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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 조회 수: 2957, 2018-03-13 13:41:09(2018-03-13)
  • [서평]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읽고

     

    조성웅 |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 시인


     

    암투병 중인 아픈 엄마 곁에서 [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읽었다. 몇 번을 책장을 덮었다 다시 펴 끝까지 읽었다. 피해생존자 심촌 샘의 존엄함이 다시 회복되는 그 처절한 투쟁의 시간을 직시하려 했다.

     

    심촌 샘은 가부장-관료주의*의 고통 받는 피해자였고 그 고통을 다 견뎌내느라 온 몸에 병이 들었지만 난 그녀가 토해내는 언어에 귀 기울이고 그 언어 속에서 내 삶을 성찰했다. 우리가 진실로 강해질 수 있는 건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라고 난 믿는다. 심촌 샘의 고통스런 투쟁의 기록은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역사다.

     

    < “계급은 언제나 성별화되고 인종화된다”([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서문 중에서, 낸시 홈스트롬, 메이데이)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우선 해고를 합의해주고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하는 조직보신주의는 계급의 단결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억압의 문제를 은폐하고 이를 제도화한다. 여성억압을 제도화 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이유인 관료주의와 결합하여 부르주아 정치를 더욱 강화한다. 난 이를 가부장-관료주의라 부른다>
     
     

    "동정 받고 싶지 않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간선언인가? 존엄함인가? 평등을 이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인가?

    "내 삶의 봄을 기다리는" 심촌 샘의 투쟁을 통해 난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고 강해질 수 있는가를 배운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관료주의가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조직보위론과 계급환원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갖게 하고 성찰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낡은 운동과 단호하게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난 심촌 샘의 투쟁의 기록을 읽으면서 내가 참여했던 운동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조직보위론 - 완전하게 드러난 관료주의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민주노조운동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공감능력의 상실은 자본에 통합된 정신을 뜻한다. 그렇게 피해생존자 심촌 샘의 눈물과 절규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자리엔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명령의 질서, 권력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도자를 보위하기 위해 관료적 명령이 동원됐고 성폭력이 사용됐으며 침묵이 강요됐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본가들과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성폭력과 2차가해도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이 조직된 폭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민주노총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위계 질서로 구성되었으며 명령이 비판과 토론을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제도적 그리고 노동조합 규약으로 완성된 관료주의(부르주아 정치)가 완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공장을 토대로 내셔널센터에 집중된,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 권력은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역할이 아니라 "협상과 타협, 노자간의 화해"가 자신의 본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동조합 관료들은 100만 촛불에 총파업으로 화답하지 않음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돕고 박종태 열사 투쟁을 확대하기 위한 평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를 억압하고 통제 해 열사투쟁을 서둘러 마무리함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돕고 쌍용차 공장점거파업을 확대하기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지 않음으로써 이명박 정부를 도왔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민주노총이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일부분으로 포섭되었다는 것을,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노동조합 관료들, 개량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운동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는 가부장-관료주의의 내부를 환하게 들여다보게 했다. 몇 년전 울산 '사라져라 성폭력'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인 이황현아 동지는 "여성에 대한 태도를 갖지 않으면 좌파 운동은 망한다"고 내전을 비추는 별빛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미 망하고 있었다. 이미 좌파 운동은 여성에 대한 태도를 갖지 않았으므로 몰락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중도주의자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내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발생했고 가해자였던 조직의 리더를 보호하는 것이 조직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됐다. 성폭력 사건은 끊임없이 비정치적 사안으로 전락하고 투쟁현안 보다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 됐다. 광범위한 2차 가해, 조직적 폭력이 재생산됐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성폭력 사건은 은폐되거나 부인됐다. 그리고 은폐와 부인의 체계적인 이론화가 진행됐다. 사건의 끝엔 대부분의 피해자가 운동사회로부터 축출당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것이 운동 사회에 내에서 발생했던 모든 성폭력 사건의 기본 특징이었고 완연하게 드러났던 관료주의(조직보위론)였다. 발생한 사건에 대한 독립적인 사유는 실종되고 비판과 토론은 억압됐으며 조직의 방침에 대한 복종만이 재생산됐다. 코뮤니즘과 관료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렇게 성평등한 조직문화, 좀더 민주적이고 더욱 문화적인 혁명적 주체의 재구성을 위한 계획은 의식적으로 폐기됐던 것이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운동사회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가부장-관료주의의 내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민주노조운동엔 여성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도 여성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노조운동도, 대공장을 중심으로 설계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도 여성의 부재를 그 특징으로 했다** 여성들은 여성성을 버림으로써, 자신의 독자적인 요구를 삭제시킴으로써 "동지"로서의 이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여성억압과 차별, 성별권력에 대한 인식과 성찰 없이 우리는 계급적일 수도 민주적일 수도 혁명적일 수도 없다. 가부장주의는 관료주의가 기생하고 있는 숙주이고 부르주아 정치로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늪지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성원들은 조직 내 성별 분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여성활동가들은 약간의 고민 끝에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직접적인 성별분업과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었다. 성별분업에 대한 고민이 존재하지 않고 또는 뛰어난 조직이기 때문에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는 조직이 ‘성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성 중립’이란 몰성적인 것이다. 몰성적인 조직에서는 보편적인 성만이 작동한다. 그 보편적인 성이란 다름 아닌 남성일 것이다. ... 이처럼 성 중립적인 조직이라는 착각은 조직 안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조직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무지를 정당화했다. 그러는 사이 조직 내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토론은 민주적이고 계급적이며 올바른 토론으로 이해되고 정당화되었다([노해투사 콤플렉스] 중에서,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운동의 위계, 계급환원주의

     

    "어려운 시기에 정부와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조직에 치명적이니 참아 달라"

     

    2008년 12월 28일 전교조 위원장인 정진후가 심촌 샘을 만나 한 첫 마디였고 조직된 폭력이었다. 조직보위론과 함께 이 계급환원주의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다. 공황기 노동자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피해생존자 심촌 샘의 고통과 절규를 삭제시키려 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경향의 운동과 접촉하고 교류하면서 이 운동에 대한 태도를 취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으로 도달할 문제이지 낡은 선언만으론 완성될 수 없는 문제다.

     

    현시기 이 계급환원주의는 더 중요한 투쟁과 덜 중요한 투쟁, 삭제되어도 좋은 투쟁으로 운동의 위계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수평적 연대운동을 가로 막는다, 특히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등장하는 계급환원주의는 여성 억압과 차별, 폭력의 문제를 노동자계급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바로 그 지점에서, 차이 속에서 협력을 생산해야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풍부한 대화를 삭제시키면서 “계급의 문제”로 도망가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부장주의를 지속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관료주의가 주거하도록 길을 열어 놓는다. 특히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선이 중층화 되고 신분제도가 공고화 된, 계급이 재구성되고 있는 현 시기에 계급환원주의는 여성, 장애, 성소수자, 불안정 노동, 청소년운동의 배제를 낳고 결국 이 운동을 부르주아의 영향력 하에 가두도록 만든다. 오로지 조직노동자 운동에만 역량을 집중하도록 하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조직된 노동자들만의 이해,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계급환원주의는 조직활동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조직 내에서, 운동 사회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무관심으로 드러나고 조직적 토론은 배치되지 않는다. 또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직적 역량을 투여하지 않음으로써 조용히 문제가 삭제되기를 바라는 분위기를 더욱 굳어지게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고 투쟁하는 시기는 쌍용차공장점거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시기였다. 민주노총 대의기구를 통해 피해 생존자의 외침을 삭제 시키려했던 자들은 총파업을 의도적으로 조직하지 않음으로써 쌍용차 공장점거파업을 고립시키고 양보안으로 자본가계급에게 협력하려고 한 자들이었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활동과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을 위한 정치조직들 간의 공동의 정치활동은 위계를 갖지 않는 하나의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는 분리되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자하자면 자신의 일이 아니었던 만큼 정치조직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난 2008년 연말 현대미포조선 굴뚝 투쟁에 연대하러 가면서 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와 나눴던 대화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성폭력 대책위에 발목 잡히지 않았으면 한다. 가능한 빠르게 잘 마무리 하고 복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난 "노력하고 있다"라고 짧게 답했다. 그를 이미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난 그의 충고(?)에 적극적으로 논쟁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난 당시<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위원>이었고 현대미포 굴뚝투쟁 지역대책위 집행위원이었다. 그는 성폭력 대책위 활동보다 공황기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게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활동은 현대 미포 굴뚝 투쟁을 조직하는데 있어 전혀 발목을 잡지 않았다.

     

    한 동지의 굳어진 인식과는 반대로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나의 노력은 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키우도록 했다 집단적으로 진행된 여성주의에 대한 학습은 내 삶과 운동의 가부장주의를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공감능력과 평등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이 성장할수록 그 모든 조직된 폭력에 타협하거나 위축되지 않은 힘 또한 성장시켰다. 난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위해 철탑고공농성을 했던 최병승 동지와 함께 흔들림 없이 현대중공업의 조직된 폭력에 맞서 공세적인 물품공수 투쟁을 조직했다.

     

    또한 노해투사 조직노선 평가 작업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휘감고 있었던 관료주의에 대해 직시하도록 했으며 혁명적 전망을 새롭고도 더욱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강령투쟁의 연장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노해투사 성폭력 대책위 활동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강령투쟁과 공황기 노동자 투쟁이 계급투쟁의 평면 위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들이야말로 우리를 더 계급적이고 민주적이며 혁명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주의, 우리 안의 평등을 이뤄야 할 강령의 문제

     

    몇 년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던,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었던 한 여성 동지는 내게 “여성주의자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는 될 수 없어도 모든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여성주의에 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국가와 자본의 가장 매혹적인 파트너는 여성이었다.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창의성, 여성성, 그녀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자본의 요구에 여성주의는 능동적으로 편입했다. 여성주의는 “성주류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국가의 자문기구가 되었다. 영페미니스트들의 정직한 문제제기와 그 성과를 인정하더라도 이 땅의 여성문제는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주어진 것, 주류화되고 제도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류화의 핵심적인 문제는 혁명적 비판 정신이 사라지고 부르주아 개혁에 안주하거나 포섭되었다는데 있다.

     

    ***< [2009년 ‘사라져라 성폭력’ 울산 강좌 중에서, 이황현아] 난 “여성주의는 기층 여성 노동자들과 결합하지 않았다. 여성노동자들이 주체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주류화되었다. 여성의 역사를 이해하고 나의 위치를 성찰하는 것. 여성노동자들이 주체화되어야 한다”는 이황현아 동지의 견해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와 노동운동이 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내 정치생활의 전망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전투적 여성주의 운동이 ‘성주류화 전략’을 채택하고 국가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것, 혁명적 비판 정신이 사라지고 부르주아 개혁에 안주하거나 포섭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를 폐기해야 하는가? 그렇게 전투적 여성주의자들을 탓하며 여성주의는 중간계층의 운동, 부문운동이라고 치부해야 하는가? 여성주의도 ‘관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곳에 코뮤니스트 자신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성주의 그 자체를 거부하는 건 여성억압과 차별, 폭력에 맞서 성평등한 조직문화, 평등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한 혁명적 주체의 재구성을 위한 코뮤니스트 자신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 관심이 없다는 것, 계획이 없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민주노총 - 각 연맹 - 대공장 집행부로 이어지는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술과 성 접대, 성매매 문화와 함께 강화되어 왔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가족임금제는 여성노동자들의 우선 해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고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립시켰으며 조합주의 관료주의를 강화해왔다. 관료주의가 강화될수록 노동자 운동 내부엔 위계가 체계적으로 도입되었고 특히 여성은 핵심적인 활동영역에서 배제되거나 허드렛일이나 조직 내 돌봄 노동에 배치됐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관료주의가 가부장제를 기초로 성장하고 가부장제를 수단으로 하여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가부장제를 넘어서지 못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혁명적 공동체를 구성할 수가 없다. 또한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여성주의 운동은 여성 해방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정치생활에 위계가 허용되지 않도록, 차이가 제도화됨으로써 권력화 되지 않도록, 비판과 토론이 배제되거나 억압되지 않도록,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코뮤니스트의 여성주의가 필요하다. 여성주의자들이 모두 코뮤니스트가 될 수 없어도 모든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노동운동 내부에 여성주의가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난 여성가족부 앞에서 농성투쟁을 하던 박사랑 동지의 곁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불파투쟁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가부 투쟁에 함께 할 여력이 없다’는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사랑 동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노동조합은 공식화하지 않았지만 박사랑 동지의 투쟁을 불법파견투쟁의 부담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논리는 ‘불법 파견 투쟁이 마무리 되어야 성폭력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전술적 판단일 수는 있지만 더 큰 투쟁, 더 중요한 투쟁을 상정하고 지금 투쟁하고 있는 여성조합원의 독자적 요구를 유보하라고 하는 건 조합주의를 강화할 뿐이다.

     

    왜 불법 파견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고 투쟁했던 박사랑 동지가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불법 파견 투쟁에 대한 현대자본의 탄압과 성폭력, 이 이중의 고통에 힘겨워 하는 박사랑 동지의 이야기에 왜 귀 기울일 수 없는가? 왜 박사랑 동지의 투쟁에 결합하는 것이 불법 파견 투쟁을 계급적으로 강화한다는 것을 사유조차 못하는가? 전투적 비정규직 운동에서조차 여성노동자의 독자적인 요구는 억압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처럼 힘의 집중은 배제가 아니라 평등을 이뤘을 때 가능한 문제다.

     

    더 크고 중요한 투쟁을 위해 지금 투쟁하고 있는 여성조합원의 독자적인 요구를 억압하고 삭제시키려는 굳어진 습성과 행위는 그토록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신분상승운동으로 전락시키고 조합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의 의해 구획된 성별권력 관계, 위계관계, 제도화된 차별을 능동적으로 허용하는 일이며 그 이데올로기에 순종하게 함으로써 수평적 연대운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사랑 동지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조직적 토론을 진행하고 불법파견 철폐투쟁과 함께 이 투쟁을 노동조합의 중요한 투쟁으로 배치하면 배치할수록 자본가계급이 설치한 제도화된 차별과 위계질서의 장벽을 넘어 평등에 이르게 될 것이고 우리 운동이 평등하면 평등할수록 불법파견 철폐투쟁은 신분상승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투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주의가 노동자운동 밖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에 자리 잡고, 우리 정치활동의 중심에 굳건하게 세워질 수 있다면 처음부터 운동의 위계질서와 대면할 수밖에 없고 조합주의, 관료주의와의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코뮤니스트가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정치(관료주의)에 맞선 가장 단호한 계급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배제 없는 수평적 연대운동, 혁명적 정치 운동의 복원을 위해 코뮤니스트는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위계는 없다. 모든 투쟁은 평등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 사이의 차별과 위계, 이로부터 발생하는 억압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 없이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가? 여성 억압을 외면하고서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제 여성주의를 성폭력 사건 해결 지침쯤으로,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우리 운동을 혁명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강령의 문제로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하늘을 덮다 -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을 읽고 내가 생각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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