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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코르쉬] 맑스주의와 사회화 4
  • 조회 수: 1540, 2021-04-19 13:06:07(2021-04-05)
  • 맑스주의와 사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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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물변증법에 관하여

     


    2년 전 저널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21호에 발표된 맑스주의의 기치 아래라는 논설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코뮤니즘이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두 가지 거대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유물론적 입장에서 헤겔의 변증법의 체계적 연구를 조직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변증법이란 맑스가 자본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적, 정치적 저작에서도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처럼 성공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때 레닌은 어떤 이들이 신헤겔주의의 관념론 철학을 경유하여맑스주의-코뮤니스트 이론에 이데올로기적 샛길을 몰래 갖고 들어올 것이라는 큰 걱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 걱정은 누군가가 언제든 레닌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는 실천적 시도에 착수하려고 노력하자마자, 오늘날 우리의 지도적 동지들이 흔히 표명하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가 이 논쟁을 입증한다. 1년 전, 80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 출판사가 헤겔의 논리학 판본을 출간했을 때, 1923520일 자 적기(Red Flag)에 나온 이 새로운 헤겔의 위험성에 대한 형식적 경고는, 헤겔변증법을 공부함에 있어서 전체 철학사의 비판적 인식과 더 나아가 헤겔 시대 이후 자연과학의 주요한 결과 및 방법에 대한 정확한 숙지가 결여된 자들 모두에게 행해졌다.” 8일 뒤, 1923527일 자 적기에서 당시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내에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지배적인 분파의 또 다른 대표는, 게오르그 루카치를 소론 선집을 도구 삼아 순전히 돈벌이가 되는 변증법적 방법의 논의 발단 내지는 단지 기회라도 제공한그의 시도 때문에 정식으로 비난했다.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학술지인터내셔널은 루카치의 모든 책을 단순성을 이유로 깡그리 무시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최신호(33)에 수록된 자신의 소론 레닌주의의 선전보급에서, 벨라 쿤은 이미 통용되는 일탈에만 주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정치적 명성이 없는 일부 코뮤니스트 정치평론가들이 정통 맑스주의에서 출발함에도 가까운 장래에 수정주의적 내규(부칙)로 일탈할 것또한 관찰하고 있다(!).

     

    수많은 이러한 사례들에 비추어, 코뮤니스트 계몽작업에서 우리가 맑스 엥겔스의 변증법적 방법뿐만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또한 유물론적 입장에서 연구를 조직해야 한다는, (레닌이 일찍이 제기하고 1922년 소론에서 마지막으로 제기한) 상세한 요구가 코민테른의 지도적 이론계에서 충분한 이해를 구하지 못하고 있거니와,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보다 적게 이해되고 있음이 시사될 수 있다. 우리가 이 현상의 원인을 찾는다면 구별해야 한다. 어떤 분파(부하린의 역사유물론 이론이 그 전형인데)에게, 모든 철학은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완전한 승리 이후에 코뮤니스트 사회의 두 번째 단계에서만 도달되어야 하는 지점, 즉 계몽되지 않은 과거를 초월해버린 입장에 근본적으로 이미 도달했다. 이 동지들은 과학적방법의 물음이 자연과학의 경험적 방법과 이에 상응하는 사회과학의 실증적, 역사적 방법에서 단번에 해결된 것으로 믿는다. 그들이 거의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시민계급이 처음부터 자신의 권력투쟁에 착수하면서 내걸었던 표어(war-cry)인 바로 이 방법이 오늘날 여전히 부르주아 특유의 과학 연구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부르주아 사회가 쇠퇴하는 현시기에 근대 부르주아 과학의 대표자들은 이 방법을 간혹 이론적으로 부인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집착하려 한다.

     

    다른 분파에 이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이 경우 사람들은 아무리 유물론적으로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고유한 경험으로부터 이 위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헤겔 변증법에 자주 노출되는 만큼 실로 은밀하게 그 희생자가 되리라는 이유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에 전념하는 것에서 위험을 본다. 이를테면 다소 뻔뻔스럽게 떠벌리는 이 단언은 인터내셔널 6~9(19235월 자)와 동시에 모스크바 코뮤니스트 아카데미의 정보지에 발표된 A. 탈하이머의 변증법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작은 논설의 사례에 의해서 설명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숨김없이 증명된다. 이 논설에서 탈하이머 동지는, 맑스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문제로부터 분리된 이 유물변증법적방법을 다루는 것은 더는 실천적이지도 않고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다는, 프란츠 메링의 테제(나도 공유하고 지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와 동맹한다. 탈하이머 동지는, 비록 메링이 변증법적 방법의 추상적 취급을 거부한 것은 정확한 핵심을 그 자체로 대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목표를 벗어난 것이라고 선언한다. 변증법을 성취/이해/산출(work out)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세계의 가장 진보적인 부분인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포괄적이고 정연한 세계관(!), 즉 투쟁의 실천적 요구와 사회주의 건설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요구가 일어나기때문이고, 이 세계관이 자체 내에 변증법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탈하이머 동지는 계속하여, 그러한 변증법을 구성할 때, “방법만이 아니라 문제/소재(matter)와도 관련해서헤겔과 비판적으로 동맹해야 한다고 말한다. 헤겔의 천재적인 진보성은 모든 사유범주의 내적이고 총괄적인 체계적 연관이 드러나야 한다는 그의 요구에 있다. 이 임무는 유물변증법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헤겔의 방법은 단지 전도되어야 할 뿐이다. 헤겔 변증법에 의해서 유물변증법은 사유에 의해서 현실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의해서 사유가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 간결하게나마 탈하이머 동지의 이러한 말들이, 그가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변증법적 방법을 상상할 수 없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탈하이머 동지가 관념론적 변증법론자라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는 다른 데서(레닌과 코민테른), 탈하이머 동지가 실제로는 전혀 변증법적이지 않고 한낱 실증주의인 나중의 소론에서, 외관상 유물변증법적 방법을 천명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때 우리는 탈하이머 동지가 변증법론자인 이상, 그가 관념론적 변증법론자이고 변증법적 방법을 오직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의 형태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언급을 보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개념화에서 유물변증법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맑스와 레닌이 유물론적으로 적용한 헤겔 변증법을 언급함으로써 실증적으로 그것의 증명에 도달하려 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발표한 맑스주의와 철학의 관계에 관한 조사의 결과와 연관 지으려 한다.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으로부터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으로의 이행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변경되지 않은 채 유지될 방법을 순전한 전도에 의해서, 즉 순전한 뒤집어놓기(바로 세우기)”에 의해서 성취되는 단순한 문제라는 피상적인 통념을 필요 없게 만들어야 할 때이다. 확실히 맑스에게는, 그가 추상적 방식으로 헤겔의 방법과 자신의 방법 간의 차이를 순전한 대조로 특징짓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문으로부터 맑스의 방법의 의미를 규정하지 않고 대신 맑스의 이론적 실천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방법의 이행이 다른 모든 이행처럼 한낱 추상적인 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금세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전경제학이 리카도의 신비화되고 추상적이며 비역사적인 형태로 가치론을 발전시킬 때와 동시기에, 독일 고전철학도 마찬가지로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부르주아 철학의 걸림돌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리카도의 가치론처럼, “변증법적 방법은 동시기에 부르주아사회의 혁명적 시기에 발전했고, 이미 그 귀결에서 부르주아사회 너머의 길을 보여준다(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이 독립적으로부르주아사회에 직면하게 되기 전까지는, 부르주아지의 실천적, 혁명적 운동이 부분적으로 부르주아사회 너머도 지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부르주아 경제학과 부르주아 철학이 제시한 이 모든 견해들은 최종심급에서 순수한견해로 머물러야만 했고, 그 개념은 재구성된 존재, 그 이론은 이 존재에 대한 그저 수동적인 반성으로, 그러니까 맑스의 더 정확한 협의적 표현으로서 현실의 이데올로기로 머물러야만 했다. 부르주아 경제학과 부르주아 철학은 모순”, 즉 부르주아 경제와 부르주아 사유의 이율배반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가장 명쾌하게 해명할 수 있었지만, 결국 모순이 압도했다. 오직 이러한 금지를 깰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새로운 과학, 즉 부르주아 과학과는 달리 더는 한낱 순수한이론적 과학만이 아니라, 동시에 혁명적 실천인 과학일 뿐이다. 칼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유물변증법은, 사회생활의 현실 속 이러한 모순의 해소에 양자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귀결되며, 동시에 그것에 의하여 이 사회현실의 현실적 구성요소인 사유의 현실에 귀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과 그의 유물변증법적 방법에, 부르주아 철학의 방법이 결코 가진 적이 없으며, 부르주아 철학 발전의 마지막이고, 정점이자 제일 풍부한 헤겔에게도 없는 힘이 있다고 믿는 그때의 칼 맑스를 이해해야 한다. 바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마지막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속에서 모든 순수한 인식행위와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도 분명하게 여전히 잔존하는 직접성(무매개성)” 혹은 추상의 족쇄를,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의 발전이 실천적 경향이 됨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의 이행은] 여기에 있는 것이지, 관념론적 변증법 즉 고전 부르주아 철학의 더 나아간 혁명적 발전을, 칼 맑스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새로운 과학과 실천의 방법으로서 이론적으로 개념화시키고 마찬가지로 레닌이 이론과 실천에 적용한, 유물변증법으로 둔갑시키는, 순전히 추상적인 전도또는 뒤집어놓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의 부르주아 변증법으로부터 맑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변증법으로의 이행을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한다면, 그 즉시 우리는 유물변증법의 독립적인 체계가 가능하다는 전적으로 부조리한 관념을 얻게 된다. 오직 관념론적 변증법론자만이, 일부는 우리의 실천, 과학, 철학에 의식적으로 적용되고 다른 일부는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 본능적,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사유형식의 총체성(사유의 규정, 즉 범주), 우리가 직관, 상상, 열망하는 주요동기이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그 행위가 그 속에서 은폐되는 물질로부터 해방하려는 시도와 물질을 그 자체로 분리된 것으로 검사하는 시도를 떠맡고자 할 것이다.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관념론적 변증법론자, 시민 헤겔은 이미 이 입장의 비진리를 부분적으로 간파했고 논리적 반성에 내용을 도입하였다(라쏜 제2논리학, 16쪽의 서문을 보라). 그러나 이 추상적 방법은 유물변증법론자에게 전적으로 부조리하다. 그 각각의 구체적 역사적 내용으로부터 유리된 현실의 유물론적변증법은 사유 규정과 그들 간의 관계에 관해 전혀 언급할 수 없다. 오직 관념론적인, 부르주아적 변증법의 입장에서만, 변증법이 모든 사유 범주의 내적이고 총괄적인 체계적 연관으로서 사유 규정의 연관을 정밀하게 그려야 한다는 탈하이머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다. 오히려 유물변증법의 입장에서, 칼 맑스가 경제학의 범주에 관하여 말한 그 문장은 범주의 연관 혹은 사유 규정 일반에 적용되어야 한다. “경제학의 범주이념에서의연관에서도(맑스는 그것을 닳아빠진 개념이라며 프루동을 격파했다), “내적 체계적 연관에서도 서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범주의 외관상 순수하게 논리적, 체계적인 연속조차도, 경제학의 범주가 근대 부르주아사회에서 서로 간에 맺는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역사적 현실과 실천의 변화와 더불어 사유 규정과 모든 그 연관 또한 달라진다. 사유 규정과 모든 그 연관의 역사적 맥락을 조망하는 것과 사유규정과 그 추상적 연관을 체계 속으로 운반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론 속에서 오직 유물론적으로전도되지만, 실제적 현실에서는 구식이며 변치 않는 부르주아 철학의 관념론적변증법으로 남아있는 사유양식을 위하여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유물변증법을 포기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유물변증법은 그것에 특유한 추상인 물질로써 실천적인 과학으로 가르칠 수 없으며, 이른바 사례로도 가르칠 수 없다. “유물변증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천에서만, 그리고 이 혁명적 실천에 내재적인 현실의 구성요소인 이론에서만 오직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계속>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pp 117-144.


    <이전 글>


    맑스주의와 사회화 1 : 서론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339925



    맑스주의와 사회화 2 : 사회화의 기초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339931



    맑스주의와 사회화 3 : 맑스주의 변증법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339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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