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주의코뮤니스트포럼
  • [류한수진의 반론에 대한 이현주 기자의 재반론] 공허한 수사로 정치적 파산을 은폐할 수 없다
  • 노동자연대
    조회 수: 9049, 2015-01-16 06:34:09(2015-01-16)
  • 류한수진의 반론에 대한 이현주 기자의 재반론
    공허한 수사로 정치적 파산을 은폐할 수 없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이현주 기자가 연초에 완성했으나 개인 사정으로 퇴고를 못한 채 기사 게재를 미뤄둔 것을 ‘노동자연대 낙인찍기에 대처하기 위한 TF’가 교정을 보아 내놓는 것이다.

    류한수진 씨가(이하 모든 존칭 생략) 반론을 펴고자 지난 2014년 12월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동자연대의 글들에 부쳐, 성폭력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몇 마디’라는 글을 썼다. 1만 1백5자(2백 자 원고지 51매)나 되는 장문이다. 류한수진은 급진 페미니즘에 불필요하게 타협한다는 노동자연대의 비판이 꽤나 신경 쓰였나 보다. 글 전체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인 자신이 급진 페미니즘에 비판적임을 보여 주려 애쓴다.

    그러나 류한수진의 이번 글도 그가 급진 페미니즘에 불필요하게 타협하고, 그 결과 혼란과 동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류한수진이 우리의 문제 제기를 못 본 척하며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류한수진은 이제라도 해명해야 마땅한 문제들에 대해 그 긴 글에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문제들은 이렇다. 피해호소인 A의 주장만 믿고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다함께를 “성폭력 단체”로 낙인찍은 점, 사실관계를 악의적으로 비틀어 ‘S대 교지 수련모임에서 회원이 아닌 사람이 동영상을 보여 준 사건’을 ‘다함께 회원에 의한 성폭력 사건’으로 비쳐지게 만든 점, 출처도 밝히지 않고 ‘다함께 내에서 데이트 강간과 가정 폭력, 여성에게 뒷바라지 시키기가 용인된다’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말을 지어낸 점, 여성의전화가 진상조사를 해주기로 한 적도 없는데 다함께가 여성의전화 주관의 진상조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다닌 점, 법원 판결에서 정아무가 ‘공범’이라는 A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판결나자 슬그머니 정아무 ‘공범’ 주장을 하지 않고 있는 점, 법원에서는 A의 “주장”을 “사실”처럼 쓴 것을 반성해 놓고 여전히 A의 “주장”을 “사실”처럼 쓰며 노동자연대를 비방하고 있는 점 등등.

    이미 드러난 사실들만으로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노동자연대에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이건만 류한수진은 자기 치부가 드러나는 쟁점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자연대가 자기 방어에 나서자 그걸 “논점을 흐리고 ‘진상이 뭔지 잘 모르겠다’는 혼란을 퍼뜨리는 목적이 분명한 선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다함께-노동자연대에게 대답하라고 극성을 부리던 때는 언제고 말이다.

    류한수진은 “적합한 절차가 마련되면 노동자연대의 모든 비난에 대해 소명할 의사가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의 한상균 후보조 선본이 제안한 3자 연석회의를 수용한 바 있다. ‘다함께-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이하 대책위) 측이 제안을 받아들여 3자 연석회의가 성사된다면 그때 증인으로 류한수진이 나오길 바랐었다. 그런데 류한수진은 “적합한 절차가 마련되면 소명”하겠다며 지금은 말 못 하겠다고 하는데, 스스로 떳떳하다면 지금 말 못 할 게 뭐가 있는가. 다함께-노동자연대에 대한 공개적 비난을 시작한 건 류한수진 자신이다. 결국 ‘적합한 자리에서 소명하겠다’는 말은 자신 없고 감추고 싶은 쟁점을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 위한 어설픈 핑계밖에 안 된다.

    파산한 류한수진의 피해자 중심주의

    류한수진이 침묵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 가운데 특히, 2013년 여름경 A지지모임을 왜 그만뒀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자기 이름 걸고 한 공개적 활동에 대해 말하라는 것인데 류한수진은 왜 이 문제에서 그토록 꿀먹은 벙어리인 것일까? 류한수진이 A의 대리인을 자처한 직후인 2012년 11월 29일 페이스북에 올린 다음 글을 한번 보자.

    저희는 이걸 한켠에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함께랑 일대일로 소통해서 쇼부치는 게 아니라 운동사회 전체에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절차를 거쳐서 공론화할 것이고, 모든 폭력과 책임회피에 대해서 운동사회 전체 앞에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렇게 원대한 포부와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뛰어들었으면, 그만뒀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더는 A를 믿지 못해 A지지모임을 도망쳐 나온 것 아닌가? 이것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A지지모임의 원칙이 걸린 문제다!

    우리는 2013년 여름경 A가 자신의 SNS에 “지지모임 내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사실을 이제는 안다. 물론 A의 혼란스런 성폭력 개념(“상대방이 불쾌감을 느꼈으면 성폭력”)에 비춰 보면 진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A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어느 경우든 당시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의 정치적ㆍ도덕적 정당성이 완전히 실추됐다는 점은 명백하다.

    만약 A의 말대로 실제로 “성폭행”이 있었다면, 류한수진은 A지지모임 내 성폭력 사건을 은폐한 셈이 된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고 “피해를 공론화하는 행위는 변화를 이끌어 낸 출발점”이라면서(2013년 2월 5일 페이스북) 위선적이게도 정작 A지지모임 내 성폭력 사건은 “공론화”하지도 않고, “공동체의 책임”을 지지도 않은 것이다. A지지모임 내의 ‘성폭력’ 사건이 알려지면 모임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문제 될까 봐 그런 것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조직 보위를 위한 진실 은폐”가 아닌가.

    만약 A의 경험이 “성폭력”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면,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 성원들은 A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게 된다. A 스스로 자신의 SNS에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지지모임 내 성원들 사이에서 A는 “경계선 인격[성격] 장애”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로 A 주장의 신빙성에 근본적인 의심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류한수진과 대책위가 A의 최초 다함께 공격 당시 사건의 진상이 무엇이었는지 일부 회원들이 질문한 걸 ‘2차가해’라고 몬 것은 자가당착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파산했는데도 재활용되고 있는 류한수진의 피해자 중심주의

    이렇듯 류한수진은 자기 자신도 A를 믿지 못해 지지모임을 도망쳐 나온 듯한데, 우리한테는 여전히 A를 믿었어야 했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피해호소인 여성이라고 다 진실을, 진실만을 말할 거라는 가정은 위험하다. 퓰리처 수상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 된 ‘스코츠버러 사건’(1931년 백인 여성 2명이 흑인 소년 9명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거짓말해 흑인 소년 8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건)은 이런 가정이 왜 위험한지를 보여 주는 극적인 사례다.

    게다가 피해호소인이 평소에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면, 그가 누군가에게 엉뚱하게 분노를 폭발시켰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피해호소인 여성은 진실만을 말한다고 확신해 버리면, 진위 여부를 가리는 일(또는 이를 위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것) 자체가 “가해자”를 편들고 “피해자”를 “억압”하는 일이 된다.

    류한수진이 동영상 사건과 SNS 논쟁에 접근할 때 딱 이런 식이었다. 오로지 A의 진술만을 근거로 진상은 이미 다 밝혀졌다는 전제 하에 “가해자”, “가해 조직”을 규정했다. 그리고 A의 말만 믿고 “[다함께 내에서] 영화 <도가니> 같은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거나 “다함께 내에서 데이트 강간, 가정 폭력이 용인된다”라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반복ㆍ확대재생산했다.

    그래 놓고 이번 글에서 “‘피해자의 진술과 해석을 일차적으로 신뢰한다’는 ‘피해자중심주의’”가 문제이고 “한 쪽 진술과 해석을 기정사실화하고 사건에 접근해서는 안 되며, 물증이나 진술의 일관성, 개연성 등 객관화할 수 있는 근거를 토대로 진상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하다니 정말 어안이 벙벙하다. 스스로에게 해야 할 비판을 누구 들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진정한 유체이탈 화법이다!) 자기가 한 일은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생시치미를 떼고, 독단적인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은 정말 봐주기가 힘들다.

    심지어 류한수진은 여전히 “객관화할 수 있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다함께 내에서 데이트 강간과 가정폭력이 용인된다’고 떠들고 있다! 얼마 전 노동자연대가 사노신에 허위사실을 적시한 기사를 내리라고 항의하자 류한수진은 문제로 지적된 내용에 “전해 들었다”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류한수진이 중상모략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A 핑계를 댈수록 우리로서는 A 주장의 진위 여부와 그의 동기, 의도 등을 캘 수밖에 없다는 점을 류한수진은 알아야 한다. 또한 류한수진은 이제 와서 A 핑계를 댄다 해도 “객관화할 수 있는 근거를 토대로 진상을 판단”하지 않은 본인의 책임이 결코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류한수진은 지금 당장 ‘다함께 내에서 데이트 강간과 가정폭력이 용인된다’는 “객관화할 수 있는 근거”를 대든지, 그럴 수 없다면 잘못을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진실 규명 회피 수단이 된 2차가해 공세

    류한수진은 대체 왜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자가당착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지난 2년간 다함께-노동자연대를 중상모략해 온 책임을 지기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책임성 문제가 이 논쟁에서도 핵심이다. 책임 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고집한다. 류한수진이 전체 회원 5백 명 중 10명이 한 일, 그것도 지도부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SNS상에서 벌어진 일을 “조직적 가해”라고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류한수진은 다함께 운영위원회가 온라인 공방을 인지한 직후 이를 중단시켰다는 사실을 우리의 약점으로 착각하고 더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 ‘2차가해’라고 여겼으니 중단시킨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다함께 운영위원회가 온라인 공방을 중단시킨 것은 그것을 ‘2차가해’로 여겨서가 전혀 아니었다. 단지 댓글 논쟁이 흔히 소모적이고 오해만 키울 뿐, 진상 규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전부터) 봤던 것일 뿐이다.

    A가 말을 바꾸고, 단체에 공식 제기한 적도 없으면서 “방임” 운운하며 단체 자체를 “성폭력 단체”라고 ‘매도’했으니 앞뒤 정황을 아는 일부 회원들이 여기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류한수진은 ‘서울대 담배 사건’에서 자신이 ‘2차가해자’로 몰렸을 때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떠올려 보라.

    류한수진과 대책위는 어떻게든 우리를 “성폭력 단체”로 만들려고 다함께 회원들이 ‘너는 문란한 여성이므로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식의 말을 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런 야비한 짓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당시 다함께 회원들의 주장은 이정*이나 정아무의 행동을 옹호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이정*의 행동을 옹호한 회원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이정*의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는 애초에 쟁점이 아니었다. 왜 A가 전에는 정아무를 가해자로 지목한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공범’이라고 말을 바꾸는지, 왜 단체 자체를 “성폭력 단체”로 몰아가는지 하는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

    그런데 류한수진과 대책위는 다함께 회원들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따지지 않고 “2차가해”라는 방호벽을 세워, 다함께 회원들이 “사건 해결을 방해하거나 피해자를 억압”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맥락과 사실관계를 일부러 회피하는 거라면, 그런 교활함은 금방 들통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자살 시도”, “우울증”, “연애 결별의 앙갚음” 언급이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 들춰내기’나 ‘인신공격’이라는 주장도 진실 규명을 회피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 사실들은 사건과 무관하기는커녕 진상에 접근하기 위한 핵심적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류한수진과 A지지모임 성원들이 2013년 여름 A지지모임 내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A의 폭로를 접했을 때, A와 박미* 관계의 정확한 성격을 모르고도 문제를 덮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A지지모임 성원들 사이에서 A가 “경계선 인격[성격] 장애”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의학정보 사전을 보면, 경계선 성격 장애는 “지속되던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는 위협이 발생하게 되면, 이제까지 따뜻하고 자비롭다고 여기던 이상화된 그 사람의 이미지가 잔인한 박해자의 이미지로 격하된다. 중요한 사람과의 분리가 가까워지면 버림받는다는 극심한 공포가 발생하는데, 이를 줄이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잘못과 잔인함에 대하여 격노에 찬 비난을 하거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보일 수 있다. … 자살 위협이나 자해 행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까운 주변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경향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경계선 성격 장애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이 글에 붙인 부록을 보라.)

    A의 다함께 공개 비난 직후 조아무가 “자살 시도”나 “우울증”을 언급한 것은, A가 “연락 두절”됐다며 다함께 회원이자 막 헤어진 옛 연인인 자신(조아무)을 ‘성폭력 방임’ ‘2차가해자’로 지목한 것과 관련 있었다. 조아무는 전날 A로부터 살해 협박 문자(“나한테 한 번만 더 그 따위 거짓말 늘어놓으면 정말 살해할지도 모릅니다. 죽기로 마음 먹었던 사람이 뭔들 못할까욬”)를 받고 그 다음날 답신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지 연락 두절을 한 것은 아니라며, 자신과 A가 얼마 전까지 연인 관계였다는 점, 사귀는 동안 A의 거듭된 자살 시도로 고통받았던 자신이 위 같은 문자를 받고 괴로웠던 정황 등을 설명했다. 이 설명을 보면, 이른바 “다함께 성폭력 사건”은 A와 다함께 단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A와 막 헤어진 옛 연인 조아무 사이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배경으로 벌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조아무는 학생조직자가 아니었는데도 A는 무슨 이유에서인지(“이상화”했던 것일까?) 조아무를 계속 “학생조직자”로 부르고 심지어 단체와 동일시하면서(그가 마치 대학생다함께 대표라도 되는 양), 그의 “연락 두절”을 단체의 “성폭력 방임”으로 치환했던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약은 A와 조아무의 관계, 또 조아무에 대한 A의 격심한 분노를 알지 못한다면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진상을 해명하기 위해 했던 언급들마저 ‘사생활’이라며 입막음하고 2차가해로 몬다면, 진실을 가리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류한수진은 또한 은근슬쩍 초점 옮기기도 시도하고 있다. 류한수진이 A지지모임 시절에 낸 성명을 보면, “조직원” 정아무가 “성폭력”을 저질렀는데 단체가 정아무를 비호하고, 심지어 그를 위해 법정소송을 “조직적으로” 지원ㆍ개입하고 있다는 게 비난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아무가 ‘공범’이 아니라 단순 ‘방조’한 것이라는 법원 판결이 나오고, 법정소송을 다함께가 조직적으로 지원했다는 게 전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자, 이제 정아무 얘기를 은근슬쩍 누락시켜 초점을 옮김으로써 마치 우리 단체가 이정*을 비호한 양 보이게 만들려 하고 있다.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이 그런 일[야동 보여 주기]을 하고 다닌다면 비판하고 시정하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자기 조직이나 대중 단위의 성원이라면 적절한 교육과 설득을 통해 태도를 고치도록 해야 한다. … 사건의 원 가해자가 피해자가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식의 말을 떠들고 다니기 전까지 피해자의 애초 요구사항은 그 정도였고, 나는 이 요구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심각한 왜곡을 담고 있다. 먼저, 류한수진은 동영상을 보여 준 사람이 회원이 아님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치 다함께가 회원의 동영상 보여 주기 행위를 묵인한 것처럼 읽히게 만들고 있다.

    또 다른 곡필은 S대 청소노동자 쟁의 지원 문제다. 당시 A는 청소노동자 지원 활동을 주도하는 이정*에게 공식 문제제기는 하려 하지 않으면서, S대 다함께 회원들이 청소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것을 부당하게 문제 삼았다. 만약 A가 교지에 가서 문제제기 하기로 마음을 먹고 S대 다함께 회원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요구했다면, 회원들은 그에게 도움을 줬을 것이다. 당시 A가 더는 다함께 회원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필요한 건 A의 항의 의지였다. 그러나 A가 항의 의사가 없는데 누가 이것을 대리할 수는 없었다. 즉, ‘동영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은 S대 다함께 회원들이 이정*에게 무비판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A 자신이 용기가 없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S대 다함께 회원 오동*은 이정*이 ‘카카오톡’ 프로필에 여성 노출 사진을 게시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는데, S대 다함께 회원들이 이정*을 옹호한 듯이 얘기하는 것은 왜곡이다.

    진실이 이런데도 류한수진은 다함께 회원들이 이정*에 무비판적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자기의 책임을 피해가려 교묘하게 또 다른 거짓 논리를 만들어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어설프게 절충된 류한수진식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이제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류한수진의 관점이 뒤죽박죽임을 지적해야겠다.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급진 페미니즘에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그 운동이 기여한 부분은 공정하게 인정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입장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듯하다. 반대로 노동자연대는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조차 깡그리 무시하는 일면적 입장이고, 심지어 “성폭력을 외면”하는 입장인 양 몰아가려 한다.

    먼저, 우리는 급진 페미니즘 운동이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 문제를 여성이 받는 차별 문제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이미 다른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성폭력 가해 단체”라는 명예훼손 모략을 중단하라’). 그리고 성폭력이 ‘정조의 침해’ 행위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 행위라는 데 당연히 동의해 왔다.(<레프트21> 59호 ‘‘슬럿 워크’ 운동 – “여성의 NO는 NO다”’를 보라.)

    사실, 류한수진은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를 균형 있게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것의 “중심 원칙”을 다 수용하고 있다. 물론 그는 급진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본질적으로 적대적이고 사회구성체의 결정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현실인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성별권력관계는 일상 속에 숨쉬듯 존재”한다며 급진 페미니즘의 “잘못된 현실인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앞선 자기 주장을 스스로 반박한다.

    “성별권력관계”는 여성 차별이 “남성 권력”에서 비롯한다는 급진 페미니즘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반영된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의 남성이든 노동자 계급의 남성이든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자이고 억압을 유지하는 데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 ‘일상적 권력 관계’라는 급진 페미니즘의 개념 형성에 가장 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푸코의 “권력” 이론인데,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권력은 통일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스며든 다양한 관계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처럼 경제적 토대가 원인이고 나머지가 결과라고 보는 것은 틀렸다. 더욱이, 권력은 개인을 억압하고 개인의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개인으로 만드는 생산적인 것이다. … 마지막으로, 권력은 반드시 저항을 부르기 마련이다. 비록 그 저항도 권력 관계와 마찬가지로 파편적이고 분산된 것이지만 말이다.(알렉스 캘리니코스,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책갈피, 2014, 151~152쪽.)

    이것이 뜻하는 바는 “권력”이 누구는 가지고 누구는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고, 또 자본가 계급이나 국가기구의 수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은 모든 곳에 있다.” 이런 인식은 지배계급에 맞선 단결된 저항이 아니라 ‘권력’이 있는 다양한 지점에서의 저항이 필요하다는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차별과 억압의 문제는 개인 간의 관계 문제로 환원돼 버린다.

    이런 관점은 여성 차별이 계급사회에서 비롯했고, 따라서 (개별 남성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에 맞선 남녀 노동자 계급의 단결된 투쟁만이 여성 차별을 완화시키고 더 나아가 끝장낼 수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와는 정면 배치되는 관점이다.

    따라서 류한수진이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면서 “성별권력관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류한수진이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수용하는 것도 “성별권력관계”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 있는 듯하다. 물론 류한수진은 성을 매개로 한 행위가 아닌 ‘성차에 기반한 행위’를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성을 매개로 하지 않았더라도 여성이 불쾌감을 느꼈다면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 사노신의 입장과 류한수진의 입장은 분명 차이가 있다(사노신에게는 ‘서울대 담배 사건’도 성폭력).

    그러나 류한수진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면 강간이든 강제적 신체 접촉이든 성적인 말이든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성폭력”이라고 뭉뚱그린다. 그런데 이렇게 성폭력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하면,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는 생각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류한수진은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권력”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다 보니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게 만들 확장된 성폭력 개념도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류한수진은 여러 행위들을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행위들 간의 “가해의 경중을 구분”해 그에 걸맞게 대처(처벌)하면 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질적으로 상이한 수준의 행위를 서로 다른 개념으로 규정해야 진정한 성폭력의 위험성을 희석시키지 않으면서도 차별적 언행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특히, 사회의 언중(공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 실제로 사용하는 용어법을 단순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어 사용자의 99퍼센트는 “성폭력”을 “강간” 또는 그에 준하는 강압이 행사된 성적 행위로 여긴다. 류한수진이 “의도치 않은 성적인 코멘트”와 “강간”은 둘 다 “성폭력”이지만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지언정, 그건 그와 그 주변의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만의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성이 매개된) 차별적 언어를 강간과 똑같이 “성폭력”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각각의 행위에 걸맞은 적절한 대응에 실패하는 것이다. 류한수진의 A지지모임이나 사노신ㆍ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 주도하는 대책위가 2년 남짓한 다함께-노동자연대의 비非대응에도 불구하고 별로 지지를 못 받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강간과 차별적 언행이 같은 급으로 매도되는 것을 걱정하고 똑같이 처벌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개념 자체를 구분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류한수진은 개념 구분 대신에 “’폭력’이라는 말 자체의 무게”를 줄이자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폭력”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게 바로 우리가 성폭력 개념 확장의 문제점으로 지적해 온 바이다. 또한 우리 자신의 경우처럼, 애먼 사람을 강간범(“도가니”!) 또는 강간범 비호자로 만드는 일에 언어가 악용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이런 개념 구분을 하면 우리가 마치 성희롱과 성차별적 언사는 문제 없다고 본다거나 심지어 성폭력을 ‘정조의 침해’로 본다는 식으로 류한수진이 오해 또는 곡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분법적 흑백논리이거나 아니면 허수아비 때리기이다.

    성폭력과 성폭력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반대할 것과 반대하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게 아니다. 여성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언사도 성차별 형태의 일부이며 사회주의자는 이에 반대해야 한다. 이때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성추행을 성추행으로, 성희롱을 성희롱으로 규정해야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오해 없이 알 수 있고,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하고 실행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부록
    경계선(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란 무엇인가?

    [편집자 주] 이 글은 저명한 정신과의사 스콧 펙(1936~2005)이 지은 The Road Less Traveled(Simon & Schuster, 1978)라는 책의 발췌문으로, 전문 통역사 천경록 씨가 아주 자연스런 우리말로 옮겼다. 이 글에서 지은이가 말하는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는 오늘날에는 ‘경계선 성격 장애’로 불리는데, 가장 흔하고 치료하기 힘든 성격 장애에 속한다.

    그런데 심리학에 관해서도 비교적 잘 아는 옮긴이에 따르면, 정신과 의사들 사이에서도 동일 환자에 대한 진단이 제각각인 경우가 흔할 뿐 아니라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예리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도 모호하다. 그래서 옮긴이는 모든 사람이 많거나 적게 수동적 의존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아래 글을 읽다가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자의 성향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발견하고 당황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러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옮긴이는 아래 글이 오늘날 유력한 발달심리학 이론의 용어로 ‘저항형 불안정 애착’이 유난히 심한 인물들의 행위 양태와 동기에 관한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며 일독을 권유하고 있다.

    나는 ‘의존성’을 ‘자신이 타인의 적극적 보살핌을 받는다는 확신 없이는 자신을 온전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거나 인간으로서 적절하고 도덕적인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정의한다. 신체 건강한 성인의 의존성은 심리적 결함의 징표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의존적 욕구와 감정을 지니고 있다.(비록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그렇지 않은 척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보다 강하고 우리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누군가의 양육과 보살핌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아무리 강인하고 성숙하고 책임감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일지라도 자기 내면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꿰뚫어 본다면, 살다가 한 번쯤은 타인의 보살핌을 받고픈 마음이 안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아무리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라도 만족스러운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존재가 자기 삶에 있어 주기를 원하며 그런 존재를 찾는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이런 욕구나 감정에 삶이 통째로 휘둘리지는 않는다. 그런 욕구가 인생의 지배적 테마는 아닌 것이다. 만약 그런 욕구와 감정이 인생을 지배하고 삶과 인간관계의 질을 좌우한다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의존적 욕구와 감정을 넘어선 ‘의존성’이라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심리적 장애다. 우리는 이를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라는 진단명으로 부른다. 이는 아마도 가장 흔한 심리적 장애가 아닐까 싶다.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자들은 사랑받으려고 워낙 힘을 쏟는 탓에 정작 누군가를 사랑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뭐든 먹을 수 있을 때 닥치는 대로 먹고 남한테 줄 음식은 남겨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 내면의 공허는 마치 밑바닥 없는 구덩이 같아서, 채워지기를 미친 듯 갈구하지만 아주 일시적인 경우를 빼면 영영 채워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충만감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의심이 많으며 때로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일부분이 비어 있다고 느낀다. 외로움을 지독하게 못 견디며 쉽게 지루해 한다. 자아가 온전하지 못하기에 진정한 자기 정체감이 없고, 따라서 오로지 타인과의 관계만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수동 의존형 인간들은 대인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마치 그들에게는 누군가 의존할 대상이 있기만 하면 그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는 듯하다. 또, 그들에게는 정체성을 부여해 줄 누군가가 있기만 하면 그 정체성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대인 관계는 언뜻 드라마틱할 정도로 강렬해 보이지만 실은 지극히 얄팍해서, 그들에게 타인은 쉽게 버리고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의 진단명에서 ‘수동’과 ‘의존’이 결합되는 이유는 자신이 타인을 위해 뭘 할 수 있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자신을 위해 뭘 할 수 있을지에만 골몰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동 의존형 인간들도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할’ 때는 있지만, 그때조차 그들의 동기는 타인을 자기 곁에 묶어둠으로써 보살핌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보살핌을 얻어낼 가능성으로 직결되지 않는 경우 그들은 뭔가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을 보인다.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의 뿌리는 애정 결핍이다.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자들을 괴롭히는 내면의 공허감은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심, 안전감, 그리고 보살핌에 대한 욕구를 충족받지 못한 직접적 결과다.

    유년기에 걸쳐 비교적 일관되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하고 가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훌륭한 면모에 충실하게 산다면 앞으로도 쭉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자리 잡은 성인으로 자란다.

    반면 애정과 보살핌이 결핍되거나 전혀 일관성 없이 주어지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런 내적 안전감도, 정체감도 없고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성인으로 자란다. ‘나는 가진 것이 부족하다’거나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수반하는 강렬한 내적 불안감에 시달리며 세상을 예측 불가능한 무서운 곳으로 인지한다. 그러니 그들이 누구에게든 사랑과 관심과 보살핌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얻어내면 너무나 절박하게 그것에 매달리는 나머지 자신이 지키고 이용하려는 그 관계를 오히려 위협하고 파괴하는 온갖 냉혹하고 교묘한 조종과 권모술수로 내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똑같은 절박함으로 그런 관계를 거부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지나친 요구와 의존성이 그들 자신을 더욱 초라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인은 물론 자신도 믿지 못하고 나아가 삶 자체에도 회의적인 그들의 성향은 그들의 불행감과 불안전감, 자기 방어성, 그리고 변덕을 더욱 증폭시킨다.

    자식을 사랑하지도, 보살피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으며 뭔가에 푹 빠진 부모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규율이 결여된 사람들이다. 그런 부모들은 자식에게 애정 결핍뿐 아니라 자기 규율과 충동 통제 능력의 결핍도 대물림한다.

    다시 말해, 과도한 요구와 공허감과 의존성은 수동 의존형 성격 장애의 1차적 증상일 뿐이다. 자기 규율의 결핍도 수동 의존형 인간들의 핵심 특징이다. 그들은 관심과 안전감에 대한 허기 충족을 미룰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혈안이 돼 정직성 따위는 허공에 던져버린다. 그들은 또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그토록 갈망하던 일관된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모와의 불건강한 관계를 붙잡고 늘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수동 의존형 인간들은 책임감이 결여돼 있다. 단지 자신의 말과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행복과 태도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은 행복과 충만감의 원천을 수동적으로 타인(자기 자식들인 경우도 흔하다)에게서 찾으며, 따라서 자신이 행복하거나 충만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타인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그런 느낌을 행동으로 표출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끝없는 요구를 결코 충족시킬 수 없고,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없는 타인들에게 배신당한 느낌을 끊임없이 받으며 그로 인해 항시 화가 나 있고 불행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만한 의존성의 중요 특징은 정신적인 성장에 대한 무관심이다. 수동 의존형 인간은 말로는 정신적인 성장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 사항은 오로지 자기 충족에 있어서, 채워지고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성장하고 성숙해질 마음은 없다. 그리고 진정한 성장에 수반되는 불행과 고독과 만족감의 유예와 고통을 감내할 의사도 없다.

    요약하자면, 의존성은 사람들을 서로 격렬할 정도로 밀착시키는 한 가지 동력이기에 언뜻 사랑과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의존성은 부모의 사랑 부족에서 비롯한 것이자, 그런 사랑 부족이 대를 이어 재생산된 형태다. 의존성은 주기보다 받기를, 가꾸고 성장하기보다는 갈취하기를 추구한다. 그것은 성숙과 존중, 사랑, 덕성, 성장이 아니라 미성숙과 철부지 같은 행태를 부추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격과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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