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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의 정치성 - 구분되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 것 - 임성용
  • 코뮤니스트
    조회 수: 15424, 2013-05-05 14:06:38(2012-12-22)
  • 시의 정치성 - 구분되는 것과 구분되지 않는 것

    이삼 년 전부터 갑자기 비평논단에 ‘시와 정치’라는 문제가 등장했다. 시에서 출발한 정치성은 곧이어 ‘문학과 정치’라는 화두로 옮겨 붙었다. 시와 정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문학의 정치성이 어떤 논의를 거쳐 어떤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솔직히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문학전공자가 아니고, 잠깐 불쏘시개를 지피는 논란의 틀이 어찌 보면 매우 좁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그것도 노동시라고 불리는 시집을 5년 전에 딱 한 권 발간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시의 정치성을 다룬 비평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 문제를 놓고 특별히 고민하지도 않았거니와 그다지 큰 관심도 없었다. 더구나 나는 시와 정치를 논할... 만한 나름의 논리도 비평적인 관점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동안 비평의 흐름을 이끌었던 전혀 미래적이지도 않다고 생각되는 ‘미래파’ 논쟁처럼 시인과 ‘정치성’ 역시 비평가들이 뭔가의 쟁점을 먼저 선점하고자 하는 얄팍한 댓거리나 논쟁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시와 시」 편집 주간인 맹문재 선생에게 시인과 정치에 관한 나의 생각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그동안 깊이 있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고뇌를 잠시 하게 되었다. 내가 비평가가 아니므로 청탁의 요지를 미루어 짐작컨대 오늘의 시인들은 어떤 정치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가, 아마도 그 정도 수준의 단순한 생각을 듣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노동자의 현실과 계급운동에 내 미약한 시선이 늘 꽂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을 내가 쓰는 시와 문학으로까지 발현시키는 데는 크게 집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문학이란 다양성의 총체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더구나 시는 의식보다는 무의식, 사상감정보다는 자연발화 되는 정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장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간혹 특정한 정치조직에서 연대시를 의뢰받거나 집회현장에서 투쟁문화제 시낭송을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시를 써놓고 보면 정치적 선동, 이른바 ‘정치성’이 결합한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그 시들의 관점과 접근방식이 처음부터 사회현실적이었고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러니까 시의 한정된 적용범위가 시를 목적의식적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마침 고봉준 평론가가 쓴 글이 한 편 있어 참고삼아 읽어보니, ‘2010년을 전후하여 시와 정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현 정부 하에서 발생한 일련의 반민주적 사건들이 90년대 문학이 사망선고를 내린 ’문학의 정치성‘을 재소환 했다. 이것이 ‘시와 정치’에 관한 2000년대식 담론이다. (계간 「작가들」, 가을호, 고봉준. ‘문학과 정치’에서 ‘문학의 정치’로) 그는 뒤이어 랑시에르라는 사람을 인용해 ‘정치’를 권력의 행사나 권력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규정해놓은 ‘분할’ 속에 배제된 자들이 침입하는 위반에서 비롯되며 ‘정치’는 바로 이 틈에 존재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성과 정치적 억압이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불러냈다는 것이고, 지배자들의 정치적인 분할을 통해서 배제 당한 사람들이 그 분할을 깨뜨리고자 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틈이란 무엇일까? 그는 또다시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 노동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시간이 없는 존재들이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말하는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없는 시간을 가질 때, 정치는 시작되고 그런 점에서 정치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의 ‘분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랑시에르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랑시에르식의 전제 하에 시와 시인, 즉 ‘말하는 입’과 노동하는 사람인 ‘먹는 입’의 존재, 그들이 그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말’이 곧 ‘정치’라는 것에는 한편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실제 시와 정치성에서는 전문적인 시인과 그들이 쓴 시만 이야기하지 ‘먹는 입들의 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말하는 입’들의 시와 시인들의 이야기만 한다. 결국은 여기에서도 ‘먹는 입들’은 항상 ‘말하는 입’들의 논점에서 배제된다. 심보선 시인의 ‘지게꾼 되기’도 이와 비슷한 관점으로 읽혔다.


    그러면 본래 ‘말하는 존재’로서 ‘먹는 입들’의 말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문학의 종말, 노동의 종말과 함께 그 모든 입들이 죽었는가? 실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이승훈의 ‘아방가르드는 없다’라는 책에서 보니 정확한 인용부분은 생각나지 않지만 요즘의 문학, 문화적 현상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미 시는, 아니 사람들의 말은 꼭 시집이라는 책을 거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유통될 수 있다.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서, 인터넷 까페나 블러그, 그리고 수많은 싸이트와 채널을 통해서 오히려 엄청난 양이 생산되고 전부 찾아내서 읽지 못할 정도로 넘쳐나고 있다. 또한 그것은 받드시 문자만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영상이나 그림, 만화, 실시간 중계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호화된 문자와 상징화된 언어의 틀 안에 갇힌 문학은 어쩌면 이제 인문학적 가치로만 남아있고 사람의 감성을 뛰어넘는 기술의 발달로 점차 그 가치마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고통과 기쁨, 희망과 슬픔을 사람들이 사는 현실에서 서로 주고받고자 한다면 결국 문학에서도 삶의 실재론이 더욱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문학이 추구하고자 하는 보편적 가치와 지적 노력은 삶의 현실주의를 한층 강화하는 데 근거를 두고 문학 자체의 의미보다는 기술문명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상황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판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문학의 본질이 철학적인 인간탐구를 벗어난 지 오래일뿐더러 아울러 헐값으로 사고파는 센티멘탈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는 없고 항시 새로운 아이콘만 존재한다.


    그런데 앞서, 고봉준이 말한대로 2010년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 시와 정치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냈다고 한다면 그 담론을 뒷받침하는 시와 문학작품들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가? 몇몇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이런 저런 말만 늘어놓았지 눈에 띄는 작가와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럴만한 텍스트는 별로 없는데 말만 무성했다.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는 쳤지만 무대는 비어 있고 관객은 없었다. 설령 이것이 어떤 현상과 흐름에 대한 예견이라면 이명박 정권이 끝나가는 지금쯤엔 이를 예증할 만한 자료들이 쌓여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의 저항과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광우병 촛불시위가 그랬고 용산참사가 그랬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진과 쌍용차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투쟁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문학이 이것을 사회적 이념으로, 경제적, 계급적 이데올로기로 대응하지 못했다. 다만 작가행동과 문학실천을 현장에서 싸우며 시를 통해서 증거하고자 했던 작가가 있다면 송경동 시인이 유일했다. 송경동은 2010년대 시의 정치성을 확연하게 담보하면서도 즉자적인 현장성을 표발하고 있다. 물론 세계화와 인간성 말살, 양극화의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내제된 모순을 한층 심화시킨 시인들이 2000년대 말부터 부쩍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역시도 그 이념적 바탕에는 시의 정치적 사유성이 깊이 있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뭏튼 모든 세계는 거의 확정적으로 구분되어졌다. 부자와 빈자는 1%와 99%로 구분되었고 정치세력은 보수와 개량으로 구분되었다. 정치세력에 있어서 더 이상의 진보는 무의미해졌다. 노동자세력도 마찬가지이다. 조합주의, 개량주의, 관료주의 노선은 더 이상의 노동운동과 계급투쟁을 무력화시켰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하고 교묘한 구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다시 파견제, 시간제, 변형근로제, 특수고용제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제는 모두들 완연하게 구분된 이름을 갖게 되었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적 경향성이 더 이상의 반향을 얻지 못한다. 하물며 노동문학, 계급문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구분된 사람들 전부가 구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의 수단에 불과하고 문학은 아직도 구분 당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나는 문학의 정치성을 이야기함에 있어 오히려 이와 같은 구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의 세계는 확실히 구분되어 가는데, 문학은 점점 구분되지 않고 있다.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것들을 굳이 구분하려고 애쓰는 부질없는 논란들이 내심 못마땅하다. 구분된 대상들은 구분 당한 영역 안에 분명하게 놓여져 있다. 그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웃거리며 들여다보는 자들은, 구분된 자들을 기만하는 구분되지 않는 자들과 한편이다. 시는 솔직히 자기기만에서 출발하지만 자기반성으로 끝나는 것이다. 시의 정치성이란 다름 아닌 시의 기만을 벗어던지는 일, 사회현실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구분지어진 계급의 이름을 자신의 가슴에 한번쯤 되새기는 일이 아닐까 싶다.



    계간 / 시와 시 / 2012년 겨울호 / 임 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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