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
    •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100년 전, 1919년 1월 15일 -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그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부인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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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비극의 종말>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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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로자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인용한 문헌>

      1. Takahashi, Shoichi <로자 룩셈부르크>

      2. ICC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팸플릿]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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