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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코르쉬] 맑스주의와 사회화 3
  • 조회 수: 1337, 2021-04-19 13:05:42(2021-04-04)
  • 맑스주의와 사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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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주의 변증법

     


    프롤레타리아계급 투쟁의 실천에 대한 맑스의 이론적 성취의 막대한 중요성은, 그가 최초로 부르주아적 지평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점의 총체적 내용을 간결하게 융합시켰다는 것과이다. 또한 그가 그 관점을 견고한 통일성 즉 과학적 체계의 살아있는 총체성 속에 형식적으로 개념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유는 자신의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에서의 필연성에 의해 생겨났다. 칼 맑스는 (부르주아 악마를 숭배하는 어떤 사람들이 아주 진지하게 상상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을 창조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을 창조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의 새로운 내용에 적합한 이론적, 과학적 표현을 창조했고, 동시에 그것에 의해 이러한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을 그 존재의 더 높은 수준으로 격상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연적계급관점이 이론적 개념과 명제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론적 명제들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체계로 강력하게 종합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 역사적 운동의 단지 수동적인 반영으로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 전환은 현실 역사적 과정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형성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운동은 독립적이고 통일된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의 발전 없이는 독립적으로도, “통일된것으로도 될 수 없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숙하고 국가적, 국제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이, 분산되고 조직되지 않은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흥분과 충동과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된 계급의식으로서,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이 처음으로 자신의 성숙한 표현을 발견하는 분산된 무정형의 감정과 시각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실천의 관점에서, 코뮤니스트 선언자본에서 칼 맑스가 표현했듯이, 사회주의의 과학을 향한 이론적 진화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이 3 신분의 부르주아적 혁명운동으로부터 점차 이탈하고 독립적이고 통일된 계급으로 자신을 구성한, 그 거대한 역사적 발전과정 내에서 아주 필수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오직 엄격한 과학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근대 사회주의에 포함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시각의 복합물은 그것이 기원상 불가분하게 연결된 부르주아적 시각으로부터 자신을 근본적으로 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직 과학이 됨으로써만 사회주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사회주의를 위해 설정한 임무를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임무는 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 행동의 역사적 조건과 본성을 규명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 행동의 이론적 표현이 되는 것, 그리하여 행동이 요청되고 오늘날 억압당하는 그 계급이 자신에게 고유한 행동의 조건과 본성에 대하여 의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앞선 설명에서 우리는 과학적 형식의 근대 사회주의 혹은 맑스의 사회주의의 실천적 의미를 특징 지운 한편, 동시에 우리는 맑스가 적용한 변증법적 방법의 의미도 서술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내용이 분명히 그것의 과학적 정식화 이전의 아직 형식을 갖추지 못한 관점(프롤레타리아계급의 관점)으로서 존재하는 한, 마찬가지로 분명히 우리 앞의 맑스 엥겔스 저작 속에 있는 과학적 내용이 집중되어 있는 과학적 형식도 그러하다. 따라서 적절히 일컬어진 과학적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맑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변증법적 방법으로 가리킨 그 사유양식의 적용에 의한 산물이다. 그리고 일부 현대 맑스주의자들이 상상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역사적 우연 덕분에 맑스가 자신의 변증법적 방법의 적용으로 생산한 과학적 명제들이, 오늘날 그 방법으로부터 마음대로 분리될 수 있고 단순히 재생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과학의 진보 때문에 이 방법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누구든 이런 식으로 말하는 자는 맑스주의 변증법의 가장 중요한 양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오늘날(모든 사회적인, 그래서 이른바 지적인 것도 포함하는, 생활의 영역에서 늘어나는 계급투쟁의 시대에) 그 방법이 본래 비판적이고 혁명적이기를그만둘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수 있겠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동시에 형이상학적 사유양식”(“지난 세기 사유에 특유한 약점”)변증법의 모든 초기 형태들(특히 피히테-셸링-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 맞서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새로운 방법을 대립시켰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변증법이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그리고 변증법적인) 사유양식과 구별되고, 그 속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 시각의 새로운 내용이 프롤레타리아계급 투쟁 내에서 형성되었던, 그 특유의 사유양식을 대표한다는 것을 완전히 조망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진정한 존재에 상응하는 이론적, 과학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그런 사람만이 이러한 변증법적 사유양식이, 그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형식만을대표하듯이, 결과적으로 물질[질료]에 무관하고 주변적인 것일 수도 있어서, 동일한 사유의 물질[질료]적 내용이 마찬가지로 잘 혹은 훨씬 더 낫게 또 다른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투쟁의 야만적이고 미개한 형식과는 다른 형식속에서 부르주아적 경제, 사회, 정치의 질서에 맞선 실천적 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통념을 특정 현대 맑스주의자가 제기할 때와 아주 유사하다. 혹은 동일한 그 맑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실정적인 임무인 코뮤니스트 사회의 실현을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와 다른 수단으로, 이를테면 부르주아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수단으로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우롱할 때와도 아주 유사하다. “형식이 그 내용의 형식이 아니라면, 형식은 무가치하다라는 명제를 초기 저작에 이미 쓴 맑스 자신은 이러한 것을 전혀 다르게 사유했다. 나중에 맑스는, 역사적, 사회적인 발전의 진정한 이해(, 동시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의식적으로 혁명적인 이해), 그러니까 과학적사회주의의 구체적인 본질을 구성한 이 이해는 변증법적 방법의 의식적인 적용에 의해서만 초래될 수 있음을 항상 재차 강조하였다. 물론, 맑스주의의 과학적 형식이 정초된 이 새로운, 또는 프롤레타리아변증법은 오직 보통의, 편협한 형이상적 사유방식과만 극도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이 변증법은 그 근본입장에서 독일 철학자 헤겔이 가장 포괄적인 형식을 정초한 부르주아 변증법과도 현격히 다른것이고, 명확한 의미에서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하는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러한 차이와 대조의 여러 가지 결과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비실천적이고 불필요하다.

     

    우리가 지적한 이 차이와 대조가 예외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계급운동이 적절한 이론적 표현을 발견하는 바로 그 형태로서, 맑스의 프롤레타리아변증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충분하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혹은 관계의 가장 어렴풋한 관념이라도 가진다면, 그렇지 않을 때는 파악하기 어려운 일련의 모든 현상을 즉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오늘날의 부르주아지가, 그들이 3 신분으로서 봉건 경제질서와 그것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귀족정과 교회)에 맞서 거칠고 영웅적으로 계속 커져가는 계급투쟁을 해야 했던 시대와 그들의 대변인 아베 시이예스가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맞서 아주 변증법적인분노를 퍼부었던 시대를 모조리 잊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 “3 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이다. 현존 질서에서 제3 신분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3 신분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어떤 것이고자 한다.” 봉건국가가 몰락하고 부르주아계급이 부르주아국가에서 어떤 것만이 아닌 모든 것이 되었을 때, 오늘날 부르주아지에게 변증법의 문제에 관한 물음에는 오직 두 가지 입장만 있다. 변증법이란 오늘날 완전히 철 지난 입장이며, 현실적인 사람, 훌륭한 시민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관여하지 않아야 할 자연적 장애를 초월하는 철학적 사유의 한 가지 고상한 광기로서 역사적으로 존중할만한 것이거나. 혹은 변증법적 운동이란 지금이라도, 모든 미래를 위하여, 부르주아계급의 마지막 혁명적 철학자인 헤겔이 한때 정지시켰던 그 절대적인 종결점에서 정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사회가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 건널 수 없는 그 경계를 변증법은 그 개념들 속에서 건너지 말아야 한다. 부르주아사회의 결정판이자, 모든 대립이 해소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종합은 국가이다. 그것의 완전한 발전 속에서 모든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의 완전한 이행의 본보기가 되는 까닭에 부르주아 계급투쟁의 최종 목표인, 부르주아국가의 맞은편에는 그 결과 다른 어떤 부르주아 의식에 대한 변증법적 반정립도, 어떤 화해할 수 없는 대립자도 없다. 그럼에도 이론과 실천에서 부르주아적 이념의 절대적 이행에 맞설 자라면 누구나 부르주아 세계의 텅 빈 원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부르주아적 법률 외부에, 부르주아적 자유와 부르주아적 평화 외부에, 따라서 모든 부르주아적 철학과 과학의 외부에 있고자 한다. 현대 부르주아사회를 인류를 위해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고 가능한 사회생활 형태라고 운명지우는 이 부르주아적 입장과 관련하는 한, 왜 부르주아국가 이념에서 부르주아사회의 이상적 결론을 발견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이 오로지 가능하고 생각할 수 있는 변증법의 형태일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듯이, 이 부르주아지의 관념론적 변증법, “더는 부정되거나 은폐될 수 없는 절대적으로 강제적인 요구, 즉 빈곤[궁핍]의 실천적 표현에 의해서 이 모든 부르주아 세계와 부르주아국가에 맞선 반란으로 곧장 내몰리는, 현대 부르주아사회 안에 있는 저 다른 계급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다. 모든 생활 조건, 즉 모든 물질적 존재 속에서 이 계급은 이미 형식적인 반정립, 즉 부르주아사회와 부르주아국가에 맞선 절대적 대립을 진실로 표현한다. 사적 소유 자체의 내적 발전 메커니즘을 통해서, 그 의지에 반하여 진행된 물질의 바로 그 본성으로 인한 독립적이고 무의식적인 발전을 통해서부르주아사회 내에서 만들어진 이 계급에게, 혁명적 목표와 행동은 현대 부르주아사회의 모든 조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생활조건에 의해서 명백하고 돌이킬 수 없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르주아적이고 관념론적인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적이고 유물론적인, 새로운 혁명적 변증법의 가치는 이러한 사회 생활상태로부터의 동등한 빈곤[궁핍]을 지켜본다. 부르주아지의 관념론적 변증법이 부르주아사회 속에 오직 이념으로”, 즉 순수하고 민주주의적인 부르주아국가 속에 존재하는 빈곤의 물질적 대립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적으로초월 된 대립은, 심지어 그것이 크고 혹독하게 계속 증대되는 물질적인사회현실 속에서 해소되지 못한 채 계속 존재하게 된다. 그것에 반해서, 계급 없는 코뮤니스트 사회의 물질적 현실로서, 이 부르주아계급 사회와 부르주아계급 국가의 억압으로 인한 부르주아적 부(“자본”)과 프롤레타리아적 곤궁 사이의 물질적 대립을 실제로 폐지하는 것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유물변증법의 본질이 있다. 따라서 유물변증법은 해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투쟁의 이론적 표현과학적 사회주의를 위하여 필수적인 방법론적 토대를 형성한다.  <계속>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pp 117-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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