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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2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1)
  • 조회 수: 2566, 2017-08-14 21:47:14(2016-12-26)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1)


    이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출현에 대해 말할 때는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정의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탄생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한다면, 명백히 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는 그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탐구가 아직 규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게 되는 그러한 경향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과거의 다른 혁명적 계급들도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해 투쟁했고, 그 전의 도그마와 경직된 생각들에 대항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 생산 양식을 제도화하기 위한 투쟁에 사상끼리의 투쟁, 서로 다른 세계관들 사이의 투쟁이 동반하여 일어났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 발전 과정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새로운 사회적 관계 설립을 위한 계급투쟁은 동시에, 새로운 보편사상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사회가 경제적 수준에서 경화되는 순간부터, 사회의 생산 관계가 사회의 진보와 삶을 제한하는 껍질로 변형되는 그때부터, 과거의 사회진화에 상응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형식들은 뿌리 뽑히고, 내용이 없어졌으며, 공공연하게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철학, 그리고 예술에서 표현되던 낙관주의와 생기는, 일단 사회가 경제 수준에서 노쇠와 데카당스(décadence)의 시기에 진입하고 나면, 철학적 비관론, 반계몽주의, 그리고 예술 표현과 사회사상의 쇠락으로써 대체된다. 이렇게 증대되는 분열은, 사회를 통제하는 현존 관계와 그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역사적 필요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회에 대해 갖는 사상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그런 시기에 정말 진보적일 수 있는 유일한 사상들은 새로운 사회를 선언하는 것들이다.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을 내다볼 수 있는 사상들이 나타나서, 혁명적 사상이 되기 전에 처음에는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이며 논쟁적인 형태를 띤다.


    계급의식도 같은 맥락에서 전개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쇠퇴의 과정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역사의식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비옥한 지형을 제공한다. 또 다른 비교점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과, 과거의 혁명 계급들의 투쟁을 특징짓는 이데올로기적 과정들 그 사이에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이데올로기 일반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사회적인 물질적 조건들의 총체성을 토대로 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전진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두 사회 계급간의 현실의 경제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대립,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운동의 과정에서, 계급의식은 그 스스로 정립하고 승리할 수 있다.


    “사람들의 대대적인 변화는 반드시 코뮤니스트 의식의 이러한 대대적인 창조 속에서 확인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변화는 단지 하나의 실천적인 운동, 즉 혁명 속에서만 실행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혁명이 단지 지배 계급을 전복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을 전복한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낡은 체제의 모든 썩은 것들을 쓸어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과거의 혁명 사상과 마찬가지로, 노동 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승리의 끝에 이르러서야 정말로 승리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종교적인 반영은, 어떤 경우에서든,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일상적인 삶의 실천적인 관계들이 인간에게 그것들 스스로를 일반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형태로 드러낼 때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 자유롭게 연합된 인간들이 생산하고 그러한 물질적 생산이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아래 놓여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 삶의 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겉모습으로부터 베일이 벗겨지게 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물질적인 기반들, 즉 일련의 물질적 실존 조건들을 소유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다시, 고통스럽고 오랜 역사 발전의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산물이다.”(맑스, 『자본론 1권』)


    그래서 과거의 낡은 사상들을 결정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이것은 언제나 그러한 경우였다) 낡은 경제적 모순들을 물질적으로 극복함을 함의한다.


    “종교, 가족, 국가, 법, 윤리, 학문, 예술 등은 생산 양식의 특수한 형태일 뿐이며, 그러므로 그 일반법칙을 따른다. 사적 소유를 긍정적으로 폐지하는 것, 즉 인간적인 삶을 전유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소외를 긍정적으로 폐지하는 것이자, 인간이 종교, 가족, 국가 등으로부터 자신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실존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종교적인 소외는, 의식의 영역에서만, 즉 인간의 내적 삶의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 경제적 소외는 실제 삶의 소외이다. 그래서 그것의 폐지는 두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그런데, 일정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대해 말할 때는 이데올로기들을 이야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말할 때는 계급의식을 계속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상의 차이인가?


    실제로, 우리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과정들을 정밀하게 특징짓는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용어들을 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들의 이데올로기적 과정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발전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얼마 되지 않는 요소들에 비해서 훨씬 더 중요하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바로 그 진정한 본질과 근원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다.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 사이의 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을 둔 경제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사회사상의 수준에서 표현한다. 이러한 하부구조에서 지배적이며, 경제적 권력, 생산수단과 물리적 힘을 가진 그러한 사회적 계급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수단들까지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반영”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심지어 지배계급의 사상이 현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실체가 없는 애매한 개념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훨씬 더 결정적인 현실, 즉 경제적인 현실과 그 법칙을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지가 봉건제에 맞선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 있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사상의 비판적 행동은 그 최종적 분석에 이르기까지도 오직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었다. 실제 혁명적 행동은 더 낮은 곳, 즉 사회의 토대에서 발생했었다.


    비록, 계몽기의 철학자들의 저작들 -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저작들, 볼테르, 디데로, 몽테스큐, 칸트, 로크 등등의 저서들 –이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투쟁에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규칙을 강제하는 데에 신뢰성을 주는 한편으로 중세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심각하게 약화시키는데 공헌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들의 공헌들은 항상 이미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제적 변혁 과정을 뒤따른 것뿐이라는 점도 진실이다. 부르주아지의 선각자들이었던 모든 천재들(로저 베이컨, 폼포나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등)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봉건적 사회관계 사이에 점점 더 극악해지는 모순들을 표현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 혁명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힘을 획득한 이후로는 일종의 정당화처럼 보였다.


    “자본주의는 19세기에만, 그러니까 그 역사적 궤적의 끝에서만, 그 투쟁의 역사적 강령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 승리의 전야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성은, 그것의 경제적 지위가 구 사회 내에서 발전하고 그 지속적 발전을 위한 길을 명확히 하는 그 만큼 점진적으로 실현되었다.” (『 Bilan 』, 5권. 1934년 3월, 우리의 강조)


    반면에,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은 어떤 경제적 하부구조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권력이 전혀 없고, 새로운 착취 형태의 확립을 그들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심지어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확인할 때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 계급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의 영속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꾸며내도록 강요당할 어떠한 경제적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록 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창조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의식의 정치적 성취물(成就物)은 그것이 절대적인 사상으로, 이데올로기로 굳어버리는 순간, 그 혁명적 성격을 잃고, 부르주아적 편견의 혼잡한 체계들로 통합되어 버린다.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팸플릿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lassconc/2_cconc/prol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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