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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3장. 이탈리아 좌파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



    이탈리아 좌파

     

    이탈리아 좌파를 형성하게 만든 모든 정치적 역사적 세부사항을 모두 살펴보지 않고, 간단히 이탈리아 좌파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 1926년으로 되돌아가면, 그들은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다음과 같은 것에 반대하여 싸웠다:


    1.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의회주의(revolutionary parliamentarism)’ 발상

    2. 공동 전선(united front) 개념, 그리고 중도주의자와 명백히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코뮤니스트 당을 형성하는 문제와 관련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시

    3. 러시아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한 것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차츰 국제주의적 입장을 포기한 것

    4. 코뮤니스트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점점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

     

    그러나 당의 역할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 혁명의 퇴행의 모든 교훈들을 끌어낼 능력은 없음을 증명했다. 사실 이탈리아 좌파는,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테제와 입장(1920년 채택한)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1921년과 1922년 출판된 이탈리아 좌파 코뮤니스트의 텍스트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보르디가는 오래된 분리, 즉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된, 경제와 정치 투쟁 사이의 진부한 분리를 또 다시 채택했다. 현실의 정적인 사진들이 사회적 계급들을 부동의 경제적 실체들로 간주하는 것을 비난하는 세밀한 추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르디가는 노동자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는 부정확한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르디가는,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적 당은 그 정치적 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매우 단순하게, 의도하지 않게, 결국 그러한 계급의식과 당의 존재에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경제적 물질적 결정들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카우츠키가 개량과 혁명 사이의 분리를 만들었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보르디가는 코뮤니스트 혁명의 필요를 물질적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이상의 완벽함 속에 둠으로써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당 활동을 떠나서는 계급의식과 계급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의 존재가 노동자계급의 존재에 선행하게 만듦으로써, 이탈리아 좌파는 물구나무를 서서 손으로 걷는다. 만약 계급의 의식과 그 행동 의지가 계급 정당 안에서만 응축되고 구체화될 수 있다면, 또 만약 혁명적 조직들을 배출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고 의식을 향한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아니라면, 만약 이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라면, 그러면 당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과거와 현재의 보르디가주의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대답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혁명가들은 ‘노하우(knowhow)’를 알고 이해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완성된 채로 가져다주는 지식인들인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외부에 있는 인자들이다.


    바로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하고 틀린 발상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I)>의 텍스트 (코뮤니스트 강령, Programma Communista)에 나타나는데, 이는 오늘날 이탈리아 좌파를 가장 잘못 희화해서 제시한다. PCI에 따르면,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총사령관격인 당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는 당면주의(immediatism)를 넘어설 능력이 없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당이 있는데,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진정으로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이자, 변하지 않는 코뮤니스트 강령의 유일한 담지자라는 것이다. 혁명이 무엇보다 의식적인 혁명인 한(PCI는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의식적인 기관, 즉 그 자신들의 당이 이끌고, 지휘하고,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하나의 계급으로 스스로를 형성하도록 보증하는 것은 당이기에, 그 당이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하는 것은 논리적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러므로 공산당의 독재가 될 것이며, 정부의 당이 될 것이다. (참조: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의 『기권주의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의 테제’, 1920년)


    그러나 그렇게 충격적인 논증들을 앞에 놓고 제기돼야만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만약 노동자들이 생각 없는 양떼들이라면, 왜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명령보다 혁명가들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가? 어떻게 그들은 당이 제시하는 혁명적 지향을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인가? PCI의 답변을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을 따른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복종의 영향 때문이 아니다. 당이 결정하고, 계급이 ‘복종’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분명 불합리하다.” 그러나 PCI에 따르면, 그것은 대중들이 당의 신성한 지성의 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약 당이 효과적인 지도 기관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소비에트들을 강제해서 권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줄 결정적인 영향력을 당이 쟁취해 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면, 이는 당이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과 일반적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그리고 미래 발전들에 앞서서, 이 투쟁을 가능한 효과적으로 만들고 그 최종 목표를 향해 갈 수 나아가도록 만들게 될 목표들, 방법들, 그리고 조직화를 당이 가르쳐 줄 수 있고 또 가르쳐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투쟁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인 정치적 해답을 줄 수 있고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르 플로레테르(Le Proletaire)』, 269권, ‘당의 지도력 없이는 혁명적 행동도 없다 (No revolutionary action without party leadership)’, 1978년 6월)

     

    이 답변의 빛나는 명료성에 주목하라!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에 따른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당이 가장 명확할 수 있고 명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어떻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옛날에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좋은 말들은 맹목적으로, 또는 믿음에 대한 ‘그들의 자유의지’로 따랐는데, 그것은 성직자들이 신성한 의지의 화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래에 노동자들은 당의 말을 따를 것인데, 왜냐하면 당이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길을 체화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의 정치적 명료성이라는 바로 그 기적적인 미덕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당의 지시에 복종하며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경직되고 빈약하며 임기응변식의 시각인가! 보르디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안경 너머로 고정하면서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생생한 계급투쟁이다. 왜냐하면 당의 이론적 명료성이 노동자 투쟁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즉 그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 연마된 그 자신들의 정치적 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프롤레타리아트(혁명가들의 개입만큼이나 객관적 조건에 자극받은)의 더 커다란 역량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한 이론적 명료성은 쇠약해지고 경직되어 결국 죽어버릴 뿐이기 때문이다.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당이 제안하는 그 방향(direction)을 수용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문제는 단순한 강령의 옳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일상적인 경험 속으로 소화하지도, 그들의 세계적 역사적 이해관계가 표현된다고 보지도 않으면서, 당의 ‘명령(directives)’을 그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따르는데 만족한다면,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손발을 부르주아지의 영역에 묶인 채 내버려 두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이것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노동자들 측의 빈약한 정치적 신념이 계급의 적들에게 유리하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보증은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에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복종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힘에, 그들이 혁명적 활동의 목적과 수단을 이해하는 전반적인 역량에, 그리고 집단적 계급의식에 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에서 유래하는 그룹들이 갖는 당에 대한 이 모든 혼란들은, 정확히 코뮤니스트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으로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결여된 데에 기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하나의 생생하고 복잡하며 집단적인 과정 전체를 기술적 군사적 준비의 문제로 축소한다. 그들이 당에 의한 국가 권력의 쟁취와 동일시하는 코뮤니스트 혁명은 정부의 지배권을 인수할 역량이 있는 ‘전문’ 직업 혁명가들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볼셰비키의 당, 국가, 계급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혼란을 다시 채택함으로써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와 코뮤니스트 봉기를 단순히 동일시한다.

     

    “국가의 통제권을 정복한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일정한 준비와 전문화가 단순히 옛 체제내의 전통적인 기능들에 따른 직업을 기초로 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근본적인 실수다 (…) 우리는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준비의 종합을 요구하는 훨씬 더 복잡한 본질의 업무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준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명확한 역사적 책무와 정확하게 부응해야 하며, 오직 정치적 당(the political party)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요컨대, 정치적 당은 한 편으로 혁명적 과정과 그 필요들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급의 최종적 일반 목적에 대한 모든 특정한 기능들을 하는 하나의 엄격한 조직을 가진 유일한 유기체이다. (…) 이 때문에 계급의 지배는 당의 지배일 수밖에 없다.” (보르디가. 『당과 계급 행동(Party and Class Action)』, 1921년)

     

    혁명의 완수를 (과거의 혁명들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소수의 정치적 ‘전문가들’에게 위임하는 이러한 왜곡된 관점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간단히 두 가지를 인용하겠다. 첫 번째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반대하는 뜨거운 논쟁 중에 쓰인 트로츠키의 저작, 『우리의 정치적 임무(Our Political Tasks)』에서 인용한다.

     

    “레닌이 사회민주주의자 자코뱅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낸 바로 그 순간, 우랄지역의 그의 정치적 동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새로운 공식을 고안하고 있었다. 우랄지역의 맑스주의자가 말하기를, ‘1871년의 빠리꼬뮨이 실패한 것은,- 그것은 그 안의 다양한 경향들,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경향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쓸데없이 말참견을 하고 수많은 논쟁을 벌였으나 행동은 거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것은 다른 것들이 그에 종속되어야 되는 중요한 조직적 책무이다. 이러한 준비는 특히,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을 지지하는 정신 상태를 만들고, 그 조직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독재자들이 나타나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같지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당은 언제나 모든 자생주의와 기회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지식과 절대적인 의지로 단결해야 한다.(…)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함축해야 한다.”

     

    이 철학은 다음과 같은 세 테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독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것은 조직의 문제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재자’의 왕관을 쓴 강력한 조직을 ‘받아 들이’도록 준비시키는 것에 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이러한 독재의 출현을 의식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3. 이 강령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기회주의의 표현이다.

    어쨌든, 이 문서의 저자들은, 그 자신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독재처럼 보인다고 큰 소리로 말할 용기가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자치 행동을 통해 사회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지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 즉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조직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보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정치적 지배를 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을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 혁명의 모든 행정 인력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자율적인 활동(self-activity), 활동의 습관을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의 중대한 정치적 책무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자코뱅’과 정치적 대리주의의 대담무쌍한 대변자들에게는, 국가 권력을 접수할 수 있도록 계급을 준비시키는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임무는 권력 기구의 구성이라는 조직-전술적 임무에 의해 대체된다.


    첫 번째 접근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끊임없이 성장하는 계층을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 교육하고 재교육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의 상이한 단계들에 훈련된 간부를 선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선발은 일을 손쉽게 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완수 될 수 있을 뿐이다.”(트로츠키.『우리의 정치적 임무』, 1904년)


    그 뒤로 계속해서, 트로츠키는 ‘우랄지역’ 경향의 입장과 블랑키주의자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비교했다. 사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착취자"를 누르고 "절대 다수의" 착취당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착취당하는 다수에 반대하는 착취하는 소수”에 의해 이뤄진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구별 짓는 중대한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이 혁명에서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시각은 블랑키주의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을 “그 자체의 이론으로 완벽하게 단일체적이며 유일한 특출 난 구조물을 건설할 때가 오면” (『코뮤니스트강령(Programme Communists』,76권) 출현하는, 통찰력 있는 전문가들로 만들어진 강철더미로 보았다. 노동자 의식의 유일한 방어자로 행세하면서, 우리의 보르디가주의자 동지들은 과대 망상적이고 유아적인 정신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음모적이며 반란자적 관점을 가졌다. 당에 대한 그들의 우스운 묘사는 코뮤니스트 혁명에 대한 우스운 묘사와 나란히 진행된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이미 19세기 맑스주의자들이 적절히 비판했다. 다음은 블랑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순간에 그들의 역할이라고 한 것에 대한 엥겔스의 언급이다.

     

    “음모의 학파 안에서 키워지고, 그 안에 있는 엄격한 훈련으로 단결된 그들은, 유리한 순간이 오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단호하게 잘 조직된 사람들이 국가의 지배권을 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무자비한 에너지를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휩쓸어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서 지도자들의 작은 무리 주위에 결집시키는데 성공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특히, 새로운 혁명 정부의 손에 모든 권력을 가장 엄격하고 전제적으로 집중하는 것을 포함했다.” (엥겔스,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 서문)

     

    이 두 인용문은 코뮤니스트 혁명에서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생각과, 혁명 그 자체의 본질 사이에서 필수적이며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당의 역할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은 혁명을 그 중대한 집단적 힘으로부터 절단해버림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계급의식을 실체화할 권력을 당에게 준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완전히 꽃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의식의 현 상태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약점을 경직시킴을 의미한다. 의식과 결단을 요구하는 임무를 혁명적 소수에게 위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단하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도록 고무할 뿐이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혁명가들은 그들 스스로 혁명의 길에서 장해물로 바뀐다.


    코뮤니즘을 그에 선행하는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그 간극을 우리가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는 까닭은 이러한 덫을 피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계급의식과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려고 시도했던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실, 당의 역할에 대한 대리주의의 개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에서 기반 할 뿐만 아니라, 이행 국가와 당, 노동자계급 사이의 혼란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개념들은 계급의식에 대한 하나의 제한적인 이론으로부터, 잘못된 분석 하나로부터 논리적인 결과된다. 이탈리아 좌파에서 비롯된 대부분의 그룹들은, 레닌과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론적 오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프롤레타리아 이론과 실천 사이의 진정한 동일성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계급의식을 살아 움직이는 과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존재의 확인으로 보지 않았다. 당이 계급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계급의식을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의식을 지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성취해야 한다든가, 맑스주의가 ‘학문(science)’이 되어야 한다든가, 코뮤니스트 강령이 고정된 교리(doctrin)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상이다. 이럴 경우에 혁명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전달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해박한 정치 전문가로 보여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러한 혼란들은 또한 이탈리아 좌파 중에서 덜 경직화되고, 덜 획일화된 그룹들에서도 발견된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당(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Battaglia Comunista)>의 이론 기관지, 프로메테오(Prometeo)의 한 텍스트 속에는 계급의식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이 있다 :

     

    “다시 한 번 우리는 코뮤니스트 교리의 본질적인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에 따르면, ‘계급 본능’과 ‘계급의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첫 번째 것은 노동자 자신들의 자산인 노동자 투쟁에서 발생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적대로부터 비롯되며, 그러한 적대로부터 비롯되는 경제, 사회, 정치적 모순의 발전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들과 자본가들 사이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긴장에 의존한다. 두 번째의 것, 즉 의식은 계급 모순을 과학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발생하여, 이러한 모순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다. 그것은 계급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오는 사실들을 검토하고 연구함으로써 살아가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 의식은 그러므로 정확히 ‘그렇게 되도록 하는 조건이 없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도입되는’ 요소이다 (카우츠키, 논쟁적 형식으로 ICC가 인용함, 『인터내셔널 리뷰 (Revolution Internationale)』, 12권).

    ICC의 논쟁은 그들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 논의들은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ICC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학문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ICC가 카우츠키와 레닌에 대항하여 재인용)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며, 그들이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인가, 그렇지 않은가? 생산의 물질적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생산의 지적 수단도 가지고 있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당하는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되는 계급이라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달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들이었다’ (카우츠키와 레닌)라는 것도 사실이다.” PCInt(『계급과 의식 : 이론에서 정치적 개입까지(Class und Consciousness: from Theory to Political Intervention)』에서, 프로메테오, 1978년 전반기, 우리의 강조)


    이 인용문은 보르디가와 레닌의 분석에서 우리가 강조했던 오류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PCInt의 추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옳은 전제, 즉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의 시작부터, 그들은 거의 완전히 무익하고 경직된 분석을 만들어낸다. 첫 번째 판단 오류는 다음과 같다: 혁명을 이뤄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적들과 동일한 정도로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의식은 ‘계급 경험의 과학적 반영(scientific reflection of the experiences of the class)’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가 사상의 영역에 반영되는 것(the reflection in the domain of ideas)이며,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파괴를 통해 이 모순이 극복될 수 있게 하는 주체적 요소이다.” 그래서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의되는데, 이 이데올로기 또한 객관적 현실이 사상의 영역에 반영되는 것이다.(참고,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두 번째 판단 오류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한, 그들이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그들은 역시 계급의식, 다시 말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부르주아지의 성원으로서, 지적 생산 수단을 가진 혁명가들만이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코뮤니스트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학문적 역량을 (노동자들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불합리에 도달하게 된다.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와 경쟁하지만 같은 도구로 연마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중에 결국 PCInt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설명에 뒤얽혀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계급의식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반영이라면, 그것은 어떤 경제적 힘 위에 존재하는가? 노동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경제적 권력들도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만들낼 수 있는가? 혁명가들에 의해 연마된 이데올로기는 공중에 떠 있는가? 그것은 계급투쟁의 내부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부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노동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에도 지적, 물질적 생산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그러면 공산주의 혁명과 전체 사회의 변혁을 이뤄낼 수 있는가? 그들의 단순한 “계급 본능”이 충분하다면, 왜 이미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는가? 어떤 기적적인 수단에 의해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언제라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 어떤 것을 그 계급에게 간신히 도입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PCInt의 대답이 매우 불만족스럽고, 그들의 대답에 굶주려 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으로부터 나오는가, 아니면 ‘역사의 법칙을 어떻게 설명할 지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는가라는 잘못된 문제설정이 있다. 그것은 변증법적 방법으로, 다시 말해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문제설정이다. 그 해답은 사실, 그러한 양자택일의 바깥에 존재한다.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의 경험과 그것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성찰(scientific reflection on the experience)로서, 이 성찰을 수행할 수단을 가지며 자신들을 노동자계급과 정치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다.”(앞의 책)


    아니, 동지들, 우리가 제기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피해갈 수 있는 잘못된 문제설정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계급의식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들이다. “누가 계급의식을 보유하고 발전시키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는데 실패하면, 동지들은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모순 속에 머물게 된다. 당신들이 이러한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는 ‘변증법적노력들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계급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 문제에 대답하려 시도하며,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도움 없이도) 코뮤니스트 혁명을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해 해명하려 시도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인 이유는, 어떤 경제적 권력, 어떤 생산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행동과 사고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론적 진화는 단순히 그 실천의 “반영”(a reflection of its practice)으로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세계의 철학적 해석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변혁을 위한 능동적인 요소이자, 수단이다. 이론과 실천은 분리가 불가능하다. 오직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계급만이 사회주의 의식의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합시킬 수 있다. 혁명가들의 활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에서 특권적인 순간임이 확실하지만, 계급 활동의 여러 국면들 중의 하나(그렇지만 필수불가결한)를 구성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의 적에 대항해 싸우면서 적의 것과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힘은 사실상, 착취당하지만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그 조건에 있다. 즉, 사회에서 어떤 권력도 없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모든 착취와 계급지배의 형식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계급이라는 점이다. 계급의식은, 현실을 엄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실천적으로 변혁하는 것, 정확히 바로 그 사실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학문적인’ 이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위력은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계급의식과 조직화에 있다. 계급에서 이러한 위력을 빼앗는 것, 즉 그 이론과 계급투쟁 사이에 수많은 매개들을 위치시키는 것은, 계급에서 코뮤니스트 혁명을 달성할 역량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구세계를 파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드러누워서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지도, 어떤 경건한 소망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좌파가 혁명 이론의 풍부화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의 성취들을 보존하려 노력한 그 용기와 고집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여전히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ICC는 모든 것을 이해한 체 하지는 않는다.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ICC의 성찰 작업이 기반하는 관심사는 정확히 말해서, 볼셰비키를 함정에 빠뜨린 오래된 덫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과 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서 최대한의 교훈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경험에서 결과된, 우리가 보기에 중요한 교훈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직 통일되고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당, 어떤 소수도 이 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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