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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2
  • [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코뮤니스트좌파

     

     

    4. 코민테른과 코뮤니스트좌파의 대립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스트에 대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코뮤니스트좌파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코뮤니스트좌파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反)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코뮤니스트좌파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저널) “코뮤니즘(Kommunismus)”으로 이동했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코뮤니즘”은 코뮤니스트좌파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했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코뮤니스트좌파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反)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보르디가의 반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코뮤니스트좌파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했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하였고, 노동자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했다. 코뮤니스트좌파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대두했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사회주의노동자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코뮤니스트좌파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결연히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당에서도 나타났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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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참가한 영국 대표단 (실비아 팽크허스트). 1920년 7월>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얀 아펠(Jan 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넸다. (울프하임, 라우펜버그, 륄레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KAPD와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아펠(Appel)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륄레(Otto Rühle)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륄레(Rühle)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륄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륄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더욱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를 KPD(독일코뮤니스트당)와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 정당"으로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아펠(Appel), 슈왑(Schwab), 메이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판네쿡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기저적인 쟁점들에 관심을 두게 된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즘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다. KAPD내에서 룰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했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소련과 서유럽 상황은 급변했다. 1920년 소련은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유럽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다수 국가와의 무역과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하였고, 유럽에서 혁명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되었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 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 버려 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5. 보르디가의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권주의파를 대표하여 보르디가 동지가 작성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 의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정치적 대의제도의 형태이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에 따라 비판한 결과는, 국가 대의기구 선거에서 모든 사회계급의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부 기관이 지배적인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위원회가 되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투쟁 기관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조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코뮤니스트는 노동자계급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무장투쟁만이 노동자계급을 그 목표에 데려다줄 것이다. 코뮤니즘 경제 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민주주의 기구들을 폭력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 즉 노동자평의회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착취 계급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대의기구를 가진 정부 체제를 세운다. 의회제도의 폐지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과제가 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 사회 형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소유보다도, 관료적 국가기구보다도 앞서 타도되어야 한다.

     

    3. 지방정부 기관 역시 똑같이 타도해야 한다. 지방정부 기관을 이론적으로 국가 기관에 대립되는 것처럼 제기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지방정부 기관은 부르주아 국가의 메커니즘과 같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 역시 파괴하고 지방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로 대체해야 한다.

     

    4. 지금, 이 순간 정신적·물질적으로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코뮤니스트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낡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의 배신이 달콤하게 유포시킨 환상과 편견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질서가 더 오랫동안 지배했고 대중의 관습과 사고에 뿌리내린 나라들에서 이 과제는 특별히 중요하며, 당연히 혁명을 준비하는 문제 중에서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5.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이 아직 까마득히 멀어서, 혁명을 직접 준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아직 계급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시기에, 선거와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전과 선동, 비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혁명이 이제 막 시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들이 아직 형성 단계에 있는 대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에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사태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6. 세계혁명의 종결과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조직에 끼친 결과,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실현한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 배신자들에 반대하여 건설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시작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코뮤니스트의 혁명적 대의를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의 선명성을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최종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선거를 거부하도록 선전할 필요성이 있다.

     

    7.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이라는 혁명적 개념이 운동의 중심 목적으로 등장한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는 당의 모든 정치적 활동은 바로 그 목적에 바쳐져야 한다. 적대적인 정당 사이의 모든 충돌, 권력 장악을 위한 모든 투쟁이 선거 캠페인과 의회 토론,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메커니즘의 틀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거짓, 그 부르주아적 거짓과 단호히 절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에게 선거에 참여하라고 호소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과 나란히 활동하는 전통적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서는, 착취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들이 의회라는 같은 지반 위에 등장하는 광경을 끝장내지 않고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 낡은 사회주의당의 극단화된 의회주의 실천은 선거 캠페인과 의회 활동이 정치 행동의 모든 것이라는 위험한 개념을 유포시켰다. 다른 한편 그런 배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혐오감은 정치 행동과 당 활동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생디칼리즘적이고 아나키스트적 경향에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다. 따라서 코뮤니스트당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노동자평의회에 직접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다면,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을 선전하는 데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9. 선거 캠페인 및 그 결과에 부여하는 지나치게 큰 중요성, 당이 자신의 모든 능력, 인력, 언론, 재정을 상당 기간 거기에 쏟아붓는다는 사실은, 우선 집회에서 모든 연설과 이론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선거야말로 코뮤니스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심 활동이라는 확신을 강화한다. 또한 그로 인해 혁명적 활동의 합법·비합법적 요구와 완전히 모순되는 전문성을 당 조직에 부여함으로써 혁명을 조직하고 준비하는 모든 과제를 거의 완전히 포기하게 만든다.

     

    10. 다수결에 의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정한 당에 선거 캠페인에 계속 참여하게 하는 것은 사민주의적 인자들을 걸러내는데 필요한 과정을 가로막는다. 그들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의회와 기타 민주주의 기관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실제 성격은 반대당들이 비판으로부터 의회주의 원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의회주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선거 과정의 공식 절차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 발언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제도의 기본 원리라는 공통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 그 규칙의 미묘함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의회제도 내부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과 똑같이 점점 더 투표수와 의석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당이 의회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주> 코뮤니스트의 의회 전술에 대해 논의한 8차 전체회의에서는 트로츠키와 부하린이 기초한 위원단의 테제에 대해 부하린과 볼프슈타인이 설명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의 보르디가가 자신이 제출한 이견 테제를 설명한다. 위원단의 테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 이후에 혁명적 의회 활동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으며, 따라서 의회를 활용하는 전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르디가는 프롤레타리아트 대중투쟁의 시기에 코뮤니스트가 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해악적인 결과만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6.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

     

    1918년부터 계속,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력은, 그 정상에 볼셰비키당이 앉아있는 국가기구에 의해 제한되고 억압되어 왔다. 권력 장악 후, 볼셰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기관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 자신을 통치 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평의회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20년대 초의 트로츠키의 저작 『테러리즘과 코뮤니즘(the Terrorism and Communism)』 - 크론슈타트 학살과 같은 행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이미 포함하고 있던 비극적 저작 – 에서 (노동의 군사화와 함께)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전망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바로 그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들의 의회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역사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전적으로 당대의 질서가 되도록 만든 시기에, 코뮤니스트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표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트로츠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언된 ‘대표자’가 되고 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비록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게 될지라도,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 자체는 당과 국가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러시아 국가는 평의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혁명의 힘을 파괴하고 반혁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과 나란히,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공동전선의 개념, 대중 정당을 통해 최소 강령을 보호한다는 생각, 노동조합 과업의 필요성, 혁명적 의회주의 입장 등을 발전시켜갔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저항하며 코뮤니스트 원칙을 그대로 지키려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고 이러한 실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전술’과 원칙 사이의 차이는 제2 인터내셔널의 안에서 그랬던 만큼이나 발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이해를 항상 염두에 두기보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더더욱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었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선택했을 때, 그 조종을 울렸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 옹호한 이러한 테제들은 단지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볼셰비키당은 반혁명의 가장 유순한 도구가 되었다.

     

    그들의 계급은 1927년 이후 국제적인 수준에서 파괴되었고, 세계 혁명의 요새는 점차 더욱더 고립되어 반혁명의 요새로 변형되어갔다. 그들의 국제 조직은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도입한 순간에 결정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점점 더 고립되어가던, 영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동지들은 추방의 고통 아래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의해 가장 비열한 종류인 중도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과 합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파괴적인 타격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굴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투쟁을 계속할 충분한 전투적 용기와 혁명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점진적인 퇴행은 가장 건강한 혁명적 인자들 사이에 분출을 촉진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해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은 조직적이고 일관적인 국제적 반대파를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다. 세계의 일부(멕시코에서 아시아까지, 물론 러시아를 포함하여)에서 그들의 출현은, 정치적이거나 조직적인 수준에서 진정으로 조정되지는 않았다. 비록, 특히 KAPD, 보르디가 분파, 팽크허스트 주위의 영국 동지들과 벨기에 좌파 등등 사이에서 눈에 띄게 많은 접촉과 교류가 있었지만, 『일 소비에트』(Il Soviet, 이탈리아 좌파의 기관지)가 좌파 흐름의 많은 문서를 출간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국제적인 접촉이 존재했었지만, 반혁명 충격의 무게와 힘은 좌익 분파를 심각한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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