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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5장. 혁명가들의 역할
  • 조회 수: 2619, 2017-08-23 15:16:27(2017-08-23)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

    •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



    5장. 혁명가들의 역할

     

    “계급으로부터 유래하며, 계급의 의식화 과정의 표현으로서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조직하여 이러한 의식화 과정에서 능동적인 요소가 됨으로써만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를 확고하게 완수하기 위해, 혁명가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수행해야 한다:

    - 계급의 모든 투쟁들에 참여하는 것, 이때 조직의 구성원들은 결연하고 전투적인 투사로서 두드러진다

    - 이러한 투쟁들에 개입하면서 항상 계급의 전반적인 이해관계들과 운동의 최종목표들을 강조하는 것

    - 개입활동의 일부분으로 그리고 이것을 촉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론적 토론 및 심화에 기여하는 것. 이러한 일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전반적인 활동들을 계급의 과거 경험 전체와 그로부터 유래된 미래의 전망들 위에 구축할 수 있다.”(ICC의 강령) 지금까지 우리는 대부분 부정을 통해 진행해 왔다. 우리는 왜 계급의식이 이데올로기가 아닌지 살펴보았다. 왜 혁명가들은 권력을 취하지 않는지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제 혁명가들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며, 그들의 책무는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사실, 혁명가들의 임무는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운동에 명확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여 계급의식의 발전을 능동적으로 돕는 것이다.

    이 책무는, 겉보기에 그렇게 단순하지만, 굳건한 혁명적 의지와 명확함을 필요로 한다. 이제 이것을 그 모든 실제적인 함의들 안에서 검토해 보자.

     

    혁명가들의 역할은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획득하는데 지속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의 일관되고 집단적인 실체로서 혁명가들 조직 또한, 기회가 주어지면 즉석에서 이뤄지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조직이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필요에 부응해 출현한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로서 자생적인 계급투쟁의 결실로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건들의 밀물과 썰물에 의해 자신이 이리 저리 떠밀리도록 아무 생각 없이 내버려두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투쟁의 자생적인 흐름에 엄격하게 ‘복종’하는 것은 이러한 자생성의 진실로 혁명적인 방향을 변경해 버림으로써 끝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는, ‘매일매일’ 상황이 나타나는 그 대로, 그저 그 앞에 수동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에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자생성은 그 투쟁들이 의식적이고 자생적으로 최종 목표를 향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혼란스럽고 통제되지 않는 채 일어나는 일련의 산발적인 폭동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생적으로 더 큰 숙달과 심사숙고된 자기 절제(self-control)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미래가 없는 계층이나 계급들의 폭동들과는 달리, 혁명적 자생성은 확 타오르고 또 그 만큼 빨리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꽃은 없으나 연기는 많이 나며 끊임없이 천천히 타들어가다가, 현존하는 질서를 의식적인 방법으로 파괴하는 커다란 불이 되어 터져 나온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자본의 비참함에 대한 갑작스럽고 자생적이며 매우 예견 불가능한 반응은, 물질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투쟁을 일반화시킬 가능성, 그리고 오늘날 파업에서 미래의 파업을 준비하기 위해 교훈을 뽑아낼 가능성과 결합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성은, 부르주아지와 맞서는 잠재적 능력과, 각각 분리된 저항들을 더 큰 규모의 행동, 더 광범위한 정치적 틀로 모아내는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잠재력은 혁명가들의 개입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런 개입을 마치 사막에 뿌려진 씨앗처럼 죽은 문자가 되지 않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목표를 지향하는 그 역량을 발전시키는데 당이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비옥한 토양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정치적 지향을 듣고,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동지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을 명확한 강령의 기초 위에 “별도의 정치적인 당” 속에 조직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으로 투쟁의 주인이 되려는 자생적인 의지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조직적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레닌)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조직적 문제 자체가 정치적 문제이다.

    역사의 경험은 이러한 생각을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볼셰비키가 옛 사회민주주의의 조류 외부에서 조직하는 쓰디쓴 결단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혁명 과정의 진행에 총력을 다 한 반면에,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은 주검에 연결된 탯줄을 재빨리 끊어버리는 데 주저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혁명의 역사적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좌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록 그녀가 자신의 저작에서 1910년에 벌써 카우츠키의 정책들과 공개적으로 결별하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극을 조직적 수준에까지 가져가는 것에는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곳에서 단순한 “조직적 처방”을 보았을 뿐,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의 수준에’ 머물 필요를 방어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당에 관한 관점에 얽매여 있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이 되어버린 옛 조직들과는 다른 명백하게 정치적인 분파로 혁명가들을 조직하는 것이, 어떻게 계급의 자생적인 운동으로 하여금 기회주의자들을 제거하도록 돕고, 그 자생성의 생동하는 요소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그녀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당의 실제적인 어떤 개입도 없이, 자생적인 운동 자체가 기회주의자들을 극복할 필요성을 주장함으로써, 룩셈부르크는 본의 아니게 조직적 문제와 혁명가들의 존재를 바로 이러한 자생적인 운동의 경계선 밖으로 치워버렸다.

    명백히, 혁명가들의 존재는 객관적인 조건들에 의존하고, 조직들로 그리고 언젠가는 당으로 재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객관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우리는 혁명이 전체로서 노동자들 전체의 일임을, 그 자신들의 일임을 또한 보아왔다.

     

    “인간은, 마음대로 역사를 만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역사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은 당시 사회 진화의 성숙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 진화는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발전의 산물이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추동력과 그 유발요인이다. 행동 자체는 역사를 함께 결정하는 힘이다.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듯이 우리는 역사발전에서 한 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발전의 속도를 가속하거나 감속할 수는 있다. (…) 그러나 대중의 의식적인 의지라는 점화의 불꽃이 과거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물질적인 조건들로부터 분출하지 않으면 (승리는) 결코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1916년, 우리의 강조)

     

    그러므로 당은 “역사 발전에서 한 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으며, “거대한 대중”의 의식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계급의식은 언제나 폭넓은 다수 운동으로 나타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글을 썼던 1916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던 ‘사회민주주의’를 두고서 그것이 ‘계급의식’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 다수는 계속해서 이 조직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성숙과 정치의식의 표시였던가?

    혁명은 진정 노동자들 전체의 의식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아름답게 곧은 일직선처럼 뻗어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마치 한 사람이 걸어가듯 그렇게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다. 광대한 노동자 대중은 언제나 하나의 길만을 걷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의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혁명적 시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 절대 다수가 부르주아지의 책략에 반쯤 눈먼 상태에 놓인 그러한 시기들이 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에, 소수 혁명가들이 도입한 ‘가속화’가 결정적일 수 있다. 이러한 순간에는, 계급의식이 도달한 성숙도를 가늠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반응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확한 인자들의 입장이다. 이러한 인자들의 책무는 그들이 이해한 것을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널리 전달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치를 대중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코뮤니스트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밀물과 썰물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러한 투쟁 속에서 불꽃은 없이 연기만 피우며 타고 있는 혁명적 경향들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들은 그들 계급의 살아있는 산물이자,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성숙에서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일단 혁명가들이 구 정치 체제, 이전의 조직 형식과 정치적 실천들의 붕괴를 깨닫고 나면, 그들의 책임은 명확한 기반 위에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대한 전망을 실현시키기에 앞서 우선 나머지 노동자들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계급의식의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악순환으로 끝나고 만다. 도대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의식적인 인자들 자체가 낡은 조직 형식들의 죽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지향을 제안하길 주저한다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그러한 죽음과 과거 정치적 입장의 파산을 알게 되겠는가?

    혁명의 에너지들을 결집하여, 적의 진영으로 넘어간 옛 노동자당과는 독립적인 정치조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독일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조직적’ 문제가 아니었다. 조직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문제이다. 독일 좌파는 조직적으로 사회민주당과 결별하는 것을 망설임으로써 더 심오한 다른 것들을 배신했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학살자들, 즉 노동자들을 세계 대전의 대량학살로 내 몬 후 부르주아지의 “블러드하운드”(사냥개)가 된 샤이데만(Scheidemann), 에버트(Ebert), 노스케(Noske)와 그 일당 등과 같은 정말 역겨운 사회민주당 인간쓰레기들의 소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확고하게 비난하는 데 주저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18년 1월에 발발한 첫 번째 거대한 파업들은 사회민주당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뒤로 위축되었고 부르주아 합법성으로, 즉 그들의 죽음으로 잘못 인도되었다. 이러한 (더욱이 전 유럽에 걸쳐 일반화된) 책략들에 직면하여, 사회민주당과 아직 결별하지 못한 스파르타쿠스 단원들, 즉 좌익은 완전히 무기력한 채로 남아 있었다.

     

    “오후에는, 샤이데만과 에버트(SDP)가 행동 위원회(파업 중에 선출된)에, 수상이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중재를 통해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행동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방향을 잃었다. 요기세스(Jogisches, 스파르타쿠스 단원)가 강조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혁명적 에너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덫을 보았으나, 파업자들 사이에서 선출된 대표들만이 그들 자신들의 이름으로 적절히 협상할 수 있을 텐데라고 인정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P.부루에 (Broue), 『독일혁명(La Revolution en Allemagne)』, 1969년, 우리의 강조)

     

    파업의 패배에서 혁명가들은 무거운 책임을 느꼈고, 요기세스는 그 패배에서 교훈을 끌어내면서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의회주의적 백치주의로 인해, 모든 노동조합 파업을 위해 만들어진 도식을 적용하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특히 대중의 신뢰 부족 때문에 (…) 그 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협상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풀어놓는 대신에, 사회민주주의 대리인들의 영향 아래서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데에 스스로를 한정시켰다.”

    (스파르타키스트 리플렛, 『독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 관한 문서와 자료(Documents et Materiaux pour une histoire du mouvement ouvrier en Allemagne )』(1914-1945) Ⅱ/2권)

     

    그 후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은 그들의 망설임이 위험한 오류였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적인 정치적 당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코뮤니스트 당(Kommunist Party)> - KPD(스파르타쿠스당) - 이 결국 1918년 12월에 만들어진 이유이다. 슬프게도, 이 탄생은 때 늦었고, 1919년 1월에도 여전히, <코뮤니스트 당>은 결정적인 개입에 대한 이전과 마찬가지의 공포, 어떤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논쟁, 이전과 마찬가지의 방향성 부족과 명확한 정치적 전망 부족이 만연했다.

     

    다음은 한 코뮤니스트가 산증인으로서, 1919년 1월의 운동과 공산당의 반응을,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것이다가 그 다음엔 KPD(s)의 것이 된 신문에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대중들은 일찍부터, 9시부터 계속 안개와 추위 속에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하며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안개는 짙어지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했다. 정오가 되고, 추위에 배고픔이 더해졌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했다. 노동자들은 흥분으로 미쳐가고 있었고, 그들의 광기를 가라앉힐 말, 실천을 원했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안개는 더욱 더 짙어졌고, 그와 함께 어둠이 깔렸다. 슬프게도,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어떤 거대한 것을 원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여전히 토론했다. 바깥에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손에 무겁고 가려운 총을 들고 있었다. 안에서는 지도자들이 토론하고 있었다. 현청에는 대포가 조준되어 있고, 건물들의 모든 코너에는 수병들이 지키고 서 있으며, 밖으로 열린 모든 방에는 군인들, 선원들, 프롤레타리아로 가득했다. 안에는, 지도자들이 앉아서 토론했다. 그들은 밤 새 앉아서, 여명이 비추고 해가 떠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앉아서 토론했다. 그리고 그룹들은 다시 지게스알레(Siegesallee) 거리에 모였고, 지도자들은 여전히 앉아서 토론했다. 그들은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또 토론했다.”(붉은 깃발(Die Rote Fahne), 1920년 9월 5일)

     

    이 묘사는, 일화적이고 다소 희화화된 비유에도 불구하고, 1919년 1월의 상황을 충분히 잘 요약하고 있다. 1월 4일부터 계속 펼쳐진 운동에 개입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전복이라는 명백한 전망을 제공하는 대신, 코뮤니스트들은 오래 동안 망설이다가 그 자신들의 혼란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들의 혁명적 운동의 속도를 늦추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환상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침내 KPD(s)는 마지막 순간에, 그것도 그 운동에 의해 추동되어 권력 쟁취의 슬로건을 걸었다. 이것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에버트 정부의 탄핵도, 운동의 마지막 목표의 제시도 이전에 먼저 준비되거나 논의되지 못했었다. 이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결별이라는 전망에 직면했을 때 주저하는 반응을 보였다.

     

    “베를린 노동자의 다수는 각각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두 진영 사이에 막 벌어지려는 이러한 전쟁에 참가하거나, 심지어는 그 전쟁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공장에서 열린 모임과 집회에서 그들은 두 경향들 사이의 싸움, ‘형제간의 싸움’의 즉각적인 종결을 요구했고, 또한 모든 사회주의 경향들에서 보편적으로 요구되고 호소되는 ‘일치단결’을 지지했다.”(P. 부루에(Broue), 『독일혁명( La Revolution en Allemagne)』, 1969)

     

    독일에서는 그 당시 명확한 강령과 조직에 기반한 선전과 정치적 선동이 전적으로 부족했다. 그 뒤로 계속, KPD는 기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20년 12월 사회민주당의 ‘좌파’와 통합되어 VKPD(독일 통합 코뮤니스트당)를 결과시켰다. 이 모호한 태도는 가장 건강한 정치적 전위 인자들의 반응을 자극해서, 그 결과 이러한 인자들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이라는 하나의 독립적인 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슬프게도, 이 반응은 너무 늦게, 1920년 4월에야 나타났다. 세계 혁명은 이미 더욱 어려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고,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1927년에 결국 죽음을 맞았다. 혁명가들은 그들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충분히 일찍 조직화되지 못한 것이다.

     

    운동에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제시하는 것

     

    1918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미 1917년의 혁명 운동에서 교훈을 하나 얻었다 :

     

    “혁명의 동기가 진보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의 승리가 꿈이 아니려면, 혁명적 노동자들은 그들의 전투적인 에너지를 활용하고 안내할 수 있는 선도적 유기체들을 만들어야 한다.”(로자 룩셈부르크,『붉은 깃발(Die Rote Fahne)』, 1918년 1월 14일)

     

    이 교훈은, 안타깝게도 그 시기에는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 우리는 이 교훈을 통해서, 오늘날 혁명가들의 선결과제는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제안하는 것이고, 또 모든 예비적 선전 작업을 통해서 그것을 준비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독일 혁명가들이 스스로를 별도로 조직하는 것을 망설였던 것이 그들의 정치적 전망의 부족과 함께 했음을 보았다. 1919년 1월의 혁명가들은, 무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들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제안을 기다리는 동안, 비공개 회의에서 끊임없이 토론했지만, 신속하게 즉각적인 전망을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운동이 취해야 하는 전반적인 지향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그들은 운동의 최종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할 실천적인 수단들을 지속적으로 주장한다는 공산주의 전위의 본질적인 책임들 중 하나를 완수하지 못했다.

     

    “코뮤니스트들은 다른 노동자계급당과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만 구분된다.

    1. 여러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국내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지적해내고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2.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코뮤니스트 선언)

     

    코뮤니스트들에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혁명의 길로 안내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이해관계와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간단해 보이고, 사실 단순하지만, 실천에 옮기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어떤 혁명가들은 이 단순함을 불쾌한 속임수를 숨기는 것처럼 보인다며 불신한다. 그들의 눈에는 그러한 단순함은 손쉬운 탈출구가 될 뿐이며, 당의 고결한 책무에 대한 무지와 과소평가로 비춰질 뿐이다. 이 ‘단순함’에 좀 더 빛을 비추기 위해서, 그리고 당이 그 충만한 영광으로 둘러싸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당에 ‘지도자’ 또는 사령관의 역할을 주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취향에는 너무 수동적인 책무인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멋지고, 좀 더 생동적인 어떤 것을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향하도록(orientating)’하거나 ‘방향을 제시 한다’는 생각들과 거리가 먼,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정치적 해석에 빠져버린다.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서 명령하거나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지도하는 것(leading)’으로의 간단한 도약을 통해, 그들은 당의 활동들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는, 그들은 그런 종류의 것들을 전혀 하지 않는다.

    혁명가 자신들을 마치 프롤레타리아 ‘군대’가 수동적으로 복종하고 추종해야 하는 장군처럼 만들어 버리게 되는 그런 책무를 혁명가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과거 혁명들의 오랜 도식들을 코뮤니스트 혁명 속에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접근해서는 혁명가들은 어떤 실제적인 영향력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노동자들이 수동적으로 명령 (그들이 어떤 진영에 있든 간에)에 따르는 한, 이는 그들이 권력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히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우둔하고 복종적인 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력하고 단결된 계급에 의해, 신중하고 자신감 있는 계급에 의해 전복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일해야 하지, 자신들을 영웅으로서 그리고 뛰어난 연설가로서 숭배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의 역사적 기능은, 계급이 마치 군대인 것처럼 그리고 군대식으로 지휘하지만 그 최종 목표에 대해서도, 그 작전의 당면 목표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전술의 종합적인 운동에 대해서도 무지한 참모본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군사 행동과 비교될 만한 것이 아니다. 그 실현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함에 따라 그 자신들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당은 계급을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당은, 그 단어의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신임’- 즉,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위임받는 것- 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의 유일한 역사적 기능은, 계급 스스로가 그 책무와 그 혁명적 행동의 기반이 되는 목적과 수단을 의식하게 되도록 활동하는 것이다.”(‘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arty)’,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e)』, 38권, 1948년. 연구토론 회보 (Bulletin d'etude at de discussion) 6권에서 재판, 우리의 강조)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정치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계급이 역사적으로 맡게 될 혁명적 지향을 의식하게 되도록 활동함을 의미한다. 이 책무를 수행하면서, 혁명가들은 결코 그 자신들의 중요성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진정한 근본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승리를 유일하게 보장하는 것은 엄밀히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의식하고 스스로를 조직하는 정확히 바로 그 역량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의 생생한 예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은,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외부에서 가져온 정치적 지도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사관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자발적인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의 진행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스스로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의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했을 뿐임을 보여주었다. 혁명가들을 1917년의 ‘폭동분자들’이나 무자비한 독재자들로 묘사하는 부르주아 선전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볼셰비키들은 권력 쟁취의 책무를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절대로 넘겨받지 않았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서 행동하도록 노동자들로부터 위임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투표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다!”와 같이 부르주아의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신임을 얻지도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계급 속에서 물속의 물고기들처럼 살고 활동했다. 그들은 몇 개월, 아니 심지어 몇 년간 끈기 있게 설명하고 선전하고 선동하는 활동을 하고 투쟁의 마지막 목표를 끊임없이 주장 후에 이러한 일치단결을 벼려냈다. 이러한 일치단결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존재하는 요구와 구체적인 경향들에 대해 당이 더 일반적인 정치적 표현을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명확한 표현이 혁명의 과정을 결정했다.

    이 경우에, 혁명 이론은 실천적인 힘이 될 수 있었고, 노동자들 전체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이 제공하는 신비하고 마법 같은 어떤 조미료 덕분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명백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노동자들의 실제 필요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론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그러한 반향을 얻고,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자연스럽게 전투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무엇을 혼란스러워하는지를 명료하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선원 코린(Khorrin)은 그의 회고록에서, 스스로를 사회 혁명당 당원들(Social Revolutionaries)로 생각하는 뱃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볼셰비키 강령을 방어하려했는지 이야기한다. 이것은 어디서나 목격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 지 몰랐다.

    어떻게 이러한 허약한 기구와 미미하게 배포된 당 출판물로, 볼셰비키의 생각과 슬로건이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는가?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 계급과 시대의 예리한 요구에 상응하는 이러한 슬로건들은 그들 자신을 향한 수천의 채널들을 만들어낸다. 붉게 달아오른 혁명적 매체는 사상의 뛰어난 전도체이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큰 소리로 읽혔고, 세세한 부분까지 읽혔다. 가장 중요한 기사는 외워졌고, 인용되고, 다시 복사 되었으며, 가능한 곳에선 어디든 다시 인쇄되었다. (…) 볼셰비즘의 성공에 대한 일상의 설명은 대중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지는 ‘슬로건의 단순함’이란 표현으로 요약 설명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에서 그들의 요구뿐만 아니라, 그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경험에 의해 인도되었다. 볼셰비즘은 대중의 독립적 경험에 대한 귀족주의적 냉소에 절대 오염되지 않았다. 반대로, 볼셰비키들은 이러한 경험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고, 토대로 삼았다. 그것이 그들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지점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2권)

     

    그들 계급에 존재하는 필요를 명백하고 간단하게 표현하고, 투쟁들 경험에서 시작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열망을 참작하고, 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며 혁명적 경향들을 가속시킨다. 이런 일들이 바로, 혁명가들이 그들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신비스러운’ 수단들이다! 사실은 전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책무의 단순함은, 공산주의자는 계급의 의식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 외의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점으로써 쉽게 설명된다.

     

    어떻게 계급의식을 균질화할 것인가?

     

    단순함은 용이함이나 필연적인 것과는 동의어가 아니다. 의심할 바 없이, 혁명가들의 역할은 단순히 정의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복잡한 상황의 산물로 남아있고 그 구체화는 노력과 지속성을 요구한다. 먼저, 우리가 보았듯이, 혁명가들은 그들 스스로를 조직해야 한다. 그들은 계급의 경험에서 혁명적 이론을 계속 풍부하게 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과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야 하고, 최종 목표에 대한 시각을 견지하며, 그들의 활동을 장기적 전망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 혁명가들에게 그들의 계급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계급 당(the class party)’이라고 선언할 수도 없으며, 계급의식과 그 발전의 복잡성에 대한 전적으로 인위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도 없다. 그들의 계급처럼, 그리고 그들의 책무와 존재의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은 사회적 현실의 일부이다. 그들은 그들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역량의 균형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계급투쟁의 밀물과 썰물을 경험한다. 계급적 동지들의 패배의 시기에는, 그들은 그저 극소수로 남아서 패배의 교훈들을 끈질기게 뽑아내고, 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준비한다. 공산주의 조직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격리 보호되어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박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도 없다. 그것은 숨을 쉬고, 영분을 섭취하고, 행동하고, 다시 숨을 들이쉬어야 하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런 만큼 병과 죽음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또한 존재한다.

    비록 코뮤니스트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의식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완전무결하지는 않다. 우리는 볼셰비키들의 혼란이 세계 혁명의 이후 발전에서 어느 정도 해악적인 역할을 했는지, 그들이 이러한 퇴행에서 얼마나 적극적인 힘이 되었는지를 보았다. 이 말은 네덜란드와 독일 혁명가들의 혼란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계급의식의 발전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결실로 생각하는 것은 당의 신비스런 힘이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으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 혁명가들은 뒤로 물러 앉아 그들의 손가락을 까닥거림으로써, 또는 그들의 불변의 강령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머리 위를 강하게 때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당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당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거나, 당의 책무가 ‘사건들의 과정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실제 과정에서 모든 생명을 죽여 버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더 이상 성장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며 질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발전하는 살아있는 실체가 아니라, 무력하고 경직되어 죽어가는 노파일 뿐이다. 혁명적 이론은 더 이상 적극적이고 필수적인 효소가 아니라, 힘을 잃고 쓸모없는 미라일 뿐이다. 이렇게 계급의식 발전의 생동하고 실천적이며 집단적인 방식을 잘못 파악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혼란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다.

    사실, 혁명가들이 힘이나 자발주의 또는 단순한 민중 선동책을 통하여 ‘그들의’ 사상을 강제하려 노력할 때마다,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을 막다른 길로, 총구 앞으로 내모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KPD(독일코뮤니스트당)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1920년 제3인터내셔널의 공식적인 부분이 된 VKPD, 즉 <독일 통합 코뮤니스트당>이라는 기회주의 무리의 통탄할 만한 경험을 회상해 보자. 이 당의 뛰어난 대표인 레비(Levi)에게는, 어떤 희생을 통해서라도, 비록 이것이 그들의 환상을 지껄이는 것을 의미할 지라도, 노동자 대중의 ‘가슴과 마음’을 휘어잡는 것이 중요했던 한편, 같은 당의 자발주의자와 ‘폭동분자’ 측에게는 투쟁과 계급의식의 현실적인 상태는 참작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사실, 호르터(Gorter)와 KAPD가 ‘레비 박사와 VKPD의 길’이라는 문서에서 상당히 정확히 강조한 것처럼, 이러한 폭동주의(putschism)는 기회주의의 평범한 확장일 뿐이다. 그 창립부터 줄곧 VKPD는 이 길을 따랐다. 그것은, 이미1914년 민족 애국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버린 노동조합들에도 계속 활동했다. ‘폭넓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의회주의 전술을 채택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량 학살했던 <사회민주주의당>과의 공동 전선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결국 끝났다. 간단히 말해서, VKPD는 제3인터내셔널의 2차 대회에서부터 계속 발전된 그 혼란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채택했다. 독일에서는 오직 KAPD만이 그러한 실천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두 가지 경향들이 출현했다. 이것들은 그 지역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에서 인식될 수 있다. 하나의 경향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혁명화하고 명확히 하는 것을 추구하며, 이 목적을 위해서 새로운 원리들을 낡고 공인된 생각들과는 가능한 한 가장 날카롭게 대조되게 제시하려 노력한다. 다른 경향은 아직 주변에 서 있는 대중들을 실제 행동으로 이끌려고 시도하며, 그러므로 그들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들은 가능한 한 피하려 하는 시도 속에서, 차이점보다 동의의 지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대중들 사이에서 명확하고 날카로운 분리를 얻으려 노력하며, 두 번째는 단결을 얻으려 노력한다. 첫 번째 경향은 급진적인 경향으로 불릴 수 있으며, 두 번째는 기회주의적인 경향으로 불릴 수 있다. (…)

     

    코뮤니즘을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구분하는 새로운 원리들 - 소비에트 체제와 독재 - 을 강력하고 뚜렷하게 강조하기는커녕, 제 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는 제 2인터내셔널로부터 건네받은 투쟁 형식들 (노동조합, 의회주의)에 가능한 한 의지한다.” (판네쿡, ‘세계혁명의 전개와 공산주의의 전술('Die Entwicklung der Weltrevolution und die Taktik des Kommunismus'), 1920년, 『판네쿡과 호르터의 맑스주의』로 재판)

     

    자발주의(voluntarism)와 기회주의(opportunism)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하며, 각자 서로의 오류를 보완해 준다. 그 둘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대해 똑같은 몰이해를 드러낸다. 이러한 혼란들은 모두, 계급 속에서 장기적이고 끈기 있게 설명 작업을 해나간다는 전망과, 최종 목표와 역사적 필요를 지속적으로 주장한다는 전망을 포기한다. 자발주의자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수만의 의지와 힘을 통해서 행동으로 이끌어져야만 하며,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첨과 코뮤니스트 원칙들의 포기에 의해 이끌어져야만 한다.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이러한 두 과정들 중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당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남아있는 환상을 극복해야했다. 노동자계급이 자발주의와 기회주의를 전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제거하기 기다리기보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열망의 앞에 나아가서 그러한 열망들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촉진하며, 프롤레타리아가 그 진정한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도록 행동해야 했다. 레닌에게는, 이것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편견들에 아첨하는 문제도 아니었고, 노동자 대중의 의식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문제도 아니라, 권력 쟁취의 필요성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일반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문제였다.

     

    “사회 애국지사들의 일시적인 힘은 대중들의 편견과 환상에 의지하는 데 있는 반면, 볼셰비키의 기회주의 세력의 숨겨진 나약함은 그러한 편견과 환상에 적응하는데 있다. 레닌의 원칙의 강점은 그가 운동의 내부적 논리를 이해하고, 그의 정책들을 그것에 따라 조절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대중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고안하고 실현하도록 도왔다. 레닌이 혁명의 모든 문제들을 ‘꾸준히 설명하는 것’만으로 끌어내려 했을 때, 이는 대중들의 의식이, 역사적 과정에 의해 그들이 추동되어온 그 상황에 일치하게 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2권, 우리의 강조)

     

    혁명가들의 진정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과거 환상들을 설명하고 비판하는 오랜 작업을 수행해야 하며, 계급의식의 균질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 그들은 원칙과 최종 목표의 포기, 그리고 대리주의와 소수 행동이라는 두 가지 함정을 피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해서 레닌은, 1917년 4월, ‘4월 테제’(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제시한)를 추진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치단결을 강화한다는 거짓된 변명 아래 멘셰비키와 화해할 어떤 가능성도 거부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당의 소수파로 남았고 무정부주의자나 광인으로 불렸다. 그 후, 바로 그 끈기 있고 지치지 않는 ‘설명’으로써, 그는 마침내 전체 볼셰비키 당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레닌의 강점은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열망과, 상황의 현실적 필요에 조응하는 정치적 명확성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레닌은 한 순간도 그 시기 프롤레타리아트 다수가 품고 있던 환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레닌은 대중 사이에 ‘솔직한’ 민족 방어 심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지 않았다. 그들과 합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등 뒤에서 행동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는 미래의 반대와 비난들에 대한 대답으로 말하기를, ‘우리는 허풍쟁이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대중 의식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입장 때문에, 우리가 소수로 남아있어야만 한다면, 그래도 좋다! (…) 진정한 정부는 노동자들의 대표자들의 소비에트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에서 우리의 당은 소수파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전술의 잘못됨을 끈기 있게, 인내 하며,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수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노동자들을 이 속임수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 비판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는 대중들이 우리들의 말을 속임수로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허풍쟁이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오류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2권)

     

    이것들이 레닌이 봉기 전날 밤 한 말이다. 그는 무엇을 제안하고 있는가? 그는 당이 명령이나 소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강요할 필요성을 옹호하는가? 그는 당이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사건을 지시할 것을 요구하는가?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혁명 몇 달 전, 레닌은 최종 전망을 상기시키는 자로서 비판하고 설명하는 오랜 과정을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는 단지 혁명적 의식을 널리 확산시키자고, 그래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전위 속에서 더 명료화된 정치적 성과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게로 보편화시키자는 것을 제안한 것이다.

    1917년 2월 또는 심지어 7월까지도,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적으로 권력을 잡기에 아직 충분히 강하거나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필요성과 관련하여 있었던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가지는 명확했다. 즉, 권력 쟁취를 통제하고 지도하는 것은 소비에트이며, 그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다수가 혁명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은 명확했다.

     

    “7월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조차도 끝없는 투쟁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권력을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에게 내주었다. 수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압도적인 다수가 볼셰비키 쪽으로 끌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자들에게 연결된 2월의 탯줄을 끊어내지 못했다. (…)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동질적이지 않고, 충분히 단호하지도 않다면, 농민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 그러므로 인민의 의식의 상태- 혁명적 정책에서의 결정적인 요소인데 – 로 인해, 7월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트로츠키, 앞글)

     

    1917년 볼셰비키의 태도는 코민테른 그리고 VKPD와 그 ‘폭동주의자’측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후자는 심지어 KAPD의 일부마저도, 코뮤니스트 강령이 옮음을 보여주게 될 ‘모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나머지 노동자들이 같은 길을 걷도록 강제함으로써, 자신들이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VKPD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성원이라는 주도권에 용기를 얻어) 1921년 3월, ‘혁명의 과정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 시도는 안타까운 재앙이 되었다.

     

    “3월 24일 목요일, 코뮤니스트들은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총파업을 시도했다. 활동가들은 갑작스레 공장을 점거하고, 그들이 ‘파업파괴자’라 부르는 사람들 - 수많은 비코뮤니스트 노동자 대중 – 의 출입을 막았다. 다른 곳에서는, 실업 노동자 무리들이 일하러 가거나 일하는 자들을 방해했다. 베를린은 몇몇 대공장에서, 루르에서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리고 함부르크에서는 부두를 점거한 실업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총격전 후 추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체적 성과는 낮았는데, 비관적 추산으로는 이십만 명, 낙관적 추산으로는 오십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어떤 실패들은, 발전소에서 그의 동지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줄트(Sult)의 실패처럼, 특히 쓰디썼다.”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e), 『독일혁명(La Revolution en Allemangne)』, 1969년)

     

    볼셰비키들이 1917년 10월 이전에 행한 선전과 선동의 작업은 매우 다른 결과들을 가져왔다:

     

    "봉기가 어디 있는가? 어떤 봉기의 광경도 볼 수 없다. 사건들이 하나의 그림을 만들지 않는다. 미리 계산되고 준비된 일련의 작은 작전들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각각 분리된 채 남아있다. 사상과 목표의 일치가 그들을 하나로 결합시키지만, 그들은 투쟁 자체 속에서 융합하지는 않는다. 거대한 대중들의 행동이 없다. 군대와의 어떤 극적 충돌도 없다. 역사적 사실 위에서 자라난 상상을 통해서 봉기라는 발상과 연결 지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전혀 없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의 전반적인 성격을 계기로, 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마자릭(Masaryk)은 다음과 같이 썼다 : ‘10월 혁명은 (…) 전혀 인민 대중 운동이 아니었다. 그 혁명은 현장 위에서,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하는 지도자들의 행위였다.’ 사실상, 그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인민적인 대중 봉기였다. 노동자들은 서로 융화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다. 그럴 것 없이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하나의 단일한 전체였다. (…) 그러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대중들은 훨씬 이전에 그 사건들과 발맞춰 나가는 것 그 이상으로 전진해가고 있었다. 공장들과 병영들은 잠시도 지역의 본부들과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았고, 스몰니(Smolny) 지역 본부와도 마찬가지였다. 적위대(Red Guard, 무장된 노동자들)는 그들 뒤에 공장들의 지원이 있음을 느꼈다. 병영으로 돌아온 군인 소대는 새로운 교대자들이 벌써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 뒤에 대량의 예비병이 있는 혁명적 파견대만이 그러한 신뢰을 가지고 자신들의 일을 행할 수 있었다. (…) 거대한 화재를 일으키고, 약탈하고, 강을 피로 물들이는 바리케이트를 부르주아계급은 기대했었다. 실제로는, 침묵이 세상의 우레와 같은 소음보다 훨씬 더 무섭게 지배했다. 사회적 토대는 소리 없이 마치 회전 무대같이 인민 대중을 앞으로 나아가게하고, 과거의 지배자들을 망각 속으로 보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3권)

     

    1917년 10월의 그 투쟁은 우리에게, 1921년 독일에서 투쟁과 마찬가지로, 수백만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행동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두 경우에 모두, 혁명적 행동은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명백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921년 3월 행동에서는, 혁명가들이 노동자 대중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매우 작게 무장된 분대로 행동했던 반면, 러시아에서 권력 장악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한 분대의 행동은 수백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집단적인 의지가 통제하는 그 아래에서 일어났다. 비록 이러한 참여가 거창하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사건의 진행을 이끈 것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였다.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의지의 융합이 이 시기에 진정으로 존재했다. 그것은 수천의 채널을 통해, 소비에트, 지역 위원회, 혁명 위원회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적위대와 볼셰비키 사이에서 있었던 접촉과 무수한 교류를 통해 생명을 유지했다. 모든 곳에서, 혁명적 불길은 끊임없이 타올라서 사람들의 에너지에 불을 붙였고, 모든 곳에서의 주도권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제안하고 결정했다. 동시에, 이러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이 획득한 의식, 즉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함께 밀착된 그들의 의지는 그 광경 전체에 고요함과 결단성과 면밀함이라는 주목할 만한 겉모습을 부여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용두사미식 계획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래가 전혀 없는 수천의 필사적인 저항들의 무정부주의적이고 제어되지 않은 폭발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17년 10월의 혁명은 우리들에게, 코뮤니스트 혁명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한 가장 의식적이고 통제된 역사적 현상임을 보여주었다.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정치적 감독 아래에서, 혁명은 부르주아 반혁명의 맹목적이고 억제되지 않는 힘에 대항해 정밀함, 용기와 자기의식(self-awareness)으로써 격렬하게 맞설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렇게 단호하고 집단적인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자동적이지도 용이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건들의 충격도, 위기의 악화도, 생활수준의 하락도, 그 자신의 투쟁의 역사적 전망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을 뜨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위기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재촉하여 더 치열하고 대대적으로 투쟁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부패는 혁명의 객관적인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거름은 거름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은 절대로 비료만으로 분출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처한 상황과, 그 조건의 객관적 일부분인 새로운 생산관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힘, 이것들은 그렇게 많은 거름 속에서 반드시 꽃피워야 하는 많은 씨앗들이다. 이러한 생명의 약속은, 그것이 완전히 개화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사소한 실수로 절멸되어 버릴 지도 모를 만큼 깨지기 쉽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조직을 마련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명의 약속을 더 완벽하게 보호하고 발전시켜서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대규모의 동질적인 의식이 이러한 부패한 객관적 토양 위에서 발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와, 자본주의 세계를 같은 시기에 뒤흔든 세계적 혁명 운동들의 역사는 이것이 혁명가들의 기능임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러한 책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균질화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사상을 선전하고 뛰어난 이론적 저작들을 쓰는 것을 의미하는가? 혁명가들은 어떻게 이 계급 안에서 그들의 개입을 생각하게 되는가?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오직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맑스)

     

    혁명가들은 그들 계급의 일부로서, 이러한 세계 변혁에 동참한다. 그들은 지적인 공상가들과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과정으로서, 이러한 과정을 계급투쟁의 실천으로부터, 파업의 운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분적 투쟁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러한 실천에 전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파업에, 대중 집회에, 투쟁속의 그들 계급의 행동들에 개입한다. 혁명가들은 심사숙고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서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코뮤니스트 강령을 심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이론 속에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혁명가들이 혁명적 이론을 발전시킬 때, 그들은 계급투쟁에 그들의 구체적인 개입을 더 잘 규정하고 지향하기 위해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에 좀 더 잘 연결 짓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다. 계급의식의 발전에서 그들의 행동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수동적이지도, 엄격하게 이론적이지도 않다. 비록 코뮤니스트들이 계급투쟁의 기계적인 산물이 아니라, 행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조직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개입을 그들 계급의 일반적인 실천에서 특수한 경우의 하나로 본다.

    심지어, 역사적 발전의 특정 순간에, 혁명가들이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못하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미미한 반향만을 갖는 그러한 보편적인 사상을 확산시키는, 근본적으로 선전적인 책무를 수행할 때조차도, 혁명가들은 결코 엄격히 탁상공론적이거나 지적 수준에서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계급투쟁에 개입할 때, 그들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대신 ‘전유할 것으로’ 여겨지는 순수하게 추상적인 이론을 내놓지 않는다. 혁명가들은 투쟁 속에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요구들, 조직 형식들(파업 위원회, 대중 집회…)를 방어한다. 그들은 투쟁을 확산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한다. 그들의 임무는 그들 계급의 모든 부분적 투쟁들에 그들의 능력이 닿는 한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대해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하려는 모든 경향들을 자극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정치적 조직적 표현에, 모든 투쟁에, 모든 총회와 소비에트, 구역위원회에 참여할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노동자계급’ 언어의 외피를 쓰고 투쟁을 막다른 길로 몰아내 패배시키려는 자본의 개들(guard-dogs)의 책략을 엄정하게 공격할 것이다.

    혁명이 있기 전 시기에, 당은 모든 투쟁에서 출간물과 슬로건, 투쟁가들의 선동을 통해, 자본의 경제적 해체에 대한 단순한 경제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투쟁들을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를 위한 정치적 투쟁들로 전환하려 시도를 할 것이다. 이런 운동 속에서 당은 그와 같은 전환을 돕고 전투를 정치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는 모든 요구와 슬로건을 지원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자치적 파업 위원회들의 집중화된 조정(centralized co-ordination)과 통합, 그리고 그것들의 정치적 평의회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기방어를 부르주아지에 대해 적대적으로 조직된 군사적 공격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같은 식으로, 봉기의 기간에,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군사 조직에 참여하여, 무장 투쟁의 최종 목표와 계급 간 역량 균형에 대한 분석을 추진한다. 내전 동안, 당은 국제적인 혁명으로의 확장과, 군사적 경제적 문제를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혁명가들의 이러한 실천적인 개입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전적으로 동참한다. 왜냐하면 계급의식의 발전이란 투쟁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실천적인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은, 혁명 사상을 널리 확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혁명가로서, 계급의 일부로서, 이 이론이 실천적으로 적용되도록 방어하기 위해서 투쟁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한다. 투쟁의 정치적 성취들을 균질화시키는 것 또한, 지속적으로 운동의 최종 목표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그러한 성취들의 구체적인 함의들을 균질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부분적 행동도 거부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행동, 모든 전투가 완수되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 저러한 전투들을 거부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필요들을 포함한 전투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1921년, <코뮤니스트인터내셔널 3차 대회>에서 헴펠(Hempel)의 개입연설(KAPD), 우리의 강조)

     

    “코뮤니스트로서 우리의 임무는 노동자 대중 사이의 일상적인 투쟁들의 슬로건들을 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공장의 노동자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일상적인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도, 그들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으며, 절대로 자본주의의 몰락을 가능케 할 수도 없음을 항상 지적해야 한다. 우리 코뮤니스트들은 이러한 일상적 투쟁에 참여하고 그 투쟁의 선두에서 진군할 책무가 있다. 그러므로, 동지들, 우리는 이러한 일상적인 전투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투에서 우리는 대중의 선두에 서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에게 코뮤니즘의 길과 위대한 목표를 보여주어야 한다.”(위와 같은 대회에서 마이어-베르크만(Meyer-Bergman)의 개입연설(KAPD))

     

    혁명가들은 계급의식이 전진함을 보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모든 투쟁과 그 조직에 참여해야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의 전투의 추동력을 활용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체제를 전복시킬 역량을 가진 세력을 구성해가는 데 있어서 가능한 많은 단계들을 전진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개입의 목표는 이러한 단련 과정에 공헌하는 것이다. 모든 투쟁에서, 코뮤니스트들은 운동의 역사적이고 지리적 차원들을 보여줘야 하지만, 이것은 세계적인 코뮤니즘이라는 최종 목표를 설정하는 것만으로 만족해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더욱, 투쟁이 도달하는 지점에 무게를 실어주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제안들을 하고, 동시에 전체 계급의 일치단결(unity)의식(awareness)의 발전에 있어서 그 투쟁이 이룬 진정한 진보를 설명해야 한다. 각각의 투쟁에서 최대한 전진해 가는 것, 실현가능하지만 언제나 더욱 더 진보적인 목표를 제안함으로써 잠재적 역량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것, 이것이 혁명가들이 그들 계급의 공개 투쟁에 개입했을 때 목표로 삼는 것이다.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노동자계급 투쟁들은 혁명적 투쟁들을 좌우하는 것과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러시아 혁명은 단지 모든 위대한 혁명들의 근본적인 교훈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모든 혁명은 다음과 같은 지극히 중요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민첩하게 여세를 몰아, 강철 같은 손으로 모든 장애물을 넘어뜨리고, 언제나 더 진전된 목표를 설정하며 단호히 전진해 나가든가, 아니면 그들의 허약한 출발점보다 더 뒤로 내몰려서, 반혁명에 의해 분쇄당하든가 하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혁명에서, 멈추거나, 시기를 정하거나, 일단 도착한 최초의 목표에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RI 3차 대회에서 채택된 개입에 대한 보고서, 1978년 6월)


    그러므로 코뮤니스트의 개입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과 전투의 전진을 자극하는 것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의 어떤 계기라도 이용해서 그 전투가 질적으로 집단적으로 세계 혁명과 코뮤니즘으로 진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코뮤니스트 조직과 계급의식』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팸플릿 『COMMUNIST ORGANISATIONS & CLASS CONSCIOUSNESS』를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 출처>

    •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conc/5_role_or_revolutionaries

    •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conc/3_

    •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conc/5_orient

    •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cconc/5_homogen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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