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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 1장 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 <상부구조의 전복>
  • 조회 수: 4713, 2018-10-12 14:15:11(2018-10-12)
  •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1장

    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

     

     

    상부구조의 전복

     

    경제가 요동칠 때 그것에 의존하는 총체적 상부구조는 위기와 해체에 들어간다. 해체의 표면화는 체제 쇠퇴의 특징적 요소가 된다.

     

    한 체제의 결과로 시작하여 그것은 하강 과정의 가속 요인이 된다. 후자의 경우를 본 대부분의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그로부터 상부구조 요인이 문명 종말의 주요 요인이라고 추론한다.

     

    상부구조 요인에 대한 검토에서, 노예제의 쇠퇴와 봉건제 쇠퇴 모두에서 발견되는 네 가지 현상을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이들이 역사적인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한 체제의 쇠퇴의 명백한 증상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 현상은 다음과 같다:

     

    1) 낡은 사회를 지배한 이념적 형식의 해체

     

    2) 지배계급 분파 사이 전쟁의 발전

     

    3) 계급투쟁의 격화와 발전

     

    4) 국가기구의 강화

     

    1) 이념형식의 해체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필수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 그 이념 형식의 풍부화와 발전의 여지는 사회 전체가 지배계급의 규칙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지배계급의 실질적인 설득 능력에 달려있다. 한 사회는 그것이 기반을 둔 경제체제가 그 사회의 필요에 조응하는 한에 있어서만 주어진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의 경제체제가 번영과 안전을 얼마나 잘 보장하는지에 따라 그만큼, 그것으로 사는 인간은 그 체제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더 잘 제휴하게 될 것이다. 확장의 조건에서 경제 관계에 내재하는 불의는 ‘필요악’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모두가 체제로부터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신념은 민주적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특히 가장 혜택받은 지배계급 내에서 허용한다. (공화국 체제는 로마 경제의 가장 번영한 시기에 조응하고, 봉건제 확장의 시기에는 왕은 동등한 영주 중에 으뜸으로 선출된 영주의 하나에 불과했다)

     

    법 자체는 비교적 발전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 체제가 대부분 문제를 순리대로 되도록 허용함으로써 해결하려는 사회의 객관적 요구에 충분하게 조응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발전하는 경향을 띠고 철학은 합리주의, 인류에 대한 낙관주의와 신뢰 쪽으로 기울어진다. 모든 착취 사회에 속하는 추한 면이 번영의 상태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숨겨지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은폐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할 필요에 의해 방해를 덜 받는다. 예술은 이러한 낙관주의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고 보통 경제 발전 시기에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다. (예를 들어 로마 예술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시기는 제국의 성장 주요시기에 조응하고, 마찬가지로 11세기와 12세기의 번영기에 봉건제는 엄청난 예술적, 지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생산 관계가 사회의 삶에 대해 속박으로 변하면, 기존질서에 조응하는 모든 이념 형식은 그 뿌리를 잃고 내용이 비게 되며 공공연하게 현실과 모순되게 된다. 로마제국의 쇠퇴에 있어서 정치 권력의 이데올로기는 점점 초자연적이고 독재적 형식을 취했다. 같은 방식으로 봉건적 쇠퇴는 왕국의 성스러운 기원과 귀족의 특권이라는 관념의 강화를 수반했고, 이는 부르주아지가 도입한 상업적 관계에 의해 심하게 난타당했다.

     

    철학과 종교는 점증하는 비관주의를 나타내고, 인류에 대한 신뢰는 숙명론과 몽매주의에 길을 내어주게 된다. (후기 로마제국에서 스토아주의 그리고 그에 뒤이은 신플라톤주의의 발달을 보기로 들 수 있는데, 스토아주의는 고통을 통한 인간의 고양을 말했고,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파악하는 능력을 부정했다.)

     

    중세의 종말은 같은 현상을 보였다.

     

    “침체의 시기에 온갖 형태의 신비주의가 부상했다. ‘죽음의 예술에 대한 논문’ 그리고 특히 ‘예수의 모방’과 같은 지적인 형식이 있었고, 통제되지 않은 일부 탁발수도사들의 영향으로 격화된 대중적 경건이라는 대단한 표현을 가진 정서적 형식이 있었다. “채찍질하는 고행자”는 인간의 감수성을 찌르고 기독교인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마을 광장에서 몸을 채찍질하며 마을을 떠돌아다녔다. 이러한 표출은 구세주를 상징하는 피의 샘과 같이 의심스러운 취향의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매우 빨리 그 운동은 히스테리를 향해 비틀거렸고, 성직의 교주권은 말썽분자들의 설교로 인해 방랑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말썽분자에 대항해 개입을 해야만 했다. 소름 끼치는 예술이 발전했으며 사려 깊은 사람들이 가장 선호한 성서는 묵시록이었다.”(Favier, 앞글, 152쪽)

     

    이 모든 것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관계와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관념 사이의 틈이 커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 시기에 실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데올로기는 한편으로는 법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알리는 이데올로기였다.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에서 법은 지배계급의 이해와 의지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것은 착취체제의 적절한 기능을 허용하는 규칙의 총체이다. 법은 하나의 사회체제의 생애 초기에, 즉 새로운 ‘경제규칙’이 확립될 때 성장기를 거친다. 그뿐만 아니라 한 체제의 종말기에, 즉 현실로 인해서 체제가 훨씬 더 비대중적이고 부적절하게 되며, 낡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배계급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게 되는 그러한 시기에도 성장기를 거친다. 이때 법은 폐물이 된 체제의 생존에 필수적인 억압적 틀을 강화할 필요성을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법이 로마의 쇠퇴기와 봉건제의 쇠퇴기에 발전한 이유이다. (로마의 위대한 황제 디오클레티안은 가장 많은 포고령과 법령을 만들었으며 비슷하게 13세기부터 관습법의 수집이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새로운 사회관계 유형을 주창하는 사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비판적이고 반역적 형식을 취하다가 마침내 혁명적 형식이 된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정당화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유럽에서 15세기부터 특히 두드러졌다.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빈이 설파한 형태는 가톨리즘과는 반대로 이자(자본의 발전에 중요한)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허용한 종교였다. 또한 그것은 일을 통한 영혼의 고양을 가르쳤고 성공한 인간을 찬양했다(귀족 특권의 ‘신성한’ 기원을 반대하고 ‘벼락’부자가 된 부르주아 기업인의 새로운 상황을 정당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가톨릭교회 (주요한 봉건영주)의 초자연적 성격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어떤 매개도 없이 인간에 의한 성경해석을 주창했다. 이 새로운 종교는 자본주의의 부상을 선고하고 촉진한 이념적 요소였다.

     

    비슷하게, 17, 8세기 철학자와 경제학자에게서 그 궁극적인 표현이 나타난 부르주아 합리주의의 발전은 사회가 진입한 갈등의 혁명적 요소를 표현했다.

     

    낡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해체, 새로운 사회의 이념의 발전,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몽매주의, 낙관주의에 대항하는 비관주의, 건설적인 법에 대항하는 강제적 법 등 여기서 우리는 맑스가 말한 대로 “인간이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그것을 싸워 이겨내게 되는 법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철학적인 한 마디로 이데올로기적인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

     

    2) 지배계급 분파 사이 전쟁의 발전

     

    착취체제의 번영은 착취자 사이의 상대적인 조화를 허용하고 그들 사이에 “민주적” 관계가 있게 된다. 체제가 생명력을 잃고 이윤이 감소할 때 조화는 이윤 전유자 사이의 전쟁으로 나간다. 로마제국과 중세의 종말을 특징짓는 수탈에 병행하여 지배계급분파 사이의 전쟁이 급증했다.

     

    로마에서는 2세기부터 기사, 관료, 군사령관, 원로의원과 귀족에 의한 일련의 전쟁이 있었다.

     

    “235년과 285년 사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26명 가운데 오직 두 명만이 자연사했으며 한 번에 즉위하려 나서는 자가 30명이나 되었다.” (SB Clough, 앞글, 142쪽)

     

    중세 말에 귀족 사이의 전쟁이 너무 빈번해서 서구의 왕들은 전쟁을 금지할 수밖에 없었고 루이 9세는 심지어 무기 휴대를 금지하기도 했다. 백년전쟁은 이러한 유형의 현상이었다.

     

    지배계급이 더는 체제의 모순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의 이윤이 돌이킬 수 없이 하락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가장 즉각적 해법은 각 분파가 그 경쟁자의 부를 전취하거나, 적어도 이러한 부가 생산될 수 있는 생산 조건(보기를 들어 봉건 시대의 농노)을 통제하는 것이다.

     

    3) 계급투쟁의 격화

     

    한 체제의 쇠퇴 시에는 계급투쟁의 격화를 이 시기 주요 특징의 하나로 만드는 세 가지 현상이 있다.

     

    첫째, 빈곤이 전개된다. 우리는 노예제와 봉건제의 종말이 기근, 전염병 그리고 빈곤의 일반화를 특징으로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것이 특권 계급 내에서 갖는 귀결을 보았지만 이러한 천벌을 가장 극심하게 겪는 것은 분명히 피착취계급이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점점 더 잦은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둘째, 착취가 강화된다. 우리는 어떻게 쇠퇴의 체제에서 생산성이 기술수단에 의해 점점 덜 증가하여 그 결과 지배계급이 한층 더 노동의 초과착취를 통해 이를 보완하려 하는지를 보았다. 노동 착취는 소진의 지점까지 이루어진다. 충분한 작업량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전반적인 체벌이 증가한다.

     

    그들이 이미 참아내고 있던 가난과 고통에 더해 이 마지막 요인은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 투쟁의 일반화 경향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반응이 너무 격렬하고 결과적으로 생산성 증가라는 목표에 너무 해를 끼치기 때문에 로마제국 말기와 중세후기 모두에서 노동자의 노동에 “이득”(노예와 농노의 해방)을 주는 것을 겨냥한 조치들로써 체벌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흥미로운 중요성을 지닌다. 즉 경제체제가 한계의 끝에 있을 때, 본질적인 것, 즉 실제적인 생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법적 국면의 일부를 포기하게 된다.

     

    셋째, 자체 안에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담고 있는 계급이 투쟁한다. 피착취자의 반란과 함께, 새로운 계급(로마제국 말기의 봉건적 대지주와 봉건제 말기의 부르주아지)이 투쟁을 전개하여 자체의 착취체계 기반을 확립하고 낡은 체제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시작한다. 이 계급은 그래서 낡은 특권계급에 대항하는 영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러한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하는 계급의 반란은 항상, 옛 구조를 대체하려 노력하는 새로운 계급 자체에는 결핍된 세력을 제공한 다음 완전히 반동적으로 된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만이, 새로운 사회의 맹아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계급이 동시에 피착취계급이다)

     

    이 모든 요소는 한 사회의 쇠퇴가 반드시 계급투쟁의 결정적인 재건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래서 클로우의 책『저지 로마제국』(Lower Roman Empire)에서는:

     

    “생산의 부족, 끊임없는 조세증가, 통화의 평가절하와 대지주의 독립성에 의해 형성된 상황은 정치적 사회적 해체를 촉진하고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제하는 원칙을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빚었다. 가난한 지주, 몰락한 상인, 도시의 노동자, 식민지 농장주, 노예, 폭동자 그리고 군 탈주자들은 골(Gaul), 시실리,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에서 약탈자가 되었다. 235년 약탈의 물결이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238년에는 북아프리카에 내전이 있었다. 268년에는 골(Gaul)의 식민지 농장주들이 수많은 도시를 공격했고 269년에는 시실리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났다.” (Clough, 앞글, 142쪽)

     

    “5세기 서부 라틴에 영향을 미친 사회운동의 폭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모든 지역을 흔들어 놓았는데 특히 브리타뉴 지방, 서부 골, 스페인 북부와 아프리카가 그렇다…” (Lucien Misset, 『침략(Les Invasions)』, 226쪽)

     

    중세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13세기 말부터 노동자의 폭동은 플랑드르 지방을 흔들었다. 백년전쟁과 이탈리아 분할의 시기에, 도시의 비참함이 급증함으로 인해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부대가 출현했다. 아주 빈번하게 각기 다른 나라에서 하지만 같은 부류의 사람들, 즉, 땅이 없는 사람이 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프랑스 평원의 “쟉크”, 랑케독의 투케인, 영국 중부의 롤라드, 파리의 말라뗑, 부르곤느의 코킬라드가 그들이다. 거침없는 호민관은 그들의 곤경을 이용했으며 이러한 폭동을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이용했다. 에티엔느 마르셀은 두팽에게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의 후견을 강요하고자 했다. 반 아트벨드는 플랑드르 노동자의 참상을 이용했고, ‘인민의 호민관’인 콜라 디 리엔조는 로마 귀족제의 과도함에 의해 파괴된 하위 계층민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플로렌스에서 기아폭동인 시옴피의 폭동은 결국 메디치 가문의 이해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침체, 분할의 결실, 전쟁, 그리고 사회적 무질서는 약탈, 폭동 그리고 학살을 초래했다…” (Favier, 앞글, 137쪽, 그리고 Pirenne, 앞글, 160쪽)

     

    1649년 영국의 크롬웰의 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봉건사회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탄생에 의해 촉발된 투쟁의 극적인 최절정이었다.

     

    경제체제의 역사는 그 안에 사는 인간의 역사일 뿐이다. 어떤 사회의 발전, 보전, 그리고 대체는 체제 내부에서 그들의 경제적 위치에 따라 행동하도록 추동된 인간 집단의 작업이다. 한 체제가 자신을 유지하는 능력은 무엇보다 그로부터 가장 이득을 많이 얻는 계급의 힘에 상대적이고, 이와 유사하게 새로운 사회의 힘은 그 속에서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의 힘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바로 사회 계급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사회를 모순으로 빠트리는 객관적 세력의 구체화를 보게 된다. 주어진 순간에 계급 갈등은 생산력 발전의 현실과 주어진 생산 관계 사이의 갈등, 바로 그것이다.

     

    4) 국가의 강화

     

    법이 지배계급의 이해와 의지를 대표한다면 국가는 법이 준수되는 것을 보증하는 책임을 지는 무장된 세력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에 필요한 질서의 보증자이다. 한 체제의 쇠퇴기를 특징짓는 경제적, 사회적 무질서에 직면하여 국가는 오직 강화될 뿐이다. “그 기능의 발전은 그 기관의 발전을 초래한다.”

     

    사회적 무질서에 대항하여: 지배 계급의 무장된 세력으로서 출현한 국가는 본질적으로 한 계급의 심부름꾼이다. 그러나 이 심부름꾼 주위에서 우리는 지배계급의 모든 이해관계의 분명한 결정체를 보는데, 그의 과업은 전반적인 일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그 체제의 기능에 대해 그리고 그 필요에 대해서 특권계급을 구성하는 개인의 그것보다는 더 넓은 조망을 지닌다. 소수에 봉사하는 억압기관이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사회로부터 분리된 국가는 착취자의 분파적이거나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다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단일하고 통일된 기관이라는 성격에 의해서 또한 그러한 소수의 착취자로부터도 구별된다. 게다가 국가 관료주의의 특권은 체제 전체의 적절한 기능성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국가는 따라서 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에 도달할 수 있는 세력일 뿐만 아니라, 경제가 잘 기능함에 직접적이고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는 유일한 세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쇠퇴의 시기에 국가는 강화된다. 왜냐하면 피착취 계급의 수많은 반란을 처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분산되고 분열될 수밖에 없을 때 그들의 통일성을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들, 특히 2세기부터 모든 황제 권력의 발달은 봉건영주의 권력 발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압제당하는 자의 반란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서, 그리고 지배계급 분파 사이의 투쟁을 제한하여 지배질서를 방어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진정으로 정당화되었다. 셉티머스 세베러스(193-211) 황제는 결국 “그의 안전과 권력을 보증하는 군인에게 지급할 기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원로위원과 도시사업가의 재산”(Clough)을 징발했다. 카페(Capet) 군주국은 대봉건영주의 희생으로 발전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은 국가기구의 강화에서 강력한 요소이다. 국가의 권위만이 전쟁이 요구하는 세력의 재편성을 수행할 수 있다. 국가는 항상 그러한 검증을 거치며 더 강력해진다. 이러한 요인은 특히 프랑스에서 봉건군주국의 강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제적 무질서에 대항하여: 로마제국의 쇠퇴기와 봉건제의 쇠약기 동안 국가개입의 강력한 발전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생산에 관한 한, 그(디오티시엔 황제, 284~305)는 ‘지시경제(directed economy)’에 의해 생산이 촉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의 활동을 규제했고 대소유지의 이용을 통제했으며 가격통제를 시행했다. 마지막으로 세율은 변경되었고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화폐생산이 규제되었다.” (Clough, 143쪽)

     

    봉건적 왕국에 대해 말하자면, 국가는 강력한 개입주의 행정을 창출시킴으로써 자신을 강화했다. 관료제가 발전하여 봉건 법정은 순회하지 않고 한 도시, 즉 파리, 웨스트민스터, 팜플로나, 모스크바에 정착되었다. 왕은 그 자신의 관리(프랑스에서의 집행관과 집사)를 사용했고 그들의 그 경제적 과업은 왕국 전체에서 점점 더 성장했다.

     

    한 사회의 경제 관계가 그에 포함된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때, 오직 무장한 세력만이 그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한 체제의 무장된 세력이자 법칙의 결정체로서 국가는 그때 경제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쇠퇴하는 사회에서의 모든 것은 이러한 현상을 강화시킨다.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경제를 유지할 필요로부터 발생한 기생적인 비용은 재정부담의 거대한 증대를 결과시킨다. 오직 강력한 국가만이 이미 굶주리고 폭동 직전에 있는 국민으로부터 이러한 기금을 탈취할 수 있다. 후기 로마 황제와 봉건 군주는 이러한 과업이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주요기반의 하나임을 알아차렸다. 경제는 더는 사회적 현실이 부과하는 필요와 일치하지 않았다. 경제적 주도권은 더는 사회의 나머지와 조화하고 번영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지침이 아니었다. 국가권력, 즉 국가개입은 경제 마비와 총체적 무질서로의 몰락을 방지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노예제와 봉건제 말기에 사회의 관료화와 개인의 체계적 통제화 경향이 발전했다.

     

    이러한 경향은 저지 로마제국 시기에 특히 놀랄 만한 비율을 차지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상황에 불만이었고 그로부터 도피하려고 했다. 농민은 농촌을 떠났고 장인은 그의 기술을 버렸으며 원로(decurion)는 시 원로원을 떠났다. 국가권력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처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든 사람을 그 조건에 얽어매고 탈출구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경구는 ‘모든 사람을 제자리에’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로마문화는 멸망하리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포위 공격의 상태였고 삶의 영구적인 포위 공격이었다. 사회적 조건과 직업은 세습적으로 되었다. 진정한 세습계급체제의 확립이었다. 이것은 원시적이고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과된 새로운 정치적인 것이었다.” (F. Lot, 『고대 세계의 종말과 중세의 시작(Le Fin du Monde Antique et le Debut du Moyen-Age)』, 109쪽)

     

    어떤 노동자들은 일을 그만주지 못하도록 붉게 달아오른 철로 낙인이 찍혔다. 추격의 권리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국가개입의 필요성은 봉건제 말기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봉건적 왕국의 경제적 행위와 전기로마제국의 그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노예제는 해체되면서 특히나 파편화된 경제체제인 자급자족체제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한편으로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강화시키려는 시도와 다른 한편으로 봉건제의 발전은 동시에 일어났지만, 매우 모순적 현상이었다. 반대로 봉건제는 자본주의에 의해, 즉 경제생활의 집중과 통합의 수준이 점점 더 증가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체제에 의해 대체된다. 해체되는 봉건체제를 떠받칠 필요성 때문에 나온 봉건국가의 중앙집권화와 개입주의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기초를 발전시킬 수단을 객관적으로 구성했다. 몇몇 기본적인 요인으로 인해 군주국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1) 군주국은 그 권력을 떠받치기 위해 빈번히 부르주아 도시로부터 지원을 요청해야만 했다.

     

    2) 주요 착취계급인 귀족의 이해관계는 부상하는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비교적 일치할 수 있었다.

     

    3) 15세기 말에 자본주의의 기반을 창출한 부르주아지의 힘의 성장을 통해 귀족 전체에게 권력분할을 강요할 수 있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2세와 3세가 취한 경제 조치, 헨리 7세의 중상주의 정책, 프랑스의 루이 11세 하에서 실현된 경제발전, 14세기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대부분 왕이 취한 산업발전에 유리한 보호무역주의적 행위,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이 부르주아 의회를 수용한 것 등 이 모두는 자본의 원시축적과정에서 봉건군주국이 취한 탁월한 역할의 증거이다.

     

    그러나 봉건군주국을 이러한 각도에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군주국은 본질적으로 봉건적이었고 사실 그것은 봉건제의 마지막 성벽이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증명한다. 즉 왕과 부르주아 의회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 군주국에 의한 귀족특권의 방어(프랑스에서는 오직 평민만이 세금을 냈다), 법인세의 방어,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지의 종교”인 신교에 대항하는 투쟁, 그리고 끝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의 진정한 발전을 허용하도록 혁명을 해야 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러하다.

     

    봉건군주국이 수행한 이러한 이중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냉혹한 강화는 본질적으로 봉건체제 유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몰락하는 사회의 전형적 국면이었다.

     

    쇠퇴하는 사회의 이미지가 너무 꽉 끼게 된 옷을 밀쳐내는 몸 같다면, 국가기구의 발전은 옷을 더 단단히 함으로써 몸으로부터의 증대하는 압력이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지배이데올로기의 해체, 전쟁과 혁명의 발전, 국가의 강화라는 이 모든 것은 쇠퇴하는 사회, 즉 생산력이 발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들이다. 그 경제체제는 역사적 필요성이기를 멈추고 대신에 사회를 증대하는 야만으로 몰고 가는 족쇄가 된다. <계속>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작성

    오세철 옮김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section1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section2

    http://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1/section3

     

     자본주의의 쇠퇴 1장 - 둘. 상부구조의 전복.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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