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문서
  •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 조회 수: 2810, 2017-12-20 13:41:39(2017-12-20)
  •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0302_코민테른.jpg

     

     맑스주의 혁명가들이 이름값대로 가장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쓰라린 종말까지 싸울 투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당이건 인터내셔널이건 간에 기회주의의 장악으로부터 조직을 구하고 퇴행으로 빠지는 것과 더 나쁘게는 배반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는 제1 인터내셔널에서의 맑스와 엥겔스의 방법이었다. 그것은 제2 인터내셔널에서의 “좌파”의 방법이었다.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단원이 독일 사민주의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이건 간에 옛 당과의 단절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당의 다수를 얻음으로써 기회주의 지도부를 전복하기를 원했다. 최악의 경우 당을 재탈환할 희망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 당 분리 때 그들과 함께 더 많은 혁명가가 함께할 것을 원했다. 그들은 당 안에 조그만 삶의 불꽃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싸웠고 가장 훌륭한 인자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것이 맑스주의 혁명가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더구나 역사적 경험은 “좌파”가 분리보다는 당이 배제할 때까지 저항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기를 들어 트로츠키는 축출당하기 전까지 볼셰비키당에 6년 넘는 투쟁의 세월을 보냈다.

     

    코민테른 내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 운동의 가장 끔찍한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역사 속에서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하게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 운동의 강력한 쇠퇴기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당과 코민테른을 바로 세우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스탈린주의의 철권으로부터 그를 구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이 투쟁은 기껏해야 최소화되고, 처음의 의견 불일치로 조직을 떠나거나 “상처뿐인 영광” 때문에 떠난 인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졌다. 이러한 태도는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며 때로는 생명을 희생한 노동자와 혁명가 세대의 어려운 투쟁에 대한 소부르주아의 경멸을 나타내고 있다.

     

    이탈리아 좌파는 이 방법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론적으로 풍부하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조직의 입장은 그것이 계급을 되돌릴 수 없게 배반했는가를 알게 한다. 조직의 반역이 분명하지 않고, 당이 적 진영에 무기와 짐을 건네주지 않는 한 진정한 혁명가의 역할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싸우고, 필사적으로 당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가 의기양양한 반혁명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코민테른에서 했던 것이다.

     

    이 정책은 오늘도 유용하다. 이는 오늘날 계급격돌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가의 투쟁을 위한 상황에서 더 쉽다. 세계혁명과 전쟁이 의제에 올려있지 않은 현 역사적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배반할 가능성은 적다. 자신의 조직이 퇴행한다고 생각한다면, 의식적이고 일관성 있는 혁명가는 같은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다른 말로 그를 바로 잡기 위해 조직 내에서 싸워야 한다. “자신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소부르주아 태도, 즉 개인주의적이고 논쟁주의적 경향이 정치적 종파주의의 경적으로 이끄는 공상적 혁명가의 경향을 채택하는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코민테른 좌파의 기나긴 투쟁

     

     코뮤니스트 운동의 위기는 1923년 동안 밝은 대낮에 나타났다. 몇 가지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기회주의 비중이 커지는 코민테른의 3차 대회 이후, 그리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파업이 확대되었지만, 크론슈타트에 대한 억압 이후이다. 동시에 [노동자 반대파]는 러시아 공산당 내에 만들어졌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위기의 근본 이유는 세계혁명의 지연에 있다”(트로츠키 「레닌 이후 코민테른」)고 선언하면서 보편적 감정을 요약했다. 세계혁명의 지연은 전체 노동자운동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0월 혁명의 위기는 NEP(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취한 국가자본주의의 조치에 의해서도 방향을 굴절시켰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유럽 혁명의 확장에 대한 희망을 연기시켰다. 혁명가 중에 레닌은 그 결과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1923년 러시아 혁명은 지구를 지배한 자본주의에 의해 경제적으로 목 졸리게 되었다. 이 수준에서 소련의 상황은 파국적이었고 지도부에 제기된 문제는 NEP가 산업에 대한 도움을 통해 전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가 수정되어야 하는 가였다.

     

     

    트로츠키 투쟁의 시작

     

     트로츠키는 다수가 현상유지를 원했던 소련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정치국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의 경제 상황의 문제와 소련공산당의 내부조직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당 통일을 깨뜨리는 것을 피하고자 의견 차이는 정치국 내에 한정되었다. 이는 1923년 가을 그의 책 “새로운 경로”에서만 공개되었다. (1923년 12월에 출간됨)

     

    다른 반대도 나타났다.

    - 좌익코뮤니스트와 반대파 코뮤니스트(Piatakov와 Preobrazhensky 뿐 아니라 Ossinski, Sapronov, Smirnov 등)를 포함한 46명의 인사들이 서명하고 정치국에 제출한 편지 (1923년 10월 15일)

    - Sapronov, Smirnov 등이 만든 [민주집중주의] 그룹의 창설

    - Shliapnikov와 함께하는 [노동자 반대파]의 재활성화

    - Miasnikov, Kuznezov 등의 [노동자 그룹]의 창설

     

    동시에 감옥에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공산당(PCI)의 모든 동지에게 보내는 선언」에서 특히 “통일전선” 문제에 대해 코민테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심각한 비판을 썼다. 그는 의견 불일치에 기반을 두어, 그의 입장을 방어하지 않고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로서의 기능을 면할 것을 요청했다. (이탈리아공산당의 좌파는 다수파였다.)

     

    트로츠키와 같이 보르디가의 태도는 더욱 효과적인 정치투쟁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심스러웠다. 2년 후 그는 코르쉬에게 보낸 편지(1926년 10월 26일)에서 그의 방법의 핵심을 설명했다.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는 실재주의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직 공세적으로 가지 않고 타격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혁명가가 참을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나긴 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미래 투쟁에 대한 교훈을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견디고, 조심스럽게 전진하면서 일하는지를 알고 있다.

     

     

    1925-26년의 위기

     

     코민테른 5차 대회 이후 시기는 다음으로 특징 지워졌다.

    - 공산당의 지속적 “볼셰비키화”와 코민테른 “우선회”, 스탈린과 그 심복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특히 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의 전위대였고 우선회로의 준비가 안 된 Trient와 Ruth Fisher였다.

    - 코민테른 지도부에게는 “적응”이 필요했던 자본주의의 “안정화”, 소련공산당 14차 당 대회(1925년 12월) 중앙위의 정치 활동 보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짧은 쉼 동안 우리가 한 번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기로 전환되었다.”

     

    당 대회에서의 논쟁 밖에서 노동자운동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레닌이 정치 활동을 포기하게 만든 이래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을 이끈 3두 체제(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1925년 말 와해된 것이었다.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 3두 체제의 존재는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 투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후 최초의 반대 운동이 침묵으로 줄어들자 스탈린은 더는 러시아 국가와 당 그리고 코민테른을 통제하는데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주위의 “옛 볼셰비키”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안정화”의 상황은 스탈린이 침로를 바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소련 내부 정책에 대한 스탈린에 반대하면서 지노비예프는 세계 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취했다. “최초의 어려움은 세계혁명의 연기에 있다. 10월 혁명 초기에 우리는 다른 나라의 노동자가 몇 달, 아니면 몇 년 안에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믿었다. 오늘날, 슬프게도 세계혁명의 지연은 확실한 사실이며 자본주의의 부분적인 안정화가 전시대에 나타나고 있고 이것은 새롭고, 더욱 크고 복잡한 곤란을 제기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의 지도부가 이러한 “안정화”를 인식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5차 대회의 전망과 정책이 올바르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고 정치적 선회를 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침묵했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공개적으로 투쟁을 지속함으로써 더욱 정치적 태도를 채택했다. 보르디가는 “L'Unita”에 쓴 글에서 러시아 문제와 “트로츠키 문제”를 제기했다.

     

    이탈리아공산당의 좌파는 당의 “볼셰비키화”에 반대하기 위해 “협상(Entente)위원회”를 만들었다.(1925년 3-4월) 보르디가는 그람시 지도부의 당으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즉각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6월에야 Damen, Fortichiaki, Repossi의 견해에 동조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진정한 분파가 아니라 조직의 수단에 불과했다. 결국 “좌파”는 당내 다수파를 점하면서도 당으로부터 축출되지 않기 위해 위원회를 해소했다.

     

    러시아에서는 1929년 봄 소련공산당 15차 당 대회 준비를 위해, 트로츠키의 최초의 반대파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크룹스카야가 합세한 [통일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새로운 반대파 결성에 스탈린의 억압이 강화되었다.

    - Serebriakov와 Preobrazhensky가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 [노동자 그룹]의 Miasnikov 같은 사람은 투옥되었고 Fichelev(국가 인쇄소 소장)은 투옥될 예정이었다.

    - 내전에서의 몇몇 투사는 군대에서 추방되었다. (항공학교장인 Grunstein과 우크라이나의 Okhotnikov)

    - 우랄지역,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를 포함한 전국에 걸쳐 GPU(국가정치총국, 게페우)는 지도자를 당에서 축출함으로써 [반대파]의 지역조직을 폐쇄했다.

    1927년 10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에서 축출되었다.

     

     

    1927년 이후 투쟁은 계속되다

     

     지노비예프와 그 지지자들의 항복은 러시아 좌파가 투쟁을 계속하지 못하게 했다. 모욕, 위협, 당으로부터의 추방은 노동계급의 진정한 투사를 막을 수 없었다.

     

    “당으로부터의 추방은 당원으로서의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지만, 우리가 공산당에 들어올 때 우리 모두가 수행해야 할 의무로부터 우리를 면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당으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우리는 그 강령과 전통, 그리고 그 기치에 충실할 것이다. 우리는 공산당과 노동계급에서의 그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Rokovsky의 이 말은 혁명 정치에서 훌륭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법이고 우리의 방법이다. 혁명가는 그들이 배제되지 않는 한 절대로 조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직을 올바르게 바로 잡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 이후 시기 동안 반대파의 성원은 그들이 당에 복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사실 그들은 그들의 배제가 잠정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28년 1월 국외추방이 시작되었다. 추방된 사람들은 지정된 주거지에서 생활할 수단이 보장되지 않아 매우 참혹했다. 모스크바에 남아있는 가족에 대한 모욕은 물론 아파트에 살 권리를 잃어버렸다. 트로츠키는 알마아타로 떠났고 48시간 후 라코브스키는 Astrakhan으로 떠났다. 반대파 조직이 망명 중에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연속되는 새로운 타격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성원과 그 대표인 라코브스키는 계속되는 투항과 소련에서의 트로츠키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투쟁을 계속했다.

     

    이 시기 동안 GPU(국가정치총국, 게페우)는 스탈린이 마침내 [반대파]의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교활하게 퍼트렸다. 이는 즉각 반대파를 균열시키기 시작했고 라덱은 자극제의 일부의 역할을 했다. 가장 약한 부분이 항복했다. 권력을 잡은 스탈린주의자들은 망설이는 자들을 알아낼 수 있었고 그들을 쓰러뜨리거나 포섭할 최선의 순간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혀, 1929년 8월 라코브스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당 중앙위가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을 석방하고 유배 중인 트로츠키를 불러 당에 복귀하도록 우리는 도울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분파적 투쟁방법을 포기하고 코뮤니스트적 견해를 방어할 모든 권리를 모든 성원에게 보장하는 당 규약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선언은 수용될 수 없었는데 첫째, 망명으로부터 트로츠키의 복귀를 요청했기 때문이었을 뿐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스탈린의 표리부동한 책임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목적을 달성했고 공황의 파장을 잠재웠다. 투항은 멈추었다.

     

    함정, 협박, 암살에도 불구하고 라코브스키와 반대파 중핵은 1934년까지 조직화된 투쟁을 지속했다. 그들 대부분은 진영 내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라코브스키가 투쟁을 포기했을 때 그것은 지노비예프와 그 추종자들이 했던 부끄러운 방식이 아니었다. 「Bilan(빌랑)」은 명확히 선언했다. “트로츠키 동지는 그것이 이념적이고 정치적 투항이 아님을 선언한 후 논평을 발표했다. ‘소련에서 공산당이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국제적인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여러 번 되풀이했다. 라코브스키의 경우는 이를 부정적이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우리는 라코브스키의 경우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연대를 보낸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행동이 라덱,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의 부끄러운 투항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국제적 투쟁

     

     트로츠키가 1929년 소련에서 추방된 이후 투쟁은 국제 좌익반대파 결성과 함께 국제적 수준에서 전개되었다. 코민테른 6차 대회(1929년 2~3월)에서 보르디가는 마지막으로 참석하여 선언한다. “좌익의 저항은 우익으로부터의 위험에 대항하여 국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하고 유용하며 필요한 반응은 책략, 음모와 복도에서의 소문 같은 형식으로 나타날 수 없고 나타나서도 안 된다.”

     

    1927년부터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의 망명지에서 계속되었다. 이탈리아를 떠날 수 없었던 활동가는 감옥에 있거나 보르디가처럼 섬에 갇혀 있었다. 좌파는 활동가 다수가 축출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코민테른 내에서 싸웠다. 그들의 기본목적은 퇴행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경로를 바로잡기 위해 이들 조직 내에 개입하는 것이었다. “코뮤니스트당은 우리가 기회주의와 투쟁해야 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당이 완전히 빛을 잃지 않는 한 조직화된 분파로서 재통합할 수 있도록 상황이 지도부를 강제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코뮤니스트로서 우리의 의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7~8월, 이탈리아 좌파)

     

    이러한 비전은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파 사이에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1928년 4월 이탈리아 좌파는 트로츠키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코민테른에 남을 수 없다고 결정한 코민테른 9차 확대총회(1928년 2월 9-25일)에서 분파를 형성했다. 이 순간부터 이탈리아 좌파는 더 는 코민테른 성원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고 분파를 형성할 의무가 있었다.

     

    분파형성 결의문에서 [분파]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설정했다.

    ①「코뮤니스트 선언」을 지지하고 「제2차 세계대회의 테제」를 받아드리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모든 인자의 결합

    ② 레온 트로츠키 의장 아래 6차 세계대회의 재소집

    ③ 6차 세계대회 의제로 소련공산당의 15차 대회 결의에 연대를 선언한 인자들의 축출을 다룬다.

     

    이처럼 [러시아 반대파]는 당으로의 재통합을 희망했지만, 이탈리아 좌파는 당과 코민테른 내에서의 분파로 생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쇄신이 분파로서의 활동에 달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혁명투쟁의 지속성을 보증하고 미래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주역이 되는 간부를 발전시키는 조직으로 [분파]를 이해했다. 우리와 반대로 [반대파]는 사건의 열쇠가 분파의 수준에 있지 않고 중앙파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간부의 형성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코민테른을 재통합하는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정책(이탈리아 좌파는 1928년 이후 포기한)은 올바른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퇴행을 막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파 없이 반대는 밖에서 있었고 그 고립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반대파 성원은 코뮤니스트 활동가 다수로부터 단절되었고 더는 그들의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노동자운동과 연결을 맺는 것이 가능한 [분파]의 방법은 그 후 이탈리아 좌파가 이론화한 방법이었다.

     

    반대로 Réveil Communiste(코뮤니스트 각성) 같은 그룹의 고립정책은 파국적이었고 생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노동자운동의 고전적 방법과 원칙을 입증했다. 즉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가볍게 분리하지 않는다. 정치적 차이점을 분명히 하고 건강한 요소들을 최대한 입증하기 위하여, 모든 가능성과 모든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이탈리아 좌파가 도출한 교훈

     

     노동자운동과 계급을 위한 교훈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조직의 역사”라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런 원칙 없이 조직으로부터 분리하고 같은 강령적 기준 위에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다. 조직의 강령과 실천을 비판에 종속시키지 않는 것은 퇴행을 선언하는 것이다. 코민테른 역사를 보면 혁명가의 진정한 태도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좌파의 이론적이고 정치적 작업이 없었다면 [코뮤니스트 좌파]에 속하는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나 다른 그룹(혁명당국제서기국<IBRP, 현재의 ICT>과 여러 국제공산당<PCI>)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반대파]와 이탈리아 좌파의 태도와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반대파]와 트로츠키의 개념에 완전히 같이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1930년대 초 「Bilan(빌랑)」이 내세운 생각에 동의한다.

     

    “분파의 역할은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건을 통해 간부를 교육하고 이러한 사건의 의미와 철저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분파의 작업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파 없이 레닌 자신도 책벌레로 남아 혁명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분파는 계급조직을 위해 계속해서 일하는 유일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8년부터 오늘날까지 트로츠키 동지는 이러한 분파건설의 작업을 완전히 소홀히 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의 진정한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Bilan」1933년 11월 “2 4/3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비슷하게, 우리는 이탈리아 좌파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퇴조시기 동안 정치조직의 상실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에 동의한다. (1930년대 전쟁을 향한 경로에서)

     

    “코민테른의 죽음은 그 기능의 소멸로부터 온다. 코민테른 죽음의 조종은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승리였고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그 기능을 소진시켰으며 중도주의 정책의 첫 번째 긍정적 결과로 나타났다.”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승리는 사건들이 혁명의 반대 방향인 세계전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은 인터내셔널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당은 죽지 않고 배반할 뿐이다.” (윗글)

     

    오늘날 이탈리아 좌파의 입장과 원칙에 동의하고 퇴행하는 조직을 비난하는 사람 모두는 이러한 역동성을 멈추게 하고 배반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비판하는데 이탈리아 좌파는 무원칙한 개인들로 비판한다. 그들은 역사의 경로를 인식하기를 원하지 않고 이미 존재했던 조직 바깥에 새로운 조직만을 건설하려 하고 그들이 떠난 조직을 파괴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새로운 당의 기초에 관한 한(여기서 이탈리아 좌파는 1932년 새로운 당의 건설을 제안한 트로츠키를 생각하고 있다), 정치적 행위를 위한 조직을 건설하는 대신 ‘위대한 행위’의 운동선수는 일하려는 순간을 잃지 않으려고 많은 소음을 낸다.··· 선동과 찰나적 성공은 운동경기이지 혁명적 작업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윗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출처> International Review, ICC, 1997. 4th Quarter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notice communistleft 40 2024-03-28
notice communistleft 48 2024-03-25
notice communistleft 60 2024-03-25
notice communistleft 117 2024-03-21
notice communistleft 127 2024-03-13
notice communistleft 83 2023-12-04
notice communistleft 839 2023-03-20
notice communistleft 5432 2021-04-19
157 communistleft 40765 2021-06-21
156 communistleft 2345 2021-06-17
155 communistleft 1970 2021-06-14
154 communistleft 1472 2021-06-12
153 communistleft 2481 2021-06-09
152 communistleft 1246 2021-05-07
151 communistleft 1414 2021-05-03
150 communistleft 1190 2021-04-28
149 communistleft 1015 2021-04-28
148 communistleft 1015 2021-04-26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