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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평등] 해결되지 않은 성폭력은 지금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한 정치적 사건이다
  • 조회 수: 6746, 2015-03-21 14:08:06(2015-03-21)
  • 해결되지 않은 성폭력은 지금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한 정치적 사건이다




    (이 글의 초안은 지난 3월9일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쟁대위 회의에 제출되고 쟁대위원들에게 배포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나의 설명과 제안, 쟁대위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뤄졌다. 이날 회의에서는 내가 제출한 글을 숙독하고 다시 날을 잡아 토론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 글은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대책위원회와 소통하고 토론한 결과물이란 걸 밝혀둔다.)



    -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입장, “피해자 동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조성웅

     

     

    가해자들은 섹스파트너, 원나이트, 성적 취향 등에 관해 피해자가 거부를 하는데도 일방적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B(서울시립대 교지동아리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인용자)는 피해자 동지에게 "자위해본 적 있느냐?",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내가 여자가 자위하는 거 보여주겠다"라며 일본여성이 자위하는 동영상을 틀고 피해자 동지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그 동영상을 보게 했다. A(다함께 회원이자 대학문화 편집위원 정모 -인용자)도 “아오, 성포비아(성혐오 혹은 성적 보수주의-인용자). 너도 이런 것에 대해 좀 알아야 돼.”라며 동영상 보기를 종용했다. 동영상을 보면서 B는 흥분된다.”는 등의 말을 했다.
    또한, “임신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는 B의 질문에 A도“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며 대답을 강요했다. B가 성교하는 시늉을 내며 “3, 2, 1 발사.”라는 농담을 하자 A도 B와 같이 박장대소를 하며 크게 웃었다.(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대책위원회,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을 말하다] 중에서)
     

     

    해결되지 않은 성폭력은 지금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한 정치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피해자의 생존이 위험하기 때문이고 피해자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 운동, 피해자의 고통 위에 세워진 정치는 혁명적 전망을 조금도 보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 해결되지 않은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있다. 피해자의 생존은 여전히 위험하고 심지어 위협당하고 있고 다수의 공조직들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로 치부하며 침묵하고 있으며 노동자연대는 피해자 동지의 호소가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이라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지금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긴급한 정치적 사건인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은 우리 사이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많은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관습적인 것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을 던져야 하고 의식적인 학습을 통해 답을 찾아가야 한다.

     

    여기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다는 이유만으로 “경계선 인격 장애자”, “성적으로 문란한 자”, “조직을 음해하는 자”, “거짓말쟁이”(평소에 자신의 무규율로 활동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 것을 거짓말로 둘러대기를 잘했다) “연애결별의 앙갚음” 등등 비난받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벌써 햇수로 4년째 포기하거나 해체되지 않고 꿋꿋하게 생존해 피해를 호소하고 있고 노동자연대에 2차 가해를 중단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피해자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의 저음에 대해 눈 감고 귀 닫으며 침묵하는 건 지배질서에 온순하게 순응하는 것이며 어떠한 운동적 의미도 없다. 4년이나 지난 사건에 대해 지금,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무수한 정치적 쟁점과 직면해야 하므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린 바로 이 지점에서 왜 우리가 운동적 삶을 살고자 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고 치유를 위한 정치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에 대해 정치적 태도를 취한다는 건 우리 사이에 도입된 위계와 차별에 맞서 이를 극복하는 투쟁 과정이고 우리 안의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피해자 동지의 호소에 대한 화답은 운동사회 전체가 자기 일로 받아들여 해결해야 한다.

     

    1. 노동자연대의 조직보위론

     

    이 사건은 조직 보위를 위해 간부 회원들의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는 전형적인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함께와 무관한 S대 교지 엠티에서 벌어진 경미한 사건이고, 피의자도 신입회원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폭로 직후에 그는 방조한 잘못을 인정했다.(노동자연대 낙인찍기에 대처하기 위한 TF, ["다함께 성폭력 사건“은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 중에서)
     

    노동자연대는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조직 보위를 위해 간부 회원의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는 전형적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노동자연대가 자신의 조직적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동원하고 있는 수단과 방법들은 “조직보위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연대의 조직보위론의 씨앗은 이미 “경미한 사건”이라고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규정한 태도 속에서 발화하고 있었다.

     

    “만약 성폭력이나 성추행 사건이었다면 나는 그동안 우리 단체가 그랬듯이 신속히 조사하고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이 그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봤다. 따라서 조직적으로 나서서 처리해야 할 사안도 아니라고 봤다. 당사자가 소송이나 진실 규명 작업으로 해결할 문제였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의 조직보위론이 개화됐던 영토가 바로 이곳이다. “경미한 성희롱 사건”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나서서 처리해야 할 사안”이 아니었으며 “당사자가 소송이나 진실 규명 작업으로 해결할 문제”였던 것이다. 왜 경미한 사건인가? 왜 조직적으로 나서서 처리 할 문제가 아닌가? 운동 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은 언제나 즉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주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 조직의 정치적 성격을 투명하게 요약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만의 기준으로 성폭력과 성폭력 아님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정하는 기준과 다르지 않다. ‘성폭력 특별법’은 성폭력(강간)을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만 한정하고 있고 이는 성폭력을 남성이 소유한 ‘임신가능한 부녀자’에 대한 침해, 즉 사적소유권의 침해로 보고 있다는 것, “권리의 침해”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자연대도 성폭력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 자율권의 침해”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확장된 성폭력 개념(2차 가해, 피해자중심주의)을 “조금치도 수용하지 않는다”. 노동자연대는 확장된 성폭력 개념이 “진보진영에서도 소수만 수용하는 개념”이라면서 이 근거를 현직 판사에게 의탁한다 “우리가 경력 25년의 현직 판사에게 문의한 결과 그는 "그런 말[2차 가해] 생전 처음 들어 본다"고 답변했다”(노동자연대 낙인찍기에 대처하기 위한 TF, [“다함께 성폭력 사건”은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 중에서)고 인용하는 건 정치조직으로써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노동자연대는 성폭력의 기준과 조직적으로 나서서 처리할 사안과 아님의 경계가 분명했고 또한 나름의 강력한 규율(“신속이 조사하고 사실이 밝혀지면 즉시 제명할 것”)이 있었으나 이러한 규율은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성적 자율권의 침해)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노동자연대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는 아픈 것이 죄가 된다. 일하다 다쳤다고 관리자들에게 말하면 일 바빠 죽겠는데, 오히려 “짜증”부터 내고 “개인 부주의”로 몰아간다. 일하다 다쳤는데도 자기 돈 들여 치료해야 한다. 산재라도 신청하려면 해고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하청노동자들은 존엄한 한 인간이 아니라 이윤의 부속품처럼 쓰다 버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지원은 무엇이겠는가? 우선으로 “괜찮으냐”고 묻는 것이고 그의 경험적 진술을 잘 들어 주는 것이며 그 욕구를 세심하게 살피는 일이다. 이러한 “곁의 정치”야말로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노동자연대가 처음으로 한 일은 피해자 동지의 경험적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하는 일이었고 이 거짓을 입증하기 위해 피해자 동지를 노동자연대의 이름으로 “경계선 인격 장애자”로 낙인찍는 일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의지의 표현들은 “성적으로 문란한 자”, “조직을 음해하는 자”, 거짓말쟁이, “연애결별의 앙갚음” 등으로 피해자 동지를 비난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러한 노동자연대의 조직된 폭력(2차 가해 행위들)은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핵심적인 실마리”(이현주, [공허한 수사로 정치적 파산을 은폐할 수 없다] 중에서)로 논리화 됐다. 그러나 노동자연대가 말하고 있는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핵심적인 실마리, 혹은 합리적 의심”과 조직적 폭력(2차 가해)과 조직보위론 사이에 경계는 없다.

     

    노동자연대가 피해자 동지를 “경계선 인격 장애”로 낙인찍고 그녀의 경험적 진술을 “거짓말”로 꾸민 이후에 한 일들은 “확장된 성폭력 개념과 2차 가해, 피해자중심주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이 피해자 절대주의, 즉 극단적인 주관주의라는 것이다. 경계선 인격 장애가 말한 주관적인 감정과 인식, 그 거짓말을 “기정사실화”하여 공론화한, 피해자 대리인이었던 류한수진 동지를 난도질하는 것이었으며 류한수진 동지의 기고 글을 매체에 실었던 <노사과연>, <사회주의노동자신문>과 그 글을 홈페이지에 게시한 <국제코뮤니스트 전망>에 기사 삭제를 요구하는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연대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였으나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지 않은 유일한 한 가지, 그것은 피해자 동지의 피해, 상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녀의 문제 제기, 호소,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전한 공감능력의 상실, 노동자연대의 정치적 행위들은 운동사회 내부에서 발생했던 조직보위론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사건(성폭력 사건) 발생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들
     
    <해당 조직 또는 주변인>
    - 음모설, 배후설 등이 등장하면서 강한 조직보위논리가 발생한다. 그런데 조직보위논리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사건을 비정치적 사안으로 끊임없이 규정하려는 경향도 나타난다.
    - 성폭력 사건을 투쟁 사안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 운동의 대의명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한 조용하게(?) 해결하고자 한다.
    - 외부에 공개되었을 경우, 조직의 위신이 심각하게 추락한 것으로 사고한다.
    - 과거 사건인 경우, 당시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여성들의 비주체성이 가해자에 대한 비난과 비슷한 강도로 행해진다(해결되지 않은 성폭력은 언제나 현재적 사건이다).
    - 2차 가해가 나타난다.
     
    <가해자>
    - 운동경력, 진보이론을 폭력 사실을 은폐 축소하는데 악용한다.
    - 시간이 지날수록 은폐부인 등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 자본주의의 모순에 빗대어(사회구조적 문제, 가부장제 문제 등) 가해자의 잘못을 협소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 가해자로 확인된 이후에도 크게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피해자>
    - 운동 전반에 대한 회의에 휩싸인다.
    -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인간에 대한 공포, 나아가 남성 일반에 대한 적대의식으로 확장된다.
    - 노출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갖게 된다.
    - 사회관계가 위축되고 활동이 왜소화되는 경향을 띤다.
    - 스스로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지만 운동사회에서 축출당하기도 한다.”
     
    -(김혜란, [운동사회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하여], {운동사회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 원칙 마련을 위한 토론회 - KBS 노조 부위원장 강철구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하여})

     

    인용문에서 잘 정리하고 있듯이 운동 사회 내부의 기본적인 성폭력 사건의 특징들은 노동자연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연대는 성폭력 사건 자체에 대해서 은폐 부인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이를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는 데 사용했다. 피해자 동지에게 자행된 2차 가해를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합리적 의심”으로 논리화했다. 피해자 지지모임의 호소는 무시하며 가해자 정모의 민사소송 뒤에 숨어 사건이 조용하게 해결되기를 기다렸다. ‘조직 노동계급 운동 속’에서 활동하는 데 “장애”가 발생하자 그제야 비로소 노동자연대는 기존의 “무반응 기조”에서 무대 위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노동자연대가 당혹스럽게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은 피해자 동지에게 사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연대가 “다급하게” 걸쳐 입은 옷은 정치적 음해 (“중상모략”,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에 맞서 피해자 동지의 호소를 짓밟고 공세적으로 상황을 돌파하겠다는 강력한 조직보위론이었다.

     

    노동자연대의 강력한 조직보위론은 계급 환원주의와 맥락을 같이했다. 즉 노동자연대엔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조직의 위신을 심각하게 추락”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용히 해결돼야 하는 부차적이고 비정치적 사안이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박근혜 정부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가하려 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려면 개방적인 토론과 논쟁, 이를 거친 단결과 연대가 필수적이다. 이들의 맑시즘 행사 방해는 이런 노력을 방해하는 것이다”(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 [단결된 운동 구축 방해하는 무책임한 행위 중단하라] 중에서)

     

    “조직 노동계급의 운동 속에서 별 장애 없이 활동하고 있”을 땐 피해자 지지모임의 호소에 눈 감고 귀 막고 무시로 일관하면서 법정대응 뒤에 숨어 조용히 사건이 해결되기를 기다리기만 했던 노동자연대가 활동의 장애가 발생하자 말자 뜬금없이 “개방적 토론과 논쟁”을 들고 나오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자연대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개방적 토론과 논쟁”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전방위적 공격에 맞선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피해자 동지의 고통스러운 호소, 그 입을 닫으라고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방적인 토론과 논쟁”은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개방적 토론과 논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오랜 전통이자 부르주아 정치인 “명령과 복종”을 거부하고 평등한 협력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맑시즘 행사 방해는..., 강력한 운동 건설을 방해하는 것이다”라는 노동자연대의 주장은 “어려운 시기에 정부와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조직에 치명적이니 참아 달라”([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중에서)고 말했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가해자들의 주장과 단어 상의 차이만 있을 뿐 그 내용에 있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노동자연대엔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강력한 운동 건설”보다 중요하지 않은 투쟁, 삭제되어도 좋은 투쟁이다. 이것이 노동자연대가 도입하고 있는 운동의 위계질서다.

     

    그러나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치유를 위한 정치적 상상력을 가지는 것과 박근혜 정부의 공격에 맞선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는 건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투쟁이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피해를 호소하는 동지의 진술을 진지하게 들어줄 여력이나 의지도 없는 노동자연대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 진술을 무조건 “거짓”으로 규정했던 노동자연대가, 심지어 피해자 동지를 “경계선 인격 장애자”로 낙인찍고 있는 노동자연대가 어떻게 “강력한 운동을 건설”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1년 이상 된 시립대 교지 엠티에서 벌어진 일, 그것도 아직 진실이 뭔지도 알 수 없는 일을 왜 뉴스레터에까지 공개 해 모든 회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모든 회원들이 집중해서 실천해야 할 문제라도 된단 말인가? 뉴스레터에 실었다면 오히려 회원들이 우리 단체가 집중해서 실천해야 할 다른 활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노동자연대엔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모든 회원들이 집중해서 실천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고 “집중해서 실천해야 할 다른 활동을 방해”하는 부차적이고 비정치적 사안이었다. 그래서 피해자 동지의 호소를 무시하며 법정 소송 뒤에 숨어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잦아들기만을 조용하게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정치적으로 평가하고 조직적 태도를 수립하는 것은 결코 노동자연대가 “집중해서 실천해야 할 다른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연대가 그토록 회복하고 싶어 하는 “조직적 명예”와 직결되어 있었고 노동자연대의 강령과 전술적 태도가 과연 민주적이고 혁명적 정치를 구현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정치적 검증대였다. 운동의 위계질서를 도입하고 조직방침으로 승인한 건 이토록 정치활동의 “장애”를 발생시켰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해결은 “모든 회원들이 집중해서 실천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2. 표적 없이 허공에 쏘아 올린 공포탄,

    노동자연대는 ‘분리주의 페미니즘’ 비판을 조직보위론으로 사용하고 있다

     

    2014년 11월 26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의 최초의 입장이 발표됐다. 난 놀라웠다. 노동자연대는 온통 “법원 판결문”을 인용하고 도배하면서 “성폭력 가해 단체”가 아님을 입증하려고 했고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피해자 절대주의”로 규정-를 공격하며 무로 돌리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없애면서까지 부르주아 사법기관의 판결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를 무로 돌림으로써만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밖에 없다는 건 노동자연대의 정치적 행위 자체가 운동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 줄 뿐이다.

     

    먼저 노동자연대가 주된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확장된 성폭력 개념과 2차 가해, 그리고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해 검토하기로 하자.

     

    “2차 가해 개념은 성폭력을 아무런 객관적 기준 없이, 동의와 강압 여부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주관적 감정과 인식에 근거해 ‘성폭력’을 규정한다. ‘2차 가해’ 개념은 또한 성폭력 개념을 무한 확장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되면 아무런 객관적 근거 없이 엉뚱한 사람이나 집단을 마녀사냥할 수 있고, 운동 내에서도 도적주의적 분위기를 부추길 수 있다(노동자연대, ["다함께 성폭력 사건”은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 중에서
     
    “피해호소인의 말을 다 믿지 않고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은 모두 2차 가해자인가? 이건 피해자중심주의라기보다는 피해자 절대주의다. 피해 호소인의 주관적 감정을 성적 가해의 기준으로 삼으면 기준이 완전히 모호해져, 강간을 강간으로, 성추행을 성추행으로, 성적 괴롭힘을 성적 괴롭힘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하는 특징을 단순히 추상해버린다. 강압 여부도 흐려지고, 가해의 경중도 흐려지고, 가해 자체와 진실 규명 노력의 차이 문제로 흐려진다. ‘폭력’이 개념이 언어 ‘폭력’과 정신적 ‘폭력’까지 확장되고, 이런 식으로 화대되다 보면 어떤 해석도 갖다 붙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실재와 상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폭력과 의도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는” 언행이 모두 “성희롱”, 심지어 “성폭력”으로 규정된다”(노동자연대운영위원회, [“성폭력 가해단체”라는 명예훼손 모략을 중단하라] 중에서, 2014년11월26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운동 사회 성폭력 피해의 본질은 원 성폭력 자체보다도 원 성폭력을 바라보는 조직과 주변인의 시선, 태도로 발생하는 피해가 훨씬 크고 깊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항상 등장하는 “객관적 기준”이라는 것들은 누구의 시선으로 구성된 이해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증거를 찾는 수사관의 역할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정치적 상상력을 갖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우리가 구성해야 할 정치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조직 노동계급의 운동”은 성매매(노래방 도우미, 룸문화 등)가 일상적으로 깊숙이 고정된 조직문화다. 여성은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다. 여성은 “맛”에 비유되거나 “사물”에 비유되는, 돈 주고 살 수도 있는 성적인 대상이었다. 동등한 권리를 갖춘 존재가 아니라 혐오와 비하의 대상이기도 했다. 운동 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객관적 기준”이라는 건 가해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이해일 수밖에 없다.

     

    또한, 노동자연대가 강조하고 있는 “동의와 강압 여부”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원가해자 정모는 피해자 동지의 “거부 의사”를 “동의”로 생각했다. 물리적인 폭력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 “동의”로 해석됐던 것이다. ‘동의’ 여부가 언제나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성폭력 가해자들은 성별 권력관계를 이용해 강압 없이도, 즉 물리적인 폭력 없이도 언어적 심리적 강제를 통해 성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자행할 수 있다. 따라서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 피해자의 진술을 존중하고 사건을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운동적 노력이자 정치적 치유를 위한 출발점이다

     

    누구도 “여성이 불쾌함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성폭력”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 즉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의 침해로 성폭력을 규정한다. 비록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나의 말과 행동이 (성)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생한 자각으로 뭉친 조직이라면 성폭력 개념의 “무한확장”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개방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피해자 절대주의”라고 울부짖는 노동자연대의 두려움은 도대체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가? 노동자연대가 폐해 목록을 주섬주섬 주워 모아 제기하는 성폭력의 “객관적 기준, 혹은 동의와 강압 여부”는 가해자의 시각으로 구성된 이해이다. 노동자연대는 이를 자신이 행했던 “조직된 폭력”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대책위가 남발하는 ‘2차가해’ 개념은 형법상 인정받는 개념이 전혀 아니다. 사회의 다수는커녕 사회운동에서도 비교적 소수가 수용하는 개념이다. 대책위처럼 성폭력 개념을 독단적으로 사용하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런 식의 느슨하기 짝이 없는 용어 사용은 종파주의자들이 성폭력 쟁점을 자기들의 맘에 들지 않는 단체를 범죄자 집단처럼 매도하는 소재로 이용하기 쉽게 만든다(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 [“성폭력 가해단체”라는 명예훼손 모략을 중단하라] 중에서, 2014년11월26)
     

    노동자연대가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종파주의자들이 성폭력 쟁점을 자기들의 맘에 들지 않는 단체를 범죄자 집단처럼 매도하는 소재”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난 “류기혁 열사투쟁을 조직하라”는 항의를 “종파주의자들의 분열책동”이라고 매도했던 현대자동차 이상욱 집행부가 떠올랐다. 계급을 배신했던 자들은 언제나 “통 큰 단결”을 외치며 아래로부터의 항의를 종파주의자의 분열책동으로 몰아갔다. 노동자연대가 매도하고 있는 ‘종파주의자들’은 사실은 운동사회 내부에서 발생했던 성폭력 사건에 있어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녀의 권리를 존중하며 가부장적 조직문화에 맞서 투쟁했던 사람들이다. 오히려 노동자연대처럼 ‘종파주의자’들에 맞서 조직의 이해를 보위하려 했던 자들은 피해자의 진술을 폐기하고 조직 내 비판과 토론을 봉쇄했으며 독립적이고 구체적인 사유를 축출함으로써 관료주의를 자신의 지도노선으로 완성했던 자들이었다. 조직보위론은 운동 사회 내부에 도입된 부르주아 정치, 완성된 관료주의였다.

     

    노동자연대는 조직의 이해를 위해 눈 감고 귀 막았다. 확장된 성폭력 개념은 “사회에서도 비교적 소수가 수용하는 개념”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관인 여성가족부에서도 “수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여성부 <성폭력 피해자 치유 가해자 교정 프로그램 매뉴얼>엔 “성폭력은 강간, 성추행, 성희롱, 성기노출, 음란전화, 온라인 성폭력 등 상대방이 원하지 않은 불쾌한 성적 언어나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굴욕적인 감정이나 신체적 손상,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도달한 인권 수준이고 우리는 이 수준을 뛰어 넘어 우리 안의 평등을 위한 혁명적 정치를 꿈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자연대가 말하는 “사회에서 소수가 수용하는 개념”인 확장된 성폭력 개념과 사건처리 원칙으로서의 피해자중심주의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의 규약으로도 정식화되어 있다. 2012년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서 승인된 <민주노총 성폭력, 폭언, 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엔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불쾌한 성적인 언사, 몸짓, 신체적 접촉, 추행, 강간 등 성적 자율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를 말하며, 법적으로 예시된 이외에 다음의 내용도 포함된다. 1. 개인의 성적 자율권 및 성정체성을 침해하는 모든 언어적, 정신적, 물리적, 환경적 폭력행위 2. 성적 호의를 조건으로 타인의 경력, 급여, 보직, 고용 등에 영향을 미치거나, 기타 일방적으로 만남이나 교제를 강요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2차 가해’라 함은 사건 이후 가해자나 그 주변인, 제3자가 피해자가 원치 않는 접촉이나 합의 시도 및 사건접수자 또는 제3자가 피해자를 부당하게 추궁하고 특정 행동을 강요하는 행위, 고의적으로 사건 해결을 지연시키거나 은폐·축소하는 행동 등으로 피해자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고 정식화 할뿐만 아니라 피해자중심주의를 사건 처리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연대는 계급의 겨우 10%만을 조직하고 있다는 이유로 민주노총의 규약을 “사회적으로 소수가 수용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우길 것인가? 노동자연대의 주장과는 다르게 확장된 성폭력 개념은 민주노총과 노동단체, 정치조직에서도 받아들이고 있는 운동 사회 내부의 “대중적”인 개념이다. 오히려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방어하려는 노동자연대의 주장이야말로 “노동자연대만이 수용하고 있는 종파적 개념”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성주의도 다양한 경향이 있다는 것, 여성주의도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 여성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 지점에서 노동자연대의 “여 VS 남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은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해결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표적 없이 허공에 쏘아 올리는 종파적 공포탄일 뿐이다.

     

    확장된 성폭력 개념이나 피해자중심주의는 노동자연대가 공격하듯이 ‘위험한 물건’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이다. “피해자 절대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 즉 시민권에 속한다는 말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상처와 피해를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시기, 이 땅에 성폭력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한 예로 2010년 무렵만 하더라도 금속노조 규약에 ‘언어성폭력’ 개념이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성차별적 폭언’만이 존재했다. 성폭력 개념 또한 ‘업무와 관련해서’라는 단서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조 내부의 가부장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조직 문화에 맞서 투쟁했던 성폭력 피해자와 그 공동체들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성폭력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자율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로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식화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적용,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대응은 운동 사회 내부의 “개방적인 토론과 논쟁”을 통해 결정하면 될 것이다. 성폭력 개념의 확장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인간 권리의 성장, 지금 여기에 도착한 여성의 존엄함이다.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는 언행이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된다고 과장하고 있는 노동자연대의 태도야말로 성폭력 개념에 대한 “의도된 과장”이고 이러한 과장은 언제나 가해자들의 논리였다. 운동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 속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피해 혹은 감정을 절대화하는 극단적 주관주의”라는 공격들이 있었다. 가해자들은 가해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모든 사실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고 피해자 진술의 주관성, 그 감정의 예민함과 불안정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진술을 객관화하는 것은 운동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문제이지 결코 피해자가 입증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 진술의 객관성은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고 배려하며 그 진술에 대해 귀 기울여 들어주는 공동체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비판적 문제제기를 하는 류한수진 동지가 왜 자신이 피해자 대리인으로 나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피해자는 개인으로서 조직과 맞서고 있었고 ... 이 힘의 불균형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우선 피해자의 말을 좀 더 신뢰하고 피해자를 지지 지원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몇 명은 필요하다고 봤다. ...만약 당시에 누구도 어느 쪽에 힘을 싣지 않고 모두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태를 관망했다면 피해자의 입장은 그냥 묻히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그렇게 끝나고 말았을 테니까”(류한수진, [사회주의가 성폭력 문제 앞에 당당하기 위하여]중에서)

     

    정치 조직 내부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오직 개인으로 조직에 맞서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힘의 균형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논쟁과 논의의 중심에 피해자에 대한 고려와 배려보다는 조직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바로 그래서 피해자 진술의 객관성, 피해자 중심주의는 공인되지 못했다. 피해자의 진술에 귀 기울여 줄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너무나 미약했고 조직적인 싸움이 무장 해제 당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감정을 절대화할 수 있는 조건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 그녀의 진술을 폐기함으로써 언제나 가해자 진술의 객관성이 조직적으로 승인됐고 결국 조직보위론과 결합 돼 가장 끔찍한 관료주의를 강화해 왔다. 이것이 운동사회 내부를 환하게 비춰주는 현실적인 힘 관계였다.

     

    피해자중심주의는 가해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구체적인 행위가 있었고 그 행위의 결과에 의해 피해가 발생했다면 피해자의 구체적인 진술을 채택하고 존중함으로써 사건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류한수진 동지의 진술처럼 “힘의 균형을 상쇄”하기 위해, “피해자의 입장이 묻히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것이 폐해목록을 백 페이지 작성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중심주의의 실천적 의미이다.

     

    생각해보자. 정치조직 내에서 확장된 성폭력 개념과 피해자 중심주의가 공인되었다는 건 그만큼 조직이 성 평등한 조직문화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 피해자의 호소에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피해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구성된, 좀 더 민주적이고 더욱 혁명적인 공동체가 구성되었다는 뜻이다. 이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공동체는 즉각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조직적인 토론과 평가를 하게 될 것이고 조직보위론과 계급환원주의에 맞서 세심하게 피해자의 욕구를 확인하게 될 것이며 치유를 위한 구체적인 조처를 하게 될 것이다. 성폭력 사건 해결은 피해자와 공동체의 부단한 공동활동 공동투쟁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대화와 토론, 진단과 평가, 제기할 요구의 정식화, 공동실천을 통해 피해 생존자에서 활동가로 사회주의 운동으로 다시 복귀하게 될 것이다. 이 전체 과정이 피해자 중심주의의 “폐해”를 넘어 객관성을 획득하는 수단이자 반혁명 최후의 보루인 관료주의(조직보위론)와의 전면적인 투쟁이 될 것이다. 가보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부르주아 정치(가부장-관료주의)와 단절하기 위한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다.

     

    성폭력과 성희롱을 구분하는 노동자연대의 태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정치적 퇴행이자 조직의 명예를 사수하기 위해 나와 다른 견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인식론적 보수주의이다. 따라서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원 성폭력 사건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 자율권의 침해”)부터 시작해야 한다.

     

    3.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원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 동지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 한 성폭력이었다

     

    2011년 7월 16일 서울시립대 교지 동아리 대학문화가 다른 대학 교지 합동 MT를 간 자리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시립대 교지 동아리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와 다함께 회원이자 대학문화 편집위원인 정모는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섹스파트너, 원나이트, 성적 취향 등에 관해 일방적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서울시립대 교지 동아리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는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자위해본 적 있느냐?",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내가 여자가 자위하는 거 보여주겠다"라며 일본 여성이 자위하는 동영상을 틀었다. 피해자 동지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그 동영상을 보게 했다. 다함께 회원이자 대학문화 편집위원인 정모도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아오, 성포비아(성혐오 혹은 성적 보수주의-인용자). 너도 이런 것에 대해 좀 알아야 돼.”라며 동영상 보기를 종용했다. 대학문학 편집장 이모는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동영상을 보면서 “흥분된다.”는 등의 말을 했다. 또한,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는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임신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고 물었고 다함께 회원이었던 정모는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며 대답을 강요했다.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가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성교하는 시늉을 하며 “3, 2, 1 발사.”라는 농담을 하자 다함께 회원이었던 정모도 이모와 같이 박장대소를 하며 크게 웃었다.

     

    피해자 동지는 세 명밖에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자기 의사에 반한 성적 자율권을 침해받은” 성폭력을 당한 것이다. (피해 유형으로 본다면 성희롱이었다) 그러나 4년이 지나서 원 사건에 취하는 노동자연대의 태도는 다함께 회원이었던 피해자 동지가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 모욕감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다. 다만 노동자연대와는 “무관하다”는 것, 가해자가 “회원이 아니다”라는 궁색한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것밖에는 없다.

     

    “노동자연대와 전혀 무관한 한 대학교지 수련모임에서 노동자연대 회원이 아닌 한 남학생이 한 여학생에게 몇 십초 짜리 야한 동영상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 [단결된 운동 구축 방해하는 무책임한 행위 중단하라], 2015년2월13일)
     

    우선 가해자가 노동자연대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서울시립대 교지 동아리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는 다함께에 가입한 적이 있고 사건 당시에는 회원이 아니었으나 다함께와 공동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관한 자가 아니라 관련이 있었던 자였다. 피해자 동지는 “성폭력 가해자가 운동을 주도하고, 시립대 회원들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방임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했지만 다함께 회원들은 성폭력 사건을 덮어 놓고 “대학문화 편집장이 주도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만큼 대학문화 편집장 가해자 이모와의 “공동활동”은 다함께 학내 조직 사업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함께와 “공동활동”을 하고 있는 자에 대해 무관하다고 하는 건 정치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다함께는 피해자 동지의 문제제기에 따라 가해자 정모와의 “공동활동”에 대해 정치적 판단을 해야 했다.

     

    노동자연대의 원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태도는 “설사 여성의 의사에 반해 야동을 보여주거나 보라고 부추겼다고 해도 그것이 성희롱일 순 있지만, 성폭력은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성폭력 2차 가해 조직이 아니기 위해서는 원 사건이 성폭력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는 오직 부르주아 사법기관의 판결문에 의지해 “대학생 다함께 신입 정모(현재 회원 아님)가 강제로 동영상을 보여 준 공범이라는 피해호소인의 주장은 정모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결과 ‘허위 사실에 근거한 명예훼손’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정모의 행위는 그저 옆에서 방관한 행위라고 판결이 났다”는 근거를 노동자연대가 “성폭력 가해단체”가 아니라는 수단으로 삼고자 하지만 이것조차 하나의 썩은 동아줄이었다. 왜냐하면, 법원 판결문조차 가해자 정모의 “방조행위”를 “피고에게 성적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피고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행위”, 즉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성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피건대, 앞에서 인정한 사실을 종합하면, 적어도 동영상 사건 당시 원고의 행위는 편집장인 B가 피고에게 음란 동영상을 보게 하는 행위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이를 방조한 것으로 판단되고, 이로 인하여 피고로 하여금 성적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피고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행위라 할 것이므로 원고는 그로 인해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법원 판결문)

     

    그러나 노동자연대는 법원 판결문이 그 “방조 행위” 자체가 피해자 동지에게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위법행위”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피해자 동지의 “인격권을 침해”했다는 점은 인용하지 않는다. 이 의도된 인용은 은폐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연대엔 다함께 회원이었던 가해자 정모의 “방조” 행위가 “성적자율권을 침해 한” 성폭력이 아니라 “경미한 성희롱”이어야 했고 그렇게 보이도록 애써야 했다. 그래서 마치 “공범이냐, 방관이냐”가 핵심적인 쟁점인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의도된 노동자연대의 논점 흐리기였다. 진실은 이런 것이다.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원 사건은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대학문화 편집장이 강제로 포르노 동영상을 틀어 피해자 동지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것이고 이 행위 전후 과정에서 다함께 회원이었던 가해자 정모가 피해자 동지의 의사에 반해 음담패설과 성희롱적 발언을 통해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것이다.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나, 편집위원이자 다함께 회원이었던 정모 모두가 피해자 동지의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성폭력 가해자였던 것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노동자연대는 “무관하다”, “회원이 아니다.”, “성폭력이 아니라 성희롱이다”고 궁색한 자기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그 밀폐된 공간에서 피해자 동지가 느꼈을 “공포”와 “모욕감”을 이해하고 피해자 동지에 대한 “공감능력”을 회복하는 것, 바로 여기가 노동자연대가 자신의 명예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다.

     

    군대폭력이나 국가폭력은 그 현장을 벗어나면 그나마 한숨이라도 돌릴 수 있지만, 성폭력은 이와 달라서 피해의 현장이 몸이라 그 고통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며 가장 깊숙하게 고통이 고정됨으로써 자아경계가 심각하게 파괴된다. 특히나 신뢰했던 사람에게 폭력을 당함으로써 분노, 배신감, 공포, 불안, 우울, 모욕감 등으로 피해자는 일상생활 자체가 파괴된다. 따라서 피해자 동지가 자신의 피해를 말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만큼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고 피해자 동지가 지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7월 말~8월 초 : 피해자가 몇몇 다함께 회원들에게 피해호소를 하며 도움을 청했으나 대부분 무시로 일관함.//8월 말 : 피해자가 다함께 남부지역 협력간사 조&&에게 사건을 이야기함. 조&&은 자신은 성폭력 문제에 대해 잘 모르니 동부지구 협력간사 김**을 만나보라고 조언함. 피해자가 김**에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김**은 피해자가 가해자와 사이가 나빠져 학내 다함께 조직이 잘 되지 않을 것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가해자에게 개인적으로 말해보겠다고 하였으나 이후 연락을 해오지 않음.(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대책위원회,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사건, 1250여일의 기록] 중에서

     

    원 사건이 발생한 이후 피해자 동지는 “신상이 공개된다는 두려움”을 넘어 다함께 내부에서 수차례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나 피해자 동지에게 돌아온 것은 “무시”였으며 “가해자와 사이가 나빠져 학내 다함께 조직이 잘되지 않을 것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다함께는 회원인 피해자 동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 고통을 방치했다.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3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연대는 주섬주섬 2차 가해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자료들을 수집해서 공개하고 있다.

     

    당시 A(피해자 동지-인용자)의 연인인 조익0은 A의 피해 주장을 듣고 김은영을 소개시켜 줬고 “직접폭로하는 방법도 있다”며 공론화할 것을 권유함. 그러나 A가 “용기가 없다”며 이 권유를 실행에 옮기지 않음(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 제출한 A의 진술서) ... 나지현은 ‘동영상 사건’ 직후 회원 뒷풀이 자리에서 A의 피해 주장을 들었는데, 이때도 A는 이정0만 언급했지 정아무를 지목하지 않았음. 나지현은 이정0의 행위를 비판하며 S대 교지편집부에 가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라고 권유함. 그러나 A는 “다 자고 뒤풀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라 교지 편집부 회의에서까지 공식적으로 애기할 건 아니”라며 거절함. 김은영은 ‘동영상 사건’을 이유로 A에게 별도 만남을 요청받은 적이 없고, 신문 전달차 A를 만난 자리에서 ‘동영상 사건’ 애기를 들었으나 A는 야동을 보여 준 사람으로 이정0만 언급했다고 증언 함. A는 당시에 (회원이 아닌) 이정0의 행위에 대해 다함께가 무슨 조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한 바는 없음. 김은영은 이 사건에 대해 더 알아보려던 터에 나지현에게서 위와 같은 내용의 보고를 받고 A가 S대 교집편집부에 공식 호소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함(노동자연대, [노동자연대 중상모략 사건 일지] 중에서)

     

    노동자연대가 3년 만에 주섬주섬 찾아 낸 “성폭력 가해 단체” 아님의 증거가 겨우 피해자 동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냐? 다함께 회원이자 성폭력 가해자였던 정모를 거론하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이냐?

     

    노동자연대의 주장은 그러나 그들이 성폭력 사건을 진지하게 다뤄 본 경험이 없다는 걸, 피해자 동지를 어떻게 대해야 했던지를 지금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피해자 동지의 치유를 위한 조력들과 프로그램이 부재하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지금 노동자연대의 관심은 온통 조직의 명예뿐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정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피해를 호소하는 동지에게 가장 큰 지원은 그 경험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피해자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가해자와의 개인적 해결, 소속 공간에서의 집단적 해결, 피해자 치유 모임을 통한 해결, 그리고 법적 제도적 해결”이 있을 수 있다. 이 또한 완성된 답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찾아낸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피해자 동지에게 제안했다고 하는 “직접 폭로”의 방법도 그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피해자를 부당하게 추궁하고 특정 행동을 강요하는 행위”가 될 때 성폭력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피해자 동지의 진술에는 없는, 그래서 노동자연대가 공들여 발굴한 나00의 진술이 있다. 난 의심 많은 밤길을 걷는 것처럼 그의 진술에 접근한다. 발굴된 나00의 진술이 노동자연대의 완전한 거짓일 수 있으나 일단 나00이 피해자 동지 앞에서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의 가해 행위를 비판한 것은 매우 정당하고 필요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피해자 동지에게 필요한 “지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00이 “교지에 가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라는 제안이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피해자 동지의 자기 치유의 힘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 동지의 자기 치유의 힘으로 사건을 발화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한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 동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매우 세심하게 그 욕구를 확인해야 했다. “다 자고 뒤풀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닥쳐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읽었어야 했다. 피해자 동지에게 무엇이 필요했는가? 바로 자기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것, 사건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돕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 자기 치유의 힘으로 요구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 이것이 나00이 해야 할 일이었고 다함께의 조직계획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연대와 나00은 자기에게 필요한 문장만을 듣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나00의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라는 제안은 피해자 동지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책임을 피해자 동지에게 떠넘기고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들여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노동자연대가 발굴한 나00의 진술은 신뢰하기가 힘들다.

     

    노동자연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또한 정치조직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 동지를 지치게 하고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아예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아예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자들이 4년이 지나 의도적으로 구성된, 피해자 동지가 대학문화 편집장 “이정0만을 언급했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모든 책임을 피해자 동지에게 떠넘기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다. 가해자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가 당시 다함께의 회원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인가? 다함께 회원이었던 가해자 정모를 피해자 동지가 거론하지 않아서 한시름 놓았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피해자 동지가 다함께 회원이었다는 점이고 회원인 피해자 동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고통을 외면하고 방치했다는 것이다. 무지할 수 있고 감각이 둔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연대는 무지했다는 걸, 감각이 둔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변명하고 논리를 개발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피해자 동지에게 비수(경계선 인격장애자의 거짓말로 구성된 중상모략)를 꽂고 있다는 것, 조직된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자연대가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의 핵심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이 서술되는 과정은 사건이 재해석되는 과정이며 새로운 여성의 언어로 재구성된 서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적 자율권을 침해받은 한 인간이 성적 자율권을 가진 존엄한 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노동자연대는 피해자 동지가 대학문화 편집장만을 거론하고 다함께 회원이었던 정모를 거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모와 친밀한 문자를 주고받았다는 걸 증거자료로 제출(피해자 동지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하고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 노동자연대는!)하고 있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의 하루하루 생존이 협상과 외교의 장이란 걸 고려한다면 정모의 행위가 “성적 자율권을 침해 한” 성폭력으로 인지했더라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다함께 회원이었던 피해자 동지는 수차례에 걸쳐 다함께 내부에서 자신 피해를 호소했다. 사건 발생 이후 1년간의 전체 맥락을 검토해보면 다함께 회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방치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피해자 동지는 비록 공론화할 용기가 없었지만, 그래서 공식적으로 이야기할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피해자 동지는 자기가 당한 성적 자율권의 침해, 그 고통을 잊지 못했고 끊임없이 피해를 호소했다. 다함께 회원들의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의 “직접 폭로 제안”이 노동자연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근거는 될 수 없다. 피해자 동지의 호소에 다함께 회원들은 인지하고서도 무시로 일관했고 오직 조직 걱정만 했던 것이 공론화까지의 전체적인 맥락이었다. 사실상의 방치와 무시, 해결되지 않은 성폭력은 언제나 현재적 사건이다. 사건에 대한 재해석과 새롭게 서사가 구성되도록 한 것은 피해자 동지의 책임이 아니라 다함께의 정치적 태도였던 것이다.

     

    다함께 회원들의 방치와 무시 속에 피해자 동지는 지쳤고 2012년 1학기 휴학을 했다.


    4. 노동자연대의 2차 가해(조직된 폭력)

     

    피해자 2학기 복학. 복학 뒤 학내 청소노동자 투쟁에 가해자 A가 주도적으로 연대하고 소속 단체인 다함께가 그 활동에 함께 하고 있는 것, A가 여성주의 강사를 초빙하여 강연회 개최 등을 하고 있는 것 등을 보고 문제의식을 크게 느낌. //11월 4일 : 피해자가 당시 다함께 학생조직 담당자인 조&&에게 A의 활동에 대해 문제제기하며 학생팀 안건으로 상정해 달라고 요구하자 조&&은 “볼셰비키도 케렌스키를 방어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면 성폭력범과도 같이 운동해야 한다”며 묵살함. 이후 조&&은 피해자와 연락을 두절함.//B에 대해서도 A에 비해 부차적이긴 했으나 엠티 사건에서는 분명한 동조자였다고 당시 조&&에게 말했으며, 원래는 다함께 보다 교지편집장의 반성을 주요 요구로 내세웠으나 “폭로 글에 대해 진상조차 규명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명예훼손과 비방으로 주장하는 몇몇 다함께 회원들의 태도와 B씨의 태도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고, 저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교지편집장 A씨뿐만 아니라, 다함께에 대해서도 다시금 책임을 묻는바”라고 심경을 밝힘(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대책위원회,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1250여일의 기록)

     

    운동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일방적인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은폐 부인 등이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가해자로 확인된 이후에도 크게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던 대학문화 편집장 이모는 아무런 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성폭력 가해자가 여성주의 강사를 초빙해 강연회를 개최하고 학내 청소노동자 투쟁에도 주도적으로 연대하고 있었다. 피해자 동지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피해자 동지는 다함께 회원들에게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했으나 “오히려 가해자들을 두둔하며 피해 호소를 외면”당하고 “볼셰비키도 케렌스키를 방어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면 성폭력범과도 같이 운동해야 한다”며 무시 당했다. 이러한 다함께 회원들의 정치적 태도가 피해자 동지에게 원 사건을 재해석하도록 강제했으며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새롭게 구성된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서사였던 것이다.

     

    피해자 동지는 2012년 11월 16일 ‘자기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시립대광장 카페에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한다. 그러나 다함께 학생조직자와 간부들, 그리고 회원들은 피해자 동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진술을 무조건 “거짓”으로 규정하며 악성 댓글로 집단린치 한다.

     

    “‘노동자연대다함께’와 ‘노동자연대학생그룹’에 대한 님의 폭로글은 저희를 근거 없이 음해하는 행동이고 ..헌신적으로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에 대해 먹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 //“노동자연대학생그룹이 “성폭력을 방임”했다는 전회원 0씨의 주장은 사실관계 왜곡이자 명예훼손이다”//“연애결별의 앙갚음 ...만약 그가 저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저까지 끌어들인 것이라면 매우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는 여러 차례 자살 애기를 꺼내고 실제 시도도 한 적이 있습니다”//“우리 단체의 명예를 훼손한 데에는 응당 책임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그동안 당신이 허구헌 날 자살한다 자살한다 하면서 얼마나 사람들 걱정하게 만들었는지 압니까? 피폐해질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두고 봅시다”(노동자연대, [초기 SNS상의 진상공방은 성폭력 2차 가해가 아니다], {노동자연대 중상모략 사건자료} 중에서)

     

    피해자 동지의 고통스러운 진술을 “거짓”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가해자들의 정치적 전략이었다. 과거의 사건을 당시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 두렵고 용기가 없어 공론화 제안을 거부했다는 이유를 들어 피해자 동지의 진술을 “거짓”으로 몰아가기 이전에 다함께가 해야 할 일들은 피해자 동지를 직접 만나는 것, 피해자 동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건이 재해석된 이유와 근거들을 확인하고 세심하게 그녀의 요구를 확인하는 것, 이를 위한 조직적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라 모든 인권 문제를 다루면서 취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런데 반복적으로 피해를 호소했으나 무시했던 다함께 학생 간부들과 회원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던 것이 아니라 무조건 “거짓”으로 규정하고, 그녀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면서 “정치적 음해”, “연애결별의 앙갚음”, “활동가들을 먹칠하는 것”, “사실관계 왜곡이자 명예훼손”을 하는 자로 낙인찍고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학생조직자는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다니 두고 봅시다.”라며 협박까지 했다.

     

    다함께 학생 간부들과 회원들의 이러한 전략적 행위들은 다함께 운영위원회가 정당하게 평가하듯이 “A(피해자 동지-인용자)가 아무리 온라인에서 우리 단체를 부당하게 공격했을지라도 개인의 연애사나 우울증 등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불특정다수가 보는 온라인에 폭로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이었고 이는 “피해자를 부당하게 추궁하고 고의적으로 사건 해결을 지연시키거나 은폐, 축소해 피해자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는 행동”, 즉 조직적 폭력(2차 가해)이었다.


    다함께 운영위원회는 운영위원이 포함된 학생 간부들과 회원들의 악성 댓글 집단린치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이라고 정당하게 평가하고 “회원들에게 온라인 대응 중단을 지시”했다. 이는 분별 있고 상식 있는 지도부라면 당연하게 해야 할 조치였다. 나아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이 발생하게 된 조직적 문화를 성찰하면서 피해자 동지를 직접 만나 사과의 뜻을 전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녀의 욕구를 세심하게 확인해야 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필요한 조직적 조치와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다함께 운영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었다.

     

    다함께 운영위원회의 악성댓글에 대한 평가와 조치는 피해자 동지와 그 지지모임과의 대화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함께 운영위원회는 악성 댓글에 대한 평가와 조치, 이후 가해자 정모에 대한 징계 조치를 피해자 동지에게 전달한 바 없다. 이렇게 “대책위를 구성하고 사건 해결을 위한 절차를 제안하는” 피해자 지지모임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사건을 해결할 의사가 없다는 걸 뚜렷하게 했다. “저희 단체와 관계없는 일”이라며 일축했던 노동자연대가 3년이 지나서 그 당시 “온라인 대응 중단을 지시했고 가해자 정모를 징계했다”고 뒤늦게 말하는 건 구차한 자기변명, 꼬리 자르기이다.

     

    이처럼 다함께 운영위원회는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조직보위론으로 서둘러 빠져들었다. 피해자 동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조직이 당하는 피해 정도만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것이다.

     

    "A가 아무리 온라인에서 우리 단체를 부당하게 공격했을지라도 개인의 연애사나 우울증 등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불특정다수가 보는 온라인에 폭로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행동은 종파주의자들이 우리 단체와 B를 공격하기 좋은 빌미를 줬고 우리 단체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 동지의 실수가 사태를 훨씬 악화시켜, B와 우리 단체에게 큰 어려움을 가중시켰는데 말이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그리고”에 연결되는 내용이 “종파주의자들이 우리 단체를 공격하기 위한 빌미를 줬고 우리 단체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이 발생하게 된 다함께 내부의 조직문화에 대한 성찰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조직적 성찰과는 반대로 노동자연대는 변명을 위한 논리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조직적 결정이 아니었다.”, “진상 공방에 필요한 합리적 의심”이라는 것이다. 난 이토록 기형적인 변명은 처음 본다. 어쩌면 이토록 변명이 허접하단 말인가? 도대체 어느 정치조직에서 조직적 결정으로 성폭력을 지시한단 말인가?

     

    정치조직이란 강령(정치원칙)으로 통일되어 있고 선전․선동․조직화로 요약되는 공동의 정치활동을 세우고 실제적인 분업관계를 형성할 때 구성된다. 따라서 정치조직의 개인은 결코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며 공동의 정치활동 속에서의 동지적인 분업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조직에서의 개인은 조직을 대표해서 활동해야 한다는 생생한 자각과 자부심이 있어야 하며 조직은 “공동활동” 속에서 발생한 개인의 행위를 언제나 조직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정치조직의 자세이고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면 정치조직이라 할 수 없다. “조직적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직원들이 행한 조직된 폭력(성폭력 2차 가해)은 노동자연대와 무관하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건 스스로가 “정치조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연대는 정치조직 ‘답게’ 스스로 명예를 회복하라!

     

    노동자연대의 종파적인 우려와는 무관하게 난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원 사건이 당시 다함께의 2차 가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회원이 연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다함께의 조직적 결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함께 운영위원회는, 그리고 분별 있고 상식 있는 다른 정치조직의 지도부라면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즉시 조직적 토론과 정치적 평가를 진행하고 오류를 통해 배우며 이를 통해 조직문화 전체를 쇄신하기 위한 책임 있고 구체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연대는 다함께 학생 간부들과 회원들의 조직적 폭력에 대해 “저희 단체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오만하게 팔짱 끼고 있다가 정치활동의 “장애”가 발생하자 다급하게 “조직적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2차 가해가 아니다”라며 구차한 변명으로 자신을 둘러치고 있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오류를 합리화하고 “진상공방에 필요한 합리적 의심”이라는 논리를 개발하고 있다. 나아가 다함께 학생 간부와 회원들의 “분별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전면화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행위가 피해자 동지에 대한 조직적 폭력(“피해자를 부당하게 추궁하고 고의적으로 사건 해결을 지연시키거나 은폐, 축소해 피해자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5. 법정소송 - 노동자연대가 “지도”한 조직적 폭력

    - 정치적 독립성의 결여, 노동자연대 부르주아 사법기관에 사건의 진실을 의탁하다

     

     

    “민사 재판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제출한 증거의 대부분은 법정의 주된 내용과는 상관없는, 피해자 동지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가는 일이었다. 민사소송 초기의 조정과정에서 그들은 피해자 지지모임 페이지 폐쇄와 앞으로 이 사건에 관해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으면 소를 취하하겠다고 했다. 이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재판 자체가 본 사건과는 사실상 하등에 관계없었고 진실폭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재판이었다(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대책위원회,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을 말하다] 중에서)
     
    “피해자가 감당하기 힘든 벌금으로 그녀 개인에게 압박을 가해 공론화를 위축시키려는 의도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조직이 저지른 성폭력 가해행위를 개인 간의 법리 분쟁으로 축소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당연히 노동자연대는 그 수혜를 톡톡히 챙겨 왔으며 그 단체의 회원들은 최근까지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면피해왔다”(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대책위원회,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관련 민사소송 판결에 대한 대책위의 입장] 중에서)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정모와 그 대리인이 제기한 민사소송의 본질은 “진실 폭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것”, “공론화를 위축시키고 조직이 저지른 성폭력 가해행위를 개인 간의 법리 분쟁으로 축소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민사소송 전체 과정은 법정의 주된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피해자 동지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가는 일”, 피해자 동지의 고통스러운 심장을 또 다시 난도질하는 조직된 폭력(2차 가해 행위)이었다.

     

    노동자연대는 ‘조직적 결정’이 아니라고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스스로를 둘러치고 있지만, 공론화 직후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학생조직자는 가해자 정모에게 “"법정대응을 권하였고”, 비용부담을 묻자 “모금을 해야죠”라며 다함께에서 지원해줄 것처럼 말했다.

     

    “더 안좋은 것은, 이후 우리의 대응이 조직 전체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B 개인을 통한 대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는 B, 이**(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와 만난 자리에서 B에게 법적대응을 권하며 변호사 선임을 하라고 권하였고, 이**와 B가 변호사 수임에 따른 비용부담을 누가 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모금을 하든지 해야죠“라며 마치 단체에서 일정부분이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지원해줄 것처럼 대답했다. 이 말을 믿고 이**는 B가 학생임을 감안하여 수임료 500만원을 개인 대출까지 해가며 감당했으나 이후 단체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전술했다시피 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므로, 이후 몇차례 @@@ 동지에게 모금계획이 있는지 등을 물어봤으나 나중에 확인해주겠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최**, [“페미니즘에 대한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 - 성폭력 추문을 돌아보며”에 더하여] 중에서)

     

    여기서 @@@은 다함께 운영위원이자 학생조직 담당자였다. 다함께 회원 가해자 정모는 학생 신분이었고 조직계통상 @@@은 가해자 정모를 지도하는 위치, 정모는 그의 말을 조직적 결정(영향력)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었다. 그렇게 가해자 정모는 법정소송에 돌입했다. (물론 노동자연대가 다함께 회원이었던 가해자 정모가 다함께의 권유 이전부터 법정 소송 운운했다는 증거자료를 제출하고 있지만, 이것은 피해자 동지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실제 집행은 다함께의 권유와 조력 없이는 학생 신분의 가해자 정모가 감당하기 힘든 문제였다) 노동자연대는 “다함께 운영위원회의 ‘종용’이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법정소송의 최대 수혜자”는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이다. [노동자연대 중상모략 사건 일지], [“다함께 성폭력 사건”은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되 사건], 그리고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의 성명서 등은 “법원의 판결문”에 의탁해 “성폭력 2차 가해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이 어디까지 망가지려 하는가? 운동 사회 내부에서 비판과 토론, 내부투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이제는 개나 소나 부르주아 법정으로 끌고 간다. 자신의 명예를 부르주아 사법기관에 의탁하고 있는 노동자연대의 행위는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독립성을 스스로가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입만 열면 “명예훼손”을 남발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정치조직으로서의 노동자연대가 당한 강도 높은 명예훼손은 “정치적 독립성의 셀프 훼손”, 바로 이것이다. 정치적 독립성의 셀프 훼손은 잊힐 수 없는 평가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다함께 운영위원회는 정말 비겁했다. 정치조직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발생한 사건에 대한 정치적 평가 및 해결의 수단과 방법을 정식화하지 않고, 오히려 법정소송 뒤에 숨어 “진실이 밝혀지기를 조용히 기다렸” 던 것이다.

     

    “다함께 중앙은 처음에는 소송에 반대했지만 결국 진술이 완전히 엇갈리는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겠다고 소송에 나선 정아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하루 아침에 ‘성폭력범’이 된 한 남성이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소송에 뛰어든 것으로, 이후 우리는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지길 조용히 기다렸다”(노동자연대, [“다함께 성폭력 사건”은 불순한 의도로 재구성된 사건] 중에서)

     

    “결국, 진술이 완전히 엇갈리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존중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태도의 문제는 정치조직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즉시 태도를 취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다른 무엇보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피해자 동지를 직접 만나고 그녀의 진술을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다함께 운영위원회는 피해자 동지를 만날 생각이 아예 없었다. 또한, 회원인 가해자 정모를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겠다고 소송에 나선” 회원 정모의 “지도”를 받아들이며 그를 노동자연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것도 아주 조용히(“우리는 재판에서 진실이 밝혀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는 다함께 한 운영위원의 법정소송 권유와 모금 등의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이 다함께 운영위원회의 공인된 결정은 아니었지만, 가해자 정모 뒤에 숨어 조용히 기다림으로써 “승인” 이외의 다른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물론 정치조직이 조직비용으로 성폭력 가해자의 법정소송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실상 정치조직 간판을 내려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모금”은 하지 않았고 법정 비용을 지급하지도 않았지만, 법정소송의 정치적 수혜는 노동자연대가 다 가져갔다.

     

    노동자연대는 “그의 당당한 대처에 힘입어 우리 단체도 부당한 비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다함께 회원이었던 가해자 정모의 법정소송을 실제로 “지도”했다.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담당자인 최00의 글은 “조용한 행위” 뒤의 “밀착 지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고 그 정치적 본질을 밝히는 데 손색이 없다.

     

    “만약 성폭력이나 성추행 사건이었다면 나는 그동안 우리 단체가 그랬듯이 신속히 조사하고 사실이 밝혀지는 즉시 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이 그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봤다. 따라서 조직적으로 나서서 처리해야 할 사안도 아니라고 봤다. 당사자가 소송이나 진실 규명 작업으로 해결할 문제였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B가 진정 억울함을 풀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면 본인이 적극 명예훼손 소송에 임하고 일부 단체나 운동 내 개인의 성폭력 혐의 씌우기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면서 진실 규명 작업을 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대리인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지 말고 본인이 스스로 사태 해결에 나서라고 한 나의 촉구와 비판은 분명히 B에게 유쾌하지만은 않은 쓴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지적 쓴소리였다. ... 나는 ... 사회주의자로서 B가 이 문제에 당당하게 잘 대처하면서 스스로 많이 배우고 떳떳한 진보 운동의 성원으로 거듭 나기를 바랐다. 또 그의 당당한 대처에 힘입어 우리 단체도 부당한 비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랐다 ... 내가 B에게 행위 주체로서 분명히 의식하며 행동하라고 논쟁한 또 다른 이유는 B가 여러 차례 스스로 소송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비쳤기 때문이다. 나는 B가 정말 본인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변호할 마지막 수단인 소송을 포기하는 것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송 포기는 곧 자신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민사재판 변호인 선임, 그 비용마련, 증거 수집, 증언 확보, 정당성 주장, A지지모임의 온,오프라인 상의 음해에 대한 대처, 심지어 우리 단체에 하는 보고조차 B가 직접 하는 게 없었다 ... 이 사건 대응과 관련한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도 B는 몇 시간 씩 늦기 일쑤였고 밤새 술 마시다가 다음날 오후까지 한참 동안 통화가 되지 않아 내 속이 타들어가는 일도 몇 차례 있었다 ... 이미 최근에는 재판상황도 B가 아니라 대리인인 이**씨가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최00,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 중에서)

     

    노동자연대는 “부당한 비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흔들리는 가해자 정모에게 “자신을 변호할 마지막 수단인 소송을 포기하는 것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B가 진정 억울함을 풀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면 본인이 적극 명예훼손 소송에 임하라”고 지도했다. 가해자 정모와 그 대리인에게 “재판상황에 대해 보고”받고 “대응 관련한 중요한 약속”을 잡으며 “민사재판 변호인 선임, 그 비용마련, 증거 수집, 증언 확보, 정당성 주장, A 지지모임의 온, 오프라인 상의 음해에 대한 대처” 등을 밀착지도 했다. 이 지도는 정말 애간장이 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가해자 정모가 너무 무규율했고 그가 법정소송을 포기한다면 종파주의자들의 “부당한 비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정치적 수단을 잃기 때문이었다. 노동자연대는 가해자 정모가 흔들리는 시기 “결정적인 지도”를 수행함으로써 다행히 가해자 정모는 민사소송을 포기하지 않았고 정말 다행히 노동자연대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르주아 사법기관의 판결문을 쟁취할 수 있었다. 부라보!

     

    노동자연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르주아 사법기관의 판결문을 인용해 자신들의 공식적인 문서들을 도배하고 있다. 정치조직으로서의 독립성을 스스로 훼손(명예를 진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라면 너무나 치명적인) 하면서까지 노동자연대가 나서서 “지도”한 가해자 정모의 법정소송은 정말 비겁한 정치적 꼼수이자 피해자 동지에게 가해진 잔인한 폭력이었다.

     

    6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가 전면에 나선 공세적인 2차 가해

     

    한라중공업 사내하청지회부터 현대차 불법파견철폐투쟁까지,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은 대공장 조합주의 질서를 재편하고 계급 전체의 단결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정규직 전투파 현장조직들을 무장해제 시켜왔다. 이 전체 과정은 격렬한 계급투쟁을 동반했다. 대공장 전투파 현장조직들도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계급적이지도 전투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증명해왔고 그들의 정치는 고작해야 전투적 조합주의 이상이 되지 못했다. 무장해제 된 전투파들은 개인으로 돌아가거나 대공장 집행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선거브로커”로 자신의 옷을 빠르게 갈아입었다.

     

    마찬가지로 현 시기 운동사회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취하느냐는 그 조직이 얼마나 민주적이고 혁명적인지를 밝혀주는 척도다. 도대체 성폭력 피해자 동지의 호소를 외면하고 그 절규를 짓밟고 구성된 정치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정치적 전망을 보여줄 수 있는가? 오히려 현실은 피해자 동지의 절규를 짓밟고 세워진 정치적 신념, 즉 조직보위론은 완전하게 드러난 관료주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연대는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대책위원회가 한상균 선본에게 노동자연대를 배제하라는 공문을 보내자 이를 정치활동의 “장애”로 판단하고 공세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동자연대의 공세적인 대응은 다함께 학생 간부들과 회원들이 자행했던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을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가 전면에 나서 공식화하고 반복하고 확대재생산 하는 일이었고 조직의 정치적 독립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부르주아 사법기관에 의탁해 받아 낸 판결문으로 자신을 정치적으로 변호하는 일이었다.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가 전면에 나선 공세적 대응이 더욱 잔인한 이유는 피해자 동지를 “경계선 인격 장애자”로 낙인찍고 그녀의 진술을 “거짓말”로 몰아가기 위해 피해자 동지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공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의 담당자인 최00은 한 때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 동지의 글을 읽고>란 글에서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했고 또 <노동자연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가당착과 자기기만의 늪에 빠진 전지윤씨>란 글에서 “진상도 불분명하고 여전히 분쟁위원회에 계류 중인 사건을, 그것도 개인이 프라이버시가 포함된 성 관련 사건을 섣불리 공개 보고하는 조직은 없을 것”이라고 분별 있는 태도를 취했지만, 노동자연대 정치활동의 “장애”가 발생하자마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포함된 성 관련 사건”을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가 전면에 나서서, 노동자연대의 이름으로, 피해자 동지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공개하고 있고 이를 자신의 명예를 사수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엔 분별 있는 이성적인 사유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조직 보위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마다치 않겠다는 종교적 신념만이 도드라지게 보일 뿐이다.

     

    ““자살시도”, “우울증”, “연애 결별의 앙갚음” 언급이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 들춰내기’나 ‘인식공격’이라는 주장도 진실규명을 회피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 사실들은 사건과 무관하기는커녕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핵심적 실마리이기 때문이다”(이현주, [공허한 수사로 정치적 파산을 은폐할 수 없다] 중에서)

     

    이00는 피해자 동지가 “경계선 인격 장애”라는 말이 피해자 지지 모임에서 나왔다고 마치 사실처럼 넌지시 인용한다. 그리고 곧바로 표적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정신과 의사인 스콧 펙의 글까지 인용하면서 피해자 동지를 경계선 인격 장애자로 낙인찍고 경계선 인격 장애자로서의 피해자 동지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들이 노동자연대에는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핵심적인 실마리”로 사용되고 있다. 즉 자신의 명예를 사수하기 위한 핵심적인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한마디로 정치적 자폭행위이다. 다함께 운영위원회가 그나마 분별력이 있을 때 다함께 학생 간부들과 회원들이 자행했던 행위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노동자연대에 돌려준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을 즉각 중단하라

     

    노동자연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회원들의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들은 점점 종교적 색채를 띠어 가고 있다. 그 절정은 <맑시즘 2015> 행사 때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보여준 반대 피케팅이었다.

     

    "피켓을 갖고 강연장에서 꽤 거리가 있는 학생회관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짐작가능한 이유로 여성으로만 구성된 40여 명 가량의 노동자 연대(=구 다함께) 회원들이 길을 막으며 강연 “방해”를 중단하라고 소리 질러댔다. 내가 상대적으로 어리숙해보여서인지 유난히도 대여섯 명의 사람들은 나를 에워싸고 따라다니며 고함을 쳤다. 그 중 한 명은 내게 “너 내가 이 단체에서 수십 년간 활동한 사실을 아느냐.” 삿대질하며 물었다. 노동자 연대(= 구 다함께)의 여성 회원들은 성폭력 사건 해결을 원하는 남성 동지들 앞을 일부러 막아서거나 몸을 들이밀며 “폭행하지 말라”라고 했다. 너무 소리 질러서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한 마디 건넸을 땐 “남성이 여성에게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해도 되느냐.”라고 기다렸다는 듯 다그쳤다. 나는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은 내게 이렇게 윽박질렀다. “00 동지, 대체 앞으로 정치 활동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피해자 지지모임하시다가 좀 쉬더니 이제 대책위 활동 열심히 하시나 봅니다?”
    사실 난 너무 무서웠다. 온 몸이 떨리는데 꼭 추위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나이나 활동 경력으로 입을 막아버리려는 위압적인 태도, 가해는 남성 피해는 여성이라는 딱할 정도로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사고관, 날 모르는 너의 사생활은 내가 다 알고 있으니 밤길 조심하라는 말투. 귀청이 터질만한 목소리로 퍼붓는 협박들은 정말 그들이 원했던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폭력을 용인하며 성폭력 당해도 괜찮은 사람들이냐?”고 소리 높여 묻는다. 성폭력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같은 맥락에서, 그들이 성폭력 해결을 이제껏 회피한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폭력 해결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라고 우기면서 곧바로 “2차 가해가 말이 되냐, 원가해가 없었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이성적으로 대화하자는 하소연도 어려웠다”(00님 페북 담벼락에서 인용, [맑시즘 2015, 반성폭력 운동과 분리주의 페미니즘 강연에 대한 입장과 피켓팅 경과보고] 중에서)

     

    노동자연대는 바로 그 자리에 피해자 동지가 있었다는 건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라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조직보위만이 중요했다. 피해자 동지와 그 지지자들의 항의를 다수의 위력을 통해 원천봉쇄하고 고착했다. “이성적으로 대화하자는 하소연도 어려운” 노동자연대 회원들의 비명과 아우성은 운동사회 내부의 오래된 전통인 공개적인 비판과 토론문화 자체를 봉쇄하는 관료적 조치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는 종교화된 정치적 신념이다. 이러한 종교화된 정치적 신념은 또 다시 피해자 동지에게 가혹한 고통을 더하는 “조직된 폭력”이다.

     

    7. 노동자연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연민조차 없는 분별없는 행동”을 중단하라
       피해자 동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

     

     

    이것이 나의 최소한의 요구이다. 피해자 동지에게 사과하는 것을 전제로 난 형성된 쟁점에 대해서 얼마든지 공개적인 논쟁에 참가할 수 있다. 더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피해자 동지에 대한 사과’야말로 우리를 이성적인 대화를 가능하도록 안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노동자연대의 공식적인 문서들을 숙독하면서 분노했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정치라는 걸, 성 평등한 조직이 민주적인 조직이고 성 평등한 조직이 혁명적인 조직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노동자연대는 피해자 동지의 호소를 사려 깊게 들을 수 있는 정치적 귀를 열어야 한다. 바로 여기가 노동자연대의 명예가 회복되는 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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