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당 건설 특집]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2
  •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2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

    (보고서 1부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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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로부터 출현한 분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93월에 창설되었다. 그 당시 아주 극소수의 코뮤니스트당이 이미 존재했다(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그리고 몇몇 주목받지 않던 다른 나라에서의 코뮤니스트당). 하지만 그 당시 최초의 (그리고 그렇게 선언한) ‘좌파분파가 주요한 당 내부에서, 즉 러시아 코뮤니스트당(19183RSDLP 7차 대회에서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을 채택했음) 내부에서 출현했다. 1918년 초 이 경향은 코뮤니스트(Kommunist)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오신스키(Ossinsky), 부하린(Bukharin), 라덱(Radek) 및 스미르노프(Smirnov)가 주도했다. 이 분파가 당의 공식적인 방향과는 달리 가진 주요한 불일치점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k-Litovsk)에서의 협상을 두고서였다. ‘좌파코뮤니스트는 그 협상에 반대하고 다른 나라로 혁명을 무력적으로 수출하는 혁명전쟁을 권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분파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권위적인 방법을 비판했고 노동자 대중이 광범위하게 권력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행한 비판과 유사하다(그의 팸플릿을 참조 바람).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의 승인은 이 분파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린은 당의 우익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오신스키와 같은 이 분파의 몇몇 인자들은 그 뒤에 출현한 좌파 분파에 가담하게 된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앞으로 코뮤니스트당을 출현시키게 될, 사회당 내부의 몇몇 분파들이 아직 형성되기 전에 (보르디가가 주도한 기권분파는 191812월에 가서 형성된다) 이미 러시아혁명가들은 자국의 코뮤니스트당에 영향을 미치는 일탈에 대항해 (분명히 매우 혼란스러운 방식이긴 하지만) 투쟁을 개시했다. 여기서 (이 현상을 지금 여기서 분석할 필요는 없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20세기 초 수 년 동안 러시아혁명가들이 다음과 같이 일련의 모든 주요한 문제에 있어서 선봉에 있었다는 것이다. ,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제 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형성,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선명한 입장, 침머발트에서 좌파를 주도한 것,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 필요성의 인식, 19183월 최초의 코뮤니스트당의 건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에 대한 자극과 정치적 방향설정 등에서.

     

    그리고 이러한 조숙함은 코뮤니스트당 내부에서의 분파의 형성에서도 발견된다. 사실상, 권력을 잡게 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코뮤니스트당으로서 그것의 특별한 역할로 인해서, 러시아당은 (명백히, 전 세계적인 혁명 물결의 패배와 더불어) 당이 부패하면서 주요 인자에 대한 압력을, 즉 당의 국가로의 융합을 겪는 최초의 당이기도 했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당의 이러한 퇴행 과정에 직면해서 비록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일찍 저항의 형식을 시작했다.

     

    그때 이후 러시아당에서 상당수의 다른 좌파경향이 출현했다.

     

    - 1919년 오신스키와 사프로노프(Sapronov)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주중앙집중주의그룹은 산업에서 개인적 권위에 대항해 싸웠고 국가기구의 부문화와 관료주의적 억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서 집합적 또는 우의적인 원칙을 옹호했다.(우의의 원칙과 개인적 권위에 관한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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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1919년에 많은 수의 민주중앙집중주의그룹 구성원이 군사적 반대파에 참여했는데, 이 파는 적군(Red Army)을 전통적인 부르주아 군대의 범주에 따라 변형시키려는 경향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19193월에 잠시 구성되었었다.

     

    내전 동안 당 정책에 관한 비판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백군(White Armies)의 위협 때문에 그 빈도가 더 낮게 표면화되었지만, 내전이 백군에 대한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그러한 비판의 강도는 배가되었다.

     

    - 1921년 초, 10회 전당대회와 노동조합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계기로, ‘노동자 반대파가 형성되었고, 철강노동자인 쉴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와 메드베데프(Medvedev), 그리고 특히, 강령을 작성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가 주도했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처럼 이 반대파는 국가의 관료제 대신에 노동조합에 경제의 관리를 맡기기를 원했다(7). 바로 이 전당대회(크론슈타트봉기 동안에 개최된)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분파가 금지된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해체되고 콜론타이는 나중에 스탈린(Stalin)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다.

     

    - 1921년 가을에 노동자의 진리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주요 구성원은 지식인 그리고 주요 조직가인 보그다노프(Bogdanov)처럼 프롤레타리아문화(Proletkult)’의 추종자들이었다. 다른 반대파 경향과 함께 이 그룹은 당과 국가의 관료화를 비난했지만, 동시에 반()-멘셰비키적 입장을 취했는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이 러시아에서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점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근대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점(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 경향의 입장이 된다)에서 그러했다.

     

    - 1922~23년에 노동자그룹이 결성되었는데, 주도자는 우랄지방의 노동자 미아스니코프(Miasnikov)였다. 그는 10차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 왕당파에서 아나키스트까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1921년 볼셰비키당 안에서 두각을 드러냈었다. 이 문제에 관해 논쟁하려던 레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스니코프는 요구의 철회를 거부했고 결국 1922년초 당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다른 투쟁가들과 함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RCP; 볼세비키)의 노동자그룹을 창설했고 러시아 코뮤니스트당(RCP)12차 대회에서 그룹의 선언문이 배포되었다. 이 그룹은 당의 노동자 사이에서 불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의 파업 물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 같다. 당시 이 그룹은 대대적인 시위를 요구했고 일차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이 시위에서 그룹의 활동으로 인해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는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미아스니코프를 포함한 그룹의 주도자들은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룹의 활동은 (망명 중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192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파리로 망명했고,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에 가까운 입장을 옹호하는 코뮤니스트노동자(L´Ouvrière Communiste)의 간행에 참여했다.

     

    볼셰비키당의 퇴행에 맞서 투쟁을 벌인 모든 경향 중에서 확실히 노동자그룹(Workers´ Group:WG)이 가장 정치적으로 명확했다. 그것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에 매우 가까웠고(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이 그룹의 문건을 출판하고 그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특히, 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혁명의 국제적인 전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그들은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그리고 경제의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었던 다른 그룹의 경우와는 상반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I)의 첫 4번의 대회를 참조점으로 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과는 달리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제3차 및 4차 대회의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을 거부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좌익과 노동자그룹(WG)의 인자 사이에 (특히 망명 중에) 토론이 있었다.

     

    노동자그룹(WG)은 일관되게 하나의 분파처럼 활동했던,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출현한 아마도 유일한 경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혁명가에 대해 시작한 (그리고 차르의 탄압보다 훨씬 더했던) 혹독한 탄압은 이들의 경로를 따라 발전할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예상대로 그는 즉시 실종되었고, 코뮤니스트좌파의 미약한 역량은 가장 용감한 투사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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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나라에서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형태를 취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세 개의 다른 코뮤니스트당으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그 좌파 경향도 아주 일찍 투쟁을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이 창설될 당시 좌파의 입장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노동조합 문제에 있어서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강령을 작성하고 당 대회에서 제시했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매우 명확하고 범주적이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노동자의 조직이 아니라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확고한 옹호 기관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노동조합의 파괴 투쟁을 포함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이점에 동의한다.” 한편, 의회 문제에 있어서 당 대회는 당시 곧 있게 될 선거의 참여라는 스파르타쿠스동맹(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 요기헤스 등)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 투사들이 암살된 후 새로운 지도부(레비(Levi), 브란들러(Brandler))는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해서 처음에는 좌파(대다수로 남아있던)에 양보를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9198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프랑크푸르트 대회부터, 독립사회민주당과의 친교 회복을 원했던 레비는 의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10월의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는 계략을 써서 반노동조합 반의회주의적인 좌익 대다수를 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 대다수는 승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당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거대한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 암스테르담 서기국의 건설을 추진하던 네덜란드 좌파 투쟁가(특히 호르터와 판네쿡)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던 인터내셔널에 의해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활동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일에 임명되었다. 그 뒤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204월 제명된 투쟁가들은, 그 해 2월의 독일코뮤니스트당 대회가 그들의 재입당을 거부했던 것 그리고 313일에서 17일 사이에 있었던 발생한 캅프-구테타(Kapp Putsch) 동안 독일사회민주당을 향해 당이 보였던 유화적인 태도에 직면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ommun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 KAPD)을 창설하게 된다. 그들의 접근법은 (노동조합과 의회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전환의 거부에 관한 ) 좌파의 테제가 승리를 거두게 되는 국제대회를 2월에 조직했던 암스테르담 서기국의 지원(8)으로 강화되었다. 여기서 특히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일면은 영국의 코뮤니스트들이 노동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표현되었었다. 새로운 당은 네덜란드코뮤니스당(CPN)의 좌파 소수(호르터와 판네쿡에 의해 주도된)의 지지를 받아 강화되었는데, 이 좌파 소수는 자체의 신문에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실었다. 그렇다고 해서 판네쿡이 (192075일자 편지에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비판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혁명적 생디칼리즘에의 그 어떤 타협에 대해서도 경고하면서) ‘유니언(Unionen)’에 관한 당의 입장을, 무엇보다도 당의 기초 단위 안에, 그가 괴물 같은 탈선으로 여긴 민족적 볼셰비키경향이 존재하는 점을 비판했다. 이 순간,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면한 모든 결정적인 문제들(노동조합, 의회, (9), 사회당에 대한 태도, 러시아혁명의 본질 등등)에 있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다수에게 영감을 불러 넣었던 네덜란드좌파(그리고 특히 판네쿡)가 노동자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81일에서 4일 사이에 개최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대회는 이러한 지향에 찬성을 선언했고 그 순간에 민족적 볼셰비키는 당을 떠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연방주의자 인자들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것에 적대적으로 되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판네쿡, 호르터 및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남아서 인터내셔널의 점증하는 기회주의적 편향에 대항해 투쟁할 결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192010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을 위해 2, 얀 아펠(Jan Appel)과 프란츠 융(Franz Jung)으로 된 대표단을 러시아로 파견했다(10). 한편 이들로부터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다른 2명으로 된 대표단을 다시 파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오토 륄레였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고통받고 있던 재앙적인 상황과 정부기구의 관료주의화 과정에 직면한 그들은, 비록 그 대회에서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표결에 참여하도록 위임되었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불참할 것을 결심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레닌은 좌익공산주의 유아적무질서(Left 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를 작성했다. 이 팸플릿 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레닌이 코뮤니즘 안에서 좌파 교조주의의 실수는 우파 교조주의의 그것보다 천 배나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다.” 라고 썼다는 것이다. (편집자 강조)

     

    한편에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볼셰비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입장 양쪽 모두에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인터내셔널에 합류시키고 독일코뮤니스트당 안으로 수용할 진정한 의지가 있었지만, 이 가능성은 1920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이 재편되어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와 함께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Vereingte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 VKPD)을 형성함으로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재편 과정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좌파 경향은 반대했었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동감하는 당의 지위를 획득해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행정위원회에 상설 대표를 가졌고 19216월 개최된 제 3차 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이러한 협력은 특히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이 부추긴 모험적인 공격이었던 ) ‘3월 행동이후 그리고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좌파는 처음에는 소련 정부의 선동에 따라 이 반란이 진정 백군 측의 작업이라고 믿고 진압을 지지했었다)으로 인해 심하게 악화되었다. 동시에, 네덜란드코뮤니스트당(CPN)의 우파 지도부(네덜란드의 레비(Levi)라고 불린 윈쿱(Wijnkoop))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서 당 규율에 위배는 방식으로 좌익 투쟁가들을 제명하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그해 9월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모델로 해서 새로운 당,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을 창설하게 된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제3차 대회에서 채택된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으로 통합될 최후통첩이 제출되면서 단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19217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지도부는 호르터의 지원을 받으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요구는 9월에 계획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대회보다 두 달 먼저 제기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성급한 결정이었다. 9월 대회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에 대해 토론이 있었고(베를린의 투쟁가들 그리고 특히 얀 아펠은 그 안건에 반대했지만) 대회는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정보국(Bureau of Information)의 설치를 결정했다. 이 서기국은 19224월에 가서야 창립대회가 열리게 될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마치 이미 창립된 것 마냥 행동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 경향(Berlin tendency)’ 다수파와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을 놓고 벌이는 투쟁을 거부했던) ‘에쎈 경향(Essen tendency)’으로 분열되었다.

     

    오직 에쎈 경향만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의 강령을 작성한 호르터와 함께 그 창립대회에 참여했다. 참여한 그룹은 수적으로 적었고 매우 한정적인 역량만을 대표했다. 에쎈 경향 외에,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 불가리아 코뮤니스트좌파, 영국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Communist Workers´ Party: CWP), 오스트리아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이 참여했는데, 이를 두고 베를린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포템킨마을(, 과장된 겉치레)’이라 묘사했다. 결국 이 잔류파 인터내셔널은 구성요소들이 없어지거나 차츰 뒤로 물러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에쎈 경향은 여러 번의 분열을 겪었다.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처음에는,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 경향에 우호적인 한 경향의 출현 때문에, 그런 다음에는 정치 원칙보다는 파벌 대립에 기반을 둔 내부적인 충돌에 의해 분리되어 나갔다.

     

    사실상,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이런 유감스럽고 극적인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I)창설의 발판 역할을 했었던 혁명물결의 썰물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호르터와 그의 지지자들의 오류는, 하나의 국제적인 좌파코뮤니스트 경향으로 재편성될 수 있는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이 코민테른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에 인위적으로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실수는 독일혁명운동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21년 즈음 세계혁명의 퇴조는 유럽에서 명백했고 이러한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경로가 여전히 혁명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라는 이론을 가진 호르터와 에쎈 경향의 KAI 선언에는 특정 논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틀렸다.” (ICC의 책, 독일과 네덜란드좌파(The German and Dutch Left), 5, 4.d)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의 최종적인 실패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에 힘의 균형의 진화에 대해 가능한 선명한 전망을 혁명가들이 가질 필요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독일-네덜란드좌파가 그렇게 지체된 이후에라도 혁명 물결의 퇴조를 의식하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11), 볼셰비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 또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극히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 볼셰비키로서는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다수파로서는 대중이 더는 혁명을 향해 움직이지 않기에 대중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특히 중앙파사회당과 그러한 경향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향해서도 점점 더 기회주의적인 정치를 초래했다.

     

    - 그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좌파로서는 전쟁 동안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까지는 볼셰비키의 특징이었던 것과 같은 비타협성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원칙에 대해 타협하고 원칙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듦으로써 혁명을 향한 지름길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가치도 없었고 그러한 지름길은 패배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실제로, 이미 제2차 대회에서, 하지만, 특히 제3차 대회부터는 줄곧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영향을 끼치며 제1차 대회에서의 명료함과 비타협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던 기회주의 노선은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것의 혁명투쟁을 지속하고 강화해 나가는데 있어서 직면한 곤경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당 자체가 처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또한 표현했다. 한편으로 볼셰비키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주도권의 영향으로 세계혁명의 선봉에 있으면서 러시아혁명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는 후자, 즉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을 향한 아주 작은 발걸음에 불가하다고 늘 주장했었고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패배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죽음을 의미하게 될 것임을 상당히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 나라 전체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당으로서 볼셰비키는 민족국가의 기능에 합당한 요구에, 특히 내외적인 보안을 확실히 할 필요에 종속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대외정책을 그리고 국가권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국내정책을 따를 필요성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19213,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의 진압과 크론슈타트반란의 유혈적 분쇄는 관대한정책에 있어서 동전의 이면과 같았다. 러시아에게 유리한 방향의 대외 정책을 펼치도록 다른 나라 사회당이 자신의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통일전선(United Front)’ 이라는 명분아래 볼셰비키는 이 정책을 사회당에게 시행했다.

     

    사실상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선두에 있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1922년 제2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로마 테제는 보르디가와 테라시니(Terracini)가 작성함)의 비타협성은 1920년 계급투쟁의 패배에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의 등장을 대항해 모범적으로 표현되었다. 실천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비타협성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직면해서 (진보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부르주아의 어떤 당과도 동맹을 맺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점에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오직 자신의 영역에서, 경제파업과 자기방어를 위한 노동자민병의 조직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현상에 대한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진지한 분석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는 이 분석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4차 대회의 대표단에게 제시하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분석을 거부했다.

     

    - 파시즘은 중간계급의 산물도 아니고 부르주아 지주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겪은 패배의 산물로서, 그 패배는 우유부단한 쁘띠-부르주아 계층이 파시스트 반동 세력을 지원하게 만들었다.” (ICC의 책,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The Italian Communist left), 1장 참조)

     

    - 파시즘은 봉건적반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밀라노와 같이 모든 산업대도시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같은 글). 그리고 산업 부르주아계급의 지원을 받았다.

     

    -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상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때 그것을 필수불가결하게 보완했다.” (같은 글).

     

    이러한 비타협성은 통일전선정책, 사회당과 그 부수체에 대한 관대정책과 관련해서도 표현되었는데, ‘노동자의 정부라는 구호는 코뮤니즘의 정치강령을,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위해 투쟁하도록 대중을 준비할 필요성을 사실상 부정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보르디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에서 인용)

     

    이와 같은 비타협성은 코뮤니스트당을 사회당이나 중앙당의 좌파경향과 통합하려는 코뮤니스트인터내셔널의 정책에도 반대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그 정책의 결과로 독일에서는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VKPD)이 건설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 정책은 억압과 사기 저하의 결과 당원이 20,000명도 채 안 되는 당에 테르찌니(terzini)’(3 인터내셔널의 빨치산에 해당하는) 2000명이 19248월 가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비타협성은 19247월 제5차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추진된 코뮤니스트당(CP)볼셰비키화정책에 반대한 것에서도 표현되었다. 이 정책에는 트로츠키도 반대했다. 요약하자면, 정책은 코뮤니스트당(CP)내에서 규율의 강화, 그것의 퇴행에 맞선 저항을 묵살하기를 의도한 관료주의적인 규율의 강화를 주장했다. 볼셰비키화는 또한 공장세포(factory cells)’에 기반한 코뮤니스트당의 조직화 방식을 추동하는 것에도 놓여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명백히 노동자를 그들의회사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전반적 예측과 전망에는 명백하게 해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좌파가 당 안에서 여전히 다수이긴 했지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자체의 정책을 지지하는 우익 지도부(그람시, 톨리아티(Togliatti))를 강요했고, 이 책략은 19232월에서 10월까지 보르디가가 수감됨으로써 더 용이해졌다. 그런데, 19245월 이탈리아당의 비밀대회에서 보르디가, 그리에코(Grieco), 포르티치아리(Fortichiari) 그리고 레포씨(Repossi)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테제를 제시했고, 45명의 연방 서기(federal secrataries) 35, 그리고 5명의 지역간 서기(interregional secretaries)4명의 찬성표를 얻어 테제의 승인을 얻었다. 1925년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파반대파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으로 반대파에 대항한 캠페인이 CI 내부에서 발생했다.

     

    “19253~4월에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I)의 확대된 행정위원회는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PI) 3차 대회에서 보르디가주의경향의 제거를 현안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에 호의적인 보르디가의 글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탈리아 지부의 볼셰비키화는 밀라노의 연방 서기 브루노 포르티치아리를 직위 해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 좌파는 활동을 조정하기 위해 데이먼(Damen)과 레포씨와 포르티치아리를 통해서 (...) ‘협상위원회(Entente Committee; Comitato di intesa)’를 창설했다. 그람시 지도부는 이 위원회를 맹렬히 공격했고, 그것을 일종의 조직된 분파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좌파는 자신을 하나의 분파로 조직하는 것을 아직 원하지 않았고, 그들이 여전히 대다수인 이상 당으로부터 제명될 어떤 빌미도 제공하기를 원치 않았다. 보르디가는 부과되어 있던 규율의 틀 밖으로 나가기를 원치 않아서 처음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6월에 가서야 그는 데이먼, 레포씨 그리고 포르티치아리의 입장에 동참했다. 그는 좌파의 입장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떠맡았다. 그 입장은 볼셰비키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공격이었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1).

     

    제명의 위협 아래에서 협상위원회((Entente Committee)는 규율원칙을 존중해서 해산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수로서의 이탈리아좌파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같은 글)

     

    파시스트의 억압 때문에 해외에서 개최된 19261월 대회에서 좌파는 겨우 9.2%의 표를 얻은 리옹테제(Lyon Theses)’를 제시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시를 적용해서 취해진 정책, 젊고 거의 정치화되지 않은 인자를 대거 유입한다는 정책이 이제 열매를 맺었다. 리옹테제는 망명 중 이탈리아좌파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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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디가는 19262월부터 3월까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제6대 확대 행정위원회 동안 마지막 전투를 벌인다. 그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비난했고,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고 분파는 병도 아니고 병의 증상도 아니라 기회주의적 영향에 맞선 방어반응임을 시인하면서 이 문제가 당장의 사안이 될 것으로는 내다보지 않으면서 분파의 문제를 언급했다.

     

    19269월 칼 코르쉬(Karl Korsch)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르디가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당과 인터내셔널의 분열을 원할 필요가 없다. 분열이 가능하기 전에, 우리는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규율의 경험을,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부조리한 실천과 함께 허용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우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결코 비판하지 않고 만연한 노선과의 연대를 표현하지 않으면서 (...). 일반적으로 나는 오늘날의 우선순위는 조직화와 작전의 영역이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좌익이고 국제적이며 코민테른에 의한 수난을 당한 그런 이데올로기의 정교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허약함은 어떤 국제적인 발의도 아주 어렵게 만들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보르디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에서 인용).

     

    이것은 또한 19284월 파리근교 팡탱(Pantin)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회 후 창설되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좌파 분파를 받치는 기초였다. 그 당시 브뤼셀, 뉴욕, 파리 그리고 리옹, 이렇게 총 네 개의 연합이 존재했고 룩셈부르크와 베를린 그리고 모스크바에 투쟁가들이 있었다.

     

    그 대회는 그것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첫째,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좌파 분파를 결성하는 것

     

    둘째, ()

     

    셋째, 두 달에 한 번씩 프로메테오(Prometeo)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하는 것

     

    넷째, 기회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가차 없는 투쟁을 수행할 임무를 가진 좌파 그룹을 건설하는 것

     

    다섯째, 채택된 즉각적인 목표는,

     

    - 코뮤니스트선언(Communist Manifesto)에 충실하고 제3차 세계대회의 테제를 수용하는 인터내셔널로부터 축출된 모든 인자들을 재통합하는 것

     

    - 레온 트로츠기를 의장으로 하여 제6차 세계대회를 소집하는 것

     

    - 15차 러시아 대회의 결의에 연대를 선언하는 모든 인자들의 제명을 제6차 세계대회의 현안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보여지는 바와 같이

     

    - 그 분파는 자체를 이탈리아의 것으로가 아니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한 분파로 생각했고,

     

    -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여전히 구출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며,

     

    - 또한 러시아당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대회의 결정을 따라야 하며, 공공연히 배반한 모든 이들을 (인터내셔널의 다른 당과 관련해서 이전에 이미 그렇게 했듯이) 축출함으로써 제 집안을 정리 정돈해야 한다.”라고 생각했고

     

    - 노동자에 대해 전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투쟁가 사이에서 개입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겼다.

     

    1945년까지 그 분파는 상당한 일을 수행하고 되고, 그 뒤부터 1952년까지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 GCF)가 그 일을 계속하고 보충했다. 우리의 기사, 내부 문건 그리고 토론에서 이미 자주 이들의 작업을 참조점으로 삼아왔기에 여기서 그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 분파의 근본적인 공헌 중 하나로서 이 보고서의 핵심을 들자면 정확히, 노동자운동의 경험 전체를 바탕으로 한 분파 개념의 발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개념은 보고서의 초입에서 이미 대략적으로 정의했다. 우리는 여기서 분파 개념이 정의한 우리 간행물의 한 기사로부터 몇 문단을 인용하는 선에서 머물려 한다.

     

    우리의 간행물에서 당과 분파 형식 사이에서 이탈리아좌파가 작업해낸 구분을 자주 다뤄왔다.(특히, IR 59, 61호 그리고 64호에서 맑스주의 전통 안에서 분파와 당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연구를 참조 ).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문제의 주요한 몇 줄을 여기에서 환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소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운명의 한 표현으로서 영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소수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갖는 영향력은 그것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 의식성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공개적이고 점점 더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시기에 만이 소수는 영향력을 갖기를 바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코뮤니스트 소수는 하나의 당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역사적으로 퇴조하고 반혁명이 승리하는 그러한 시기에 혁명적 입장이 중요성을 띠고 계급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시기에는 유일하게 가능하지만 극히 중요한 일은 바로 분파의 일이다, 즉 계급 역량의 균형이 또 다시 코뮤니스트 입장으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에게 영향력을 갖도록 가능하게 만들 그때를 대비해 미래의 당 건설을 위한 정치적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좌파 분파는 프롤레타리아당이 기회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말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 당에 침투함으로써 퇴행되어갈 때 형성된다. 혁명적 강령을 지지하는 분파의 책무는 당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분파가 성공한다면 그것의 원칙이 승리하고 당이 구출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당은 퇴행을 계속하여 무기와 짐을 모두 넘겨주고 결국 부르주아 진영 안으로 전향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당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전향의 가장 중요한 징후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생활이 당 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좌파 분파의 책무는 당을 바로잡을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당 내부에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좌파 경향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당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런 당은 종종 야비한 술책까지 동원해서 이들을 제명했다. 프롤레타리아당이 일단 자본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면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을 향한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하고, 분파의 역할은 적에게로 넘어가버린 낡은 당과 미래의 당 사이에 놓인 가교가 되는 것으로, 미래의 당을 위해 강령적 기초를 세워야 하고, 당의 골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이 일단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면 당 안에는 어떤 프롤레타리아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늘 트로츠키주의의 전술 중의 하나였고, 좌파 분파가 항상 거부해 온 엔트리즘(entryism)’을 혁명가들이 수행하는 것은 쓸모없고 위험하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의 당, 다시 말해 계급 입장을 놓고 볼 때 불모지인 그러한 당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유지하려는 시도들은 결국 그 당을 조금이라도 바로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시도를 행한 조직의 기회주의적 퇴행이 가속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결코 불러오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얻어진 새로운 영입(recruitment)’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특히 혼란스럽고, 기회주의로 병들어 결코 노동자계급의 선봉을 형성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이탈리아분파와 트로츠키주의의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는, 혁명역량을 재조직할 때 이탈리아분파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맞선 투쟁에 헌신했던 다른 모든 경향과 토론하는데 열려있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최대의 명료성과 강령적인 엄격함에 대한 필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와는 반대로 트로츠키주의 경향은 정치적 입장을 사전에 진지하게 토론하거나 조율하지 않고 오직 1917년 혁명과 초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하나인 트로츠키의 권위와 인물사이 이루어진 합의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면서 성급하게 조직의 건설을 시도했다.”

     

    트로츠키주의가 이탈리아분파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새로운 당을 건설할 시기와 관련되었다. 트로츠키와 그의 동지들에게는 새로운 당의 건설 문제는 낡은 당이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있어서 그 존재를 상실하는 순간부터 즉시 현안이 되었다. 이탈리아분파에게 그 문제는 매우 분명했다. ‘분파의 당으로의 전환은 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이탈리아분파와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s:IR)90(12))

     

    이 문구는 우리가 공간의 제약 때문에 위에서 다루지 않은, 트로츠키주의의 방법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트로츠키) 경향이 부르주아 진영에 합류하기 이전 그것이 갖고 있던 성격 중 두 가지가 다음과 같다는 것은 중요하다:

     

    - 첫째, 그 어느 순간에도 분파라는 이름을 그들의 개념에 포함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한 당에서 다른 당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혁명가들이 극소수로 존재하는, 계급의 후퇴기 동안에는 그들의 조직은 소당(mini-party)’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한편 이 소당개념은 1930년대 중반 이탈리아분파 자체에서 출현했었고, 현재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의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의 주요 구성요소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소당(Partito Communista Internazionalista)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 둘째, 트로츠키는 (비록 그 혼자만은 아니었을지라도) 반혁명의 정도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는 프랑스에서 19365~6월에 있었던 파업을 그가 혁명의 시작이라고 본 것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역시 국제코뮤니스트경향에 의해 거부된) 역사적 경로 개념은 이탈리아분파에게 근본적이었다.

     

    좌파가 자체의 역할을 완수하는 근본적인 전제 조건으로 여겼고 좌파에 항상 혼을 불어넣었던, 명확화로의 의지는 분명히 이론 편향과 분리될 수 없었고, 한 때 결정적으로 보였던 분석과 입장을 문제시할 지속적인 필요성과도 분리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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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결론을 맺으며

     

    보고서의 1부를 끝내며 우리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떠난 경향의 이후 괘적들로 아주 간략하게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독일-네덜란드좌파로부터 출현한 경향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었다. 그것의 가장 주요한 대표는 네덜란드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그룹(Group of Internationalist Communists: GIK)이었다. 이 그룹은 (예를 들어, 폴 매틱(Paul Mattick)에 의해 격려된 미국 그룹, 살아있는 맑스주의(Living Marxism)에 대해서처럼) 네덜란드 밖에서도 영향력을 가졌다. 1930년대의 가장 비극적이고 위기의 순간이었던 스페인내전동안 이 그룹은 반파시즘을 향해 어떤 양보도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국제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했다. 이 그룹은 또한 (민족 문제에 있어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좌파의 입장을 채택한) 빌랑(Bilan)그룹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관하여 이탈리아좌파의 전통적인 입장을 거부하고 대신에 독일-네덜란드좌파의 입장을 수용한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Gauche Communiste de France)의 경우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내부에서 반성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 경향은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지는 (그리고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에게는 낯설었을) 입장 두 가지를 채택했는데, 1917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분석하는 것과 당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부하는 것 두 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결국 그 그룹은 과거에 존재했던 일련의 모든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범주화해버리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그리고 그것이 미래를 위해 제공할 수 있을 교훈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취약점의 결과로 그것은, 비록 평의회주의적인 사상이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계속 영향력을 갖고 있긴 할지라도, 앞으로 미래의 당으로 그래서 코뮤니스트혁명으로 나아가게 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았다.

     

    보고서의 제 2부로 연결하는 마지막 개요적인 점은 바로, ICC는 하나의 분파로 간주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당연한 대답은, 분명히 그렇게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조직은 어느 순간에도 어느 한 프롤레타리아 당의 내부에서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이미 1950년대 초 우리의 동지 마크 치릭(MC)이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 그룹의 다른 구성원에게 보낸 편지 안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었다.

     

    분파는 상대적으로 짧게 존재하기 때문에 옛 조직과 직접적 유기적 연속성을 가졌다. 종종 그것은 분열의 바로 그 순간까지 옛 조직 내에 남아 있었다. 그러한 분열은 분파가 새로운 당으로 전환되는 것과 종종 동일했다(예를 들어, 볼셰비키분파와 스파르타쿠스동맹, 그리고 옛 인터내셔널의 거의 모든 좌파 분파처럼). 오늘날, 이러한 유기적 연속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그 분파는 영구적인 위기와 국가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가 부과하는 문제와 같은 그런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와 대면할 필요가 없었고 또 극히 작은 경향으로 산산이 흩어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어내도록 요구되기 보다는 그것이 획득한 혁명 원칙 안에 더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그 분파는 새로 만들기보다는 유지할 것이 더 많았다. 이 덕분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걸쳐서 직접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 덕분에 그것은 형성 중에 있는 새로운 당이었다.

     

    [우리 그룹은], 비록 부분적으로 분파의 임무를 - 예를 들어 과거의 경험을 재점검하고 투쟁가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 갖고 있을 지라도, 새롭게 진화하는 상황과 새로운 전망에 대한 분석도 수행해야 하지만, 미래당의 강령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앞으로 건설될 미래의 당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건설에 단지 한 구성 요소를 이룰 뿐이다. 조직적인 성격 때문에, 그것이 강령적인 면에서 공헌하는 기능은 오직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ICC가 존재한지 40년이 되는 지금 우리는 30주년을 맞이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던 것과 동일하게 접근해야 한다. “ICC가 지난 30년 동안 살아남아서 책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 대부분이 우리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공헌의 덕이라고 본다. 이 시기동안 활동으로부터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긍정적인 대차대조표의 비밀은 우리가 그 분파의 가르침에, 더 일반적으로는 ,특히 그것이 그렇게 잘 배운 맑스주의의 정신과 방법에 충실했던 점에 있다.” (ICC30: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과거에서 배우기”, 국제평론, 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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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nutes of the Central Committee Meeting of 15th September 1850” in Marx: The Revolutions of 1848, Penguin, 1973, p341 ) 맑스엥겔스저작집(MEW) 8, 598

     

    2. 이때 주목할 만 한 점이 있다. 이 회합 직후 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맑스는 에커리우스가 이전에 건설을 시도했고 그래서 맑스를 초대했었던 조직이 맑스에게는 인위적으로 여겨졌던 반면에 이번에는 그 노력이 진지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 초대를 이번에는 받아들였다고 한다.

     

    3. 이 부분과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2개의 주요 나라, 즉 영국과 프랑스의 당을 검토함이 없이 4개의 다른 당, 즉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당 안에서의 분파에 중점을 둘 것이다.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이름값을 할 만한 좌파 분파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주요한 이유는 내부에서 맑스주의 사상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제1차 대전에 대항한 초기의 조직된 반응이 사회당 안의 소수에게서가 아니라 CGT노동조합 내부의 소수로부터, 즉 노동자의 삶(La Vie Ouvriere)를 간행한 로스마(Rosmer)와 모나트(Monatte)를 주변의 그 핵심인자로부터 나왔다.

     

    4. 국제평론 (International Review)153, ‘프로레타리아당의 본질과 기능에 재수록되었다.

     

    5. “나는 트리뷴의 편집진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주위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패한다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싸운 뒤에 우리의 모든 노력이 실패한다면, 그때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다시 말하자면, 트리뷴에 대한 억압을 수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1909216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당 내에서 우리의 힘이 강해질 수는 있지만, 당 밖에서의 우리의 힘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데벤터대회에서 호르터의 개입 발언 (참조:‘네덜란드좌파 (The Dutch Left; 1900-1914), 3: 트리뷴운동’, 국제평론47))

     

    6. 탄압을 당한 여러 투쟁가 중에서, 전쟁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처음에는 징집되었다가 그 다음엔 191651일 시위에서 전쟁과 정부를 비난한 후 요새에 감금당했던 칼 리프그네히트의 경우, 그리고 70살이 넘은 나이에 수감되었던 프란츠 메링의 경우를 우리는 인용할 수 있다.

     

    7. 두 개의 다른 입장 중 하나는 트로츠키(Trotsky)의 입장인데, 그는 (적군(Red Army)을 모델로 해서) 노동조합을 노동자에 대한 통제 기구로 만들고 그래서 노동 규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국가 안으로 통합하는 것을 원했다. 한편 다른 하나는 레닌(Lenin)의 입장인데, 그는 오히려, ‘강력한 관료주의적 변형을 포함하는 국가에 맞서 노동자들을 옹호하는데 노동조합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 암스테르담 서기국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좌파 재결집의 축을 구성할 위험때문에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I) 행정위원회는 192054일 그 서기국의 해체를 라디오를 통해 선언했다.

     

    9. 그 당시에 네덜란드좌파와 판네쿡은 당이 필요함을 거부하는 오토 륄레가 발전시킨 전망에 맞서 투쟁함에 있어서 확실히 명확했다. 하지만 그 동일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자들(councilists)의 입장 그리고 판네쿡의 입장이 된다.

     

    10. 이 대표단은 어느 상선 한척의 선원들이 선상 폭동을 일으켜 항로를 무르만스크(Murmansk)로 바꾸도록 설득함으로써 (내전과 봉쇄 때문에 육로로 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러시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11. 호르터는 그가 사망하는 날 저녁에 쓴 마지막 글에서 자신의 실수를 파악하고 동지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런 오류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격려했다. (독일-네덜란드좌파, 5장 끝부분, 4.d. 참조)

     

    12. The Italian Fraction and the French Communist Left

     

    13. 30 years of the ICC: Learning from the past to build the future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2016126

     

    https://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601/13786/report-role-icc-fr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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