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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펌] 류한수진이 회피하는 문제들
  • 펌펌
    조회 수: 2107, 2014-12-06 21:18:57(2014-12-06)
  • 12월 3일에 ‘노동자연대 낙인찍기에 대처하기 위한 TF’는 ‘류한* 씨는 노동자연대 낙인찍기를 시작한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라는 제목의 글(이하 ‘책임을 돌아보라’ 글)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류한수진 씨(이하 호칭 생략)가 자신의 생각을 SNS에 밝혔다(이하 ‘12월 3일 SNS 글’).

    그러나 류한수진은 여전히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못 본 척하고 넘어가거나 회피하고 있다.

    1. 인과관계의 전도: 다함께에 뒤집어씌우기

    A는 처음 폭로부터 다함께[2014년 2월 28일 이전의 일을 언급하는 경우에는 노동자연대의 이 옛 명칭을 사용할 것임]를 “성폭력 2차가해” 단체로 낙인찍었다. 류한수진은 이것이 없었던 일인 양 무시하면 안 된다.

    류한수진의 글만 보면, 마치 갑자기 다함께 회원들이 온라인상에서 피해호소인을 ‘린치’하려고 달려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임을 돌아보라’ 글에서 우리는 A가 이미 첫 폭로 때부터 다함께를 “성폭력 방임”한 “2차가해 단체”라고 규정했고(A의 첫 폭로 글을 확인해 보라), 사실 이 때문에 당시 학생조직자의 경솔하고 부적절한 온라인 대응이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즉, 처음부터 단체 자체를 2차가해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서 온라인상의 (잘못된) 공방이 시작됐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류한수진은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봐서인지 계속해서 인과관계를 전도시키고 있다. “유체이탈 화법”을 하고 있는 것은 류한수진이다.

    2. 온라인상에서의 무분별한 폭로에 대한 성찰 없음

    류한수진은 이런 폭로 방식이 사건 해결에 목적이 있는지, 아니면 비방 자체에 목적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방식이라는 점을 조금도 돌아보려 하지 않고 있다. 류한수진은 12월 3일 SNS 글을 시작하며 누군가가 노동자연대의 글에 자신을 태그하고 간 것에 대해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얼굴에다 성명서를 던지고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썼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사실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우리를 “성폭력 단체”로 낙인찍었을 때 우리가 느낀 심정만 하겠는가.

    류한수진은 다함께에 여러 차례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는 걸 증거로 들면서, 자신과 A지지모임은 문제 해결을 바랐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A지지모임이 다함께에 첫 공문을 보낸 것은 A의 온라인 폭로 2주 뒤인 12월 2일이었다. 그 사이에 류한수진은 이미 “다함께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을 만들고 지지자들을 모집했으며 11월 28일에 지지모임의 명의로 다함께가 “2차가해로 ‘대동단결’”해 있다는 내용의 입장서까지 발표했다!

    이미 바깥에서 “성폭력 가해 단체”로 낙인찍어서 동네방네 떠들어 놓고 그 뒤에 공문 보내서 사건 해결하자고 하면 대체 누가 그걸 진상 조사가 가능한 절차로 받아들이겠는가? 실제로 A지지모임은 “가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조사 절차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다함께ㆍ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에 대한 평가와 해결 방안’) 12월 3일 SNS 글에서도 류한수진은 다함께에 공문을 보내기 전에 자신들이 한 일은 쏙 빼놓고 마치 지지모임이 처음부터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해결하자고 요구”했는데도 이를 다함께가 걷어찬 것처럼 서술해 인과관계를 뒤바꾸고 있다.

    다함께의 사과와 반성을 전제한 대화

    게다가 류한수진은 지지모임이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내걸었다는 점을 완전히 모른 척하고 있다.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은 첫 공문에서부터 이미 이 사건을 “다함께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해 놨고, 두 번째 공문에서는 우리 단체가 정아무를 성폭력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렇게 류한수진과 지지모임에게 정아무는 “성폭력 가해자”이고 다함께는 “성폭력 가해 조직”이라는 점은 이미 명약관화한 사실이었고, 따라서 이들에게 “사건 해결”이란 가해 사실을 ‘다함께가 인정하고 사과ㆍ반성’하는 것을 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함께가 지지모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함께가 아닌 그 어떤 단체라도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다함께의 이런 판단이 옳았음은 S대 교지 조윤* 대표의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 류한수진의 A지지모임은 조윤* 대표가 사건의 진상을 진술이 엇갈려 알기 어렵다고 했는데도, 조 대표의 사과문에 “명백한 성폭력이었다”는 문구 추가를 강요하고 윤문까지 해 보냈다. 이런 방식으로 다함께가 가해 사실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2차가해로 취급하는 일이 똑같이 반복됐을 텐데, 이게 과연 “양자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인가?

    3. 피해호소인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문제를 돌아본다면서 여전히 지지모임 결성은 옳았다는 모순

    류한수진은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하는 식의 표현이 많았던 것”(강조는 나의 것)은 당시 자신의 한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문제는 단지 일부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다. 류한수진은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하고, 그런 인식에 기초해 행동을 했고,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하지 않는 행위를 실제로 ‘2차가해’로 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모든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 요인이자 출발점이었다.

    류한수진이 당시와 달리 지금은 피해호소인의 말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면,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조직”이라 규정한 애초 A의 주장을 지금에라도 검증해 보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홀로 조직에 맞서는 피해호소인을 조력하기 위한’ 피해자 지지모임을 구성하는 것과 그 활동이 올바랐는지 아닌지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다함께가 가해 조직이 아니라면 그런 모임은 있을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책임을 돌아보라’ 글에서 우리는 ‘과연 류한수진이 정아무가 이정*(사건의 주 가해자)와 함께 강제로 야동을 보여 줬다는 A의 말이 진실인지 검증했는지, A의 말대로 다함께가 A의 호소를 방임했는지 아니면 다함께 중앙은 이 사건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확인이나 해 보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류한수진은 이 물음에 답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류한수진은 이미 법정 진술(2014. 4.12)에서는 이렇게 썼다.

    “이전에 제가 썼던 글들 가운데 주장을 사실처럼 쓴 부분이 있거나 신원 보호에 충분히 유의하지 않은 부분이 었었다면 이는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며, 이정* 씨와 정아무 씨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또한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당한 입장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중압감과 고통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것도 후회합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를 다함께 낙인찍기를 돌아보는 데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한 것을 후회한다면서도, 가해자 또는 가해 단체로 함부로 몰아서는 안 된다며 SNS상 진위 공방을 벌인 다함께 회원들의 태도는 여전히 “2차가해”로 몰고 있는 것이다. “후회”할 짓(“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하기)에 동참하지 않고 진위를 따지자고 한 게 “2차가해”란 말인가? 이것은 혼자 “후회”는 할망정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비판도 받지 않겠다는 태도다.

    2) “신원 보호에 충분히 유의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이는 잘못”이었다면서도, 우리 단체를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성폭력 가해 단체로 지목한 것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류한수진은 지지모임의 명칭을 “다함께 성폭력 사건”으로 붙임으로써, 마치 다함께 내의, 그것도 핵심 간부가 저지른 강간 사건을 조직 보위를 위해 다함께가 은폐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만들었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가해자로 지목당한 입장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중압감과 고통”에 대해서는 후회한다면서, 한 단체와 그 단체의 회원 7백여 명이 느끼는 중압감과 고통은 외면해도 되는가?

    3) 또한, 류한수진은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단체”로 폭로한 A를 옹호하면서, “A의 말이 사실이라고 전제한다면 A의 폭로는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썼다. 다시금 류한수진이 유일하게 의존하는 것은 A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일 뿐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한계를 인정한다면, 이 전제를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후회”를 하고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발본적인 돌아보기를 유보하고 있는 탓에, 류한수진이 “피해자의 말을 기정사실화”해서 당시 상황을 인식했던 편견은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다. 12월 3일 SNS 글에서 류한수진은 노동자연대를 “조직원에 의한 인권 침해를 호소하는 개인을 침묵시키고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이런 규정에 대한 자세한 논박은 노동자연대가 11월 26일 발표한 글 ‘”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명예훼손 모략을 중단하라’를 보라.)

    그러나 A의 말을 “기정사실화”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이제라도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판단해 볼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지는 않고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당시에 다함께 회원들은 명백히 문제를 묻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고 여전히 주장하는가? 또다시 A의 “주장을 사실처럼” 쓰는 후회할 일을 반복하는 것인가?

    나는 류한수진이 지지모임을 구성하는 과정과 이후의 활동 전체에서 피해자 절대주의 말고는 어떠한 객관성이나 신중함이 있었는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와 관련해 노동자연대는 ‘책임을 돌아보라’ 글에서 ‘2차가해’ 개념이 성폭력 개념을 매우 주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일조함으로써 피해자의 말을 절대화하는 데로 이끌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류한수진은 이 지적에 대해서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2차개념’을 받아들이면 피해자 절대주의를 경계한다는 말과 행동 사이의 불일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4. ‘방조’와 ‘공범’을 구분하지 않음: 형법 제30조를 찾아보시오

    류한수진은 ‘방조’와 ‘공범’(이 사건의 경우 공동정범을 뜻함)도 구분하지 않고 접근했다. 그러나 두 행위는 단순한 용어 차이가 아니라 명백히 구분되는 행위이다.

    법적 용어로 ‘공범’이란 “1인이 단독으로도 실행할 수 있는 범죄를 2인 이상이 협력하여 실행하는 경우”를 말하는 한편, ‘방조’란 “실행행위 이외의 행위로써 정범(피방조자)의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강조는 나의 것) 최근 정아무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도 정아무가 공범이라는 A의 주장은 허위사실이라고 판결했다(즉, ‘공범’과 ‘방조’를 구분했다). S대 성폭력예방대책위원회 의결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런 법적인 용어를 자세히 모르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방조’와 ‘공범’을 다른 의미로 쓰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류한수진은 이 둘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피해자의 말만 듣고 정아무도 이정*과 함께 강제로 야동을 보여 준 ‘공범’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아무가 공범이냐 아니냐’가 진상을 둘러싼 공방의 핵심 쟁점이었다. 명예훼손 소송의 핵심 쟁점도 바로 이것이었다.

    류한수진은 S대 교지 조 대표와 우리 단체에게 이정*과 정아무 모두를 공범으로(즉, 주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2차가해라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우리 단체는 둘 모두를 “주 가해자”라고 보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봤다. 물론 개념 없이 방조한 것도 잘못이라고 여겨 정아무를 징계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류한수진은 이정*에 대해 “주 가해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주 가해자”라는 표현은 ‘부차적 가해자’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류한수진은 처음에 A의 말만 듣고 성급하게 정아무도 ‘공범’으로 규정했던 오류를 시인하거나 돌아보려 하지는 않고, 은근슬쩍 둘의 행위를 구분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무책임하고 솔직하지 못하다.

    5. SNS상의 공방과 법정소송이 조직적 결정이 아니었다는 증거 무시

    류한수진은 SNS상의 공방과 정아무의 법정소송이 다함께의 조직적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근거들도 한사코 못 본 척하고 있다.

    류한수진은 SNS상에서 공방을 벌인 회원들에 대해 조직 내부에서 “상호비판을 얼마나 했는지”는 몰라도 피해자는 이에 대한 사과를 받아본 바 없으므로 내부 비판은 피해자와 “무관한 얘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조직 내부적으로 비판과 문책이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다는 주장은 거의 의도적인 책임 회피다. 다함께가 “조직적”으로 결정한 사항이 SNS상의 모든 공방을 중지하라는 것이었다면, 다함께가 “조직적 2차가해”를 저질렀다는 류한수진과 대책위의 핵심 주장(나아가 활동 자체)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류한수진은 피해 호소인에게 사과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부당하게 “(2차)가해 조직”으로 낙인 찍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의 해결 없이 다시금 왜 사과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다함께가 “2차가해”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밖에 안 될 것이다.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이 다함께를 근거없이 낙인 찍은 책임을 먼저 시인하는 것이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참에 류한수진이 우리 단체를 너무 우습게 본다는 점도 지적하고 가야겠다. 만약 단체가 정말 “조직적”으로 대응했으면, SNS상에서 공방에 나선 회원들의 글에 ‘좋아요’가 고작 30개밖에 안 됐을까? 회원들에게만 촉구해도 순식간에 수백 명, 비회원 지지자들까지 합치면 천여 명은 훌쩍 넘길 것이다. ‘좋아요’ 30개 누른 걸 “조직적” 대응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우리 단체의 조직적 실천의 힘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

    사실, 그때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은 대체로 A와 잘 지냈던 학생회원들이었다. 그중에는 A를 진지하게 도와주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와 잘 지냈던 학생회원들이 어느날 갑자기 A가 단체 자체를 ‘성폭력 집단’으로 만들자 배신감에 ‘발끈’했던 것이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공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닌가? 류한수진은 한 번만이라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

    정아무의 법정소송을 다함께가 “부추겼고”, “배후 종용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여러 글에서 언급하고 있어서(‘책임을 돌아보라’와 ‘노동자연대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가당착과 자기기만의 늪에 빠진 전지윤 씨’를 보시오), 이 글에서 길게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정아무 대리인이 스스로 “다함께 측에서는 소송에 반대했다”고 증언한 사실을 류한수진은 못 본 척하지 말라.

    6. 추진위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다함께 중앙과 회원 개인은 구분하지 않음

    결국 류한수진에게 남는 논리는 “조직의 정치성은 조직원들의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류한수진은 아주 손쉽게 회원 개인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연대에 묻고 있다.

    그러나 조직적 결정에 따른 것도 아닌 조직원의 행동에 왜 조직 전체가 책임져야 하는가? 다시 묻건대, 민주노총 조합원이 동호회 모임에 가서 성희롱 방관을 저지르면 그것은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되는가?

    또, 우리는 류한수진의 입장을 노동계급정당추진위의 공식 입장으로 치부해도 좋겠는가에 관해 물었다. 류한수진의 입장이 추진위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류한수진은 추진위와 자신을 구분하듯이 다함께 중앙과 회원 개인을 구분해야 한다.

    사실 류한수진의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당이 운동을 반영하기만 한다는 그릇된 당 개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직의 정치성은 조직원들의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그 정치조직은 자발성 원칙이 리더십 원칙을 압도한다는 뜻이다. 이런 조직에서 중앙 지도부는 사실상 조정 기관일 뿐이다. 그냥 조직원들이 알아서 활동하고 중앙 지도부는 그 활동들을 조율할 뿐이다. 이런 조직관 때문에 추진위 회원인 류한수진이 그토록 개인주의적일 수 있는 것인가?

    개인주의적 조직관에 친화적이어서인지, 류한수진은 레닌주의 조직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그러나 류한수진이 가정하듯 개인들의 돌출적ㆍ일탈적 행동 없는 그런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조직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같은 단체의 회원이라도 개인들이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그래서 같은 걸 보고도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레닌주의 조직원들이 로봇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우리 단체는 회원들 간의 의식의 불균등성을 극복하고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높여나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은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외눈박이

    설사 “조직의 정치성은 조직원들의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류한수진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를 통해 다함께를 ‘성폭력 가해 조직’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왜냐하면 A가 회원일 당시 다함께 회원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어떤 회원은 A에게 S대 교지에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2012년 11월에 지지모임이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심지어 A가 첫 폭로 글에서 주로 분노를 드러내는 옛 애인인 다함께 회원 조아무도 A에게 “직접 폭로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해” 줬다. 그러나 A 스스로 쓰고 있듯, “용기가 없어서” 공개적 문제제기를 해보라는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본인이 제기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가 폭로를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성적 수치심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그 뒤에도 또 다른 회원이 ‘강제로 동영상을 보여 준 사건에 회원이 관여돼 있느냐. 그렇다면 징계 절차에 들어가야 하니 알려 달라’고 했지만, A는 “회원이 아니다”, “웃어 넘길 일이다” 하며 이를 거절했다. 이 일은 A의 온라인상 첫 폭로 불과 보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류한수진은 외눈박이처럼, A를 도와주려 했던 이런 회원들은 보지 않고, SNS상에서 공방을 벌인 회원들만 보고 조직 전체를 매도하고 있다. 매우 불공정하다.

    7. 기호 2번 한상균 후보조 선본도 지지할 가치가 없는가?

    류한수진은 ‘성폭력 가해 조직(이 포함된) 선본이 당선된다 한들 그렇게 세워진 지도부가 여성해방의 쟁점들에 대해 계급 대중에게 어떤 지도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고 말한다. 심지어 “하자 있는 상품을 과대포장해 팔아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류한수진은 자기 단체인 추진위가 한상균 후보조 선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도, 노동자연대가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이 선본은 지지할 가치도 별로 없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백번 천번 양보해, 노동자연대가 류한수진의 말마따나 “성폭력 2차가해 조직”이라 해도, 그렇다고 선본도 지지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

    현재 선본 활동은 강령과 원칙을 달리하는 이질적 집단들이, 좌파적 지도부가 세워지면 투쟁에 더 유리할 것이라는 목표 하에 일시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선본이 곧 노동자연대는 아닌 것이다. 설사 노동자연대가 문제가 있다손치더라도 그걸 이유로 선본 전체를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은 완전한 비약이다.

    사실 류한수진의 이런 태도는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성폭력 문제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은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마치 노동자연대가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발현으로 치부한다는 식으로 왜곡하지 말라), 성폭력 문제를 모든 문제보다 우선시하고, 거기에 모든 걸 종속시킨다는 점이다.

    게다가 구정물에는 발도 담그지 않겠다는 이런 순수주의적(초좌파적) 태도는 스스로를 운동의 언저리로 물러나 있게 하는 태도임을 류한수진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8. 절충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모순과 동요

    마지막으로, (역시 류한수진은 한사코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이 문제에서 전선은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그어져 있다고 본다. 무릇 말보다 실천이 중요한 것인데, 앞서 설명했듯이 류한수진이 이 문제에 관한 실천에서 사용해 온 수단들 – 피해자 절대주의, 2차가해 개념, 구체적 행위들을 서로 구분 않기, 성폭력 문제를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기 – 은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류한수진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그를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류한수진은 성폭력 문제에서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언어ㆍ개념을 차용하고, 계급투쟁이나 노동운동 문제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언어ㆍ개념을 사용하는 절충주의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모순과 동요를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계급투쟁에 더 친화적이라는 점에서 계급투쟁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분리주의 페미니즘보다 마르크스주의와 공통점이 더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절충할 수 없는 두 가지(분리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절충을 시도하다 보니, 실천에서는 중간주의적 특징(중간에서 동요하기)을 보였다.

    예컨대, 영국에서 계급투쟁 수위가 낮아지고 사회적으로 반노동계급 사상이 우세해지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도 여성 차별의 문제가 많은 부분 남성들 – 특히 노동계급 남성 – 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이런 생각은 계급투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초계급적 페미니즘에 찬성하는 주장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0년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우경화하고 있던 노동당으로 향했다.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와 반노동계급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을 모두 받아들이면 모순에 빠지는 건 필연적이다. 그리고 결국 여성 차별을 끝내기 위해서 무엇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류한수진이 진중한 사회주의자로 살고자 한다면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그와 관련된 이론적 쟁점들도 천착해 보길 바란다. 자기 오류를 돌아보려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 는 활동가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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