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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4호]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 조회 수: 6589, 2014-10-02 19:14:19(2014-09-29)
  •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한국에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Left Communism)가 소개된 것은 80년대 레닌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공산주의좌파 진영에서 레닌 '최악의 저작'으로 혹평 하는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가 그것인데, 이에 대한 재평가와 비판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기관지  '코뮤니스트'에 연재 중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477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이 팸플릿의 권위는 90년 넘는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가진 '공산주의좌파'를 '좌익소아병' 한 단어로 매도하며 오랜기간 세계 공산주의 운동뿐 아니라, 한국운동사회도 지배해왔으며, 계급투쟁의 중요한 시기마다 기회주의자들의 자기합리화 도구로 전락해왔다. 한국에 공산주의좌파가 공산주의자 자신에 의해 체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중반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공산주의(혁명적 맑스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무려 20년 넘는 기간 공산주의좌파는 이론가들의 연구대상에서도 제외되었고, 구체적인 이론적 쟁점에 대한 논쟁도 없는 상태에서 이상주의적인 '극좌파' 또는'초 좌익'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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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공산주의좌파에 기원을 두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론, 즉 1920~30년대 볼셰비키와의 논쟁과 유럽 혁명의 실패로부터 자신을 정립한 '평의회 공산주의(Council Communism)'와, 그것에서 시작하여 '당(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 '평의회주의(Councilism)'를 '공산주의좌파'와 혼동하는 운동세력이 이곳에서는 아직 다수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이 사회주의자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혁명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사상노선에 대해 역사적인 기원을 설명하고, 공산주의좌파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1. 기원과 구분


    1) 공산주의좌파


    공산주의좌파는 마르크스주의 연속성에 있는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이다.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좌파를 형성했는데, 러시아의 레닌과 함께했었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1),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2)로 대표되는 이들은 기회주의 세력이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확산되자 자신들의 정당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로서 활동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전망을 확인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운동 내부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마르크스, 엥겔스에 기원을 두었다는 조직들이 서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예전의 개량주의자들이 장악한 사회민주주의 당들은 과거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먹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동원의 앞잡이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


    반면에 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들게 한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좌파 흐름이었다. 또한, 1919년 창설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좌파 흐름이었다. 이들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던 1919년, 코민테른 창설 총회에서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라는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등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그간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발전되고 혁명적인 입장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시인이자 공산주의좌파였던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3)는'국제 프롤레타리아 선두의 전위 투사'로서 당시의 레닌을 환영했고,"세계 노동계급은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 자신의 조직화, 집중화, 형태 그리고 표현을 이러한 노동자 평의회에서 발견한다." 라면서 소비에트를 찬양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의 악명 높은 팸플릿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통해 호르터와 그의 동료 판네쿡을 '소아병'에 걸린 극좌파로 혹평한다.


    그러나 1917년 두 사람은 국제 혁명운동 내에서 주요한 인물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회민주주의 당들과 노동조합의 참전은 이들에게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의 도덕적 비열함뿐만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지도자들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조직형태의 파탄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러한 낡은 노동조합에 맞서,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대치시켰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당 형태에 맞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의 발전에만 집중된 정치적 전위의 '새로운 형태'를 옹호했다.


    서유럽의 많은 지역 특히 독일에서 그러한 관점은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폭넓은 반향을 얻었다. 1919년 말에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독일 공산주의좌파들은 새로운 당인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이 당은 짧았지만, 독일 노동자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 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1920년 초 우익들의 카프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산주의좌파 활동가들은 루르 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안에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유아적'이고 '무정부 노동조합 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지라도, 낡은 의회주의 및 노동조합 전술에 대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거부는,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는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전술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은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쿡과 호르터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코민테른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 내부를 변질시켰다.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이었던 소비에트에 비해 반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고,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행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로 제시되었다.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 활동의 강조, 동양인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을 호소, 그리고 애국적 민족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정책 등이 그것이었다. 이때 공산주의좌파들은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했듯이,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했다.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 민족해방에 대한 국제주의적 입장, 프롤레타리아 독립성을 훼손하는 통일전선의 거부 등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공산주의좌파들은 코민테른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활동했다. 독일­네덜란드의 판네쿡과 호르터, 이탈리아의 보르디가, 러시아의 오신스키, 스미르노프, 영국의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4) 등 공산주의좌파(코민테른에서의 공산주의 좌파 흐름)는 본질에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요약과 현재>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914년 제국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제주의를 방어했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 창설에 공헌했고, 1920년대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주로 활약했다. 즉, 공산주의좌파는 1920~30년대에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서 분리해 나왔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 특히 독일,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의 연속적인 공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반혁명과 파시즘 아래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며 살아남았고, 68혁명 이후 고무되어 1970~80년대 국제적인 혁명조직을 건설했고, 현재에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볼셰비키와의 논쟁, 그리고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회민주주의 좌파에 속했던 공산주의좌파였다. 이들은 오랜 기간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타났으며, 네덜란드의 판네쿡과 독일의 칼 스로더(Karl Schroder), 오토 륄레(Otto Rühle)5)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 후 폴 매틱(Paul Mattick)6)이 중요한 이론가가 되었다.


    판네쿡은 190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독일에서 활동했는데, 브레멘에 있는 동안, 항만 노동자의 아주 중요한 비공인파업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계급투쟁에 대한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을 아주 이른 시기에 거부하게 된다.


    오토 륄레도 판네쿡처럼 1920년대 볼셰비즘을 거부하는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히 다른 조직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정립한 최초의 인물 중의 하나다.


    이러한 생각들은 더욱 세밀하게 정립 되어갔고, 그 경향들은 평의회 공산주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독일혁명의 실패를 겪은 이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평의회 민주주의'의 방어와 '당 권력'의 거부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볼셰비키와 볼셰비즘으로부터 구분하였고,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20년대 독일과 러시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처음에는 레닌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볼셰비즘과 구분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10월 혁명이 짜리즘(tsarism)을 붕괴시켰고 봉건 관계를 끝장냈지만, 러시아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와 상관없다'는 것에 근거해, 러시아에서의 생산이 계급사회인 사적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가치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스크바를 언급하면서, 러시아가 더는 공산주의가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1930년대에, 수많은 잡지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을 위한 공개토론장을 제공했는데, 당시 공산주의좌파들은 자신들을'평의회공산주의자'라고 칭했었다. 잡지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폴 매틱의 '국제 평의회 통신(후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가 됨)'이었는데, 평의회 공산주의 주요 이론가들인 판네쿡, 오토 륄레, 칼 코르쉬(Karl Korsch)7)가 기고했었다. 이러한 잡지들 속에서 발전한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분석은 높은 수준이었지만, 반혁명의 기나긴 어둠은 이들을 오랜 기간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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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0~70년대의 급진적 정치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레닌주의 그룹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8년 이후의 리버테리안(자유의지주의)경향 좌파의 생각에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때 평의회 공산주의는 초기에 레닌주의와 결별한 그룹과 사상가들인 '상황주의자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 '존슨-포레스트' 경향들과 접촉했고, 몇몇 경우에는 가족 역사 내의 우연성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노암 촘스키는 뉴욕에 있는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삼촌에 의해 급진적 정치와 처음 만났다. 이후 현재까지 평의회 공산주의는 실천(조직)적 운동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반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으로 자리 잡아 여러 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안톤 판네쿡, 오토 륄레, 아펠(Jan Appel), 칸느 메이예르(Henk Canne-Meijer), 폴 매틱, 칼 코르쉬, 카요 브렌델(Cajo Brendel)8)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주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볼셰비키(레닌)와의 논쟁에서 자신들을 정립했는데,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한다. 당에 대한 권력의 거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의 분리, 노동조합과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평의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결실을 제거한 일종의 반혁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스탈린을 볼셰비즘과 볼셰비키 혁명의 계승자로 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좌파와 유사한 기원을 두지만, 국제적인 분파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들은 반혁명시기 이후 오랜 기간 고립되었다가 1960~70년대부터 재발견되어 이론화되었으나 실천적 운동세력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러시아혁명, 독일혁명의 경험 속에서 '반의회주의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했지만, 여전히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도식적인 완결된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평의회주의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1926~7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테제에 맞서 모든 공산주의좌파들은 반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평의회주의자들은 '자율'과 '자주관리'에 기반을 둔 '한 지역(국가)'에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방향으로 나가게 됨을 의미한다. 그 후 평의회주의자들은 특히 1930년대 공개적으로 '지방적 및 민족적' 사회주의 건설의 테제를 이론화했다.


    또한, 평의회주의자들은 당이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평의회(소비에트)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계급투쟁의 퇴조기(계급의식의 하강기)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자체의 몰락을 가져온다. 당시 네덜란드 좌파는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자본주의 쇠퇴기에서 노동자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들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해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로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결합하여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들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평의회주의가 주장했던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계급이 역사적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은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과 혁명적 생디칼리즘(syndicalism)으로 이어졌으며, 1917~23년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으로, 그리고 오토 륄레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학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의회주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오토 륄레,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as),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헨리 시몽(Henri Simon)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방해되는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이들은 반혁명의 암흑기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가 68혁명 이후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재해석 되어 나타났지만, 운동이 성숙함에 따라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조직을 거부하는 편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평의회주의는 현재에는 독자적인 사상이나 노선을 가진 운동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평의회 공산주의를 리버테리안적으로 해석한 일부 그룹에 의해 '노동자 자주관리'와 '평의회 민주주의' 강조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이론과 한계


    1) 레닌과 소련사회 비판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소련사회를 처음으로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했는데,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운동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주의 노선과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근거로 하여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형식의 조직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들의 출발점은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국가주의와 지도자 중심의 정책을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즉,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가 관료에 의한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소련의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를 의미하며,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자평의회에 의하여 일하는 대중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생산에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1938년 레닌의 철학에 대해 분석한 팸플릿(Lenin as Philosopher)을 출판했다. 여기서 판네쿡은 레닌의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러시아에서 짜리즘에 반대한 투쟁은, 오래전 유럽에서 봉건제에 반대한 투쟁과 닮아 있었다. 러시아의 교회와 종교는 현존권력을 도왔다. 그런 이유로 종교에 반대한 투쟁은 사회적 필연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역사유물론을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유물론과 거의 구분되지 않게 사고했다. 유물론이란 교회와 종교에 반대한 영혼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혁명 전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와 혁명적 프랑스의 사회적 관계의 유사성도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그의 당 구성원들이 자신을 자코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8년 3월 볼셰비즘은 이미 최소화된 권력이었던 소비에트를 야만적으로 공격하는데, 그것은 10월 혁명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가 말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는 그러한 시스템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 독재는 임노동의 철폐와 노동착취의 절멸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생산자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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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 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는 내전 동안에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평의회를 약화시켰고, 1921년 3월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그들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 당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하는 일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의 실패로 인한 고립 속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속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


    2) 노동자평의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는 과거의 조직들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조직들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판네쿡은 평의회 조직체계에서는 일반 대중 위에 군림하던 전문적인 지도자를 없앰으로써 지도자와 대중들 간의 갈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평의회가 사회주의 변혁과 건설과정에서 중심적인 조직의 역할이 부여되지만, 평의회는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일부 임의적인 혁명적 집단에 의하여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였다.


    평의회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분석에서 판네쿡은, 평의회는 일하는 대중들의 실천으로부터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도부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는 비공인파업이나 공장점거 투쟁 등과 같은 실천적 활동에서 태생적인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되는 파업위원회에 평의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계급공동체'의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두 개의 실천이 국가 차원으로 확장된다면 자본주의 국가 자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조직이 필요한데, 바로 이때 노동자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며,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할 때까지 평의회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이론은 특정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이 불안정노동과 미조직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대공장)' 중심의 투쟁형식은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로의 투쟁 확산에 약점이 있고, 투쟁이 전면화되지 않는 한 광장에서의 평의회 민주주의 실현은 지속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상시기에도 평의회 형식의 조직은 노조를 넘어설 뿐 아니라 지역, 업종, 고용형태 까지 넘어서서 가장 넓게 계급을 포괄하는 아래로부터의 계급조직이어야 하고, 내용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평의회민주주의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는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나 미조직프롤레타리아까지 포괄한 새로운 '평의회 운동'의 경험과 전형이 필요하다.


    3) 자발성과 대중행동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실질적인 혁명은 반자본주의적 힘이 친자본주의적 힘보다 더 성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자본주의적 관계 아래에서의 그러한 힘은 반자본주의적으로 조직화할 수 없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것은 불만을 가진 대중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자신의 반란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모든 필요한 결정사항이 '노동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개념에서는 노동자와 운동가 사이의 분할에 기초해서는 공산주의가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계급에 행동을 호소하지 않고, 그들 자신을 노동자 계급의 구성원의 일부로 사고한다. 그들은 계급과 함께하면서 자본주의 흥망성쇠를 향한 발전경향을 인정하고, 노동자의 현재 활동과 그들의 목적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선전그룹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단지 노동자에게 필요한 행동의 과정을 제안할 뿐이라 주장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신하여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스스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대해 미래의 전망 즉, 공산주의 혁명의 최종목표를 밝히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현재 필요한 것을 완전히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이라 말한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행동이 일어나는 어디든 참여하며, 모든 경우에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이 분리된 프로그램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러한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모든 결정에서 자신들의 직접 참여가 증대될 때 운동이 발전하고 혁명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의 주체'문제와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에 대한 고찰은 이른바 '당 중심(주의)' 운동에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투쟁 속에서 자기 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계급 스스로 성숙을 통해 운동을 발전시키고 역사적 역할을 할 때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연결하고, 계급적 단결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며 계급의식을 질적으로 도약하는 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혁명조직(당)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4) 한계와 전망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노선에는 많은 한계가 있고, 오늘날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과 논란이 뒤따른다. 특히 자본과 그들의 방어자들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자발성을 방어하려는 노력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큰 공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계급구성에 대한 고정된 이해로 비쳐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행동, 그리고 인종과 여성, 소수자 문제에 있어 '계급중심(환원)'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이 노동자 운동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계급정치의 중핵'으로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에 대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평의회 조직'들은 1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렬한 사회적 갈등의 순간마다 출현해왔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시작하여, 헝가리로부터 칠레까지, 폴란드로부터 이란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수천 번의 비공인파업과 광장점거에서의 대중총회를 통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3. 평의회주의 오류와 변형


    1) 당에 대한 거부


    평의회 공산주의자였던 오토 륄레는 1924년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하나의 당이 프롤레타리아적(的)이라는 단어 상의 의미만으로 당이 혁명적 성격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당의 혁명적 성격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단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변할 때 말이다."


    륄레는 처음에 '혁명은 당의 과업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의 과업'이라며, 이전의 당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당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조직)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과도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의회주자들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부족했다.


    2) 경제주의 오류


    평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추진력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20세기 초 이미 세계시장의 형성을 완성했기 때문에 일국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그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기지로서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혁명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평의회주의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에 매달리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정치수준에서 가로막혀'노동자계급의 조건에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착취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정복을 진행할 수 있는 경제 권력을 옛 사회 내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궤적, 즉 세계 수준에서의 정치권력 획득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의회주의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성격'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착취기반이 경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공산주의적 경제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일국에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노동자 착취를 전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의 비중이 압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의식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 계급투쟁의 마지막 결과이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이 경제적 성격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평의회주의자들은 간과했다.


    이처럼 평의회주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을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기관리'기획으로 바꾸었고, 그 안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찬양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좌파들은 공산주의는 관리가 아니며, 자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서, 공산주의는 '자본의 완전한 파괴'라고 주장했다.


    3) 평의회주의의 변형


    당 조직에 대한 거부,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 평의회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주장해온 평의회주의는 반혁명기를 거치면서 스스로 생존능력을 상실했으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여러 조류와 만나 변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는 무정부주의와 연결되었고,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은 '자주 관리', '노동자 통제'라는 경제주의 이론으로 정식화되었고,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주요 주장에도 평의회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좌익공산주의자, 평의회 공산주의자, 리버테리안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교류가 활발하고, '공산주의 최종 목표'와 '당과 계급의 역할,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열린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리버테리안,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내부에서 평의회주의의 정치조직 거부와 경제주의 논리는 약화 되었다.



    4. 이탈리아 좌익분파와 평의회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좌파


    1920~30년대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유럽혁명의 실패는 독일에서 공산주의좌파들을 파편화시켰다.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 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지라도, 나치 테러로 제압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반혁명의 전면화와 '평의회주의' 흐름은 좌익세력을 더욱 분산시켰으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원칙적 기반 위에서 국제적 토론과 협동을 위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반혁명에 대해 줄기찬 투쟁을 했다.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과 좌익반대파 망명그룹과 논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개방적 정신은 망명분파에 의해 성취된 보편적 강령의 진전과 함께 빌랑(Bilan)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좌파는 반혁명과 계급투쟁의 퇴조 속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히 정의했다. 그 임무는 첫째, 전쟁에 직면하여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할 것, 둘째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대조표'를 만들 것, 셋째,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즉, 독일-네덜란드 좌파가 러시아 혁명의 퇴행과 볼셰비키 당이 보인 반혁명적 역할에 대해 '10월 혁명과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당과 혁명을 모두 버리는 '평의회주의'로 경도된 반면, 이탈리아 좌파는 항상 명확하게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에 대한 '평의회주의적' 관점을 가진 네덜란드 좌파와 '당이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언하면서 투쟁했다.


    전쟁 시기 수감 및 가택연금 속에서도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9)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 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같은 해 프랑스 망명분파는 프랑스 공산주의좌파(Gauch Communiste de France, GCF)를 만들었다. 이때 프랑스 공산주의좌파는 빌랑의 정신에 따라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게으르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이행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이들은 이탈리아 좌파의 확고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에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훌륭한 공헌들을 통합할 수 있었다.

           

    사진4.JPG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분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공산주의 입장 중에서 명료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탄생시켰고, 기존 혁명그룹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혁명의 시기인 1917~1920년대에서, 반혁명의 시기인 1930~ 1940년대를 거쳐, 계급투쟁의 부활기인 1968년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은 공산주의좌파들에게 과거의 유산을 쇄신하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게 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공산주의좌파들은 조직, 사상,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확대되고 심화하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좌파들이 90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계급투쟁의 전진과 후퇴 속에서 수많은 장애물과 곤경을 만나면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면서 약점을 보완하고 계급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는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각종 기회주의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고, 내부적으로는 조직(역할)을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의 극단적 오류와 경직된 강령주의로 공산주의 운동 단일화를 가로막은 '보르디가주의'와의 기나긴 투쟁10)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고 확장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은 평의회주의의 오류와 평의회 공산주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래의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우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비록 평의회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해결책은 오류이었을지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과 혁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어떻게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부에서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량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킬 혁명의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계급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떻게 계급의식을 방어하고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실천운동이다.


    ~형로


    2014년 4월


    <주>


    1. 안톤 판네쿡(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좌파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2. 아마데오 보르디가(1889~1970)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 이론에의 기여자였으며,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였다. 또한 코민테른의 지도자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공산당의 주요 인물이었다.


    3. 헤르만 호르터(1864~1927)는 네덜란드 시인이자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88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새로운 안내자(De Nieuwe Gids : The New Guide)를 공동작업 했던 네덜란드 작가들의 매우 영향력 있는 그룹인 '80년대인들(De Tachtigers)‘의 주요 회원이었다.


    4.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0)는 영국의 공산주의좌파이자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e)였다.


    5. 오토 륄레(1874-1943)는 전쟁공채에 반대하여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투표한 공산주의좌파이며 독일공산당 창립멤버였다.


    6. 폴 매틱(1904-1981)은 독일 공산주의좌파이며, 이후 미국에서 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주창자이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혁명사상의 반대자였다.


    7.칼 코르쉬(1886-1961)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서구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창립 문서 중 하나를 작성한 독일 공산주의좌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사회주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 되었지만 후에 모택동의 지지자가 되었다.


    8. 카요 브렌델(1915-2007)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좌파였으며 제2세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자 판네쿡의 동조자였다.


    9. 오노라토 데이먼(1893~1979)는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처음으로 활동했던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 혁명가였다.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이후, 그는 조직된 이탈리아 좌파와 함께 활동했으며, 흔히 기관지 공산주의 투사(Battaglia Comunista)로 알려진, 국제공산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 PCint)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1945년에 창립된 국제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숫자상으로 가장 큰 공산주의좌파 조직이었다.



    10. 보르디가주의와의 투쟁은 [코뮤니스트 4호]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구조와 기능 2 :  당과 계급, 당의 중앙화에 대한 이탈리아 좌파의 논쟁을 중심으로 " 를 참고 바람.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의 국제 공산주의(혁명) 조직은 다음과 같다.


    ICC(국제공산주의흐름): http://en.internationalism.org

    ICT(국제공산주의경향): http://www.leftcom.org

    IP(국제주의자전망): http://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

    ICG(국제공산주의그룹): http://gci-icg.org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의 국제적인 토론 그룹(포럼)은 다음과 같다.


    Controversies (국제주의 공산주의좌파 포럼) :  http://leftcommunism.org

    Internationalist Discussion Network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 :  http://groups.yahoo.com/group/intsdiscnet


    *세계 여러 곳에서 최근 10여 년간 생겨난 공산주의좌파 그룹들과 공산주의좌파 친화적 그룹, 보르디가주의 경향의 조직은 다음 호부터 별도로 소개 예정이라서 제외했다.





    <참고문헌>


    1.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1920, V.레닌


    2.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2008, 오세철


    3. [좌파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1998,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


    4. [러시아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2004, International Review


    5. [평의회 공산주의], 1939, 폴 매틱


    6. [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비판], 1999, 카요 브렌델


    7. [WHAT IS COUNCIL COMMUNISM?], 2000, Wage Slave X


    8. [Council communism - an introduction], 2005, libcom


    9. [혁명적 전통- 평의회 공산주의], 1995, 스티브 라이트


    10. [노동자평의회], 2005, 빛나는 전망, 안톤 판네쿡


    11.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1984, J. P. Geber


    12.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1900–68)], 1988 and 2008, Philippe Bourrinet


    13.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6-45], 1992,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4. [THE COUNCIL 'COMMUNISTS BETWEEN THE NEW DEAL AND FASCISM], 1976, Gabriella M. Bonac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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