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코뮤니스트 10호] 코민테른과 4차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
  • 조회 수: 4494, 2019-12-27 10:20:01(2019-12-26)
    •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코민테른과 4차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

    •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


    • kai.JPG

    • <사진 >  코뮤니스트 노동자 인터내셔널  :  평의회 인터내셔널인가,  지도부 인터내셔널인가?  (1922년, 코뮤니스트노동자당 발간)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이 창설될 당시 좌파의 입장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노동조합 문제에 있어서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강령을 작성하고 당 대회에서 제시했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매우 명확하고 범주적이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노동자의 조직이 아니라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확고한 옹호 기관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노동조합의 파괴 투쟁을 포함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이점에 동의한다.”

     

    한편, 의회 문제에 있어서 당 대회는 당시 곧 있게 될 선거의 참여라는 스파르타쿠스동맹(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 요기헤스 등)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 투사들이 암살된 후 새로운 지도부(레비<Levi>, 브란들러<Brandler>)는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해서 처음에는 좌파(대다수로 남아있던)에 양보를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9198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프랑크푸르트 대회부터, 독립사회민주당과의 친교 회복을 원했던 레비는 의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10월의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는 계략을 써서 반노동조합 반의회주의적인 좌익 대다수를 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 대다수는 승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당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 내부에서 거대한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 암스테르담 서기국의 건설을 추진하던 네덜란드 좌파 투쟁가(특히 호르터와 판네쿡)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던 인터내셔널에 의해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활동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일에 임명되었다.

     

    그 뒤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204월 제명된 투쟁가들은, 그 해 2월의 독일코뮤니스트당 대회가 그들의 재입당을 거부했던 것, 그리고 313일에서 17일 사이에 있었던 발생한 카프-구테타 동안 독일사회민주당을 향해 당이 보였던 유화적인 태도에 직면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ommun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 KAPD)을 창설하게 된다. 그들의 접근법은 (노동조합과 의회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전환의 거부에 관한 ) 좌파의 테제가 승리를 거두게 되는 국제대회를 2월에 조직했던 암스테르담 서기국의 지원으로 강화되었다. 여기서 특히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의 일면은 영국의 코뮤니스트들이 노동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표현되었었다.

     

    새로운 당은 네덜란드코뮤니스당(CPN)의 좌파 소수(호르터와 판네쿡에 의해 주도된)의 지지를 받아 강화되었는데, 이 좌파 소수는 자체의 신문에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실었다. 그렇다고 해서 판네쿡이 (192075일자 편지에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비판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혁명적 생디칼리즘에의 그 어떤 타협에 대해서도 경고하면서) ‘유니언(Unionen)’에 관한 당의 입장을, 무엇보다도 당의 기초 단위 안에, 그가 괴물 같은 탈선으로 여긴 민족적 볼셰비키경향이 존재하는 점을 비판했다. 이 순간,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면한 모든 결정적인 문제들(노동조합, 의회, , 사회당에 대한 태도, 러시아혁명의 본질 등등)에 있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다수에게 영감을 불러 넣었던 네덜란드좌파(그리고 특히 판네쿡)가 노동자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81일에서 4일 사이에 개최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대회는 이러한 지향에 찬성을 선언했고 그 순간에 민족적 볼셰비키는 당을 떠났다. 그리고 몇 달 후 연방주의자 인자들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코민테른에 참여하는 것에 적대적으로 되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판네쿡, 호르터 및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코민테른에 남아서 인터내셔널의 점증하는 기회주의적 편향에 대항해 투쟁할 결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192010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을 위해 2, 얀 아펠(Jan Appel)과 프란츠 융(Franz Jung)으로 된 대표단을 러시아로 파견했다.

     

    한편 이들로부터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다른 2명으로 된 대표단을 다시 파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오토 륄레였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고통받고 있던 재앙적인 상황과 정부기구의 관료주의화 과정에 직면한 그들은, 비록 그 대회에서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표결에 참여하도록 위임되었에도 불구하고 대회에 불참할 것을 결심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레닌은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 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를 작성했다. 이 팸플릿 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레닌이 코뮤니즘 안에서 좌파 교조주의의 실수는 우파 교조주의의 그것보다 천 배나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다.” 라고 썼다는 것이다.

     

    한편에는 코민테른과 볼셰비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입장 양쪽 모두에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인터내셔널에 합류시키고 독일코뮤니스트당 안으로 수용할 진정한 의지가 있었지만, 이 가능성은 192012월 독일코뮤니스트당이 재편되어 독립사회민주당의 좌파와 함께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Vereingte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 VKPD)을 형성함으로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재편 과정을 코민테른의 모든 좌파 경향은 반대했었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동감하는 당의 지위를 획득해서 코민테른의 행정위원회에 상설 대표를 가졌고, 19216월 개최된 제 3차 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이러한 협력은 특히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이 부추긴 모험적인 공격이었던 ) ‘3월 행동이후 그리고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좌파는 처음에는 소련 정부의 선동에 따라 이 반란이 진정 백군 측의 작업이라고 믿고 진압을 지지했었다)으로 인해 심하게 악화되었다. 동시에, 네덜란드코뮤니스트당(CPN)의 우파 지도부(네덜란드의 레비<Levi>라고 불린 윈쿱<Wijnkoop>)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서 당 규율에 위배는 방식으로 좌익 투쟁가들을 제명하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그해 9월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모델로 해서 새로운 당,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을 창설하게 된다.

     

    코민테른의 제3차 대회에서 채택된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으로 통합될 최후통첩이 제출되면서 단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19217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지도부는 호르터의 지원을 받으며, 코민테른의 모든 연결을 단절하고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요구는 9월에 계획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대회보다 두 달 먼저 제기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성급한 결정이었다. 9월 대회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에 대해 토론이 있었고(베를린의 투쟁가들 그리고 특히 얀 아펠은 그 안건에 반대했지만) 대회는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정보국의 설치를 결정했다. 이 서기국은 19224월에 가서야 창립대회가 열리게 될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마치 이미 창립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 경향(Berlin tendency)’ 다수파와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을 놓고 벌이는 투쟁을 거부했던) ‘에쎈 경향(Essen tendency)’으로 분열되었다.

     

    오직 에쎈 경향만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의 강령을 작성한 호르터와 함께 그 창립대회에 참여했다. 참여한 그룹은 수적으로 적었고 매우 한정적인 역량만을 대표했다. 에쎈 경향 외에,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 불가리아 코뮤니스트좌파, 영국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Communist Workers´ Party: CWP), 오스트리아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이 참여했는데, 이를 두고 베를린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포템킨마을(, 과장된 겉치레)’이라 묘사했다.

     

    결국 이 잔류파 인터내셔널은 구성요소들이 없어지거나 차츰 뒤로 물러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에쎈 경향은 여러 번의 분열을 겪었다.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처음에는,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 경향에 우호적인 한 경향의 출현 때문에, 그런 다음에는 정치 원칙보다는 파벌 대립에 기반을 둔 내부적인 충돌에 의해 분리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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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상,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이런 유감스럽고 극적인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코민테른(CI) 창설의 발판 역할을 했었던 혁명 물결의 썰물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호르터와 그의 지지자들의 오류는, 하나의 국제적인 좌파코뮤니스트 경향으로 재편성될 수 있는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이 코민테른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 인위적으로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실수는 독일 혁명운동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21년 즈음 세계혁명의 퇴조는 유럽에서 명백했고 이러한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경로가 여전히 혁명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라는 이론을 가진 호르터와 에쎈 경향의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내셔널(KAI) 선언에는 특정 논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틀렸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독일과 네덜란드좌파(The German and Dutch Left), 5, 4.d)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네덜란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의 최종적인 실패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사이에 힘의 균형의 진화에 대해 가능한 선명한 전망을 혁명가들이 가질 필요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독일-네덜란드좌파가 그렇게 지체된 이후에라도 혁명 물결의 퇴조를 의식하게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호르터는 그가 사망하는 날 저녁에 쓴 마지막 글에서 자신의 실수를 파악하고 동지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런 오류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격려했다.” (같은 책)

     

    정리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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