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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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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참여했다. 독일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맑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이라는 글에서 그는 맑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맑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맑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 되어야 했다. 독일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맑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자본의 축적에서 룩셈부르크는 맑스의 저작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8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1차 세계대전의 서곡이 되는 과정과 개량주의의 한계를 매우 훌륭하게 서술한다

     

    "오늘날 전쟁 탄생의 역사는 19147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필연성으로 한 가닥 한 가닥 짜인 제국주의 세계정치의 촘촘한 그물망이 5대륙을 감싸게 되는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그물망은 경제발달의 지각 심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외부 가지들이 희미하게 동터오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자, 광대함에 비해보면 죄과와 원죄의 개념, 방어와 공격의 개념이 공허하게 퇴색해버리는 그러한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다."

     

    "사회민주주의 여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병역을 위해 자본주의 여성 운동과 동맹을 맺었고 민족적 사마리아 작업을 위한 동원 이후 남아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배치했다. 사회주의 여성 운동은 당을 위한 선동 활동 대신 무료 급식소와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 ()사회주의법 아래서 당에 반대를 표명했던 계엄 상태와 사회주의 언론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당은 선동을 확산하기 위해 의회선거를 활용했고, 대중에 대한 확고한 세력을 유지했다. 이 위기에, 독일의회와 주의회 선거 동안,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모든 선전과 교육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계급의 가장 유명한 혁명가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관해 행한 연설에서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1월 중엽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동지들, 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 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합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 사실로 만들며, 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더는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 독일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 1918)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2 인터내셔널 좌파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민족문제에서 레닌보다 더욱 명확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민족자결권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 쇠퇴, 민족주의, 제국주의 등에 대한 그의 교훈은 여전히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다. 그에게 자본주의 쇠퇴기의 민족전쟁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그는 민족의 이익은 단지 대중을 오도하고, 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에 도움이 되도록 유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국제사회주의는 동등한 권리와 더불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자체로도 그러한 민족을 창출할 수 있고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다른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조건에 대한 사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혁신적, 적극적인 정책을 위한 이정표와 원동력과 같다.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제국주의 세계정치가 민족의 삶의 안팎을 결정하고 규제하는 한, 전시든 평시든 민족자결권은 있을 수 없다. 현 제국주의 환경에서 민족방어전쟁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결정적 역사적 환경에 의존하고, 전 세계적 소용돌이 속에서 한 국가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책은 사상누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민족문제에 대한 룩셈부르크 교훈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어떤 억압받는 민족도 제국주의 또는 전쟁의 결과로써 주어진 국가에 의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권력 집단에서 그들의 지배적인 동료들과 한통속이 된 약소국은 강대국의 제국주의 게임에서 한낱 말에 불과하며, 그들을 위한 도구로서 전쟁에서 혹사당한, 그리고 전후에 버려지고 자본주의 이해관계로 인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자유로운 국가와 민족은 자본주의 쇠퇴기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자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흡수되어야 하며 세계시장에 참가해야 한다. 이것은 민족운동에서 발생한 신생국은 그 크기 또는 경제력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제국주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가장 높은 단계의 표현이자 자본주의 존립의 최후 국면의 표현인, 자본주의의 팽창주의적 제국주의는 경제적 흐름을 야기한다. 전 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킨다. 모든 구시대적이고 전()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와 사회는 일소된다. 그것은 전 세계의 모든 부와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대중을 임금 노예로 전환한다."

     

    "제국주의는 국가의 어느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인 자본의 발전에서 성숙이라는 특정 단계의 산물이며, 국내에서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나눌 수 없는 전체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전 세계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정치적 세계지배의 가장 특색 있는 발현이자 자본주의 최종 단계에서 발생하는 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숙적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처음으로 엄밀한 과학적 사상의 목표가 프롤레타리아트와 해방을 위한 길을 밝혀 주었다. 종파, 학파, 유토피아 및 다양한 국가에서 고립된 실험 대신에, 밧줄을 묶는 것과 같이 국가들을 단결시키는 한결같은 국제적인 이론적 기초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맑스주의 이론은 전 세계의 노동계급에 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확고한 목표이자 최종 목표로의 정도를 항상 나타낼 수 있는 나침반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팸플릿)

     

    2 인터내셔널의 반역 이후, 룩셈부르크는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노동계급의 목표와 이익에 대해 그릇된 일을 저질렀던 가장 중요한 국가들의 사회주의당 지도부의 반역 이후, 그리고 그들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서 부르주아 제국주의로 이동했던 퇴행 이후, 전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 행동을 이끌고 조직할 과업을 가진 새로운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사회주의에 가장 중요하다."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과업에 관한 지침)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 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그는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문학과 문화 문제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한 점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는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보기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룩셈부르크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에게,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에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1919115, 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 이전 룩셈부르크는 1916년 재투옥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독일혁명이 시작했을 때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전후 1918118, 룩셈부르크는 석방되자마자 독일혁명의 심장부,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191811, 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군화발로 짓밟았다. 191812,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을 창설했다. 집요한 추적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노동자 탄압 시기, 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 룩셈부르크는 적기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벽보의 주제는 섬뜩했다.

     

    평화, 일자리, 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 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115일 밤, 베를린의 부촌 빌머스도르프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 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 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로 데려갔다. 범죄자들은 혁명가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재판이 열리지 못하도록,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가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1919115,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1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룩셈부르크의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중위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여성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기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부르주아 언론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으며, 룩셈부르크는 폭도 중 한 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다.

     

    노스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암살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무죄방면에 사적으로 사인했다. 기병대 사단의 우두머리로 살해를 명령한 발데마르 파브스트는 후에 나치 정권, 독일연방공화국에 봉사했다. 몇 년 후, 그는 자신이 저지른 독일혁명을 진압한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히려 독일 국민을 비난했다.

     

    이 독일 멍청이들은 무릎을 꿇고 노스케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거리와 광장은 모두 우리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1919115일의 살인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노스케 치하의 수천 건의 살인의 시작이자 히틀러 시대의 수십 년 동안 수백만 건의 살인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신호였다.

     

    이러한 잔학행위의 90주년을 맞아 독일자유당은 베를린에 노스케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제안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친애하는 기민당 사무총장 포팔라는 노스케의 행동을 공화국의 용기 있는 방어라고 극찬했다. (2009111일 베를린 신문 Tagesspiegel에서 인용)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16일의 폴베르쯔는 칼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사회민주당(SPD)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신과 학살로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나치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한 것이다. 나치즘의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사회민주당은 과거 자신이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사회민주당(SPD)과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 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 가증스러운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은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민주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다.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코뮤니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코뮤니즘과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 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후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증스러운 선전이 유행했다.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지배계급에 대항한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동문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책이 룩셈부르크를 볼셰비키와 독재자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었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를 변환시키기 위한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논리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의 배후에는 코뮤니즘에 대한 불신과 혁명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맑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지배계급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다. 비록 문명화된 야만인들, 스스로 민주주의자라 칭하는 이들이 유럽의 심장에서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열망의 원천, 그리고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 제국주의 개념, 국가에 대한 질문 등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을 죽인 살인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계급전쟁에서 살아 있다. 혁명가들이 살해된 지 104년이 지난 지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욱더 강화되고 있지만, 룩셈부르크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나고 있다.

     

    탄압받는 상황에서 자본의 질서에 관하여 쓴 마지막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를린은 질서를 되찾았다!” 비겁한 아첨꾼들아! 너희들의 질서는 모래성 위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내일, 혁명은 다시 일어나,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고, 불타오르는 트럼펫 소리가 너희를 공포에 떨게 하며 증명할 것이다.

     

    나는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4115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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