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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1부. 일국사회주의
  • 조회 수: 3583, 2017-08-30 14:19:12(2017-08-30)
    •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Trotsky, Trotskyism, Trotskyists

       

       

      혁명적 실천에 커다란 공헌을 한 트로츠키는 결국 사회민주주의의 반혁명적 오류로 돌아온 운동에 그의 이름을 부여했다.

       

       

       

      1부.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기원

       

       

      일국사회주의

       

      트로츠키의 반대는 그가 힘을 키운 관료주의의 내부에 대한 진정한 것은 그의 많은 추종자들에 의해 용인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체면 세우기는 일국사회주의 (1924년 12월 스탈린에 의해 먼저 일관성 있게 진행된)에 대한 그의 반대와 그리고 그런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국제주의에 대한 예비된 포기에 대한 반대였다. 다른 어떤 단독적 이슈도 이것만큼이나 많은 신화와 신비화를 낳은 것은 없다.


    • 1917년 이전에는, 한 국가의 사회주의로의 움직임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문제 제기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맑스의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애매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제2 인터내셔널(1889년 설립)의 주된 관점은 각 부르주아 국가들 안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은 가능할 것이며, 그러한 각각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로 연맹을 맺어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비록 인터내셔널 좌파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거부했지만, 선진국에 한해서 그런 이행은 국가적 범위 내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까지 거부하진 않았다. 선진국들 안에서는 그런 이행을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의 절정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 연합 슬로건은) 일국사회주의의 승리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불균등한 정치적 경제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가능하다. 먼저 몇몇 혹은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가 이를 단독적으로 해낼 수 있다. 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자들을 몰수하고 고유의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하여 세계의 나머지 국가에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다."5)

       

      논쟁의 주요한 지점은 러시아 자체였고, 그리고 여기서 토론은 러시아의 낙후성이라는 구체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레닌과 볼셰비키 대다수는, 러시아 문제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혁명이 완수되어야 한다 할지라도, 부르주아 혁명이 여전히 과제임을 늦게 느꼈다. 반면, 트로츠키는 그의 영구혁명 이론에서 러시아 혁명이 서유럽에서 같은 시기에 일어났더라면, 러시아의 후진성은 극복되었을 것이며, 혁명이 사회주의 국면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 또한 1917년 4월 테제에서 독립적으로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그 이후로 계속 볼셰비키는 유보 조건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그리고 세계혁명을 전파하기 위해 나섰다. (「사회주의적 질서의 건설을 위해 전진하자」, 레닌, 1917년 11월 7일) 그것은 물론, 사회주의 국가가 세계혁명에 등을 돌리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자신의 지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외국으로 혁명을 전파하는 것은 같은 뜻으로 여겨졌다. NEP(신경제정책)의 러시아가 사실은 고립되어 있음이 명확해졌을 때, 당 지도자들의 일부가 제기한 유보 조건은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느꼈던 것은 자본가들의 군사적 공격으로 인해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홀로 살아남기는 아마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내전에의 개입은 바로 이것의 극단적 예였다. 1920년대 CPSU(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의 리더들, 그 중 특히 트로츠키는 통일전선을 구축한 제국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복권을 위해 러시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공포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일단 소비에트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에 느리게 항복하는 과정이지만), 러시아에서 고립된 사회주의 가능성 이론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로 나타났다.

       

      스탈린은 부하린과 같이 NEP(신경제정책)를 농민에 대한 장기적 양보로 보았던 다른 이들과 함께 당의 우파였다. 이 지점에서 그는 러시아 경제의 부르주아적 본질을 인정했다. 1924년「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스탈린은 러시아 내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런데 CPSU의 14회 대회에 제출한 중앙위원회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트로츠키의 관점과 유사했다.

       

      "어떤 이들은 그러나 우리의 정책이 자본주의적이지도 사회주의적이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기업들을 관리할 때 관료주의가 살아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사회주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아직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나 국가산업이 사회주의 생산의 유형이라는 사실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그러므로, 스미치카(smytchka, 노동자-소농 연맹)가 유지되는 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느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혁신에 관계하지 않았다. 사실 그 시기의 그의 저작들은 명백히 일국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후진국까지도.

       

      "유럽과 전 세계에서의 여러 해를 견디는 자본주의의 재생의 조건에서, 후진국에서의 사회주의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음을 스스로 발견할 것은 명백하다".6)

       

      사실 14차 당 대회에서 일국사회주의를 처음 반대한 것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레닌그라드 반대파였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스탈린을 이 시기에는 큰 위협으로 보지 않았던 트로츠키는 침묵했다. 연합 반대파의 레닌그라드 반대파와의 이후 트로츠키의 동맹은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가장 좋은 경로로써 러시아의 산업화에 대한 필요에 대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의 대화의 결과였다.


    • 그러므로 일국사회주의의 모든 논쟁에서 차이점이라고는 강조점의 차이뿐이었다. 스탈린이 부하린과 함께 NEP(신경제정책) 러시아 하에서라면 농민의 조랑말을 타고 사회주의로 천천히 가고 있다고 믿었던 반면, 트로츠키는 좀 더 역동적인 산업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립된 상황에서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고. 그는 이를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를 향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사회주의도 없다."7)

       

      그러므로 1926년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공격은 후에 덧붙여진 합리화가 견지한 국제주의에 대한 강고한 방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제적 맥락에서 볼 때, 트로츠키가 요구한 모든 것은 세계시장의 이점을 차지하기 위해 외국과의 무역을 다양화하는 것뿐이었고, 이는 경제자급자족 정책과 축적에 대한 스탈린의 믿음과는 대조적이다. 망명 중 러시아 반대파의 잔류파에 보내는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의 실업의 증가를 이용하자고 했고, 이를 통해 집합 노동 생산물의 교환 대가로 농업 장비와 기계류 구매를 위한 신용을 얻으라고 했다. 스탈린은 산업화의 시작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제무역을 무시했는데, 특히 상업조건이 1929년 이후 소련에 매우 불리하게 된 이후 그러했다.8)


    • 트로츠키는 한편, 모스크바가 상업(무역)적 위치를 강화하도록 부추겼다. 그는 수출 신용을 돕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실업을 경감시키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수백만 서구 실업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와 무역을 하라고 호소했다. 트로츠키의 국제주의는 그 후 전적으로 추상적이진 않았다. 자본주의 안정화에 대한 요구로써 19세기 자유무역주의자들에게 신용을 얻다니! 사실, 트로츠키는 지노비예프와 함께 연합 반대파에게 오직 암묵적인 승인으로 그의 (세계혁명에의 지원을 내포한) 영구혁명 생각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 사실, 1934년 이전 세계혁명에 대한 의식적 요구를 발표한 것은 스탈린 분파였는데, 특히 스탈린의 세 번째 시기라 불리는, 스탈린의 좌익화가 반대파의 강령을 훔친 이후였다. 트로츠키 추종자들의 하나로써,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는 이야기한다.

       

      "1928-9년부터 계속 정치국은 새롭게 방출된 반대파의 기본적인 생각(물론 노동자 계급 민주주의를 제외하고)에 의존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그것들을 실행했다. 부유한 농민에게 우리는 세금 부과를 제안했고 - 그들은 입안했다! 우린 NEP(신경제정책)의 개혁과 제한을 제안했고 - 그것은 현실적으로 폐지되었다! 우린 산업화를 제안했다 - 그것은 엄청난 규모로 이뤄졌다. 슈퍼 산업주의라 불리는, 우리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한 혁명가의 자서전」, 252쪽)"

       

      슈퍼 산업주의자가 되어 스탈린은 반대파의 강령보다 더 많은 것을 했다. 공산당 반대파들이 관료주의가 그들의 요구를 절대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가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비판지점의 근본을 파괴했다. 그들은 같은 관료주의에 그들의 근거를 두고 있어서 그 사회적 토대를 공격할 수 없었다. 우리가 볼 것처럼 트로츠키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계급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희미하게 알아챘지만 말이다.


    • <주>

      5) 레닌, R.V.Daniels의 「A Documentary History of Bolshevism」에서 인용

    • 6) 트로츠키,「Challenge of the Left Opposition」, 295쪽

    • 7) 「Challenge of the Left Opposition」, 295쪽

    • 8) 1930년에서 1935년 사이의 소비에트 수출의 1/3로의 감소와 수입의 1/4로의 감소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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