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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 8장 총체 자본의 개념
  • 조회 수: 2954, 2020-02-06 14:23:40(2020-02-06)
  •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8장 
    총체 자본의 개념


    이 분석에 대해서, 총체 자본(global capital)의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순수 추상이어서 어떤 종류의 생산 수익성 문제에 관련해서도 논쟁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흔히 반론이 제기된다.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어느 자본가나 어느 나라도 ‘총체 자본’에 대해 별로 우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대적 실재들의 총합에 기반을 둔 경제적 총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이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으로서의 자본이 오직 분할된 형식으로만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것이 전체적인 수준에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도시의 도둑 전체는 서로 항시적인 경쟁 속에 살고 그 환경의 법칙은 바로 가장 강력한 도둑의 법칙이다. 이것은 이러한 전체가 실질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의 이해관계(보기를 확대하자면 경찰과 관련하여)를 가진다는 사실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다. 그것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자체의 이해관계에 대해 집단적이고 통합된 의식을 가지며 그러한 이해관계들과 관련하여 행동한다는 사실은 그 문제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 언제나 총자본은 적대적 자본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그 자체의 수준에서 작용하는 일반법칙들을 가지며, 그 각 분파들에게 자체를 부과하고 자본의 그 어떤 분파도 진정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는 그 자체만의 현상(세계전쟁, 세계 위기 등)을 가지고 존재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자본의 지배는 이미 오래전에 지구 전체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모든 상품은 세계 구석구석으로부터의 노동과 원자재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 각각의 부분들의 실재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총자본의 실재이지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다. 

    대규모 군사 생산은 그 기원, 발전, 효과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관계된 현상이다. 그 본질을 총체 자본의 개념 밖에서 판단하려는 시도는 그 어떤 분석도 포기하는 것일 뿐이다. 

    자본의 재생산문제를 분석하기 위하여 맑스는 이 지형에 관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문제를 애매하게 하는 모든 부차적 사정을 떠나 연구대상을 순수한 형태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상업 세계 전체를 한 나라로 보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이 모든 곳에서 확립되어 모든 산업 부문을 지배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맑스, 「자본론」 제1권, 「경제학고전선집」, 비봉출판사, 2002, 791쪽, 각주부분 )

    이것은 이른바 초제국주의 이론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이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기본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지형에 대한 정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한자본가나 총체 자본의 한 분파에는 이익이 되지만  동시에 전체로서의 총체 자본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 생산의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총체자본(세계적 수준과 국민자본의 수준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의 개념을 수용한다. 이것은 “제너럴 모터스에게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미국의 농담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의제기이다. 그래서 군사 생산이 한 자본가에게 생산적이라면, 그것은 총체 자본에도 생산적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첫 번째 이의제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다시 자본의 모순적 실체가 무시된다. 자본주의체제의 모든 모순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기본모순은 생산과정의 점점 더 증대되는 보편적이고 사회화된 성격이 그 과정이 기반으로 하는 사적으로 균열된 재산 관계와 대립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예에서는 자본의 총체적인 성질이 무시된 채 자본의 파편화되고 분할된 측면만이 고려된다. 이번의 경우에는, 자본 간의 불가피한 적대는 외면해버리고, 부분 간에 그리고 부분과 전체 사이에 모순이 없는 총체 자본의 조화로운 모습에 길을 터준다. 한 특정 자본가가 그의 이윤을 실현하는 조건은 전체로서의 자본의 이해와 장기적으로 명백하게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미국에는 ‘나쁜  것’이 ‘제너럴모터스에는 좋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지점까지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방향으로 일들이 진행될 수 있다! (고전적 보기는 노동자계급에 필요한 소비재를 생산하는 자본가의 경우인데, 일반적인 임금상승은 그에게는 시장의 실현을 위해 보탬이 되는 조건이지만, 전체로서의 자본의 이윤율에는 위협이 된다.)

    사유재산체제를 지배하는 불가피한 부조화는 그 체제의 쇠퇴와 함께 증가할 뿐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해체의 경향을 강제적 집중화를 통해 억제할 목적을 가진 국가개입의 발전을 초래한다. 

    자본주의체제에서 수익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이 개별 자본가에게 적용될 때와 총체 자본에 적용될 때에 상이한 결과를 낳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생산이 국민자본에 ‘비생산적’임(다른 국가에 비용을 전가시키는 가능성을 제쳐놓고)에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국민자본의 대표로서의 국가가 무기의 자본주의적 판매자를 유지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맑스주의적 기준을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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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맑스의 해답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공식으로 요약된다.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는, 즉 자본을 확장하는 노동은 생산적이다.”1)

    이러한 공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특수하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으로서, 모든 역사적 형식에 공통된, 가장 단순한 국면 하에서의 노동과정”을 연구할 때 “생산적 노동 일반의 문제”2)에 적용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일반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모든 노동은 그것이 생산물로 끝나고 그 생산물이 인간의 어떠한 욕구에 상응하는 순간부터 생산적이다. 

    “요컨대,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처음부터 의도하고 있던 변화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 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었다. 즉, 노동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 측에서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이제 생산물 측에서는 고정된 정지성으로서 존재의 형태로 노동자는 방적 노동을 한 것이고, 그 생산물은 방적 된 것이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3) 
      (Marx, 「자본론」, 1권, 3편, 7장, 비봉출판사, 2002, 239~240쪽)

    맑스는 설명을 계속한다. 

    “생산적 노동에 관한 이와 같은 규정은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한 것이 못 된다.” 
    (Marx, 「자본론」, 1권, 3편, 16장, 비봉출판사, 2002, 683쪽)

    생산적 과정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특수한 형태들을 취하기에, 우리는 이러한 처음의 거의 동어반복적인 표현으로는 더는 만족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노동의 관점에서 자본을 볼 때 나타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자본에 의해 구매되고 마치 자본의 통합된 일부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노동력은 그것이 자본으로부터 받는 것(임금)보다 더 높은 가치의 총액을 자본에 회복시켜줌으로써만 생산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의 단순한 일부분이 아니라 산노동으로서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노동이 무작위적인 가치를 무작위인 양으로 생산하는 것으로는 더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초가치’, 즉 잉여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산노동을 자본의 관점으로 볼 때 명확해진다. 자본의 목적은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상품을 그래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한 생산적 노동의 첫 번째 결정요인을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결정요인은 ‘불충분’하게 된다. 사용가치는 이전 체제에서와같이 생산의 기초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교환가치를 위해 필요한 원조요인이지만 그 특이적 내용은 자본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묵인 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개별 자본가에는, 그가 구매하는 노동이 어떠한 특정 사용가치로나 구체화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은 자본을 확대해야 한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특이적 산물인 잉여가치는 생산적 노동과의 교환의 결과로서만 창출된다. 자본에 있어서 그것의 특이적 사용가치를 구성하는 것은, 그것이 실현된 상품의 특정한 유용한 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환가치(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요소로서의 그 성격이다.4)

    “노동 자체는 그 과정이 자본 또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생산적인 소비과정과 같을 때 생산적이다.”5)

    요약하면, 자본주의하에서 생산적 노동을 결정하는 방식은 이전 체제에서 타당성을 지녔던 일반적 결정요인과는 다른데, 이는 자본주의가 “노동력 소비의 생산적 과정”의 수준에서 도입하는 차이 때문이다.

    이 차이는 잉여 노동의 실제적 추출에 있지 않다. 즉 봉건영주나 고대 노예소유주도 농노와 노예의 잉여노동을 처분했다. 잉여노동의 다른 형태들과 잉여가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잉여가치는 새로운 자본으로 전환되지 고대와 봉건제에서처럼 비생산적 방식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잉여가치의 전환이 완결되어야만 자본의 확장(자본축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의 문제는 그래서 자본주의체제에서 생산적 노동을 정의하는 데 근본적이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의 구별은 축적 면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산적 노동과 교환하는 것만이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조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6) 

    그러나 바로 이 수준에서 생산적 노동에 대한 혼란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 사실 잉여가치의 전환 조건들은 그것이 개별 자본가와 관련되는가 아니면 총자본에 관련되는가에 따라 다르다. 

    한 자본가가 자신의 기업이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것은 예외적 경우에 속한다. 자본의 각 분파는 생산의 사회화가 증가할수록 그 복잡성이 증대되는 네트워크 안의 원자 하나일 뿐이다. 개개 자본가는 이러한 네트워크에 대해 가장 파편화된 의식을 가질 뿐이고 실질적으로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 일단 한 상품이 생산되고 나면 그 판매 회로에 유입되고 그것을 생산한 자본가의 영역으로부터는 사라진다. 그 자본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화폐적인 대가를 받아서 자기의 자본의 재구성과 확장에 필요한 상품을 생산 회로로부터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별자본가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총자본의 한 분파에 있어서, 

    “…노동이 생산적이라는 사실은 노동의 결정적 내용, 즉 그 특정한 효용, 또는 그것이 물질화되는 특정한 사용가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7)

    그의 상품의 사용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그 자본가가 그것의 교환가치를 실현하는 데 성공한 순간부터 잉여가치는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생산적 노동의 결정요인은 그 노동의 내용과 독립적이다. 
    반면에 총체 자본은 모든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어서 자체 생산품의 본질적 부분을 스스로 소비한다. 그것이 생산하는 사용가치 내용은 그것의 확대와 실현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조건 짓는다. 

    “축적을 위해서는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즉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즉 생존수단)뿐이다. 따라서 연간 잉여노동의 일부는 투하된 자본의 대체에 필요한 양을 넘는 추가적 생산수단과 생존수단의 생산에 충당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잉여생산물[이것의 가치가 잉여가치다]이 이미 새로운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8) 

    총체 자본, 즉 자본의 전반적인 축적과정의 관점에서(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를 판단하는 문제에 있어서 고려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임) 볼 때,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며 자본축적 과정에서 생산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사용가치 속에 구체화되는 노동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무기(사치품 등)와 같은 상품의 생산에 투입된 노동(산 그리고 죽은)은 비생산적 노동을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사용가치 때문에 자본가가 자신의 소비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국가를 통하여) 구매하는 서비스는 자본의 요소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적 소비를 위해 구매된 상품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생산적 노동을 구성하지 않으며 그 주체는 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다.”9) 

    생산적 노동에 대한 맑스주의자 사이의 혼란은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다. 

    첫 번째로 맑스는 개별자본가의 관점, 또는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는 자로서의 노동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주로 다뤘다. 맑스가 그 문제의 이러한 단일한 측면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설명해준다. 하나는 맑스가 J.B. Say에 대해 그리고 그 문제를 이러한 지형에 위치시킨 Bastiat에 대해 벌인 논쟁이었고, 그리고 맑스가 저술하던 당시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발전과정에서 이 문제의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중요성이 그것이다. (자본의 비생산적 지출은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시작된 시기와 더불어서만 실제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10)

    혼란의 두 번째 원천은 ‘잉여가치’라는 용어의 의미 속에 있는 것 같다. 그 소비가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상품과 서비스, 즉 생산적 과정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상품들만을 일 년 동안 생산하는 한 자본주의 국가를 상정해 보자. (보기를 들어, 무기 또는 사치품의 생산이 전혀 없는 경우를 가정한다.) 첫해 말에 자본가들은 그 사회의 나머지를 배제한 채 그들이 처분할 수 있는 다량의 생산품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잉여가치의 크기, 즉 그 국가의 총자본의 실질 잉여가치의 크기이다. 

    더 나아가 첫해 말에는 추출된 모든 잉여가치를 이전처럼 새로운 생산적 상품생산에  전부를 투여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의 특권화된 상황에 걸맞도록 사치품 산업을 만들기로 하고 다른 나라의 가능한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군수산업을 만들기로 한다고 치자. 이 두 가지 새로운 산업은 임노동 등과 같은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 따라 기능하게 될 것이다.11)

    문제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부문의 자본가들이 거두어드리는 이윤의 본질과 기원은 무엇인가? 이 산업의 노동자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가? 이 부문의 자본가의 이윤과 생산적 부문의 진정한 잉여가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부문의 모든 생산은 자본가들에 의해, 전체로서의 자본가계급에 의해 (무기 산업의 경우 국가기구를 통해) 구매된다는 점을 깨닫자마자 명확해진다. 이러한 산업에서 자본가의 이윤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은 이미 창출된 잉여가치에 의해 지불된다. 총자본은 이러한 비생산적 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노동의 단 한 시간에 의해도 확장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기 확장에 충당될 수 있었을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 분야의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유지에 충당할 것이다. 

    총체 자본 - 또는 이 경우에 국민자본 - 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노동자들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그를 소비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그 부문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잉여노동을 통하여 그 자본가들에게 실질적 잉여가치의 일정량을 처분할 권리를 (‘자본주의 환경’의 법칙에 따라 그들이 투자한 자본에 비례하게 적정한 비율로) 제공한다.

    다소와 샤넬은 자본주의 착취양식에 따라 생산된 상품을 다른 자본가들에게 제공한다. 이러한 상품들의 가치 속에는 노동자들에 의해 제공된 미지불 노동이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노동의 가치로서의 등가물은 물론 자본주의 법칙에 따라 또다시 다소와 샤넬에 속한다. 다른 자본가들은 이러한 상품을 그들 가치로 구매하고 그래서 자기 동료들의 잉여가치를 실현한다. 

    비생산적 부문의 노동력은 그래서 그것을 구매하는 직접 자본과의 관련 속에서는 그가 받은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자본에 제공함으로써 그 생산적 능력을 확인했다. 노동력은 자본을 위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나 총체 자본의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잉여가치를 파괴했다. 

    비생산적 자본주의 부문에 의해 착취되는 노동자는 생산적 부문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이다. 그러나 후자가 창출한 잉여가치가 총자본을 확장하는 실질 잉여가치의 일부분인 반면에 비생산적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는 오직 자신의 직접적인 자본가에게만 이윤의 원천이고 총자본에는 비생산적 비용이다. 

    우리의 출발지점은 무기생산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해법인가?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위기를 막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생산적 노동의 결정 문제를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무기생산은 위기에 대한 해법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답할 수 있게 된다. 

    군사지출을 통한 출구는 또한 각 나라 경제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군사지출은 자본에 그리고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엄청난 낭비다.12) 지난 몇십년간 미국은 평균적으로 매년 잉여의 3분의 1을 군수품으로 전환시켰다. 이 지출이 만일 생산적 상품으로 전환되었다면 미국 경제성장은 (필요한 시장을 발견했다고 가정하고) 33% 가속되었을 것임을 의미한다. 

    대포 한 대의 생산은 자본에 있어서 그 대포에 구체화된 노동의 손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이러한 노동의 불모화를 의미한다. 자본은 과거 노동의 손실을 감당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의 마비라는 짐도 견뎌야 한다. 

    ‘군사적 자극제’가 자본주의의 영원한 확장을 결코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출구로서 그것은 (예를 들어 재건시기에) 보조적 요소일 뿐이며, 어떤 경우라도 그 효과는 재건의 경우처럼 제한된 기간 동안 지속될 뿐이다. 한 해의 잉여를 모두 무기로 전환시킨 나라의 경우 그 해말 경제성장은 총체적으로 멈춘다. 그 나라는 오직 그러한 무장이 수익성이 있게 만듦으로써만 즉, 전쟁을 통해서만 (그것도 그 나라가 승리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경제적 확장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13)

    무기로 전환되는 잉여 부분이 크면 클수록, 이러한 출구의 자극적 효과의 지속기간은 더욱더 짧아지고 그 이윤성에 대한 의문이 더욱 빨리 압박을 가하게 된다. 이 해법이 오래 지연되면 될수록 국민경제에 대한 이러한 비생산적 부담의 하중이 막대해진다. 즉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세계시장에 그 국가의 생산품들의 경쟁력 저하(이러한 상품들의 원가가 군사비를 점점 더 포함하기 때문에)를 가져오고, 이것은 결과되는 시장 상실을 통해서 다시 출구의 부족이라는 내적 문제를 증폭시킨다. 미국 정부가 유럽 국가들이 그 자신들의 군사비를 맡으라고 그 국가들에 가하는 압력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처음부터 함축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즉 군사 생산이 자본의 발전에 그렇게 무익하다면, 왜 세계 모든 나라, 특히 강대국들은 이러한 생산유형에 그들 생산역량의 그렇게 거대한 부분을 바치는 것일까?

    우리는 군수품에 의해 창출된 수요가 출구로서의 특정한 이점을 가지는 것을 보았다. 보기를 들어 그것은 거의 모든 산업 부문들에 영향을 미치지만, 자본이 고도로 집중화되어 있는 부문에 특별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경제적 자극제로서의 그 역할 때문에 어떤 분석가들은 무기 산업의 발전이 시장 부족으로 인한 질식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는 경제의 요구를 채우기 위하여 자본가 편에서 인위적인 출구를 창조하려는 의식적 결정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맞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한다. 당연히 그 일차적 관심은 상품의 교환가치, 화폐적 등가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사용가치가 전혀 없는, 그 어떤 사회적 필요에도 부응하지 않는 상품은 결코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에 설 땅이 없다. 무기를 구매하는 자본주의국가는 그 어떤 다른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가치법칙의 죄수이다. 즉, 그것은 실질적 요구에 상응하는 것만 구매할 수 있다. 마음대로 창출될 수 있는 출구는 파산한 자본가들의 꿈속에서만 존재한다. 무기 산업의 발전은 제국주의 간 적대의 격화와 연결되어 있다. 경쟁하는 열강 사이에서 전적으로 분열된 그리고 모든 경쟁자에게 나누기에는 너무 적은 조각들로 이뤄진 세계에서 각국의 군사적 힘은 그 나라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하고 불가피한 도구가 된다. 세계대전은 한 나라가 이러한 영역에서 어떠한 약점에 대해서라도 지불해야 하는 그 대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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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생산적 비용

    무기만이 자본에 있어서 비생산적 산업인 것은 아니다. 1914년 이래 자본주의 쇠퇴는 여러 가지 비생산적 경제 활동 전체의 아찔할 만큼 어마어마한 성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 모든 비용은 동일한 존재 이유를 갖는데, 그것은 경제체제가 그 자체의 재생산을 확보하려는 노력 속에서 모든 영역에서 직면하는 증대하는 곤경을 조정하는 것이다. 무기는 이러한 활동의 한 부분일 뿐이고 우리가 그것을 별도로 다룬다면 이는 ‘경제의 자극제’로서의 그것의 중요한 역할 때문이다. 

    특별한 중요성이 있는 이러한 유형의 비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①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경찰에서 노동조합기구까지, 복지노동자로부터 사회학 교수까지의 모든 피고용자를 유지하는 비용, 실업급여 등과 같은 지출(보기를 들어 영국은 5년 이상 백만이 넘는 실업자들을 ‘유지했다’!)

    ② 각 나라 또는 각 회사 내의 경제적 곤란을 조정하는 비용.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 행정의 엄청난 팽창 즉, 기획부서, 조절기관 등의 놀랄만한 팽창. 이 모든 비용에 부가적으로 실패기업을 보조하고, 자본주의하에서 점점 쇠락하는 농업을 보조하는 비용들이 첨가될 필요가 있다. 즉,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지불, 추수와 잉여의 파괴, 농업시장을 안정화 시키는 비용 등. 끊임없이 판매 문제에 직면한 사기업들의 비용이 있는데, 마케팅 비용, 관리비, 특히 광고비 등을 들 수 있다(이 비용은 일반적으로 국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낮지만, 그 절약 효과는 관료적 무책임성이 배분망 안에서 수반하는 엄청난 낭비에 의해 상쇄된다.) 제3의 부문의 발전은 주로 이러한 유형의 비생산적 비용의 결과이다.

    ③ 시장의 부족을 보상할 필요에 직면한 특정 국가(미국, 일정 정도 유럽과 일본)에서 기업의 절망적 행위로부터 발생한 비용. 이러한 현상의 가장 충격적인 측면은 계획된 위축을 겨냥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소비재(자동차, 양말, 전자기기 등)의 사용가치 감소 속에서 있다. 이러한 기법은 유행을 ‘만들고’ 그러므로 유행이 ‘지나가게’ 만들려 의도된 광고에 의해 강화된다. 이러한 일탈 중에서 자동차를 보기로 들 수 있는데 처음에는 사회적 필요로부터 출발했으나 점차 사회적 재난이 되었다. 자동차의 생산적 국면(노동력의 이동수단)은 점점 유해한 쓰레기로서의 그 상품의 비생산적 국면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④ 특히 국제관계로부터 발생하는 비용으로, 특히 군사비용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과 소련의 군사비의 합은 라틴아메리카, 인도, 파키스탄의 국민소득의 합보다 크다. 중동국가들도 GNP의 25%를 군사비에 쏟아붓는다. 지난 10년간 세계자본은 20세기 50년간(1, 2차 세계대전 포함)보다 더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비생산적 부문의 불균형적 성장: 쇠퇴의 특징

    비생산적 비용은 자본주의 상승기에도 존재했다. 보기를 들어 지배계급을 위한 사치품은 자본주의 시작 이래 존재해왔다. 경찰, 군대, 국가의 행정비용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이러한 지출의 규모는 지난 60년 동안 같은 유형의 비용과 비교할 수가 없다. 

    상승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이러한 ‘인위적인’ 비용의 비생산적 내용은 그 당시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에 기본적이었기 때문에 약화되었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그 이전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을 때, 전 세계에 그 기법을 적용하고 있을 때, 그 생산 관계는 또한 생산적인 힘이었다. 그 당시 생산 관계 유지에 필요한 일반 비용은 이러한 관계의 생산적 본질에 의해 상쇄되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국가가 예를 들어 세계의 어느 부분에서 자본주의 관계를 부과할 때 세계자본주의는 풍부해졌다. 이러한 군대들은 어떤 경우에는 세계자본주의에 있어서 진정한 생산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가 경쟁하는 열강 사이에서 분할되자 완전히 변했다. 전쟁은 전리품의 재분배를 가져올 뿐, 새로운 정복은 불가능해졌다. 그 시기부터 한 자본주의 강대국은 다른 국가를 희생함으로써만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세계자본에 전쟁은 내부적 분열과 재난 낭비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도구이기를 멈추고 족쇄가 되면, 그것들이 수반하는 그 모든 ‘인위적인’ 비용은 단순한 낭비가 된다. 이러한 인위적인 비용의 팽창은 그 모순만큼이나 격렬하게 자본주의에 부과되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50년간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는 ‘긴축 계획’, 즉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시도, 정부지출과 비생산적 비용 일반의 통제 불가능한 팽창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국제경쟁이 심각하게 악화될 때마다 이러한 비용의 문제가 더 첨예하게 제기되었다.14)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체계적으로 실패했다. 닉슨의 긴축 계획(1972.8.15) 그리고 그것과 함께 진행된 반(反)인플레이션 예산안의 경우, 수많은 연설에도 불구하고 미국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천인 군사비는 한층 증가되었다. 비생산적 비용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어떤 질병에는 약도 되고 독도 되는 약처럼 기능한다. 병이 악화될수록 복용량을 늘리게 되지만 복용량을 늘리게 되면 병은 더 악화된다. 인플레이션은 현대 자본주의의 암이며 비생산적 비용은 그 영양의 주요 원천이다. 자본주의가 어려움에 처할수록, 인위적인 비용을 더욱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악순환, 임노동체제의 핵심을 썩게 하는 괴저증(壞疽症)은 진정한 병인 자본주의의 쇠퇴 증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귀결은 지난 50년이 넘게 알려져 왔는데 그것은 세계전쟁인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인가, 즉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이다. 


    <주>

    1. Marx, 「Materiaux Pour L’Economie”」 in Qeuvres, Vol.2, La Pleiade, 387쪽

    2. Marx, 「자본론」 1권, 5부, 16장, in Qeuvres, Vol.2, La Pleiade, 1001쪽 (우리는 이 프랑스판을 인용한다. 왜냐하면 문제 되는 구절이 영문번역보다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3. Marx, 「Capital」, Vol. 1, Pt.3, Chap. Ⅶ, London 1970, p.180-181 

    4. Marx, 「Materiaux Pour L’Economie”, in Qeuvres」, Vol.2, La Pleiade, 392쪽 

    5. 윗글, 388쪽

    6. 윗글, 398쪽

    7. 윗글, 393쪽

    8. Marx, 「자본론」 1권, 7편, 24장, 비봉출판사, 2002, 790-791쪽

    9. Marx, 「Materiaux Pour L’Economie」, in Qeuvres, Vol.2, La Pleiade, 390쪽. 이러한 생산력 정의에서 오직“윤리적 기준”만을 보는 "건조하고 빈약한 이론"으로 피난할 때 H.Weber 같은 ‘맑스주의자들’이 보인 맑스주의와 자본주의적 실재에 대한 무지를 우리는 지적할 수 있다. 

    10.  자본주의하에서 생산적 노동의 정의는 체제의 특정한 발전의 지점에서 이 노동의 유용한 내용과 관련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자본주의적 메뉴팩쳐 생산자들은 무기, 화약, 사치 의류 등 같은 ‘비생산적’ 상품을 주로 생산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주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자본주의 부문이 자본주의 이전의 구조(본질적으로 봉건적인)에 의해 지배되던 사회생산의 과정 내의 단순한 작업장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업 및 수공업 생산은, 극히 낮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으로 기능했던, 즉 산 노동이 죽은 노동보다 우세했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과 소비재를 위한 기본 원료를 자본주의적 매뉴팩쳐 생산자들에게 여전히 공급할 수 있었다(최초의 작업장은 종종, 옛날 방식으로 일하지만 한 기업주에 의한 임노동체제에 복속된 장인들의 단순한 연합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의 사용가치 내용은 자본의 발전에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생산 전체를 포괄하는 때(자본의 실질적 지배)에서야 생산적 노동의 정의는 그것의 구체적 유용성을 참작해야 하게 된다.
    그래서 엥겔스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14세기 초에 폭약이 아라비아에서 서유럽으로 건너왔고, 초등학생이면 다 아는 바대로 이 폭약은 작전 전반에 변혁을 일으켰다. 그러나 폭약과 화기의 도입은 결코 폭력 행위가 아니었으며 하나의 공업적 진보, 따라서 경제적인 진보였다. 물건들의 생산이 목적이든 파괴가 목적이든 공업은 어디까지나 공업이다” (Engels,「반뒤링」,「맑스엥겔스 저작선집 5권」, 박종철출판사, 1994, 184쪽)

    앞에서 언급한 팸플릿에서 불행히도 이 주제를 다뤘던 웨버는 무기생산 즉 “현대적 소비재”에 헌신하는 오늘날의 산업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산업을 구성한다고 추론했다. 웨버씨는 다소 공장이 폭격기를 생산하는가 민간항공기를 생산하는가에 따라서 그 노동의 생산적 또는 비생산적 본질에서 어떤 것이 변화하는지에 대해 왜 생각해 봐야만 하는지를 진정으로 보지 않는다. 15세기에 모든 자본주의 기업들은 그들 스스로 오직 무기생산에만 집중하고도 여전히 일정한 확장을 이룰 수 있었다. 웨버씨는 그와 똑같은 것을 오늘날 그려보며 이것이 자본주의 확장을 나타낸다고 결론짓는데, 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주장 논리 속에 포함된다.

    11. 이 나라는 위에 언급한 사례(다소와 페루의 경우)에서처럼 이러한 산업의 비생산적 영향을 다른 나라에 굴절시킬 수 있는 외부적 교역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우리는 가정하고 있다. 

    12. 이러한 종류의 생산에 투여된 산 노동과 생산수단은 생산적이지 않고, 생산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일반 추상의 관점에서, 즉 노동과정의 관점에서 정의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불모화되고 폐기된 생산력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발전된 생산의 과학과 기술만이, 생산 후에도 남아 존재하는 만큼, 그리고 그들이 생산재 창조에 적용될 수 있는 정도에 한해서, 생산력이다. 

    13. 러시아가 2차 세계대전 말 자신의 영토로 가져가기 위해서 체코슬로바키아와 몽골리아의 모든 공장을 분해한 것은 군사 생산의 ‘이윤성’의 극적인 보기이다.

    14. 살인 자동차와 그 관련 제품들의 적, 랄프 네이더 같은 사람이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소비자들”의 분노로부터만 나오지는 않는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작성
    오세철 옮김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pamphlets/decadence/c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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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

    자본주의의 쇠퇴 (The decadence of capitalism) 


    서론


    1장 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 <경제적 조건의 물질적 변환>


    1장 계급사회의 번영과 몰락 <상부구조의 전복>


    2장 위기와 쇠퇴


    3장 자본주의에서의 쇠퇴


    4장 쇠퇴: 생산력의 총체적 정지?


    5장 1914년 전쟁이라는 전환점

    6장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생산력 성장의 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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