회심리적 조건들을 검토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개관하는 데는 1927년 노동계급의 패배까지의 중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와 그 이후의 반혁명,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 시기(1923-1933)를 명백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급의 패배 위에서 건설된 이른바 “중국인민혁명”은 중국의 농민 대중을 제국주의 전쟁에 봉사하도록 한 부르주아 신비화였다. 한 마디로 중국 혁명 과정은 전(前)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부터 임노동에 기초한 국가자본주의와 같은 것으로가는 이행에 불과했다.

      중국공산당(CPC) 내에서 마오의 정치적 흐름은 1930년대에 나타났는데, 이 시기는 반혁명의 중간지점이었다. 마오주의는 노동계급을 압살한 반혁명으로부터 출현했다는 것을 빼놓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오의 공산당은 그 후 부르주아지의 근본적 이해에 봉사했다. 마오는 코민테른 상임위의 퇴행에 따르는 경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기회주의 세력의 일부분이었다. 1927년 3월 상하이 봉기가 국민당 군대에 의해 유혈로 억압당한 날, 그리고 CPC의 혁명 세력이 처절하게 국민당과의 동맹을 끝내려고 하는 동안, 마오는 장제스를 칭송하고 국민당의 행동을 인정했다.2) 1928년부터 노동자는 더는 집단으로 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당이 더는 공산주의당이 아닐 때 적군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농민과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당에 들어왔다.

      ‘중국인민혁명’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제국주의적’이고 ‘혁명적’ 서사시로 기술된다. 그러나 실질적 목적은 십여 곳에 흩어져 대지주와 투쟁하던 농민 게릴라 세력을 정규군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대장정이 마오에 의해 조직되고 지도되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마오는 와병 중이었고, 대장정을 준비하는 기간 왕밍(?明)의 분파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다. CPC와 적군의 유일한 결속요인은 “돌아온 학생들”(러시아 유학생 또는 볼셰비키)이 제시한 소련의 제국주의 정책이었다. 그것은 스탈린 체제의 정치, 외교 및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달렸었다.

      1936년과 1945년 사이의 일본과의 전쟁기간 동안 옌안에서 마오는 공산당과 적군을 지배하게 되는데, 세 단계를 거친다. 옌안 기지 창설 그룹의 제거, 마오 분파의 강화, 그리고 왕밍 분파와의 공개적 갈등이다. 이른바 ‘시안 사건’의 배경은 장제스가 포로가 되었을 때, 스탈린의 압력으로 CPC와 국민당의 새로운 동맹을 협상하라는 미끼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동맹은 명백하게 부르주아적이며 제국주의적이었고, 결국 소련정부나 장제스 사이의 군사 협정으로 끝난다. 적군의 주요부대(제4 및 제8)는 장제스의 군대에 통합된다.

      1941년 독일군대가 소련을 침공하고 스탈린은 새로운 전선이 열리는 것을 피해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에 따라 국민당에 대한 소련의 군사지원은 끝났지만, 일본이라는 적과 협력한 책임을 지고 공산당 내의 왕밍의 스탈린주의 분파가 몰락한다. 10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이 태평양 지역을 통제하게 하였고, 이러한 사건들은 국민당과 공산당(특히 마오 분파)이 모두 미국에 접근하게 하였다.

      마오는 ‘돌아온 학생들’에 대한 전면 공격을 단행하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정화 운동”을 한다. 마오는 이들을 “중국에 맑스주의를 적용하는 데 교조적이고 무능력하다.”라고 비판했다. 이들에 대한 숙청도 1943년 정점에 달했는데, 코민테른의 공식적 해소와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대한 미국의 중재와 맞아떨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틀 속에서 “정화 운동”은 공산당이 미국에 접근하게 하였다. 이는 마오 진영의 부르주아적 본질을 의미할 뿐이었다.

      1945년 4월 숙청이 “공식적”으로 끝남에 따라 마오와 그 분파가 당과 군을 통제하게 되었고, 마오는 당 주석이 되었으며 마오주의, 즉 “마오쩌둥 사상”을 ‘중국에 적용된 맑스주의’로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마오주의가 어떻게 농민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 중국사상과 접목하면서 인민과 영합 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중국의 전통문화와 마오주의의 영합

     

      중국에서 문화의 개념은 인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마오 사상 특유의 개념으로 정의된다. 문화는 밖의 세계를 인식하거나 개념화하는 방식의 구체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를 강화시키고 영속화하는 것이며,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는 ‘올바른’ 방식으로서의 세계관을 의미한다.3) 사상은 독립적 존재로서 맑스주의 상부구조 개념 안에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상은 반드시 경제적 토대에 따를 필요가 없으며 사회주의가 자동으로 프롤레타리아 사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인간의 정신 상태는 그가 사회계급에서 갖는 성원자격을 결정하는데, 맑스주의로 바뀐 부자는 프롤레타리아이며 옛날 관습에 매달리는 빈농이나 노동자는 부르주아에 해당한다. 모든 물질적 장애를 극복하는 주체적 능력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인간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인간 자원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문제와, 맑스주의와의 이론적 충돌을 가져온다는 점이며, 둘째는 유교와 신유교가 말하는 마음(心)의 개념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理)가 더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 마음 자체라고 하는 왕양명(1492-1529)의 사상은 이러한 ‘중국식 공산주의 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완전성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념적 자기규율에 의해 평등주의가 유지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과 행위의 통일(知行合一)을 주장함으로써 올바른 사상을 통해 객관적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마오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유교와 마오 사상의 차이는 마오 사상이 형이상학 체계가 아니라 당에 개인을 연결하는 수단이며, 신유교의 마음(心)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마오 사상은 투쟁의 수단으로 자연과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4)

     

      전통 중국과 중국인민혁명 이후의 중국은 문화주의로부터 혁명적 민족주의로, 가족주의로부터 사회주의적 형식을 가진 집합주의로, 관료주의로부터 당의 규율로 바뀌었지만, 문화(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기능은 같다. 인민의 수동성을 생산적 에너지로, 가족에 대한 충성을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변형시키면서 국민성의 나쁜 부분을 고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중국에서의 지성사를 더듬어 볼 때 독창성보다는 전통의 종합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유교에서의 사회와 합리성에 대한 강조와 도가에서의 개인과 행동의 직감적이고 비합리성의 강조를 갈등으로 보기보다는 두 전통을 통합하려고 한 보기를 들 수 있다.5)

      물론 전통문화에 대한 중국 공산주의자의 태도를 이중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전통의 철저한 파괴로 해석하는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6) 그러나 대체로 중국에 대한 학자들의 인식은 전통과의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서방의 논문에서는 권력투쟁으로 보는 견해,7)  맑스주의를 중국문명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우연한 현상으로 보는 견해,8) 스탈린주의 같은 정치적 변태로 보는 견해9) 가 있을 수 있다.

      전통 중국에서 유교가 수행했던 문화 이념의 역할은 그대로 마오 사상에서도 수행됐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정치조직의 기반으로 정치사회화의 내용을 제공하고 정치분석의 방법을 제공하며, 인민과 관료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우선순위와 희망에 따라 사회를 결속시키며, 규범과 의사소통의 경로가 되고 행동과 제도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10)

      그런데 전통 중국 사상 중에서 유교와 도교가 강조했던 조화와 고요라는 유산은 버려야 할 유산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보았다. 인(仁), 충성심, 이타심은 오히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다스리는 사람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화시키려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며, 도교에서 궁극적으로 반대가 사라진다는 주장도 변증법 입장에서 배격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대동(大同)은 유교의 슬로건인 동시에 공산주의적이고 사실로서 존재하는데, 이는 19세기 말 캉유웨이(康有爲)가 부활시켰으며, 마오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먼로는 전통 중국 사회의 의식적인 유산으로서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초보적 유물론, 무신론, 그리고 미완성의 변증법을 들고 있는데, 음양 철학과 변증법은 비슷한 구조로 인식되기는 하나, 음이 양의 반대가 아닌 보완물이나 반영으로 보는 점이 다르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데 마오에게 모순은 사물 사이가 아닌 사물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무의식적 유산으로는 도덕적 훈련으로서의 교육이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열쇠라는 생각이며, 이를 통하여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1)

      도덕적 훈련으로서 교육이 지니는 의미는 기존의 규범에 대한 인민의 태도를 바꾸게 하는데 중점을 둠으로써 통제를 내면화시킨다. 공자는 올바른 정신의 탈바꿈이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으며, 왕양명(王陽明)의 지행합일과 마오주의 주의주의의 유사한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마오 사상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론은 몇 가지 방식으로 실천에 의존한다. 첫째, 실천은 이론보다 우선한다. 실천적 활동의 원초적 국면은 생산이며, 사회적 실천은 계급투쟁, 정치활동, 그리고 과학적·예술적 추구를 포함한다. 둘째, 개별이론도 실천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그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경험을 통하여 습득되기 때문이다. 셋째, 이론은 자기의 생활을 개선하려는 능력으로부터 인간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데 이는 이론이 실천으로부터 나오며 실천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 중국 사상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사회성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 사이에 보존의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맑스 이론이나 소련의 이론을 넘어서는 중국의 인간이해는 사람들의 개성과 능력이 무한히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계급 내의 동질성에 대한 맑스주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게 만들었다. 인간성의 본질을 이해하는 유교적이며 마오주의적 관점은 정부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해야 정당한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부가 자기 의무를 실행하는 데는 어떠한 방법이 정당한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결합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결합성은 세 가지 정신현상, 인식, 감정, 그리고 행동의지의 결합을 수반한다.12)

      물론 결합성 속에 포함된 심리학적 사실들의 상세한 구성요소에 관하여 유교는 마오주의자들과 다르게 설명하지만 앎, 감정, 의지 등의 마음의 구성요소가 서로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다는 믿음은 동일하다. 즉 현재의 중국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인식과 감정을 결합시킨다. 중국에서 심리적 사실이 계급의 표시라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어떤 신념이나 감정이 본래부터 한 인간의 의식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며, 둘째, 인간의 계급의식이 많은 심리적 활동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자아개조라는 말은 도교와 유교의 ‘수신’과 자화(自化)라는 말과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중국에서는 공식적인 외부의 교육기관에 순응하는 정도가 크지만, 전통 사상에서는 개인적인 의무에 의존하는 폭이 넓다는 점일 것이다. 중국인의 입장은 올바른 사상, 소망과 같은 내적 요인들이 물질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중요한 속성, 즉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다는 천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은 국가 양성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 주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선천적인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선천적인 결함이 없어서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능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통치자들에게는 대중을 학습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 연약함 속에 강력함의 근원이 있다는 원칙은 외형적으로는 약해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덕망 있는 통치자가 모범이 됨으로써 인민의 마음을 끌고 강대해 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인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라고 보았던 것이다.13)

      여기서 소련과 다른 중국적 특징은 대중 노선을 사용하는 것이다. 양성의 개념과 같이 대중 노선은 소련의 이념과는 모순된다. 또한, 중국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도덕 지식과 관계를 맺게 하려고 모든 사람에게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교육을 한다는 점도 소련에서 발견할 수 없는 중국의 특징이다.

      또 하나의 유교의 전통은 정당성의 기준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신유교에 있어서 성인(聖人)은 마음속에 사실과 가치가 항상 적절하게 결합하여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기준은 그대로 중국에서 지속하였다. 하나는 홍(紅)과 전(專)의 결합으로 나타났다. 일부 학자들이 홍과 전을 이분법으로 보고 이를 대립적 관계로 파악한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14)

     

    “홍과 전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들의 융합이다. 그들은 밀접하게 연관되고 나누어질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물리치지 않는다. ‘홍’은 정치이다. 그것은 모든 과업의 정신이고 지도자이다. ‘전’은 전문적인 직업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도구이고 무기이다.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들의 위대한 효용성을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지식인이 발달시켜야 할 재질과 미덕을 결합하는 기준이다.”15)

     

      송영배 교수는 유교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택동에게서 드러나는 ‘중국화 된’ 맑스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주체적 능동성(또는 혁명적 의식)’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가 ‘모택동 사상’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유교의 ‘전통적’ 사상이 모택동에게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유가 또는 2천 년 이상을 ‘유교적’으로 교육되어 온 중국인들에게는 사물들이 인간의 ‘주관적 윤리적’ 의지에 의해서 처리되고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모택동에 의한 주관적 능동성의 강조는 전통적 유교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후진적 경제상황과도 연관되며, 또한 그것은 사실상 상부구조, 생산관계 등에 우선적 의미를 주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모택동의 ‘주관적 능동성’에 대한 높은 평가가 사회주의 건설, 다시 말해 물질적 생산, 사회 생산력, 과학 기술 등등을 촉진하는 과정에서도 과연 ‘필연적’이었고, 또한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16)

     

      마오주의가 맑스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절충주의적 견해임을 다음에 더 구체적으로 지적할 텐데, 이를 통해 우리가 검토한 중국의 전통사상과 문화가 오랫동안 중국인, 특히 농민의 심리구조 속에 뿌리박혀 있었고, 그를 중국 농민 혁명과정에서의 지배도구로 활용하고자 한 마오의 전술이 대중에 영합하면서도 대중에 대한 무의식적 억압이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3. 마오주의의 본질과 중국혁명

     

      처음부터 마오주의는 마오나 그 분파가 당에 대한 전면적 통제를 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권력 유지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마오는 국민당, 귀족, 군벌, 대부르주아지와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과 함께 전쟁에 당이 참여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자본의 도구로서의 당의 새로운 정체성은 마오주의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렇게 마오주의는 제국주의 전쟁에서 애국의 깃발 아래 노동하는 대중(특히 농민)을 동원하는 부르주아 전선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자 마오주의는 중국 ‘인민의 국가’의 공식 ‘이론’, 즉 중국에 확립된 (국가) 자본주의 이론이 되었다. 국공합작을 했을 때 마오는 쑨원이 제시한 대로 민족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종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쑨원의 1911년 ‘혁명적 민족주의’는 중국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감추려는 신비화에 불과했다. 결국, 마오주의는 공식적 스탈린 교본의 세속적 표현이고, 스탈린 반혁명의 이념적 체계를 적용한 것에 불과했다. 마오주의가 맑스주의를 어떻게 위조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마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말할 때, 그것은 오직 ‘부르주아 혁명’ 내에 존재한다. “1924-1927년의 혁명은 잘 정의된 강령을 기초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두 당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은 거짓이다. 1924-27년 시기는 ‘민족 혁명’이 아니라 봉기의 지점에까지 이르게 한 중국 대도시의 노동계급의 혁명적 물결이었다. ‘북방 정벌’은 혁명적 승리가 아니라 도시를 통제하고 노동계급을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부르주아지의 공작이었고 그 정점에 국민당에 의한 노동자의 학살이 있었다.

      둘째,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는 것은 1848년 이래 맑스주의의 원칙인데, 이는 마오주의에서 정반대가 된다. 그에게 애국주의와 국제주의는 같다.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는 또한 애국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애국자이며 우리의 표어는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공격자에 대한 투쟁이다.” (민족 전쟁17) 에서의 공산당의 역할, 1938년, 10월) .

      셋째, 마오는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적 역할을 언급했지만, 계급투쟁에 대한 마오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피착취계급의 이해를 착취계급의 이해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계급투쟁의 이해는 저항 전쟁의 이해에 종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계급 사이의 관계에서 재조정의 적절한 정책을 적용해야 한다.” (민족 전쟁에서의 공산당의 역할, 1938년, 10월)

      넷째, 마오주의의 ‘맑스주의의 발전’은 저개발국을 위한 혁명적 경로로 제시된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을 통해 국가의 문제에서 드러난다. ‘신민주주의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독재로 이끌지는 않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로 여러 혁명계급의 통일전선 독재로 이끈다.’라는 말은 중국에서의 제국주의자, 협조자, 그리고 반동분자의 지배를 패배시킬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과는 다르다. 마오는 새로운 국가 유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어떤 특정계급의 도구가 아니라 계급 간 전선이나 동맹이다. 이는 계급지배의 형식일 수는 있지만 맑스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신민주주의’ 이론은 인민 즉 모든 계급의 정부를 주장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유형이다. 이는 공산당의 통제 아래 여러 지역의 대다수 농민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다섯째, 마오의 ‘철학적 저작물’은 대학 서클에서 ‘맑스주의 철학’으로 가르쳐졌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주의 방법과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스탈린의 통속화에 의해 고무된 마오의 철학은 정치적 왜곡의 정당화일 뿐이다. 제국주의와 문제의 국가 사이의 모순은 주요 모순이 되고 국가 내의 다른 계급 사이의 모순은 잠정적으로 이차적이고 종속적 수준으로 격하된다. ‘대체된 모순’의 마오의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족적 이해의 이름으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을 포기할 수 있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적대적 계급은 제국주의 살육의 틀 안에서 통일되고 통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피착취 계급은 착취자의 이해에 굴복할 수 있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요약하면 마오주의는 노동계급의 투쟁, 그 의식, 그들의 혁명조직과 전혀 관련이 없고, 맑스주의와도 관련이 없다. 즉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 발전의 내부 경향이 아니고 그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혁명 원칙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혼동시키고 가장 어수룩하고 편협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대체시킬 뿐이다.

      그러면 마오 체제 아래에서의 국가 자본주의 발전단계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라는 마오의 슬로건은 농민 게릴라에 기초한 사회주의로의 새로운 길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노동계급 없는 농민혁명을 통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실제로 마오의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기둥 중의 하나였다. 1949년의 마오 체제는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2단계 이론’이라는 스탈린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중국공산당은 농촌으로 나아가 이른바 ‘농촌 소비에트’를 세워, 도시 노동계급을 포기하고 농민을 포용함으로써 부르주아지와 동맹하는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오의 농민 ‘적군’이 부패한 장제스 독재를 패퇴시킨 것은 몇 가지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다. 소련의 스탈린 관료주의가 극동에 그들의 방패막이를 세우려 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공격으로 국민당 체제는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런데 스탈린이 기회주의적 동맹을 한 것은 장제스였다. 스탈린의 계획은 마오를 양쯔강에 멈추게 하고 장제스와 분할하기를 원했다. 토지 개혁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얻은 마오는 부르주아지에게도 대안세력이었다. 1949년의 ‘민주’ 정부의 수립은 공산당이 십여 개의 부르주아 당과 함께 한 것이며, 사회주의 또는 노동계급의 정권을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마오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산업 대부분을 접수하고 관료적 계획 경제를 강제하면서, 1950년대 후반 자급자족 코뮌이라는 집단 농업의 강제라는 ‘대약진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 운동은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추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 혼합경제와 점진적인 자본주의 발전은 한국 전쟁으로 흔들렸고, 미 제국주의로부터 민족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기 위해 중공업을 통한 급속한 산업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명령경제와 국가자본주의를 활용하여 노동의 지시, 8등급 임금체계, 낮은 가격의 농산물 구매, 농민의 세금 인상을 단행하게 되었고, 노동자, 농민, 하급 관리의 소득을 최소화시켰다. 다수 노동자를 위해 단 웨이(單位)체제18)와 ‘철밥통 정책’으로 복지를 해결하면서 잉여생산물을 중공업과 군비에 집중했다. 마오시대에 국민총생산의 30%가 투자되었고, 1957년에는 50%까지 상승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까지 급속한 산업화를 유지하는 계획은 전통적 중국 농업의 낮은 생산성이라는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 도시의 작업장을 특징짓는 사회조직의 형식인 단웨이 제도는 당과 국가에 노동계급을 포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현대 영농기술, 농업의 기계화에 기반을 둔 농업의 집산화는 부유한 ‘쿨락’ 농민 계급을 출연시켰다. 공업화와 집산화의 ‘두 다리로 걷는다’라는 마오의 국가자본주의 정책은 대약진운동(1958-61), 문화혁명(1966-69) 시기를 제외하면 연평균 성장률을 10%로 유지했고, 중국을 세계 6위의 공업국으로 끌어올렸다.

     

      요약하면 마오시대는 제국주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족 정체성의 유지나 노동자, 농민에 대한 높은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자급자족적 명령경제를 확립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로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오의 중국은 1930년대 근대화와 산업화를 향한 ‘제3세계’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1978년 자유시장 경제개혁으로의 이행은 수억의 중국 인민이 보건혜택을 못 받게 하고, 수천만의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나는 중국으로 변모시켰다.

     

     

    4. 중국의 농민, 지식인, 그리고 관료주의

     

      마오주의가 전통적 중국문화의 절충적 선택을 통하여 맑스주의의 원칙과 관련 없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된 데에는 절대다수의 인민인 농민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마오는 맑스주의 원칙을 주장한 진독수(陳獨秀: 1880~1942)보다 농민이 중심이 되는 신중국 건설을 주장한 이대교(李大釗: 1889~1927)에 더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장악하고 나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가장 큰 잘못은 빈곤한 농촌과 남루한 농민들의 실상을 외부세계에서 볼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아마 집안 문제를 숨기는 중국의 전통적인 허위의식에서 나왔거나 나쁜 일을 감추려는 공산당의 과장된 자존심에서 나왔을 것이다.19)

      대약진운동도 그 목적이 최종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지 않았고, 유토피아적 환상을 실현하는 데 있었다. 대약진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정신이 더 아름다워지고 더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약진이 실패하자,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확산하였는데, 이는 허황된 마오식 공산주의에 대한 징벌이었다. 농민들은 도둑질, 유랑, 진20)향 단위암시장 등과 같은 수단으로 정권에 도전하였다. 도시의 노동자에 기반을 둔 계급의식의 발전이 아닌 농민의식에 기댄, 유토피아 건설의 허황함이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이는 중국 농민의 근본 정서, 다시 말해 원시적인 아름다움, 세상과 동떨어진 한가함, 자급자족으로 근심 걱정 없는 농촌 생활을 하는 찬란한 몽상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마오는 신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마오의 ‘학대채 운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국의 몇 억 농민들과 천만의 생산대가 대체와 같아지면 중국은 이 지상에서 공산주의 낙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마오가 말년에 저지른 실수인 문화 대혁명도 지도자의 공적을 무조건 긍정하고 미신으로 발전시키며, 새로운 교조로까지 신성시하는 우상숭배와 봉건적 지배관계의 무의식구조가 뒷받침되었다고 본다.

      1990년 설 후의 「인민일보」는 돈을 벌려고 일을 찾아다니면서 광주나 상해 등지의 기차역에 체류하는 농민이 수십만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유민 물결이 사회의 화약고와 다름없다고 보는 루이링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21)

     

    “수십만 명이 부유하는 상황에선 서로의 공감으로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강한 피해의식과 보복심리를 갖게 된다. 개개인의 이러한 정서가 뭉쳐서 지도자도 없고 목표도 없는 파괴적인 운동을 언제라도 촉발시킬 수 있다. … 그래서 이때 과격하고 종교적이며 반권위적인 사상이나 신념이 인간 의식의 깊은 곳에 아주 쉽게 뿌리내릴 수 있다.”

     

      중국의 농민 범죄 가운데는 인질을 잡아놓고 협박하여 돈을 요구하는 범죄율이 높고, 인신매매의 경우, 특히 여자를 팔아넘기는 범죄가 만연하여 중국 농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계급의식이 없는 농민을 중시하는 마오주의의 중국은 자연스럽게 반지성주의와 연결된다. 1957년 여름 ‘반우파운동’에서 중국의 지식인과 공산당 사이에 감정이 악화되었다. 물론 마오는 지식인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와 관용의 정신을 표현했지만, 결국 총칼로 정권을 획득한 농민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와 오만한 심리를 버리지 못했다. 마오의 제자이며 중국 공산당 원로 가운데 한 명인가경시(柯慶施)는 중국의 지식인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는 게으르다. 평소 그들은 스스로 다그치지는 않고 오히려 항상 꼬리만 치켜세운다. 둘째는 얄팍하다. 사흘만 그냥 내버려두면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긴다.” 그가 지식인을 경멸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는 농민 출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공산당 내부의 성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22)

      루이링거는 중국 지식인의 민족의식에는 그 특수한 발전과정 때문에 심각한 결함이 생겼으며, 다음과 같은 증세가 나타난다고 보았다.23)  첫째는 인격의 독립성 결여이다. 군중을 향하고 세속을 향하는 경향이 짙다. 쉽게 과격해지고 외부의 선전에 좌우되며, 권위적인 지도를 갈망하고 권위를 보호한다. 따라서 모든 민중민주 운동은 똑같이 민주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 둘째는 자율정신의 결여이다. 도덕 수양과 자주 의식이 없어서 중국 청년 지식인들의 단체 행동에는 저급한 도덕수준과 천연덕스런 위법성이 나타난다. 셋째는 정치 평등의식의 결여이다. 전체 사회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에 맞지 않다. 1957년의 공산당 영도권의 포기 요구, 서단장(북경 서 단대의 회색 벽돌담)의 삼권 분립 요구(1966년 대자보 유행), 1989년의 언론 개방 요구 등은 민주의 껍데기를 쓴 소수 엘리트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전체 구성원의 공동 이익이나 보편적 복리가 아니었다.

      위와 같은 농민과 지식인의 특성은 중국의 뿌리 깊은 관료주의와 연결된다. 중국의 보수파 이론가들은 당대의 계급투쟁이 단지 마오의 신경쇠약성 의식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 결코 보편적 사회모순은 아니었다고 본다. 자신의 정신 질환도 치료할 수 없었던 마오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인 견해에 따르면 당내의 계급투쟁과 간부의 부패 현상에 대한 마오의 두려움과 긴장은 강철, 강생 등이 그의 귀에 대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댄 결과였다는 것이다.24) 이는 마오가 상해 꼬뮌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우려를 나타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의 관료주의는 상층보다 생명력이 더 강한 하층 소유 사회의 정치에 의해 좌우되었다. ‘우량화’는 ‘정화’로 바뀌었다. 권세가 있는 기층 지도자들은 이를 빌미로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을 배제하고 자신의 권력 환경을 정화하였으며, 자신에게 보복하려는 자와 권위에 위협이 되는 자들을 제거하였다. 권력은 우량화 된 이후 다시는 감독받지 않았다. 우량화 된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패하고 공공연하게 뇌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서방의 나라들은 법률상으로 권력에 대한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감독과 통제를 제도적으로 철저하게 규정하여 권력이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은 관리들의 도덕적 양심을 믿고, 관리들의 사상, 도덕 교육을 중시하므로 권력을 감시, 통제하는 제도의 제정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다. 이 때문에 권력이 이익에 유혹되고 매수될 기회가 서방국가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의심스러우면 쓰지 않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중국의 용인철학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철학적 명언들은 비상품 사회에서 생겨난 것이고, 현재 중국은 상품경제 사회인 자본주의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링거는 1987년 중국의 맛보기 식 정치체제 개혁이 대단히 어렵고 유감스런 일인데, 이는 덩샤오핑이 지도한 이 개혁의 진정한 어려움은 인민의 이익을 건드리면 인민이 반기를 들 것이라는데 있다고 보았다. 인민이 물가, 정치, 자유화, 주택 등과 같은 것에는 양보할 수 있지만, 두 가지 기본요소, 사회주의 국가가 부여한 평균 수준의 생활보장제도와 심리적으로 획득된 주인의식을 굳게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25)

     

     

    5. 중국에서의 테러와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

     

      1927년에서 1946년까지 중국 혁명은 테러와 분리될 수 없다. 1927년에서 1928년의 몇 달은 문화혁명의 시기와 맞먹는 ‘민주적 테러’ 체제의 확립시기였다. 펭 파이(P’eng P’ai)가 이끄는 중국의 농촌 소비에트는 반혁명분자인 지주에 대해 대대적 공개재판을 통해 대부분을 사형시켰다. “죽여라 죽여라”를 외치면서 희생자를 갈기갈기 찢었고, 요리해서 먹었으며 살아있는 가족에게도 먹였다.이는 고대 동사이사의 전형인 복수축제의 열광이었다.26)

      1931년 총살당한 펭 파이는 군사화 된 농촌의 공산주의자였는데, 도시 노동자 운동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자신의 농촌 소비에트를 주장했으며, 마오가 이를 받아들여 1927년 ‘후안에서의 농민운동 보고서’에 이론화되었다. 1949년 마지막 승리까지 중국 공산주의의 주요 모델은 국가 건설에 혁명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적을 분쇄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군사적이고 억압적 기구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1927년-31년까지 대략 18만 6천 명의 희생자를 낸 중국 소비에트의 테러는 스탈린의 대테러(1936-38)보다 훨씬 먼저 벌어졌기 때문이다.

      1946년에서 1957년 시기는 농업 개혁과 도시에서의 숙청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학살을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으로도 생각했지만, 마오는 1952년 11월 한국 전쟁에 중국 군대를 보내면서 그들을 성역화하기 위해 급진화 시기 동안 학살을 좋은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반동분자를 죽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농업 개혁이라는 목적보다는 지식인, 부르주아지 소상인, 비공산주의 투사, 독립적 공산당 간부를 포함하는 모든 집단을 공산당의 전제주의적 통제를 위협하는 집단으로 보고 대중운동을 통해 도시에서의 숙청을 확산시킬 목적이었다. 1949-52년 동안 공산당 공식 통계로는 2백만 명이 숙청당했다.27)

      1950년 7월에 시작하여 1951년으로 이어지는 숙청은 반혁명분자 제거운동으로 三反(반 낭비, 반부패, 반관료주의)과 五反(뇌물, 사기, 탈세, 거짓말, 국가기밀누설), 그리고 서구화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사상개조’였다. 억압은 1955년까지 계속되었고, 특히 지식인을 겨냥한 “숨겨진 반혁명분자”를 제거하는 새로운 운동(sufan)이 전개되었다. 1957년 5월의 ‘벽화운동’은 마오가 몇 주간의 자유화 기간에 형성된 낙관주의를 파괴할 목적으로 일으킨 ‘독 있는 풀잎’ 제거였으며, 수만 명의 공산주의 지식인이 덫에 걸렸고, 40만-70만의 간부(지식인, 기술자, 엔지니어)가 20년간 투옥되었다.

      라오가이(Laogai 勞改)는노동을 통한 인간개조로 그 시기 중국에는 1천 개의 대규모 수용소가 있었고, 유치장은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수용소는 대규모 공기업으로 위장되었다. 라오가이는 마오가 수천만 인민을 눈멀게 한 블랙홀이라고 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5천만 명이 이 제도를 거쳐 갔고, 그곳에서 상당수가 죽고 매년 천만의 감금자(인구의 1.2%)가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새로운 인간’의 추구는 새로운 복귀 가능성이 없는 감금이었고, 세뇌 기법이 동원되었다. 개인 표현의 기회를 박탈하고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체계적인 음식 덜 먹이기, 자유 시간 박탈과 개인 공간의 축소(과다 인원, 밤샘 조명, 사유물 금지) 등이 이루어졌다.

      한 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라는 중국식 딱지 붙이기는 잘 알려졌다. 중국에서는 죄가 있기 때문에 체포되는 것이 아니라 체포되었기 때문에 죄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체포는 공산당이 주도하고 마오가 통제하는 ‘인민 정부’의 경찰이 수행했다. 노동수용소에서의 평균 음식량은 1개월 12-15kg의 곡물이었는데, 이는 19세기 프랑스 감옥보다 적고, 소련 수용소보다 적고, 1935-77년 베트남 수용소와 비슷했다. 비타민과 단백질 부족이 심각했다.28)

      1966년부터 1976년의 문화혁명은 무정부적 전체주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망자는 40만-100만이라고도 하고, 어떤 학자는 100-300만이라고 주장한다. ‘억압적 반역’의 상징인 홍위병은 국가 기구를 공격하는 목표를 지닌 마오의 작품이었는데, 1966-67년에는 지식인과 정치 간부에 대한 폭력, 1967-68년에는 대결과 분파의 행위, 1968년에는 질서회복의 잔인한 억압 시기로 나뉜다. 홍위병은 14-22세 사이의 교조적이고 불만에 가득 찬 마오의 열광적 지지자들이다. “세계는 여러분의 것이고, 중국의 세계는 여러분의 것이다.”와 ‘당은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이들의 노래가 지니는 파시즘의 광기를 엿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반지성주의는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홍위병은 어느 곳에서나 그들의 슬로건을 반복했다. “자본가 계급은 피부다. 지식인은 피부에 자라는 털이다. 피부가 죽으면 털도 없다.”29)

      여러 번 자아비판을 했기 때문에 지식인은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문화 혁명 기간 천8백만 간부 중 3-4백만이 투옥되었고, 인민 해방군 내에 홍위병을 금지했지만, 40만 군인이 투옥되었다. 지식인 가운데 14만 2천의 교수, 5만 3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 500명의 의대 교수, 2천6백 명의 예술가와 작가가 투옥되었고, 그 중 대부분은 살해되거나 자살했다.

      문화 혁명의 명백한 실패는 도시 거주자들이 정치에 신뢰를 잃어버리게 하였다. 젊은 세대가 더욱 그러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조소, 범죄, 이기주의가 모든 곳에서 규범이 되었다. 중국인은 지쳤고 두려워했다.

      유교 전통에서 마음의 평화는 선한 행동에서 오지 않고 올바른 곳에서 올바른 말을 하는 것한테서 온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아시아 공산주의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이념의 과도한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즉 새로운 사회가 다시 만들어지는 것을 통해 유교와 공산주의의 조합 위에서 분류되고 재조직화하는 열광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개개인의 마음이 새롭고 더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고, 이러한 개인들의 행동은 새로운 지식에 근거한다는 생각에 의존함으로써 전 세계의 변혁을 꾀한다는 점이다. 결국, 그것은 말의 향연과 관념론에 빠지고 과도한 의지주의에 근거한 폭력과 열광으로 나아가 파시즘적 토대를 형성한다. 마오주의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6. 마오 시대 이후의 중국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과 노동자 계급의식

     

      덩샤오핑의 ‘자유주의 시장개혁’ 정책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마오의 ‘2단계론’에 근거하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머나먼 미래를 위해서는 장기간의 자본주의 발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또한, 그는 ‘올바른’ 마오 노선으로 공산당을 되돌린다고 항상 강조했다. 1970년대 말부터의 ‘시장개혁’은 생산을 지구화하는 넓은 과정의 부분이라고 보았다. 전후 시기 부르주아 운동은 ‘반제국주의’ 수사학을 포기하고 값싼 노동기지로 중국을 전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까지의 시기를 덩 시대의 1차 개혁으로 볼 수 있다. 마오 시대에는 보건과 복지의 개선이 있었지만, 첫째, 1950년 이후 대다수 노동자의 개인 소득이 오르지 않은 점, 둘째, ‘농민을 위한 교육’을 위해 청년을 농촌으로 보내는 인기 없는 정책의 포기로 당 간부 자녀의 도시 실업문제가 발생한 점이 드러났다. 1차 개혁 시기에는 소비재 공업으로의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1980년대 말에는 1950년대 건설한 중공업의 내구연한이 끝나 중공업 시설도 새롭게 대체되어야 했다. 노동 생산성을 향상시키려 했지만 마오 시대의 명령 경제는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자유주의 개혁은 세 가지였다. 첫째, 특별기업지역(SEI), 둘째, 중앙계획의 폐지, 셋째, 국가 금융 및 개혁의 재조직화였다. 핵심 산업을 제외한 중소기업은 당과 국가기구의 하급 수준으로 위양하여 이윤분배협정을 맺고 지방관리와 공장관계자의 이윤추구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로 다시 경제에 대한 직접 통제로 전환된다.

      1990년대 초 서구의 관측통은 동유럽의 개혁처럼 ‘시장사회주의’ 단계를 거친 ‘자유시장경제’로의 점진적 이용이 실패할 것으로 보았으나, 중국의 개혁 초기의 성공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다른 중국 특유의 당과 국가의 분권화 구조에 맞는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잘 규정된 상법 등의 법체계 없이 사업에 필요한 상호신뢰가 중국의 전통적 ‘관시’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성공 원인이다. 그 결과 1980년대 경제 개혁으로 나타난 자본가계급은 당과 국가의 틀 속에 포괄되었고, ‘관시’로 연결된 국가 관료주의에 종속되었다.

      이 새로운 계급은 권위주의적 일당국가의 정치적인 ‘현상유지’를 방어하는 공통 이해를 지닌다. 일당국가의 지속적 지배와 중국 부르주아지의 응집성과 배타성 때문에 1990년대 초 이후 일어난 경제개혁에서 중국의 새로운 자본가 계급은 중심적 구실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두 번째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동구 블록의 해체 중에 이루어진 천안문 사건으로 중국은 1차 개혁 물결에 느슨해진 중앙통제를 다시 강조하게 되었다. 중국은 단지 값싸고 복종적인 노동력 때문뿐 아니라 마오 시대와 덩 시대의 1차 개혁에서의 자본축적의 결과 비교적 발전한 동아시아 경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국유기업과 초국적 기업 사이의 합작이 이루어졌고, 이윤은 국가와 초국적 기업 사이에 분할되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중국이 경제성장을 지속하려면 정치 개혁이 이루어지고 일당국가가 종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30년간 중국의 자유주의 경제 개혁은 경제 관계의 상품화와 화폐화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적 자본축적으로 통합됨으로써 거대한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고 계급투쟁을 봉쇄하여 산업 평화를 유지하는 중국 정부(자본)의 능력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 자본축적에서의 미국과 중국이 차지하는 역할을 살펴보면서 세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계혁명의 가능성과 세계전쟁을 통한 야만의 가능성을 모두 예견해야 한다. 1960년부터 미국 경제는 일본과 유럽에 자신의 기반을 침식당해 왔으며 1980년대의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던 것이 80년대 말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고, 경제 성장은 채무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1990년 일본이 거품경제로 그 기반이 약화된 반면, 미국은 레이거노믹스로 점점 힘을 얻었고, 미사일 방어체계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높은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주요 산업이 동북부의 노조가 있는 제조 산업 중심으로부터 남부와 서부의 노조 없는 컴퓨터 산업으로의 이전은 1930년대부터 쌓아온 노동계급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그 결과 임금이 유지되었고,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켰다. 1990년대 이윤율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후 경기 붐에도 볼 수 없었던 수준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부채 기반의 소비거품 때문으로 자본 축적의 취약성을 은폐하고 있으며, 이는 최근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로 표현된 공황으로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거대한 국가부채는 미국 자본주의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은 아직 과학기술의 세계적 중심이며, 1980년대 구조조정에도 세계의 광범위한 산업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 시장은 세계의 최대시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서유럽의 노동계급의 지위는 동유럽의 거대한 산업예비군의 통합으로 침식당하지만, 미국은 당분간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의 중심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한다.

      1980년대 자본축적의 재구조화의 본질은 세계경제 주변부의 이른바 ‘신흥공업국’에 생산적 자본을 재할당하는 것이었는데, 노동집약 산업으로 방적, 의류, 신발, 장난감을, 새롭게 발전하는 산업으로 정보통신, 컴퓨터를 분할했으며, 1980년대 말까지는 일본이 그리고 1990년대에는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중국은 1990년대 말까지는 동아시아 상품 생산의 노동집약적 조립단계를 이어받으면서 아시아 자본축적에 진입한다. 1998년 이후 중국은 세계 시장을 향한 아시아 상품의 제조단계로 상승했다.

      이윤율 저하와 선진 자본주의 내에서 투쟁적 노동계급 사이에서 짓눌려 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자본은 주변부의 값싸고 복종적인 노동력을 찾아야 했고, 그것이 신흥공업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한 것이다. 중국은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인구, 50년간 급속한 민족자본의 축적, 그리고 값싼 노동력의 거대한 저수지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높은 사회적 생산성에 필요한 하부구조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합작기업은 중국정부가 얻은 잉여 이윤 가운데 상당 부분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 노동력 착취수단의 증가는 생산수단의 원가 절감과 생존수단의 저렴화로 일반화된다.

      중국의 출현과 지구적 자본축적에의 통합은 1970년대, 80년대 구조조정으로부터 촉발된 자본주의 재활성화를 연장하고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중국의 부상은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헤게모니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는 희소한 천연자원에 대한 경쟁이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유주의 대안으로 불리는 ‘베이징 컨센서스’는 중국의 정치, 사회적 환경과 전통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떠오르는 시장경제’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에너지를 위한 중국의 요구가 중요한 것은 15년간의 수출지향을 통한 성장으로 새로운 공장시설, 원자재의 투입 증가로 나타났다. 2004년 중국은 세계에서 원유소비 7.4%, 석탄 31%, 철강 27%, 철광석 30%, 알루미늄 25%, 시멘트 40%를 점하고 있다.

      중국의 공업화는 거대한 수출단지로 중국을 이용하는 초국적 기업과 서구시장(특히 미국)의 거대한 할인소매점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 제너럴 모터스라면 지금은 월마트이다. 2002년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제품의 10% 이상을 월마트가 차지하고 있다. 월마트는 한 편으로 중국의 수천 개의 노동착취 공장에서 이윤을 얻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저임금을 강요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노동자 사이의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매년 600억 불 이상이 수천만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로 이루어진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중국으로 쏟아지고 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거대한 노동예비군은 임금 인하의 지속적인 압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본질적 문제는 당면한 경제 문제보다 시장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사회적 재앙과 특정 계층으로의 부의 집중이다. 중국은 1949년 혁명으로 얻은 사회적 성과인 공공교육, 공공보건이 해체되고 있고, 탈규제화로 세계최악의 공해와 안전부재국이며, 세계최대의 온실가스 생산국이다.

      한 마디로 중국 자본주의는 노동집약적, 노동억압적, 불평등하고 무정부적이고 환경파괴적인 자본주의이다. 부패의 만연, 알코올 중독, 매매춘, 모든 사회적 악이 1949년 이래 노동자의 독립적 역할을 억압했고, ‘시장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은 중국 자본가와 세계 자본 이해의 집단적 대리자이며 노동계급을 자본의 논리로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국가 자본주의 국가이다.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은 지속되고 있으며, 더욱 규모가 커지고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 중국은 당과 정부를 앞세워 이 계급투쟁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향해 무자비한 억압과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이를 뚫고 일어서는 중국의 노동계급은 앞으로 세계혁명의 주요 주체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투쟁을 통해 강화되는 계급의식이 민족주의로 변질하여 세계전쟁으로 비화하여 중국 노동자를 살육하고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중국식 파시즘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과 미국의 노동자 연대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노동자 연대를 통한 노동자 국제주의를 통해 세계 혁명으로 진군하는 앞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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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주>

     

    1) Jean-Louis Margolin, “China: A Long March into Night”, in Stéphan Courtois et al.(eds.)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and Repressi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464쪽.
    2) Report on an investigation into Human peasant movement, Mao Zedong, March, 1927.
    3) James Chieh Hsiung, 「Ideology and Practice: The Evolution of Chinese Communism」, New York: Praeger, 1970, 127쪽
    4) 윗 책, 131-132쪽.
    5) Jean-Louis Margolin, 앞 글, 466쪽.
    6) Wang Hsȕeh-Wȇn, 「Legalism and Anti-Confucianism in Maoist Politics」, Taipei, Taiwan, Institute of International Relations, 1975, 이 책은 공자를

    비판하고 진시황을 찬양한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다.
    7) C.P. Fitzgerald, 「The Chinese View of Their Place in The World」, London, Oxford, 1964.
    8) T. Wang, “Power struggle in Peking: Plot and Counterplots”, Far Eastern Economic Review, January 25, 1968.
    9) 맑스 이전의 프랑스 혁명가 루이 블랑키(1805-1881)와 같은 혁명적 낙관주의로 평가하는 경우를 말한다.
    10) James D. Seymour, 「China: The Politics of Revolutionary Reintegration」, New York: Thomas Y. Crowell, 1976, 47-52쪽.
    11) Donald J. Munro, 「The Concept of Man in Early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9, 167쪽.
    12) 도널드 먼로 지음(김덕중 옮김), 「현대 중국의 인간이해」, 서울:청사, 1982, 57쪽.
    13) 윗 책, 148쪽.
    14) Tu Wei-ming, “Confuciansim: Symbol and Substance in Recent Times”, R.W. Wilson, et al.(eds.) 「Value Change in Chinese Society」, N.Y.:

    Praeger, 1979, 23-25쪽.
    15) 도널드 먼로, 「현대 중국의 인간이해」, 196쪽.
    16)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서울: 한길사, 1986, 483쪽.
    17) 여기서 민족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다.
    18) 작업장 중심의 공동체로써,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서는 단웨이 체계를 통해 국가의 복지기능 대부분이 개별 국가-자본 또는 기업에게 양도되었다.
    19) L. 루이링거 지음, 김용권 옮김, 「중국을 보는 제3의 눈」, 소나무, 1995, 53쪽.
    20) 향급행정구(鄕級行政區, 제4급)로. 향(鄕)이나 진(鎮) 등으로 불린다. 영어에서는 향은 township, 진은 town으로 번역된다.
    21) 윗 책, 95쪽.
    22) 윗 책, 112쪽.
    23) 윗 책, 191-2쪽.
    24) 윗 책, 206쪽.
    25) 윗 책, 285-6쪽.
    26) Jean-Louis Margolin, “China: A Long March into Night”, in Stephane Courtois et al.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 Harvard Univ. Press, 1999, 470쪽.
    27) 윗 책, 476-477쪽.
    28) 윗 책, 511쪽.
    29) 윗 책, 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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