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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천 복간호」 일상생활의 혁명
  • 조회 수: 5454, 2019-11-29 00:05:50(2019-05-16)
  • 일상생활의 혁명

    김종원 | 사실연 회원

     

     

    라울 바네겜 지음, 일상생활의 혁명: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 주형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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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이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바네겜은 1957년에서 1972년 사이에 존재했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일원이었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현대 사회와 일상생활에 대하여 가장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비판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고전 가운데 하나이다. 책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를 읽는 것에서 시작하자.

     

      일상생활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 않으면서, 사랑 안에는 체제전복적인 것이 있고 구속의 거부 안에는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혁명과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송장을 입에 물고 있다.(31)

     

      바네겜은 계급투쟁이 더 이상 노동자들생존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계급투쟁 개념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을 바꾸겠다는 의지에서 나왔다.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풍요로운 삶과 완전한 인간성을 찾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계획을 맑스가 세우려 했음에도, 1 인터내셔널은 오로지 노동자의 요구만을 기반으로 한 계획을 세우는 실수를 범했다.(31,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바네겜은 인간 존재 전체가 겪는 억압과 분리해서 노동자의 억압을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편 생존을 위한 투쟁은 삶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 요구가 없는 투쟁이 됐다. 이 투쟁은 생존까지 좀먹는다.”(134) 오늘날 노동자들의 생활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이제 우리의 사적인 영역까지 파고 들어와 우리의 자체를 억압한다. “소비경제가 생산경제를 흡수함에 따라노동자들은 작업 시간뿐 아니라 여가 시간에도 에너지를 빼앗긴.(31) “생존은 삶에 관심을 줄이는 것[삶을 경제적으로 만드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217) 따라서 생산의 영역만 고려하고 노동자들만의 혁명을 이야기하는 옛 이론의 신봉자들은 죽은 이론(송장)을 떠벌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삶은 개인들이 서로 관계 맺고(참여), 서로 소통하고(커뮤니케이션), 스스로 상황을 건설함(자기실현)으로써 가능하다. “1부 권력의 관점에서 바네겜은, 권력이 이 세 가지를 어떻게 불가능하게 하고, 지배를 영속화하는지 분석한다. 우선 불가능한 참여다시 말해, “구속의 총합으로서 권력은 다섯 가지 마모와 파괴의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 모욕(2), 고립(3), 고통(4), 노동의 실추(5), 감압(6)이 그 다섯 가지다. 이것들 모두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바네겜은 짐멜(Georg Simmel)이 그린 대도시의 풍경과 비슷하게 대도시 군중의 일상을 묘사하고, 그 속에서 모욕과 고립을 이끌어낸다. “도시 외곽을 오가는 기차에 의해 밀려갔다 밀려오며 거리와 사무실과 공장을 점령하는 많은 사람들의 왕래 속에서군중은 공격하고 또 공격받는다. 사람들은 비열함을 감추기 위해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부르주아지는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합리적 규범들에복종하도록 만들었다. “벽돌처럼 무감각하고 다루기 쉬운 것이 되라는 것이 바로 사회 조직이 각자에게 친절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모욕감은 바로 물건이 되는 감정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규율이 되어 우리를 순종하게 만든다. 바네겜이 말하는 모욕감은 물신숭배를 넘어 우리를 물건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2)

      규율에 복종해야 하는 현실, 바네겜에게 그것은 감옥과 같은데, 감옥은 분리된 개인들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고립감과 소외를 느낀다. “사물들이 중요성을 갖는 감옥 같은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냉담하게 서로 이리저리 부딪치는 대중교통 안에서 실망, 거만함, 경멸을 드러내는 ··· 표현들을 한다.” 함께한다는 환상만이, 거짓말의 힘만이, 그리고 마약과 술만이 고립이라는 힘든 현실을 지워버린다. 나를 둘러싼 군중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불편함과 공허가 엄습한다. 하지만 암묵적 동의, 경직된 미소, 생기 없는 말, 그가 가는 곳마다 뿌려진 나약함과 모욕이 한꺼번에 그에게 밀어닥치며 함께 있다는 환상을 증발시킨다.” 개인주의가 고립을 긍정적인 것처럼 만들었지만, “소외가 침해할 수 없는 재화처럼 행세하게 될 정도로 이처럼 소외가 고착된 적은 없었다.”(3)

      역사를 통해 소외는 자연적인 것(죽음, 질병, 고통)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차츰 변화했다. 이것은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기후의 혹독함, 배고픔, 불편함에서 벗어나 노예의 함정에 빠졌다.” 다시 말해, “신들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언어에 대한 노예 상태에 빠졌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악에서 해방시켰다. 기독교 권력은 유용한 고통과 동의된 희생을 요구했다. 그다음에는 고통의 악과 신앙의 악을 과학적으로 끝장내겠다는 의지를지닌 부르주아 권력이 등장했다. 부르주아의 지배와 더불어 신이 제거되면서 고통은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 됐다.” 그 후로 과학과 진보에 따른 고통이 뒤따랐으며, 그런 흐름 속에서 인간의 본성제거되고 고통은 사회적인 것, 사회적 존재에 내재한 것이 됐다.” 기술 문명은 행복과 자유의 이데올로기를 발명하여 사람들의 생활계획표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무기력의 자유, 수동성 속의 행복일 뿐이다. 편안함을 기대했지만, 삶의 부재를 낳았을 뿐이다. “인간들을 무섭게 하는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부재이다.” 이런 고통은 원자폭탄 같은 것에 의한 갑작스런 죽음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다.”(4)

      산업사회는 생산을 의무로 강제하고, 그런 강제 노동 때문에 삶은 곳곳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바네겜은 이렇게 묻는다. “매일 아침 6시에 잠에서 깨어나 지하철에서 흔들리며, 기계의 소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작업속도 통계적 통제에 의해 세뇌되고, 일과가 끝나면 주중의 지옥과 주말의 미미한 천국을 향한 출발지인 지하철역에 내동댕이쳐져 피로로 녹초가 된 군중 속에 섞이는 존재에게 창조력이 남아 있겠는가?” “생산의 의무는 창조의 열정을 소외시킨다.” “이제껏 어떤 문명도 이처럼 삶을 멸시한 적이 없다.” 생산성을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소비에트 경제도 마찬가지며, 그것은 노예가 되라는 요구이다.” “봉건적 권위의 원칙을대체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지배는 생산성의 원칙을 통해 실현된다. 역사에서 가장 호소력이 적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생산적 노동은노동으로 지친 대다수의 사람들을 생물적으로 약하게 만들고 바보로 만든다.(5)

      압력을 낮춘다는 뜻의 감압은 적대를 약화시켜 통제하는, 영원히 지속하는 수단을 뜻한다. 이는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탈출의 희망을 보여주는 쇼 같은 것이다. 희망이 없다면 폭발할 것이다. “희망은 복종의 끈이다.” 감압은 적대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체결된 원칙에 대한 동의에서 온다. “위계적 원칙에 대한 동의. 그래서 지금까지 폭정은 지배자들을 바꿔왔을 뿐이다.” 경쟁을 지휘했던 자가 지배자가 되면, 위계의 원칙은 되살아난다. 여기서 바네겜은 소비에트 혁명을 보기로 든다. 첫눈에는 화해 불가능해 보였던 적대세력들은 감암의 과정에서 함께 노쇠해지고 중화된다. 국제무대에서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는 연인들처럼 밀당을 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화에 전율하고 평화에 기뻐한다. 그리고 이런 선악 이원론에 판단을 내리도록 강요받는다.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미국과 소련)의 대립뿐 아니라 미국(부르주아 정치)의 양당 체제도 일종의 감압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것이 일상적 창조성의 모든 재료들을 공들여 막아 버린다.” 지배자만 교체하는 쇼로 마감하는 적대 세력들의 대립에서 거짓 문제들을 고발하며 권력을 그 구조까지 위협할 수 있는 제3의 힘은 개인적 열정들다시 말해, “일상생활이다.(6)

      바네겜은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를 보여준 후에 커뮤니케이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보편적 매개로서 권력을 분석한다. 매개 안에서,” 소비()의 독재에 의해(7), 증여에 대한 교환의 우위에 의해(8), 사이버네틱스의 적용에 의해(9), 그리고 양적인 것의 지배에 의해(10),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을 배운다.”

      맑스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면서 화폐를 보편적 뚜쟁이(매개)’로 묘사했다. 그런데 왜 바네겜은 권력을 보편적 매개라고 할까?

      “행복의 시대이다. “생활수준은 향상되고 수많은 편리한 기구들과 다양한 오락들, 모든 이를 위한 문화 활동, 꿈같은 안락함이 제공된다.”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소비재의 사냥. 19세기 반란자들의 꿈이던 생존 보장이 실현되는 복지국가. 그러나 젊은 세대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투쟁들의 의미는 그 투쟁을 이끈 사람들의 현재에 뿌리내리고 있고 역사적 조건은 다르지만, 자신들도 똑같이 현재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 따라서 급진적 혁명의 사조를 이끄는 계획은, 맑스가 처음으로 제시한, “총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냉장고가 아니다. 지금 생존의 풍요로움은 삶의 빈곤화를 내포하는데, “현대 복지국가는 시대착오적으로 과거 생산 사회의 소외자들에 의해 요구되었던 생존 보장을 제공한다.” 바네겜은 어느 노동자의 말을 인용한다. “1936년 이래로 나는 임금 인상을 위해 싸워 왔다. 내 앞에서는 나의 아버지가 임금 인상을 위해 싸웠다. 나는 텔레비전, 냉장고, 폭스바겐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나는 항상 개 같은 삶을 살아왔다.” “돈은 부르주아의 냄새 없는 신, 매개자이다.” “부는 그 자체로 힘과 명예를 부여한다.” “구매력은 권력을 사는 허가증이다.” “존속하기 위해 그의 노동력을 팔았옛날 프롤레타리아와 달리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는 소비하기 위해 노동력을 판다.” 그는 강제 노동을 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해 줄소비재를 산다. “이것이 바로 소비의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의 소비가 되는 시간이다.” 이렇듯 화폐는 곧 권력이고, 권력은 뚜쟁이다.(7)

      부르주아지는 교환의 계급인 반면, “귀족과 프롤레타리아는 증여의 모델 위에서 인간관계를 생각한다.” 그러나 희생 개념에 사로잡혀 과시용으로 증여하는 귀족과 달리 프롤레타리아는 총체적 삶의 기획속에서 자기애를 통한 증여의 쾌락을 즐긴다. “교환과 거래에 의한 인간관계의 악화는 부르주아지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뿐 아니라 그 연장선에 있는 경쟁자(소련)에도 교환이 존속한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지배하고 있다. 맑스가 그러했듯이, 바네겜도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과 한계를 모두 이야기한다. “경제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 어떤 해방도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는 경제학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제 수량화된 교환의 독재(시장 가치)가 일상생활을 시장으로 변화시킨다. 사물만이 존재하는 물화의 세계. 이제 모든 것이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는기회이다.(8)

      바네겜은 기술의 진보와 지배자들에 의한 기술의 지배(“기술의 매개된 사용”)을 구분한다. 기계에 모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계는 또한 인류가 행복과 자유가 지배하는 단계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기적이기도 하다.” “모호함은 그것의 주인들을 위해 봉사한다.” 모든 기술의 종합인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 기술)를 그 지배자들에게서 뺏어낸다면, 그 기술은 인간 집단을 노동과 사회적 소외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생산력,” 그에 따른 소비재의 폭발적 증가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새로운 생산력이 생산양식을 전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생산력을 믿었던 것과 똑같이 소비재의 마법을 믿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실천의 도구들실천의 소유자들, 즉 노동자들에게속하게 만드는 것이다.(9) “양적인 것의 지배”(10)상품의 표준화된 측정 방법인간 행동 전체에 강제한다.

      구속이 사람들을 파괴하고, 매개가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을 보았다. 이제 사람들은 억압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한다. 자신을 불구로 만드는 대의명분을 위해(12), 자신을 파편화하는 허구적 통일을 위해(13), 자신을 물화하는 겉모습을 위해(14), 자신에게서 진정한 삶을 앗아가는 역할을 위해(15), 자신을 한정하고 제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위해(16). 이것들이 자기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유혹의 총합으로서 권력이다.

      바네겜은 대의명분이나 미래를 위한 희생을 거부한다. 개인은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은 일상생활의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12) 사람들의 파편화, “분리는 사적 소유의 원리에서 비롯했다. 권력은 함께 한다는 환상을 심어주지만, “헛된 일이다.” 여기서 바네겜은 변증법을 꺼낸다. “부정적 폭력이 자신의 긍정성을 해방할 수 있다.(13) 겉모습을 조직하는 것은 사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과거에는 신화가 겉모습을 조직했다면, 부르주아의 분할된 권력이 겉모습을 조직하는 방식은 스펙터클이다.(14) 이 스펙터클 안에서 객관화된 스테레오 타입의 역할은 자발성을 앗아가고 삶의 의지를 시들게 한다.(15) 자신을 시간으로 표시하는 것은 귀족 가문의 전통을 따지는 것처럼 권력과 연관된다. 나이는 생명력 없는 삶의 양식, 다시 말해 겉모습의 차원에서 체험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나이(시간 표시)는 소비자에게 부여된 역할의 표시이다.(16)

      바네겜은 관점의 전복”(2)을 요청한다. 구속·매개·유혹의 기능을 하는 위계적 권력이 전도시킨 통일된 삼위(자기실현, 커뮤니케이션, 참여)”를 촉진할 것을 요청한다. 이 세 가지는 각각 창조의 열정, 사랑의 열정, 놀이의 열정과 연결된다. 이 열정을 통해서 우리는 소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일상의 진부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열정이 고립되어 있으면 안 된다. 분리될 때, 자기실현은 권력이 되고, 커뮤니케이션은 거짓말이 되고, 참여 의지는 환상의 공동체를 창조한다.

      바네겜은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를 고쳐 쓰면서 글을 마친다. “우리가 쟁취할 것은 희열의 세계이며, 잃을 것은 지겨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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