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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 룩셈부르크 - 유니우스 팸플릿] 제3장 독일제국주의의 대두와 공공연히 준비된 전쟁
  • 조회 수: 5426, 2017-06-23 13:59:03(2017-06-08)
  • 제3장 독일제국주의의 대두와 공공연히 준비된 전쟁



    우리당은 휠씬 더 깊은 연관과 더 근본적인 통찰만으로도 이 전쟁의 진정한 본질과 실제 목적을 간파하고 그래서 이 전쟁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4일을 초래한 과정들과 추동력들은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이 세계대전은 몇 십 년동안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한걸음씩 시시각각 준비되고 있었다. 현재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이, 베일 뒤에서 이 악행을 빚어낸 “비밀외교”에 격분해서 그것의 폐지를 선언한다면, 그렇게 그들은, 뇌우를 일으키려 자신들의 주물을 때리는 보토쿠데인디언마냥, 그 가련한 무뢰한들이 마치 비밀스런 마법을 가진 듯이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 운명의 이른바 조종자들은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부르주아 사회의 지각 내의 압도적인 역사적 사건과 변위를 통해 떠밀린 체스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이런 사건과 변위를 명확히 파악하려 내내 노력해 왔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최근 역사발전에서 2개의 가닥들이 곧바로 지금의 이 전쟁으로 연결된다. 그 하나는 이른바 민족국가들, 즉 근대적인 자본주의국가들의 확립시기에서, 프랑스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전쟁에서 유래한다. 1870년의 전쟁은 알자스-로렌의 합병으로 인해 프랑스공화국을 러시아의 품안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유럽을 2개의 적대진영들로 양분했으며 광적인 군비경쟁의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세계 대화재로 이어지게 될 최초의 불씨를 당긴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군대가 아직 프랑스에 있는 동안 마르크스는 브라운슈바이크위원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순간의 함성들 때문에 완전히 귀가 먹어버리지 않은 자라면, 아니 독일민중을 마비시켜야할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1866년의 전쟁이 1870년의 전쟁을 품고 있었듯이 1870년의 전쟁은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반드시 품고 있음을 통찰해야 한다. 나는 반드시, 불가피하게라고 말하는데, 이는 있음직 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그 이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있음직 하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지금 이미 하나의 기정사실로 여겨져야 한다. 이 전쟁이 이로울지 해로울지는 전적으로 승리자인 독일의 현재 행보에 달려 있다. 그들이 알자스와 로렌을 취한다면, 프랑스는 러시아와 함께 독일에 대항해 싸울 것이다. 그 파멸적인 결과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i


    이 예언은 그 당시에는 비웃음을 샀다. 사람들은 프로이센을 러시아와 연결하는 유대가 너무나 강해서 전제주의 러시아가 공화주의 프랑스와 제휴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마저도 망상이라 여길 정도었다. 이러한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예측한 그 모든 것은 마지막 글자 하나까지 들어맞았다. 아우어는 자신의『세당기념식』에서 말하기를,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 성공을 위해선 맹목적으로 굴복하는 일상적인 정치와는 구별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민주당의 정치이다.”ii


    그렇지만 프랑스가 마치 비스마르크가 자행한 강탈에 대항해 1870년 이래 만기된 설욕 때문에 지금 더욱 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독일제국과의 힘겨루기로 휘몰린 것인 양, 오늘의 전쟁이 그 핵심에 있어서 알자스-로렌에 대한 이미 많이 비방된 그 “복수”인 것인 양 그런 식으로 연관성이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은 독일 전쟁선동자들이 꾸며낸 안일한 민족주의적 전설로서, 패배를 “잊을 수 없어” 복수를 꾀하는 음흉한 프랑스에 대하여 떠들어댄다. 비스마르크의 언론 친위병들이 1866년에, 매력적인 신데렐라 프로이센보다 높았던 자신의 이전 지위를 “잊을 수 없어 하는” 폐위된 공주 오스트리아에 대해 꾸며댔던 것처럼. 사실 알자스-로렌에 대한 복수는 겨우 몇몇 애국적인 어릿광대들의 극적인 필수품, 낡은 방패 문장의 동물, “벨포르의 사자”iii 정도로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정치에서 그 합병은 벌써 극복되고, 새로운 걱정에 의해 추월당했다. 프랑스정부도 다른 그 어떤 진지한 정당도 그 땅 때문에 독일과 전쟁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유산이 현재 세계 대화재로의 최초의 장작 조각이 되었다면, 이는 오히려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을 그리고 이와 더불어 유럽 전체를 군비경쟁의 급격한 광기로 몰아 넣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러시아와의 동맹을 그리고 독일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어쩔 수 없는 귀결로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이다. 그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유럽정치의 권력요소로서 러시아 차리즘이 비상하게 강화되었고, 바로 그 이후 러시아의 총애를 얻기 위한 프로이센-독일과 프랑스공화국 사이의 체계적인 아첨경쟁이 시작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의 정치적인 결탁이 야기되어, 독일정부의 백서에서의 내용이 보여주듯이, 오늘의 전쟁에서의 “전우관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1870년의 전쟁은 그 결과로서 독일-프랑스 대립축을 둘러싼 유럽의 외적인 정치적 그룹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내 민족들의 삶에 군국주의의 형식적 지배를 도입했다. 이러한 지배와 그룹화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지만 그 전쟁 이래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한편 오늘의 전쟁에 맞닿아 있으면서 마르크스의 예언을 빛나게 확인해주는 두번째 가닥은, 마르크스가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한, 국제적 성격의 사건들로부터, 즉 지난 25년간의 제국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나온다.


    1860년대와 1870년대의 전쟁기 이후 새로이 개편된 유럽에서 기초를 다진 자본주의의 약진은, 특히 창설열기iv와 1873년 공항에 뒤이은 오래 동안의 침체를 극복한 뒤 90년대의 호황 속에서 전대미문의 절정에 도달했다. 이것은 알려져 있는 것처럼, 유럽국가들의 새로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세계의 비자본주의적 국가들과 지대를 찾아 벌이는 경쟁적인 팽창의 시기를 열였다. 1880년대 이래 이미 식민지 정복을 향한 새롭고 특히 정력적인 열망이 대두했다.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남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식민제국을 건설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와 동아시아의 통킹을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아베시니언v 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정복을 마무리하고 만주로 돌입했다. 독일은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서 최초의 식민지들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미국도 그 윤무에 끼어들어 필리핀을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치열하게 찢어발긴 이 시기, 1895년 청일전쟁 vi부터 시작해서 거의 끊임없이 연쇄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을 초래했던 이 시기는 거대한 중국원정vii에서 절정을 이루며 1904년의 러일전쟁viii으로 마감된다.


    연이어 발생한 이 모든 사건들은 유럽 외부의 새로운 적대관계들을 세계 곳곳에 만들어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이집트에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태평양에서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그것은 생동하는 바다, 즉 날카로운 대립관계와 일시적 연합의, 긴장과 이완의 출렁임이었다. 이때 수년 마다 유럽세력들 사이에 부분적인 전쟁의 발발 위협이 생겨났다가 또 다시 사라졌다. 이로부터 누가 보아도 다음 사항들은 분명했다. 1,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족들의 등 뒤에서 자본주의국가들 모두가 모두에 대항해 조용히 진행하는 비밀스런 그 전쟁이 언젠가는 전반적인 담판을 초래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뿌려진 바람이 언젠가는 무시무시한 폭풍이 되어 유럽으로 몰아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것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사건들의 지속적인 침전물들이 유럽에서의 점점 더 늘어가는 군무장들로 나타나면 나타날 수록 더 끔찍하게. 2,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의 변화하는 부분적 대립관계들이 잠정적으로 그룹화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축, 즉 하나의 압도적으로 강력한 대립관계를 발견하게 되자마자 유럽의 세계대전이 폭발하게 될거라는 점. 이 상황은 독일제국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독일에서 짧은 기간 내에 압축되어 이뤄진 제국주의의 대두는 순수배양 속에서 관찰될 수 있다. 제국창건 그 이후 대공업과 무역의 전례 없는 약진으로 1880년대에 여기에서 자본축적의 두 가지 특징적인 고유형식들이 생겨났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카르텔의 발달과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은행업의 형성과 집중이 바로 그것들이다. 전자를 통해 중공업, 즉 국가납품과 군무장과 제국주의적 계획들(철도건설, 광산채굴 등)에 직접적 관심을 둔 자본부문이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요소로 조직화되었다. 후자를 통해 금융자본이 항상 긴장되고 더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하나의 폐쇄된 세력으로 압착되었다. 국가의 산업과 통상과 크레딧에서 영역적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국가경제와 사적 경제에서 똑같이 결정적이고, 제한없이 그리고 비약적으로 팽창가능하며, 항상 이윤과 활동에 굶주리고, 간접적이며 그래서 관대하고 대담하며 가차없고, 처음부터 국제적이며, 기질 전체로 볼 때 활동의 장으로는 세계무대가 적격인 그러한 세력으로 금융자본이 압착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강력하며 정치적 주도성에 있어 가장 도전적인 인물의 지배와 어떤 반대도 불가능한 가장 약한 의회주의, 게다가 노동자계급과는 극히 대조적이게 단합되어 정부를 방패로 삼고 있는 모든 부르주아 계층을 덧붙인다면, 세계가 이미 분할될 대로 분할되어 있는 때 엄청난 식욕을 갖고 세계무대에 출현한 젊고 힘에 넘치며 어떤 억제로도 곤란을 겪지 않는 이 제국주의가 재빨리 전반적 불안정화의 예상할 수 없는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음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었다.


    이는 이미1890년 말 제국 군사정책의 과격한 돌변을 통해, 1898년과 1899년 연이어 급히 진행된 해군법안들과 더불어 나타났었다. 그 법안들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이뤄진 전함의 급작스런 배가, 환산하면 거의 20여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해군무장의 건축계획을 의미했다.ix 이는, 1902년의 관세율x이 그 두개 해군법안을 반영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제국의 재정정책과 통상정책의 광범위한 전환, 한발 더 나아간 논리적 귀결로 볼 때, 사회정책과 내부 계급관계 및 정당관계들 전체의 광범위한 전환일 뿐만이 아니었다. 해군법안들은 특히, 독일제국 창건이래 결정적 역할을 해온 대외정책에서의 과시적인 노선 전환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이 일종의 내륙세력이고 또 그렇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을 펼쳤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기껏해야 해안선 방어를 위한 쓸데 없는 부속품 정도로 여겨졌다. 당시 차관 홀만 스스로도 1897년 3월 제국의회 예산위원회에서, “해안선 방어를 위해 우리는 해군이 필요 없다. 해안선은 저절로 방어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독일이 육지뿐만 아니라 해양에서도 제 1의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강령이 세워졌다. 더불어 비스마르크의 대륙정책이 세계정책으로 전환되었고, 군무장의 목적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변화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부득이한 코멘트가 독일제국의회 자체 내에서 제공되었다. 이미 1896년 3월 11일에, 독일제국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해군법안의 전조로서 새로운 강령을 황제가 언급한 그 유명한 연설xi이 있은 뒤 중앙파xii의 당시 지도자 리버는, “무제한의 해군계획들”을 거론하며 이에 대항해 결연히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파의 또 다른 지도자 쇄들러는 1898년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첫 번째 해군법안을 놓고, “우리가 육지에서 제1의 세력이면서 해양에서도 제1의 세력일 수는 없다는 것이 국민의 견해요. 지금 당신들이 나에게 우리는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라고 외친다면—그렇소, 신사여러분, 당신들은 그 시작에 서 있소, 그것도 아주 대단한 시작에”라고 외쳤다. 그리고 두 번째 법안이 나오자, 바로 그 쇄들러는 1900년 2월 8일 제국의회에서, 어떤 새로운 해군법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해명들을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의 이 수정법령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발 묶인 우리 해군을 20여년을 앞질러 두 배로 증강시킴으로써 세계정치의 토대로서의 세계해군 창설을 개시하는 것이다.” 한편, 정부 자체도 새로운 노선의 정치 강령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1899년 12월 당시 외무차관 폰 뷜로프는 두번째 해군법안의 근거를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이 그레이트브리튼(위대한 영국 – R.L.)에 대해 말한다면, 프랑스인들이 뉴벨 프랑스(새로운 프랑스 – R.L.)에 대해 논한다면, 러시아가 아시아를 합병한다면, 우리도 위대한 독일에 대한 요구가 있다.… 우리가…우리의 통상과 다른 곳에 있는 우리 동족과 우리의 선교사들 그리고 우리 해안선의 안전을 보호하는 데 충분한 해군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우리는 국가의 치명적인 이해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다음 세기에 독일민족은 망치 아니면 정이 될 것이다.”xiii[강조 – R.L.] 해안선 방어, 선교사들과 통상이라는 미사여구를 빼고나면, 더 위대한 독일, 다른 민족들에 대한 망치의 정치라는 간결하고 힘찬 강령이 남는다.


    이러한 자극이 제일 먼저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는 모두에게 분명했다. 새롭고 공격적인 해군정책은 독일을 세 1의 해상세력인 영국의 경쟁자로 만들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바로 이렇게 이해되었다. 해군개혁과 이와 관련된 강령 연설들은 영국에서 큰 동요를 유발했고, 그 이래 잦아들지 않았다. 1910년 영국 하원의 해군논쟁에서 로버트 세실경은 영국과 싸움을 시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독일이 거대한 해군을 만들려는 그럴듯한 이유를 그 누가 한번 알려 주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지난 15년간 양 측에서 계속되어온 해상권 경쟁은, 마지막으로 전함과 초전함의 열띤 건축은 이미 독일과 영국간의 전쟁이었다. 1899년 12월 11일의 해군법안은 독일의 선전포고였고, 영국은 이를 1914년 8월 4일 접수했다.


    정확히 말해서, 이 해상권 경쟁과 세계시장을 놓고 벌이는 경제적 경쟁 투쟁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이른바 독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억제했다는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많이들 떠들어대는 그 ‘영국의 독점’은, 격분한 프랑스의 ‘복수’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어 하는 애국주의적 전쟁전설들의 왕국에 속한다. 저 ‘독점’은 영국 자본가들에게는 고통스럽게도 이미 1880년대 이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 인도, 일본, 특히 독일과 미국의 산업발전은 19세기 전반부에서 1860년대까지의 영국의 독점에 종지부를 마련했다. 영국 외에도 각 나라들이 지난 몇 십년간 차례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고, 자본주의는 그 본질상 당연하게 그리고 질풍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오늘날 심지어는 여러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또 이 기특한 자들에 따르면 국제 사회주의의 안녕을 위해 타도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이는, 영국의 해상권, 이 해상권은 세계 5개 부분들로 대영제국이 팽창한 결과의 하나로서 지금까지 독일자본주의를 거의 방해하지 않았다. 독일자본주의는 오히려 그 ‘멍에’ 아래에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서 튼실한 엉덩이를 가진 매우 건장한 젊은이가 되었다. 참으로, 바로 영국 자체와 그 식민지들은 독일의 대공업적 약진의 가장 중요한 초석들이고 역으로 독일은 대영제국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없어서는 안될 고객이다. 서로 방해가 되기는 커녕 영국과 독일의 대자본주의적 발전은 극도로 상호의존적이며 광대한 분업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특히 영국의 자유무역을 통해 장려된다. 독일의 상품무역과 세계시장에서의 이해관계는 그래서 독일정치에서의 전선변경과 해군건설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독일 식민지 소유 자체도 영국과의 세계적 적대관계와 해양경쟁을 초래하지 않았다. 독일 식민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1의 해상력은 필요가 없었다. 그 특성상 어느 누구도 독일제국을 시기하지 않았고 영국은 더더욱 독일을 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식민지들을 지금 전쟁중에 영국과 일본이 빼앗아간 것은, 노획물의 주인이 바뀐 것은 전쟁의 일상적인 대응이고 작용에 불과하다. 이전에 평화시에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싶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벨기에를 삼키겠다는 계획따위는 감히 세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독일 제국주의의 탐욕이 광포하게 벨기에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동- 과 남서아프리카를, 빌헬름스란트와 칭타오를 놓고라면 결코 독일과 영국사이에 육지에서든 해양에서든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과 영국사이에는 심지어 조약 하나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는데, 이에 따라 두 세력은 아프리카에 있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을 편안하게 분배할 예정이었다.xiv


    독일측의 해상력 발달과 세계정치적인 목표는 세계에서 독일 제국주의의 새롭고 대단한 편력을 예고했다. 일류의 공격적 해군과 그 확장에 병행하여 이뤄진 상호보완적인 육군의 증강을 통해 일단 미래의 정치를 위한 도구가 마련되었고, 그 정치의 방향과 목표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가능성들의 문이 열렸다. 해군력 강화와 군무장 그 자체는 독일중공업에게 광대한 사업이 되었고, 동시에 카르텔자본과 은행자본에게도 드넓은 세계 속에서 장래의 작전욕구를 위한 무한한 전망이 펼쳐졌다. 이로써 모든 부르주아정당들이 제국주의의 깃발 아래로 선회하는 것은 보장되었다. 제국주의적 중공업의 핵심부대인 민족자유주의자들의 예를 중앙파가 따랐다. 그렇게 소리 높여 비난했던 세계정치적 해군법안을 1900년 받아들임으로써 중앙파는 결정적으로 정부의 당으로 전락했다. 그 전철을 해군법안의 낙오병, 즉 격심한 관세률 법안의 경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밟았다. 그리고 이 행렬을 완성시킨 것은 귀족층으로서, 운하건설xv과 ‘무서운 해군’에 대한 반항적인 반대자에서, 해양군국주의와 식민지 강탈 그리고 이와 연계된 관세정책의 열성적인 식객이자 기생충으로 전향했다. 이른바 호텐토텐선거라 불린 1907년의 제국의회선거xvi는, 하나의 깃발 아래 단합되어 제국주의적 열광으로 발작하는 부르주아적 독일 전체를, 뷜로프의 독일을, 즉 세계의 망치로서 등장할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독일을 드러냈다. 또한 이 선거는, 정신적인 타민족박해 분위기에 있어서 8월 4일 독일의 전주곡이었던 이 선거는 독일노동자계급에 대해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도전이자, 특별히 누구 하나가 아닌 모두를 향해 내뻗은 주먹이었다.


    iKarl Marx, Brief vom 1.September 1870 an den Braunschweiger Ausschluß der sozialdemokratischen Arbeiter-Partei in Lötzen und vor dem Gericht, Braunschweig, 1872, S.9


    iiI. Auer, Sedanfeier und Sozialdemokratie, 1895년 9월 4일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한 연설문, Berlin 1895, S.9


    iiiDer Lion de Belfort,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의 포위에 대항해 벨포르시민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03일 동안(1870년 11월 3일~ 1871년 2월1 3일) 시를 방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벨포르는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당시 프랑스정부가 강력하게 시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결국 프로이센군에 점령당하게 된다. 이 사자상은 점령된 당시인 1871년 12월 시의회에 의해 건립계획이 이뤄져 1880년 완성되었고, 이후 프랑스의 자유- 와 투쟁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ivGründerfieber, 1848년부터 시작되어 주식시장붕괴가 일어난 1873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특히 독일의 경제붐 시대, 창설시기의 열기. 당시 수많은 주식회사들이 마구 창설되었고 투기가 만연했다.


    vAbessinien, 북아프리카 홍해연안, 현재의 에티오피아와 에트루리아지역에 기원전 980년부터 기원후 1974년까지 존재했던 국가. 1931년까지는 제국, 그 이후부터 1974년까지는 입헌군주국으로서 에티오피아라 불리기도 했다. 1974년 쿠테타에 의해 제국이 폐지되고 에티오피아인민민주공화국으로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19세기의 열강들의 식민지분할정책에 대항해 살아남았었고 존재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였다.


    vi한반도에 대한 우세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은 1894년 8월 1일 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어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평화조약과 함께 일본이 유리하게 끝났다. 중국은 일본의 요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제국주의 세력들의 영향권 안에서 중국이 분할되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vii1899년 북중국에서 위화단(Ihotuan)의 반제국주의 민중봉기가 발생했고, 1900년 독일제독 알프레드 발더제 백작 휘하의 제국주의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1년 종결회의록에서 중국은 특히 약 14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내고 개입군대를 위한 방호기지들을 구축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viii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중국지역들에 대한 우세권을 놓고 벌어진 러일전쟁은 러시아제국주의의 패배로 끝났다.


    ix1898년 3월 28일 제국의회에서 가결된 첫번째 해군법안에 따르면 독일전투해군은 1904년까지 4억 8천 2백만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근본적으로 강화될 계획이었다. 이렇게 독일제국주의는 독일제국주의와 영국제국주의사이의 대립관계의 첨예화를 초래할 해양에서의 군비경쟁을 시작했다. 1900년 6월에 의결된 해군법은 1898년의 해군법안으로 정해졌던 전투해군을 다시 배가할 준비를 했다.


    x1902년 12월 14일 독일제국의회에서 의결되고 1906년에 발효된 관세율은 모든 수입 상품들, 특히 모든 농산물에 대해 매우 증가된 세율을 적용했다. 이를 통해 생계유지비가 갑작스럽게 상승했다.


    xi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1896년 1월 18일 제국창건 제 25주년을 기념하는 한 연회에서, 해외 거주 독일인과 무역함선들을 보호하고 식민지들을 제국에 단단히 연결해야 한다는 핑계로 더 이상의 군무장을 위한 증가된 자금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xiiZentrum, die deutsche Zentrumspartei(1870 -1933) . 독일의 카톨릭과 정치적 카톨릭주의를 대표한 정당중의 하나. 입장은 보수와 진부의 그 중간위치에 있었고 제국의회에서 ¼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하여 과반수를 획득해야 하는 경우 작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xiiiStenographische Berichte. Verhandlungen der Reichstags, X. Legislaturperiode, I. Session, 1898/1900, Vierter band, Berlin 1900, S. 3293–3295.


    xiv1914년 6월 15일, 바그다드철도 와 포르투갈의 식민제국의 분할과 관련, 독일과 영국의 이해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협상들이 종결되었다. 준비된 조약서는 전쟁의 발발로 인해 서명되지 않았다.


    xv1899년과 1901년 프로이센의 하원에서 기업권과 군사권의 지지를 업고 프로이센정부가 입안한 ,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연결운하 건설에 관한 법안이 엘베강 동쪽지역 귀족들의 저항으로 인해 부결되었다. 그 이유는 외국산 곡물이 값싸게 운송되어 곡물가격이 하락할 것을 농부들이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이 다시 저항하여 정부가 결정적인 중간부분인, 하노버와 엘베강사이의 연결운하를 포기한 후인 1905년 2월에야 이 법안은 받아들여졌다.


    xviHottentottenwahlen. 1907년 1월 25일의 제국의회 총선을 놓고 제국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의 지휘 하에 이뤄진 선거전은 모든 반대세력, 특히 사회민주당을 비방하는 캠페인과 아프리카의 헤레로스와 호텐토텐에 대항한 식민지전쟁 지속을 표방하는 국수주의적 선동을 그 특징으로 했다. 사회민주당은 최대의 유권자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선거구할당방식으로 인해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한 부르주아정당들의 결선투표동맹 때문에 1903년의 81석에 비해 훨씬 적은 43의 의석만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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