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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 제2권 및 제3권 : 로자 룩셈부르크
  • 조회 수: 3535, 2019-04-04 16:47:10(2019-04-04)
  • 「자본」 제2권 및 제3권 :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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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로자 룩셈부르크 선집 제4권 1914년 8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디이츠 출판사, 베를린 1974, 291~301쪽


    <역자 주>

    맑스의 전기를 쓰고 있던 프란츠 메링의 요청에 따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글을 썼다. (메링은 이 글을 그의 맑스 전기, 칼 맑스, 그의 삶의 이야기 「Franz Mehring: Karl Marx, Geschichte seines Lebens」 제12장 제3절에 포함시켰다 -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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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의 자본 제2권과 제3권도 제1권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탈고하자마자 곧 출판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사이 여러 해가 지나도 결국 인쇄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가 없었다.

     

    항상 새롭고 항상 더 깊이 파고드는 연구, 오랜 병고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인해 그는 그 저작 전체를 완성할 수 없었고 그래서 친구 엥겔스가 맑스의 미완성 수고로부터 그 두 권을 편집해냈다. 그 수고는 집필 원고, 초안, 메모, 어떤 때는 연관된 큰 단락, 다른 어떤 때는 연구자들이 스스로나 알아볼 수 있게 늘 하는 것처럼 짧게 대충 써놓은 소견이었는데, 이는 엄청난 정신작업으로 종종 긴 중단기가 있긴 해도 1861년부터 1878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마지막 두 권에서 정치경제학(Nationalökonomie)의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한 완결된 해답을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분적으로 그러한 문제의 나열과 이에 덧붙여, 해답을 어떤 방향에서 찾아야 할지 알려주는 지표만을 찾을 수 있다. 맑스의 세계관 전체가 그러하듯이, 그의 주요 저작은 이미 완성되어 그 어떤 경우에도 유효한 진실의 결정체를 지닌 성경이 아니라, 계속된 정신 작업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하고 진리를 향해 계속 탐구하고 투쟁하도록 고무하는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외면적으로도, 그 문학적인 형식 면에서 제2권과 제3권은 제1권처럼 그렇게 완성도가 높지 않고, 그렇게 생명력이 넘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권은 어떤 형식에도 구애되지 않은 바로 그 단순한 사고작업 때문에 어떤 독자에게는 제1권보다 더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제공한다. 내용 면에서 이 두 권은, 비록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 어떤 대중화도 고려되지 않은 채 그러니까 계몽된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있지만, 제1권을 본질적으로 보완하고 더 발전시키고 있기에, 체계 전체를 이해하는데 불가피하다.

     

    제1권에서 맑스는 정치경제학의 주요한 질문을 다룬다: 치부(die Bereicherung)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윤(Profits)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맑스가 출현하기 이전에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최상의 ‘학문적’ 옹호자들, 슐츠-델리츠(Schulze-Delitzsch)와 같이 그 일부는 노동자 사이에서도 명망과 신뢰를 누렸던 이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부를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는 정당화 근거와 교묘한 조작을 통해 설명했다. 즉 기업가들이 생산을 위해 고귀하게 ‘넘겨준’ 자본에 대해 기업가의 배상(Entschädigung)을 위해 상품에 체계적으로 부가된 가격(Preisaufschlag)의 결실이라고, 각 기업가가 감당하는 ‘위험’에 대한 보상(Vergütung)이라고, 기업의 ‘정신적 지휘’와 그 비슷한 활동 등에 대한 임금(Lohn)이라고 그렇게 자본주의의 부를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항상 중요한 것은 단지 한편의 부를 그리고 다른 한편의 빈곤 또한 ‘정당한’ 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부르주아 사회의 비판자들, 즉 맑스 이전에 출현한 사회주의자 학파들은 자본가의 치부(die Bereicherung)를 기껏해야 순전한 사기행위로서, 그러니까 노동자에 대한 도둑질로서, 화폐가 그사이에 끼어듦으로써 또는 생산과정의 조직화 부재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 사회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공상적인 계획에 도달했다. 어떻게 화폐의 폐지를 통해서, ‘노동의 조직(Organisation der Arbeit)’을 통해 그리고 그 비슷한 해결책 등을 통해 착취( die Ausbeutung)를 척결할 수 있을지를.

     

    맑스는 이제 「자본」의 첫 번째 권에서 자본주의의 치부(Bereicherung)의 진정한 뿌리를 밝혀내고 있다. 그는 자본가들의 정당화 근거를 다루지도 않고, 그들의 부당성의 고발을 다루지도 않는다. 처음으로 그는 어떻게 이윤이 생겨나고 어떻게 그것이 자본가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을 그는 두 개의 결정적인 경제적 사실을 통해 설명하는데, 첫째, 노동자 대중은 노동력(Arbeitskraft)을 상품으로서 팔아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그리고 둘째, 노동력이라는 이 상품은 오늘날 그 자체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생산물(Produkt)을 특정 시간에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높은 생산성(Produktivität)을 갖는다는 점을 통해서. 이 두 개의 순수하게 경제적이면서 또한 객관적 역사 발전에 의해 주어진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이 생산한 열매가 저절로 자본가의 품 안으로 굴러떨어지며 임금체제가 지속되는 한 기계적으로 항상 더 거대한 자본자산(Kapitalvermögen)으로 축적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맑스는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치부(Bereicherung)를 자본가의 상상된 희생이나 자선 행위에 대한 그 어떤 보상으로서 설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사기행위나 도둑질로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형법상의 의미에서 완전히 적법하며 모든 다른 상품구매(Warenkauf)와 상품판매(Warenverkauf)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환거래(Austauschgeschäft)로 설명한다. 자본가에게 황금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이 흠 잡을 데 없는 거래를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서, 맑스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위대한 영국 고전학자들인 스미스와 리카르도에 의해 설정된 가치법칙(Wertegesetz), 즉 상품교환의 내적 법칙의 설명을 그 마지막까지 발전시켜 노동력이라는 상품(Ware)에 적용해야 했다. 가치법칙, 그로부터 임금(Lohn)과 잉여가치(Mehrwert)가 도출되는 것, 즉 그 어떤 폭력적인 사기행위도 없이 임금노동의 생산물이 어떻게 저절로 노동자를 위해서는 옹색한 생계유지로 그리고 자본가의 무노동의 부(Reichtum)로 나뉘는가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 제1권의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 이 권의 거대한 역사적 의미가 놓여있다. 그는 오직, 노동력의 판매, 즉 임금체제가 폐지됨으로써만 착취가 철폐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우리는 「자본」의 첫 번째 권에서 내내 노동의 작업장(Werkstatt)에 있다. 하나의 공장에, 탄광에 또는 근대적인 농장에 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어느 자본주의의 기업에나 유효하다. 우리 혼자 관련된 것은 전체 생산양식(die Produktionsweise)의 전형으로서 개별자본(Einzelkapital)이다. 우리가 이 권을 떠날 즈음에는 이윤이 매일 생성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고, 착취의 메커니즘은 그 밑바닥까지 조명되어 있다. 우리 앞에는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아직 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채 작업장에서 곧바로 도착해서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그 상품 안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지급된 노동에서 결과되어 상품 전체와 마찬가지로 적법하게 자본가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가치의 그 부분을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착취의 뿌리를 손으로 움켜쥔다.

     

    그러나 이것으로 자본가의 수확물이 곡간 안으로 옮겨지려면 한참 멀었다. 착취의 열매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직 기업가가 누릴 수 없는 형식 안에 존재한다. 그가 그 열매를 쌓여있는 상품의 형태로 소유하는 한 자본가는 착취에 대해 기뻐할 수 없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노예소유주가 아니고, 자신의 사치와 거대한 궁중의 유지를 위해 노동 인민을 혹사했던 중세의 봉건영주도 아니다. 자본가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이 소유한 자본의 계속된 확대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짤랑거리는 화폐(Geld)의 형태로 된 부(Reichtum)를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이 생산한 상품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잉여가치의 판매가 요구된다. 상품은 공장의 창고와 농장의 광에서 나와야 하고 자본가는 그 상품을 사무실(Kontor)에서 거래소(Börse)로 추적한다. 우리는 「자본」의 제2권에서 그를 그곳까지 따라간다.

     

    자본가의 삶의 제2장이 펼쳐지는 상품교환(Warenaustausch)의 영역에서 그는 몇몇 곤경을 겪게 된다. 자신의 공장에서, 자신의 농장에서는 그 자본가 스스로가 주인이었다. 그곳에서는 엄격한 조직, 규율 그리고 계획성이 지배적이었다. 그 반대로 상품시장(Warenmarkt)에서는 완전한 무질서(Anarchie), 이른바 자유로운 경쟁(Konkurrenz)이 지배한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다른 이를 상관하지 않고 그 아무도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본가는 바로 이 무질서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든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느낀다.

     

    그는 모든 경쟁자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자신의 상품을 최종적으로 판매할 때까지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보다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중간에 작업이 중단되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 등을 제시간에 구매하기 위해서 충분한 자금(Geld)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상품을 팔아 획득한 자신의 금전을 그냥 한가하게 놀리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이윤이 남도록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뒤처지고 말게 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떠밀린 자는 뒤쫓는 개에게 물리는 신세가 된다. 개별 기업가가 자신의 사업이 공장과 상품시장 사이의 계속된 우왕좌왕 속에서도 작업장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자신의 임금노동자들을 활용할지언정, 보통의 이윤을 획득할 수 없다. 자신의 ‘정당하게 얻은’ 이윤의 일부가 그 어딘가에서 정체되어버리고 제 주머니 안으로는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본가는 그가 상품, 즉 실용품(Gebrauchsgegenstände)을 제조할 때만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그 상품의 종류를 그것도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양만큼만 제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은 팔리지 않은 채 남게 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잉여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개별 자본가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 사회가 실용재화(Gebrauchgüter)의 무엇을 얼마만큼 필요로 하는지를 아무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계획적이고 무질서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개별 기업가 각자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래도 이 카오스로부터, 이 뒤죽박죽으로부터 전체적인 어떤 것(etwas Ganzes)이 생겨나야 한다, 자본가들의 개별사업과 그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사회의 필요 충족과 존재 지속 그 모두를 가능케 할 그것이 생겨나야만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뒤죽박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 첫째, 개별자본의 지속적인 순환 운동, 즉 생산하고 판매하고 구매하고 다시 생산하는, 그 사이에 자본(Kapital)이 금전 형태(Geldgestalt)에서 안정적으로 상품 형태(Warengestalt)로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는 그 순환 운동이 가능해져야 한다. 이 단계들은 서로 맞아떨어져야 하고, 구매를 위해 어떤 시장 경기(Marktkonjunktur)도 이용할 수 있고 공장의 운영비용이 충당할 수 있도록 금전(Geld)이 예비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상품판매에 따라 점차 다시 흐르게 된 금전은 곧바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벌써 여기서, 겉으로 보기엔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개별자본가들은 신용(Kredit) 체계를 통해서, 은행의 체계를 통해서 서로 계속해서 필요한 금전을 제공하고 예비금을 떠맡으며 그렇게 개개인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생산과 상품판매의 중단없는 진행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결사체(Bruderschaft)로 결집한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상품교류의 편의(Erleichterung des Warenverkehrs)’를 위한 똑똑한 시설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는 그 신용을 맑스는 자본의 단순한 생존방식의 하나라고, 생산에서 그리고 상품시장에서의 자본의 두 생활 시기 사이의 연결일 뿐만 아니라 개별자본가의 겉보기에 독자적인 움직임 사이에서의 연결이라고 자신의 저작 제2 권에서 대략 묘사한다.

     

    둘째, 개별자본의 뒤죽박죽 속에서 그 사회 전체의 생산과 소비의 순환운동이 매끄럽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조건, 즉 생산수단(Produktionsmittel)의 제조, 노동자계급의 생계, 자본가계급의 점진적 부의 축적 등, 말하자면 사회의 총자본(Gesamtkapital)의 축적과 활동이 확보되어 있도록 그렇게 그 순환 운동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개별자본의 좌충우돌하는 움직임으로부터 그 전체(das Ganze)가 맺어지는지, 어떻게 그 전체의 이러한 움직임이, 금방은 호황(Hochkonjunktur)의 과잉으로, 금방은 다시 위기(Krise)로 인한 붕괴로 치닫는 그러한 계속된 탈선을 통과해서 그다음 순간에 다시 올바른 관계로 조정되는지, 그런 다음 결국 다시 그 관계로부터 다시 일탈하게 되는지, 어떻게 이 모든 것으로부터, 오늘날의 사회에게 있어서 오직 수단에 불가한 것, 즉 그 자체의 생계와 경제발전이 출현하고 그 사회의 목적, 즉 계속된 자본축적(Kapitalansammlung)이 점점 더 엄청난 규모로 결정적으로 출현하는지, 그것을 맑스는 그의 저작 제2권에서 비록 결정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담 스미스 이래 백여 년 만에 처음으로 법칙성의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자본가들의 험난한 과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윤이 점증하는 규모로 금(Gold)으로 변화되면서 또 그렇게 된 후인 지금, 노획물(Beute)이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라는 커다란 문제가 떠오른다. 기업가(Unternehmer) 이외에도 상인(Kaufmann), 대출자본가(Leihkapitalist), 지주(Grundbesitzer) 등 여러 다른 그룹이 여기서 그들의 요구를 들고 나선다. 이들 모두는 임금노동자의 착취 및 그에 의해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하는데 각자 자기 몫만큼 기여했고 이제 이윤에서 제 몫을 요구한다. 이러한 분배는 그런데 언뜻 보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게 뒤엉킨 과제이다. 왜냐하면 기업가 중에서도 그 기업의 유형에 따라서, 어떻게 그 이윤이 노동의 작업장으로부터 소위 신선하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획득된 이윤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생산 부문(Produktionszweig) 안에서 상품의 제조와 그 판매는 매우 신속히 이뤄지고 자본은 그 증가분과 함께 짧은 시간에 회수된다. 그렇게 항상 다시 사업과 이윤이 매끄럽게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한 생산 부문에서 자본은 생산 안에 수년 동안 묶여 있고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윤을 가져온다. 특정 부문에서 기업가는 자신의 자본 대부분을 죽은 생산수단, 즉 건축물, 비용이 많이 드는 기계 등등에 쏟아 넣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아무리 이윤 만들기(Profitmacherei)에 필요할지언정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어떤 이윤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른 부문에서는 기업가는 아주 극소한 지출만으로 자신의 자본을 주로 노동자들을 획득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그 각각의 노동자는 황금알을 낳아주는 부지런한 암탉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윤 만들기 자체 안에서 개별자본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생겨나고, 부르주아 사회의 눈에는 이 차이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그 특이한 ‘분배’보다 훨씬 더 떠들썩한 ‘불공평(Ungerechtigkeit)’을 표현한다. 어떻게 이제 여기서 보정(Ausgleich), 즉 노획물의 ‘공평한’ 분배를 이뤄내서 각 자본가가 ‘제 몫’을 가질 수 있게 할 것인가? 게다가 이 모든 과제는 그 어떤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규제도 없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 사회에서는 분배는 생산만큼이나 무질서하다. 실상 어떤 사회적인 대책이라는 의미에서 그 어떤 ‘분배’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교환만이 발생한다, 상품교류만이, 구매와 판매만이 일어난다. 어떻게 그러면 오직 맹목적인 상품교환의 길 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력으로 창조된 부(Reichtum)에서 자본지배의 관점으로 볼 때 ‘공평한’ 분량만큼을 착취자의 각 계층과 그 계층에 속한 각 개인이 획득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맑스는 그의 저작 제3권에서 대답한다. 그가 제1권에서 자본의 생산과 그 안에 놓인 이윤 만들기의 비밀을 파헤쳤듯이, 제2권에서 작업장과 상품시장 사이에서, 사회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서 자본의 움직임을 묘사했듯이, 그는 제3권에서 이윤분배(Profitverteilung)를 추적해 나간다. 그것도 동일한 세 가지 기본조건을 유지하면서. 그 첫째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무작위적이 아니라는 것, 즉 규칙적으로 작용하는 그리고 관련자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특정한 법칙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 둘째는, 그 경제관계(die wirtschaftlichen Verhältnisse)는 강탈과 도둑질이라는 폭력적인 대책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어떤 사회적 이성( gesellschaftliche Vernunft)도 계획적인 작용으로 그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 오직 교환의 메커니즘, 즉 가치법칙과 그로부터 유도되는 잉여가치(Mehrwert)로부터 맑스는 조금씩 자본주의 경제의 모든 현상과 관계를 투명하게 철저하고 명료하게 전개해 나간다.

     

    그 대작 전체를 개관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제1권은 그 안에 전개된 가치법칙, 임금 및 잉여가치와 더불어 현 사회의 토대(Fundament)를 폭로하고, 제2권과 제3권은 그것에 기초하여 세워진 건물의 층을 보여준다. 또는 아주 다른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데, 말하자면, 제1권은 우리에게, 사회 유기체에서 생명의 즙이 만들어지는 그 심장을 보여준다면, 제2권과 3권은 혈액순환과 최말단의 피부세포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체의 양분공급을 보여준다.

     

    그 내용에 알맞게 우리는 마지막 두 권에서는 제1권에서와는 다른 평면 위에서 움직인다. 전자인 제1권에서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치부(Bereicherung)의 원천을 찾아내게 된 작업장, 즉 노동의 깊은 사회 갱도(Schaft)였다. 제2권과 3권에서 우리는 표면에서, 사회의 공식적인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상점(Warenmagazine), 은행, 거래소, 금융업, ‘궁핍한 지주(Agrariar)’ 그리고 그들의 근심이 여기서 전면을 가득 채운다. 노동자는 여기서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실컷 두들겨 맞을 대로 맞은 후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에 관심이 없다. 거래하는 군중의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도 단지 노동자들이 새벽녘에 무리를 지어 작업장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 그리고 저물녘에 긴 행렬로 작업장으로부터 내뱉어질 때나 그들을 만난다.

     

    그 뒤 이윤 만들기와 노획물의 분배를 놓고 자본가들이 벌이는 싸움박질에서 자본가들의 여러 개인적인 근심이 노동자에게 있어 어떤 이해관계를 갖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제2권과 제3권은 제1권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제메커니즘의 완전한 인식에 속한다. 물론 이 두 권은 현대 노동자 운동에 있어서 첫째 권만큼 그렇게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역사적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 투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적 무장에 가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띠는 풍부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 두 가지 예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제2권에서 맑스는 어떻게 개별자본의 혼란스러운 지배로부터 사회의 정규적인 부양(Ernährung)이 결과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서 자연스럽게 위기(Krise)의 문제도 언급한다. 여기서 위기에 대한 그 어떤 체계적이고 교훈적인 논문을 기대해서는 안 되며, 그냥 몇몇 부수적인 소견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소견의 활용은 사고하는 계몽된 노동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그리고 특히 노동조합의 선동에 있어서 이른바 고정재고(eisener Bestand)에 속하는 것이 바로, 위기는 일차적으로, 자본가들이 그들의 노동자 대중이 그들의 최상의 구매자임을 그리고 구매력 있는 고객층을 유지하고 위기의 위험을 방지하려면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자본가들의 그 근시안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상당히 대중적이지만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것을 반증한다:

     

    “위기가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의 부재로 인해 또는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동의어의 반복(Tautologie)이다. 빈민구호(Sub forma paupris)나 ‘도둑(Spitzbube)’의 방식을 제외하면, 지불하는 방식 이외의 다른 소비유형(Konsumarten)을 자본주의 체제는 알지 못한다. 상품이 팔릴 수 없다는 것은, 지불능력이 있는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비자들은… 그러나 이러한 동의어의 반복에 더 심오한 근거를 부여하고자, 노동자계급은 그 자신 생산물의 너무 작은 부분만을 받는다고 그들이 더 큰 부분을 수령해서 노동임금이 증가하면 당장 그 나쁜 상황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항해서, 위기(Krisen)는 항상, 노동임금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노동자계급이 사실상 연간 생산물 중 소비를 위해 결정된 부분에서 더 큰 할당을 받은 시기를 통해 준비됨을 언급할 수 있다. 그 시기는 - ‘단순한(!)’ 상식의 이러한 기사(Ritter)의 견지에 따르자면 - 반대로 위기를 제거해야 할 터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좋거나 나쁜 의지와는 독립적인 조건을 포함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조건은 노동자계급의 그 상대적인 번영을 단지 순간적으로만 그것도 항상 위기의 전조로서만 허용한다.” (1)

     

    실제로 제2권과 제3권의 논증은, 단순히 자본 운동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위기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로 이끈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은 축적을 향한, 성장을 향한 격렬하고 채워지지 않는 충동 속에서, 비록 소비(Konsumtion)가 어느 한 단일 사회계층의 상승된 구매수단을 통해서 또는 하나의 새로운 판매시장 전체의 정복을 통해 그 얼마나 크게 확대될지언정, 소비의 그 어느 장벽도 곧 뛰어넘는다. 그래서 또한 노동조합의 그 대중적인 선동의 배후에 잠복하고 있는 그리고 기업가의 근시안 때문에 오해된다고 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해의 조화(Interessenharmonie)라는 그 생각은 버려져야 하며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질서(Anarchie)에 완화적인 짜깁기(Flickarbeit)의 모든 희망은 포기되어야 한다. 임금프롤레타리아의 물질적인 개선을 위한 투쟁은 그 정신적 무기고에 수천 개의 너무 좋은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근거 없고 실천적으로 애매모호한 논거가 필요하지 않다.

     

    또 다른 하나의 예. 제3권에서 맑스는 정치경제학이 그 출현 이래 속수무책으로 놀라워하기만 해오던 현상, 즉 모든 생산 부문(Produktionszweigen)에서 자본은, 비록 다른 조건 아래 투자되어 있지만 이른바 ‘보통의(landesüblichen)’ 이윤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첫눈에 이 현상은 맑스 본인이 제공한 한 설명, 즉 자본주의의 모든 부를 오직 임금프롤레타리아트의 미지불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서 실상, 자기 자본의 비교적 큰 분량을 죽은 생산수단에 투자해야 하는 자본가가 이러한 종류로는 적은 지출을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살아있는 노동을 확보할 수 있는 동료 자본가와 같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제, 맑스는 놀랍도록 단순하게 이 수수께끼를 푼다. 어떻게 어떤 상품 종류(Warensorten)는 그 가치 이상으로 그리고 다른 상품 종류는 그 가치 이하로 판매됨으로써 이윤의 차이가 상쇄되고 단번에 생산의 모든 부문에 ‘평균이윤(Durchschnittsprofit)’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자본가들은 전혀 모른 채, 서로 간에 그 어떤 의식적인 의사소통도 없이, 어느 정도 각자 자신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함께 끌어모으고 착취의 이 총 수확(Gesamternte)을 자신들 사이에서 우애롭게 각자 투여한 자본의 크기에 따라 분배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품교환을 진행한다. 말하자면, 개별자본가는 그가 개인적으로 획득한 이윤이 아니라 자기 동료 모두가 획득한 이윤 중에서 그의 몫으로 돌아온 그 분량만을 누릴 수 있다. “여기서 다양한 자본가들은, 이윤을 참작할 때, 이윤의 지분이 골고루 퍼센트로 분배되고 각자가 그 기업에 쏟아부은 자본의 크기에 따라서, 그 기업 전체(Gesamtunternehmen)에 각자의 비례적인 관여(Beteiligung) 정도에 따라서만 서로 차이를 보이는, 주식회사(Aktiongesellschaft)의 주주(Aktionär)들처럼 행동한다.” (2)

     

    겉보기에 완전히 건조한 이 ‘평균이윤율(durchschnittliche Profitrate)’ 법칙이 자본가들의 계급연대의 견고한 물질적 토대에 대해 얼마나 심오한 통찰을 주는지! 자본가들은 일상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형제이지만 노동자계급에 대항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총착취(Gesamtasubeutung)에 최고로 그리고 극히 직접적인 관심을 두는 결사체를 형성한다. 자본가들은 이 객관적인 경제 법칙을 당연히 전혀 알지 못하지만, 지배계급의 틀림없는 본능 안에서 자신의 계급이해(Klasseninteressen) 그리고 그것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적대에 대한 감각을 표출하는데, 이는 역사의 모든 격랑을 통하여 안타깝게도 과학적인 - 바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통해서 - 계몽되고 확립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자신을 증명했다.

     

    이 두 가지 짧고 무작정 골라진 증거들이, 「자본」의 마지막 두 권 안에 얼마나 많은 묻힌 보물들이 계몽된 노동자의 정신적 고무와 심화를 위해 여전히 존재하며 대중에게 제시되기를 고대하고 있는가를 조금이나마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미완성인 채로 그들은 그 어떤 완성된 진리보다 무한히 소중한 것을, 즉 생각(Denken)과 비판(Kritik)과 자기비판(Selbstkritik)에 대한 격려를 제공하는데, 자기비판은 맑스가 남긴 교훈의 가장 특유의 요소이다.

     

     

    <주>

    (1) 칼 맑스: 자본, 제2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집 제24권, 베를린 1972, 409/410쪽

    (2) 칼 맑스: 자본, 제3권,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집, 제23권, 베를린 1972.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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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국제코뮤니스트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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