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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 쇠퇴논쟁] 과학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해체
  • 조회 수: 5100, 2015-01-26 20:06:27(2015-01-26)
  • <과학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해체>



    체제의 모순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현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부여잡고 있는가? 그리고 아직도 진보를 이야기하기가 가능한가? 우리의 아이들과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어떤 미래가 준비되고 있는가? 오늘날 모두가 괴롭게 묻고 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미래 사회가 기대고 있는 자본주의의 두 가지 유산을 대조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미래의 약속이라고 하는 생산력의 발전, 특히 체제가 아직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진보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진보도 파괴될 것이라 위협하고 인류의 미래 자체를 타협하고,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나오는 체제의 해체가 그것이다. 21세기의 첫 10년은 체제 해체로부터 나오는 현상, 즉 병든 사회1)의 부패가 점점 커지면서, 가장 비합리적 행위와 모든 종류의 재앙으로 문을 열어놓고, 공포가 지배하게 만들면서 점점 불만스런 피착취자에 대한 장악을 유지하게 하는, 냉소적으로 국가가 이용하는 일종의 ‘최후심판’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엥겔스의 정식을 반복하는, 한 세기 전 혁명운동,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기한 대안을 전적으로 정당화하는 오늘날 세계의 이러한 두 가지 현실 사이의 영원한 모순, 완벽한 대조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잠재성은, 고전적인 노동자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의 인류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기초를 다지는 생산력의 발전이다. 이러한 생산력은 인간 노동으로 자연을 효율적으로 변혁시키는데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결합되는 세 가지 요인들로 구성된다. 첫째는 발견과 과학적 진보, 둘째는 도구의 생산과 점점 세련되어지는 기술지식, 셋째는 프롤레타리아가 제공하는 노동력이다. 이러한 생산력에 축적된 모든 지식은 새로운 사회건설에 사용될 수 있다. 비슷하게 노동력은, 전세계인구가 자본주의에 의해 점점 더 거부되는 대신 인간 활동과 창조성에 기반하여 생산으로 통합된다면, 열배 증가할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변혁, 자연의 이해로서의 지배는 인류에 봉사하는 목적에 기여하지 않고 다수가 이러한 생산력 발전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고 이윤에 봉사하는 맹목적 역학만이 존재한다.2)


    자본주의 내에서 과학적 발견은 수없이 많지만 2012년에는 더욱 그렇다. 똑같은 실질적 기술의 솜씨는 인간 천재성과 지식의 정도를 과시하면서 모든 영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과학의 진보: 인류의 미래를 위한 희망


    몇 가지 보기만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3)수많은 최근의 기술발견과 성취는 제쳐두기로 한다. 사실 우리의 목적은 포괄적이지는 않지만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일부인 자연을 통제하게 만든 이론적 지식과 기술적 진보에 관한 일련의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를 예시하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 후 인류의 핵심 관심사였고 가장 근본적인 지식을 말해주는 세 가지 과학 발견의 보기는 다음과 같다.


    -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무엇이고 그 기원은 무엇인가


    - 우리의 종, 인류를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 질병은 어떻게 고칠 것인가


    (1) 기초 분자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해


    즉각적 응용으로 발견에 공헌하지는 않지만 기초연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 지식의 본질적 요소이며, 따라서 그 법칙과 구성요소를 통찰하는 능력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새로운 분자의 존재에 대한 최근의 발표를 높이 사야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이는 힉스 보손(Higgs Boson)으로부터 부르는 것과 여러 면에서 비슷한데, 이는 LHC 분자가속기 연구에 1만명을 동원한 제네바의 CERN(핵연구 유럽 센터)에서의 실험을 통한 부단한 추적 후에 이루어졌다. 새로운 분자는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 기초분자를 제공하는 특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사실 새로운 분자 없이는 우주에서의 모든 요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주의 탄생과 발전을 이해하는데 더욱 정교한 접근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분자의 존재는 피터 힉스(두 명의 벨기에 물리학자인 Englert and Brout와 함께)에 의해 1964년 이론적으로 예측되었다. 그 이후 힉스 이론은 이론적인 존재만이 아닌 분자의 실질적 존재의 확인에 이르게 한 과학 공동체의 논쟁과 발전의 주체가 되었다.


    (2) 5억년 전에 살았던 척추동물의 잠재적 조상


    진화에 대한 다윈주의와 유물론적 이론을 예시하면서 영국과 캐나다의 두 명의 연구원들은 발견 백년 후 지구에 존재한 가장 오래된 동물의 하나로 Pikaia gracilens가 척추동물의 조상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 그들은 외적, 내적 해부를 정확하게 기술하게 하는 서로 다른 이미징 기법을 사용하여 동물의 화석을 조사했다. 스캐닝 미시경의 특별한 유형의 도움으로 그들은 탄소, 유황, 철, 인산염의 화석의 화학요소에 대한 기초적 매핑을 수행했다. 그 동물의 화학구성을 언급하면서, 그들은 Pikaia의 여러 기관의 소재를 연역했다. Pikaia는 진화의 계보에 어디쯤 있는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다른 종들과 비교되는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척색(chordate) 계보 어디쯤이다” 척색동물은 척추를 가진 동물이거나 그 선조를 말한다. 이처럼 이 발견은 수십억년 지구에 살았고 우리의 조상인 종의 사슬에서 “잃어버린 고리”의 하나를 재구성하게 했다.


    (3) AIDS의 완전한 치료를 향하여


    1980년대 초 이래 AIDS는 지구의 대표적 전염병으로서 재앙이 되었다. 거의 3천만명이 이미 죽었고 그것과 싸우기 위해 엄청난 자원을 동원하고 치료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에 1천 8백만명4)을 죽이고 있으며, 이 (숫자)는 말라리아나 천연두와 같은 다른 어떤 치명적 질병(의 결과)보다 크다. 이 질병의 가장 불행한 국면의 하나는, 비록 지금은 이 병의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확실한 사망에 이르진 않지만, 희생자는 인구의 상당부분에 의해 추방될 뿐만이 아니라 극도의 제한된 치료를 받으며 일생동안 지내게 된다는 점이다. AIDS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람들을 치유하는 주요 단계는 금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팀이 수행했다. 8개의 AIDS 바이러스 양성환자의 검사에 사용된 약은 현재의 항-레트로바이러스 처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HIV의 복제를 차단함으로써, HIV의 집중을 감소시켜, 결과적으로 거의 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바이러스의 뿌리를 뽑고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감염 초기에 바이러스의 복제물은 항-레트로바이러스의 활동을 피하면서 오랫동안 살아있는 백혈구에 숨어있다. 그러므로 이 약은 면역체계를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백혈구 식별하고, 그것들을 파괴함으로써 HIV의 “보유군”을 한꺼번에 파괴하는 방식이다. 검사에 사용된 약물은 이러한 “보유군”의 추적을 허용하고 있으며 면역체계에 의한 그들의 파괴를 보증하고, 그러한 목적으로 활동을 촉진시킨다. 현재의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발전이, 다른 유형의 사회, 특히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지금의 것을 초월하여 일어날 것임을 즉각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윤, 혼란, 비합리성뿐만 아니라 퇴행, 소외, 사회관계의 파괴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생산력 발전의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그것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심각하게 가로막을지라도 아직도 그것들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은 오늘날 사회의 긍정적 측면으로 남아있다. 반대로 오늘날 나타나는 해체는 자본주의에서는 특수하다. 더욱 길게 지속될수록 이러한 해체는 미래에 더욱 부담되는 짐을 지우게 할 것이며 더욱 미래를 말살시킬 것이다.



    자본주의의 병적인 투영은 인류를 집어삼키며 위협하고 있다.


    일상 세계의 현실은 수십년 동안 다시 나타나고 악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삶의 어려움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사회 결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사회 구조, 사회·정치적 기구, 그리고 이념적 틀이 오직 해체를 심화시킬 뿐이라는 전망을 부르주아지는 물론 노동계급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국면과 현존하는 징후로 볼 때 해체는 인류를 집어삼키며 위협하는 이 체제의 모든 병적인 잠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을 들지 않고 있다.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싸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시간을 거스르는 경주”를 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는 오늘날 사회의 두 결정적 계급 사이의 투쟁의 산물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너무 늦기 전에 적에 맞서는 결정적 일격을 가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에 달려 있다.


    (1) 의미없는 살육의 배후에는 우리가 더 이상 의미없는 세상에 살도록 저주하는 자본주의의 비합리성이 놓여있다.


    최근의 이러한 해체의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징표의 하나는 2012년 12월 14일 미국의 뉴타운(코네티커트)의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살육이었다. 이전의 비극 중에서 한 개인에 의한 27명의 어린이와 어른의 이번 살육의 공포는 피를 얼어붙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2012년에 미국에서 벌어진 열세번째 사건이다.


    학교에서의 무고한 생명의 살육은 사회의 완전한 혁명적 변혁을 위한 필요성의 끔찍한 암시이다. 자본주의의 해체의 확산과 깊이는 야만적이고,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줄 수 있고 사회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코네티커트 초등학교의 학살 이후 그리고 다른 폭력적 행위에서의 경우와 같이 모든 지배계급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졌다.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마을”로 알려진 뉴타운에서 혼란스런 한 개인이 그처럼 공포와 테러를 자행하는 방법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는가?제시된 해답이 어떻든 간에 언론매체의 첫 번째 관심은 지배계급을 보호하고 그들 자신의 살인적 라이프스타일을 숨기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의는 학살을 엄격하게 개인 문제로 축소시키고 살인자 아담 란짜의 행위를 악을 저지르는 개인적 욕망,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경향의 개인적 선택으로 설명한다. 개인과 사회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하는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수십년간 이루어진 모든 진보적 결과를 부정하면서, 부르주아 정의는 살인자의 행위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종교적 신념과 집단적 기도의 재생을 해법으로 내놓고 있다.


    이는 그들의 범죄를 비도덕적 행위로 축소시키면서 일탈적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제안을 정당화하는 방법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분리시킨다면 폭력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 전체에 대한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의 관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지만 사회연대와 감정이입이 사라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지배하는 포위공격의 상태에 있는 사회에서 그 표현이 정점에 이른다. 사람들은 정확하게 무엇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은 잠재적 적으로 여겨지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민족주의, 군사주의 그리고 제국주의에 의해 강화된 이미지이며 신념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스스로 “합리성”의 보증자로 자임하고 조심스럽게 반사회적 행동이 만연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의 책임의 문제를 회피한다. 이는 9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16명의 아프가니스탄 시민을 학살한 로버트 베일스의 경우에서처럼 흉악한 행위를 저지른 병사들에 대한 미국 군사재판의 판단에서 더욱 극악무도하게 드러난다. 그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잠재우기 위한 알콜, 스테로이드, 수면제의 복용, 그리고 네 차례나 죽음의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 보낸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은 이와 같은 혐오스러움이 있는 유일한 국가가 아니다. 보기를 들어 중국에서는 뉴타운의 학살이 벌어진 그 날 한 사람이 칼로 학교에서 22명의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혔다. 지난 30년 동안 이와 비슷한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보기를 들어 자본주의 심장부의 한 나라인 독일은 2007년 에르푸르트에서의 학살과 같은 비극을 경험했으며, 특히 2009년 3월 11일 비넨덴의 알비트빌-레알슐레 대학의 총격사건에서는 가해자를 포함하여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뉴타운 사건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이러한 현상의 국제적 규모의 의미는 살인을 무기의 소지권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주로 매체의 선전임을 보이고 있다. 사실 압도되고, 고립되고, 오해받고,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많아 고립된 개인들이 저지르는 살인과 젊은이들의 자살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의 발전은 그들이 살아야만 하는 어려움에 부딪혀 그들의 삶의 조건의 긍정적 진화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 줄 변화의 전망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극단적인 길로 이끈다. 실업과 불충분한 소득이 가져다주는 불안에 의한 과로, 도덕적 위약과 침식 때문에 오는 부모들의 불충분한 존재가 어린이에게는 문제가 되며, 어른들에게는 그들 존재의 “실패”감으로부터 오는 증오의 감정과 누적된 욕구불만이 문제가 된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 고통과 혼란을 가져다주어 전체 사회가 책임이 있다고 느끼며 특히 청년들의 사회통합이 이루어지려고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열려있어야 하지만 실업으로 귀결되는 핵심기관 중의 하나인 학교의 책임을 묻게 된다. 수많은 욕구불만이 만들어지고 수 맣은 상처를 입히는 장소인 학교라는 기관은 꽉막힌 미래, 파괴된 인생과 꿈의 상징으로서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살인자의 자살로 끝을 맺는 학교 환경에서의 맹목적 살인은 그들의 고통을 나타내고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학교 정문에 경찰을 배치하자는 운동의 이면에는 노동계급 내의 어떠한 연대감도 가로막고 파괴하자는 생각이 스며들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소화기에 대한 강박과 아들을 포함한 자녀들을 발사범위에 두는 습관을 지닌 아담 란짜의 어머니의 사례가 효시다. 낸시 란짜는 “생존주의자”이다. “생존주의” 이데올로기는 사전·사후 묵시적 세계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얼마 안 남은 자원을 부여잡기 위해 무기를 보호의 수단으로 삼는 개인의 생존을 북돋는다. 생존주의자들은 목전에 벌어질 미국경제의 몰락을 예상하면서 무기, 화약, 음식을 쌓아놓고 황무지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 아담 란짜가 “미래가 없다”는 감정에 휩싸였다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반면에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폭력과 공포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의 안내자로서 국가와 그 억압을 신뢰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완전히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한 설명을 찾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그 자신 운명을 통제하게 하고 극단적 폭력의 끊임없는 순환으로부터 인류를 벗어나게 하는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사람들의 정서를 유리하게 취하고 오직 국가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신뢰를 필요성을 이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이는 공화당의 근본주의 가장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기능과 나머지 국민의 양심에 모든 무게를 싣고 있는 종교 이데올로기, 창조주의자들 등등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들이 제거할 수도 없고 심지어 통제할 수도 없는 비합리적 행동의 발전에 책임을 지는 것은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의 유지이고 자본주의의 착취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어디를 보든 간에 자본주의는 이윤 추구를 위해 자동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좌파는 현대 자본주의가 합리적 기반 위에 있고 사회의 일부는 물질적 이해가 더 이상 그 행동의 유일한 안내자가 아닌 비합리성이 증가하고 있다. 고립된 개인들이 저지른 콜럼바인, 버지니아 공대, 그리고 모든 학살은 우리의 동료 인간을 무작위하게 살해하기 시작하는데 어떠한 정치적 동기로 필요 없음을 보이고 있다.


    (2) 폭력의 일반화: 비행, 조직 범죄, 약물거래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깡패 도덕


    비행과 범죄의 물결은 2012년 10월과 11월 몇 달 동안 브라질 몇몇 등지를 흔들어 놓았다. 이 기간에 특히 상파울로에서는 260명이 살해되었지만 범죄율이 비교적 낮은 다른 도시들 역시 폭력이 일방적이다.


    폭력이 인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뿐만 아니라 그 정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찰도 범죄자들을 죽이고 있다. 우리가 TV에서 매일 보는 것은 전쟁이다.”라고 NGO 대표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재난은 대다수 인구의 보편적 가난에 보태질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설명 중에는 재활을 돕는 대신 범죄자를 양산하는 감옥 체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감옥 체제는 그 자체로 사회의 산물이며 그 이미지에서 그렇다. 사실 감옥 체제나 그 어떤 다른 체제의 개혁도 조직범죄의 현상과 경찰 억압, 그리고 나아가 모든 형태의 테러를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주요 문제는 이러한 체제의 지구적 위기와 함께 더욱 악화될 뿐이라는 점이다. 이는 브라질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오늘날 범죄의 도시로 나타난 상파울로는 30년 전 조용한 도시였다.


    멕시코의 경우 마피아 집단들을 볼 수 있는데, 정부 스스로 그들이 수행하는 전쟁에서 인구의 가장 빈곤한 부모에 속한 요소들을 등록하고 있다. 무차별하게 인구를 타격하는 이런 집단들 사이의 충돌은 정부와 마피아가 “부수적 손해”라고 부르는 수백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있다. 그들의 활동이 야기하는 참상으로부터의 마피아 이윤은 1990년대의 콜럼비아의 경우처럼 가난한 농부로 전환시키는 마약 생산과 거래에 관련되어 있다. 2006년 이래 멕시코에서는 6만명이 카르텔과 군대의 총탄으로 숨졌다. 사망자의 다수는 마약 카르텔 사이의 전쟁의 희생자였지만 정부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국가의 책임을 덜어주지 못한다. 사실 모든 마피아 집단은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의 보호 아래 형성된다. 마피아와 국가기구의 담합은 “그들의 투자를 보호하게” 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보호하게 한다.5)


    마약 거래의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재앙은 라틴 아메리가 전체에 존재하지만 브라질과 멕시코의 예시된 폭력현상은 북아메리카나 유럽과 무관하지 않은 지구적 현상이다.


    (3) 대규모 산업재난


    세계의 어떤 지역도 이러한 재난의 예외일 수 없고 그것의 첫 번째 희생자는 항상 노동자다. 그 원인이 산업 발전 자체는 아니지만 지구적 무역전쟁에 직면하여 모든 것이 이윤 증식의 목적에 희생되어야 하는, 위기의 자본주의의 수중에 있는 산업발전이기 때문이다.


    가장 전형적 보기는 체르노빌(1986년과 2004년 사이에 백만명의 “확인된” 사망자)에는 못미치지만 후쿠시마에 발생한 핵재난이다. 2011년 3월 11일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의 동쪽 해안을 덮쳤고 핵발전소를 보호하려는 제방이 무너져 버렸다. 2만명 이상이 홍수로 목숨을 잃었고 수천명이 여전히 행방불명된 상태이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잃었다. 사실 부르주아지는 후쿠시마 재난의 무시무시한 정도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 이러한 재난에 직면하여 지배계급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소홀함을 보여주었다. 주민의 소개는 너무 늦었고 안전 지역은 불충분했다. 정부는 실제 위험이 있다는 인식을 정보는 대규모 피난을 무조건적으로 최소화하기 위해 대규모 피난을 대부분 자제했다.


    템코회사의 실패나 규제기구가 회사와 맺었던 온정적인 관계에 대한 일본에서의 논쟁을 넘어서서 핵산업이 일본에서 발전된 방식이 실제로 미친 짓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본이 네 개의 주요 지질구조판(유라시아, 북아메리카, 필리핀과 태평양)이 교차하는 지점이고 세계의 가장 격렬한 지진의 20%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발전소 내와 주변의 방사능 유출기록은 치명적 강도를 나타냈다. 재난이 일어난 직후 일본수상은 노동자들의 자살특공대를 보냈는데 발전소의 방사능 수준을 감소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은 대부분 실업자이거나 노숙자였다. 25년 전 체르노빌 사태 당시의 몰락 직전에 있었던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그 재난과 싸우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WHO에 따르면 60만에서 80만의 “청산인”이 파견되었고 10만 이상이 방사능으로 죽거나 병들었다. 소련 정부는 믿을 만한 공식 통계를 밝히지 않았다.


    일본과 같이 고도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인구가 밀집된 나라에서는 그 효과가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공기, 토지, 해양의 오염, 핵폐기물의 저장, 이윤의 제단에 바치는 보호와 안전의 영원한 희생은 지구적 수준에서 체제의 비합리적 역동성에 가혹한 빛을 드리울 뿐이다.


    (4) “자연” 재난과 그 결과


    분명히 우리는 지진, 폭풍우, 가뭄의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비난할 수 없다. 반면에 우리는 자연현상과 관련된 이러한 모든 지각변동이 거대한 사회적 재난으로, 거대한 인간의 비극으로 전환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인간을 달에 보내고, 수십번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괴물같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수단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지진과 허리케인에 견딜 수 있게 댐을 짓고, 강물을 돌리고, 집을 지음으로써 자연 재난에 노출된 나라들의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다. 이는 이윤, 이윤 증식, 비용 절감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욱 논의를 발전시킬 수 없는, 인류에 대한 가장 극적인 위협은 생태적 파국이다.6)


    (5) 자본주의의 이념적 해체


    이 해체는 자본주의가 과학과 기술의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법칙에 스스로 점점 더 종속되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발전의 자리에 올려놓는 수단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초에 다다를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의 가치의 이념적 대체를 통하여 사회생활의 모든 국면에 반영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수많은 현상을 통하여 사회생활을 강하게 하는 모든 가치의 몰락을 가져온다.


    - 점점 진공으로 빨아들이는 사회의 표현, 즉 염세적 이데올로기의 발전


    - 종파의 만연, 심지어 선진국에서의 종교적 몽매주의의 부활, “과학적” 환경의 일부분을 포함하는 일관된, 구조돠된, 합리적 사상의 거부, 그리고 광고, 무의미한 쇼를 무효화시키는데 역할을 하는 매체


    - 인종주의와 인종학살의 발전, 이웃에 대한 공포와 증오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주변화, 개인의 원자화, 가족관계의 파괴, 노인의 배제


    자본주의의 해체는 전체로서의 사회에 부과되는, 벼랑끝의 세계, 미래없는 세계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그것은 “능력있는 개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그리고 폭력의 지배이다. 그리고 전체 사회를 전염시키는 배제인데 특히 일상을 절망과 파괴로 사는 가장 불리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 참상을 피하기 위해 자살하는 실업자,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어린이, 그리고 몇 푼 때문에 고문당하고 살해당하는 노인들이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 막다른 길목으로부터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


    2009년 하반기에 열린 코펜하겐 정상회의에서 미래는 현재를 위해 희생되었고 죽었다고 결론지었다.7) 이 체제는 이윤이 한계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단기적으로 늘 그렇지는 않지만), 점점 더 제한되고 있다(투기로 보여주듯이). 벽을 향해 돌진하지만 그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2005년 미국 대통령 민주당 후보인 알 고어가 지구온난화의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을 제시했을 때 진지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그는 8년동안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후 더 이상 “사업”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세계를 움직이는 이전 사람들이 가끔 이러한 위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그들의 도덕적 양심이 어떠하든지 그들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체제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메커니즘이 있고 그 논리는 가장 강력한 정치의 의지보다 더 강하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미래를 걱정하는 자녀들을 가지고 있다. ... 불안하게 다가오는 재앙은 먼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타격할 것이지만 부르주아지도 점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노동계급은 스스로 미래를 견딜 뿐만 아니라 현재 부르주아지의 후손을 포함한 전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견딘다.


    세계시장을 만들고 통일시키는 사회의 생산력과 부의 양적 도약을 달성할 수 있는 버녕의 시기 이후, 이 체제는 지난 세기가 시작된 이래 쇠퇴의 시기에 들어서는 그 자신의 역사적 한계에 도달했다. 대차대조표는 이렇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1929년의 위기, 그리고 끊임없이 세계를 가난으로 몰아넣는 1960년대 말의 새로운 공공연한 위기가 그것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인류의 거대한 재앙인 그 체제 자체의 영구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위기이다. 이는 특히 수백만의 인간들을 가난에 종속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영속화시키면서 자본주의의 고뇌는 지난 30년 동안 나타난 현상인 해체의 현상으로 나아가면서 쇠퇴의 극단적 모습이라는 새로운 질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만들어 갈 새로운 사회의 생산관계는 몰락하는 과정에 있는 사회 안에서 부화하지만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봉건사회 내에서 발전하는 것처럼) 이는 오늘날의 경우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직 가능한 대안은 자본주의 체제의 하괴 위에서 공산주의 사회라는 다른 사회의 건설이다. 인류를 자본주의의 맹목적 법칙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법칙이 불가능하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과 통제를 통하여 인간의 욕구를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것이다.


    야만으로의 현재의 몰락에 책임이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진화과정인 것처럼, 자본주의 내에서 대부분의 부를 생산하는 계급은 이 체제의 영속화에 더 이상 물질적 이해를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 뒤에서 모든 비착취 인민을 끌어내는 혁명 투쟁으로 공산주의라는 진실로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현재의 사회질서를 전복시키는 주요 피착취계급이라는 점이다.


    아직까지 40년 동안 모든 대륙에서 발전한 계급투쟁은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그 막다른 골목인 새로운 세계대전이라는 야만의 궁극적 형태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혁명 투쟁을 통하여 자신의 전망을 확인하고 그에 수반하는 미래 사회를 제시할 수 없다. 현재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의 어떠한 대안도 스스로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우리는 서 있다. 이는 우리의 발밑에서 썩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발점이고 이 체제의 쇠퇴가 극단적인 야만으로 나아가는 특별한 경우를 설명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는 경제위기의 악화와 더불어 자라나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지가 퍼뜨린 모든 불신에 맞서서 노동자 사이의 신뢰를 의미하는 연대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보호자”라는 국가의 거짓에 맞서 사회의 해체를 가져오는 이 기구의 탄핵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제기하는 쟁점들의 심각성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전멸의 위협을 깨달아야 한다. 노동계급은 모든 삶의 조건에 대한 경제적 공격에 더하여 매일매일 고통을 주는 이러한 쇠퇴로부터 투쟁을 발전시키고 계급단결을 단련시키는 이성과 결단을 해야만 한다.


    단결과 계급연대를 위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의 투쟁은 총체적 부패에 빠진 이 세계 속에서 유일한 희망의 빛이다. 그 투쟁만이 새롭게 태어날 인류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마침내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새로운 사회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투쟁의 국제적 보편화이다.


    <주>


    1)  “해체,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 「국제평론」,62, 3rd Quarter, 1990.


    2)  컴퓨터의 초기 발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컴퓨터는 전적으로 군대의 봉사용이었다. 군사 연구가 최고의 기수발전을 흡수하고 지시하지만 오늘날 모든 선도적 부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3)  이러한 보기에 관련된 정보는 2012년에 이루어진 발견에 대한 「연구」지에 실린 논문에서 발췌한다.


    4)  2011년 UNAIDS의 숫자


    5) 「국제평론」 150호, 2012년 4th Quarter의 “위기와 마약거래 사이의 멕시코”를 볼 것


    6)  크리스 하먼의 「석기시대에서 새로운 백년으로의 인류의 역사」(2002)에서 특히 653-654쪽을 볼 것. 프랑스판 La Decouverte, 2011


    7) 「국제평론」, 140호(2010년 1st Quarter)에 실린 “지구를 구하라? 아니 구할 수 없다”를 볼 것



    <번역> 오세철 / 사회실천연구소


    <원문출처>  국제 공산주의 흐름, 「국제평론」, 151, 1월-4월, 2013년, 1-5쪽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304/7382/editorial-scientific-advances-and-decomposition-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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