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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1장. 코뮤니즘이란 무엇인가?
  • 조회 수: 3470, 2017-08-14 21:44:56(2016-12-19)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


    1장. 코뮤니즘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이 항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미래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은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단절시키고 훼손한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코뮤니즘은 그래서 러시아, 중국, 쿠바 등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국가 자본주의와 군사화된 노동의 ‘천국’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코뮤니즘의 본질 자체로 인해서 코뮤니즘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 “코뮤니즘이란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코뮤니즘을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맑스,『독일 이데올로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은 코뮤니스트 사회가 소수의 ‘계몽된’ 사람들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완성’의 추상적인 이상일 수 없다.


    헤겔(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로 맑스는 그에게서 변증법을 도출했다)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역사는 관념(인간의 관념, 코뮤니즘의 관념)의 진보적 실현이 아니다. 코뮤니즘은 인류의 목표로서 기능하는 정신적인 창조물이나 환상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실재적이고 인간적이며,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기원이다. 이것은 구 사회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코뮤니즘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코뮤니스트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창조물이다. 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왜 코뮤니즘이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도 아닌 이유다. 코뮤니즘은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들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그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코뮤니즘을 향한 이 현실의 운동을 지배하는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조건들의 산물이다. 일단 코뮤니즘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되고나면,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은 주체적 발전, 즉 현 시대의 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혁명 그 자체도 코뮤니즘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의식적인 정치 행동의 형식을 취해야 하고, 그 성공 여부가 프롤레타리아트가 획득한 의식과 조직화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인류 공동체는 단지 객관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코뮤니스트 사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코뮤니스트 혁명의 주요 국면과 이 혁명이 지향해야 하는 최종 목표를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코뮤니스트 혁명은 오직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코뮤니즘에 의해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관계의 특징들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양식이 발전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는 뒤 이은 장에서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갈 것이다.



    코뮤니즘의 본질


    코뮤니즘은 유토피아라든가, 추상적인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뿌리를 그 이전 사회에 두고 있다. 코뮤니즘의 가능성과 코뮤니즘을 이루기 위한 객관적인 조건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계급의 정치적 역량, 이 두 가지로부터 나온다. 미래 사회의 자양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구체화된 사회관계의 본질, 이 두 가지 모두이다.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객관적 필요성이 되는 시기는 오직,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생산력의 계속된 발전과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 사회가 더 이상의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때이다.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의 통제를 장악하는 것은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고, 역사적 필요성으로 될 수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계급들이 존재함이 정의나 평등 등등에 모순된다는 통찰이 얻어진다고 해서, 이러한 계급들을 폐지하겠다는 단순한 의지가 있다고 해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에 의해서만 실행 가능한 것으로 된다.”

    (엥겔스, 『반뒤링론』1894)


    이러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 상품 생산, 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들을 철폐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관계들만이,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하고 인류의 현재 필요에 대응하게 될 사회관계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코뮤니즘은 계급,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어떤 종류의 개인적, 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여야만 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이뤄진 생산의 사회화의 유일한 최절정은 사회 전체에 의한, 생산 수단의 사회적인 몰수이다. 오직 계급 특권과 사적인 몰수의 철폐만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관계의 자본주의적 성격 사이의 현존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생산력과 생산 수단의 사회적 몰수는 오직,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생산적인 집단으로서만 기능하는 피착취 계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수행할 수 있다.


    ․  코뮤니스트 사회는 그러므로 결핍의 철폐와 인류의 필요를 위한 생산에 근거한다. 코뮤니즘은 풍요의 사회이며, 이 사회는 인류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생산력, 인문학, 기술과 지식의 수준을 통해서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경제적 힘들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과 재생산을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통제력을 의식적으로 획득함으로써, “필요가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자유가 만연한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은, 인류의 해방은 오직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코뮤니즘은 가치 법칙을 철폐한다. 모든 인간들에 의해 모든 수준에서 사회화되고 계획되는 코뮤니스트 생산은 오로지 사용가치의 생산에만 기반하며, 그 사용가치의 사회화된 직접적 분배는 교환, 시장, 화폐(…) 등을 배제한다.


    ․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 경제적 경쟁과 경제적 무질서의 사회, 그러므로 개개인과 계급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사회로부터, 인류는  코뮤니즘 아래에서 인류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권력의 모든 형식들(정부, 국가, 경찰 등)은 착취와 계급 분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통치권들의 존재는, 인간성과 인간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모든 방식들의 존재는 사물의 단순한 관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코뮤니즘의 이러한 특징들은 최소한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서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가슴속에 품고), 더 이상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광범위한 일반화에 국한된다. 더구나, 이러한 간단한 묘사 속에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새로운 삶의 방식들의 결과들이 다뤄지지 않았다. 또한 사회 내부의 분리와 차별, 소외, 인간 사이의 세력 관계 등을 철폐가 담고 있는 의미도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렇게 대략적인 개괄을 통해서도 자본주의 사회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회들과 미래 세계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다.


    착취가 없는 사회!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살 수 있는 곳!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리가 없는 곳! 자유의 의미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유 이상을 의미하는 곳! 놀랄만하지 않은가!


    비록 이렇게 인류가 만들어 가야할 거대한 도약의 자세한 부분까지 생각할 수는 없을 지라도, 인류의 역사상 아직까지 이와 같은 종류의 질적 도약을 위한 필요성은 없었다는 점, 이것 하나는 명확하다.


    이 발언은 양날의 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도약은 오직 한 사회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은 가장 극단적인 박탈, 가장 사나운 착취, 영속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는 바로 그 계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전의 모든 사회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코뮤니즘의 모든 특징들 그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트 존재의 취약함, 궁핍, 그리고 비인간성에 달려있다. “사회 존재의 모든 비인간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조건에 집중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현재 그 자신의 상황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측면을 극복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맑스, 엥겔스, 『신성 가족』, 1844)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그 입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를 해방시키고, 또한 계급이나 착취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어떤 경제적 권력도 소유하지 않고, 생산의 지점에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오직 스스로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대와, 자신들의 의식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반대할 수 있다. 이 두 무기는 그 자체가 미래 사회의 특징적인 원칙들의 체화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대가 매우 취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지 사회와 대결할 때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경제적 특권들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해방을 위한 최종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압력에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이것이 코뮤니즘을 향한 길이 필연적이지 못한 이유이다. 코뮤니즘은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열매다. 이것이 어째서, 잃을 것은 그 쇠사슬뿐이며 쟁취할 것은 세계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특별한 혁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지, 그 발전에 대한 결정론적인 전망이 있을 수 없는지 이유다. 그러나 만약 이 새로운 역사적 신기원이 쟁취되지 못한다면, 인간성은 이름 없는 야만으로 전락하고, 아마도 그 최종적 파멸에까지 이를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을 향한 길, 계급투쟁은, 일련의 승리와 패배로서, 한 발 퇴진과 그에 뒤이은 새로운 승리라는 패턴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의지와 의식 사이의 긴장, 끊임없는 재평가와 자기비판 사이의 긴장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코뮤니스트 혁명


    “부르주아 혁명들, 즉 18세기의 혁명들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맹렬히 돌진한다. 그 극적 효과들은 서로 자신을 내세우며, 사람들과 사물들은 불꽃의 찬란함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황홀경이 그 날 그 날의 정신이다 ; 그러나 이것들은 수명이 짧다. 이것들은 얼마 안 가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회는 이 질풍노도의 시기의 결과들을 냉정하게 자기 것으로 하기까지 기나긴 회한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즉 19세기의 혁명들은 항상 자기비판을 행하고, 진행 도중에 반복해서 걸음을 멈춘다. 그 임무를 다시 수행하기 위해서, 완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도 다시 되돌아온다. 처음 시도된 것들의 불완전함, 허약함, 빈약함을 가차 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또한 이 혁명들은 마치 자신들의 상대들을 땅에다 메다꽂아, 그 상대들이 땅에서 새로운 힘을 흡수하여 더욱 거대해져서 자신들에게 대항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이 혁명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목표들이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창출되어 관계들 자체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면 이러한 물러섬은 끝나게 된다 :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춰라!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


    이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지속적인 자기비판이라는 기초 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코뮤니즘을 향한 험난한 길을 걸어간다. 사실상, 코뮤니스트 혁명은 하나의 경제적 과정에서 그 최절정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위한 정치적 수준에서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코뮤니즘 혁명은 옛 사회를 변혁하는 모든 과정을 위한 출발점이다. 과거에는, 계급의 경제적 권력과 그 계급이 사회관계의 새로운 시스템을 강제하는 능력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였다. 사회적 진보의 체화로서, 설득이나 힘에 의해 사회에 부과되는 새로운 사회구조는, 그 혁명 계급의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중세 봉건 사회가 부르주아지에 의해 파괴되었는지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대한 부르주아 가문들은, 특히 남부 유럽에서, 무역과 상업의 명백한 주인이었다. 대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무역로를 따라서 금속과 직물, 향신료의 끊임없는 파도가 흘러들어왔다(…) 황금이 새로운 무역의 중심지들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그리고 많은 도시들에 흘러넘쳤다. 미술, 과학, 문학, 그리고 지식이 번영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견들이 산업 도시들처럼 증가했다. 머지않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진보도 일어났다. 어디든 속도와 정확성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확했고, 산업 생산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금융과 상업 문제에 있어서도 특히 그러했다. 한 사회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를 위해, 이 계급은 하나의 본질적인 힘, 즉 금융과 돈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중세 귀족정치의 수중에 남아있던 정치권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의 법을 사회에 강제했다.

    “중세 귀족세력에 대항한 부르주아지의 투쟁은 농촌에 대한 도시의 투쟁이었으며, 토지 재산에 대한 산업 재산의 투쟁이었으며, 자연경제에 대한 화폐경제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결정적인 무기는 그들의 경제적 권력들이었고, 이것은 산업의 발전 - 첫 번째로 수공업, 그 다음 단계로 증가하는 메뉴팩쳐, 그리고 상업의 확장을 통해 - 과 더불어 끊임없이 증가해 온 것이었다. 이 모든 투쟁 동안, 정치적인 힘은 귀족세력의 편에 있었다.” (엥겔스,『반뒤링론』, (우리의 강조))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모든 착취 형태의 파괴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종류의 경제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돈, 재산, 또는 산업 권력을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권력을 해체하고, 공산주의로 점차적으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어떤 경제적 권력도 없다. 자본주의의 사회관계가 지배하는 일반적인 틀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의 도구, 기계, 또는 심지어 공장 전체를 소유함으로써 대체 어떤 물질적 권력을 얻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수단이나 그 결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소유한다는 발상은 객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덫이며, 신비화이다. 오직 폭력적이고 세계적인 혁명만이 생산수단과 그 결실의 집단적 전유를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소유형식에 기반 하지 않는 만큼, 새로운 종류의 착취 사회를 만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착취 받는 계급으로서,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 족쇄뿐”인 바로 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객관적으로 착취가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의 건설로 나아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후에도,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후에도 착취 받는 계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 쟁취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 - 와 코뮤니즘 사이에서는 일종의 이행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사회를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을 생산적 노동에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의 조건을 일반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 없이, 계급의 이러한 점진적인 해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심지어 세계적으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착취받는’ 계급 (다른 사회 계층들의 기생적 소비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매우 빈번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코뮤니스트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으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사회 계급을 착취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또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지녔다 해도 권력은 부패 한다” 등등.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되는 그 방식은 그들의 잘못된 추론을 드러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이자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본질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다음을 설명할 수 없다 :


    ․ 계급 억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경제적 권력을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노동자계급에게는 없다는 점

    ․ 생산력의 계속적인 발전의 유일한 기초로서 계급 없는 사회가 이뤄질 필요성과 객관적 가능성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매우 쉽게 그러한 진부한 의문에 빠지는데,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유지를 위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특징적인 이러한 근시안은, 혁명이 일어난 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이 나머지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혁명의 후퇴를 의미하고 자본주의의 재등장을 의미할 뿐임을 보지 못한다. “착취하는 노동자”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로 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터이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파괴는 오직 지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코뮤니스트 혁명의 승리는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코뮤니즘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 이행기 동안, 자본주의 사회로의 후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한 후퇴 가능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엄청난 노력을 다해 그 자신의 의식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제한된 수의 무기만이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옛 부르주아 권력의 어떤 잔재도 용인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오히려 옛 부르주아 권력의 잔재들은 이행기동안 점진적으로 분해되고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과거의 제도와 기구를 깨끗하게 철폐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진 않았다.


    부르주아 혁명은 많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구조들 뿐만 아니라, 사고와 행동의 방식들(…)의 전복을 포함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이 착취를 강제하는 기구라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근본적 토대까지는 아니었다. 이단 심문의 도끼는 길로틴의 ‘민주적’ 칼날로 대체되었다. 중세의 노예 상태로부터 미래에 착취당할 계급을 ‘해방시킨’ 우리의 새로운 주인들은 구체제의 ‘덜 공격적인’ 측면들, 중세 국가의 억압적인 기구들과 같은 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간단히 이 기구들을 근대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적용했다. 경찰, 공무원, 검찰(…)들은 그들의 제복을 바꿔 입었다. 사색가, 선생, 철학자 등은 그들의 학설을 바꿨다. 특정 경우에는, 20세기가 시작했을 때의 독일과 러시아처럼, 부르주아의 경제적 권력은 귀족, 귀공자, 제국의 장교들과 행정 관료들, 귀족들, 왕자와 황제 등의 토지와 공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억압적 사회가 다른 억압적 사회로 바뀐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억압적인 중세적 권력 구조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것들은 부르주아 경제적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 중 어떤 것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겐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측면들을 사전에 파괴한 그 기반 위에서만 지배적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꼬뮨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현존하는 국가를 전복시켜서만은 안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코뮤니스트 사회의 본질에 어울리는 투쟁과 사회 변혁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혁명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양식은, 사회 혁명의 본질에 조응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할 사회의 새로운 형식의 본질에 조응해야 한다.


    “이러한 전유는 더욱이 그것이 달성되어야 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유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격상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보편적인 연합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연합에 의해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 속에서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생산 및 교류에서, 그리고 사회적 편제에 있어서 이전의 양식의 권력이 전복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속에서 혁명 완수에 불가결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성격과 에너지가 발전한다. 더욱이 그러한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게 된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우리의 강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조직화, 계급연대, 혁명적 의식의 성장, 명확한 전망과 지칠 줄 모르는 행동, 눈앞에 놓인 거대한 의무에 대해 전체 노동자계급의 창조적인 참여(…) 이 모든 것들은 혁명, 권력 장악, 그리고 코뮤니즘의 비옥한 토양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점 외에도, 무엇보다도 계급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과거에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의지와 의식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 상이한 생산 양식의 계승은 어느 정도 인간과 사회 계급의 “머리 위에서” 발생했다.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으로 인해, 혁명 계급은 자동적이고, 신비스러우며, 변치 않는 것 같은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원동력은 자연적 힘으로서 나타났고, 그 힘은 보이지 않으며,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제어되지 않는 그러한 것처럼 보였다.


    “코뮤니즘은,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산 관계들 및 교류 관계들을 변혁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운동들과 구별된다. 또한 그것은 최초로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인 전제들을 지금까지 존재하는 인간들의 창조물로서 간주하고, 그 전제들에게서 자연적이라는 성격을 벗겨내며, 그 전제들을 연합된 개인들의 힘에 복속시킨다.”(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우리의 강조)


    그러므로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코뮤니즘과 코뮤니즘을 향한 진행은, 다시 말해, 혁명은 같은 과정의 일부이며, 같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 운동의 각각의 특정한 단계들은(그 단계들은, 각각 다른 단계들과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최종적 목표의 특징적 성격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코뮤니즘이 인간 필요를 위한 생산을 의식적으로 조직함을 의미한다면, 코뮤니즘에 앞선 사회 변혁과 혁명은, 그 스스로 의식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편견 없이 현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들은 그 이전의 사회 질서에 비해 진보적인 사회 질서를 위해 투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질서는 새로운 착취의 형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투쟁을 통해 얻어진 이 계급들의 의식은 그들의 착취를 정당화하거나 은폐해야 했기 때문에 그저 신비화된 의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든 착취의 형식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의식이다.


    확실히, 노동자계급 의식의 발전은 완결된 과정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투쟁들의 ‘자생적’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미완적이다. 그 계급의식은 물질적 환경의 압력, 계급의 역사적 경험 아래에서 차츰 발전하며, 성장과 풍부화의 지속적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비록 계급의식의 발전이 ‘완전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는 혁명적 계급 의식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자생주의나 자발주의, 그 어느 것도 혁명의 토대가 될 수 없다.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는 그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요구되는 의식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과 혁명의 필요에 상응해야만 한다. 더욱이, 계급의식의 발전은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발전은 계급의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능력들, 이 두 가지로부터 비롯되는 상이한 요소들이 결합한 산물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것이다.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팸플릿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lassconc/1_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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