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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2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당
  • 조회 수: 2973, 2017-09-17 22:54:20(2017-09-05)
      •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Trotsky, Trotskyism, Trotskyists

         

         

        혁명적 실천에 커다란 공헌을 한 트로츠키는 결국 사회민주주의의 반혁명적 오류로 돌아온 운동에 그의 이름을 부여했다.

         

         

         

        2부. 트로츠키와 국제 코뮤니스트 좌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당 

    트로츠키가 자본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조그만 기여를 하는 동안, 국제 코뮤니스트 좌파는 처음으로 작고 분열된 그룹들로 축소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흩어지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1942-43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고무적 움직임들과 함께, 당으로 즉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당>으로 스스로 재구축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본적인 코민테른의 첫 두 대회의 혁명 원칙을 굳건히 견지하면서 존재해왔다. 파시스트와 반파시스트에 대해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방어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모두 그렇게 한 유일한 당이었다.21)

     

    그것은 스탈린주의 빨치산으로부터 많은 젊은 전투파를 얻었고 한동안 전후 이탈리아 투쟁에서 수천의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이 투쟁이 이탈리아만으로 제한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회복으로 인해 1952년 이후 이탈리아 외부에 새로운 당이 존재할 수 없었다.22)

     

    이 해 PCInt는 그 당시 10월 혁명의 혁명적 방법과 목표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강령을 만들었다.

     

    1977년 코뮤니스트 좌파그룹은 일련의 국제회의를 선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의 세계당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는데, 1983년부터 <코뮤니스트 노동자 조직(CWO)>이 참여함으로써 <혁명당 국제 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의 형성을 고무시켰다. 이 사무국의 형성과 함께, 당의 재건을 향한 과정의 새로운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경험의 교훈에 기초하여 시작되었다. 이 재구성의 작업과 반대로 트로츠키주의는, 그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서 (1945년부터 영국에선 적어도 20개) 좀 더 순수한 트로츠키주의가, 현기증이 날 비율로 차례로 계승하는 위기와 위기의 연속이었다. 트로츠키주의는 국가자본주의자들에게로만 열린 막다른 길이었다.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이전 소련과 제국주의 전쟁의 명백한 주요 지지자들이었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데 단지 제자리를 원을 그리며 달릴 뿐인 이들이었다.

     

    오늘날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분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트로츠키주의의 중요 구성요소를 구성하는 데 모순이 많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 무리 지음은 부르주아 정치기구의 좌익을 의미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대표하지 않고 새로운 지배자가 될 국가자본주의자들의 질서를 대표한다. 객관적으로 그들은 사회민주주의나 스탈린주의당의 좌익으로 기능하며, 이 당들이 혁명적인 정치적 입장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며, 무엇보다 중요하게 이 당들이 노동계급의 눈에 진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지도력이 부족할 뿐이라는 선언을 맹종함으로써, 그들은 혁명 정당의 부활을 위한 실제 조건을 깨닫는 데 실패한다. 이 조건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투쟁과 당 강령의 명확화에 대한 객관적 필요 속에 있다. 이러한 기초적인 조건들을 인지할 수 없었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취한 혁명적 교훈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역사적 궁지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의 근본적 혼란들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그 자체의 부르주아적 반혁명적 본질을 깨달아야 하므로 그들은 트로츠키주의자임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 <주>

      21) PCInt 초기에 대해 더 알기 위해서는 Workers Voice 시리즈의 no.73~74, no.78 참고. CWO 홈페이지에서 이전 발행 호 볼 수 있다. http://www.internazionalisti.it/BIPR/Inglese/cwo.htm
    • 22) 이때까지, PCInt는 20년간 정치활동을 떠나있던 보르디가(Bordiga)가 혁명 활동으로 돌아온 위기에서도 살아남았다.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그는 그의 과거 공적의 관점에서 혁명 정치에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줬지만, 동시에 그의 과거라는 짐도 함께 짊어졌다. 소련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민족 투쟁의 진보적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볼 수 없었기에, 그리고 노동조합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자본주의의 방파제일 뿐이라는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는 이 시기 당의 필요에 따라 흔들거리며,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 좌파에 의한 이론적 평가의 작업을 전복시키겠다고 위협했다. 보르디가는 PCInt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재등장은 많은 간부들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의 반대파로서 입장은 1952년이 되어서야 극복되었다.

    •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00-10-01/trotsky-and-the-internationalist-communist-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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