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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주의 비판 :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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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부르주아적 폄하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맑스를 읽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류 발전의 최종 단계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지만)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1) 필연적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동에서 이윤을 얻는 부르주아의 마음과 정신에 그러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와 이윤의 거대한 양극화 창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행성에서 온 이성적인 존재라면, 너무 많은 풍요의 한가운데에 지구상의 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현재의 기근, 영양실조, 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절망적인 실패라고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맑스의 비전은 평범한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잘 할 수 있고,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희소성이 끝나고, 사회 발전이 모두에 의해 계획되는 사회,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인류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탄생이 인류 선사시대의 종말이자 진정한 인류 역사의 시작을 나타내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 사회는 자본주의와 직접적으로 대조를 이루며, 계급과 사회 불평등, 국가와 전쟁, 민족과 국경, 착취와 화폐가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비전은 자연스럽게 맑스에게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비난을 하게 했다. 그는 착취 없는 사회에서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을 주장했는데, 이 사회에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은 억압적인 국가의 강제력 없이 함께 협력할 것이다.

     

    하지만 맑스가 노동계급에 그 목표를 명확히 이해시켰다면, 스탈린은 그 어떤 개인보다 그 열망의 가장 큰 무덤을 파는 자였다. 스탈린주의가 반()혁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지만, 우리가 자주 언급했던 스탈린주의 반()혁명1917년 이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었던 고립 과정의 마지막 절정이었다. 스탈린 사망 기념일은 자본주의 선전 기계가 스탈린주의 옹호자들이 언제나 부르기 좋아했던 현실 사회주의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괴물이었다는 메시지를 주입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기회에 불과했다.

     

    우리는 여기서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s)의 명백한 자본주의 선전이나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 학파의 학문적 반증에는 관심이 없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고용된 글쟁이들은 10월 혁명과 스탈린의 연속성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드러난 노동계급 사이의 논쟁이다. 그들은 스탈린주의가 러시아혁명의 논리적인 결과일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의 진정한 표현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계급, ()착취 사회 건설로 이어질 수 있는 일련의 사상을 거부한다.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맑스와 엥겔스의 경우 두 용어를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음)1930년대 소련에서 스탈린이 만들어낸 전체주의 체제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계속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편리한 신화이다. 자기 계급의 진정한 역사를 모르는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이 생겨나면서 자본주의 거짓말 기계는 그것의 결점이 무엇이든 간에, 자본주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체제일 뿐만 아니라, 가능한 유일한 체제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조차도 학계 언론과 정치 저널리즘의 모든 그늘은 러시아 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한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그들의 주요 무기는 1917년 혁명적 노동자들의 패배로부터 등장했고, 1990년에 결국 붕괴한 스탈린주의 체제를 언급하는 것이다. 10월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스탈린주의의 정반대와 동일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자식이라고 끊임없이 언급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미 증명된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스탈린주의와 러시아혁명의 퇴행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이러한 사건을 이해해야 하는 일반적인 분석 틀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틀은 맑스가 제공하고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강화에 부응하여 성장한 볼셰비키에 맞선 코뮤니스트 좌익 반대파가 발전시켰다. 맑스가 명확히 보여주었듯이, 생산력 발전과 그에 따른 노동계급의 성장 없이 사회주의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1917년이나 실제로 1925, 또는 1928년에 러시아에서만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규모에서 생산력 발전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은 1914년에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에 충분했다. 1차 세계대전의 참사는 세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해야 할 필요성과 시급성을 보여주었다. 1917년의 혁명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세계혁명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루어졌다.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전 세계적으로 정치 권력을 쟁취해야만 사회주의 생산으로의 이행기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행기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지속되는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후진성은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세계적인 과정에서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혁명의 실패는 이러한 희망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후진성은 맑스가 예상한 자본주의 발전 경로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1917년에서 1921년의 혁명적 격변이 붕괴한 이후 남아 있던 러시아 체제는 필연적으로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과제, 즉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수행했다. 이러한 발전이 19세기 유럽 자본주의의 경로였던 사적 자본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여전히 자본주의 발전이었다. 이 문서는 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고려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와 스탈린주의가 만든 야만적인 국가 자본주의 사회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개념을 반박할 것이다.

     

    스탈린이라는 신화

     

    스탈린주의에 대한 문제가 너무 방대해서 하나의 짧은 기사로는 그것이 현대 혁명운동에 영향을 준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없다. (2003)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 기간 우리는 혁명가가 되고 싶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많은 젊은이를 만났다. 우리는 자신을 마오주의자라 주장하며, 스탈린이 비록 오류를 저질렀지만그가 사회주의를 만들었고발전시키고 소련을 현대화했다고 주장하는 남미와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압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실제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했던 모든 것은 명령경제의 마오-스탈린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사적 부르주아지가 없고, 세계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현대 국가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은 산업화라는 부르주아적 과제를 수행한 스탈린(그리고 마오)을 존경했다. 우리는 스탈린이 나중에 소련에서 추진한 체제의 종류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우선은, 이러한 젊은 마오주의자들을 위해, 그리고 실화를 연구할 준비가 된 다른 이들을 위해, 스탈린에 대한 소련 내 실제 기록을 그 자체로 살펴보겠다.

     

    우선 고립된 소련이 산업화해야 한다고 인식한 것은 스탈린만이 아니었다. 소련에서 모든 분파의 코뮤니스트당 지도자들 사이의 전체 논쟁은 사회주의의 선구자로서 산업 발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경제의 유일한 생산 부문인 소농계급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1920년대 초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회주의적 원시 축적”(트로츠키의 이전 지지자인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첸스키가 만든 용어임)의 재원 마련을 위해 소농계급에 대한 중과세를 주장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소농계급이 미래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사적으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신경제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른바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가 반대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논쟁(트로츠키를 ()산업주의자라고 매도한 것을 제외하고!)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지만, 1928년에 소련을 충분히 장악하여 자신의 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자본 축적이 일어난 농업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착취하기 위해 스탈린은 집산화를 결정했지만, 트로츠키와 1920년대의 다른 주요 코뮤니스트들과는 달리, 그는 이것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단순히 세금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강제 집산화에 들어갔다. 그것은 완전한 재앙이었다. 수천 명이 총으로 위협받으며 집산화 되었다. 많은 농민(그리고 부농만이 아니라)이 농작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하고, 새로운 농작물 파종을 거부했다. 스탈린은 1930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프라우다에 성공의 현기증과 지역 관리들이 그 계획을 왜곡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 스탈린의 파렴치한 위선은 이러한 비극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았고,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가 동일한 잔인함으로 재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2년까지 농민의 60%가 콜호즈(집단농장)에 있었지만, 전체 농장 가축의 1/3에서 절반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과 혁명의 해 이래 처음으로 1925년 수확량이 1913년의 수확량을 넘어섰지만, 1934년에는 기근이 너무 심해서 보기를 들어보면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외부세계에서 들려오는 재앙 소식을 차단하기 위해 군사봉쇄가 도입되었다. 최소한 8백만 명이 처형, 기근 또는 강제 이주로 사망했다. 소련 농업은 이로부터 한 번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항상 소련 경제의 약한 고리였다. “맑스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인 스탈린이, 소농계급에 대한 레닌의 마지막 논설을 무시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그의 정책의 어리석음은 더욱 명백해진다. 레닌은 농민은 협업의 우월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로 움직일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나은 기계류를 농민에게 제공할 수 있을 때이고, 그것은 오직 유럽혁명이 성공해야 가능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레닌은 진정한 사회주의는 노동자 스스로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하향식으로 사회주의를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농업에 재앙을 가져왔다고 보는 우리가 소련의 산업화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해야 하는가? 심지어 냉전 시대에 쓰인 영국 교과서조차도 1945년까지 강대국 중 가장 낙후된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변화시킨 5개년 계획의 놀라운 성과를 지적하곤 했다. 이것은 면밀하게 검토한 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는 이 성과가 어떻게 달성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5개년 계획은 군사적 전제에 바탕을 두었다. 1928년은 거짓 전쟁 공포(서방 국가들이 서로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탈린은 그들 모두의 공격을 예상했다)를 경험했다. 그는 왜 옛 러시아가 항상 패배했는지를 소련 시민들에게 질문했다. 대답은 경제의 낙후성이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 뒤처져 있다. 우리는 이것을 10년 안으로 단축해야 한다. 우리가 해내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짓밟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 사회 전체가 국가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소비재는 가게에서 사라졌고, 가장 기본적인 상품조차도 끝없이 줄을 서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배급제도가 도입되어야 했고, 임금은 삭감되었고 가격은 급등했다. 임금 격차는 사회 불평등이 서구의 불평등을 반영하는 지점까지 증가했다. 5개년 계획의 근간은 곡물을 수출하여 해외에서 기계 설비를 들여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다수 인구의 기아와 결핍이 이러한 자본 축적의 기반이었다. NKVD(내무인민위원회)의 강압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태업(怠業)자들을 체포하여 노동 규율을 강화하려는 시도 외에도, 많은 사람은 그들이 정말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으며, 현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믿었다. 가장 비참한 착취의 한가운데에서, 스탈린이 삶은 점점 더 좋아지고, 더 즐거워지고 있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할 뿐이다!

     

    이 시점에선 개인숭배가 한창이었다. 1936년 프라우다의 한 시는 스탈린을 수백 만의 마음을 통해 반사되는 태양이라고 묘사했다! 1934년에 당은 현재 우리가 대부분 과장된 수치로 알고 있는 인상적인 목록을 들으며 제15개년 계획의 업적을 축하했다. 자본 축적과 산업 성장의 측면에서 실제 업적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승자의 당 대회는 더 큰 재앙의 싹을 가져왔다. 중앙위원회 선거는 스탈린이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면서 평소대로의 결과를 낳았다. 글쎄,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스탈린의 동지이자 레닌그라드의 인기 있는 당 대표 키로프(Kirov)가 더 많은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몇 달 후 키로프는 불만을 품은 전 코뮤니스트 청년 회원에 암살당했는데, 그는 재판도 받지 않고 의문의 총에 맞았다. 스탈린은 이제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1935년 스탈린의 옛 정치국 동지였던 카메네프(Kamenev)와 지노비에프(Zinoviev)는 첫 번째 공개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것은 아마 연루된 사람들 숫자에 있어서 역사상 전례가 없는 국가탄압의 물결을 촉발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코뮤니스트당원이었다. 명백한 경쟁자들은 제거되었다. 만약 (다양한 종류의 고문 후에) 그들이 터무니없는 혐의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면 그들은 공개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그들은 단순히 실종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또는 굴라크로 알려진)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의 과거 반대자들에서 멈추지 않았다. 나이 든 당원들은 그들의 알려진 견해가 무엇이든 간에 제거되었다. 역사가들에게 분명해진 것은 스탈린이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꿈꿔왔던 것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실제로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간부 그룹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만들었다. 스탈린 유혈사태의 젊은 수혜자들은 다른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들 중 15만 명은 숙청 아래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를 통한 승진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들의 자녀들은 노동절이나 10월 혁명 기념일(117)에 여전히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언론이 묘사하는 것처럼 불명예스러운 코뮤니스트 체제의 슬픈 잔재가 아니다.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대한 관계는 오직 그 무덤 파는 자에 대한 숭배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뿐이다.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이 수용소로 보내졌고, 대다수는 진정한 코뮤니스트였다. 그중 일부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좌파와 트로츠키주의자의 정치적 선구자였다. 많은 사람이 굴라크에서 계속해서 저항하다 사망했다.

     

    이 비참한 대학살에서 스탈린의 결정적인 어리석음은 붉은 군대의 기존 장교계급을 거의 전멸 시켜 그의 5개년 계획이 공급하기로 했던 바로 그 방위군을 약화시킨 것이었다.

     

    스탈린의 외교정책 기록은 자신의 선전과 완전히 다르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스탈린은 자신을 최초의 원수라고 칭한 후 나치를 물리치는 데 있어 이른바 그의 군사적 기술을 위한 프랑코주의 칭호인 대원수를 자신에게 부여했다. 외교와 군사정책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이것이 단지 그의 자만심임을 보여준다.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하도록 하려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도는 먼저 스탈린이 나치와 1939년 악명 높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 점에서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다른 자본주의 권력보다 더 비난할 것이 없다. (스탈린의 반()파시즘에 속았던 모든 코뮤니스트와 노동자들은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수 있지만) 하지만 스탈린은 히틀러가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히틀러가 1941622일 소련을 침공했을 때 스탈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이틀 동안 방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정치국을 소집했을 때 스탈린은 그의 파행으로 해임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해임 대신 그는 지지를 받았고, 결국 침공 후 11일 동안 초토화정책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수백만 명의 소련 시민이 이미 죽거나 나치의 포로가 되어 나치 전쟁 기계의 노예 노동 수용소에서 학살당하는 길에 서 있었다. 스탈린이 1945년에 다시 돌아온 생존자들을 굴라크로 집어넣은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범죄적 어리석음에 대한 증인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탈린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살아남았다. 실제로 모든 슬라브인을 열등 인간으로 간주한 나치의 인종 차별적인 대량 학살만이 소련 시민들을 조국 러시아의 방어를 위해 결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한 민족주의는 스탈린의 다른 정책들과 일치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스탈린은 1943년 영국 및 미국과 동맹의 대가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해체함으로써 세계혁명을 지원한다는 마지막 가식을 포기했다. 이것은 소련이 제국주의 세계 질서의 일부라는 것을 더욱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새로운 제국을 정복한 것은, 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믿었던 것처럼 국제 사회주의의 성공적인 확장이 아니라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표현이었다.

     

    스탈린의 업적에 관한 사실은 너무 많다. 이것들은 실제로 스탈린 체제의 모델을 이용해 자국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제3 세계 민족주의자들(마오주의자들, 카스트로주의자들 등)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서구 제국주의와의 단절이 스탈린주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모든 민족해방투쟁은 불가피하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소련이 국제 사회주의의 공평무사한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이면에는 그들도 스탈린주의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시급하고 현대적인 문제로 눈을 돌려야 한다.

     

    생산양식

     

    우리는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서 마오주의자들 외에도 주로 대도시 국가에서 온 다른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 현대 세대는 자본주의 체제의 악취를 알고, 자신을 ()자본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분명히 표현하지 않는다. 수백만 명이 전쟁에 반대해 행진하고, “세계화에 반대하는 젊은이 중에는 종종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과 같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 방식의 변화, 즉 생산양식의 변화만이 실제로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의 착취에 의존하고 그에 의해 정의된다. 노동만이 자본이 자신의 용도에 따라 전유하는 가치를 창조한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노동을 전유하고 이 노동 자체를 상품으로 바꾼다.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상품이 무상으로 분배되고, 노동이 자유롭고 집단으로 제공되는사회인 사회주의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탈린주의는 한 번도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적이 없다. 만약 스탈린주의가 실제로 사회주의였다면 현존하는 세계 질서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어떠한 생각에도 반대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인륜적 범죄뿐만이 아니라 소련을 특징짓는 중앙집권적 통제경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바탕을 둔 사회에 대한 맑스의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의 부분이다. 스탈린은 일생 진정한 코뮤니스트들을 위한 물질적 지옥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산은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들의 뇌리를 악몽과 같이 짓누른다.”(맑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를 정치적으로 거부하는 것(보기를 들어,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가 그러는 것처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코뮤니스트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주의 정의를 재해석하는 것에 기초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코뮤니즘은 좋은지도자가 있는 국가 자본주의가 아니다. 코뮤니즘은 우리를 대신해 결정을 내리고 우리를 억압하는 어떤 국가의 개념 전체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 코뮤니즘은 현재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보다 더 공정하고, 더 평등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스탈린주의로 변질한 러시아혁명 또한 우리에게 코뮤니스트의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소비에트 또는 노동자평의회의 설립은 대중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 어떻게 행정 기능과 입법 기능을 결합하면서도 사람들 다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기구가 있을 수 있을까? 소비에트는 수백만 명이 자신 일을 운영하는 데 참여할 방법에 대한 지표를 제공했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실패했지만, 그들의 실패는 계획되지도 않았고 필연적이지도 않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반()혁명의 원인과 궤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이해는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을 강령적으로 준비하는 방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혁명의 과정

     

    러시아혁명은 세계사에서 독특한 경험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국가에서도 권력을 잡은 적이 없었고, 191710월 러시아 노동계급의 승리는 짧은 몇 년 동안 전 세계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독일 노동자들이 패배했을 때(그리고 이것은 19213월 행동 이후 일어났지만,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세계혁명에 대한 전망은 희미해졌다. 볼셰비키는 임시정부 전복을 주도했는데, 이는 국제 노동계급의 다른 더 발전된파견대가 영감을 받아 러시아 노동자들의 선례를 따를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19173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는 유럽 국가 중 가장 후진국 중 하나인 농민 국가다. 사회주의는 그곳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 하지만, 농민 대중은 귀족들의 막대한 소유물을 모두 몰수할 정도로 불가피하고 성숙한 농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 그러한 혁명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 노동운동에 큰 자극을 줄 것이다.”

     

    이것은 맑스가 사망하기 1년 전 말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전통 농민공동체(미르)가 사회주의 조직의 기본형태가 된다는 주장은 오직

     

    러시아혁명이 서구 노동자혁명의 신호탄이 되어 둘이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면 말이다.” (E.H 볼셰비키 혁명2387, 펠리컨 판에서 인용함)

     

    하지만 1917-18년에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주요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붕괴 직전에 있었고, 러시아혁명이 더 서쪽으로 계속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곳에서 노동자 투쟁의 부활에 직면하여 빠르게 종결되었다. 1918년 세계혁명의 모든 개념이 신화”(사회당/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수치스럽게 공유한 견해)라고 주장한 (러시아 내전」 〔베를린, 2000의 저자 에반 모즐리Evan Mawsdley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가들과는 달리, 러시아혁명이 세계혁명의 신호일 뿐이라는 견해는 견고한 물질적 근거가 있었다. 1917년 프랑스군과 영국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918년 초에 독일에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영국 정부는 19181월에 서둘러 선거권(모든 남성 노동자와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을 확대했고, 셰필드와 글래스고의 (노조)직장위원들이 배급제를 조직하겠다고 위협하자 1918년 여름부터 그것을 전국에 도입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베를린, 헝가리, 바이에른의 혁명은 군사적으로 진압되었고 리마에서 시애틀, 위니펙, 레드 클라이드사이드, 이탈리아 공장 점거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에 영향을 미쳤던 투쟁은 모두 무산되었다. 자본가들은 자국 노동자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서로 화해했다. 그들의 성공은 러시아 소비에트 실험을 고립시켰다.

     

    이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독특한 역사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노동계급이 지역 지배계급을 타도했지만,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고립된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이전의 계급투쟁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전의 노동계급 경험에서는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엥겔스의 역사서 독일농민전쟁은 재세례파(Anabaptist) 지도자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의 딜레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극단파 지도자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사회가 그가 대변하는 계급의 지배와 그 지배가 의미하는 조치가 실현할 정도로는 운동이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를 인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언제나 다양한 계급 사이의 적대감의 정도, 계급 모순의 기반을 이루는 물질적 생존 수단의 발전 정도와 생산 및 상업 수단의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 그가 해야 할 일, 그의 당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역시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발전 단계와 그 조건에 달려 있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된 교리와 요구에 얽매여 있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는 그 순간의 계급 관계나 다소 우연한 생산 및 상업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운동의 일반적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관통하는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필연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전의 모든 행동과 원칙과 모순되고, 당의 당면한 이익과도 모순되며,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의 당이나 계급이 아니라 당시 운동이 그들이 지배할 기회를 제공한 계급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운동의 이익을 위해 그는 다른 계급의 이익을 증진하고, 자신의 계급에 말과 약속, 즉 다른 계급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라는 단언으로 만족시켜야 한다. 이 어색한 위치에 놓인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잃는다.” (위에서 언급한 엥겔스의 책. 모스크바 1977, 115)

     

    볼셰비키와 러시아 노동계급 전체가 바로 이 문제를 정확히 경험하고 있었다. 상황은 경제문제에 절박했고 곧 군사 전선에서도 그러했다. 세계혁명의 확산이라는 생각은 모든 주요 볼셰비키들에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물질적 조건이 필요했다. 전후 세계가 안정되면서 역사의 흐름은 노동계급에 등을 돌렸다. 게다가 혁명당은 이제 대다수 사람이 문맹인 나라에서 국가를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적합하지 않은 과제였다. 이 모든 문제는 서로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반혁명의 실제 과정은 우리가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내전과 제국주의 개입

     

    낙후된 농민 경제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는 문제에 대한 레닌 초기 해결책은 곡물 독점이었다. 627일 전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주의 상품 교환에서 사회주의 생산물 교환으로 점진적 이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R.W. 데이비스 사회주의 공세2쪽에서 인용)

     

    1920년 말 내전이 끝났을 때도 레닌은 곡물의 강제 몰수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기근과 1920~1921년 겨울 농민 불만과 노동자 파업 증가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레닌 자신이 인정했듯이 볼셰비키는 경제 전선에서 퇴각을 선언해야 했고, 노동계급 투쟁 급증이 그들을 구할 때까지 버티려고 노력해야 했다. 신경제정책(NEP)은 농민 생산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곡물의 자유(자본주의) 시장을 복원하려는 의도였다. 이른바 전시 코뮤니즘시기 비상 정책(화폐폭락, 배급에 의한 분배)이 사회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희망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그리고, 부하린은 레닌이 따뜻하게 평가했던 책, 이행기 경제에서 이것을 주장했다), 근본적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 생산양식을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1917년 레닌이 러시아 경제 일부를 국유화 하고자 요구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 도입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 조치...”2)

     

    사회주의의 하향식 도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레닌은 사회 변혁은 노동계급 대중이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이해했다. 이것은 단지 기존 자본주의 정치 질서를 전복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여기서도 레닌은 볼셰비키가 블랑키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소수가 스스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거나 장악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이것이 레닌이 19177월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던 이유다.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중심인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19179월 이후에야 레닌은 케렌스키 정권의 전복을 주장했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191711월에 수립된 체제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또는 노동자 국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장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소비에트 체제의 주권 강조이다. 그러나 노동자 국가의 수립이 사회주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사회주의는 법령으로 시행될 수 없기”(레닌) 때문이다. 레닌은 혁명이 사회주의에 도달하려면 국제적으로,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 계급의식 측면에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쪽 전선에서 1917년의 혁명적 희망은 1921년에 깨질 것이었다.3) 국제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가 군사적으로 승리한 내전으로 인해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기반이 무너졌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어떻게 소비에트가 빈껍데기가 되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다. 1921년까지 1917년 공장 노동자의 57%가 붉은 군대에 입대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시골로 돌아가기 위해 공장을 떠났다. 이때 레닌이 말했듯이

     

    우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의 대표자이다.”

     

    그 자리에 코뮤니스트당이 생겼다.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에서 이제는 거대한 관료기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천 명의 당원이 있을 때조차도 야코프 스베르들로프(Jakob Sverdlov)와 두 명의 비서가 한 사무실에서 운영한 혁명당은 점차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1919년 스베르들로프의 사망은 한때 혁명적이었던 당의 통치기구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저항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1922년 스탈린이 당 총서기가 되었을 때,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당 독재로 넘어갔다. 내전은 또한 상황을 바꿔 놓았다. 그것의 악랄함은 소비에트 실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단순히 옛 혁명가들이 무자비한 국가 관료가 되도록 강요했다. 아무도 이 오염을 피하지 못했다. 10차 당 대회의 분파 금지 결정은 콜론타이(Kollontai)와 슐라프니코프(Shlyapnikov)노동자 반대파와 같은 코뮤니스트 좌파 반대파, 사프르노프(Sapronov)와 오신스키(Ossinsky)와 같은 민주 중앙집중주의자, 그리고 미아스니코프(Myasnikov)노동자 그룹과 같은 다른 그룹들을 겨냥했다. 이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진정한 양심이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이미 당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21~1928년 사이에 분파 금지가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1921년의 결정은 스탈린이 독재자로 부상할 수 있도록 나중에 사용할 또 다른 무기를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부 볼셰비키는 당이 나아하는 방향에 분명히 관심을 보였고 혁명적 노동계급(지금은 소수가 됨)에서 당의 뿌리가 상실되는 것에 대해 걱정했지만, 지노비예프(Zinoviev)와 같은 다른 볼셰비키들은 심지어 당 독재가 좋은 일이라고 선언했다.4) 이러한 차원에서, 스탈린의 기관 통제는 그가 총서기를 맡았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말년에 레닌은 혁명의 퇴보와 스탈린의 부상 위험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그는 노동자농민 감독관인 라브크린(Rabkrin)을 체제에서 최악의 운영조직 중 하나로 비판했다. 이 조직의 수장은 스탈린이었다. 마찬가지로 레닌의 마지막 저술에서 그는 스탈린이 총서기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의 추가 쇠퇴와 죽음만이 스탈린을 구했는데, 1924년까지 트로츠키를 권력에서 제거하기 위한 당내 투쟁으로 지노비예프가 중앙 위원회에서 그를 옹호하면서 레닌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레닌은 말년에 관료화 과정이 1917년 초기의 혁명적 희망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뮤니스트당은 더는 혁명적 노동계급의 전위가 아니었다. 그 계급은 이제 수천 명의 출세주의자로 부풀려졌고 그들 중 대부분은 차르의 전직 관료였다. 내전 동안 러시아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은 그들을 받아들였다. 레닌은 19223(11차 당 대회에서)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에 보낸 마지막 생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거대한 관료 기계, 그 거대한 무더기를 취한다면 우리는 누가 누구를 지휘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들이 그 무더기를 지휘하고 있다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이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받고 있다.”

     

    코뮤니스트당이 이제 사실상 국가 기구였기 때문에 레닌은 기본적으로 심각한 위험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탈린을 총서기에서 해임하라는 그의 유명한 요구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레닌은 일반적으로 당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집착했다(공안질서수호국[Okhran] 요원 말리노프스키[Malinovsky]가 문서를 보여줄 때까지 경찰 스파이였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또한 볼셰비키가 191710월에 케렌스키를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세상에 알린 것도 용서받았다. (주로 레닌이 말했던 파업 파괴에 대한 많은 지지를 받았던 볼셰비키는 무관했기 때문에) 하지만 스탈린을 제거하라는 요구는 총서기직에서 그를 해임하라는 요구였다. 왜냐하면 그를 정치국에서 제거하지 못할 만큼 그는 과도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마지막 유언에서 여전히 혁명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집단지도체제 구성을 바랐다.

     

    그러나 지노비예프가 트로츠키에 맞선 분파를 만들기 위해 당에 레닌의 충고를 무시하라고 요청하면서 분열은 이미 일어났다. 스탈린은 지역 당서기를 임명하여 중앙위원회에 누가 선출될지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기구가 지도부를 선출함에 따라 레닌이 경고했던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스탈린은 여전히 소수의 대의원만을 통제했기 때문에 때를 기다려야 했지만, 과반수를 차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제

     

    만약 반()혁명이 정치영역에서 진행 중이라면, 경제에서도 긍정적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이, 볼셰비키가 생산양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전시 코뮤니즘기간에도 노동계급은 더는 자신의 기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른바 1918년 공장위원회 탄압은 사실 생산을 더 잘 조정하기 위한 더 강력한 집중화에 대한 그들의 제안이었지만, 1인 경영(정부가 임명한 경영자를 이용한) 부활, 미국에서 노동력 착취를 강화하는 테일러주의 경영 관리법 채택, 부르주아 전문가에 대한 임금 인상 등은 모두 심각한 후퇴 증거였다. 확실히 이러한 후퇴는 계획적인 오류라기보다는 상황의 산물이었지만, 그런데도 후퇴로 남아있다. 1920년에 이르러 하향식 장치가 되어 트로츠키 자신이 노동의 군사화를 제안했을 때 백군과 제국주의 지지자들에 맞서 내전에서 승리한 방법을 사용할 것을 주창했다. 이 모든 것은 19213월 적어도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이 신경제정책을 채택하도록 강요하기 전에 일어났다. 신경제정책 골자는 소부르주아 생산에 대한 양보였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무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경제정책이 정확히 후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농업국가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미래에 사회주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 소련의 분위기는 스탈린 시대와 달랐다. 볼셰비즘의 지지자가 아닌 알렉 노브(Alec Nove)1920년대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20년대는 지적으로 흥미진진한 시기였다.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뛰어난 웅변과 재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볼셰비키가 아닌 사람들이 상당히 독립적인 발상을 제안했다. 국가계획위원회(GOSPLAN)와 인민경제최고위원회(VSNKh) 전문가에는 많은 옛 멘셰비키가 포함되었는데, 훗날 음모 및 사보타주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로만(Groman), 바자로프(Bazarov), 긴츠부르크(Ginzburg)와 같은 사람들은 정책토론에 크게 기여했다. 보기를 들어 저명한 경제학자 콘트라티예프(Kondratiev), 농업 전문가 차야노프(Chayanov), 첼린츠셰프(Chelintsev)와 같은 옛 인민주의자들과 전 사회혁명당원(SR)또한 활동했다. 리토스셴코(Litoshenko)와 커틀러(Kutler)와 같은 비()사회주의자들조차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일당(一黨) 국가가 있었고, 조직과 반대의 법적 수단은 없었지만, 조건은 획일적인 1930년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경제사, 펭귄 출판사, 1992, 131)

     

    1920년대 볼셰비키당원들 사이의 논쟁을 연구하는 사람은 비극의 목격자이다. 정권이 세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버텨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설과 글이 넘쳐났지만, 고립이 가중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코뮤니스트 개인의 의지는 크게 흔들렸다. "원시적 사회주의 축적"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조차 외부 자본 없이는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돌이켜 보면(, 그들의 경험)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현실은 역사가 가만히 있지 않고 한 번의 후퇴가 곧 다른 후퇴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항상 스탈린은 당의 완전한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계책을 부렸다. 그가 행한 수단 중 하나는 세계혁명이라는 원래 목표를 포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소규모 공장은 개인 소유로 돌아갔지만, 주요 변화는 곡물 시장의 재건이었다.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농민의 바다에 둘러싸인 작은 프롤레타리아트로서 소비에트 정부는 많은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레닌은 공개적으로 그것을 후퇴라고 묘사했지만, 이 늦은 단계에서도 세계혁명이 이 상황을 구할 것이라고 여전히 기대했다. 몇 달 후 그는 혁명의 물결이 끝났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고립에서 벗어나기까지 몇 년, 심지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대신 신경제정책은 국가자본주의 제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레닌은 "국유화""사회화" 라는 용어의 혼동을 비난했지만, 레닌이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 사이에서 제기했던 이전의 반대 또한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두 용어는 동의어가 되었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강령을 부활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이 혼란은 핵심 쟁점이다.

     

    러시아혁명이 러시아의 생산양식을 바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기가 항상 어려웠다. 일부 사람들에게 "전시 코뮤니즘"(1918-21) 동안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소농의 소유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크게 확대되었을 때였다. 자본가들은 모두 도망쳐서 공장을 프롤레타리아트(그들이 사회화하기 시작한)에 버렸을지도 모르고, 화폐는 그 가치를 잃어서 배급과 물물교환이 일반적인 교환수단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체제가 생존하기 위한 이러한 긴급조치가 사회주의 건설 시도라고 추정하는 것은 착각이었다. 사회주의는 생산력이 물질적 풍요를 창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만 올 수 있다. 1918년 러시아 경제의 붕괴 상태는 너무 심각해서 한 역사가는 적어도 1347년의 흑사병에 비유했다.

     

    다른 사람들은 스탈린이 계획경제를 시작할 기관(국가계획위원회, 국영은행 및 인민경제최고위원회가 보다 직접적인 국가 기구로 전환된 시기)이 작동하기 시작한 신경제정책 시기(1921-8)를 지적한다. 그러나 신경제정책은 많은 볼셰비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착취"로 불리지 않았다. 신경제정책 아래에서 실업률은 대략 노동계급의 약 25%로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 상승에 따라 하락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팔기 전에 내야 했던 "현물세"가 화폐세로 대체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화폐개혁이 수반되었다. 국영은행은 이제 새로운 질서의 독점 금융자본가가 되었다. 다시 한번 이것의 주요 희생자는 노동계급이었다.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차이가 가장 명백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실제로 지배적이고 정치적으로 통제한다. 소비에트가 확장하고 기능하던 1918년에도 어떤 의미에서도 이것은 러시아에서 단일 국가(따라서 볼셰비키가 국제주의를 고집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와 같은 슬로건 채택은 분명히 맑스주의자들이 항상 이해해왔던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의 폐기를 의미한다. 건설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혁명에 대한 진정한 전망이 희미해지면서 소련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볼셰비키 지부의 많은 사람이 신경제정책이 계속된다면 러시아는 소부르주아 자본주의 생산자들이 지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하린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경제의 생산 부문(농민)에 대한 과세를 통한 국가자본의 느린 축적만이 이후 산업발전의 기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후진성이 논쟁을 지배하면서 핵심 질문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아니라 러시아를 어떻게 산업화시킬 것인가로.

     

    스탈린은 진지한 공헌자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에서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1924레닌주의의 기초라는 강연에서 일국사회주의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처음 제기했다. 이 작업은 레닌 사상을 단순화한 것이지만, 세계혁명 이외의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또한 담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당 전체가 처한 혼란을 반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세계혁명의 미래와 러시아 발전에 대한 논쟁에서 거의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모든 분파 사이에서 중심에 서는 것이었고, 항상 다른 분파를 좌파”, “우파또는 통합파”, 반대파로 묘사했다. 지노비예프와 같은 사람들이 한때는 격렬하게 반()트로츠키였다가, 다음에는 친()트로츠키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자신을 분파 위의 당원으로 묘사할 수 있었고, 또한 점점 더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때까지 소비에트가 공식적으로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생각은 당 국가에서 실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 기억이 되었다. 당이 더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관료적 통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우선 지노비예프가 도입한 것이다. 심지어 트로츠키조차도 누구도 당에 맞설 수 없다라고 외쳤는데, 이는 스탈린이 청중들에게 좋은 레닌주의방식으로 당이 실수하리라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게 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당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었다.

     

    1920년대 후반, 대부분 무시되었던 분파 금지에 관한 1921년의 결의안은 스탈린에게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의 대의원에 대한 지배가 커짐에 따라 모든 반대자는 정치국에서 투표권을 박탈하고, 정치국을 오르조니키드제(Ordzhonikidze), 카가노비치(Kaganovitch), 몰로토프(Molotov) 및 미코얀(Mikoyan)과 같은 자신의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1928년에 이르자 스탈린은 당-국가 기구 전체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 그는 농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 것에 자신감을 느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에게 이 시기는 소비에트 생산양식의 사회주의적 변혁이 일어난 시기였다. 그들은 강제 집산화 프로그램이 농민에 대한 강제 수용, 사적 생산의 종료, 모든 공장의 재국유화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5개년 계획의 산업화 프로그램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를 대체한 것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사실이지만, 이러한 조치를 사회주의라고 계속 말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스탈린은 그것에 관해 거침없이 말했다. 이것은 위로부터의”(당시 그가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표현) 혁명이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사회주의는 생산자 자신이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레닌이 소비에트 권력의 초기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는 공장으로 가서 노동자 스스로 경영하도록 촉구했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만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세계혁명의 확장에 달려있었다. 세계혁명의 확장에 실패하고 1918~21년 내전 기간에 계급의식을 가진 많은 노동자가 사라지자 러시아 혁명가들은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레닌 자신도 명확한 해결책이 없었고 1921년 이후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그의 글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앞서 설명한 이른바 자유 독재시기인 1920년대의 활발한 논쟁은 사실 딜레마를 숨기고 있었다. 사회주의가 자기 생산물 생산자의 통제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맑스주의 이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만이 이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붕괴가 당을 새로운 국가로 남겨둔 이후 역사는 이미 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내전 동안 발전한 경찰기구의 더욱 적극적인 사용과 국가산업을 강제로 현대화하기 위한 군국주의 동원 프로그램의 채택이 필요했고,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모든 주요 구성요소를 갖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의 승리는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모든 문제를 제쳐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장되었다.

     

    그들에게는 사회주의에 관한 어떤 이론보다도 소련의 산업화라는 실질적인 과제가 더 중요했다. 후진국에서 산업화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투자에 대한 독점적 통제를 통한 국가였다. 스탈린은 1929년에 의제를 정했다.

     

    중공업은 국가 보조금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제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는 고사하고 문명국으로서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다. (레닌주의의 문제, 모스크바 1940, 303)

     

    그리고 여기에는 국유화(즉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와 생산자 자신이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사회화를 동일시하는 많은 사람의 혼란이 있다. 이것은 결국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한 걸음으로 보여야 한다. 국가가 결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회주의가 훨씬 더 중앙집권화된 국가 기구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스탈린주의자들만이 국가 소유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에서도 널리 퍼진 믿음이었다. 하지만 국가 소유는 이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단일 자본주의 실체에서 집단 자본주의 실체로 이전할 뿐이다. 임금노동자의 처지에서(그리고 맑스가 말한 임금노동의 존재는 자본주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둘 다 자신의 잉여생산물 처분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5개년 계획에 따라 생계비가 엄청나게 오른 것으로 계산되었다. 집산화 재앙은 4년 만에 기초 식료품 가격의 8배 상승을 이끌었다. 임금이 억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득세가 인상되었고, 여기에 임금 격차 및 다른 인센티브가 도입되었다. 일부 산업에서는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40배까지 벌어질 수 있다.5) 문제는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시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형편이 더 나았는지가 아니라(당시 서유럽 노동자의 1/4은 실업 상태였다) 그들이 실제로 생산수단에 대해 동일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주의자들(그리고 실제로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자본주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그들의 모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19세기 기업가(틀림없이, 시가와 중산모를 갖춘 남성)를 찾고 있지만, 그러한 인물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말의 독점 자본주의가 지배계급이 지구의 잉여가치를 처분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집단적인 기업 자본주의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이클 라이먼(Michael Reiman)의 다음 관찰과 어떻게 다른가?

     

    스탈린의 강령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인민과 분리되고 인민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지배적인 사회계층의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탈린주의의 탄생: 2차 혁명 직전의 소련, 인디애나, 1987, 120)

     

    우리는 이미 이 지배계급을 낳은 두 가지 핵심 요소를 보여주었다. 첫째, 당내의 모든 잠재적 반체제 인사들의 모든 권력 위치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정치적 그리고 물리적 제거. 둘째 젊고 새로운 계급의 노멘클라투라를 만들었는데, 그들의 다수는 첫 번째 5개년 계획에서 훈련받은 노동자의 자녀들이었다. (한 가지 역설은 그것이 ()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별 주택, 특혜 상점, 별장(dacha), 고등 교육 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별개의 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서유럽의 지배계급처럼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이러한 특권을 그들의 자녀에게 물려주고 항상 지배계급에서 역할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의 잉여가치를 집단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국가 기구가 설정한 모든 목표를 향해 돌렸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도 경쟁 압력을 가져왔고, 이는 또한 사회주의 계획이 존재한다는 개념을 약화했다,

     

    존재했던 것은 아마도 일어나고 있는 계획의 반영으로 추정되는 목표 설정 체제였다. 모든 목표 설정 체제와 마찬가지로 그 목표들이 한 일은 경제가 기능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관리자들은 종종 그들의 프로젝트에 자원을 전용하기 위해 경쟁했고 중앙은행의 지원을 얻기 위해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국영은행과 재무부의 역할은 명시된 계획이 무엇이든지 간에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매우 중요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엉터리 국가 체제는 화폐 폐지를 향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실제로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경제에서 금전적 유인책의 역할이 커졌다. 화폐 문제는 어떤 체제의 사회주의적성격을 평가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비록 우리가 여기서 그 문제를 완전히 다룰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하에서 화폐는 생산의 실제 가치를 왜곡하는 또 다른 수단을 나타낸다. 생산 자금을 조달하고 통화 공급을 통제하는 사람들도 경제 관리의 주요 수단을 통제한다. 그들은 자원을 배분하기 위해 화폐적 가치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존재하는 한 사회는 가치 법칙에 지배될 것이다. “필요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영역으로의 도약은 화폐가 폐지되어 노동시간 자체가 탈상품화되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에만 사용되기 전까지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는 또한 개인이나 추상적인 집단 자본주의 국가에 우리의 잉여가치를 수용하고 지시할 지배계급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 스탈린주의는 소련이 너무 낙후된 자본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소련에서만 나타났다. 어떤 면에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의 혼합 경제를 예고했지만(보기를 들어 인민이 국유화된 산업을 소유한다는 구실), 실제로는 독특한 맥락에서 발생한 자본주의적 구성체였다. 그것은 중국과 쿠바와 같은 국가의 모델이 되었지만, 진정한 혁명가들과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코뮤니즘의 요람이 아니라 묘지였다. 이것은 우리가 퇴치해야 할 유령이다.

     

    결론

     

    러시아혁명은 스탈린이 1928년 소련의 확실한 지도자가 되기 훨씬 전에 이미 패배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퇴보는 세계적인 계급 운동의 패배와 그에 따른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맞선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의 약점에서 비롯되었다. 스탈린주의는 볼셰비키혁명의 당연한 결과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희망과 노력과의 완전한 단절이었다. 노동계급의 자유 대신에 스탈린(그리고/또는 그가 대표했던 성장하는 자본가계급)은 전례 없는 잔혹한 당 독재를 발전시켰다.

     

    코뮤니즘 대신에, 특히 잔혹한 국가자본주의의 변종이 발전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인 상품생산과 임금노동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전면적인 국가통제와 강제노동은 사회주의의 업적이라고 거짓으로 그려졌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의 수중에 집중된 생산수단에 대한 처분권이 없는 임금노동자로 남았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특히 퇴행하는 국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등장한 혼합경제의 특정 요소를 예상했다. 여기에서도 국유화된 산업은 인민의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독특한 맥락에서 발전한 극히 예외적인 자본주의적 구성체였다.

     

    스탈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심각한 패배를 안겼던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쿠바나 중국과 같은 일련의 국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지배 형태이자 정치 경향으로서 스탈린주의는 민족주의와 국가자본주의 강령을 토대로 행동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복종, 테러, 혁명의 포기, 코뮤니스트의 대량 학살,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조장, 여성에 적대적인 성도덕 전파, 임금노동에 대한 미화에서 완전히 반동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스탈린주의는 다소 퇴보한 사회주의 실험이 아니라, 반대로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들, 특히 반()코뮤니즘의 음흉한 변종이었다. 6)

     

    AD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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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록 그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이것이 자연적으로 더 높은 사회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사회가 새롭게 건설되거나 아니면 계급투쟁이 경쟁하는 계급의 공동파멸로 이어질 것이다. 또는 훗날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공식으로 표현한다면 부르주아 사회의 붕괴에서 나올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준비와 계급의식이다.

    2) 선집2(모스크바 1977) 51쪽 인용,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3) 국제주의 코뮤니스트21, “1921: ()혁명의 시작참조

    4) 이 주제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8, “러시아혁명의 쇠퇴와 당 숭배참조

    5) 1. 머빈 매튜스, 소련에서의 특권 : 코뮤니즘 아래의 엘리트 생활양식에 대한 연구, (Alen and Unwin, 1978)

    6) (역자) 결론은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믿지 못할 친구들: 스탈린주의”, 코뮤니즘을 위하여를 인용했다. 이 팸플릿을 발행한 CWOICT의 영국 지부이다.


    <파일 다운로드>
    스탈린주의 비판(전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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