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스트
  • [파리코뮨 150년] 혁명적 코뮨Ⅰ
  • 조회 수: 2347, 2021-04-28 19:31:39(2021-03-26)
  • [파리코뮨 150] 혁명적 코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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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적어도 새로운 시간은 준엄하다.

    승리를 손에 넣었다고 말할 수 있기에, 이를 갈아대던 일도, 불같던 기적 소리들도, 악취 나던 한숨들도 가라앉는다. 모든 더러웠던 추억들도 사라진다. 내 마지막 회한들도 달아나니, - 거지, 강도, 죽음의 벗, 온갖 낙오자들에 대한 질투도. - 저주받은 것들, 응징할 수 있다면!

    절대적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

    찬송가 따위는 없다. 그러니 의기양양하게 발걸음을 옮겨라. 힘든 밤이여! 메마른 피가 얼굴 위에서 먼지처럼 일어나고, 나의 배후에는 끔찍한 관목만이 있을 뿐!…… 영혼의 전투는 인간들의 싸움처럼 야만적이다. 정의에 대한 환시(幻視)는 신이 홀로 누리는 즐거움.

    하지만 지금은 전야(前夜). 흐르는 모든 생기와 실제의 애정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새벽에, 열렬한 인내로 무장하고, 우리는 빛나는 저 도시로 들어갈 것이다.” (랭보,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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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파리코뮨은 18713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5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뮨의 진정한 비밀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2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때, 다시 한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깜짝 놀란 속물들의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뮨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코르쉬는 일평생 혁명적 실천 및 사회주의 모델의 발전에 관심을 쏟았다. 초기의 코르쉬는 노동자평의회 또는 소비에트를 진정한 사회주의적 기관으로서 지지했다. 레닌주의 시기의 코르쉬는 잠시 정당과 국가에 대한 레닌주의의 테제를 혁명적 실천의 결정적 수단으로서 수용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 기간에조차도 독일코뮤니스트당 내의 레닌주의 강경파로서였다. 그는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과 노동자평의회를 강력하게 강조했다. 레닌주의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면서 코르쉬는 새로운 혁명적 역량을, 또한 혁명적 변화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 및 그 모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후반 좌익반대파 기간의 코르쉬는 코뮤니스트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정책을 혹독하게 비판했으며, 혁명적 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지했다.

     

    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뮨과 러시아 소비에트, 독일 노동자평의회에서의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갔다.

     

    파리코뮨에 관한 두 개의 에서 코르쉬는 혁명적 정치의 성격에 대하여 진지하게 몰두했다. 첫 번째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 행동(Die Aktion)에 실렸으며, 1931년 같은 저널에 실린 두 번째 글은 첫 번째 글에 관한 논의 및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 여기서 코르쉬는 파리코뮨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했다. , 파리코뮨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코르쉬의 지적에 따르면, 슬프리만치 짧았던 파리코뮨 시대정치 형식은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도 실은 명백하지 않다. 맑스는 파리코뮨의 뚜렷한 특징으로서 개방성과 잠재된 발전 가능성을 강조했고, 이에 동의하면서 코르쉬는 파리코뮨이 비극적으로 짧아 보일 수는 있지만, 자치정부 및 급진적 사회 변화에 대한 영웅적인 실험이었다고 말한다.

     

    파리코뮨을 연구하는 데 있어 코르쉬의 정치적 전략은 맑스가 프랑스 내전이라는 위대한 글에서 사용한 전략과 대응한다. 왜냐하면 코르쉬가 지적하듯이, “맑스는 파리코뮨 속에 맑시즘을 결합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파리코뮨을 맑시즘에 결합하고자 했기때문이다. 맑스의 글과 유사하게 코르쉬의 연구는 사회적·경제적 투쟁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모든 투쟁을 정치 권력과 국가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 따라서 정당이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서 단편적인 논박을 벌였다. 첫 번째 글의 말미에서 코르쉬는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적 역할을 노동조합이 맡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또한 혁명적 투쟁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회적·경제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혁명적 코뮨의 두 번째 글 끝부분에서 코르쉬가 논쟁을 벌이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결코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그 국가가 아무리 민주적이든 코뮨적이든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하든 마찬가지이다. 정확히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뮤니스트의 사회이다. 그 사회의 종합적 형식은 이제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코뮤니스트 선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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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적 코뮨

     

    혁명적 코뮨이라는 의제를 기반으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적 속박에서 벗어나 혁명적으로 스스로를 해방하는 현재, 이 역사적 시점에서 모든 계급의식적 노동자는 혁명적 코뮨에 관하여 과연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또한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이 혁명적 코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그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이 이루어진 지 반세기 만에, 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 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 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뮨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리코뮨은 18713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뮨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5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뮨의 진정한 비밀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2 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때, 다시 한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깜짝 놀란 속물들의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뮨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20년도 더 지난 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주요부에서 파리코뮨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19172, 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 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 레닌 및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 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뮨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모든 혁명적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 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 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 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 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 또는 1920년 카프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 또는 1923년 루르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 파업 과정에서, 아니면 192010이탈리아의 공장점거 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 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이러한 노동계급 패배의 결과로 현재, 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는 우리의 낡은 신념, 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평의회 원칙배신한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사회주의 원칙배신했던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샤이데만과 뮐러, 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 기구의 최고 정점이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 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 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 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했던 말처럼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 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 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 발전하는 의식이라는 발전형식으로부터 그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 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뮨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뮨의 가담자들이다. 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할 수 있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 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뮨을 달성해냈으며, 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뮨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뮨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코뮨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 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뮨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 동시에 그는 코뮨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뮨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뮨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코뮨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 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뮨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 코뮨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이란 코뮤니스트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써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뮨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 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 발전의 이러한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바,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뮨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뮨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 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뮨을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 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스주의자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뮨을 비교함으로써, 부르주아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봉건제와 전제군주제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을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 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 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 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 단계 역시 봉건 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써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 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 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 철학의 빈곤, chater 2, # 5) <계속>


     

    2013코뮤니스트 2,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 남궁원

    2021년 파리코뮨 150년 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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