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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은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된다 - 오토륄레
  • 조회 수: 11757, 2015-01-13 18:30:48(2015-01-13)
  •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은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된다

     

    오토 륄레1), 1939


    1.



    오늘날 국가조직의 새로운 원칙을 구현하고 있는 전체주의 국가들 선두에 러시아가 있다. 시간적으로도 실제 발전 정도에서도 그렇다. ‘소비에트 국가’2)라 불리기 무색할 정도로 러시아 국가는 헌법상 처음으로 독재를 확립하고,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테러체제를 만들어 확장해, 일당독재이자 기계적이고-관료적인 획일화의 방식을 지닌 정치적 전체주의국가가 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지점으로 내몰린 다른 국가들에게 민주제도들을 포기하고 정치독재를 확립할 모델을 만들어 파시즘의 스승이 된 셈이다.


     



    이는 우연도, 세계역사의 우스꽝스러움도, 단순히 현상을 복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모든 증후들을 살펴보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상이하게 발전해도 결국 하나의 동일한 원칙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당 공산주의자들의 마음에 들든 아니든,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의 -3국가들만을 예로 들면- 국가조직과 국가운영은 혼동될 만큼 서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역설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는 붉은, 검은 그리고 갈색 ‘소비에트국가’ 또는 하나의 검은, 갈색의 그리고 붉은 파시즘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 당시 전체주의 국가를 따라다니며 정당화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결코 현상의 본질이 아니며, 언제나 부차적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예가 증명하듯이, 이데올로기는 국가기구의 성격과 기능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고도 중요한 변화를 완성할 수 있다.


     





    독일과 이탈이아에는 사유재산이 유지되고 있는 반면 러시아에서는 폐지되었다는 상황 역시 부차적일 뿐이다. 사유재산 폐지만으로 사회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의 폐지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가능하다. 사유재산의 폐지 이외에 사회주의 사회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성과를 처분할 권리를 갖고 임금제도가 철폐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요구가 독일 이탈리아에서처럼 러시아에서도 성취되지 못했다.


     





    러시아가 사회주의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소비에트 국가’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투쟁 과제의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러시아는 자신의 ‘소비에트 국가’를, 그 빈약한 사회주의적 포장과 옹색하고 미숙한 체제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한 것으로 선전함으로써,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잘못된 길, 기만과 착각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진보 노동자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자신의 행동을 계급투쟁자로서 취할 행동과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를 놓고,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이며 사회주의 사회와 연관되어 있다는 착각에 너무 쉽게 기꺼이 굴복한다. 이러한 기만이 파시즘과의 완전하고 단호한 내면적인 단절을 방해한다. 이러한 착각이 러시아,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동일한 국가체제와 정부체제를 야기한 원인, 전제조건 그리고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이 착각은 반혁명의 수단이 된다.












    2.





    레닌에게 볼셰비키 노선은 처음부터 순전히 러시아만의 일이었다. 정치적인 효력을 미치고 투쟁을 한 오랜 기간, 볼셰비키 체제를 매우 명확하고 완벽하게 발전시키는 동안, 레닌은 볼셰비키 체제를 러시아 밖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 형태로 승격시키려는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레닌은 사회 민주주의자였으며, 베벨3)과 카우츠키4)를 천재적인 지도자로 숭배했으며, 독일 좌파가 홀로 중앙집권제와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을 하도록 놔두었다. 볼셰비키 논지를 가지고 그들의 투쟁을 도와주러 오는 것에 얼마나 근접했는가!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볼셰비키 이론에서 진정한 혁명적 노선을 제공하는 것이 레닌에게 얼마나 유혹적이었는가! 러시아 이민자들의 소그룹에 둘러싸여 레닌은 끝내 고립되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5) 하의 독일 좌파가 오래 전부터 레닌과 그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비판할 때도 카우츠키에 속박되어 있었다.


     





    레닌은 단지 러시아와 관련되어 있었다. 레닌은 혁명적 행동의 목적으로 유일하게 러시아를 염두에 두었다. 즉 봉건적 차리즘을 타도하고 혁명 후 러시아 정당들 전체에서 가능한 한 커다란 분파를 획득하고자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활발한 생동감으로 레닌은 이전에 생각한 목표를 훨씬 넘어서려고 하였다. 볼셰비키 당은 갑자기 정치권력 쥔 러시아의 주인이 된 것을 알았다. 당은 세계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성공할 경우, 이 권력을 유지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당시 당은 서툴렀다. 볼셰비키 당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당으로, 조합으로, 의회로 되몰았으며,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한 평의회운동을 파괴하는 데 일조했다. 볼셰비키 당은 스스로 성장하던 유럽 혁명을 파멸로 이끌었다. 이리하여 잘 훈련된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아직 무지한 전혀 단련되지 않은 대중을 지시하던 볼셰비키 당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머물렀다. 내란, 적의 침입, 완전히 파산된 경제, 즉석에서 구성된 군대 그리고 변화무쌍하고 빗나간 사회화 실험의 와중에서 당은 거의 3년 동안 진정한 소비에트체제를 건설하지 못하였다.


     





    어느 누구도 두 명의 주인을 모실 수 없다. 전체주의 국가 역시 그러하다. 전체주의 국가가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자들에게 그들 정책의 유용한 수단,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보호막이며 몰락의 구제자라면, 그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는 없다. 즉 전체주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의 이익기관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인정을 받을 수도 방어를 위한 가치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두 적대적인 계급이 모순되고 화해할 수 없는 계급목표를 가지고 하나의 동일한 국가체제를 좋아한다면, 그리고 그 국가에서 그들의 피난처를 찾고 국가가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기대를 인정한다면, 이는 의심스러우며 맞지 않다. 




    두 계급 가운데 하나는 피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단지 외형적인 형태만 보면 우연히 동일하지만 내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는 자기기만이다. 첫째, 맑스주의자에게 역사에서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맑스주의자에게 형태와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고, 서로 일치하며, 결코 분리가능 하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생각을 끝까지 해보면, 아래와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







    만약 ‘소비에트 국가’가 파시즘의 본보기가 된다면, 소비에트 국가는 이후 파시즘에서도 반복되는 원칙적, 구조적 그리고 기능적인 요인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러한 경우인지 연구해야 한다. 이 연구는 레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소비에트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 레닌주의는 레닌에 의해 발전된, 러시아 상황에 맞게 재단된 볼셰비즘의 특수한 형태이며, 볼셰비즘은 설립자나 지지자들에 의해 맑스주의의 근거 있는 해석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볼셰비즘에 파시즘의 국가조직과 국가운영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만약 관련성이 증명된다면, 볼셰비즘과 파시즘 사이의 본질적인 동일성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맑스주의적 계급투쟁의 의미에서 그리고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러시아 ‘소비에트 국가’를 인정하지도 방어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기 위한 유일하게 유효한 명제를 획득하게 된다.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은 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한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볼셰비즘은 자신들과는 본질적으로 인연이 없는, 멘셰비키에 의하여 시작된 소비에트 운동의 도움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였지만, 그들 권력을 안정화하고 경제를 건설한 데에서는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소비에트 체제가 볼셰비즘과 본질적으로 인연이 없고 볼셰비즘 체제와 모순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사회주의적이라고 간주하던 일련의 조치에 소비에트 체제를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설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볼셰비즘은 사회주의를 하려 했고 따라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필요했다.







    그 당시 레닌은 볼셰비키 이론과 실천, 전략과 전술을 위하여 결국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볼셰비즘이 러시아에서 이룬 요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볼셰비키 방식과 친해질 생각이 별로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레닌을 불안하게 하였다. 




    더 불안한 것은, 오래된 사회민주주의로 남아있지 않는 한, 대중은 그들의 혁명적 행동을 수많은 국가들에서 일어난, 특히 독일에서 강력하게 발전한 평의회운동과 연결했다. 레닌은 바로 이 평의회운동을 러시아에서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평의회 운동은 볼셰비키 선례를 추종하는 혁명적 봉기를 위하여 평의회를 획득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했다. 물론 모스크바로부터 모든 국가들에서 선동기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의회 운동의 ‘급진 좌파’ 선동가들은 -레닌 자신이 확신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제를 볼셰비키 당이 보낸 사자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당(독일 공산당-역자 주)은 나약하고, 신음하는, 거친 척 하는 작은 떼거리로 볼셰비키 당과 평의회라는 두 거대한 진영 사이에 머물렀다. 두 진영 중 한 진영은 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 쓰레기를 획득하였으며, 다른 진영은 마력의 힘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엄청난 혁명적 요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따라서 볼셰비키 선전의 배후에서 더 강한 다그침이 실행되어야 했다! 우선 급진 좌파들에 대한 강력한 비난이 유효했다.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후 그리고 볼셰비키 방식에 따라 비난과 치욕을 덮어 쓴 후, 급진 좌파는 대중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체제는 실패했다. 이제 소비에트 체제가 볼셰비즘의 손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볼셰비즘과 무관하게 완성할 수 있는 사회주의적 요구를 완성하기 위해 유일하게 실천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뻔뻔스럽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 더러운 경쟁은 근본적으로 타파되어야 했다!







    이리하여 레닌은 분노하여 안락의자에 앉아서 격한 팜플렛을 썼다. 권력 상실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과 이단자의 성공에 대한 불타는 분노로 레닌은 글을 써 내려갔다. 만약 레닌이 스탈린이었다면, 그는 이단자 모두를 일급 인민의 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총살형에 처하였을 것이다. 레닌은 단 하나의 팜플렛을 작성했다. “맑스주의 전략과 전술을 대중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를 부제로 하는 “급진주의, 코뮨주의의 소아병”인데 이 팜플렛은 이후에 -물론 불순한 공갈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중지된다.







    이 팜플렛은 논박하는 글이다. 굉장히 격분하여 공격적이고 거칠며, 왜곡과 중상모략 그리고 거짓으로 넘칠 것 같은, 교황의 파문장처럼 원한에 가득차고 박해에 광적인, 모든 반혁명주의자들에 대한 진정한 신사들의 식사였다. 그러나 동시에 볼셰비키 강령을 적은 출판물 가운데 볼셰비즘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고 무자비하게 드러내고 있다. 볼셰비즘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사회주의와 코뮨주의 문헌을 탄압할 당시, 이 팜플렛이 히틀러가 재간행을 허락한 유일한 팜플렛이었다. 히틀러는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었다.







    레닌이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의 역사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다른 흐름과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성공의 조건들에 대하여 말하는 이 팜플렛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모든 사실이 일방적으로 서술되었으며, 반박의 여지가 있으며, 토론을 위한 도전이다. 그 외 목적에 이 팜플렛은 걸맞지 않다. 그저 볼셰비키 전략과 전술의 요지들을 파악할 용도로 쓰일 뿐이다. 이 요지에서 -당시의 요구에서는- 볼셰비즘과 급진 좌파 사이의 결정적인 대립점, -오늘날의 요구에서는- 볼셰비즘과 파시즘 사이의 일치점이 드러나 있다.






    3.


    레닌은 원래 러시아 사민당으로 불렸으며 제2 인터내셔널의 한 분파를 형성하던 자신의 당을 러시아가 아니라 외국에서, 망명지에서 만들었다. 1903년 런던에서 당이 분열된 후 볼셰비키 노선은 소수의 당원들을 가진 작은 종파였을 뿐이다. 이 소수의 당원들이 능력 있고, 훈련이 잘된 레닌의 직접적인 전위로 나타난다. 볼셰비키 대중은 한 번도 서류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지도자의 혁명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환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위는 엄격하게 훈련되었으며, 혁명적인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지속적으로 통제되었고, 언제나 군사적으로 준비된 상태였으며, 계속적인 정화를 통하여 일치감을 유지하였다. 이리하여 작은 당은 혁명적인 훈련과 준비를 위한 육군 사관학교였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교육수단은 무조건적인 지도자의 권위, 엄격한 중앙집권, 엄격한 규율, 신념적으로 우수한 적성을 가지기 위한 단련, 투쟁성, 자기희생, 당의 이익을 위한 완전한 인격 포기이다.




    레닌이 만든 것은 이렇게 혁명에 몸을 던져 혁명이 지도권을 장악해 이룩한 성공을 빼앗아야 하는 장교군단, 엘리트 지식인, 지도부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혁명을 준비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변증법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추가적으로 특정한 하위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 즉 이 준비가 어떤 종류의 혁명에 유효한가? 혁명이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인가 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인가?




    레닌의 지도당과 지도 이데올로기는 차리즘의 봉건제도를 타도하고 부르주아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뒤늦은 부르주아 혁명과 역사적 사명에 관련되어 있던 러시아에서는 옳다. 이 혁명에서 지도당의 의지가 더 엄격하게 집중되어 있을수록, 권력의 장악과 형성에서 지도당의 개입이 더 목적 지향적이고 의식적이고 힘찰수록, 부르주아 국가형성의 과정은 더 성공적이며, 새로운 국가질서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위 또한 더 전망이 좋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에 유리한 해결책으로 간주된다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도 그런 것은 아니다. 만들어지는 사회의 본질에서 결정적인 구조 차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레닌의 혁명방식에 따르면 지도자들은 대중의 수뇌이다. 그들은 혁명교육을 이수하였으며, 결정적인 상황을 총괄하는 지식, 상황을 파악하는 정신적인 능력과 전투부대에 대한 명령을 구현하고 있다. 그들은 공부한 혁명의 전문가들이며, 직업전술가이며, 거대한 시민군의 장군들이다. 이제 머리와 몸 덩어리, 지도적 인물과 대중, 장교와 군대로의 구획은 계급사회의 이중성, 부르주아 질서를 특징짓는 상층 하층 구분과 완전히 일치한다.




    한 상위 계급이나 계층 - 지배자로 교육받고 지도할 준비가 된 상층의 존재를 규정한다. 하층의 다른 계급은 - 이미 추종자로 생각되고,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타인의 의지에 복종한다. 이러한 낡은 계급공식에서 레닌의 당 이미지가 탄생했다. 그의 당은 부르주아 현실과 그 존재법칙을 축소하여 모방한 것이다.





    그의 혁명은 객관적으로 어떤 사회질서를 창출하고 형성하려는 경향에 의해 지배되며, 이러한 부르주아 질서를 원하는 자는 지도자와 대중, 전위와 추종자의 구분에서 올바른 과제와 목표에 조응하는 혁명 전략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는 혁명적 행동에서 최상의 기회를 잡는다. 지도부가 더 총명하고, 잘 훈련되고 훌륭할수록, 대중은 더 의지를 갖게 되고 복종하고 정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전략과 지도당은 적절했다.





    물론 러시아 혁명이 그 성격을 변화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전개되었을 때, 레닌은 그의 부르주아 혁명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으며, 그의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작품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결국 승리했다면, 그의 전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전체 혁명계획에 전혀 예정되지 않은 멘셰비키 진영에서 온 평의회운동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닌이 승리한 후 평의회운동을 다시 해산했을 때, 모든 혁명적 성과는 제어하기 어렵게 다시 부르주아지 영역으로 되돌아갔다.




    스탈린주의는 이러한 레닌 방식의 최후의 집행자이며 유산이다.




    레닌이 완전히 비변증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힐 용기를 가져야 한다. 즉 레닌은 사물과 과정을 역사적 연관성과 변증법적인 조건에서 살펴볼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사고는 매우 기계적으로, 고착된 법칙에 따라, 고정되고 규격화된 궤도에 따라 작동하였다. 그에게는 단지 하나의 진정한 혁명정당 - 볼셰비키 당이 존재하였다. 단 하나의 진정한 혁명은 러시아 혁명이었다. 단 하나의 확실하고 이상적인 혁명방식은 레닌적인 것이었다.




    러시아에 적용되는 것은 독일, 프랑스, 아메리카, 중국 그리고 호주에도 적용된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에 적합한 것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도 적합하여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 물질과 상황의 차이, 발전정도와 문화상태의 차이, 사상과 인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이전에 찾아낸 형식의 역학이 편집증적인 단조로움으로 자기중심적인 궤도를 빙빙 돌고 있다.




    그는 기계시대의 정치에서 독재의 화신이며, 혁명의 기계이며, 획일화된 사회적 존재의 창시자이며, 전지전능한 지도자 의지를 대표한다. 파시즘의 근본요소들 전부가 그의 정신에, 그의 독트린에, 그의 혁명 전략에, 그의 사회 계획과 그의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레닌에게는 당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포기하는 심오한 혁명적 자각이 영원히 숨겨진 상태였다.




    그는 평의회체제에서 사회주의로의 새로운 방향성의 비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폭력, 압제, 테러, 독재를 부정하는 것이 인간해방의 수단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권위, 지도 그리고 폭력, 다른 한편으로 조직, 수뇌부 육성, 복종만이 존재하였다. 독재와 훈련이 그의 저술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단어이다.




    따라서 말 그대로 노동하는 인간의 해방투쟁에서 마침내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자명한 것을 요구하며, 감히 그의 혁명 전략에 반항한 ‘급진 좌파’ 운동에 레닌이 냉정을 잃고 매우 분개한 것은 이해가 된다.






    4.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쥐는 것 - 이것이 모든 문제들의 표어를 형성하며, 볼셰비키와 급진 좌파 사이의 견해에서 모든 적대감의 표적이며 요점이다.




    당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문제에서도 그렇다.




    급진 좌파의 견해는 혁명적 노동자는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더 이상 찾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과제는 작업장에서 공동작업을 한 결과 생긴 자신의 투쟁적인 동맹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과분하게 소유하고 있던 권위의 힘으로 독일 노동자들을 독일혁명 초기에 다시 전쟁도발, 당쟁 중지 그리고 재건구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으로 되몰았다. 급진 좌파의 행동이 잘못되고 우둔하고 반혁명적인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레닌은 그의 저작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오래된 비변증법적인 사고방식에서 오는 상투적 표현의 갖은 욕설을 사용하면서 분노를 폭발하였다. 독일 상황을 예증하는 대신, 볼셰비키의 러시아 노동조합의 경험을 증거로 끌어 왔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운동 초기 계급투쟁에서 종종 중요한 역할을 하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에서 강력한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러시아에서는 새로웠으며, 레닌의 열정을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세계 노동자는 이후 노동조합의 발전에 속하는 전형적 현상인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초기에 발전의 수단이자 해방운동의 원동력이었던 노동조합은 끝에 가서 발전의 제동장치, 반동의 대리자이며 배반적인 반혁명의 아성이 되었다. 이는 또한 독일 노동자들의 경험이었으며, 이로부터 독일 급진 좌파는, 이 반혁명이 노동자의 진영에 등을 돌릴 것이라는 유일한 결론을 끌어내었다.




    레닌 자신도 시간이 경과하면 “오직 조합적이고, 고루하며, 허영적이고, 융통성이 없고,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이며, 제국주의에 적절한, 제국주의에 매수당하고 풍기 문란한 노동귀족” 층이 형성될 것을 인정하였다. 이 부패한 조합, 이러한 깡패 같은 지도층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노동조합운동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대중의 희생 하에 해적질을 자행하고 있다.




    급진 좌파가 노동자들이 이들과 더 이상 연합하지 말 것을 요구했을 때, 독일 노동조합의 지도층이 문제였다. 그러나 레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선동적으로 독일 노동조합과 신생 러시아 노동조합을 비교하고, 그곳에서 모든 것이 최고의 상태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후 일정한 시기와 특별한 상황의 특수한 경험을 유일하게 옳은 인식으로 규정했다. 왜냐하면 -레닌은 계속 논증하였다- 혁명가는 대중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대중은 어디에 있는가? 조합사무실에? 조합원 집회에? 지휘부가 자본가와 함께하는 비밀회의의 닫힌 문에? 어느 곳에도 대중은 없다. 대중은 공장에 그들의 작업장, 상점과 사무실에 있다. 그곳에서 혁명적 동맹을 맺을 수 있고, 계급투쟁을 선동할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요구조건의 대헌장을 낼 수 있다. 평의회체제에 토대를 둔 공장조직이 진정한 혁명조직이다. 이 공장조직이 당과 노동조합들을 대신하여야 한다.




    공장조직에는 직업지도부, 지도부와 대중의 구분, 지식인과 노동자 간의 서열 그리고 이기주의, 풍기문란과 부패, 우월함에서 오는 자만, 고루함, 실리주의를 위한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장조직에서는 노동자 자신이 자신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그러나 레닌은 노동조합문제에 대한 이러한 해결책에 대해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당처럼 레닌은 노동조합 역시 보존하려고 한다. 그는 노동조합 내부를 개혁하고 변혁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간단하다. 다가오는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간부를 볼셰비키 간부로 대체함으로써 변혁하려고 한다.




    콜럼부스의 계란이다! 레닌은 나쁜 관료와 좋은 관료가 존재한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쁜 관료는 사회민주주의 토양에서 성장하며, 볼셰비키 토양은 단지 좋은 열매만을 맺게 한다.




    20년 동안의 경험은 이러한 순진한 믿음의 우스꽝스러움을 실제로 밝혔다. 레닌의 해결방법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변혁을 관철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결과는 어떠한가? 노동조합의 변혁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새로운 노동조합을 창립하려는 시도 역시 실패하였다. 사회민주주의 지도자와 볼셰비키 지도자 간의 경쟁은 실천에서는 부패경쟁으로 드러났다.




    이리하여 소중한 노동자들의 투쟁에너지는 파시즘에 대항해 쓰이는 대신, 20년 동안 의미도 전망도 없는 실험에 낭비되었다. 자기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대중의 자신감에 대한 실천적 확인은 체계적으로 억제되었으며, 활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렸고, 성공은 기만당했다.





    대중의 모든 걸음걸이를 제어하고 통제하고, 자율성의 성장을 방해하고, 사기 오른 자신감을 인위적으로 야기한 실패를 통해 잃게 하여 새로운 시도를 포기시키는 파시즘의 방식들을 볼셰비키 노선을 추종하는 20년간의 노동조합운동이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파시즘의 승리는 매우 쉬웠다. 노동조합과 당의 노동자 지도자들이 인간자원을 훈련하고, 타락시키고 기력을 잃게 하여, 파시즘에 복종할 의사가 있는 전리품으로 오랫동안 교육하였기 때문이다.





    5.


    의회주의 문제에서도 레닌의 역할은 정치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중의 혁명적 해방을 위협하는 부패한 정치제도의 상투적 옹호자로서 되풀이 된다. 급진 좌파는 모든 형태의 의회주의를 부정하고, 의회선거를 거부하며, 의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레닌은 매우 열정적으로 의회에 참여하고, 선거와 의회활동에 노력을 다한다.





    급진 좌파는 의회주의를 역사적으로 낡은 것으로 선언했다. 의회제도는 선동무대로서의 가치를 이미 오래 전에 상실했으며, 지도부나 대중에게 위험한 부패의 근원지이며, 합법적인 개혁에 대한 환상으로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의식을 잠재운다. 또한 의회는 분쟁 시에 반혁명의 기구로 발전한다. 이러한 이유로 의회제도는 타파되어야 하며, 의회제도가 아직 가능하다면 방해해야 하며, 의회제도 전통이 대중의 의식에서 아직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부정되어야 한다.




    이에 반하여 레닌은, 자신의 반대 의견에 대한 지지자를 찾기 위하여,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낡은 제도를 구분하는 교묘한 술책을 써서 모면한다. 그는 의회는 역사적으로는 낡은 제도지만 -이러한 이유로 부정되어야 하며- 정치적으로는 아직 낡은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실천의 측면에서 의회를 고려하여야 하며, 의회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얼마나 천재적인 술책인가? 이 술책은 모든 문제에 교활하고 기만적인 분열의 이중성을 허용한다. 자본주의 역시 역사적으로는 낡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낡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혁명적으로 투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타협하여야 한다! 레닌 전술의 결과는 기회주의, 타협, 모든 정치적 문제들에서 추악한 정치적 거래이다. 군주제 역시 역사적으로는 낡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낡지 않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군주제를 철폐할 권리가 없다. 군주제와 타협하여야 하고, 군주제의 존속을 고려하여야 하며, 군주제의 권리와 특권에 대하여 군주제와 대화하고 협상하여야 한다.




    레닌은 그렇게 할 것이다. 교회 또한 역사적으로는 낡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낡지 않았다. 혁명가로서 레닌에게, 아직 대다수의 사람이 교회에 속하기 때문에, 대중 속에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기준이다. 따라서 교회 속으로 가야한다! 성직자들과 함께 사기를 쳐야 한다. 이것이 올바르게 이해된 혁명의 의무이다!




    파시즘도 언젠가는 역사적으로는 낡을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낡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와 타협하고, 조약을 체결하고, 파시즘을 충실하게 모셔야 한다! 현재 히틀러와 모스크바와 베를린 간의 동맹을 협상하고 있는 스탈린은 레닌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볼셰비키 대표들과 선동가들이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의 우호관계가 유일한 혁명전술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곧 경험할 것이다.




    의회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이 그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서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진정한 시금석이다. 레닌의 혁명은 전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이다. 다수를 차지하기 위한, 정부의석, 법안의 문고리를 잡기 위한, 강한 권력을 위한 투쟁이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아직 의회선거를 더 많은 표를 얻은 후, 의회에서 강력한 분파를 형성하고, 표결에서 다수를 차지하여, 법안의 내용과 경향에 영향을 주고, 정치권력의 일부를 잡아채기 위한 것으로 믿고 있다. 레닌은 이러한 의회주의가 오늘날 단지 기만, 겉치레, 모조품일 뿐, 부르주아 국가에서 실제 권력은 전혀 다른 곳에 있으며, 부르주아가 좌파의 선거승리, 분파형성, 표결 성공에도 불구하고 의회 밖에서 자신들의 의지와 이해를 옹호할 수단과 방법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레닌은 의회에서 퍼지는 크레틴병, 즉 매수당하고, 겁에 질리고 수입에 겁을 먹은 지도자들에 의한 공공도덕의 오염이 대중에게 미치는 파멸적인 영향을 보지 못하였다. 파시즘 시대 이전에, 독일 제국의회에서 반동들은 법안이 거부될 경우 의회를 해산한다고 위협함으로써 모든 결정을 관철시킬 수 있던 시기가 있었다. 부르주아 의원들처럼 의회 해산과 그로 인한 세비손실을 두려워한 공산당 의원들은 거리낌 없이 모든 것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베를린, 모스크바, 이탈리아는 어떠한가? 여기나 저기나 의회에는 의견도 의지도 전혀 없이 독재자들의 수중에 있는 노예들만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독재자들은, 만약 노예들이 잘 훈련된 개처럼 짖거나 엎드리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파괴의 나락으로 몰고 가지 않겠는가?




    분명히 의회제도는 타락하고 부패하였다. 그러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이전에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던 부패한 정치제도를 거부하게 하지 못하는가? 비합리적인 의회주의와 화해하는 과정, 부패가 냉소주의와 파시스트적 찬탈자와 폭력배의 경멸 하에 제공하는 비참한 연극보다는, 영웅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으로 의회주의를 철폐하려는 결단이 대중의 정치적 의식에 더 유용하고 교육적으로 더 가치 있다.




    레닌은 오늘 날의 스탈린처럼 이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닌에게 지식의 종속, 의지의 오염, 의식의 혼란과 인간존재의 자기소외로부터 인간 해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개조, 환멸의 세계와 비인간적인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해방은 혁명의 본질적이고 진정한 과제가 아니었다.




    레닌에게 혁명은 순전히 권력투쟁이었다. 그는 부르주아처럼 많고 적음, 지출과 수입,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였다. 이러한 장사꾼 같은 계산에서 레닌은, 당원 수, 유권자 수, 의회의 의석, 투표결과, 승리의 트로피 그리고 지배적 지위 등 단지 외형적인 것만을 생각했다. 그는 부르주아 의미에서 유물론자였다. 그의 유물론은 물질, 기계적인 사건들과 관련되며, 생동하는 인간과 생기 있는 인간의 행위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레닌에게 변증법적 사고능력이 놀랄 만큼 부족하다. 의회는 레닌에게는 의회이다. 진공상태 공간의 추상적인 개념이다. 레닌에게 의회는 모든 국민들이나 모든 시간에서 언제나 동일하다. 자신의 반박문에서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레닌은 의회주의가 수많은 발전단계들을 거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혁명 전략이나 전술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즉, 레닌은 혁명의 포기를 풍자적인 사회정책의 개혁주의로 포장하고 있는 부르주아 몰락시기의 낡은 의회를, 부르주아가 정치적으로 상승하던 초기시대의 의회를 통해 논박하고 있다. 이렇게 레닌은 정치적으로 위급한 경우에 부르주아들과 함께 ‘가능성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결정하였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치는 ‘혁명의 예술’이다.




    6.


    정치타협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간단히 다루어 보자.




    독일 사민주의는 1차 세계대전에서 노동자의 사정을 부르주아에게 누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는 혁명을 상속했다. 이는 본질적으로는 독일 평의회운동을 파멸로 몰고 간 러시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자신의 품속으로 굴러온 권력을 가지고 사민주의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민주의는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갱신했다. 당쟁을 중지하는 경향이 함께 하는 재건구호로 되돌아 왔다. 사민주의는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성직자들과 권력을 나누기 위해 타협했다. 민족적 성과로서의 자본주의 부흥과 강화가 목표였다.




    이러한 새로운 공공연한 배반에 대항하여 급진 좌파는 ‘반혁명과의 비타협’이라는 요구를 가지고 저항하였다. 따라서 매우 구체적인 경우가 문제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그리고 특정한 상황 하에서 출현한 특정한 문제에 대한 입장에 관한 것이다. 이 사안이 바로 변증법적으로 전형적인 본보기였다.




    실제 문제 그 자체를 인식할 능력이 없는 레닌은 변증법적으로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를 일반문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단지 변증법적으로만 다루어야 할 요구를 주요요구로 격상시켰다. 일반적으로 중요하고 근본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레닌은 정치적 적대자들과 타협하는 것이 어떤 상황 하에서든 혁명적 의무라는 사실을 급진 좌파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급진 좌파에게 그의 커다란 논박폭탄을 발포하였다.




    오늘 날 레닌의 저술에서 타협에 대한 문구를 다시 읽으면, 레닌의 비판적 토로와 스탈린의 레닌주의적 타협정책 결과들 사이의 비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탈린 치하에서 볼셰비키적 현실이 되지 않은 볼셰비키 이론의 대죄(大罪)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닌에 따르면 급진 좌파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의 원칙에 따르면 공산당은 타협하고, 히틀러 근위병의 편에서 조약에 반대하여 저항했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라우펜베르크(Laufenberg, Heinlich)6)의 민족볼셰비즘은 “천인공노할 부조리”이다. 그러나 라덱(Radek, Karl)7)과 공산당은, 레닌의 원칙에 따라, 독일 민족주의와 타협했으며, 루르지방 점령에 항의한 쉬라그에터(Schlageter)8)를 민족의 영웅으로 찬양했다.




    국제연맹은, 레닌에 따르면 “자본가 약탈자와 강도들의 무리”이며, 노동자들은 이를 끝장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의 전술에 따라, 이 범죄 집단과 타협했으며,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인민(Volk)" 개념은 레닌에 따르면 부르주아의 반혁명 이데올로기에 대한 양보이며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스탈린과 디미트로프(역자 주,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처음으로 인민전선을 주창) 역시 레닌의 원칙에 따라 쁘띠 부르주아와 타협했으며, 정치적 기형아인 ”인민전선“ 운동을 고안했다.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집중된 자본주의적 위험이며, 이에 대항하여 모든 반대 세력들을 동원하여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의 원칙에 따라 독일 제국주의와 곧 동맹을 맺어야 했으며, 마지막 남은 러시아 혁명의 성과들을 새로운 혁명이 두려워 히틀러에게 팔아먹었다. 더 많은 예와 증거가 필요한가? 역사적 경험들에 따르면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타협은 언제나 혁명의 약화를 야기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약화는 언제나 혁명운동의 파멸을 가져왔다. 따라서 혁명에서 타협은 언제나 파멸정책이다. 독일 사민주의가 타협으로 시작한 것은 히틀러에게서 끝났다. 레닌이 코뮤니즘의 ‘소아병’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사이비 코뮤니즘의 ‘노인병’으로 명백하게 드러났다.







    7.


    레닌의 저작에 서술된 볼셰비즘의 형상을 비판적으로 눈여겨보면, 아래와 같은 볼셰비즘의 본질의 원리를 요약하여 확인할 수 있다.




    1) 볼셰비즘은 민족주의적 독트린이다. 볼셰비즘은 원천적이고 본질적으로 민족 문제의 충족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나중에야 비로소, 즉 볼셰비즘이 민족문제의 충족에 쓸모없다는 사실이 증명 된 후에야 국제적인 효력과 광고를 위해 일반적인 독트린으로 확장되었다. 볼셰비즘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작은 국가들의 독립투쟁에 대한 볼셰비즘의 행동방식에서 확증된다.




    2) 볼셰비즘은 권위체계이다. 볼셰비즘에서 사회피라미드의 맨 꼭대기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지점이다. 이 지점에 있는 자율적인 인물로 권위가 실현된다. 이 전지전능한 인물의 완벽함에 대한 지도자 신화에서 부르주아적 이상적 인격은 최고의 승리를 만끽한다.





    3) 볼셰비즘은 중앙집권적으로 조직화된 운동이다. 중앙으로부터 발의, 지도, 지령 그리고 지휘권이 시작된다. 부르주아 국가의 본보기에 따라 볼셰비즘 조직에서는 지도적인 성원이 부르주아의 역할을 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은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4) 볼셰비즘은 군사적 무력정치이다. 단지 정치적 권력의 우위를 장악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볼셰비즘은 부르주아 전통의 전형적인 지배형태를 구성한다. 볼셰비즘 자체의 조직에서조차 당원들의 결정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군대가 볼셰비즘 조직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5) 볼셰비즘은 독재기구이다. 폭력과 억압 그리고 테러라는 수단으로 작동해, 그 모든 기능을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모든 제도들, 의견들과 경향들의 정복과 파괴로 나아간다. 볼셰비즘이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관료나 몇몇 인간들의 독재이다.




    6) 볼셰비즘은 기계적인 체계이다. 볼셰비즘은 사회질서로서 기계적인 획일화, 기술적으로 달성 가능한 똑같은 형태 그리고 가장 능률적인 전체주의를 지향한다.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계획경제가 유기적인 성장과 발전에 적당한 경제 형태를 경제공학으로 대체한다.




    7) 볼셰비즘은 부르주아 성격의 사회구조이다. 볼셰비즘은 임금제도를 제거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노동결실에 대한 처분권도 주지 않음으로써, 원칙적이고 실천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계급공식에 머물러 있다. 사유재산의 폐지만이 사회주의의 조건이 아니다.




    8) 볼셰비즘은 단지 부르주아 의미에서의 혁명원리이다. 평의회체제를 실현할 능력이 없었기에, 볼셰비즘은 부르주아 사회와 경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 볼셰비즘은 사회주의 대신에 국가자본주의에 도달하였다.




    9) 볼셰비즘은 사회주의로 가는 입구도 다리도 단계도 아니다. 평의회 체제 없이는 인간의 자기소외 극복을 통한 인간 내부의 혁명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회주의적 요구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충족되지 못한 체 머문다. 볼셰비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마지막 단계이지, 사회주의 세계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니다.




    위에서 논한 9개의 항목들은 볼셰비즘과 사회주의 사이를 심오하게 구분하는 경계선 이상이다. 이 항목들은 볼셰비즘의 근본적인 부르주아 노선과 볼셰비즘이 파시즘과 아주 명백하고 친밀한, 아니 가장 친밀한 친족관계임을 지적하고 있다.




    민족주의, 권위원칙, 중앙집권주의, 지도자독재, 무력정치, 폭력과 테러체제, 기계적인 작동, 부르주아 노선, 사회주의를 할 무능력 등 모든 파시즘의 본질적인 특성들이 볼셰비즘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파시즘은 볼셰비즘에서 이미 고안되고 만들어졌다. 볼셰비즘은 파시즘의 본보기며 스승이다. 이러한 이유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들은 볼셰비즘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끝)






    [주]


    1) 오토 륄레는 1874년 독일에서 태어나 1943년 멕시코에서 사망한 독일의 이론가 겸 정치가이다. 자신의 주요활동을 독일 사민당의 순회강사로 쌓던 륄레는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당시 독일 제국의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1차 대전에 필요한 전시공채에 반대표를 던지 유일한 사민당 의원이었다. 1916년 로자 룩셈부르크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참가하였으며, 전쟁 후에 “독일공산당(KPD)"에도 참여하였다. 독일 ”평의회 코뮨주의“의 핵심 이론가 가운데 하나이며, 볼셰비즘(레닌주의)과 파시즘에 대한 비판 이론가로 유명하다. 1932년 독일을 떠나 체코를 거쳐 멕시코에 정착하였으며, 1943년 그 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정치 분야 이외에는 주로 교육과 문화, 노동자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저서를 남겼다.




    2) 소비에트(Sowjet)는 러시아 말로 “평의회”를 의미한다.




    3) 베벨(Ferdinand August Bebel, 1840-1913)는 독일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 여성해방 운동가이다. 독일 사민당 창설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까지 다양한 분야들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생존 당시 그는 대중적으로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 베벨” 또는 “노동자 황제”로 불리었다. 사민당 내부에서 베벨은 “좌파”와 “수정주의 노선” 사이의 소위 ‘맑스주의 중앙파“에 위치하였다.




    4)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1854-1938)는 체고 태생의 독일의 맑스주의 이론가이며 정치가였다. 1881년 런던에서 맑스와 엥엘스를 알게 되었으며, 1883년 기관지 “신세대”를 창간하였고, 1895년 엥겔스가 죽은 후 독일 사민당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이론가가 되었으며, “전통 맑스주의”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의 “울트라 제국주의” 이론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을 국가들 간의 카르텔이 대체할 것이며,, 따라서 군수경쟁이나 전쟁의 위험이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비인에 머물던 그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하였으며, 그 해에 생을 마감하다.




    5)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는 폴란드 태생의 맑스주의 이론가이며, 유럼 노동자운동과 반군국주의 운동 그리고 노동자 국제연대운동의 대표적 활동가이다. 독일 사민당의 좌파의 지도자였으며, 당내 “수정주의 노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 임박하여 “대규모 파업”을 통하여 전쟁을 막으려 하였지만 실패함. 리프크네히트, 륄레와 함께 ‘스파르타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독일 공산당(KPD)을 창립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 레닌과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를 비판하였으며, 주요 경제학 저서인 ”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맑스 ”자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국 사회주의의 정치경제적 불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독일 혁명의 와중에 1919녀 1월 베를린에서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암살당한다.  




    6) 라우펜베르크(Laufeberg, Heinlich, 1872-1932)는 독일의 이론가이다. 철학과 역사를 공부 한 후, 맑스와 엥엘스를 학습하기 위하여 런던에 장기간 체류하였다. 1904년 독일 사민당에 가입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민당의 분열에서 그는 급진 좌파의 편에서 전쟁을 거부하였다. 1919년 독일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에 처음으로 “민족 볼셰비즘“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독일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7) 라덱(Radek, Karl, 1885-1939)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정치가로 폴란드, 독일 그리고 소련에서 활동하다가 스탈린에 의하여 시베리아로 유형된후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1차 대전 이전에 이미 레닌의 노선에 합류하였으며, 레닌의 스위스 망명 시절을 함께 보냈다. 1920년대 라덱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성원이었으며, 스탈린과 트로츠키 간의 권력싸움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지만, 다시 돌아와 “자기비판”을 통하여 당의 노선에 무조건 복종 할 것을 천명한다. 하지만 라덱은 1937년 트로츠키의 지지자로 다시 법정에서 10년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며, 그곳에서 1939년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8) 쉬라그에터(Schlageter, Albert Leo, 1894-1923)는 1차 대전에 참전한 독일의 군인이자 의용군이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가 루르지방을 점령하자 전투적으로 대항하다가, 프랑스 군사법정에서 간첩죄와 여러 번에 걸친 폭탄테러로 교수형을 당한다. 처형 후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우파를 넘어 거의 모든 정파로부터 민족의 영웅 또는 순교자로 칭송되며, 나치에 의하여 “제 3제국의 첫 번째 군인”으로 선전된다.




    *이 글은 진보넷에 올라온 번역글을 옮겨 놓은 것이며,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번역글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은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된다 (1)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49343&page=4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은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된다 (2)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49366&page=3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은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된다 (3)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49386&page=2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은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으로 시작된다 (4)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49403&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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