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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궁원동지의 이일재선생 인터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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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1954, 2013-07-03 11:10:34(201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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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이일재 선생

    "공산주의자 당을 만들어야 해, 이런 당은, 당을 만드는 과정이 곧 운동이야"

    글·사진 : 남궁 원


    나는 이일재 (86세) 선생 인터뷰를 쉽게 생각했다. 평소 이일재 선생과는 현장 토론회, 집회에서 자주 만나 얘기를 했고, 더구나 구 사회주의정치연합(준비모임)에서도 같이 활동했기 때문에, 선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막상 인터뷰를 준비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선생의 삶과 연관된 ‘공장자주관리운동’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대구 10월 항쟁’ ‘조선공산당’ ‘남로당’ ‘남조선해방전략당’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현재 시점에서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목적이 단순히 선생의 연보(年譜)를 적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려움으로, 노환으로 선생이 기억을 제대로 못하거나 짧게 단답식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선생이 기록한 글과 논문·구술 자료를 구해서 읽고, 인터뷰를 보완했다.

    남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운동의 명맥

    흔히 우리는 해방 직후 결성된 전평이 1946년 9월 총파업을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걷고,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회주의·급진적 노동운동 세력이 단절된 것으로 인식한다. 이후 1950년대는 미군정이 육성한 대한노총의 어용적 흐름이 지배적이며, 이후 오랜 침체기를 거쳐 1970년대의 민주노동운동, 1980년대 이후 전투적 노동운동으로 이어진다고 설명된다. 해방 직후 당 건설 관련한 인식도, 1950년대 단절기, 1960년대 통일혁명당(통혁당), 1970~8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흐름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주류적 시각은 사실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다수 견해다. 해방 전후와 1950~60년대를 단절적으로 파악하는 주류적 입장1)에서 보면, 분명 선생의 활동은 한국 ‘비주류’ 공산주의·노동운동사다.

    뒤에 인터뷰에서 확인되듯이, 나는 선생의 사상과 활동 계보를 이재유의 경성트로이카,  조선공산당, 남로당 빨치산 정신을 계승하는, 남한 독자적인 노동자계급운동의 명맥을 이어가는 흐름으로 본다. 즉 해방 이후 노동계급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어떤 형태로든 일정한 유산을 남기고 있었고, 이것이 한국 노동계급 운동과 정치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전평은 깨지고 없고 대한노총은 완전히 황색노조’인 현실 앞에서, 선생의 고민은 “남한에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 북한과 관계없이 자주적이고 독자적으로 남한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 그래서 전위정당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라는 문제였다. 이러한 선생의 고민을 볼 때, 1950~60년대 대구지역은 주목할 만한 지역이다. (선생은 대구 지역 토박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은 공업화가 미미한 상태였지만, 대구지역은 공장과 노동조합 조직이 집중되어 있었고, 더구나 “과거 남로당 활동하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아남아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선생은 대구 지역에서 주요 활동을 전개했다.

    노동계급 속에서 항일운동을 결심, 현장에 투신

    나는 2009년 4월 10일, 6월 11일 두 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위해 성주 효병원에 내려가기 전날, 나는 선생께 인터뷰 취지와 함께 인터뷰 항목을 사전에 말씀드렸다. 선생은 장협착 수술 이후 성주 효병원에서 가족과 간병인의 도움으로 요양과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당시 화물연대 파업 중이라 나는 선생에게 노동자 투쟁 소식을 전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선생님은 6년제 사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6살에 노동현장에 투신했습니다.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나는 조부의 영향을 받았어, 우리 조부 이름은 이기양인데, 의열단원 이종암 선생에게 피신처를 제공해 주어서, 3년간 옥고를 당했지. 이후 조부는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 아버님과 삼촌은 집안 사정이 좋을 때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일본 대학까지 나왔어. 아버님은 운동에 뛰어든 적은 없는데, 내가 1950년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다 산에서 총상으로 체포되어 죽을 경각에 있었을 때에도 전향만은 권유하지 않으셨고, 이후 내가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간섭하지 않고, 떳떳하게 죽을 수 있느냐를 먼저 물을 정도였어.

    삼촌 이강복은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당시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이었던 나카노 밑에서 서생노릇을 하면서 좌익 연극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었어. 삼촌은 해방 직후 조선예술극장, 혁명극장 등에서 활동을 했고, 조선연극동맹 서기장을 했어. 삼촌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서 1년 반의 형을 살고, 6·25 직전에 출옥했어. 이후 삼촌은 1968년 나와 같은 사건(남조선해방전략당)으로 형을 살다가 옥사했어. 강복 삼촌은 내가 어려서 그런지, 운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준 적이 없어. 해방 이후에는 서로 활동 공간과 장소가 틀려 잘 만나지도 못했지.

    성장기 나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외삼촌이야. 외삼촌의 이름은 최세기였는데, 트로츠키주의에 가까웠지만 아나키스트였지. 외삼촌은 아나키스트 기관지인  [아동맹]사건에 연루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어. 나는 외삼촌의 책들을 탐독하면서 의식이 싹텄다고 할까, 외삼촌의 책은 내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어. 나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책들은 트로츠키의 [배신당한 혁명], 사카이의 [계급투쟁의 필연성], 고바야시의 [게공선] 등인데, 특히 사카이는 일본 일차 공산당 사건인 대역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한 사람인데, 일본에서 처음으로 계급운동한 사람이야. 당시 나는 외삼촌의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어.

    일제하라서 내가 한글 배운 마지막 학년인데. 그때 국어독본은 일본어 책이고 우리말은 조선어독본이라 불렀어. 일본어를 배웠으니까 러시아 고리끼, 톨스토이 소설도 많이 읽었어. 이러한 책들을 탐독하면서 나름대로 의식이 생겨나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것이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어.

    16살 되던 1939년부터 통조림 공장, 양화점, 제과회사, 방직공장 등을 다녔고, 그러다 일본 놈 완구공장, 신발공장에서도 일했고, 또 소를 공출이라는 미명으로 빼앗아가는 군용통조림 만드는 공장에도 다녔지. 하지만 명확한 활동 목표를 설정해 놓고 공장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은 아니야. 그런데 한 가지 목표는 분명히 했는데, 노동계급 속에서 항일을 한다는 것이었지.

    해방 직후 노동자공장자주관리 투쟁, 군수산업을 평화산업으로

    해방 직후 전평 결성 때 대의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질문을 받았던 의제는 ‘노동자공장관리에 대하여’였다. 일제가 빠져나간 상태에서 ‘노동자공장관리’ 운동은 8·15 직후에 조선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운동이었다. 노동자공장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자연발생적 운동이자, 동시에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망을 포함한 운동이었다. 선생의 활동이 궁금했다.

    - 선생님이 경험하신 공장자주관리운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는 10여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삼륜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공장 ‘자치관리’에 나섰는데, 노무과에서 일하던 자가 주인으로 나서는 것을 물리쳤지. 우리들은 먼저 군수산업을 평화산업으로 전환시켜서, 치약을 만들기로 했어. 공장을 가동시키는 것과 아울러 우리들은 사무실과 관사도 접수했었는데, 1층은 전농(농민조합총연맹)사무실로 쓰고, 2층에는 노동자들이 집을 팔고 들어와 살았어.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일제에 의해 농촌에서 징발되어 온 사람들이라서, 시골로 가버린 경우가 많았어. 당시 물자부족에다 일할 사람도 없어 자연히 자치관리는 유야무야되고 공장의 가동은 중단되어 버렸어. 나는 그때 전평 일과 조선공산당의 사업에 나서게 되어 더 이상 삼륜회사에는 관계할 수 없었어.

    - 그러면, 조선공산당은 어떻게 가입하셨나요?

    공장을 접수한 지 몇 달이 지나서, 8월말 경에 공장으로 몇 사람이 찾아와 공장 책임자를 찾았어. 그들은 내게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에 같이 하자는 거야. 나는 이때 쾌히 승낙했는데, 이때 찾아온 사람이 이승진, 고용준, 박일환, 이병기 네 사람이었어. 9월 달에 가서 박일환 하고 고용준 하고 두 사람이 신원을 보장해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는데, 나는 노동자 출신이라 석 달 만에 후보당원에서 정당원이 됐어. 이승진, 박일환, 고용준, 나 이렇게 네 명이 일주일마다 당 세포회의를 했지. 우리 세포는 대구시당의 서부지구당에 소속되었고, 나는 그때부터 당 활동을 시작했지.

    이승진은 10월 항쟁 직전에 연락이 끊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도 4·3 항쟁의 영웅이 된 김달삼이야.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 김달삼, 이현상을 말하는데,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경성트로이카 이재유 선배야. 그 외에도 이병기, 최소복, 안기남 등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어. 우리 위의 선배로서는 황태성, 윤장혁, 이석 같은 이들과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하는 최충식, 김관제, 최문식, 이재복, 이상운, 김일식, 이수길 어르신 등이고, 나는 화학노동조합을 결성(준비위원회)할 때부터 같이 일을 시작했어. 직책은 화학노동조합 대구시지부 서기, 뒤에 도 평의회 간사도 했어.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이재유 경성트로이카 운동

    - 당 세포 활동 시 현장 활동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현장 안에서 사회주의 용어는 못쓰고, 노조 안에서 사회주의자 모임과 프락션 활동을 했지. 현장에 아나키스트들이 많이 있었어. 사회주의자 모임을 만들어서 당시 조공이 내는 기관지와 박헌영의 「8월 테제」 등을 읽고 토론을 했지. 그리고 공장 점심시간이 1시간인데, 경성트로이카 하던 이병기, 김달삼 하고 박일환, 나 이렇게 해서 전평의 행동강령, 동일임금 동일노동제, 8시간 노동제, 노동법 제정 뭐 이런 것들 교육했지.

    - 선생님은 전평 활동과 조선공산당 활동을 같이 하셨는데, 당시 전평 결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조선공산당 정세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8월 15일에서 11월 5일까지, 어떻게 두 달 20일 만에 전평과 같은 방대한 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을까? 아마 세계노동운동사에 유례가 없는 사례야. 한국노동운동의 경험과 교훈, 이론과 실천, 인적자원이 총화되어 집결되었기 때문이고, 또 해방공간이라는 특수한 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 한국의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이 전국중앙조직을 그것도 거의 완전한 산업별노동조합형태를 조직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조건은 전평의 조직을 막고 반대할 자본가들의 정치세력이 없었고, 규제할 제도나 법률도 없었기 때문이야. 전평은 해방공간, 미군정 하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백만 노동자들의 유일한 노동조합으로 출발했어.

    조직의 체계를 살펴보면 조선금속노동조합을 필두로 화학, 섬유, 출판, 운수, 식료, 토건, 전기, 목재, 어업, 광산, 체신, 철도, 일반, 해운, 조선의 16개 단일산업별노동조합이 전국평의회를 결성하고, 각 권역별로 11개 지역에 산별지부와 각 산별지방평의회가 있었어. 그리고 산별지부가 없는 중소 도시에서는 합동노동조합이라는 지역단위의 노동조합이 있었지.  각 지역에서는 산별단위의 의무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지역평의회에 참가하고 있는 곳도 있었고, 그리고 실업자동맹이 조직되어 파업 시에 파업파괴분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연대활동 등을 전개했어.

    그런데 특기할 것은 노동조합에 쟁의부가 없었다는 사실이야. 처음 창립 당시에는 쟁의부가 있었으나 산업건설부로 바꿨어. 당시 조선공산당은 곧 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가졌던 것 같고, 이러한 전망 때문에 전평이 ‘쟁의부’를 ‘산업건설부’로 고치고, ‘산업건설협력방침’을 내걸었던 걸로 생각해. 독립정부 수립을 너무 낙관한 중앙도 중앙이지만, 이에 더해 지방의 당 조직이나 당원들의 미군에 대한 인식은 ‘해방군’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수준이야. 따라서 투쟁의 중심적 대상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였어.

    나는 1946년 4월 16일, 전평 2차 대의원 대회에서 경북화학노조 대의원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는데, 그 대회에서 논쟁이 일어났어. “노동조합에 어떻게 쟁의부가 없을 수 있는가, 쟁의 대상이 분명히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이 터져 나왔지. 이에 대해 연단에서는 “이미 당이 결정한 일이 아닌가?”라는 답변으로 그냥 대충 넘어가 버리더군. 이후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된 것을 나는 보지 못했어.

    - 그럼, 전평의 산업건설노선 방침과 관련해서 조선공산당 안에서 이견은 없었나요?

    당시 조공 내 장안파2)가 반대했지. 산업건설 목적이 아니라, 장안파는 ‘노동자해방’ 목적이라고 주장했어. 내가 알기로 박헌영이 북에서 합의 보고 온 것으로 알고 있어. 장안파는 반대하면서 결국 끌려갔어. 산업건설 방침은 틀렸어. 전평의 산업건설노선이 큰 오류임은 미군정이 실시되자마자 곧 알게 됐지. 모든 일본인의 산업시설과 재산은 미군정이 접수하였고 노동자들은 산업시설에서 쫓겨나 산업건설은커녕 대량의 실업자로 변했고, 공장과 작업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전혀 노동기본권의 보장이 되지 않은 채 가혹한 착취를 당했어.

    - 선생님,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관계를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그때 조합운동 이론은 1930년대 프로핀테른에서 나온 로조프스키의 [파업의 전략과 전술], 피아로니키의 [조직론] 등에 의지한 빈곤하기 짝이 없는 것이야. 전평 결성과 활동의 약 3년 동안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공산당과의 관계였는데, 결성준비를 위한 중심 조직자가 과거 일제하 소련의 볼셰비키 당을 추종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정치조직인 당과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의 관계설정이 잘못되어 있었어. 노동조합은 당의 산하기관 역할을 하였고 모든 것이 당의 결정에 따라 집행됐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다가 지지하라는 지시가 있으면 그 지시에 따랐어. 전평 집행위원장과 간부, 각 전국산별간부, 지방평의회 간부는 물론 각 지방지부, 심지어는 분회 간부까지도 당원들이야. 전평의 전 기구를 당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각 공장에 산재해 있는 당원들이 3∼5명으로 된 당 세포(러시아식으로 야체이카라고 불렀다)에서 각 조직기구에 파견된 프락치(프락치라는 말은 원래 당이 다른 단체에 파견한 공작원을 일컫고 정보기관에서 침투한 염탐꾼은 프라파라고 한다)가 프락숀을 구성하여 조합의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갔지.

    당과 노동조합 간에 상대적인 자주성이 없었어. 전평은 결성된 후 자주관리운동이라는 노동자들의 창조적인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지 못했어, 노동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노동시간, 임금, 노동환경과 조건의 개선, 고충처리와 일상 활동이 부재했어.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초기 한계

    - 사회주의·급진적 노동운동 세력이 1946년 전평의 9월 총파업을 계기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전평의 9·23 총파업 투쟁을 좌익모험주의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전평은 어이없게도 미군정과 협조하고 곧 매판화할 민족자본과 제휴하여 국가를 건설한다는, 전평의 첫째 강령인 반제에 위배되는 반계급적인 과오를 범했어. 만약에 전평 건설 직후부터 반제의 입장에서 미국의 남한 신식민지 정책에 반대하고 계급적 입장을 견지했던들 그 후의 한국 노동자와 민중, 미국과 한국 자본과의 관계는 더 전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역관계도 달라졌을 것이야.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가정이 없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고, 다시 같은 류의 과오를 범하게 돼.

    1946년 8월에 들어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고, 천민자본의 반민족적 반노동자계급적 의도와 미래를 알아차린 공산당을 위시한 노동자·민중정당의 지도자들과 전평의 지도부는 ‘신전술’로 미군정과 자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어.

    이 신전술에 따른 전평의 9·23 총파업과 10월 항쟁의 극좌적인 투쟁노선 때문에 해방 후에 방대한 조직력이 파괴되어 다시 재기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연구가도 있으나 이것은 그 후의 상황과 국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평가야. 일각에선 10월 항쟁 후 당도 전평도 완전히 궤멸됐다고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야. 절대 안 그래. 미군정이 폭력으로 민주세력을 탄압하고 민주적인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거야. 이때는 어떻게 하겠어. 조직은 비합 운동으로의 전환이 아니면 안 되던 시기였어. 이걸 궤멸이라 보면 안 돼지. 그 뒤에 오히려 당원이 늘어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잖아.

    전평과 민중 투쟁은 비합운동의 체제를 갖추어서, 1947년의 합법진출을 위한 3·22 투쟁, 1948년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2·7 파업 등 정치파업을 전개할 수 있는 여력을 갖췄어.

    전평 붕괴의 원인은 9·23 총파업이 아니라 미군정의 비민중성, 반노동자정책과 전평을 위시한 한국의 민주세력 간의 총체적인 역관계에서 찾아야지.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는 그 나라의 산업발전과 분업구도에 상응해서 나타나며, 투쟁 형태는 그 나라 총자본(자본+자본가 정부)의 대(對) 노동정책과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해.

    대구 10월 인민항쟁

    1946년이 되면서 선생은 전평과 당에서 중견활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선생은 1946년 메이데이 행사에서 화학노조를 대표해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대구 ‘10월 항쟁’의 전주곡인 전매청 연초공장 8·15 파업을 직접 주도한다. 이후 선생은 곧 수배상태가 된다. 9·23 총파업과 대구 10월 인민항쟁 현장 상황을 들어보자.

    1946년 9월 24일 전 철도가 파업에 돌입하고, 남한 총파업위원회(허성택)에서 담화문 발표가 있고, 9월 25일 대구 우편국과 대구 40여개 공장이 총파업에 들어갔어. 26일에는 대구 중공업이 파업에 돌입했는데 당시 그 파업에 60만 명이 참가했어. 총파업은 전국을 휩쓸었어.

    10월 항쟁이 있기 전 당시 전국상황은 말할 수 없이 처참했어. 1946년 2월쯤에 식량이 바닥났어. 시장은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고, 야매 시장이 있을 정도였어. 모두들 전라도 어느 부락에 가서 쌀 한두 말씩 가져와서 연명했는데 그게 쌀 유통구조야. 당시 전매청 노동자들이 작업용 풀을 먹자, 못 먹게 염료를 타도 다시 먹을 만큼 식량난이 심각했지. 그러니 쌀값이 육십 배로 뛰어 오르고 식량 상황이 매우 어려웠어. 9·23 총파업 이후에 대구에서 참다못한 사람들이 기아행진을 시작한 거야.

    10월 1일, 도평 앞에서 시위가 벌어질 때, 한쪽에선 또 다른 시위대가 식량배급을 요구하며 행진을 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에 아줌마는 아이를 들쳐 업고, 냄비와 숟가락 들고 비산동·내당동·남산동 등 빈민촌 달동네를 중심으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했지. 그러자 미군정 시장은 달아나고 없고, 10월 초이튿날 무정부상태가 되자,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시장 관사 이런 데를 터니까 쌀이 가마니떼기로 쌓여 있고 꿀단지가 있고 그랬어.

    다른 도시에 비해 대구시민이 왜 그렇게 거세게 많이 들고 일어났냐 하면, 당시 대구에 호열자(콜레라)가 만연했는데, 대구에 집중적으로 호열자가 번진거야. 호열자로 죽은 집은 새끼줄을 치고 경찰이 통제했지. 대구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안동·경산·성주 쪽의 통로도 봉쇄됐어.

    나는 전매청 파업 때문에 수배를 받아 도망 다니고 있었지만 10월 1일부터 시내가 무정부상태가 되니까 자유롭게 돌아다녔어. 10월 2일 오전 10시경 7~8천명에 달하는 군중들은 도평의회 앞에서 이백오십 명 되는 전투부대인 특경대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군중들은 “왜 조선인 노동자를 사살했느냐, 일제 때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에게 총을 겨누더니 이제는 미군정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인에게 총을 겨누느냐”며 “무장해제 해라”고 요구했다. 미조직된 군중이 ‘와’ 하며 만세를 부르고 투석전을 했어. 경찰이 여기저기 맞으며 위협을 느끼게 되자 반사적으로 발포를 했지. 총소리가 나자 나는 순간적으로 엎드렸는데 경찰 바로 앞에 있었기에 다행히 사정권에 들지 않아 맞지 않았어. 이때 열일곱 명이 사살되고 총소리가 나자 군중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어.

    나는 현장을 수습해 대구경찰서로 갈려고 했으나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았어. 흩어진 노동자는 전매청 식당에 주로 집결하고 시민들은 대구경찰서로 모였어. 경찰서에는 얼마 후 미군 장갑차가 시민을 해산시키려고 나타났어. 2일 낮 12시부터 4시까지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친일파나 악덕 지주, 포악한 경찰을 공격했지. 대구는 무정부상태가 되었어. 10월 2일 오후 4시부터 계엄령이 내리고 7시부터는 통금령(통행금지)이 내려졌지.

    대구 10월 인민항쟁은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1월 중순까지 계속됐어. 당시 시위 참가인원 3백여 만 명, 사망 3백여 명, 행방불명 3천6백여 명, 체포 1만 5천여 명에 달했어. 대구 시월항쟁은 단순히 발생한 것이 아니야. 일제시대부터 쌓인 인민들의 울분과 분노가 폭발한 거야.

    빨치산 유격 활동, 체포, 다시 입산, 감옥, 총상

    - 선생님은 대구 10월 인민항쟁 이후 구속되고 출소한 이후에 대구 팔공산 빨치산 유격 투쟁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정세는 단독정부를 기정사실화한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이 모든 자주적인 활동과 좌익조직 폭력적 박멸에 나선 때였습니다. 당시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1948년 2월 초순 감옥에서 나와 나는 바로 당과 선을 댔는데, 영천군 조직책으로 임무를 부여받았어. 당시 단선·단정반대를 위한 ‘2·7 구국투쟁’ 때 고경면 지서를 습격한 다음 보현산에 들어가 칩거해 있던 영천군 선전책, 부조직책 등 7명을 제명하는 것이었지. 그런데 내려가자마자 체포됐어. 당의 도움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빠져나와 문경군의 노동부책으로 명령을 받았어. 나의 임무는 문경탄광과 은성탄광에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지도를 하는 것이었어. 파업을 하자 체포가 됐어. 그래서 김천 감옥에서 10개월 징역을 살았지.

    김천 감옥에서 나와 다시 팔공산으로 올라갔는데,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킨 6연대 사람들도 있었지. 팔공산에서 6연대 군인들하고, 지방민들하고, 당 간부들이 규합되어 빨치산 운동을 했어. 빨치산이 되어 산에 있을 때는 어느 한 거점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지. 내가 활동하던 청도·경산 일대는 민주부락이라고 해서 마을 세포 책이 대부분 남로당 당원이었어. 그런 곳에는 오래 있어도 경찰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지. 준 해방구인 셈인데 그런 곳의 생활은 얼마 못됐어.

    49년 9월 이후부터 군경은 낙엽기를 맞아 초토화 포위작전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어. 그 일로 우리는 거의 궤멸상태에 직면하게 돼. 그러다가 1950년 4월 12일 나는 비슬산에서 군경 토벌대의 소탕 망에 걸려 왼쪽 옆구리와 다리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어. 총상으로 인해 길지 않은 입산 생활은 끝나게 되었지. 내가 입산했던 기간은 1년 반가량, 문경까지 합치면 2년 정도 될까. 총을 맞아 과도한 출혈로 기절한 나는 청도 어느 지서로 들것에 실려 호송돼서 사나흘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지. 그러다가 경찰 고위직에 있던 친지의 주선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어. 연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그렇게 무사히 넘기게 됐어.

    내가 빨치산으로 있다 체포되었다고 하자 내 바로 밑 남동생이 염산을 먹고 자살했어. 뒤에 집에 오니 화장해서 뼈만 있었어. 그 시대에 운동 안 한 청년이 없었듯이 동생은 당시 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어. 내 옆구리는 아직도 총알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히 남아 있어. 이 땅에 휴전선이 가로질러 있듯이 그렇게….

    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8년도에 처음으로 유격대에 의한 무장투쟁노선이 제기되었는데, “남한은 유격활동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유격대가 활동하고 휴식할 수 있는 넓은 산지가 없다”라는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박헌영이 “우리에게는 인민의 산이 있다”라는 반박으로 이를 물리쳤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박헌영과 중앙당의 무장투쟁결정은 경북도당과 당원들도 동의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1949년에 가면 ‘거점 확보’, ‘해방지구 설정’의 지시까지 내려오는 상황으로 발전해버렸다고 한다.

    - 1950년대 이후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나는 4·19가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다시 뛰어들었어. 그 전에는 나경일 선생과 김기곤 선생이 중심이 돼서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했어. 나는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선배입장에서 자문역할을 했는데, 구체적인 현장과의 관계 상황을 잘 파악 못하고 있었어.

    당시 관제어용인 한국노총의 경북위원장이자 후일 한국 노동운동의 대부가 되는 김말룡을 만나서 자주적 노동운동에 대해 논의했어. 결국 김말룡이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게 한국노련이야. 또 우리는 교원노조, 혁신계 인사 등이 모여 노동조합 대구시연맹을 만들었어. 거기서 내가 조직부장을 했지. 우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독자적인 조직이었는데, 폴란드 바웬사가 하던 자유노조, 즉 독립노조 생각하면 돼. 교원노동조합도 대구가 그 출발점이었지. 지금이야 대구가 보수의 대명사지만 당시는 대구가 전국 제일의 야도(野都)였어.

    그러다가 덜컥 5·16이 일어났어. 한마디로 성격규정이 처음에는 안 되는 기라. 참 막막해. 5·16이 나자 우리 일행 중에는 “이 부패하고 무능한 장면 정부가 타도되고 군부가 정권을 잡았으니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고 연설도 했어. 속으로야 좀 찝찝했지만. 이튿날 교원노조 사무실 갔어. 만경관 맞은 편에 있었는데 가는 길에 형사가 ‘좀 보입시더’ 하는 기라. 그래서 여기서 말해라 하니, 굳이 따라 오라네. 그래 가보니 이미 새벽부터 작전이 내려 여러 애국인사와 혁신계 어른들이 잡혀와 있는 기라. 광주 민자통은 벌써 지지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는데 우리한테 뭔 일이야 있겠는가 했어. 그런데 감옥에 바로 수감됐어. 가족들도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였어. 감옥에 가니 청구대의 홍영희하고 수학자 안재구 교수,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경근, 오촌인 안민생, 일제 때 진우연맹 사건에 연루되었던 대구의 대표적 애국자 방한상 선생까지 잡혀와 있더라구. 거기다 노동조합 대구시연맹 사람들까지 몽땅 다 잡혀왔어. 생각 있고 나라 생각한다는 이는 모조리 다 잡아들인 거야. 5월 달에 잡혀가서 광복절 앞의 어느 경축일에 풀려나왔어. 뒤에 보니 박정희는 결국 제 정당 사회단체를 모두 해산시켜 버렸어. 철저히 정권 잡을 준비를 한 거지.

    감옥을 나와 1963년 백범 선생 비서하던 신장균과 김성숙, 유관순 열사의 오빠와 통사당 계통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 노동운동을 시작하자 했어. 교원노동조합 지원관계 때문에 도예종, 서도원을 만났어. 어떻게 할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한국노총 말고 따로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논의했어. 민주적이고 대중적이고 전투적이고 강력한 조직을 만들기로. 그런데 시도할려고 보니까 현실성이 없는 기라. 다시 한국노총 내에 복선을 깔기로 한 거야. 노동운동 활성화를 위해서는 대중 속에 깊이 발 디뎌야 한다. 말하자면 전민항쟁을 하지 않고는 안 된다고 본 것이야.

    남조선해방전략당

    - 선생님은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구속돼서 권재혁 선생님과 함께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서, 20년 옥살이를 했습니다.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조선해방전략당’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한국노동운동의 자주화를 위한 재건운동, 노동운동을 한다. 그런데 두 가지 방향인데 노동조합운동은 한국노총 내에, 복선을 깐다, 그러면서 복선을 까는 주체가 있어야 된다, 이런 것 하고, 그 다음에 둘째가 있는데 인혁당하고 관계된 사람들하고 차이점이 있다, 한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전위정당을 만든다, 그러면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겠지만, 또 다른 노동세력도 규합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아주 그 극심한 탄압 속에서, 전국에 산재해 있는 혁명세력들이 서로 모른다, 서로 정보도 없고 교환도 없다, 이걸 어떻게 해서 알아내고 서로 연결을 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일종의 전국적인 정보센터 역할을 우리가 담당하자, 그래서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체적인 전략을 짜는 테제를 만들자, 해서 1964년부터 준비를 했어. 68년 1월 ‘남조선해방전략론’이란 문건을 완성했는데, 그해 논문이 압수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다시 체포가 됐어. 체포계기는 정종소라는 사람이 통혁당 관계하다가 우리하고 교류를 하다 중간에 어떻게 복잡한 일이 생겼어. 그래서 중정(중앙정보부)에 의해 사건이 조작된 거야. 그것이 68년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략당’ 사건이야. 북한의 당과 정부에 추종하는 노선에 따라 반국가 단체를 구성하고 내란을 예비음모하고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것은 완전히 왜곡, 조작, 날조된 거야.

    중정이 자기네들 마음대로 조작하고 마음대로 형랑 때려 버리대. 군사독재시절 조작이 우리만 아니라 인혁당, 통혁당 등 많았잖아. 체포 당시에 국가보안법 1조 1항 및 2항 위반이야. 반국가단체 구성 및 내란예비음모. 1심에서 사형 받고, 2심에서 무기를 받았어.

    무기형이 억울하다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시대상황이 너무 절박했어. 그때는 1심에서 죽는구나 하다가 2심에서 무기로 떨어지니까 이제는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구. 무기가 되니까 산다는 게 이래 좋은 거구나 싶을 정도였어. 인혁당 사람들이 재판이랄 것도 없는 요식행위로 하루 만에 전격 사형 당하던 시대였으니,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고 고마울 정도였지.

    전향 공작 때문에 나는 옥 안 철창에 부딪혀 자살을 기도했는데, 당시 뇌가 좀 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한 일 년 고생했어. 내가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할 때 우리 사건의 주범으로 몰렸던 권혁재 선생이 1969년 11월 4일 사형을 당했어. 억울하게 죽은 그를 기리고자 요즘도 그날만 되면 하루 단식을 하고 그러지.

    - 언론에는 통혁당 조총련 하부조직으로 나와 있던데 사실입니까?

    아니야. 완전히 조작됐어. 내 선배들이 북으로 올라가서, 미제의 프락치로 사형 당했는데, 우린 북한 김일성에 대해 비판적이었어.

    - 그러면, 남조선해방전략당과 통혁당의 통합논의가 있었습니까?

    아냐, 통합논의는 없었어. 권혁재 선생이 가끔 통혁당 지도부 책임자 김종태를 만난 적은 있었던 것 같아. 김종태는 나도 잘 아는데 생각이 달라.

    - 통혁당과 비교해서, 남조선해방전략당 규모는 어떠했습니까?

    통혁당이 학생, 지식인 인텔리 중심이라면, 남조선해방전략당은 노동현장에 오르그(조직가)를 중심으로 했었지. 통혁당보다 남조선해방전략당이 훨씬 많았어. 그리고 그때 내가 노학연대를 주장했지. 노동계급이 혁명의 중심세력이야, 그런데 한국의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에 의해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보다 더 수월한 환경에 있는 학생들이 노학연대를 해야 되고 학생 중심들이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투쟁하고 결합한다, 그걸 강조했지.

    - 선생님, 그러면 남조선해방전략당은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권재혁, 이강복, 나 이렇게 지도부 13명이 구속되고 나니까, 조직이 와해됐지.

    20년 옥살이 출소 후, 비정규직·현장운동·전해투 활동에 나서

    - 선생님 출소 이후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이십년 옥에 있다 보니 사회 적응하기가 너무 어려워. 이십여 년 간 단절되어 있었으니 도저히 못 따라 가겠더라구. 그래서 사회적응 한다고 한동안 헤매고 다녔어. 오년 정도 지나니까 이젠 사회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더라고. 젊은 사람들이야 좀 빠르게 적응하지만 나는 나이도 있고 해서 한 오년 만에야 적응했어. 출소해 보니 아기라는 것, 여자라는 것이 그렇게 신기해. 백화점, 상가, 거리 등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야. 백화점에 가보고 놀라 자빠질 뻔했어, “와(놀라며)! 이러키 변했나” 했어. 자본주의 발전이 이렇구나.

    처음 한 삼년 동안은 차도 나 혼자 못 탔어. 일반인이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적응하기 어려워. 사람 만나 나누는 대화도 적응하기가 어렵고. 이십 년차가 나니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때는 무슨 얘기를 해야 되는가 싶기도 해.

    연좌제와 나 때문에 전 가족이 고생을 많이 했어. 출소 후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보안감호야. 생활이 늘 자유롭지 못했어. 어디 가면 늘 신고를 해야 했으니까.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 들어 1999년 2월 25일 사면복권 됐어. 복권장 안 받으러 갈려다 갔어. 내가 사람 죽인 것도 도둑질 한 것도 아닌데 복권이라 할 것이 뭐 있나 싶었어. 사면 복권장에 당시 죄명은 국가보안법위반이고 무기형 받은 걸로 되어 있더라구.

    활동은 대구지역에서 노동운동 연구소 쪽에 관여를 했구,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비정규직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남궁원 동지도 김기일 동지 알지, 지금은 못 보는데, 당시 김기일 동지하고 비정규노동자 조직하는데 활동을 했어.

    - 선생님은 노동자평의회 활동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계셨죠?

    내가 처음 노동자평의회 말을 들은 것은, 원산 총파업했던 선배한테서 들었어. 그 선배가 평의회 운동을 강조하는 거야. 세계혁명운동 조류에서 활발했다고 들었어. 책에서 계속 봤지. 그래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활동을 주목했지. 노동자평의회 운동하고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어. 거기서 조돈희 동지도 만났고. 한 4~5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현장 노동자들을 만났지. 노조에서 투쟁이 아닌 독자적 투쟁과 목소리가 나왔어. 현장 운동하는 노동자들이 상호교류도 있었고. 그런데 노조 선거 때만 되면 선거용 현장조직으로 이용하는 거야. 문제야.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많은 데가 당시 전해투였어. 그래서 전해투 활동에도 많이 관여를 했지.

    선생께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별노조와 관련해서 많은 우려의 표시를 했는데, 자세하게 언급은 안하셨다.

    - 선생님 한 평생 살아오시면서, 고생이 많으셨는데, 혹시 후회하신 적은 있나요?

    나는 내 살아온 이 길을 절대 후회 안 해. 죽을 때 “아! (힘을 주어) 잘 살았다. 내 나름대로 잘 살다가 죽는구나”라고 마지막 임종을 할 거예요. 기쁨이 영원하니, 가는 거요. 그게 극락이고 천국이지. 정주영이나 김대중의 한 평생하고 내 생활의 한 시간하고도 안 바꿔. 나는 그 정도의 자긍심, 이런 게 있어. 하나도 후회 안 해. 잘 못 한 거, 무수히 잘 못하고, 운동도 잘 못한 게 많지만 전체적으로 살아온 인생길 자체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은 안 해.

    - 선생님은 최근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 토론회에도 참가하셨습니다. 사회주의 후배 활동가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오세철 선생하고 사노련이 탄압을 받았는데, 탄압은 타협해서 피하면 안 돼. 요새 감옥가면 밥도 잘 주잖아. 이론과 행동을 통일해야 해. 당 무용론은 틀렸어. 공산주의자 당을 만들어야 해. 이런 당은, 당을 만드는 과정이 바로 운동이야.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노동자해방을 위한 한 노혁명가의 삶과 활동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줄곧 ‘스스로 후회하지 않는 공산주의자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역사에서 ‘무엇이 이기고 지는가를 벗어나서’, 분명 역사는 그 시대에 필요한 혁명적 주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일재 선생이 걸어온 길

    1923년 12월 28일 대구 출생

    1936년 대구 혜성보통학교 졸업

    1942년 노동현장 투신. 제화공장·화학공장 현장 활동

    1946년 해방 후 대구지역 공장자주관리 운동 참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화학노동조합 대구시 지부 서기 활동

              미쯔아화학노동조합 위원장.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경상북도 평의회 간사

    1946년 9월 조선공산당 입당

    1946년 대구 9·23 총파업, 10월 항쟁 주도적 활동

    1946년 미군정 법령 13호, 맥아더포고령 2호 위반 구속

    1948년 문경탄광 파업 주도 구속

    1948년 대구 팔공산 빨치산 활동, 경북지역 빨치산 정치위원

    1948년 남로당 2·7 투쟁으로 구속

    1950년 남로당 경산군위원장

    1950년 4월 23일 빨치산 활동 중 총상

    1958년 대한노총 경상북도 조사통계부장

    1961년 대구시노동조합연맹 조직부장

    1968년 7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권재혁 선생과 함께 구속, 무기징역

    1988년 8월 14일 가석방

              대구노동정책연구소

    1998년 민주노총 2기 지도위원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지원 활동

           삼성 민주노조 건설 지원 활동

    2002년 사회주의정치연합 (준비모임) 활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지도위원

    <참고문헌>

    이일재, 「해방직후 대구지방의 조공·전평 활동과 야산대」, [역사비평] 1990 여름, 역사비평

    이일재, 「2002년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 구술사료」, 2002

    이일재, 「10월 항쟁의 증언 : 10월 그날이 다시 오면」, [향토와 문화], 1999, 대구은행

    김경일, [195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대안적 전통], 역사비평사, 2006

    편집부엮음, [공안사건기록], 세계, 1986

    --------------------------------------------------------------------------------

    1) 1950년대는 대한노총이 전일적으로 지배했던 ‘암흑기’가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갈래의 노동운동이 시도된 시기로 파악하고, 대한노총에 대항하는 민주노조와 급진주의 흐름에 주목하는 연구결과는 김경일,

     

    <출처 : 사회주의자 4호, 2009년, 사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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