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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 게바라: 신화와 실재
  • 조회 수: 3221, 2016-12-22 13:05:43(2016-12-18)
  • 체 게바라: 신화와 실재



    몇 달 전, 우리는 E.K라고 하는 동지로부터 체 게바라에 관한 두 편의 글을 받았다. 여기에 우리는 4월 그에게 보낸 편지를 싣고 이 기회에 그가 제기한 문제에 보다 완전하고 정교하게 우리의 견해를 밝히려 한다. 우리가 이러한 소통의 서신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E.K 동지가 말했듯이 “40주년을 맞는 체의 투쟁 속의 죽음을 기리고 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기념에 같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 게바라가 진정한 혁명가였는지 그리고 노동계급과 젊은 세대가 그의 유산을 주장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이해하려고 한다.

    E.K 동지에 따르면 체 게바라는 억압받는 민중의 대의를 위해 싸운 믿음직한 투사였다. 사실 그 동지에게 “체의 국제주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국제투사와 민중연대의 전형이다”. 그는 소련을 당당하게 비판한 몇 안 되는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

    “ 아프리카- 아시아 연대를 위한 두 번째 대회에서 체는 소련의 보수적이고 착취적인 입장에 대해 비판하는데 사방으로 두루 찾아나서지를 않았다. 마지막으로 E.K는 첫 번 서신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가 역할에 대한 자신의 통찰력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사회변혁의 역사적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노동자로만 환원시켜, 인류의 조건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 지식인의 임무는 뛰어난 정치적 수단으로 상황에 대한 의식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답신을 전하자 E.K 동지는 재빨리 두 번째 서신을 보내면서 티셔츠와 벽보에 끊임없이 체의 형상을 재생산하는 체의 우상론자들과 자신을 구별하기를 바랬다. “체의 이미지를 복제함으로써 그를 신비화하는 것은 그의 삶과 행위를 신성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다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 체는 특별한 목적을 따랐기 때문에 소련의 사회제국주의적 모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CIA와 KGB까지도 볼리비아의 혁명시기 동안 그를 제거하기위해 협력했다. E.K 동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 어네스토 체 게바라는 일생동안 그의 온전함을 바쳤다.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길은 그의 책을 읽는 것이다. 그를 영원히 기억하는 것은 그의 투쟁을 계속하고 그의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 40주기에 대한 기념이 끝나면서 그의 사상을 다시 고무시키고 그의 생각을 다시 살릴 때다.”


    E.K 동지에 대한 우리의 답변


    4월초 보낸 동지의 서신에 감사한다. 늦게 답변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라고 우리는 동지가 우리에게 보낸 내용에 대해 비판하려고 한다. 이 비판으로 우리의 소통이 끝이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계속해서 동지의 문제제기와 우리의 견해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동지가 “그의 가치” “그의 생각” “그의 투쟁”을 요구한 것처럼 진정으로 “그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심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검토함으로서 우리는 동지가 체 게바라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체 게바라는 오늘날 젊은 혁명가의 본보기인가?


    2007년 10월 우리는 CIA가 기획하고 볼리비아 군대가 살해한 체게바라 죽음 40주기를 기념하고 있다.

    1967년 이래 “체”는 “낭만적 혁명청년”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손에 총을 들고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대중의 위대한 방어자”로 죽었다. 모두는 체와 붉은 별의 베레모를 쓰고, 슬프고 멀리 바라 보는듯한 그의 얼굴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여행일기는 아르헨티나의 방랑자 가정에서 태어나 남미의 길을 따라 모터싸이클로 모험여행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기술을 베푸는 이 방랑자의 이야기를 대중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그는 잠시 (1956)과테말라에 살았는데 그 당시 미국은 그들의 맘에 들지 않은 정부에 대해 또 다른 쿠데타를 꾸미던 때였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영구적인 질식화는 게바라가 일생동안 미국을 증오하게 만든다. 그 후 그는 멕시코에서 쿠바의 카스트로 그룹에 가입하고 오랫동안 미국이 지원한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를 전복시키는 시도가 실패한 후 그곳에 망명한다. 여러 번 모험을 한 후 이 그룹은 1959년 1월 바티스타가 패배할 때까지 쿠바 산악지대에 정착한다. 이 그룹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이며 그들이 내건 “맑스주의”는 게바라를 포함한 인자들이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악화되는 반(反)양키 “저항”의 편리한 덮개에 불과하다. 그 당시 바티스타를 지원한 쿠바 공산당은 카스트로의 승리 몇 달 전인 1958년에 당 지도부의 한 사람인 라파엘 로드리게르를 카스트로에게 보냈다.

    이 게릴라 그룹은 결코 농민봉기의 표현이 아니었고 노동계급의 봉기의 표현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다른 분파를 전복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군사적 표현이었다. 카스트로의 게릴라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어떤 “민중봉기”도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주 그런 것처럼 그들은 도착했고 한 군벌이 다른 군벌을 대체했다. 반란자들에게 협력했건 아니건 간에 피착취 계층과 빈민은 권력을 쥔 새로운 주인에게 환호하는 것을 빼놓고는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바티스타 군대의 약한 저항에 대항하여 게바라는 그의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피델 카스트로를 무색하게 할 만큼 용맹스런 게릴라처럼 보였다. 바티스타에게 승리한 후 카스트로는 체를 “혁명법정”의 책임자로 임명했는데, 그 법정은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부르주아지 분파 사이의 접수를 안정화시키는 최선의 전통을 지키는 유혈적인 가면무도회였다. 체 게바라는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심각하게 수행하여 바티스타의 고문자들이 재판 받을 뿐 아니라 매일 간단한 탄핵으로 그 가족을 심판하는 “민중적” 정의를 실현한다. 그 후 UN에서 자신의 방법을 공격한 마음씨 고운 “민주주의자들”인 라틴아메리카의 대표들에게 답하면서, 체는 “우리는 총살했고 아직도 총살시키고 있으며 필요한 한 계속해서 총살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실행은 혁명적 정의를 꼴사납게 방어하는 것과도 관련이 없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자 그것은 무력에 의해 다른 분파에 대해 우위를 차지한 부르주아지 분파의 전형적인 방법일 뿐이다.

    몇 년 후 볼리비아의 산악에서 죽은 “게릴라 지도자”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엄격한 “영웅” 우상화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름뿐인 공산주의 정권으로 권력을 차지한 더러운 일을 했을 뿐이다.

     

    체 게바라 : 국제주의자인가?


    동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체의 국제주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아프리카-아시아 연대를 위한 두 번째 대회에서 체는 소련의 보수적이고 착취적인 입장에 대해 바판하는데 사방을 두루 찾아 나서지를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는 소련의 사회제국주의적 모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카스트로 민족주의 정권은 재빨리 자격을 갖춘 “공산주의”로 치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카스트로 정권은 소련이 이끄는 제국주의 진영으로 나아갔다. 미국 해안에 인접한 쿠바는 서구 블록의 지도자를 분명하게 걱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주요 군사요원과 민간인이 있고, 동구 블록 국가의 비밀활동이 있는 섬 쿠바의 스탈린주의화는 1962년 미사일 위기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장관(1960-1961)인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새로운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국가를 방문하는데 여기서 그는 아낌없이 소련을 찬양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사상의 자유가 지배하는 곳”, “자유의 모국”이라고.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열정에 차있고 모든 사람이 근무시간을 넘어 일하는” “특별한” 북한과 마오의 중국을 찬양하고 이어서 동구의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성취가 특별하다. 그들의 삶의 체제, 발전의 체제와 자본주의 국가의 삶과 발전 체제를 비교할 수가 없다”라고 추켜세웠다. 소련에 대한 그의 사랑이 부족한 문제는 다시 다루겠다. 동지가 확인한 바와 같이 체는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해 조금도 원칙적인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에게 소련과 그 블록은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진영이었고, 그의 투쟁은 서구 블록에 대항하는 러시아 블록에 잘 맞춰져 있었다. “하나, 둘, 여러 개의 베트남을 만들자”는 그의 표어는 “국제주의적” 표어가 아니라 러시아 블록에 우호적인 민족주의적 표어일 뿐이다! 그의 실제 기준은 진정한 사회변동이 아니라 다른 블록의 지도자인 미국에 대한 증오였다.


    기본적으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소련이 주도하는 블록 사이의 적대로 분화되었다. “민족해방”은 인구의 군사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완전한 이념적 신비화 일이 드러났다. 노동계급이나 다른 피착취 계급 어느 것도 이러한 전쟁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었다. 각기 다른 부르주아 분파와 그들의 제국주의적 지원자들이 단순히 그들을 이용했다. 얄타협정 이후 두 블록으로의 세계분할은 한 블록에서의 탈피가 반대되는 블록의 가입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쿠바는 이러한 완벽한 본보기이다. 워싱턴의 비밀활동과 각종 마피아가 통제하는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로부터 스탈린주의 블록으로 넘어간 것이다. 쿠바의 역사는 지난 반세기의 “민족해방투쟁”의 비극적 축약도이다.

    언제 어떻게 게바라가 소련과 거리를 두었는가를 말하기 전에, 소련과 그 블록의 본질에 대해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다. 혁명가로 체를 방어하는 배후에는 우리가 소련을 좋아하건 아니건, 그 과오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블록”이었다는 생각이 있다. 이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거짓말이다. 분명히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있었지만 그것은 패배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그 스스로 “일국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근본적으로 비맑스주의적인 표어를 만들었다.

    맑스주의에게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 1917년에 시작된 전 지구적 혁명물결에, 그리고 레닌과 볼세비키로부터 로자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단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 모든 혁명가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한 것은 이러한 진정한 국제주의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하는 이러한 “이론”의 정도를 벗어난 채택은 부르주아 방법인 테러와 국가 자본주의,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착취의 가장 잔인하고 전체주의적 표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체는 “소련의 사회제국주의 모델로부터 벗어”났는가?


    소련에 대한 체의 비판의 기원은 1962년 미사일 위기였다. 소련에게 쿠바에 대한 지배는 신이 준 선물이었다. 마침내 터키처럼 소련에 인접해 있는 국가로부터 직접 소련을 위협한 미국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었다. 소련은 미국 해안에서 몇 마일 안되는 곳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러시아 배가 되돌아가도록 강제하면서 쿠바에 입항금지 조치를 취했다. 그 당시 크렘린의 수장인 후르시쵸프는 마침내 미사일을 제거하게 되었다. 1962년 10월 며칠 동안 스스로 “자유세계”로 부르는 국가와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세계”로 부르는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적 대결은 인류를 파멸의 순간까지 몰고 갔다. 카스트로 지도부가 보기에 후르시쵸프는 미국을 공격할 “탄환”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조국 아니면 죽음”이라는 카스트로주의자의 표어가 가장 불길한 의미를 지닌 애국주의 히스테리가 지나쳐, 그들은 원자전쟁의 제단에 인민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인민이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뒤틀린 정신착란 속에서, 게바라는 오직 최전선에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이 “쿠바의 전복”을 두려워하는 것은 옳다. 원자무기를 스스로 가루로 만들어서 그 재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접합제가 될 것이라는 인민은 무시무시한 보기이다. 그리고 협의 없이 원자 로켓트의 제거라는 협정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안심하여 한숨 쉬지 않고 감사하게 휴전을 받아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 확신하려고 싸움터에 자신을 던지고 (…) 혼자서라도 양키 제국주의의 원자위협에 대항하여, 그리고 모든 위험에 대항하여 싸울 결정을 할 것이다.”

    이 “영웅”은 쿠바인민이 기꺼이 조국을 위해 산화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이렇게 소련비판의 기원에는 “소비에트 공산주의” (실제로 스탈린주의 자본주의)의 미덕에 대한 신념의 상실이 없다. 반대로 체의 불평은 군사적 충돌이라는 논리적 결론으로 가지 않은 체제에 있다. 그리고 알지에에서의 회담, 즉 체가 “소련의 사회제국주의적 모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동지의 주장이 근거로 하는 회담은, 스탈린주의적 입장에 대한 게바라의 집착이라는 사실은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 유명한 회담동안 그는 동구블록 국가들과 우호적인 인민” 사이의 “상업주의”을 의문시한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느 정도 제국주의 착취의 착취의 공범자들이다.(…) [그들은]서방의 착취 국가들과의 암묵적 공모를 끝낼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러한 발본적 변모 뒤에서의 비판은 스탈린주의 제체 내에서의 비판에 불과하다. 더 나쁘게는 비판이 쿠바에 국가자본주의를 온 힘으로 설치하려는 지도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후 게바라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소련을 조금도 비판하지 않는다.


    1967년 CIA와 볼리비아 군대가 암살한 순간 체게바라는 미제국주의 뿐만 아니라 서구블록과의 “평화공존”이라는 크렘린의 새로운 정치지향의 희생물이었다. 우리는 소련과 그 불럭이 이러한 “선회”하도록 촉진시킨 이유까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회”는 제국주의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인민의 “배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배신과도 관련이 없다. 스탈린주의 부르주아지의 정치는 때때로 그들의 계급 이해에 따라 변화되었다. 쿠바 미사일 사건은 스탈린주의 제국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뒤뜰의 미국을 무시할 수단이 없었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소련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쿠바 동지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지점까지 게바라와 쿠바 지도부의 한 분파가 이해하기를 거절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부터 체게바라의 운명은 확실해졌다. 콩고에서의 재앙적인 모험 이후 무장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결국 모스크바에 줄을 선 볼리비아 공산당에 의해 버림받은 채 볼리비아에서 홀로 생을 마감한다. “러시아 친화적” 분파에게는 “포코”(foco)(게바라에 의해 고무된 게릴라 혁명 “이론”)의 지지자들은 “대중으로부터 단절된” 소부르주아 모험가들의 무리였다. 그리고 모든 운동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무장투쟁을 선호한 공산당들의 분파들에게는, 공산당의 “관료들”은 역시 “대중으로부터 단절된” 커피숍 혁명가, 특권을 지닌 관료들이었다. 우리 좌익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들은 똑같은 반혁명의 두 가지 형태이며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10월혁명의 연속선상에 있었으며 소련이 공산주의였다는 위대한 거짓말의 두 가지 변형일 뿐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체게바라의 비전은 무엇이었나?


    동지에게 지식인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상황에 대한 의식을 소개하는 것”이다. 아마도 동지는 “혁명적 엘리트”라는 체게바라의 상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체의 입장은 노동계급에 대한 심대한 경멸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쿠바혁명에서의 새로운 인간”에 대한 그의 서정적인 비약은 진실로 무엇을 드러내는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통일은 계급연대라는 구체적 표현이 있다. 서로의 도움과 동지애를 통해 만들어진, 투쟁의 조직에서의 자발적 연대는 헌신을 위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을 키운다. 그러나 게바라의 입에서 나온 이러한 “헌신”은 최선의 경우에도 최상의 순교에 대한 유사 신비주의적 소명처럼 들린다. (그는 항상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와 쿠바의 “고집 센” 인민이 미사일 위기의 순간에 방어했던 제국주의적 대의를 위해 “순교자”가 기꺼이 되려고 찾음을 인식해야 한다) … 그 자신의 “모범적” 행동 뒤에는 국가의 필요를 위해 위로부터 부과되는 “희생”과 “영웅주의”의 비전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저항”의 스탈린주의자들이 칭찬하고 퍼트린 민족주의적 관념론처럼). 이러한 비전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교육 받을” 필요가 있어서 “혁명의 혜택”을 이해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대한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경멸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게바라는 선언한다.


    “대중은 주장하는 것처럼 양떼처럼 행동하는 … 같은 유형의 요소의 합이 아니다. 지도자들, 기본적으로 피델 카스트로를 주저하지 않고 따르는 것은 옳다.…” “피상적으로 보면 국가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다. 대중은 비길데 없는 열정과 규율로 정부가 정한 과업을, 경제, 문화, 국방, 스포츠 분야에서 수행한다.…일반적으로 주도권은 피델로부터, 혁명적 지도부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인민에게 설명된다.”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1965)


    사실 동지가 우리에게 “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을 노동자에게만 환원시킬 필요가 없다”고 할 때 동의 유추는 분명히 의도하지 않게 노동계급에 대한 경멸적 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스탈린주의의 다른 변종 (마오주의로부터 카스트로주의까지)의 공통적 특징 중의 하나는 대중의 뇌 속에 의식을 “주입”하는 지식인이 이끄는 “혁명의 주체”를 신화적 빈농으로 만들면서, 노동계급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기껏해서 이러한 신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위한 역사적 준거와 담보물을 제공하는데 유용할 뿐이다. 이러한 사이비 혁명가들의 저술 속에서 누구도 계급권력기관으로서의 소비에트를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어떠한 참조도 발견할 수 없다. 스탈린주의의 이러한 복제판들은 그들의 국가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위장할 필요가 없으며 러시아 혁명에서의 노동자 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 삶의 표현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남긴 모든 것은 “계몽된” 인민이 지도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가끔 일부의 “주도권”을 보이도록 허락받은 대중은 “혁명방어의 위원회”와 사회감시의 기관으로 충원된다.


    쿠바에서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주요 기관 중의 하나는 다시한번 놀랍게도 노동조합이다. 쿠바노동조합총연맹 (CTC)은 이미 미국식의 노동조합이었으며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부패로 완전히 통합되어있었다. 쿠바지도부는 이들을 1960년에 관료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모형에 기반한 스탈린주의 노동조합으로 재빨리 전환시켰다. 카스트로 정권의 첫 번째 결정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 규칙을 철저히 지키게 하는 책임을 지게하고 회사에서의 파업금지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노동계급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미제국주의 반대와 “쿠바인민의 방어”로 정당화 되었다.쿠바에 있는 미국회사에서 임금삭감에 대항하는 파업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카스트로 정권의 지도자들은 파업노동자들을 파괴자로 낙인찍고 CTC의 새로운 카스트로주의 수뇌부의 입을 통해 “파업에는 파업으로”라고 선언할 기회를 이용하였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체의 삶과 일에 대한 논쟁을 지켜보았다. “공산주의의 죽음”을 부르짓는 전도사의 입장, 즉 부르주아지의 우익분파는 몇 몇 역사가의 도움을 얻어 우리에게 체의 “반-민주주의적” 역할, 특히 카스트로 시대 초기의 “혁명”법정의 수장으로서의 처형관의 역할을 항상 강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피의 숙청”이 일어났는데, 그리고 법정의가 “적절” 또는 “자의적”이었다면, 그 처형이 “과도”했는지의 문제를 서로 따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체가 단순히 그 이전과 같이 부르주아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영광에 대한 거짓말과 반쯤은 진실인 수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프랑스 공산당을 대체할 욕망을 가지고 프랑스에서 지도적인 “반-자본주의” 당이 되려는 「혁명적공산주의연맹 (LCR)」이 오늘날 어떻게 “체 주의자들”을 끌어안고 그의 “젊고 반란적인” 표상을 활용하는지를 우리는 보아야할 뿐이다.


    친애하는 EK동지. 이것이 실상이다. 체의 T셔츠를 입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이 세상의 참상과 불의에 대향해서 싸우기를 바라는 고결하고 진실한 마음이 분명하게 있다. 그러나 체가 우상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혁명적 열정을 가져다주는 감격을 없애기 위함이다. 체는 다른 누구보다 더 과감한 민족주의적이고 스탈린주의적인 지도자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아직도 카스트로주의라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열대지역의 변종의 대표이기도 하다.


    EK동지. 우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토론은 분명히 열려있다.… 우리는 동지가 우리와 같이 지속해서 토론하기를 바란다.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2007년 11월


    <출처>  ICC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Online December 2007.


    06체게바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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