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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령] 코뮤니즘 ABC : 제3장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독재 (4~6)
  • 조회 수: 13692, 2022-01-09 21:33:01(2021-06-28)
  • 코뮤니즘 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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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코뮤니즘과 프롤레타리아독재



    4. 코뮤니스트 체제에서 생산력의 발전(코뮤니즘의 이점)

     

    승리가 달성되자마자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료되자마자, 코뮤니스트 체제는 급속히 생산력을 발전시킬 것이다. 이러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은 다음에서 나올 것이다.

     

    첫째, 계급투쟁에 들어간 방대한 인간 에너지가 해방될 것이다. 정치 투쟁, 파업과 반란으로 소모된 에너지와 힘과 노동의 낭비, 그리고 두 적대 계급의 일상의 노력에 투여된 탄압과 법정 재판, 경찰 활동, 국가 권위의 소비가 얼마나 컸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계급전쟁은 방대한 양의 에너지와 물질적 수단을 삼켜버렸다. 새로운 체제에서 이러한 에너지는 해방될 것이다. 사람들은 더는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다. 해방된 에너지는 생산의 작업에 모두 쓰일 것이다.

     

    둘째, 경쟁과 공황과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낭비되었던 에너지와 물질적 수단은 모두 절약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전쟁에 탕진된 것이 얼마나 큰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것이 엄청난 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사회가 판매자끼리, 구매자끼리,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투쟁에 낭비하고 있는 양은 얼마나 큰가. 상업 위기에서 나온 파괴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 생산을 지배한 무조직과 혼동에서 나온 경비는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가. 낭비되었던 이런 모든 에너지는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절약될 것이다.

     

    셋째로, 합리적 계획에 따른 산업의 조직화는 대규모 생산이 더욱 경제적인 한, 불필요한 낭비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것이다. 게다가, 기술적인 측면으로 생산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업은 아주 큰 공장과 기계장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기계장치의 도입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가는 오직 값싼 노동력을 충분하게 조달할 수 없을 때 새로운 기계장치를 도입한다. 만일 자본가가 값싼 노동력을 풍부하게 고용할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새로운 기계장치를 설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문제 없이 막대한 이윤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그저 높은 임금 때문에 그의 비용이 많이 들어갈 때 기계장치가 필요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일반적으로 싸다. 노동계급 사이에 널리 퍼진 취약한 조건들은 제조기술의 개선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인과적 결론은 특히 농업 부문에서 명백하다. 농업 부문에서 노동력은 언제나 저렴하다. 그러한 까닭으로 농업작업에서 기계장치의 도입은 아주 느리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이다. 코뮤니즘 아래에서 모든 기술적 진보는 곧바로 적용될 것이다. 자본주의가 부과했던 구속은 더는 없을 것이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기술적 진보는 계속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좋은 교육을 충분히 받을 것이고 자본주의에서는 쓸모없어진 사람들, 보기를 들면 지능을 타고난 노동자가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식객 노릇을 하는 사람도 사라질 것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사는 기생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폭식, 음주, 그리고 요란한 생활로 낭비하는 모든 것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생산에 이바지할 것이다. 자본가와 그들의 아첨꾼, 그리고 그들의 식객(목사, 매춘부, 그리고 다른 이들)은 사라질 것이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생산적 노동에 종사할 것이다.

     

    코뮤니즘 생산방식은 생산력의 막대한 발전을 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는 과거에 했던 양 만큼의 노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노동일은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고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속박에서 그만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인간이 먹고 입는 것에 시간을 덜 쓰게 되자, 그는 정신적 발전에 더욱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 문명은 이전에 결코 성취하지 못했던 수준까지 발전할 것이다. 그것은 더는 계급분화가 아니고, 진정으로 인간 분화가 될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학대가 사라짐과 함께, 인간에 대한 자연의 학대도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처음으로 잔인한 짐승과 같은 삶에서 생각하는 존재의 가치 있는 삶으로 인도될 것이다.

     

    코뮤니즘에 반대하는 사람은 늘 그것을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과정으로 묘사해왔다. 그들은 코뮤니스트가 모든 것을 몰수하길 바라고 모든 것을, 즉 토지를 나누고 다른 생산수단을 나누며, 모든 소비 품목을 나누길 바란다고 주장했다. 어떤 것도 이러한 인식보다 더욱더 불합리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일반적인 분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토지와 말, 그리고 가축과 화폐를 분배할 수 있으나, 철도와 기계장치와 증기선과 그러한 종류의 여러 가지 것을 분배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해서 더는 거론하지 않겠다. 더욱이 그러한 분할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뒷걸음질 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많은 소()소유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소소유자들에게서, 그리고 소소유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대 소유자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비록 그러한 평등한 분배가 현실로 될 수 있다 할지라도, 똑같은 과거가 되풀이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코뮤니즘(proletatian communism)은 커다란 협동 국가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그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조건의 결과이다. 다음의 4가지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

     

    1. 계급의식 없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lumpenproletarian socialism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코뮤니즘이 미래 사회에서 국가권력을 존속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코뮤니스트를 비판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아나키즘과 코뮤니즘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아나키스트는 생산의 조직화보다는 분할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생산의 조직화를 커다란 공동 국가가 아닌 많은 자유로운작은 자치적인 코뮨을 취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한 사회체제는 자연의 속박에서 인류를 자유롭게 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체제에서 생산력은 자본주의에서 발달했던 정도까지 발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생산을 증가시키지 않고 무너트릴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소비 품목을 분할하는 것을 옹호하고 대규모 생산의 조직화를 반대한다. 대부분 그들은 노동계급의 관심과 열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급의식 없는 프롤레타리아, 즉 빈둥거리는 노동자의 관심이나 열망을 대표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취약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나 독립적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지 않는다.

     

    2.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

    이 체제는 그의 주된 지지자를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독립적인 숙련공이라는 사라져가는 계급 안에서, 중간계급 시민들 가운데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전문가 계급 가운데서 찾는다. 그것은 소기업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자본에 이의를 제기한다. 대부분 쁘띠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사회혁명에 반대한다. 그들은 협동조합, 즉 가내 노동자가 연합한 조직체 등등의 발전을 통해 평화적으로그들의 이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러시아에서 사회혁명가들이 만든 도시 협동조합의 대부분은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협동기업은 대개 자본주의 조직으로 퇴화하기 쉽고 이 경우 협동자들은 부르주아지와 구별될 수 없다.

     

    3. 농업을 기반으로 한 농민 사회주의(agrarian peasant socialism)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며 농민 아나키즘과 아주 비슷하다.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흔히 사회주의를 대규모 생산으로 바라보는 데 실패한 것이고, 분배와 평등화로 기울어지는 방식이다. 아나키즘과 다른 농민 사회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지주와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농민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권위의 창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들 사회혁명가들은 영원히 소규모 생산의 설립을 바라고 프롤레타리아를 두려워하며, 크고 통합된 협동체적인 국가(cooperative commonwealth)의 형성에 반대한다. 게다가 농민의 어떤 계층 가운데서, 우리는 얼마간 아나키즘에 가까운 사회주의의 다른 형태를 발견한다. 여기서 국가권력은 부정된다. 그러나 이들 경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평화주의적 관점에 따라 구별된다. 농업적 사회주의 형태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농민 대부분이 대규모 생산의 이점을 알게 되자마자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나중에 이 문제를 다시 다룰 것이다.

     

    4. 노예소유와 대규모 자본주의적 사회주의(Slaveholding and large-scale capitalistic socialism) : 

    우리는 이 유형에서 사회주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전에 말한 세 가지 여러 형태에서 우리는 적어도 사회주의의 어떤 기미와 압박에 맞서는 저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형태에서는 사회주의는 새로운 역할을 바라는 사람들이 속임수를 위해 쓴 단순한 단어이다. 부르주아 지식인이 이 유형을 도입했다. 계급협력을 지지한 사회주의 옹호자(그리고 부분적으로 카우츠키 등등)는 그들에게서 그런 변종을 접수했다. 보기를 들면,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의 코뮤니즘이었다. 그의 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특징은 노예소유자의 조직이 동지애적으로” “공동으로법적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 많은 노예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노예소유자들에 관한 한, 그들은 완전한 평등을 누리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 노예는 이와 전혀 다르다. 노예는 가축과 같다. 분명히 이러한 변종은 사회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주아 교수들이 옹호했다. 두 가지가 다르다면, 노동자는 노예의 자리를 대신했고, 자본가 권력자들은 노예소유주로서 권력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에서도 사회주의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강제노동에 바탕을 둔 국가자본주의를 지닌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말할 것이다.

     

    쁘띠부르주아, 농업, 룸펜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는 그들 모두에 한 가지 공통되는 특징을 지닌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의 그런 변종은 전반적인 발전의 경로 밖에 있다. 사회 발전의 경로는 생산의 확장으로 이끈다. 그러나 비()프롤레타리아 변종들에서 전반적인 경향은 소규모 생산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회주의는 어쩔 수 없이 유토피아적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5. 프롤레타리아 독재

     

    코뮤니스트 체제를 현실화하려면,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손아귀에 모든 권력과 힘을 가져야 한다. 만일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지 않으면, 만일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이 되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는 낡은 세계를 뒤엎을 수 없다. 부르주아는 틀림없이 전쟁을 하지 않고서 자신의 지위를 순순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주아에게 코뮤니즘은 그가 지닌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자 노동자의 피와 땀을 강탈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며, 임대료와 이자, 그리고 이윤에 대한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코뮤니스트혁명, 사회의 코뮤니스트적() 변형은 착취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다. 노동자 정부의 중요한 일은 이런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야 한다. 정확히 그런 반대가 아주 거세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의 권위, 즉 프롤레타리아 통치는 독재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독재는 정부의 매우 엄격한 방식이자 적들에 대한 단호한 분쇄를 뜻한다. 그러한 사태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를 위한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 부르주아계급에서 자유를 빼앗고, 부르주아의 손과 발을 묶어두며, 부르주아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에 맞서 투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한 이유다. 부르주아의 저항이 거셀수록, 부르주아가 죽기 살기로 자신의 힘을 동원할수록, 부르주아의 태도가 더욱더 위협적이 될수록,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더욱더 단호하고 가혹해져야 한다. 극단적으로 노동자 정부는 폭력적 수단을 쓰는 것에도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착취자들의 저항을 완전히 진압했을 때, 착취자들이 저항을 끝냈을 때, 그들의 힘이 더는 노동계급을 손상시키지 않을 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차츰 관대해질 것이다. 그 사이 부르주아는 조금씩 프롤레타리아와 융합될 것이다. 노동자 국가도 차츰 소멸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사회는 계급이 없는 코뮤니스트 사회로 바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임시 제도)에서, 생산수단은 전체로서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즉 프롤레타리아 국가 조직에 속할 것이다. 한동안 인구의 대다수인 노동계급은 생산수단을 독점한다. 따라서 아직 전면적으로 코뮤니스트적 생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전히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여전히 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이 있다. 모든 생산수단은 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독점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적들을 짓밟는 국가권력(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있다. 그러나 자본가와 지주, 은행가, 장군들, 주교들의 저항이 진압될 때,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혁명 없이 코뮤니즘으로 바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단순히 적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변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사회적 소유로 대체되어야 한다. 부르주아에게서 생산과 교환 수단을 모두 빼앗아야 하고, 부르주아는빼앗겨야만 한다.” 누가 이런 일을 할 것이고 할 수 있는가? 분명히 비록 그가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 하더라도, 고립된 개인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만일 고립된 개인이나 고립된 개인 집단이 그런 일을 한다면, 기껏해야 그것은 분할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최악의 경우, 단순한 도둑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부르주아의 박탈이 프롤레타리아의 조직된 힘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조직된 힘은 독재적인 노동자 국가형태를 취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반대는 여러 방면에서 나온다. 첫째 아나키즘에서 나온다.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력과 모든 종류의 국가에 반대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정부를 떠받치는 사람들이다. 모든 종류의 정부는 권력의 남용과 자유의 제한에 연루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볼셰비키, 소비에트 정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전복되는 것이 필요하다. 독재도 필요하지 않고 국가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것이 아나키스트의 주장이다. 겉으로 보기에만 아나키스트의 비판은 혁명적이다. 사실 아나키스트는 볼셰비키, 즉 좌파라기보다는 오히려 우파 쪽에 가깝다. 독재가 왜 필요한가? 부르주아 정권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려고 독재가 필요하다. 힘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적들을 진압하기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 아주 솔직히 우리는 힘으로라고 말한다.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있는 도끼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확고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부르주아에 대한 사냥을 두려워하며, 혁명가가 아닌 사람들이다. 우리가 부르주아를 완전하게 정복했을 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요성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사적인 투쟁이 계속되는 한 완전하게 프롤레타리아의 적을 진압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의무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는 자본주의와 코뮤니스트 사회의 사이에 있어야 한다.

     

    독재에 대한 반대자로서 다음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멘셰비키가 있다. 이들은 이전에 이 문제에 관해 썼던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와 멘셰비키가 함께 계획했던 이전의 강령에는 다음과 같이 이 나온다. 사회혁명의 근본 조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가 착취자의 모든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멘셰비키는 이 문구에 서명했다. 그러나 행동할 때가 찾아왔을 때,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부르주아 신문에 대한 탄압, 그리고 볼셰비키의 공포정치에 항의했다. 심지어 플레하노프는 우리가 부르주아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부르주아에 맞서 가장 무자비한 수단을 쓰는 것에 찬성했다. 오늘날 멘셰비키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부르주아 진영에 도피처를 마련했다.

     

    마지막으로, 많은 도덕적 고려도 우리에 반대하는 주장을 내놓는다. 우리가 야만인 호텐토트(Hottentots)처럼 우리의 판단을 형성한다는 말은 듣는다. 호텐토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이웃의 아내를 훔칠 때, 그것은 좋은 것이다. 내 이웃이 나의 아내를 훔칠 때, 그것은 나쁘다.” 볼셰비키는 이런 야만인과 닮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탄압하려고 애쓸 때, 그것은 나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탄압하려고 힘을 쓸 때, 그것은 좋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말하지는 전혀 모른다. 호텐토트의 경우, 우리는 같은 이유로 다른 사람의 아내를 훔치는 두 명의 똑같은 개인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는 동등한 말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아주 방대한 계급을 포함한다. 부르주아는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을 이룬다.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인류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억압과 착취, 전쟁을 유지하려고 싸운다. 프롤레타리아는 코뮤니즘을 위해 싸운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의 보호를 위해 싸운다. 자본주의와 코뮤니즘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두 명의 호텐토트와 견줄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오직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싸운다. 투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이다.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쁘다.

     

    6. 정치권력의 획득

     

    프롤레타리아는 국가권력의 획득을 통해 독재를 현실화한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많은 사람은 공을 한 주머니에서 다른 주머니로 옮기는 것처럼, 부르주아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것은 쉬운 문제라고 상상한다. 먼저 권력이 부르주아의 손아귀에 있다. 그러고 나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권력에서 몰아낼 것이고 지배를 그의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문제는 새로운 권력의 창출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력의 점유이다.

     

    그러한 인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몇 가지를 고려하면 오류가 어디에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 국가권력은 하나의 조직이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은 부르주아적이다. 그 조직에서 사람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역할을 떠맡는다. 군대의 우두머리는 부유한 계급의 구성원인 장군이고, 관리의 우두머리는 부유한 계급의 구성원인 장관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위해 싸울 때, 누구에 맞서 그리고 무엇에 대항하여 싸우는가? 첫째로는 이 부르주아 조직에 맞서 싸운다. 프롤레타리아가 이 조직과 싸울 때, 프롤레타리아의 일은 이 조직을 파괴할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정부의 중요한 힘은 군대에 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부르주아에 맞서 승리를 거두려면, 첫째 기본적인 것은 부르주아 군대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독일 코뮤니스트가 백위군 군대를 파괴하지 못하면 샤이데만과 노스케 정권을 뒤엎을 수 없다. 반대파의 군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 혁명이 승리한다면, 부르주아 군대는 해체되고 와해될 것이다. 보기를 들어 차르에 대한 승리는 차르 국가의 부분적 파괴와 군대의 부분적 해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11월 혁명의 승리는 임시정부의 국가조직에 대한 결정적인 전복이고 케렌스키 군대의 완전한 해체를 뜻한다.

     

    따라서 혁명은 구시대의 권력을 파괴하고 이전에 존재해왔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권력을 창출한다. 물론 새로운 권력은 옛 권력을 이루는 일부 요소를 취한다. 그러나 새로운 권력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한다. 국가권력의 획득은 이전에 존재한 조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서 승리한 계급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조직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실질적 중요성은 아주 크다. 보기를 들어, 러시아 볼셰비키가 예전에 비난받았던 것처럼, 독일 볼셰비키가 군대를 해체했고 규율을 조장했으며, 장교에 대한 불복종을 고무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것은 잔인한 명령으로 생각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서 잔인한 것은 전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인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노동자의 반대편에 서 있고 부르주아의 명령에 따르는 군대를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 실패한다면, 혁명은 굴복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르주아 군대를 해체시키는 활동을 하면서 두려워할 어떤 것도 없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혁명가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부르주아의 규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서, 부르주아를 정복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를 전복하길 바라는 사람은 부르주아에 손상을 주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계속>




    니콜라이 부하린·프레오브라젠스키 지음

    황동하 옮김

     

    <영문 출처> The ABC of Communism(Ann Arbor Paperback : The Univ. of Michigan Press, 1966) 

    <한국어 출처> 빛나는 전망 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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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코뮤니스트는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기에 외부로부터의 이론적 공헌과 열린 토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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