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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붉은글씨] 다시 ‘소련’을 말하다 - 김성렬
  • 조회 수: 5090, 2013-05-30 18:21:34(201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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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소련’을 말하다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 김성렬/사회주의노동자신문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게 혁명이란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요. 혁명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어리석죠?”
    “어리석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우리 -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죠….”
    - 예브게니 자마찐, <우리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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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실의 시대’ 그 이후


    소련은 무엇이었는가? 소련은 어떤 사회였는가? 역사의 무대에서 소련이 사라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규정에 따르자면 소련의 붕괴는 이른바 ‘단기(短期) 20세기’의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부터 사실상 시작된 지난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이후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만큼 10월 혁명에서의 승리와 환희를 뒤로 하고 후퇴와 변질의 역사적 단절을 통해 등장한 소련 역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


    때문에 지구 영토의 1/6을 점한 그것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린 소련의 붕괴가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역사의 종언’을 운운하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앞에 대부분의 좌파세력은 무기력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인 실수로 매도당했고,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며 매장당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회주의를 향한 전망과 정치는 역사의 오류를 답습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소위 ‘상실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충족이 아닌 이윤추구의 경쟁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색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우익세력이나 사회주의의 실현불가능성을 외치는 자유주의 세력 모두 일반화된 상품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속수무책이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어 생산과 소비 역시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사슬에서 어느 한 쪽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위기는 발생하고 늘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IMF 경제위기’로 기억되는 지난 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미국 등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은 수출호조로 일시적인 극복이 가능했지만 현재 가중되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다. 때문에 중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출하고 미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글로벌 불균형’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른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올 정도로 세계경제는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스스로 붕괴된다거나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여태껏 경험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대공황을 비롯해 자본주의 체제가 그간 겪었던 수많은 경제위기의 역사가 예증해준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국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때 이른 낙관도 성급한 비관도 아닌 점차 확산되고 있는 대중의 자각과 정치적 각성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11년은 유럽과 미국,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맞서 대중의 직접행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과 역동성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성찰로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고, 남한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과 목마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만큼 과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역시 더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세기 동안 존재했고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과 판단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급의 폐절로 집약되는 사회주의는 오직 ‘지나간 미래’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불편한 진실’은 결코 우회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이하 <소련>)가 남한에서 1993년에 이어 2011년에 재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지난 1993년 당시 <소련>이 출간되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이야 지금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소련>이 맑스주의 운동에서 고전으로서 지닌 역사적인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서 소련 문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고민하는 데 있어 여전히 그 방향을 설정하는 시금석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소련을 말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2. 1917년 10월 혁명 : 과연 혼돈의 기원인가


    소련 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대한 재검토부터 필요할 듯하다. 사실 10월 혁명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로 삼을 만큼 오래된 쟁점이다. 역사 속에서 10월 혁명은 레닌의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열정과 행동으로 권력 장악에 성공했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고 압도적인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탓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혁명의 성격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체제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준다는 점에서 10월 혁명과 소련 사회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소련 사회를 놓고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규정한다면 10월 혁명과의 연관성은 한층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러시아는 왜 그토록 빠르게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는가? 그렇다면 10월 혁명은 처음부터 세계사에서 일탈해버린 잘못된 행동이거나 기껏해야 부르주아 혁명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소련 사회에 대해 살펴보기도 전에 숙명적인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태적인 사고로는 1917년 당시 10월 혁명의 본모습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10월 혁명과 세계 혁명




    19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제국주의 세계질서는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인식되었다. 자본주의의 자유경쟁과 달리 독점자본이라는 거대한 힘과 국가라는 거대한 힘이 서로 유착된 제국주의 열강들이 출현했고, 이들 사이의 알력과 갈등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 국제적인 정치경쟁은 이윤 극대화에 혈안이 된 경제경쟁의 양상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세계전쟁으로 전례 없이 유럽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곧 전유럽은 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 광란에 의한 대량살육이라는 비극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의 깊은 수렁은 불과 1년도 채 안 되어 대중의 의식을 애국적 열정에서 변모시켰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각성된 대중은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빵’을 공공연하게 직접 요구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1915년 이후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혁명적 정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반동적인 차르체제의 러시아에서 최대의 혁명적 정세가 성숙하리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혁명 전략과 관련된 레닌의 구상은 과거 1905년의 러시아 혁명 때와 비교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1905년 혁명기에 레닌은 러시아에 있어 부르주아 혁명을 제기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농민의 지지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외적 조건에 좌우되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 주장했다.


    이 같은 시각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이어졌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과제가 여전히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증대하는 위기가 서로 결부되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만큼 이 결합이 직접적임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을 관철시킨다는 것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이제 서구 사회주의 혁명의 서곡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분한 구성부분이 된 것이다. (레닌, 「러시아의 패배와 혁명적 위기」, <사회주의와 전쟁 外>, 오영진 옮김, 두레, 1989, pp.211~212)”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엇보다 1918년 당시 세계 제2의 산업대국이자 유럽 최강국이던 독일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자 세계혁명은 더 이상 헛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것으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10월 혁명은 세계혁명이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이제 겨우 첫 전투에서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나라에 있어 혁명의 발전과 지원, 그리고 각성을 위하여 러시아라는 일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술은 당시 유일한 국제주의적인 전술로 입증되었다.



    이런 까닭에 10월 혁명은 애초부터 러시아의 일국혁명이 아닌 세계혁명이란 전망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이중권력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혁명보다는 더 나아갔지만 아직 노동계급과 빈농의 순수한 독재에는 도달하지 못한 과도적인 국면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중권력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해야 했고, 우선 대중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화부터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의 고통에 놓인 수많은 대중들의 당면한 요구를 즉각 해결하기 위한 각종 혁명적 민주주의의 방책들이 시급하게 실행되어야 했다.


    예컨대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러시아 부르주아 권력의 반동적 관료주의에 맞서 혁명적 노동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민주주의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⑴모든 은행들의 단일 은행으로 합병, 그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 또는 은행들의 국유화 ⑵신디케이트들, 곧 가장 대규모의 독점적 자본주의적 기업연합들(설탕, 석유, 석탄, 철 및 강철 그리고 그밖의 신디케이트들)의 국유화 ⑶상업적 영업비밀의 철폐 ⑷생산업자들, 상인들 및 고용주들의 강제적인 신디케이트화(즉, 강제적 연합체로의 합병) ⑸소비자 조합으로의 주민의 강제적 조직화, 또는 그러한 조직의 장려, 그리고 조직 통제 행사”(레닌, 「임박한 파국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레닌의 세계사회주의 혁명이론>, 淺原正基, 한유승 옮김, 다락방, 1990, p.347)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러시아에서 직접적인 사회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과거 1980년대 남한의 PD 강령과 그 방침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민중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하고 이를 정식화 했지만 그것은 10월 혁명의 의미를 단순히 일국혁명의 차원으로 협소하게 재단한 결과 나타난 이론적, 실천적 왜곡이었다. 오히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이후 1921년까지 계속된 세계혁명의 시기에서 그 출발점이자 구성부분으로 보아야 하며 세계혁명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다. 일국적 잣대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으로 제한될 수 없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물론 사회주의의 완성은 바로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보증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좌절된 세계 혁명, 포위된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의 혁명적 정세는 분명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요구했다. 세계혁명의 붉은 물결은 유럽 곳곳에서 넘실거렸다. 그러나 1921년 3월을 기점으로 세계혁명의 고조되던 분위기는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볼쉐비끼당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사민주의에서 분화한 유럽 공산당들의 경우 대중의 자생적인 파업과 가두투쟁을 넘어서서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기 위한 임무를 사려 깊게 수행할 능력은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이 곧 드러났다. 특히 세계혁명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독일혁명에서 독일 공산당이 보여준 좌충우돌과 반복되는 오류는 혁명적 정세를 유실시키기 일쑤였다.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성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노동자권력 하에서 이제 막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로 들어섰고 또한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볼셰비키 그 누구도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와 지원 없이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기를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에 속했다.


    이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대공업적 팽창은 더 이상 소규모의 고립분산적인 지역적 시장이 아니라 서로가 연결되고 통합된 세계시장을 창출해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혁명도 그 자체로 세계혁명이고 또한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일국에서 노동계급이 권력 장악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세계혁명으로 확산되지 않고 고립된다면 필연적으로 반혁명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국민국가 단위로 노동자권력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러한 사회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궁핍이 일반화되어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등 지극히 퇴행적인 형태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이 겪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혁명의 잇따른 패배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현실적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 세계혁명을 표방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계적인 생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들에서 혁명의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전에 이미 대공업의 주요 부문과 은행, 무역 등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고, 전쟁 동안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와 집중화가 강화된 유럽에서 정작 기대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은 무위에 그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포위된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자신의 모든 노력과 전쟁 이후 유럽이 경험한 사회적, 정치적 동요에 불구하고 그들이 고립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결코 달갑지 않는 현실에 마주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차츰 ‘정상 체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물론 1914년 이전처럼 팽창하는 시장과 자유무역으로 대표되는 전지구적 경제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와 달리 일국적 자본주의가 규준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지배질서마저 위협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혁명의 고립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정권의 장기적 전망과 그 방향은 아직 미결의 상태로 열려 있었다. 레닌은 전쟁 이후의 국제관계를 일종의 ‘계급간 휴전상태’로 판단하며 식민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나뉜 서구 제국주의 열강간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피억압 민중들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터져 나올 또 한 번의 ‘군사적 대결’을 전망하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혁명을 지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몰두했다.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여전히 세계혁명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혁명과 괴물의 탄생




    분명한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장기적으로 지연될수록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한가운데서 언제까지나 온전히 존속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이후 러시아 혁명의 비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 체제의 등장을 놓고 그 원인을 불발된 세계혁명만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혁명의 실패가 곧 10월 혁명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로의 변질을 자동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단선적인 도식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반혁명 중에서도 역사상 유례없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국가관료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을 강제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소련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를 가능하게 한 내적 원인에 대한 규명 역시 필요로 한다.


    실제로 1921년 무렵 러시아 혁명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다. 1918~1920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볼셰비키 정권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지만 10월 혁명을 만든 계급의 기껏해야 잔영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끔찍한 경제위기와 공장폐쇄 속에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어 갔고,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대중의 자연적 지도자로 부상한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과 볼셰비키들은 내전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탈계급화 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내전 중에 강요된 식량 징발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다수를 점점 더 볼셰비키 정권에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 정권은 내전기의 처참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강제된 ‘국유화의 가속화와 국가통제의 강화’를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 즉 계급이나 국가가 없는 사회주의를 위한 당장의 실행조치로 혼동하며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던 전시공산주의(1921년 3월 신경제정책이 채택된 이후 그해 4월 레닌은 소책자 「식량세론」에서 처음으로 전시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인용부호로 묶어 사용했다. 이 용어는 한때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보그다노프의 개념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전쟁 중 서구 여러 나라에서 등장한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대체로 군대란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코뮌이며 전쟁의 영향으로 생산과 분배에 대한 국가통제가 확립됨에 따라 전시․소비공산주의가 군대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보그다노프는 전시공산주의가 계급투쟁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에 서구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 또한 부정하였다.)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시적 후퇴로써 정책적 방향을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변함없이 중시된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였다. 이는 탈계급화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수의 소부르주아 농민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다음번의 세계혁명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네프 시기 농민에게 경제적 이익추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불가피했고 또한 필요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문제는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기초한 소비에트 권력 그 자체가 내전이라는 반혁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대단히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나날이 강화되어 가는 국가권력과는 대조적으로 혁명의 활력은 급속도로 퇴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오직 자신을 방어하고 세계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가를 이용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계급과 국가권력의 사멸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내전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중앙집권화되고 군사화된 볼셰비키당의 등장이었다. 국가방위와 권력유지를 명분으로 한 군사적인 방법들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지녀야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당과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운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곧 인민에 대한 전면적인 강제의 일상화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발성의 위축을 가져오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권과 대중 사이의 이러한 균열 양상은 네프 도입 이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네프 초기 가장 주된 쟁점은 자본주의로의 후퇴와 양보의 한계였으며(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로의 급격한 전환을 주도했던 레닌은 후퇴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현실이 가르쳐 줄 것이라 공언했지만 네프의 시작과 더불어 투기가 만연해지고 당 안팎에서 부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는 후퇴의 중단을 외치며 당 대열의 재정비를 요구했다. 실제로 네프 시기 자본주의로의 퇴행은 사회경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자유로운 물품교환의 욕구는 너무나 필사적인 것이어서 일단 어떤 상거래가 합법화되자(1921년 3월)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져 모든 제약을 쓸어버릴 정도였다. … 사적 상인들은 점차 거의 모든 종류의 상거래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 사회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폐를 폐지하자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국영공업과 국영상업은 경제적 혹은 상업적 회계(khozraschyot, 독립채산제) 위에서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윤을 남기고 손실을 피하는 것이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김남섭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8, pp.94~98)) 상당한 위험이 내재해 있었던 만큼 당의 결속은 더욱 더 강조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전시공산주의 시기와는 다르게 노동의 탈(脫)군사화가 추진되었음에도 정치적 독점을 확고히 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위계질서와 군대화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형성이 금지되고 1921년 후반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된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1918년 초부터 우려했고 생애 마지막까지 싸워야 했던 관료주의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국가 형태는 그들과는 괴리되어 있는, 곧 국가와 결합된 당의 독재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 결과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두고 이른바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네프 시기 국가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볼셰비키 정권이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집단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와 그들의 굳건한 계급의식이었다. 노동자대중은 반혁명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해야 했지만, 그러한 국가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내전을 경과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심지어 소멸되어 가는 상황에서 혁명의 물결은 급속히 그 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압도적 다수의 독재가 아니라 단호한 소수의 독재로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1920년대 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볼셰비키당의 독재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당의 일각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으며 1923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노동계급의 독재를 볼셰비키당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테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레닌 역시 내전 때 국가와 당의 관계가 바뀌자 그 이전과는 다르게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볼셰비키당원들이 곧 국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대체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당의 독재를 관료주의의 독재로 대체한 것에 대해 주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10월 혁명의 이듬해인 1918년부터 발발된 내전과 그 후과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고려는 매우 중요하다. 소련 사회에서 발생한 혁명의 변질과 퇴락, 즉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에서 부르주아 계급 국가로의 전환을 놓고 대개 스탈린주의의 궤적을 따라 1937년(대숙청)이나 1928년(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 1927년(좌익반대파의 패배와 트로츠키의 축출)을 짚거나, 혹은 그 이전인 1921년(크론슈타트 반란 진압과 네프의 도입)에 주목하는 등 두드러진 연도와 관련해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 대중의 혁명운동에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퇴조하게 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경직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내전 시기가 미친 전사회적인 영향력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셰비키 정권이 곧바로 권력을 포기했다면 볼셰비키당은 제국주의 열강들과 결합된 부르주아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적 야당은 고사하고 철저하게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세계혁명의 좌절과 내전을 거치면서 본격화된 볼셰비키 정권과 노동자대중 사이의 균열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화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결국은 세계혁명의 꼬리표마저 떼어내고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만을 영속적으로 주장했을 때, 그 귀결은 일국사회주의로 치장된 또 다른 반혁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볼셰비키 정권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를 행사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누적적인 과정들을 주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는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빅토르 세르주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르주는 10월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대중의 혁명참여가 퇴조한 것이 1918년 말부터였다고 파악한다. 이 책의 원제가 ‘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등장한 코뮌국가가 불과 1년여 만에 당 독재의 국가로 전환되었다며 내전을 비롯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누적적인 역사적 과정들에 주목했다. 그럼에도 세르주는 내전 기간 내내 볼셰비키 정권을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며 그 생존을 위해 앞장섰는데, 이는 사회경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였다.)



    3.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과 이론적 혼란


    1920년대 초 볼셰비키 정권은 이미 진정한 혁명적 대중 권력기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물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의 자발적인 무장력은 내전을 겪으며 불가피하게 훼손되었고 그 후에도 민병제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물리적․문화적 후진성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옛 차르체제의 장교들도 편입된 적군에서 그 지휘와 통제는 점차 관료적으로 변해갔다. 또한 그 자체가 입법과 행정이 통일된 국가기구이자 직접민주주의의 표상이어야 할 소비에트는 내전 동안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이후 의회적인 감시기능으로 역할이 국한된 채 하향식으로 재건되었다. 더욱이 네프에 따른 자본주의로의 퇴행 속에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당에 의해 그 혁명성을 보증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노동자대중이 더 이상 국가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집단적인 통제력을 상실한 객체로 전락해가고, 또한 세계혁명의 전략에 종속되어야 할 러시아 혁명이 오히려 그 자신의 안정과 번영을 세계혁명보다 앞세우며 일국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게 될 때, 국가기구를 주도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반혁명의 귀결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의 역사에서 소위 ‘위대한 전환의 해’로 일컬어지는 1929년은 이런 의미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로 요약되는 스탈린의 급격한 정책전환은 일국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집행한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공업과 농업의 불균형 속에서 인민경제의 발전과 관련해 공업독재와 부농해체로 상징되는 트로츠키의 좌파적 노선과 공업발전을 농민경제에 의존하는 부하린의 우파적 노선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이론적 투쟁이 아닌 정치적 투쟁이었지만 그 승리자는 다름 아닌 당 중앙기관에 의지하며 당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삼은 스탈린이었다.

    레닌 사후 네프를 실질적으로 총괄했던 스탈린은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지만 정작 그것은 스탈린 자신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보자면 문제될 게 없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을 이유로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부정한 좌익 기회주의자로, 또한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과 방법을 부정한 우익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사실, 네프는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양보이자 후퇴로 시작되었지만, 세계혁명과 절연된 일국사회주의에 충실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는 국가권력 그 자체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경에 이르러 농업총생산이 전쟁 전의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고 권력이 안정화되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부농에게 더 이상의 양보를 중단하는 등 네프를 이제 적극적인 정책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7년 영국과의 외교 및 무역관계 단절 등 국제정세가 긴장을 맞게 되고, 그해 하반기부터 곡물조달의 위기가 심각해지자 스탈린은 이미 국가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 해결책으로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전면에 내걸고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 이전부터의 누적적인 추세를 반혁명으로 완결지은 공세였다.


    클리프 역시 『소련』에서 이와 유사하게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28년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설정한다. “이때 처음으로 관료층은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면서 급속히 자본을 축적하려 했다. 달리 말하면, 관료층이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되도록 신속하게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정성진 옮김, 책갈피, 2011, p.168)”


    클리프는 1928년 이후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보다 정확히 말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명명한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관료층은 노동계급에 기생하고 있는 신분에서 인격화된 자본인 지배계급으로 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소련 사회에 대한 이 같은 분석은 1948년에 정립되었는데, 당시 소련은 히틀러를 패퇴시키고 이른바 ‘대조국수호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유럽 전역에 스탈린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서구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내재한 이론적인 혼란과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선명하고 분명한 주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말하다


    클리프가 자신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정식화한 과정은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트로츠키주의 운동 내부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이론적 논쟁과 맞물려 있었다.


    클리프가 제출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원래 소련이 아니라 종전 후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4~45년 ‘인민민주주의’의 슬로건 하에서 대체로 동유럽이 소련의 감독 밑에 놓이게 되자 트로츠키가 건설했던 제4인터내셔널은 이들 국가들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리프는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주장한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에 동조했지만,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에 대한 이 같은 방침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클리프는 양자 모두 퇴보한 노동자국가임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면서 클리프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소련 역시 그 사회 성격이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우왕좌왕 하였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등장할 무렵인 1947~48년부터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자 그 완충지대에 있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강력하게 소련을 닮아가기 시작했고 불과 몇 년 만에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한 전환을 이루었다. 그러자 제4인터내셔널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과 동일하게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며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임을 중단했다는 수정된 견해를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클리프와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이상 없었다.


    당초 트로츠키는 전쟁의 비극을 다시 한 번 지켜보면서 이 전쟁이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새롭고 결정적인 시험대이자 노동자혁명을 촉발시킬 것이라 확신했다. 자본주의가 최종단계에 들어서게 되었고 생산력의 정체와 사회적 쇠퇴 속에서 지배계급조차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특유의 파국적인 정세인식은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 역시 이러한 압력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오래된 격언처럼 그 반대의 가능성(“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트로츠키, 「전쟁에 돌입한 소련」,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이장수 옮김, p.54))도 제기되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곧 닥쳐올 세계혁명과 그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러나 기대되었던 세계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게 활력을 보여주었고, 스탈린주의 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정적임이 입증되었다. 트로츠키의 예측은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에 따른다면 소련의 관료층은 이제 새로운 착취계급으로 스스로 등장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은 변화된 세계정세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고집스럽게 또 다른 정치적 격변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트로츠키가 그의 입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1930~40년대의 시대적 맥락을 고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또한 소련 사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로의 복원 가능성을 부정하며 과거 트로츠키가 했던 방식처럼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이유로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했다. 향후 혁명의 과제 역시 사회혁명이 아니라 기생적인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으로 한정되었다. (트로츠키는 본래 소련에 대해 개혁주의 전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소련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당을 없애고 새로운 혁명정당을 만드는 것이나 코민테른 대신 새로운 국제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이에 대한 스탈린주의 관료층의 묵인과 방조를 목격하면서 당과 국가를 개혁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트로츠키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었는데,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련의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도 악용될 수는 중대한 문제였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없듯이 당연히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피난소바야 가제타>라는 언론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하고, 정치혁명은 단 하루만에도 일어날 수 있으나 사회혁명은 수십 년 내에 행해질 수 없다고 협박하며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2월 혁명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명백한 사실을 숨기려 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이를 반박했다. “모든 정치적 격변은 단순한 파벌의 변화가 아니라면 사회혁명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계급이 그 사회혁명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1917년 2월 27일 혁명은 니콜라스가 이끄는 봉건지주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그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주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사회혁명이었다.”(레닌, 「인민을 놀라게 하려고 자본가들은 어떻게 애쓰고 있는가」, <레닌저작집 7-1>, 레닌출판위원회 옮김, 전진출판사, 1991, p.409))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을 정통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중 스스로 국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러한 국가가 노동자국가가 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노동자국가가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도 없이 동유럽 국가들처럼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때문에 트로츠키주의 운동 안에서 클리프를 비롯해 반대 조류가 출현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소련의 방어를 주장해야 했다. 193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목격한 트로츠키에게 ‘발전하는 사회와 쇠퇴하는 사회’의 구별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전쟁에서 소련의 방어를 호소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이유로 소련 사회를 두고 노동자국가의 변종이자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로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트로츠키의 견해를 왜곡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1936년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했다는 스탈린과 달리 소련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임을 명확히 했다. 물론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보다 진보한 사회체제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주장은 공통된다. 그 근거도 대부분 소련 사회에서 존재한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로 집중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가지고 그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혁명 이후 사회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기능할 뿐이며,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전사회적으로 획득․점유되어 생산이 더 이상 개별단위에게 맡겨지지 않고 전사회적으로 조직되는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계급의 폐절과 국가기구의 사멸을 전제로 하며, 가치법칙 역시 소멸하게 된다.


    “사회가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그것을 직접 사회화하여 생산에 이용한다면, 각인의 노동은 그 특유하게 유용한 성격이 아무리 상이하더라도 처음부터 직접 사회적 노동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생산물에 들어 있는 사회적 노동의 양을 확정하기 위해서 우회로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 ; 날마다의 경험이 평균적으로 얼마만큼의 사회적 노동이 필요한가를 직접 알려주게 된다. … 따라서 이제 사회가 생산물에 투입된 노동량을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알고 있는 이상 그 노동량을 … 제3의 생산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사회의 머릿속에 생겨날 리가 없다. … 그러므로 사회는 위에서 말한 전제에서는 생산물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3, pp.338~339)


    그러나 정작 소련에서 상품생산의 일반적 성격은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일국사회주의라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상품생산의 현실을 ‘사회주의적 상품생산’으로 호명하며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이론을 왜곡하였다. 1952년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에서 스탈린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때로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가치법칙이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여부가 질문된다. 그렇다, 그것은 존재하고 작용한다. 상품 및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가치법칙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인가? 아니다.” (스탈린,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 <스탈린선집 2>, 서중건 옮김, 전진출판사, 1990, p.240, 255)


    하지만 엥겔스는 “가치법칙은 바로 상품생산의 기본법칙이며, 따라서 또한 상품생산의 최고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법칙이기도 하다(엥겔스, 앞의 책, p.342)”라고 분명히 했다. 스탈린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소련 사회에서 가치법칙의 존재를 자인하는 것이자,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일례로 스탈린이 소련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선언한 그 무렵 트로츠키는 “루불화는 대중의 경제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되었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1995, p.106)”고 밝혀 소련에서 화폐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님을 명백히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련이 노동자국가로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 민병제가 상비군으로 대체되고 관료제가 부활했으며, 당의 퇴보와 소비에트의 무력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소련의 국가기구는 사멸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유례없는 끔찍한 강제기구로 변했다고 증언했다. 트로츠키 그 자신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겼던 국유화와 계획경제도 노동자대중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도리어 그 위에서 군림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모습은 소련 사회가 아무리 퇴보했다고 해도 더는 코뮌국가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향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등장하게 될 코뮌국가의 구체적인 방침을 미리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등장한 다음과 같은 방책은 분명히 확인될 필요가 있다.


    ““경찰과 상비군이 폐지되어 보편적으로 무장한 인민으로, 즉 인민의용군으로 대체되고; 모든 공무원이 선출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거인들의 다수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소환에 응하고; 예외 없이 모든 공무원이 유능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초과하지 않는 수준의 급여를 받고; 의회 대의기관들이 점차적으로 입법기관 및 행정기관의 기능을 겸비하는 (다양한 계급과 직업 출신의, 또한 다양한 직업 출신의) 인민 대표자들의 소비에트로 대체될 보다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바로 코뮌국가인 것이다.” (레닌, 「당 개정에 관한 자료들」, <레닌저작집 7-2>, 레닌출판위원회 옮김, 전진출판사, 1991, p.36)


    오히려 트로츠키가 묘사한 소련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0년대 초 레닌은 이미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해 당시 사회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한다면 그것 역시 코뮌국가의 일종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분명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을 트로츠키가 그것도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보여준 반혁명의 최종적 귀결 이후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코뮌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클리프를 포함해 당시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반대자들에게 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해명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선택한 것은 바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이었다.


    클리프 이전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역사


    지난 1990년대 초반 남한에 클리프의 『소련』이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국가자본의론은 클리프가 주도하여 창건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이하 SWP)의 이론적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서구에서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해명하려는 노력은 클리프의 이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었고,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미 상당히 인기 있는 이론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기의 그 배경에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역사에 대한 단선적인 도식, 즉 ‘봉건제→(국가)자본주의→사회주의’와 친화성이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에 따라 소련 사회를 관료적 집산주의를 비롯해 ‘제3의 체제’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살펴볼 것처럼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의 유형에 속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사회주의도, 노동자국가도 아니라서 자본주의로 규정한다는 편의적 사고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 사회의 성격 문제를 위해 고안된 이론이 아니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의 역사는 10월 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국유화와 사회복지정책이 실시되자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이를 소위 국가사회주의 정책이라 부르며 지지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러자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하여 이들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부르주아 국가의 팽창이 ‘국가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불리하게 세력균형을 바꿈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어떤 분석적인 의도를 갖고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독일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독일이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그만큼 강하게 규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더욱 정교해졌다.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나타났던 기업에 대한 생산의 강제, 소비재의 분배 규제, 최소가격의 고정 등은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대해 부하린은 “자본주의적 ‘국민경제’는 비합리적인 제도에서 합리적인 조직으로 변화했으며, 주체 없는 경제에서 그 자신을 경제주체로 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금융자본주의 성장, 부르주아 경제조직과 정치조직의 결합”이었다. (부하린, <과도기 경제학>, 황수정 옮김, 백의, 1994, p.21) 따라서 “금융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편성은 국가자본주의적 조직화로 나아가는 길이었으며, 그것은 상품시장의 폐지, 화폐가 계산단위로 전화되는 것, 생산이 국가적 규모로 조직되고, 모든 ‘국민경제’ 구조가 세계적 경쟁이라는 목적에, 특히 전쟁 목적에 종속되는 전 과정과 더불어 진행”된다고 보았다. (부하린, 앞의 책, pp.48~49)


    당시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부하린처럼 자본주의 발전의 더 높은 새로운 국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은 1918년 상반기 러시아의 볼셰비키당 내에서 벌어진 국가자본주의와 관련한 논쟁에서도 반영되어 있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이 수습되자 경제를 국가운영의 최우선적 과제로 놓으며 기업의 노동규율 확립, 경영의 단독책임제 도입, 독립채산제의 실시, 부르주아 전문가 활용, 경쟁의 조직화 등 일련의 경제조치를 내세웠다. 레닌 스스로도 파리코뮌의 원칙으로부터 일보 후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당내에서 좌익적 경향을 대표하던 부하린, 오신스키 등은 이러한 정책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부르주아 세력의 부활 가능성을 우려하는 한편,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권은 미리 박탈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 속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독점이 확고해질 때 도입된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는 노동자국가에 봉사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있는 러시아 경제의 독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18년 5월 「좌익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적 심리」에서 레닌은 “현재 러시아에서는 (소농 중심의-옮긴이)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데, 그것을 대규모 국가자본주의로 혹은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은 양자 모두 완전한 동일한 과정이며, 또한 이 과정은 ‘생산과 분배에서의 국가적 계획과 통제’라는 완전히 동일한 중간 역을 거친다”고 했다. (레닌, 「좌익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적 심리」, <좌우익 기회주의 연구>, 이민희 편역, 아침, 1988, p.282) 이는 그만큼 러시아에서 우선적인 과제로 대규모 생산의 발전, 즉 국가자본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단호한 사회화’를 주장할 때, 레닌이 이를 ‘국유화나 몰수’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사회화를 위한 계산과 분배능력의 결여라는 당면한 현실을 고려해야 함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1918년 중반 이후 내전의 본격화는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적 구상을 사실상 기각하며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논쟁도 일단락시켰다. 이후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네프 시기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좌익에 속한 호르터, 판네쿡, 륄레 등이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비판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당초 이들은 10월 혁명에 열광하고 지지했지만 이후 그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재규정하였다. 오토 륄레에 따르면, 볼셰비키당은 봉건제에서 사회주의로 직접 나아감으로써 하나의 역사적 시기를 건너뛰려 했지만 결국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즉, “러시아 혁명은, 주어진 역사적 환경에서, 오직 부르주아 혁명일 것이다. (마르셀 판 데르 린던, <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 황동하 옮김, 서해문집, 2012, pp.59~60에서 재인용)” 이러한 견해는 일국차원에서 10월 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난한 카우츠키를 제외한다면 소련 사회를 가장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경우였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비롯된 만큼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개입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시장경제로 폭넓게 해석되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규모의 거대화와 맞물려 국유화를 통한 사적 자본주의의 지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의 역할을 하는 경제라는 개념으로 예전에 비해 협소한 뜻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추진된 전면적 국유화 조치와 관련이 깊다.


    트로츠키의 경우 이를 근거로 파시즘 국가와 소련 사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자랑한다 : ‘내가 이탈리아에서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원한다면 필요하고 적절한 객관적 조건들은 전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즉 자본가계급 전체의 생산수단 전부를 국가는 아직 몰수하지 않았다. 이 조건을 실현하려면 파시즘은 계급투쟁의 바리케이드에서 노동자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 전부를 몰수하는 일은 다른 사회세력, 다른 지도자, 다른 중핵들을 필요로 한다.”(트로츠키, 앞의 책, p.251)) 그러나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연구 작업은 그 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그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그 출발에서부터 꼼꼼한 독해를 요구한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① :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혼란스런 이해과 이론의 왜곡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모델로 삼은 만큼 <소련>에서 먼저 소련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이는 소련에서 혁명이 어떻게 파괴되어 있는지 생생한 사례와 구체적 통계를 통해 환기시켜주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클리프는 10월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재확인한다. “차르 체제의 몰락을 재촉한 제1차 세계대전은 교전국들 각각의 생산력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세계 수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물질적 조건들이 무르익었음을 나타내는 것(클리프, 앞의 책, p.156)”이라고 함으로써 10월 혁명의 의미를 일국차원으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마련되기도 전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비극은 10월 혁명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과격 정파의 지도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의 지배와 그 계급지배가 함축하는 여러 조치가 실현되기에는 시기가 성숙되지 않은 때에 한 정부를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딜레마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한 마디로 그가 어쩔 수 없이 해야 대변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정파나 계급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제 조건이 성숙된 계급이다.”라고 한 바가 있다. (엥겔스, 「독일농민전쟁」, <독일 혁명사 2부작>, 이종훈․김용우 옮김, 소나무, 1988, pp.122~123))


    이를 토대로 클리프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됨에 있어 1928년의 제1차 5개년계획을 그 기점으로 놓는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도 이때부터는 명확하게 자본축적을 지상과제로 삼게 된 자본가계급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클리프가 소련 사회의 국가자본주의적 특성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기 이전 <소련>에서 주요하게 문제 삼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규정은 대단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한 소련을 통해 노동자국가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입증하려는 과정에서는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왜곡과 그 일반화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클리프가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트로츠키였고,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 곧 자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리프는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에서 피력한 견해(“국가자본주의가 경제 전체를 지배할 경우 이 이윤균등분배 법칙은 자본들간의 경쟁이라는 우회로가 아니라 국가 회계라는 방식을 통해 직접 그리고 즉시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지금까지 존재해본 적이 없으며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대한 모순 때문에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더욱이 국가가 자본주의적 소유형태의 보편적 담지자가 되면 사회혁명의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이 될 것이다.”(트로츠키, 앞의 책, p.250))처럼 국가자본주의의 실현 불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국가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더라도, 사적 자본주의가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 실제로 사회의 모든 자본이 하나의 수준에 집적되는 상황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클리프, 앞의 책, pp.170~171)”


    하지만 곧이어 클리프는 “집권한 노동계급이 타도되고 난 후에 전통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가 부활할 가능성도 배제하는가?(클리프, 앞의 책, p.171)”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의도는 분명했다. 소련 사회를 통해 국가자본주의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클리프가 제기하는 국가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은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발전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일 수밖에 없다. 소련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패퇴시킨 반혁명에 의해 등장하게 되는 국가자본주의를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격을 서술하면서부터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 극한이라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국가자본주의는 노동자국가와 함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한 단계로 격상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유는 클리프가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판단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물구나무선 국가자본주의, 즉 국가자본주의 자신의 대립물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 것이라 주장한다. “사회세력들 간의 상관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지수형(한 곱 더 올라간) 권위를 나타내며, 여기에서 자본의 지배는 극치에 달하여 정말로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 독재로 표현되는 자본의 지배 하에서 적대적 생산관계를 토양으로 하는 생산과정의 합리화이다. … 사회주의 독재 체제는, 만약 국가사회주의라는 말이 일반에 통용되는 과정에서 더렵혀지지만 않았더라도 그것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으로서, 국가자본주의의 변증법적 부정, 대립물이다. 여기에서 생산관계의 유형은 근본적으로 바뀌며 자본주의 종주권은 폐지된다.”(부하린, 앞의 책, pp.140~142))


    이러한 입장은 앞서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제한적인 조건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는 “소련은 통상적인 표준(즉, 독점자본주의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한 국가자본주의 개념)과는 다르다”며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한 국가자본주의보다 소련 경제가 이 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보다 분명하게 말한다.(클리프, 앞의 책, p.186) 이렇게 될 경우 클리프가 트로츠키와는 달리 국가자본주의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 사회를 통해 설정했던 예외적인 가능성과 그 양식은 이제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클리프의 자기논리는 서로 충돌하게 되어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한편,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의 실재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자본주의로의 변질 역시 부정했는데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폭력적인 반혁명의 부재였다. 이와 관련해 트로츠키는 “소련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정부에서 부르주아 정부로 점진적으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개혁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클리프, 앞의 책, p.199에서 재인용) 클리프 또한 소련의 반혁명 과정에서 노동자권력을 해체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양상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클리프는 노동자국가의 관료가 지배계급으로 바뀌면 경제적 부활과 정치적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국가는 점진적으로 노동자대중과 절연된다고 주장했다. “관료가 대중의 통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과정은(1928년까지는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할 수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혁명적인 질적 변화의 단계에 이르렀다.(클리프, 앞의 책, p.199)” 뿐만 아니라 이를 다음과 같이 일반화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이 평화적으로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관료와 상비군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에는 관료도 상비군도 없다. 그래서 이러한 제도들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국가에서 그것들이 존재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클리프, 앞의 책, p.200)


    그러나 소련 사회에서 반혁명의 귀결이 일견 점진적인 이행으로 비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1918~1920년의 내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내전을 거치며 10월 혁명의 코뮌국가로서의 의미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대중이 정치권력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0년대 말 권력을 움켜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반혁명의 최종 공세는 오히려 문화혁명으로 둔갑하며 모든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책은 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또한 대중운동에 적극성을 더해주었으며 전투성을 동반하게 했고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기대감을 일깨웠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 전반을 60년대 중국의 경우에 빗대어 ‘문화혁명’이라 불렀다. 이러한 파악방식은 수백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은 강제와 억압 외에, 다수의 당원과 대학생 혹은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의 상당 부분, 그리고 노동자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집단(혹은 계층)이 스탈린의 폭압적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들 지지집단은 국가지도부가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통해 마침내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때를 계층이동, 즉 신분상승의 시기로 체험했다.(헬무트 알트리히터, <소련 소사 1917~1991>, 최대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7, p.76)”) 하지만 클리프는 내전을 경과하면서 확연해진 혁명의 퇴화를 주요하게 고려하지 않은 까닭에 소련의 퇴행과정을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으로 묘사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이론적 왜곡까지 했던 것이다. 클리프의 주장처럼 정말로 ‘1928년까지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했다면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로 퇴행하는 과정에서는 노동자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대중의 집단적인 저항과 조직적인 투쟁이 존재했을 것이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②: 현실과 괴리된 소련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강조
    <소련>에서 클리프는 기본적으로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부하린과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밝히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해 부하린은 ‘자본주의 전시경제’와 ‘자본주의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의 저장고가 되는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면서 양자의 개념을 각각 ‘국가독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로 구별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클리프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질적 차이는 없지만 혼동을 피하려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클리프, 앞의 책, p.222) 하지만 클리프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클리프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기본법칙인 가치법칙이며 그것의 규정을 받지 않는 사회를 더 이상 자본주의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따지고 보면 맹목적인 경제력에 좌우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목적의식적 의지나 결정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비록 경쟁과 가치법칙이 왜곡되기는 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도 따지고 보면 가치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클리프, 앞의 책, pp.222~223)
    "소련 경제 내부의 관계들을 세계경제와의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살펴보면, 생산의 동력자이자 조정자인 가치법칙이 소련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클리프, 앞의 책, p.229)


    이러한 판단은 1920년대 말 이후 소련의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에 기초해 국가자본주의 개념이 협소화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1940년대 C.L.R 제임스와 두나예프스카야의 경우 소련 사회가 모든 자본이 하나의 거대 자본주의 기업으로 결합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다수자본 간의 경쟁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인 까닭에 그들이 소련을 ‘하나의 공장’으로 보면서도 출구로 찾은 것은 바로 세계시장이었다. 세계시장에서 소련이 다른 국가 자본과 경쟁하는 것을 통해 가치법칙은 소련에서 계속 적용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C.L.R 제임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스탈린주의 경제는 임금으로 조정되었고, 그러한 임금은 가치법칙에 따라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근대 세계에서 계급 사회가 초래하는 엄청난 비용, 즉 생산의 끊임없는 기술 혁명에서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을 필요와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 (생산 비용에서 엄청난 증가를 감수하는) 자립 경제냐 아니면 세계 시장으로의 침투(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의 모든 변동에 종속되는 존재)냐의 선택, 제국주의적 투쟁과 후진적 경제라고 하는 이 모든 것 때문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노동을 독일에서와 똑같은 취급해야 했다. 즉, 그는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해야 했고,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의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마르셀 판 데르 린던, 앞의 책, p.147에서 재인용))


    클리프도 이러한 입장에서 소련의 국내 경제에서는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소련과 국제경쟁 사이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클리프는 소련이 세계시장에서 상품을 매개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군비라는 형식의 사용가치를 매개로 경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에서 클리프는 소련 사회의 실상을 통해 ‘관료의 부실경영’을 평가하면서는 소련 경제가 계획경제라기보다는 ‘관료적 지령경제’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공장들이 조정되지 않고 발전이 일치되지 않아 가격의 발작적인 등락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개별 공장 간 물물교환 협정을 알선해주는 중개인 집단마저 출현했기 때문이다. 클리프의 말마따나 소련의 관료지배와 경영의 자유재량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이론화하는 부분에 가서 정작 클리프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소련에서 기업들 간의 관계는 얼핏 보면 전통적 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업 간 관계와 다를 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렇다. … 소련에서는 개별 기업과 경제 전체가 모두 계획적 생산 규제를 따라야 한다. (클리프, 앞의 책, p.223)”


    그러나 실제로 소련 경제는 중앙집권적인 통제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공장 체제가 아니었으며, 굳이 세계시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상이한 생산단위들 간의 관계는 애초에 클리프가 실증하였듯이 다수자본의 경쟁관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느슨하였다. 이는 소련 내부의 생산부문이 가치법칙에 기초한 상품․화폐 관계로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경제학자 베뜰렝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련에서-옮긴이) 사회적 자본은 통일된 모습을 띠지만(이는 주로 계획 체제와 국가 소유의 법률적 형태가 조장하는 환상이다), 현실에서는 사회적 자본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복수의 경제 단위들로 분할되어 있다. 사회적 자본의 파편화가 국가적(혹은 집단적) 소유의 외피 하에서 전개된다. … 개별 기업은 단지 ‘단일한 국가트러스트’의 단위들(혹은 거대 국영공장의 ‘작업장’)이 아니다. … ‘당 자본주의’(party capitalism)는 사회적 자본이 파편화되는 특수한 방식이다. … 소련 경제에서 자본들 간의 경쟁은 분리된 생산단위들과 상업의 존재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단위들은 실제로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있는 기업장들의 관할 하에 놓여 있다. … 투자와 생산 및 혁신과 관련된 모든 결정이 중앙에 의해 ‘지령’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결정의 대다수는 기업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성진, 「소련 사회의 성격: 마르크스주의적 설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2006, p.188에서 재인용)


    소련 경제를 세계시장과 관련지어 살펴본다 해도 클리프의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클리프는 자본주의에서 군비증강의 실질적인 이유를 간과하고 있다. 클리프는 1930년대 소련의 대외무역 규모가 저조했던 것을 이유로 세계시장에서 소련에 강제되었던 경쟁이 상품경쟁보다는 군비경쟁의 형태를 취했다고 하면서 군비경쟁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앞뒤가 뒤바뀐 주장이다.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군사경쟁은 부르주아들의 이윤창출과 자본축적을 둘러싼 경쟁의 연장인 까닭이다. 물론 자본주의 세계질서에서 정치군사적인 갈등과 경쟁이 경제적인 사안만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절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군비경쟁 역시 일국사회주의로 합리화한 자신의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유지하며 급속히 추진된 중공업의 확대와 맞물려 군수산업을 통해 이윤창출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국제경쟁이 주로 군사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소련에서 가치법칙은 자신의 대립물, 즉 사용가치의 추구로 나타난다는 클리프의 분석은 다양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클리프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특히 전시경제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이미 밝힌 것처럼 전시경제에서도 가치법칙은 관철되었고 사용가치가 생산의 목적으로 사회질서 전반을 규정할 수는 없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사회학자 퓌레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가치법칙에 훨씬 종속되었다. 영국 지배계급이 잘 알듯이, 영국은 그들의 무기를 공짜로 얻지 않았다. 가치법칙의 원칙은 영국이 미국에 진 부채를 충당하기 위해 팔아야 하는 중요한 해외 자산의 상실을 통해 영국 자체에 가장 고통스런 부담을 주었다.”(마르셀 판 데르 린던, 앞의 책, p.320에서 재인용))


    그럼에도 클리프가 소련 경제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모종의 사용가치 생산을 지향한다고 한다면, 이는 소련의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앞서 소련 사회가 세계시장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가치법칙이 부재하다는 것과 맞물려 세계시장 속에서 가치법칙이 관철되더라도 적어도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형태보다는 진일보한 사회로 여기게끔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련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소련과 관련한 자본주의 경제공황에 대한 판단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클리프는 자본주의 공황론 중 불비례설에 입각해 국가자본주의가 공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적 설명이다. 부하린은 “각종 생산 분야의 생산물들에 대한 수요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수요, 즉 자본가와 노동자의 수요도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 경제에서 일반적 과잉생산 공황 따위는 있을 수 없”고 “특별히 급속한 생산발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클리프, 앞의 책, p.246에서 재인용)


    둘째, 러시아 경제학자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이다.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사회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한(생산력이 이것을 충분히 받쳐 준다면), 사회적 생산이 균등하게 배분되면 이에 따라 수요도 증가할 것”이며, 관건은 생산수단 부문과 소비재 부문 사이의 비례성으로 이것만 유지되면 “사회적 소비가 감소하더라도 과잉생산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 앞의 책, p.247, 249에서 재인용) 이에 대해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따라서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은 세계자본주의와 비교해서 후진적이고 생산수단이 부족해서 경제의 주된 요구가 기계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기계 생산인 경우의 국가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기계 생산이 국가자본주의 경제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면, 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과잉생산에 봉착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 경제는 사실상 정체하리라는 부하린의 대답이 그것이다." (클리프, 앞의 책, pp.251~252)


    결국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에서 공황은 그 사회의 발전수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클리프의 규정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극한’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공황에 관한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을 살펴보면서는 이것이 후진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국가자본주의가 사회경제적인 발전수준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기준과 잣대는 더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그런데 클리프에 따르면 소련은 부하린과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을 따르지 않더라도 공황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군비경쟁에 따라 ‘전쟁경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경제의 실상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경기순환과 경제공황은 소련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는 소련의 경제성장이 1970년대 이후 사실상 정체되고 1980년대에는 구조적인 난국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그 시기만을 특정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소련 사회에서 경제공황은 과잉축적에 의해 야기된 부족공황이라는 도착된 형태로 주기적으로 발생해왔다.


    예를 들어 베뜰렝은 소련 경제에서 공황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속적인 공업화가 종료된 후 소련의 경제발전은 순환적이었다. … 소련에서 경기순환은 다음과 같은 계기적 국면들로 이루어진다: 가속적 팽창 및 투자-호황-경기둔화(혹은 정지)-불황-새로운 가속적 성장 국면으로의 이행. 경기순환은 축적률이 증대되었다가 감소하고 다시 증가하는 시기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경기순환은 과잉축적 경향에 근거하며, 이는 다시 기업 경영자들의 자립적 의사결정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이들이 계획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기 확장을 목적으로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전반적 경제균형을 위해 요청되는 수준 혹은 현실적으로 이용 가능한 수준을 초과하여 배치하기 때문이다. … 과잉축적 경향이 과도하게 되면 금융 및 은행 당국이 투자 고삐를 조인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부분적인 제약이 과잉투자와 성장에 부과된다. 그러나 가장 현저한 부족 현상이 제거되면 통제가 이완되고 새로운 경기순환의 상승국면이 다시 시작된다.”(정성진, 앞의 책, pp.193~194에서 재인용) 이른바 중앙의 계획은 소련의 경제전반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③ : 이론의 수정과 국가자본주의론의 일반화


    소련 사회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지녔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클리프의 이론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클리프를 따르자면 소련 사회의 성격은 분명 자본주의이지만 가치법칙이 부재하거나 그 규정을 받더라도 생산의 목적이 사용가치의 추구로 나타나며 경제공황도 부재한 사회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SWP 안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특히 소련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존재를 놓고 내부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임금노동과 자본 간의 관계는 서로를 전제하고 제약한다는 점에서 임금노동 없이는 자본주의를 말할 수는 없는 만큼 논쟁이 지닌 의미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클리프는 소련 사회가 일국차원에서는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상품화도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클리프는 “소련에는 상품의 필요조건들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력”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고용주가 한 명 밖에 없다면 ‘주인 바꾸기’는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파는 일’도 단지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 앞의 책, p.227, 228) 이것은 맑스가 제기하는 임금노동의 전제조건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자, 소련 사회에서 직접생산자들이 겉으로는 등가교환이지만 사실은 부등가 교환으로 잉여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클리프는 세계시장을 고려하면서 소련 국가는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는 자본주의 기업 소유주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말하지만 노동력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 SWP 당원인 피터 빈즈와 마이크 헤인스는 관료적 집산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놓았다. 이는 클리프의 이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소련 사회의 유일한 고용주는 국가라는 클리프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SWP의 다른 당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맑스주의 이론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빈즈와 헤인스는 물론 클리프의 이론까지 정면으로 비판했다. 캘리니코스는 클리프의 주장대로라면 소련의 노동자는 경제외적 강제를 받는 노예나 농노에 더 가깝게 된다고 반박하며, 소련의 노동자는 단일한 공장이 아니라 상이한 생산 활동들이 접합된 국민경제 체제에 속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사이에서 실질적인 차이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우리가 소련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소련에서도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업들은 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며, 자기 기업에서 일하도록 설득하려고 온갖 종류의 불법 상여금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의 선택 폭은 상당히 넓다. 그들은 특정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이 점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소련 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할 권리나 그 밖의 민주적 자유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칠레나 남한의 노동자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소련에서 사실상 완전고용이 존재한다(비록 중국과 유고슬라비아 같은 다른 국가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지만)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산업예비군 개념은 실업자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제3세계가 서방 자본주의를 위한 값싼 노동력의 저수지 역할을 했던(특히 서방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던 1950년대와 1960년대) 것처럼, 유럽러시아의 농업 인구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초기의 50년 동안 비슷한 구실을 했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소련>, p.402)


    그 결과 1980년대 SWP 내부 논쟁 이후 클리프의 이론은 중대한 수정을 겪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비해 소련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던 클리프의 이론은 이제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클리프가 구분했던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차이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의 적용을 소련과 이와 유사한 사회체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더 확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가운데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주도 양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체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크리스 하먼은 “전체 경제가 국가 통제로 나아가는 경향은 스탈린주의에 특유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걸쳐 발생하고 있는 경향이었다(하먼, 「폭풍이 인다」,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이원영 편역, 갈무리, 1995, p.89)”고 말하였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 개념의 과도한 일반화는 소련 사회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소련 자본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모두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지니고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발전해온 양상마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중국,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국가들은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블록에 속해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그 발전과정에서는 소련과 또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국가의 개입 여부를 잣대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을 동일하게 국가자본주의로 한데 뒤섞는 것은 클리프의 이론과 비교해 일종의 역편향이라 할 수 있다.


    즉, 클리프가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를 사적자본주의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놓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필수적인 한 단계로 일반화한 것과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소련에서 나타난 매우 독특한 사회형태들마저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관료가 맑스주의를 왜곡하며 스탈린주의와 그 변종이론들을 국가통치이데올로기로 삼고 자본주의 발전이 낙후된 지역에서 자본축적을 강제한 것은 분명 소련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4. 나가며


    오늘날 소련 사회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입장은 과거에 비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 규정일 것이다.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아무도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이점이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여전히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클리프의 이론에서처럼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대단히 일반화되어 적용되고 있다. 때문에 소련 사회를 자본주의로 규정한다고 했을 때, 이와 함께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붕괴되고 변질되어 갔던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과 구체적인 판단이다. 노동자대중의 집단적인 힘과 열정이 어떻게 소진되어 갔고 결국은 해체되었는지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소련 사회를 단순히 국가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일변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사회를 그것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이론적 규명에 머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련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으로써 지금의 대중운동에서 새로운 정치적 전망과 새로운 권력을 향한 그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자리매김해야 한다. 오히려 소련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로 또는 노동자국가의 변종으로 파악하는 퇴행적이고 낡은 이데올로기야말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그 가능성을 제약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직접 목격하며 누구보다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또한 이를 냉철하게 검토하며 독일의 노동계급을 각성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이 걸었던 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러시아 혁명 사례에 대한 존경과 매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 사례만이 독일 대중의 숙명적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일은 독일 사민당의 후견적인 정신 아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그 일은 ‘최고위원회’나 ‘러시아의 사례’와 같은 완전무결한 권위에 의해서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아울러 혁명적인 열기를 창출해내는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즉,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일은 우려되는 모든 심각한 사태 및 그것과 연관된 과제에 포함된 복합성을 통찰할 때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성숙과 정신적 자립의 결과로써, 또한 대중의 비판적 판단능력 - 대중의 비판적 판단능력은 수십 년 동안 사민당에 의해 여러 가지 구실로 조직적으로 압살되어 왔다. - 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역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독일 노동계급에게 생기는 것이다. 제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독일과 국제 노동계급이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상의 훈련방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혁명」, <로자룩셈부르크주의>, 편집부 옮김, 풀무질, 2002, p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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