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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뮤니스트 3호] 파국의 시대
  • 조회 수: 3671, 2013-11-21 00:15:42(2013-11-20)
  • 파국의 시대1)


    국제공산주의 흐름
     


    오늘날 혁명가들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모두 공유하지는 않지만, 이는 1차 세계대전에 반응해야 했던 사람들과 대전 이후 뒤따른 혁명적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이 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비슷하게 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는 것이 그로부터 도출된 공산주의 강령과 전술을 다시 고무시키는데 필수불가결했다.


     「국제평론」에 실렸던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련된 연재물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확장에 깔려있는 기본적 과정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이 지구의 전(前) 자본주의의 지역으로부터 그 체제의 진정한 핵심인 부르주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밀어닥친 재난의 귀환을 예측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원제목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을 1915년 감옥에서 썼을 때, 1914년의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발은 교전하는 양 진영의 노동계급에게 퍼부었던 파괴와 참상 때문에 파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배신행위, 즉,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훈련된 국제주의의 전수된 봉홧불인 대다수 사회민주당의 결정이 그들의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고, 191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 동안 제2인터내셔널과 그를 구성하는 당의 수많은 회의에서 통과된 전쟁 반대 선언에서 울려 퍼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 학살하는 것을 재가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에 파국이었다.

     

     이는 지금은 서로 다른 국민정당으로 쪼개지고 그 다수가 지도정당으로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를 위한 강제 징병 관료로서 서명하게 한, 인터내셔널의 죽음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을 배신행위로 끌고 간 “사회 쇼비니스트” 또는 “사회 애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끔찍한 와해 속에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인 “중도주의자들”은 온갖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평화 정책의 가능성이라는 어리석은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사회 애국주의자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설 수 없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교황”이었던 카우츠키의 경우에는, 인터내셔널이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일 뿐이라는 근거로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주 멀어졌다. 이와 같은 트라우마의 시대에 오직 소수만이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의 전쟁 노력을 인터내셔널이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유보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문서를 전쟁 전야에 채택한 인터내셔널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을 앞당기는 수단으로서 전쟁이 가져다 준 사회위기를 사용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의 개전시기에 민족주의적 히스테리에 직면하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에서 묘사된 “학살 분위기”는 혁명적 좌파의 훌륭한 투사들까지도 의문과 어려움으로 몸부림치게 했다. 보기를 들자. 라이히스타그(Reichstag)에서의 전쟁 채권에 대한 당 투표를 발표한 「독일사민당」 신문인 「Vorẅarts」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닌은 이것이 정치 경찰과 함께 공모한 헛소문이라고 처음에 믿었다. 독일의회에서 반(反) 군사주의자 리브크네히트는 처음에는 당 규율을 벗어나 전쟁채권에 대한 투표에 참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사회민주주의 내의 좌익반대파가 불완전한 개인들의 소수집단이었음을 그녀가 느낌 정도를 보이고 있다.


     “나는 (라이히스타그) 대표들의 활동에 맞서는 가장 활발한 행동을 하기를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일관성 없는 인물들(집단)로부터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 칼(리브크네히트)은 하늘의 구름처럼 떠돌아 붙잡을 수 없군요. 프란츠(메링)는 문자캠페인 말고는 관심도 없습니다. 클라라(제트킨)의 반응은 히스테리 같고 가장 어두운 절망인 것 같고요.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려 합니다.”2)


     아나키스트 중에는 역시 혼란과 철저한 배신이 있었다. 덕망 있는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독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프랑스 문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그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나코-트렌치스트라고 불렸고,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 CCTT의 경우에는 특히 애국주의의 매혹이 강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그 이질적 성격 때문에 “맑스주의 당”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뿌리부터 흔들리지는 않았다. 수많은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그들이 전에 지녔던 동일한 국제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방어했다.3)

     

     

    제국주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공공연하게, 재조직화와 재집단화의 작업은 민족주의적 열광과 국가억압에도 불구하고 선전과 선동의 기본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전의 사민주의 좌파 그룹들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전쟁이 오랫동안 운동을 붙들어 왔던 가정들을 어떻게 휩쓸어갔는가를 이해하는 투철한 노력, 이론적 재점검이었다. 국가 방어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조심스럽게 선택한, 맑스와 엥겔스의 문구를 사용하면서, 반역자들이 그들의 애국주의를 위장한 “사회주의적” 포장을 찢어버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독일의 경우에는 러시아 짜리즘이 제기한 반동적 위협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맑스주의 경향의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이론적 탐구의 필요성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취리히 도서관에서 조용히 헤겔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 레닌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코뮨(The Commune)」에 최근 실린 논문에서 미국의 맑스주의-인본주의 위원회의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은 레닌의 헤겔 연구는 그의 멘토인 플레하노프와 (확장해서 그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이 조야한 유물론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또한 헤겔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역사의 진정한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고 주장한다.4)


     물론 헤겔의 기본적인 변증법적 원칙 중의 하나는 한 시대에서의 합리적인 것은 다른 시대에서는 비합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특히 플레하노프 같은 사회 쇼비니스트들에 레닌이 응답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전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사회 쇼비니스트들(플레하노프가 이끄는)은 1870년 전쟁에서의 맑스의 전술을 인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연합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조국을 방어할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있다는 1891년 엥겔스의 성명에 대한 독일의 입장들(Lensch, David 등 집단의 유형)이 그렇다. … 이러한 모든 인용들은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자들 편에 서서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무모하게 왜곡시키는 보기들이다. … 진보적인 부르주아지 시대의 전쟁에 대한 맑스의 태도를 인용하고,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는 맑스의 언명을 반동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언명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맑스를 왜곡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견해를 사회주의자의 견해로 대체하고 있다." 5)

     

     여기에 맑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가 반동적 체제가 되었다는 열쇠가 있다. 전쟁이 그것을 증명했으며 이는 운동의 낡은 전술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와 옛 시대의 위기에 있는 자본주의 특성, 그리고 계급투쟁이 맞닥뜨린 새로운 조건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뜻했다. 좌익 분파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진화의 이러한 기본적 분석은 보편적이었다.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은 전쟁으로 이끄는 시기의 제국주의 현상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기반으로, 인류가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엥겔스의 언명을 담아, 이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이 전쟁은 야만이다.”고하면서 당면한 현실이라고 선언했다. 이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억제되지 않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서 특정한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낡은 전략은 모든 진보적 내용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고삐 풀린 시대에 민족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민족(국가)의 이해는 제국주의라는 필멸의 계급의 적의 지배아래 노동대중을 몰아넣는 구실로만 봉사할 뿐이다.”


     트로츠키는 「Nashe Slovo」에서 전쟁은 국민국가 스스로 인류진보를 진전시키는데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룩셈부르크와 같은 방향으로 쓰고 있다.

    “국민국가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틀로, 계급투쟁을 위한 기반으로,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국가형식으로 스스로 성장했다."6)


     이보다 더 유명한 저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처럼 세계 강대국 사이의 유혈적 갈등은 이들 강대국들이 전 지구를 분할하고 제국주의적 먹이는 제국주의 도깨비들 사이의 폭력적인 숙원풀이를 통해 다시 분할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다.


     “검토하고 있는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는 지구의 마지막 분할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재분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분할이 가능하고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 정책이 지구상의 미점령지역의 장악을 완결지었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세계는 완전히 분할되어 미래에는 재분할만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소유자로서 주인없는 지역을 넘기는 대신 하나의 ‘소유주’에서 다른 소유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임을 말한다.”7)

     

    같은 책에서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를 “기생과 쇠퇴” 또는 “소멸해가는 자본주의”로 특징지우고 있다. 기생적이라는 의미는 특히 영국의 경우 공업국이 지구적 부에 생산적으로 공헌한 경향이 점점 금융자본과 식민지로부터 빨아들인 초과이윤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비판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금융투기의 만개와 몇몇 강대국들의 탈공업화의 증거를 보면 직관의 요소를 담고 있다).  쇠퇴의 의미는 (레닌은 성장의 절대적 정체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으로부터 독점으로 기우는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부르주아 사회가 더 고도의 생산양식으로 그 자리를 양보할 필요성이 커졌음을 뜻한다.

     

    레닌의 「제국주의」라는 저술은 수많은 약점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는 겉으로 드러난 징표들의 기술에 가깝다. (“(제국주의를8) ) 정의하는 다섯 가지 특징들”은 특정 국가와 블록이 제국주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좌파들의 인용구이기도 하다.) 이는 룩셈부르크가 정의했던 것처럼 축적 과정에서의 현상의 뿌리로 다가가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다. 식민지로부터의 초과이윤으로 기생하며 사는 선진 자본주의 중심국가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제국주의 기획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계급 언저리의 “노동귀족”을 매수한다는 견해)는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 형식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커다란 간극을 남기고 있다. 더구나 독점시기(거대 사적연합이라는 의미의)는 무엇보다 전쟁과정을 통해 이미 국가자본주의의 엄청난 성장이라는 자본주의 쇠퇴의 “고도의” 표현으로까지 전환되었다.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분명히 부하린이 했는데, 그는 “제국주의 국가의 시대”에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삶의 총체가 무엇보다 경쟁하는 제국주의와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기구에 의해 삼켜져버렸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인물 중 하나였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국가에 대한 총체적 대조를 해보면, 제국주의 국가는 그 기능의 복잡성의 엄청난 증가와 사회의 경제적 삶으로의 격렬한 침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전반적인 생산영역과 전반적인 상품순환영역을 지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혼합기업의 중간유형은 순수한 국가규제로 대체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중앙집중화 과정은 더욱 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을 위해 금융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배계급의 상이한 하위집단을 제거하고 그들을 단일한 금융자본주의 집단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거대한 국가기업의 주주 또는 동업자가 되었다. 착취의 보존자와 방어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국가는 착취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직접 맞부딪치는 단일한, 집중화된 착취조직으로 전환된다. 시장가격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는 노동력의 보존을 위해 충분한 일정한 배급량을 할당받는다.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관료주의는 그 중요성과 권력이 꾸준히 성장하는 군사당국의 입장과 전적으로 발맞추어 기능의 조직화를 완수한다. 국민경제는 군사적 방식으로 구성되고 거대하고 규율있는 육군과 해군을 가진 국가로 흡수된다. 노동자는 그들의 투쟁에서 이와 같은 괴물 같은 기구의 무소불위와 맞서야 하며 그들의 모든 진전은 직접적으로 국가에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범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착취에 대항하는 반란은 부르주아지의 국가조직에 맞서는 직접적 반란의 의미를 지닌다.”9)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와 전쟁경제는 분명히 뒤이은 세기의 근본적 특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괴물의 전능한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부하린은 앞으로의 모든 중요한 노동자투쟁은 국가와 맞서는 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일한 깊은 부르주아지 국가를 파괴하고 그들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대체하는, 다시말해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구를 “폭발시키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결론짓는다. 이는 기존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데 대한 모든 가정들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뮨의 경험 이후까지도 이러한 가정들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고 이는 점차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적 입장이 되었다. 판네쿡은 1921년 부하린과 같은 입장을 취했고, 부하린은 레닌이 부하린을 아나키즘으로 넘어갔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응답을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이해할 필요성 때문에 끊임없이 진화하는 변증법에 다시 빠져들었고, 판네쿡과 부하린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결론은 10월 혁명전야에 쓴 「국가와 혁명」에 정식화되었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1917)」에는 맑스가 확신한, 경제모순에서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향한 추동을 말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은 이윤율 저하에 의해 발생하는 압력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시장 확대의 필요성에 인식을 포함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처럼 부하린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적 “지구화”의 과정이 통일된 세계경제를 창조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앞으로 쇠퇴의 길만이 남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전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적절한 임무는 적어도 큰 틀에서는 세계시장의 창조였다. 그리고 그 시장에 기반한 생산의 창조다.”10)

     

     이처럼 맑스주의를 호전적 진영의 어느 하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왜곡시키고, 현상유지로 되돌리기를 원했던 사회 쇼비니스트들과 중도주의자들에 맞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은 더 이상 진보적 자본주의는 없고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역사적 의제에 올랐음을 만장일치로 확인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


     역사적 시기의 똑같은 근본적 문제는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고양되는 국제적 물결의 절정의 지점인 1917년 러시아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소비에트로 조직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짜르의 제거가 그들의 근본적 문제의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발견했을 때, 사회민주주의의 우익과 중도파는 옛 짜르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2월을 합법적 혁명으로 주장한 모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의 숙원을 풀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비에트 대항권력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맞서 그들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주의가 충분하게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맑스의 저작물을 빠르게 훑어간 멘셰비키에 의해 이론적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너무나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과 볼셰비키는 역사적인 등넘기 놀이를 하는 모험주의자들의 일당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4월 테제」에서 레닌이 내놓은 응답은 항상 역사의 운동을 총체성으로 강조한 헤겔에 대한 그의 독해와 일치했다. 동시에 그 응답은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헌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혁명을 위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성숙해야 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출현은 이러저러한 국가만을 검토함으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제국주의 이론이 보여준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지구적 체제였으며 그 쇠퇴와 전복의 필요성 역시 지구적 규모에서 무르익는다.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이에 대한 충분한 증명이었다. 고립된 러시아 혁명은 있을 수 없고 러시아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봉기는 국제혁명을 향한 첫걸음일 뿐이었다. 이는 레닌이 망명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그를 환영하러 나온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한 폭탄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병사, 선원, 그리고 노동자 동지들. 동지들과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축하하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로 동지들을 만나 행복합니다. …칼 리프크네히트 동지의 법정소환에서 인민이 자본주의 착취자들에 맞서 그들의 무기를 들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 동지들의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11)


     혁명적인 국제주의 좌파가 코민테른 1차 대회에 함께했을 때 10월 혁명에 의해 속박을 푼 혁명적 격정은 최고조에 있었다. 1월 베를린에서의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분쇄되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잔인하게 살해되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건설되었다. 그리고 유럽, 미국의 일부와 남미는 대중파업이 움켜쥐었다. 그 때의 혁명적 열정은 1차 대회가 채택한 기본 텍스트에 실려 있다. 「독일공산주의당(KPD)」의 창립대회에서의 로자의 연설과 나란히 새 시대의 새벽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분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개혁을 위해 싸우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과 의회에의 참여를 통해 자본주의 내부에서 조직하는 작업은 근본적 존재기반을 잃었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전쟁뿐만 아니라 그 흔적 속에 남겨진 경제적, 사회적 혼돈으로 나타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위기는 소비에트로 조직된 권력을 위한 직접 투쟁이 현실적이며 긴급을 요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강령은 식민지와 반(半)반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유효했다. 더구나 이러한 새로운 최대 강령은 이전 시기동안 노동계급을 “대표”했지만 1914-17년 전쟁과 혁명의 검증이라는 역사적 검증이 적용되자마자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한 조직과 완전히 분리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개혁주의자,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노동자 운동의 우익이 아닌 자본의 시종으로 규정되었다. 1차 대회에서의 논쟁은 초기 인터내셔널이 혁명적 전투의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가장 대담한 결론에도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의 경험이 다소 다른 길을 걸었지만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이 더 이상 단순히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톱니로써 직접적인 반혁명의 장애물이 되었고, 노동자는 공장과 거리에서 조직의 평의회 형식을 통해 밖에서 조직화되고 맞서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독일, 스위스, 핀란드, 미국, 영국과 기타 국가들의 대표들 증언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계급투쟁이 작업장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살아있는 중심부는 코민테른의 공식문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투쟁에 단순히 관련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의 권력을 사보타주하는데 사용된 지배계급의 직접적 무기였던 도구인, 의회의 빈껍데기와는 날카롭게 대조되었다. 이는 1917년 러시아와 1918년 독일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비슷하게 코민테른의 “선언”은 민족투쟁이 과거 시대의 산물이고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는 경쟁하는 제국주의적 이해의 단순한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혁명적 결론은 새로운 시대의 새벽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다수를 따르게 한 것처럼 보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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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대회의 논쟁

      

    1914년으로부터의 경우처럼 역사가 가속화할 때, 1-2년은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21년 6월 코민테른 3차 대회 때까지 창립대회에서 보인 혁명으로의 즉각적 확장에 대한 희망은 가장 심각한 타격으로 고통 받았다. 러시아는 3년 동안의 내전으로 소진되었고 적군이 백군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켰지만, 정치적 희생은 극에 달했다. 소비에트가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상실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혁명”국가의 관료화가 심화되면서 가장 계급의식이 강한 노동자의 대다수는 목숨을 잃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엄격함과 적색 테러의 파괴적 과잉으로 마침내 노동계급의 공공연한 반란을 자극했다. 소비에트의 부흥과 노동자 군사화와 첵카의 억압적 행위의 종식을 요구한 크론슈타트 선원과 노동자들의 무장봉기에 뒤이어 3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가에 육화된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 운동을 백군의 반혁명 표현으로만 바라보았고 무자비하고 유혈적으로 그 운동을 억압했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 기지의 고립 표현이었다. 패배는 패배를 낳았다. 헝가리와 바바리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위니펙과 시애틀의 총파업, 레드 클리데사이드(Red Clydeside), 이탈리아 공장점거, 독일의 루르 봉기, 그리고 기타 수많은 대중운동들의 패배가 그것이다.

     

    점점 그들의 고립을 깨달으면서 러시아에서 권력에 매달리는 당과 그 밖의 기타 공산주의당들은 폴란드로의 적군의 진주, 1921년 3월 독일에서의 3월 행동 등 이 혁명을 확산시키는데 처절한 수단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는 노동계급 권력에 진정으로 필요한 계급의식과 조직의 대대적인 발전 없이 혁명의 속도를 강제하는 실패한 시도였다. 그 동안 전쟁으로 피를 흘리고 깊은 경제적 위기 징후를 보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을 세계 산업 발전소와 채권자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서, 스스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화하는데 성공했다.

     

    코민테른 내에서 1920년 2차 대회는 이미 이와 같은 연이은 패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대회에서 배포된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의 발간으로 상징화되었다.1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살아있는 경험을 드러내는 대신 볼셰비키의 경험, 또는 그 경험의 특정한 유형이 보편적 모형으로 제시되었다. 볼셰비키는 1905년 이후 듀마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혁명적 의회주의”의 전술은 모든 곳에서 유효했고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최근에 형성되어 프롤레타리아 삶의 모든 징표를 잃지 않고 있었다 … 그러므로 모든 국가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부패한 관료로부터 노동조합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이러한 노동조합과 의회전술의 정식화와 함께, 이를 거부하는 좌익 공산주의의 경향에 확고한 반대를 밀고 나갔으며 독일의 「통합사회민주당(USPD)」과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당(PSI)」과 같은 당들을 통해 대중정당으로서 공산주의 당들을 설립하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1921년은 단기적 성공과 수적인 성장을 위해 원칙과 장기 목표를 희생하는 기회주의로 편향되는 증거를 더욱더 보이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사회민주주의당을 명백하게 비판하는 대신, “그들의 지도자들을 싸우도록 강제”하거나 그들의 노동계급 멤버쉽을 드러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궤변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공작정치는 대중을 어떻게든 계급의식화되게 하려는 간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술은 “통일전선” 전술의 선포를 하게 만들었고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의회에서의 담합을 하는, “노동자 정부”의 무원칙적 슬로건으로까지 나아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배후에는 “소비에트”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와 일시적 타협을 하여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버티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1917년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저주받은 비밀외교의 실행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을지라도 말이다. (1922년 “소비에트” 국가는 일 년 후 공산주의 노동자들을 살상하는 데 사용된 무기를 공급하는 비밀협정을 독일과 맺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멀어지고,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되는 퇴행으로의 길을 걷게 되는 자본주의의 현상유지로 통합되는 궤적의 가속화를 의미했다.

     

    이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모든 명료함과 모든 심각한 논쟁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러한 기회주의적 경로에 대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응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는 견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1920년의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강령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만든 역사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14)

     

    같은 해에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좌파의 주장은 의회 선거운동이 이전시기에서는 입증되었지만, 혁명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낡은 실천을 입증시키지 못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공식적” 목소리조차도 새로운 시대의 특정과 결과를 이해하는 진정한 시도를 했다. 
     

    1921년 6월, 7월의 3차 대회에서의 트로츠키가 제출한 세계 정세에 대한 보고와 테제는 신용과 의제 자본으로 뛰어오른 새로운 시대에서 생존을 보증하기 위해 심대하게 몸살을 앓는 자본주의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분석을 내놓았다. 전후 회복의 첫 번째 징후를 분석하면서 트로츠키의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보고와 코민테른의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사실과 호황 자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째로 경제적 원인이 있다. 전쟁 후 국제적 연결망은 극히 단축된 형식이지만 시작되었고 모든 상품 유형에 대한 보편적 수요가 있었다. 둘째, 정치적, 금융적 원인이다. 유럽 정부들은 전쟁 이후 따라와야만 하는 위기에 대한 숙명적 두려움이 있었고 전쟁이 만든 가공적 호황을 동원해제의 기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 정부들은 계속해서 엄청난 화폐량을 유통시켰으며 새로운 공채를 발행하고 이윤, 임금, 그리고 빵 가격을 규제함으로써 동원이 해제된 노동자의 소득을 기본국가기금으로 지급했으며 국가의 가공적인 경제부흥을 괴했다. 이처럼 이러한 간격 사이에 의제 자본은 특히 산업이 침체에 바진 국가들에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 이후 자본주의의 전체 생명은 그 자신의 경제법칙을 어기면서 스스로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이와 같은 진단을 입증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텍스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 자본주의는 새롭고 더욱 파괴적인 전쟁을 분명히 풀어놓을 것이라는 이해를 심화시키려고 했다.(영국이라는 옛 권력과 미국이라는 떠오르는 권력 사이의 절박한 충돌이라는 연역이 충분한 근거 없이도 넓게 퍼졌을지라도) 그러나 이와 같은 문서에 담겨진 가장 중요한 명료한 사실은 새로운 시기의 도래가 쇠퇴, 공공연한 위기, 그리고 혁명이 동시적임을 의미하지 않았고 1919년에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다”는 원래의 정식화에서 보였던 모호함은 자본주의가 동시에 “마지막” 경제적 위기와 혁명적 갈등의 끊이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결론이었다. 이러한 진전된 이해는 1921년 6월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텍스트 “3차대회의 주요 교훈”에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계급은 생산에 뿌리박고 있다. 계급은 노동의 사회조직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 계급은 더 이상의 존재에 필요한 조건이 생산력의 향상, 다시 말해 경제의 더 나아간 발전과 모순될 때 그 기반을 잃기 시작한다. 이것이 현시기에 부르주아지가 발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살아있는 근거를 잃고 기생적이 된 하나의 계급이 즉각적 죽음으로 내모는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가 계급규칙의 기초를 구성하지만, 각각의 계급은 국가 - 정치기구와 조직의 수단인 군대, 경찰, 당, 법원, 언론 등등의 수단에 의해 스스로 권력을 유지한다. 경제적 기초에 관련을 맺어 “상부구조”를 대표하는 이러한 기구들의 도움을 받아, 지배계급은 사회 발전에 대한 직접적 제동장치가 된 후 수년, 수십 년 동안 스스로 권력을 영속화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긴 시간을 견디지만 한물간 지배계급은 그가 지배하는 국가와 인민을 그들과 함께 끌어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계속해서 쇠퇴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순수한 기계적 개념은 몇몇 특정 그룹의 동지들이 핵심에서 오류를 범하는 이론, 즉, 영웅주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수동성의 벽”을 흔드는 주도하는 소수라는 그릇된 이론을 만들게 한다. 투쟁의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의해 수행되는 중단 없는 공격을 말하는 그릇된 이론, 무장봉기의 방법을 적용하며 수행되는 부분 전투를 말하는 그릇된 이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론들이다.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한 요소는 「공산주의」라는 비엔나 저널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술 이론들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명하다.”

     
    이처럼 쇠퇴의 징후는 경제적 수준에서의 회복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후퇴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1919-21년의 패배가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혁명의 임박한 순간이 아닌 혁명의 시대를 마주하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할 뜨거운 문구가 있었다. 3차 대회가 채택한 별도의 텍스트인 “전술에 대한 테제”는 매우 정확하게 노동계급의 확신과 자기의식을 세우기 위해 공산주의당들이 방어적 투쟁에 참여할 필요성을 밀고 나갔으며, 쇠퇴와 혁명이 결코 동의어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이러한 입장은 「3월 행동」의 반(半)반란의 접근방식을 대체로 정당화한 “공격의 이론”을 거부하는 필요성에 입각했다. 객관적 조건의 성숙이라는 전제 아래 공산주의당이 대중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다소 영구적이고 봉기적 공격을 해야 한다는 이러한 이론은 벨라 쿤과 기타 혁명가에 의해 독일 「공산주의당」 내에서 좌파에 의해 견지되었으며, 이는 이 점에 대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과 그 주위의 세력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았더라도 「공산주의 좌파」가 주장한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15)

     

     이러한 면에서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선언의 개입은 매우 교훈적이다. 「전술에 대한 테제」에서 “종파적”이라는 딱지에 근거해 보면,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태도는 책임있는 소수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그 시기에 그 개입이 곤혹스럽게 제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공식라인의 지지자들로부터 방해와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KAPD는 모든 일정에서 스스로 충실한 부분이었으며 그 대표들은 그들이 참여한 곳에서 동의의 지점을 인식하는 데 기꺼이 노력했다. 그들은 종파적 태도의 본질인 스스로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6)

     

    보기를 들어 세계정세에 대한 토론에서 다수의 KAPD 대표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재구성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통제를 다시 획득하고 있다는 트로츠키 분석의 많은 부분에 동의했다. 따라서 시맨은 특히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을 잠정적으로 제쳐두는 국제 부르주아지의 능력을 강조했다.

     

    트로츠키의 보고와 세계정세에 대한 테제가 대체로 “공격성의 이론”의 편에선 세력에 대한 반박으로 정식화되어 있음을 전제했을 때, 여기서의 함의는 KAPD가 더 이상의 자본의 안정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투쟁이 어느 순간에도 공격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견해의 관점은 수많은 개입에서 명료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세계의 경제 정서에 대한 트로츠키의 발표에 대한 응답에서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어떻게 트로츠키 동지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 모두가 그의 입장에 동의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작은 위기와 순환적이고 순간적인 소생이라는 짧은 시기 사이의 관계를, 다른 한 편으로는 거대한 역사적 시기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의 부흥과 쇠퇴의 문제를 제시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전에 상승하고 있었던 큰 곡선이 지금은 저항할 수 없이 하강하고 있고, 이러한 넓은 곡선 내에서 일반적 하강 속에서 아직 동요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17)

     
    이처럼 “죽음의 위기”에 대한 KAPD의 견해에 모호함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쇠퇴의 징후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생명의 급작스럽고 명백한 몰락을 의미했다.
     같은 의미로 코민테른의 전술에 대한 헴펠의 해석은 “종파주의적” KAPD가 방어적 투쟁을 거부하고 매순간의 공격적 투쟁을 요구했다는 비난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 행동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어떠한 부분적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개개 행동과 개개 전투를 말하는데 왜냐하면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의 이러한 전투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전투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요구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독일과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40-50년 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효과에 종속되어 왔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투쟁에 익숙해왔다. 슬로건은 부분적 행동에 상응해야 한다. 보기를 들어보자. 한 기업에서 또는 다른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날 때, 그것은 특정한 지역에 한정된다.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한 투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꼴사나울 것이다. 슬로건은 주어진 상황에서 기대될 수 있는 정도로, 힘의 균형에 적응해야 한다.”18)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개입의 뒤에는 코민테른이 자본주의 생명에서 새로운 시기와 그에 따른 계급투쟁이 시작됐다는 이해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KAPD의 주장이 있었다. 일시적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견해에 동의하는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테제에 표현되지 않았던 것은 총체성으로 보인 흥성하는 자본주의의 이전 시기와 비교되는 쇠퇴의 시기의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다.”19)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후로 생존할 것이라는 방식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본은 경제를 파괴함으로써 그 힘을 재구성한다.”20)


     이러한 전망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다음 세기에 체제로서 지속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전술에 대한 토론에서 헴펠은 코뮤니스트가 특히 전술로서 노동조합과 의회문제를 밀고 나가야 하는 정치적 입장에 관련하여 새로운 시기의 의미를 도출한다. KAPD가 때대로 동질화되었던 아나키스트와 대조적으로, 헴펠은 의회와 노동조합의 활동은 이전시기에서 옳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옛 노동자 운동의 임무를 회고해 보면, 더 구체적으로 혁명의 발발시기 이전의 노동자 운동을 돌이켜보면, 한 편으로는 그 임무는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인 당 덕분에 부르주아지와 관료주의 노동계급의 대표에게 남겨놓은 의회와 기구에 대표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임무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이는 노동계급에게 이득이었고 옳았다. 그들 편에서 보면 노동계급의 경제 조직은 자본주의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개선하는 과업이 있었고 투쟁을 밀고 나가 투쟁이 끝났을 때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쟁 전의 노동자 조직의 임무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졌고 다른 임무가 조명을 받았다. 노동자 조직은 더 이상 임금 인상이나 개선을 위해 의회에서 노동 계급을 대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투쟁에 한정되지 않았다.”21)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과정에 머물렀던 모든 노동자 조직이 그들의 혁명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투쟁에서 스스로 가면을 벗는 경험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22)
     

    그리고 이것은 노동계급이 왜 프롤레타리아 자기조직화의 필요성과 국가와 자본에 직접 대응할 필요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창출할 필요성이 있는지를 말한다. 이것은 소규모 방어적 파업과 더 넓은 대중파업 모두에게 진실이었다. 베르히만은 노동조합을 국가의 부분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옛 노동조합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근본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파괴를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어의 최악의 의미대로 노동조합이 혁명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구가 되었음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23)
     

    비슷한 맥락에서 샤크스는 대중 정당 개념으로의 퇴행과 사회민주주의 당에 대한 공개편지의 전술을 모두 비판했다. 이들은 한물간 사회민주주의 실천과 조직 형식으로의 퇴행이거나 더 나쁘게는 그들 자신을 적에게 넘겨준 사회민주주의 당으로의 퇴행이었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승자에 의해서거나 적어도 승자로 나타나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다. 3차 대회 이후 수년 동안 공식적인 공산주의당들은 수백만 노동자들을 명령할 수 있었던 대규모 조직으로 남았다. KAPD는 곧 수많은 요소로 분열되었고 그 중 소수가 1921년 모스크바에서의 대표들이 표현했던 명확성을 유지했다. 진정으로 종파적인 오류가 특히 KAPD의 호르터 주위의 에센 경향이 “제4인터내셔널” (KAI 혹은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세우려고 한 성급한 결정을 하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그때 혁명의 후퇴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코민테른의 퇴행에 맞서 싸우는 국제적 분파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코민테른의 미성숙한 파괴는 10월 혁명의 본질을 점점 부르주아 혁명으로 거부하는 회귀를 수반했다. “죽음의 위기”의 시기에 임금 투쟁은 기회주의적이라는 KAI의 슈뢰더 경향 역시 종파주의적 견해였다. 다른 경향들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평의회주의”로 알려진 경향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혁명적 전위의 보다 일반적인 약화와 분열의 표현은 증가하는 패배와 반혁명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영향력 있는 대중조직으로서의 공산주의당의 유지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산물이었지만 이러한 당들은 파시스트와 민주적 학살자와 함께 그들의 전위성을 등치시키는 끔찍한 특수성을 보였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쇠퇴이론에 뿌리를 내려 혁명의 최고점에 만들어진 산물인 KAPD와 이탈리아 좌파의 가장 명료한 입장은 소규모이지만 고통스럽게 고립된 혁명가 그룹들의 참을성 있는 노력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반혁명의 안개가 걷히면서 이러한 입장들은 새로운 혁명 세대의 출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며 그들은 다음 혁명당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 성과로 남아있다.

     

    옮긴이|오세

     

     

    <주>

    1.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ICC), 「International Review」, 2010, 4th Quarter, 143, 15-21

    2. 1914년 말 콘스탄틴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 피터 네틀 「로자 룩셈부르크」, OUP, 1969

    3. 그러나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 운동 내의 현재의 가능한 시도들을 더 탐구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4. “80년 후 레닌의 헤겔과의 조우: 비판적 평가”, http://thecommune.wordpress.com/ideas/lenins-encounter-with-hegel-after-eighty-years-a-

    critical-assessment/

    5.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1915, 전집, 21권

    6. Nashe Slovo, 1916년 2월 4일

    7.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VI, “강대국 사이의 세계분할”, 전집, 22권

    8. 역자 주

    9. “제국주의 국가 이론에 대하여”, 1915

    10.  맑스가 엥겔스에게, 1858년 10월 8일, 「전집」 40권, 347쪽, Lawrence and Wishart

    11.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1권, “짜르의 전복”, 15장, “볼셰비키와 레닌”, 296쪽, Pathfinder, 1980 에서 인용

    12. 1차 대회에서의 이러한 토론을 더 자세하게 보려면, 「국제평론」 123호 “역사    유물론의 핵심인 데카당스 이론” 제4부를 볼 것.
    (http://en.internationalism.org/ir/123_decadence)

    13. 우리는 이 텍스트가 호르터의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 대한 답변이나 비판없이 쓰여지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한다.

    14. “거대한 차원의 유전이라는 벼락맞은 인상을 준 엄청난 사회·경제적 효과와 함께, 세계 전쟁으로부터 빚어진 세계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신들의 황혼]이 가깝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한 부문이었던 주기적 경제 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다. 예기치 못할 정도의 계급적대의 무서운 분출, 모든 계층의 인민의 일반적 참상이라는 사회적 유기체 전체의 격동적 경련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운명적 경고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점증하는 적대감,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 이 전에 무관심했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더욱 퍼지는 의식이 해결될 수 없음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실패를 경험하고 있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의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견디기 힘든 연장은 야만으로의 퇴보인가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인가라는 역사적 대안 앞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내려놓는 혼동을 만들었다.”

    15. 보기를 들면 앞의 각주에서 인용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강령의 서문은 자본주의의 마지막이며 명백한 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반란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3월 행동」 동안의 몇몇 KAPD 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범주에 속했다. 보기를 들면 총파업에 참가하도록 미고용노동자를 이용한, 「독일통합공산주의당(VKPD)」와의 무비판적 동맹이라든지, 막스 호엘츠와 기타가 이끄는 “독립” 무장세력과의 모호한 관계맺기를 들 수 있다. 또한 3차 대회에서의 헴펠의 개입을 보라(La Gauche Allemande, 41쪽). 여기서 「3월 행동」은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는 없었지만 일관성을 상실한 입장인, 정부의 전복이라는 슬로건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에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못한 어던 종류의 “노동자 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개입에 대한 영문 번역은 www.libcom.org, “interventions by the KAPD at the 3r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21), parts1-5“를 볼 것)

    16.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에 대한 헴펠의 태도는 이러한 조류의 진정으로 혁명적 표현으로 함께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종파적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La Gauche Allemande, 44-45쪽을 볼 것)

    17. 「La Gauche Allemande」, Invariance, 1973, 21쪽

    18. 「La Gauche Allemande」, 40쪽

    19. 윗 글, 21쪽

    20. 윗 글, 22쪽

    21. 윗 글, 33쪽

    22. 윗 글, 34쪽

    23. 윗 글,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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