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덩치만큼이나 오지랖 넉넉하고 푸근했던 사내
  • 조회 수: 2659, 2013-09-14 13:28:23(2013-09-06)
  • 덩치만큼이나 오지랖 넉넉하고 푸근했던 사내

    이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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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코뮤니스트 국제대회 참관
     

    얼마 있으면 그가 떠난 지 벌써 한 달이다. 남궁원 동지 하면 무엇보다 2년 전 함께 국제대회(유럽에서 열린 좌익공산주의자 회의)에 참관했던 게 떠오른다. 나로서는 환경도 그렇고 언어 문제로 평소 여행이든 뭐든 외국에 간다는 건 만용이라 치부해 왔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자기와 함께 대회에 가자며 밀어붙였다. 셋이 갔는데 남궁원 동지가 중심을 잡고 일정 등을 총괄했고, 다른 한 동지는 전문가 수준의 동시통역으로, 난 민폐나 끼치며 덤으로 묻어 다녔다.

     

    어쨌든 간 김에 대회 뒤엔 여기저기 구경도 잘하고 왔다. 대회는 3일간 먹고 자는 시간 빼곤 내리 붙박이로 토론의 연속이었다. 지구촌 곳곳의 계급투쟁 상황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차이, 특히 중남미에서 온 참관단체에서 제기한 인민전선이나 공동전선(공동투쟁이 아닌)의 문제는 여기뿐 아니라, 어디서도 겪거나 마주칠 수 있는 문제였다. 국제조직에서 얼마 전 한국어로 출판한 ‘토론문화’에서 보듯이 그들의 토론문화엔 남다른 점이 있었다. 참관단체에서 비슷한 내용을 표현만 약간 달리해 같은 질문을 계속했으나 그때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비유나 심지어는 1920~30년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자신들의 경험사례를 들어가며 지루하리만큼 설명을 이어 나갔을 뿐, 결코 줏대 없이 상대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타협하거나 동의하지도 않았고 질문을 막지도 않았다.

     

    한국이었으면 하고 싶어도 같은 질문을 두 번 세 번씩이나 할 엄두도 안 내겠지만 설사 했다 한들 서로 얼굴 붉히며 아예 질문을 막거나 입장의 차이를 들어 상종 못 할 부류로 낙인찍는 풍토에서 볼 때 신선했다. 물론 그들이 끝까지 합의나 동의를 하진 못했지만, 합의나 동의라는 결과 자체보다는 그 과정을 중시하고 문제를 드러내는데 더 방점을 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론 트로츠키주의나 전위당, 인민전선 등에 대한 유럽과 여타지역 사이에 쳐지는 대립선은 좀 심하게 말해 유럽 중심주의랄까 자부심이랄까 거의 종교 수준이란 느낌도 들었다. 다른 지역에선 상황논리를 말했고, 그들은 원칙을 들이밀었다.

     

    우리도 발언 기회를 얻어 남궁원 동지가 한국 상황과 촛불, 사노련 사건과 그에 따른 국제연대를 요청했으나, 그들의 첫 반응은 비판적이었다. 국가보안법폐지서명, 각국 대사관 앞 1인 시위, 1유로 서명 모금운동 등에 대해 청원 운동류로 깎아내리며 보안문제와 명망가 중심주의를 벗어난 계급투쟁의 힘으로만 뚫을 수 있다는 원론을 되풀이하면서도 마지막 날 현장 즉석모금으로 우릴 다독였다.

     

    한국의 다른 동지들도 왔었는데 매일 일정이 끝나고 우리끼리 모일 때마다 남궁원 동지는 앞장서 유럽조직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계급의식에 대한 원칙은 철저히 배워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행진 때 경찰 저지선을 뚫자며 선동할 몇몇이 대열을 벗어날 때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그런 행동을 막아내고 솎아내야 한다는 생각, 대중과 함께 싸우되 계급의식의 성장과 자발성을 중시할 뿐 그 결과를 자기 것으로 조직하거나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 그에 반해 순교와 헌신을 덕목으로 하는 우리 풍토에선 선도투만을 최고로 알고 있는데, 다시 한 번 계급의식과 계급역량에 대해 곱씹어 보라는 것과 그것은 매 순간순간의 전투에서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에 있는 게 아니라 단결과 연대라는 계급의 힘을 깨닫는 데 있다는 ‘선언’의 한 구절을 되새기게 한다고도 했다.

     

     

    2. 관광(에피소드)

     

    가. 코뮌 묘

     

    흔히 프랑스혁명 3부작이라 불리는 맑스의 저작 중 파리코뮌의 역사를 다룬 게 프랑스내전이다. 패전 뒤, 벨 에포크라는 욱일승천하는 자본주의 상승기 아래 프랑스는 68혁명까지 100년 이상 침묵을 지켰다. 어디나 그렇긴 하지만 파리 역시 자본은 피로 쌓은 역사를 분칠하고 도려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무 흔적도 없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그럴싸한 곳으로 여겨지는 데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묵념한 뒤 근처 식당에 내려와 도로변 식탁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침 그때 몇몇 백인도 낀 이주노동자 집회행진이 지나가며 유인물을 주기에 받았더니, 돈을 내라 해 없다니까 선전물을 낚아채듯 도로 뺏어 갔다. 나중 알았지만 여기는 선전물만 아니라, 서명도 공짜가 없고 모두가 돈을 내야 할 수 있단다. 가히 문화 충격.(?) ‘우린 서명하거나, 받아만 줘도 감지덕지하는데…….’

     

    에펠탑 뒤였던 거 같은데 너른 공원에 나무 그늘마다 소풍 나온 가족끼리 싸온 음식을 먹거나 자전거 타는 애들, 데이트하는 연인들……. 우리네 공원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대낮 공원 한가운데 나무그늘 아래 10대를 갓 지난 앳돼 보이는 연인 한 쌍, 서로 끌어 앉은 채 과감한 애정 표현을 하기도 했다. ‘역시~ 파리군.’ 한가로이 한두 점 구름이 떠가는 파란 하늘, 무척 덥기도 한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나. 다이아몬드의 도시 안트베르펜

     

    엥겔스 생가를 가는 길에 벨기에의 제2도시 안트베르펜(영어식 안트워프)으로 갔다. 쵸콜릿, 동화 ‘플란다스의 개’로도 널리 알려진 벨기에는 경상도 크기에(30,000㎡남짓)인구1,100만/1830년대 네덜란드에서 독립했다. 안트베르펜은 로테르담에 이은 유럽 2번째 항구도시이자 중심항이다.

     

    규모는 작아도 도시 전체가 양차 대전의 폭격을 비켜나 온전히 보존된 유럽에선 거의 유일한 도시로서 대표관광지다. 이제까지 인류의 삶의 방식인즉 배고프거나 남의 것 탐나면 옆 동네 쳐들어가 뺏어오는 게 중요한 경제활동(전쟁)이었고, 유럽문명이란 것도 알고 보면 고작 중상주의 이래 지구를 상대로 노략질해 쌓은 것이지만 대단했다. 자본주의 발흥기 영주는 영주대로, 신흥 부르주아는 부르주아대로 온갖 거리와 건물을 화장과 분칠로 꾸민, 도시 전체가 국보요 유적인 셈. 시 청사가 있는 길드 거리엔 건물마다 요란한 치장에다 꼭대기엔 상징 조각을 얹고 눈부신 금도금을 했다. 지금도 세계 다이아몬드시장을 쥐락펴락한다는 다이아몬드 거리엔 전자감응으로 등록 차량만 드나들 수 있게 도로에 ‘볼라드’라는 진입방지기둥이 땅 위로 솟았다 꺼졌다 한다. 도시 번영의 유래도 원래 에스파냐에 살던 유대인들이 16세기 종교 박해로 집단 이주할 때, 집이나 땅 등 일체의 재산을 못 가져가게 하자 모든 걸 두고 수술로 살갗 밑에 다이아몬드를 감춰 들여왔던 게 오늘날 번영의 원천이자 에스파냐로선 쇠락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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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무페탈 엥겔스생가

     

    무페탈을 가려면 쾰른을 지나는데 로마제국시대 고도답게 라인강을 사이로 로마와 야만을 나눈 역사를 증명하듯 그 당시의 옛집이라든가 말 타고 겨우 지날만한 좁은 길 등 곳곳에 유적이 남아 있고,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부서진 일부를 아직도 복원하는 쾰른 성당의 위용은 대단했다. 종탑까지 계단 숫자는 잊었지만, 몸무게 가뿐한 내가 제일 먼저 오르고 남궁원 동지가 꼴찌를 했다.

     

    무페탈 가는 길엔 이번 출장의 중요한 임무인 남궁원 동지의 번역출판 업무도 있어 잘 마무리 했다. 엥겔스 생가는 너무 늦어 박물관은 못 보고, 생가와 부속건물 일부만 봤다. 두 사람, 엥겔스가 없었다면 맑스의 저술이 있을 수 없었을 거고, 남긴 저술도 세상에 빛을 못 보고 묻혔을 거다. 인류사에 찾기 힘든 친구나 연인 이상의 분신과도 같았던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3. 추모

     

    남궁원 동지를 보내는 자리에서 했던 추모사가 아직도 맘에 걸린다. 원래 말주변이 없어 나서길 꺼리지만, 뭐라도 한 가지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응낙은 했으나 낫살이나 먹고도 도무지 횡설수설 지겨운 얘기를 시간만 끈 게 지금도 낯 뜨겁다. 우리끼리야 별일 아니나 장례식에 오신 친척 분 중엔 남궁원 동지 활동을 모르고 이해도 힘든 분들도 계신 자리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막연하긴 하지만 아마도 동지가 했던 일 중엔 출판사 대표로서 했던 일과 실천 활동에서 오지랖 넓고 푸근했던 동지였다는 말을 하려 했던 것 같다.

     

     

    4. 현상과 본질

     

    현상과 본질은 현실에선 곧잘 반대로 보이기에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보려면 여간한 끈기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힘들다. 우린 곧잘 경험주의 한계에 갇히기 쉽기 때문이니까. 그래도 자연현상은 수학이므로 1+1=2라는 정답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긴 해도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현상은 지구촌 70억 인구의 얼굴이 다르고, 경험과 환경이 다른 만큼 해석도 달라, 자연현상보다는 본질을 깨닫기가 몇 배나 더 힘들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갈릴레이가 옳았고 종교재판이 억지였다는 걸 안다. 그러나 사회현상은 다르다. 제주 4·3이나 6·25처럼 그런 일을 같이 겪은 우리 부모세대에서조차, 처한 입지와 환경에 따라 서로 해석은 다르다. 하물며 역사를 추경험으로 이해하는 자식세대와는 그 차이가 더 클 수밖에 없다. 극단으로 말한다면 어버이연합도 맞다. 그들 입장에선.

     

    그래도 자본제 이전인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에선 현상과 본질의 혼란이 덜 했다. 그만큼 누구의 눈에도 지배와 수탈이 분명했으므로……. 양반은 입만 가졌을 뿐, 머슴이나 상놈 없인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아마 대신 먹어줄 수만 있었다면 먹는 것도 대신시켰으리라. 수많은 반란, 전봉준, 스텐카 라진 누구나 깃발만 꽂으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원전 73년 로마 남쪽 카푸아에서 78명의 검투 노예들이 훈련소를 탈출하며 일으킨 반란은 이를 잘 보여 준다. 순식간에 불어난 노예군은 스파르타쿠스 등 세 사람의 대표를 뽑고 뒤따라온 진압군을 쉽게 물리쳤다. 한때 로마도 점령하는 등 3년간 이태리반도를 휘저으며 승승장구, 가는 곳마다 노예군은 불어났다. 맞서 싸우다 쓰러질망정 등에 칼을 맞고 죽은 자는 없었다. 그들은 자유를 바랐으나 제국을 무너트리지 않고는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 진압군은 마지막엔 꽁무니 1할을 처형하는 ‘10분의 1형’이나, 병기를 잃은 병사들에겐 받은 병기보증금을 몰수하는 등 제국의 온 힘을 쏟아 붇고서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마지막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생포된 6천 명은 로마로 이어진 아피아 도로 양쪽을 따라 당시 가장 악형인 십자가에 매달았다. 10m 간격이라도 도로 양쪽으로 30km 거리다. 예수가 같은 형벌로 처형되기 100년 전이다.

     

    맑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사의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장군이며 고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하는 사람이라 했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듯 그의 기록 역시 지워지고 잊혀졌다. 남아 있는 거라곤 당시 로마의 변방인 트라키아 지방 출신 전쟁노예였을 거라는 설 정도다. 그는 연전, 연승 알프스기슭까지 닿았다. 산맥만 넘으면 자유를 찾아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검투사들과 노예들은 연전연승에 취해 자신들이 당해왔던 제국의 토대인 노예제와 정복전쟁을 뒤엎기보다는 똑같은 약탈을 일삼으며 노예주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로마를 향해 남쪽으로 갔다. 시대의 한계였으나 노예군 역시 자신들을 착취했던 체제의 뿌리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로자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건 비난 받아야 한다. 지킬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는 사람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짓’이라 했다. 그녀는 2천 년의 세월을 넘어 스파르타쿠스단을 세웠다. 그의 이름은 언제나 억압에 저항하는 반란자들의 머리에서 부활하곤 한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제 사회는 노동자 계급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의식이 존재를 배반하는 시대다.  그래서 동지가 했던 출판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입이요 메가폰이었다. 이 일을 동지는 기꺼이 감당했고 기획에서 제작과 배포, 판촉, 재정문제 등 몇 사람이 나눠 해도 벅찰 일을 조용히 처리해 왔다. 한마디로 운동이 차이를 넘어 공동행동(공동투쟁)을 통해 단결과 연대를 이루며 이해와 차이를 드러내고, 좁혀나가는 실천으로 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를 넓히고 조직하는 거라면 동지야말로 이를 실천으로 보여준 혁명가였다.

     

    동지는 원래 체격만큼이나 에너지도 많고, 마음도 넉넉했다. 내가 보기엔 동지는 이론보다 실천(행동)이 앞서는 기질인데 토론을 즐겼고, 또 동지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도 책 읽기도 열심이었다. 원래 운동 판이 걸핏하면 노선 차이로 갈라서기에 십상이고 그럴 경우 대부분 서먹한 감정으로 대응 하나, 동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노선투쟁에선 한 치의 양보도 없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 경우를 봐도 동지보다 나이가 많아 선배 소리 듣지만, 이론이나 실천이 뒤져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래도 어찌어찌 따라갈 때면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게 그만큼 심성이 맑고 순수하다는 방증이다. 원래 이론은 뛰어난 머리가 골방에서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피 튀기는 삶, 현장의 실천 속에서 수많은 사람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숙성된다. 김치가 되려면 무 썰고 배추 다듬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 더해 숙성이란 시간도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책 몇 줄 읽었다고 자기 것이 아니듯, 숙성의 시간은 자연의 법칙이다.

    오선생님의 말처럼 동지는 떠나면서도 커다란 일을 하고 갔다. 수련회에서 밤새워 토론하고, 확정하고, 언제나처럼 많은 몫을 짊어진 채 마무리까지 마친 뒤 집에 가다 사고를 당했다. 공무원으로 따지면 순직이요. 운동으로 봐선 치열한 투쟁 속에 현장에서 산화했다. 유족에겐 가슴 아픈 말이지만 오십도 안 된 불꽃 같은 아름다운 삶이었다. 그랬기에 조직을 달리했던 동지들도 스스럼없이 달려왔고, 충분치는 않으나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동지가 벌려 논 큰 판!!
    어떻게 그들과 소통하고 풀지는 남은 자의 몫이다.
    잘 가라 동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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