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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맑스주의와 사회화 10 : 노동자 통제 III
  • 조회 수: 1165, 2021-04-22 15:00:40(2021-04-22)

  • 맑스주의와 사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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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통제

    III

    

    노동자가 자기 조직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를 그들이 묵인한 결과였다. 조직노동자나 비조직노동자가 똑같이, 시장 경제가 그들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었고 발전 과정에서 더 한 층의 개선을 약속했기 때문에, 시장 경제에 순응했다. 그런 비혁명적인 상황에서 효과적인 조직의 형태는 분명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정당과 중앙에서 통제되는 비즈니스 노동조합이었다. 계몽된 부르주아지 역시 후자를 집단적 동의에 의한 산업 평화의 도구로 보았다. 자본가들은 더는 노동자들과 대면하지 않고 그들의 대표들과 대면했는데, 노동자 대표들의 존재는 자본-노동 시장의 존재, 즉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존재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의 조직에 대한 노동자들의 만족은 사회 변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 상실을 반영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더는 진정한 노동계급의 열망에 의해 지지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을 휘어잡은 배외주의(chauvinism)에서 극적으로 빛났다.

     

    좌익 급진주의는 그들의 개량주의적 적수들에 의해 대재앙의 정치로 지적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의 생계 수준 악화뿐 아니라 결국에는 혁명으로 이끌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만큼 파괴적인 경제 위기도 예상했다. 그들은 혁명에 필요한 객관적 조건이 결여된 혁명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상 어떤 사회 혁명도 사회경제적 재앙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에 실현된 혁명들은 허약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재앙적인 조건의 결과였고 그 혁명들은 처음으로 노동자 통제 문제와 사회주의의 실현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제기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패배한 전쟁 과정의 점차 참을 수 없는 조건에 저항하는 자연 발생적인 운동의 결과였다. 파업과 시위는 일부 군대의 지지를 받는 전반적인 봉기로 확대되었고 차르 정부의 붕괴를 낳았다.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폭넓은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집단으로부터 첫 번째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사회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이 혁명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1905년 혁명에서보다 더 큰 역할을 수행했다. 1905년 때처럼 1917년에도, 소비에트들은 처음에는 임시 정부를 대체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과정에서 소비에트들은 점점 더 큰 책임을 떠안았다. 실질적으로, 권력은 소비에트와 정부에 의해 공유되었다. 악화되는 상황에서 운동은 더욱 급진화되고 부르주아지와 사회주의 정당들의 정책은 흔들렸는데, 이러한 상황이 볼셰비키를 결정적인 소비에트들에서 다수파로 만들었고,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국면을 끝내는 10월 혁명으로 나아가게 했다.

     

    혁명운동 내에서 볼셰비키의 힘이 증가한 것은 반란을 일으킨 대중의 실질적인 목표, 즉 전쟁 종결과 농민에 의한 토지 징발과 분배에 볼셰비키가 무조건적으로 순응한 탓이었다. 19174월에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레닌은 그에게는 소비에트의 존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추구를 대신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들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레닌이 혁명 준비를 요구했을 때, 그는 소비에트가 아니라 볼셰비키에 의한 국가 권력 행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소비에트 대표의 다수가 볼셰비키이거나 볼셰비키를 지지했으므로, 레닌은 소비에트에 의해 형성된 정부는 볼셰비키 정부일 것임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물론 일부 사회혁명당 좌파와 좌파 사회당원들이 새로운 정부에서 직책을 얻었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정부 지배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이 계속해서 볼셰비키를 그들의 소비에트 대표로 선출해야 할 것이었다. 한때 다수였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이 소수파가 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볼셰비키에게도 사정은 다시 그렇게 변할 수 있었다. 무기한으로 권력을 보유한다는 것은 볼셰비키 당을 위해 정부의 독점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레닌이 소비에트 권력을 볼셰비키 당의 권력과 동일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볼셰비키의 권력 독점에서 소비에트 통치의 실현을 보았다. 결국 의회제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주의냐 아니면 부르주아 지배의 복귀를 막을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냐 하는 선택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민혁명의 전위로 생각하면서, 볼셰비키는 스스로를 위해서는 못할 것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하기를 원했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소비에트들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사회 개량주의적 동맹 세력들의 약속에 그들의 권력의 지위를 내어줄 수 있었다. 혁명의 사회주의적성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가 볼셰비키의 소비에트로 남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소비에트 체제 내외부에서 모든 반 볼셰비키 세력에 대한 억압을 요구할지라도 말이다. 짧은 시간 안에 소비에트 체제는 볼셰비키의 독재가 되었다. 무력화된 소비에트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만 유지되었다.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으로 승리를 얻었지만, 볼셰비키 정부는 그 내용을 노동자 통제로 축소했다. 처음에는 다소 조심스럽게 그 사회주의화 강령을 진행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수중에 있는 산업체들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독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노동자 통제에 관한 첫 번째 법령은 이 통제를 기업체의 재정뿐 아니라 원재료와 최종 생산물의 생산, 비축, 구매, 판매에 대한통제로 확대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위원회, 직장 위원회, 소비에트 고참자들 같은 선출된 조직을 통해 이러한 통제를 행사한다. 사무실 직원이나 기술 인력 또한 이러한 위원회들에 대표를 보낼 것이다. ······ 노동자 통제 기관들은 생산을 감독할 권리를 지닌다. ······ 상업 비밀들은 폐지된다. 소유자들은 노동자 통제 기관들에 올해와 과거의 모든 장부와 명세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과 노동자 통제는 양립할 수 없으며, 이 임시변통의 일은 (이를 통해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적 생산 조직가들의 도움을 유지하고 농민들이 토지를 점유하듯이 산업을 점유하려는 노동자의 열망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려 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레닌은 노동자 통제에 관한 포고가 있은 지 1년 후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산업 전반에 한꺼번에 사회주의를 포고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이 경제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게 될 때만이 구체화되고 최종적으로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노동자 통제가 모순적이며 불완전한 조치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노동자 통제를 도입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그 일과 직접 맞부딪혀 왔다는 사실, 주요 산업에서 혼란스럽고, 미숙하고, 불완전할 것이 분명했던 노동자 통제로부터, 우리가 전국적 규모에서 노동자의 산업 관리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통제에서 관리로 나아간 변화는 양쪽의 폐지를 수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소비에트의 무력화가 볼셰비키 국가 기구의 형성과 강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것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영향력은 소비에트에서 노동조합으로 통제권을 이전시키고 그 다음 노동자를 통제하는 국가의 대행자로 노동조합을 변형시키는 것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단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다. 경제적 몰락, 내전, 농업의 사회화에 대한 농민의 반대, 산업 불안, 그리고 시장 경제로 부분적인 복귀로 인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볼셰비키 정부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동의 군사화에서부터 부활한 자유 기업에 노동의 종속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순적인 정책이 나왔다. 정부의 독재적인 정책들은 자본주의적정치적 적들뿐 아니라 노동자들과도 대립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더 대규모의 생산이었고, 단순한 권고만으로는 구체제에서 겪었던 것과 동일하거나 더 크게 자신들을 착취하도록 노동자들을 유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볼셰비키 국가는 산업을 재건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배 계급의 기능을 떠맡았다.

     

    레닌은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중단 없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는 부르주아지가 철저한 민주주의 혁명을 감행하기보다는 차리즘과 타협에 이를까봐 두려워했다. 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장면에 대한 또 다른 관찰자들이 공유한 견해는, 임박한 혁명을 노동자와 빈농에게까지 끌고 가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맥락에서, 레닌은 국제적 관점에서 러시아혁명에 접근하여 혁명이 서쪽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생각했는데 이것이 러시아 부르주아의 지배를 그 시작 시점에 파괴할 기회를 제공했을지 모른다. 그 다음에는 서방의 혁명이 러시아혁명을 보완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러시아의 객관적인 준비 부족이 덜 중대한 요소가 될 국제 협력의 형태를 준비할 때까지, 타협이든 원칙 침해든 관계없이, 권력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본질적이었다.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이러한 전망을 제거해버렸다. 실제로 뒤이어 나타난 조건 속에서 권력에 남아 있는 것은, 상이한 사회 제도와 상이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권력 전복은 볼셰비키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볼셰비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권력을 붙들고 있는 것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레닌은 국가의 비호 하에서 러시아를 자본주의화하는 것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러시아의 발전을 맡기는 것보다 더욱 진보적이고 더 바람직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당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는 “15만 명의 지주에 의해 통치되는 데에 익숙해 있었다. 24만 명의 볼셰비키가 똑같은 임무를 인수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위계제적이고 권위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경제 영역으로 확장함으로써 볼셰비키도 그렇게 했는데,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경제 통제를 의미한다고 내내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주의는 기초는 절대적이고 엄격한 의지의 통일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수백, 수천, 수만 인민의 공동 노동을 지휘한다. ······ 어떻게 엄격한 의지의 통일이 확보될 수 있을까? 수천이 그들의 의지를 하나의 의지에 종속시킴으로써. 공동 노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계급의식과 규율이 있다면 이 복종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부드러운 지도와 아주 비슷할 것이다. 이상적인 규율과 계급의식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독재의 형태를 띨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단일한 의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대규모 기계 산업의 패턴으로 조직된 절차의 성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진술을 진지하게 수용하면, 생산과 사회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경험한 그 어떤 것도 능가하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통제의 그 어떤 조치들도 배제하는 독재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계급의식은 전적으로 부족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차리즘과 부르주아지 양쪽 모두를 전복한 것이 소비에트였다는 사실을 변경하지는 않는다. 상이한 내적국제적 조건이라면 소비에트가 권력을 유지하고 권위주의적 국가 자본주의의 등장을 막았을지 모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니다. 러시아에서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혁명의 실제 내용은 그것의 혁명적 형태와 동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의회 운동이 실패한 주요한 원인이 러시아에서는 주로 사회주의적 전화를 위한 전반적인 객관적 준비 부족이었던 반면, 독일에서는 혁명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에 대한 주관적 거리낌이었다.

     

    독일에서 전쟁에 대한 반대는 산업 파업에서 표현되었는데, 파업은 사회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의 애국심 때문에 다양한 기업체를 조화시키는 행동 위원회를 통해 작업장에서 비밀스럽게 조직되어야 했다. 1918년에 노동자 병사 평의회가 독일 전역에서 생겨나 정부를 전복했다. 계급협조주의적 노동 조직들은 이 운동을 인정하고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혁명적 열망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뿐이었다. 이것은 노동자병사평의회가 코뮤니스트들뿐 아니라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 초당파, 그리고 심지어는 부르주아 정당 지지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로라는 슬로건은, 평의회의 특성과 구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혁명가들에 관한 한 자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대다수는 정치적인 것을 사회 혁명으로 오해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힘은 강한 자취를 남겼다. 생산의 사회화는 노동계급의 임무가 아니라 정부의 관심사로 간주되었다. 반항적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적 의미에서만 그러했다. “모든 권력을 노동자 평의회로라는 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뜻하는데, 이 슬로건에 따르면 사회의 비노동계층을 정치적 대표가 없는 상태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보편 선거권으로 이해되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노동자 평의회와 의회 모두를 원했다. 그들은 양자 모두를 얻었다. 바이마르 헌법의 일부로 의미 없는 형태의 평의회를. 그러나 그와 더불어 또한 반혁명과 결국에는 나치 독재를.

     

    다른 나라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보기를 들면 이탈리아, 헝가리, 에스파냐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평의회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혁명적 성향을 표출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해에 반하는 정책이나 행위에 대한 보증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런 경우에 노동자평의회는 오래된 권력 기관이나 새롭게 설립된 권력기관에 의한 노동계급 행동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 형태나 새로운 통제 형태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적 형태의 자기 결정으로 분출하는 자연발생적 운동이 사회에 대한 통제권과 더불어 자신들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지 않는다면, 그 운동은 단순히 잠재된 익명성으로 다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계속>


    <출처폴 매틱(Paul Mattick), 노동자 통제(Workers’ Control),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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