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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웅태 동지 4주기] 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를 추모하며
  • 조회 수: 4645, 2020-02-13 11:48:16(2020-02-13)
  • 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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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 윤웅태 대표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나 쉽사리 글이 써지지 않습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해 왔고, 그가 떠나간 후에 ‘00해방운동가’라는 명칭을 하나 정하는 것도 노동이냐 빈민이냐 장애냐 의견이 분분했을 정도입니다. 급기야 노동.빈민.장애해방운동가라고 긴 명칭을 써야한다는 의견도 나왔었지요.

     

    대표님을 떠올리면 제일 처음 한 가지가 생각납니다. 그는 이름 없이 가난하게 살다가 죽어간 이들에 대하여 늘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3년 1월, 기아차의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되어 다년간 해고자 복직투쟁을 이어오던 윤주형 동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때, 그가 처음으로 소리내어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뎌진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했었지요.


    2014년 부산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던 정현성 동지가 떠나갔을 때에도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모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그로부터 빈곤의 원인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를 배웠습니다. 빈곤의 원인은 다층적이지만, 윤웅태 대표님은 특히 불안정노동의 문제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자본의 비용을 줄이고 노동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소위 노동유연화라는 것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에 내몰렸습니다. 또한 각종의 노무관리와 현장통제로 노동강도와 시간은 늘어가지만 실질임금은 하락하고 있기에 이러한 구조에서는 필연히 노동자도 빈곤해 질 수 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워킹푸어’라는 신조어가 출현하면서 이제 빈곤의 문제는 특정한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증명이 되었지요.


    한편, 그렇게 노동자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삶의 위기가 닥칠 때 바닥으로 거꾸러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2중, 3중의 사회안전망이 필요한데 이 나라에는 IMF 이후에 시행된 기초생활보장법이 그나마 유일한 사회안전망이며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은 시민사회단체의 오래된 노력과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IMF 라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체제유지 방편으로 도입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시기적으로 예산을 이유로 수급자수가 조절되기도 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정부여당에서 개악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윤주형은 스스로 비정규직이면서 그 문제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정현성은 스스로 장애인이면서 기초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그 법을 개정하는 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돌이켜 보면 대표님은 정확하게 자신의 뜻대로 걸어왔고, 어떤 한 사람을 기릴 때에도 단순히 기일을 챙기는 추모개념을 넘어서서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을 계승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돌아가시면서 그 정신이 우리에게 남았습니다.어쩌면 대표님의 자아는 먼저 싸우다 돌아가신 그 수 많은 사람들의 정신이 계승되고 또 계승된 총체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그는 철거민, 노점상, 장애인, 여성, 노동자들이 기대 쉴만한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우리들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했고, 언제나 일선에서 그 조직을 만들고 헌신해 왔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자치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주적인 학생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즐겨쓰던 닉네임은 ‘그림자’, ‘이스크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교지편집위원장을 맡으며 각종 이론을 생산하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회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부산철거민연합의 연대사업팀장을 맡았습니다. 도중의 생계의 어려움으로 노조에서 일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시작도 끝도 가난한 민중의 생존권이 가장 일순위 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사생활이 없었습니다. 생활의 전반이 활동과 운동에 관련된 것으로만 짜여져 있었습니다. 2012년 강정평화대행진을 함께 갔었는데 그 때 잠시 짬내어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를 갔었지요. 그 때 그는 “회의나 집회 때문에 제주에 온 적은 있지만 이런 곳은 처음 와 봤다”라고 했습니다. 연세가 사십이 넘도록 그 흔한 관광지도 못 가봤다는 말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못 해본 것도 많고 못 먹어본 것도 많고, 운동가라는 이유만으로 왜 스스로의 즐거움과 행복을 다 포기하고 살았는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취미생활도 없이 활동에서 겪는 스트레스는 오로지 술과 담배에 의존해서 해소하던 좋지 않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혼자만의 심연은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아프게 했는지 가족도 친구도 가까운 동료들도 온전히 다 이해하지는 못 합니다. 장례를 치르며, 또 유품을 정리하며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그것은 하나의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그저 막연히 그 우울의 근원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 합니다. 늘 관심사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었던 분이고,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으로 바뀌길 원하며 20여년을 헌신 했는데 바뀌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운동내부에서도 점차적으로 변질되고 서로를 상처주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의 그림자가 그를 감쌌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산반빈곤센터에는 협동과 공동체, 여성주의, 노동법, 사회과학에 관한 연구팀과 모임들이 있습니다. 아픈 몸으로도 모임들에 나와 동지들에게 영감과 아이디어를 불쑥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어쩔 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그림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대표님은 누구보다 더 멀리보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진중하게 체계적으로 고민하는 분이셨습니다.


    사무국장인 저에게는 늘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자신감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활동가라는 이름이 너무 무거워 피하고 싶었던 제가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던지면 마치 선문답처럼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할 때 그 때 활동가가 된다”라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책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지난 6년의 세월동안 그가 몸소 보여준 말과 행동들이 제 속에 차곡차곡 쌓여서 비로소 활동가가 되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지난 1월 30일에는 정기총회를 준비하는 운영위 겸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대표님이 돌아가기 불과 2주 전에 참여한 마지막 회의 였습니다. 우리는 밤새 회의를 하고 토론을 했습니다.


    그 때 대표님이 내놨던 사업계획은 故 정현성동지 추모사업회와 빈곤을 심화하고 전쟁위기를 일으키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활동가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故 정현성동지 추모사업회는, 단순히 한 두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부산지역의 빈민.장애인 희생자들을 함께 추모하고 그 뜻을 이어가는 형식으로 받아 안기로 했습니다. 이후에는 윤웅태동지정신계승사업회(준)에서 구체적인 사업을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활동가 조직에 대한 것은 그 뜻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곱씹고 있습니다. 따로 유언장이 없어서 유언이 되어버린 마지막 회의자료….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제 정말 눈 앞에 닥친 일이기에 우리 활동가들이 본격적으로 반전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었을까요


    생전에도 대표님은 쉽사리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년간의 경험과 그 응축된 지식을 전달 받기를 원했지만, 그는 스스로 사유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 한번도 그냥 쉽게 해답을 제시해 준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표님은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기고 가셨습니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여, 빈민 열사와 희생자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그 삶으로부터 배우라고 말합니다. 더불어서 헌신하는 가난한 활동가들이 어떻게 몸과 마음의 온전함을 유지하며 발전할 것인지 우리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같이 고민하고 또 우리 삶을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계승’이란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그 실천은 어렵지만 적어도 무엇을 해야할지는 어느정도 알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우리가 이 땅을 겨울지나 새순 돋는 곳으로, 훌륭한 토양으로 가꿔나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윤웅태동지정신계승사업회(준)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더불어, 그가 하고자 했던 반빈곤 운동을 흔들림 없이 실천하고 있는 부산반빈곤센터에도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 드립니다.


    2016년 4월 

    최고운 (부산반빈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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