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
  • 한광호 열사를 추모하며 : 금속노조 유성영동지회 한광호 조합원의 자살
  • 금속노조 유성영동지회 한광호 조합원의 자살 
     
     
    내일이면 온다더니 죽어서 오다니!
     
     
     2016년 3월 17일. 유성기업 충북 영동 공장에 다니던 한 노동자가 죽었다. 봄이 오는 길목, 이제 막 새잎을 내민 봄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기 전이었고 여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이었다. 
     한광호, 마흔 세 살. 스물 두 살에 유성기업 노동자가 되어 스무 해를 일한 그는 유성기업노조 영동지회 조합원이었다. 그는 고향 마을을 떠난 이후, 왕래가 거의 없었던 아버지의 산소 인근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그는 왜 뜻밖에도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그와 함께 유성기업에서 일한 동료와 그의 유족인 형의 이야기를 통해, 이젠 ‘한광호 열사’가 되어 길거리 분향소 영정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의 행적을 잠시 돌이켜보고자 한다.
     
     평범하고 성실했던 노동자, 한광호 
     
     한광호 열사는 1973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청남리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보모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부산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93년 11월 경, 한광호는 그의 고향인 영동으로 귀향했다. 유성기업 영동공장에 실습생으로 입사한 것이다. 자동차 부품인 라이너(연마) 생산직으로 근무하던 그는 영동군 군부대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1995년 제대했다. 제대 후, 유성기업 가공라인에 재입사했다. 머리가 똑똑했던 그는 자동화 기계를 빨리 터득했고 직장생활에 충실했다.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던 그는 동료들과도 잘 어울렸다. 
     
     10여 년 동안, 평범한 노동자로 살면서 성실하게 일하던 한광호는 노동조합 대의원을 세 차례 역임했다. 1999년부터 대의원 활동을 하고 노동조합을 알게 된 그는 그때부터 삶이 바뀌었다. 2012년 당시에는 유성기업 사측의 사주에 의해 어용노조(기업노조)가 설립되었고, 유성노조(금속) 지회와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용역깡패들의 폭력과 직장폐쇄로 이어진 노조파괴 책동은 유성지회 조합원들의 극렬한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용과 노조와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면서 현장투쟁이 많았던 시기에 2년 연임으로 대의원을 맡은 한광호는 현장투쟁을 남에게 미루지 않고 모범적으로 앞장서 나섬으로써 자연히 마찰과 충돌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어용노조와의 교섭권 확보를 위한 싸움은 조합원 확보 때문이었고 사측은 유성노조를 조합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때문에 회사의 일방적인 노조 탄압은 노조 간부들과 대의원을 비롯한 조합원 개인에게 향했다. 수십 장씩의 징계와 경고장이 남발되고 고소 고발을 일삼았다. 정상적인 쟁의행위인 현장순회조차 집단적으로 관리자들을 동원해 방해했고, 이 과정에서 충돌을 야기시켜 폭력행위로 또다시 검찰에 고소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자행했다. 
     한광호는 징계 3회와 함께 모두 11건에 달하는 고소 고발을 당하고 경찰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표적이 될 게 뻔한 대의원을 자임해서 맡았다. 
     
     노조파괴가 한광호를 죽였다
     
     사측의 끊임없는 압박으로 한광호의 부담감은 점차 심해졌다. 본래 쾌활했던 그는 고소 고발에 대한 고통으로 점차 우울한 상태에 이르렀다.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한광호 뿐만이 아니었다. CCTV 몰카, 녹화, 채증, 재판, 검찰 소환, 경찰 조사, 징계와 해고 등으로 이어진 사측의 지속적인 괴롭힘은 유성기업 노동자들 모두의 심리적 건강을 파괴하고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2012년, 유성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주요 우울장애 고위험군의 비중이 조사 대상의 43.3%나 차지했다.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주요 우울장애 비율이 6.7%인 것에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투쟁사업장(23.1%)이나 비정규직 해고자들(28.6%)과 비교해도 두 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불행감을 느끼는 정도를 측정하는 사회심리스트레스 지수를 보더라도 2013년에는 유성기업 노동자의 41.3%가 고위험군이었는데, 한광호 열사가 죽기 전 해인 2015년에는 64.5%가 고위험군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서, 유성 노동자의 10명 중 7명은 행복하지 않으며 고통스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상황 속에서 아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한광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2016년, 한광호는 노조 7기 2년차 대의원에 이어 노조 8기 대의원 임기가 끝났다. 그런데 3월 들어 현장에는 징계소문이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3월 15일 밤에 ‘징계사전조사출두요구서’가 야간작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문자로 발송되었다. 징계사유는 이전부터 사측에서 그의 근태기록을 모아서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이를 표적 탄압의 빌미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노조 대의원 활동 기간에 사측으로부터 11번이나 고소를 당했고, 8번의 경찰 조사를 받았고, 2건의 형사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징계통보를 받은 그는 조퇴를 하고 퇴근했다. 
     다음 날,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동료들과의 통화 시에 마음을 추스르겠다고 했던 그는 16일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다. 
     17일 새벽, 그는 친한 동생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 집으로 못 갈 것 같다......’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17일 아침, 유성 동료들은 위치추적과 함께 한광호를 찾기 시작했다. 8시 30분 경, 그는 끝내 시신으로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가 발견된 곳은 죽천교 다리께 야산 공원이었다. 높은 다리 위, 조망 좋은 곳, 정자 옆의 소나무에 목을 맨 그를 지나가는 차량이 신고했다. 그곳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청남리, 아버님의 묘소 근처였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물을 건너오다 불행히도 익사하셨고, 한광호도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더듬을 만한 것이 없을 터였다. 더구나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기에 아무도 그가 그곳으로 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개인의 유품을 대부분 정리한 상태였다. 유가족이 유품 정리를 위해 찾은 집에는 뜯지도 않은 각종 출석요구서만 잔뜩 쌓여 있었다고 한다. 
     차량 안에 남겨진 번개탄과 소주...... 유서는 없었다.
     
     그는 미혼이었다.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살았다. 그의 누님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어머니와 한광호, 그리고 이복 형제인 형과 누님들이 있었다. 그의 형도 유성기업 노동자이며 해고자 신분이었다. 서로 흩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한 가족들이 지난해에 모처럼 모였다. 어머니와 누님들, 형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한광호는 매우 기뻐했고, 앞으로 가족 간의 우애를 다지며 살자는 약속도 했다.
     여행을 무척 좋아했던 그는 친한 동료들과 겨울이면 스키장도 가고 여름이면 캠핑도 자주 갔다. 그렇게, 누구나 그러하듯 가족모임을 하고 여행을 다니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았던 그는 자신의 손으로 목을 맸다. 유성기업 납품사인 현대차자동차의 노무관리 지시와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파괴 전문 용역회사를 동원한 유성기업 자본의 가학적인 노조탄압이 가해진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보내지 못한 죽음, 보낼 수 없는 죽음
     
     한광호 열사의 분향소는 서울 시청광장에 마련되었다가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사옥 앞으로 옮겨졌다. 한 노동자의 사회적 죽음을 알리고자 상엿길 100리 행진을 하고, 유성노조 파괴 배후세력으로 드러난 현대차 정몽구 회장 집으로 찾아가 항의집회를 열었다. 결국 경찰의 방해를 뚫고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 농성장을 만들었다.
     분향소를 양재동으로 옮긴 첫날 저녁, 추모문화제에서 한광호 열사에 대한 조사를 읽던 유성기업 김성민 영동지회장의 울먹거리는 음성이 가슴을 쳤다. 
     “내일이면 온다더니 죽어서 올 거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현장순회를 할 때 네가 있던 생산부 조합원들 특히 너와 친했던 종진이 형은 정말 많이 걱정하더라. 내일이면 네가 올 거라던 종진이 형은 일부러 너와 멀어지는 척하느라 힘들었대. 내일이면 온다던 말이 네가 죽어서 올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프레시안, 김성민 유성기업 영동지회장 기고 글
     
     한광호 열사의 형인 국석호 조합원(유성노조 해고자)는 현대차와 유성기업의 노조파괴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지난 8월 17일부터 유가족 단식에 돌입했다. 민노총 충남세종본부 문용민, 단식동참 시민 신영철, 두 분의 동조자도 함께 단식에 나섰다. 
     단식 보름쯤 지나서, 현대차 앞 유가족 단식장에서 만나본 국석호 씨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약간 지친 모습의 그는 검게 그을린 얼굴에 눈빛이 더욱 강렬했다. 
     한광호 열사가 자결한 지 6개월, 동생에 대한 이야기와 유성에서 노조활동을 하며 힘들었던 시기, 열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략적인 전말을 들려주었다. 
     
     “6년 동안 힘들었지만, 노조파괴 하나씩 바로잡는 투쟁에서 동생이 열사로 죽었다. 장례를 빨리 치러 냈으면 한다. 아직까지 장례를 못하고 있다는 게 동생에게 죄스럽다. 가족 입장에서는 어서 보내주고 싶다. 어머니 꿈속에서 광호가 자꾸 나타난다고..... 언제 보내줄 거냐고!”
    -고(故) 한광호 열사의 형 국석호
     
     마지막으로 그는 노조파괴는 반드시 중단돼야 하고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지 두렵다고 했다. 6년 동안 원하던 그의 바람대로 하나씩 바로 잡히는 일도 생겨나고 있다.
      노조파괴에 맞서 싸웠던 유성 노동자들의 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이 법원에서 나왔다. 또한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가 무효라는 판결도 내려졌다. 검찰의 수사 지연이 우려스럽지만 유성기업 유시영 대표이사의 재판도 진행 중에 있다. 유성과 똑같이 노조파괴를 자행한 갑을 오토텍 대표이사는 법정구속까지 되었다. 유성도 이와 전혀 다를 바 없으므로 유시영에 대한 처벌은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기업노조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오기 무섭게 제3노조를 설립하고, 해고무효 판결이 나오면 바로 항소를 한다. 그러므로 유성노조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는 자본가와의 싸움이고 현재진행형이다. 
     노조파괴 재발방지, 책임자 처벌, 유성과 현대차 자본의 사죄, 고소 고발 취하, 해고자 복직 등 유성 범대위와 유성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한광호 열사는 보낼 수 없는 죽음이다. 그의 죽음을 편히 거두고 생전의 염원을 이루고자 하는 한광호 열사 장례투쟁은 한시라도 연대와 승리의 꿈을 멈출 수 없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이 될 것이다.


    글/ 임성용(작가회의 자유실천위윈회)


    문학과 행동/ 2016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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